[신의정원에서 왕을 만나다. '번외편'] 대원왕 이하응(大院王 李昰應) 흥원(興園)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興宣大院君 石坡 李昰應) 1820년(순조20년) 12월 21일~1898년(고종35년) 2월 22일 조선26대왕 고종의 생부 본관은 전주(全州), 아버지는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어머니는 '군부인 민씨(郡夫人 閔氏)'의 넷째 아들입니다. 남연군은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었으나, 순조 (1815년), '장조(莊祖=사도세자)'의 4남,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의 양자로 입적하였습니다. 이로서 족보상 왕위계승에 들어서게 된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군부인 민씨와의 사이에서, '완흥군 이재면(完興君 李載冕=흥친왕興親王)', '익성군 이명복(翼成君 李明福=조선26대왕 고종高宗)'과 2녀를 두었으며, 소실 계성월과의 사이에서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을 두었고, 그 외 소실로 기생 출신의 '추선(秋善)', '서씨(徐氏)', '명창 진채선(名唱 陳彩仙)'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들대로 가면 가계도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그래서....이만 줄입니다.(__);;
흥원 문인석 흥선대원군의 외모 평가에 "그는 형형한 눈빛과 매섭고 날카로운 하관을 가졌다."라고 합니다. 문인석은 조금은 다른 모습이지요? 좀 부드러운 느낌입니다.
철종15년(1863년), 아들 명복이 왕위에 오르고, 자신은 '대원군(大院君)'에 봉해집니다. 조선왕조 역사상 대원군에 책봉 된 인물은 모두 네 사람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그 중 유일하게 살아 생전에 책봉된 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시 임금의 생부, 즉 대원군은 이미 죽은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강하다보니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으로도 불리게 됩니다.
고종의 즉위 이 후 신정왕후의 섭정 대권을 이어받아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지요. 서원철폐, 법전편찬, 잡세폐지, 비변사폐지등의 시행으로 기득권 양반과 안동김씨의 세도정권을 억눌러 왕권의 강화를 꾀하고, 밖으로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또한 노론의 일당체재를 붕괴시키기 위해 남인과 북인등을 등용하였지요. 그러나 무리한 경복궁의 건립과 동학의 탄압, 천주교 박해등으로 어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직접 간택한 며느리 명성황후에게 의해 정치적 수세에 몰리고 며느리 민씨와 안동김씨, 풍양조씨등에 의해 결국 권좌에서 축줄되었지요. 이 후에는 양주 곧은골에 은거하며 며느리 명성황후와의 권력투쟁에 나서게 됩니다. 명성황후와 고종을 축출하고 완은군 이재선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하고, 장남 왕흥군 이재면을 왕위에 앉히려 일으킨 정변들도 실패하였지요. 이 후 임오군란으로 정계 복귀를 계획하였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오히려 청나라로 잡혀가게 됩니다. 이 후 조러조약으로 불만을 품은 청과 장손 이준용을 옹립하려다 실패하였고, 동학혁명의 힘을 빌어 집권 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납니다. 계속적인 정계복귀에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이라 하여 사람들과의 접촉에 제한을 받아 유폐생활을 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있은 후로 잠시 집권을 하였으나, 고종의 '아관파천(아관파천)'으로 실각하였습니다. 만년에는 '국태공(國太公)'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합니다. 그러던 1898년 1월 부인의 죽음을 보았고, 자신도 2월에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참 복잡하게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묫자리마저도 참 복잡합니다. 처음의 묫자리는 운현궁 별장 아소당의 뒤뜰이었습니다. 경기도 고양군 공덕리(현, 서울 마포구 공덕4동)에 장사지내고 '흥원(興園)'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던 1907년 11월, 순종이 즉위하면서 '대원왕(大院王)'에 추봉하였고 '왕의 예로 장례하라.'는 명으로 경기도 파주군 운천면 대덕리로 천봉을 하게 됩니다. 좀 조용히 지낼만하니까 이번에는 그 자리에 미군군사시설이 들어선다는 이유로 1966년 6월 다시 천봉하여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때 조선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던 인물의 묘가 여간 찾기 어렵습니다. 구불구불 비좁은 산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보니 더 이상 갈길이 없습니다. 깻잎밭이 무성하고 뒤로는 산입니다. 이런?!, 다시 돌려 내려 옵니다. 아주 작은 주차공간에서 어르신께 여쭈니 눈으로 한 방향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대략 70cm 높이의 표지석이 수풀에 가려 있습니다. 차량 통행을 막고 있는 철문으로 잠겨진 그 뒤의 공간이라는 것이지요. 핸펀으로 찾아보니 여기서부터 대략 350m가 나옵니다. 그렇게 산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리저리 빠지는 길이 있지만, 그냥 길 다운 길만 쫓으면 큰 무리 없이 대원군묘에 닿습니다.
'대한헌의대원왕(大韓獻懿大院王)' 신도비가 자리하며 그 뒤로 30m정도에 묘원이 자리합니다. 대원군 말년에 잠시 불렸던 별칭인 국태공을 따서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라는 표지석이 대원군묘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사초지는 비교적 높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흥원(興園)'은 원의 예로서 2단 상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상단에는 봉분을 두고 봉분에는 낮은 '호석(護石)'을 둘렀으며, 그 앞에 '상석(床石)'을 놓았고, 봉분의 주위로는 석양 1쌍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님들의 글에 보면 석호1쌍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제가 직접 본 바, 석호는 없고 석양만이 있었습니다. 봉분의 좌우로 망주석 1쌍이 자리하며 그 주위를 5각의 곡장이 두르고 있습니다. 그 앞으로 하단이 자리하는데, 장명등이 중앙에 자리잡고, 문인석과 석마 1쌍씩이 배치 되어 있습니다. 원의 예를 따랐기에 무인석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석물들에는 많은 상처들이 남아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의한 풍화도 있겠으나, 대부분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총탄의 흔적들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터지고 깨져있습니다. 그런데 참 아쉬운것이 보수의 흔적이 너무 노골적입니다. 시멘트를 턱 하니 발라 놓았는데, 참으로 흉물스럽습니다. 그나마 보수라도 한다 하니 그러한 관심에 고마워 해야할 일일까요?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원의 잉으로 올라서 봅니다. 앞에서 보던 풍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산속에 깊이 들어 와 있음을 시실감할 수 있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는 기분도 여간 상쾌합니다. 멀리 보이는 빌딩 숲도 하나의 풍경으로 어우러지면서 잠시 서운한 마음을 싹 씻어 냅니다.
흥원의 옆으로는 대원군의 '운현궁 가(家) 납골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상설의 예는 대군묘의 예에 따라 이루어져 있으나, 문인석과 석마 각각 1쌍씩, 그리고 그 뒤에 석호와 석양 1쌍씩이 자리하고 있음이 다릅니다. 봉분의 주위에 있어야 할 석양과 석호가 문인석의 뒤로 배치된것이지요. 그리고 그 중앙에는 장명등이 삐딱하니 섭니다. 납골묘에는 8기의 비석이 자리하며 그 앞에 상석이 놓여 있습니다. 맏아들 '이재면(李載冕)', 양조부 '은신군(恩信君)', 양증조부 '이온(李縕)'의 비석과 '이우(李?)'의 아들 '이종(李淙)', '이청(李淸)', 그리고 의친왕의 둘째아들로 이준용의 양자로 입적한 '이우(李?)', 국태공의 손자 '이문용(李汶鏞)', '이준용(李埈鏞)'의 비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흥원(興園)을 알리는 표지석
'흥선대원군 이하응(興宣大院君 李昰應)', 아버지 '이구(李球)'는 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5대손, '이병원(李秉源)'의 차남이었으나, 어린시절 사도세자의 넷째아들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어 '남연군(南延君)'의 작호를 받았습니다. 은신군(恩信君, 1756~1771)은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서자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명횡사 뒤 김귀주의 탄핵으로 형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 1754~1801)'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갔으나 2년만에 풍토병에 걸려 16살의 나이로 병사하였습니다. 그 후 정조1년(1776년), 정조에 의해 연령군에 적통으로 입적이 되었고, 은신군 역시 아들이 없어 남연군을 양자로 입적하여 후사를 잇게 된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하응은 남연군의 넷째아들로 태어남으로서 왕족의 형통을 잇게 되는 것입니다.
왕족, 그러나 이하응의 어린시절은 불우하였습니다. 8살때 큰형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1809~1828)'을 잃고 난 후, 12살에 어머니 '군부인 민씨(君夫人 閔氏)'를 여의었습니다. 이듬해 외가의 친척중에서 '민씨(閔氏, 훗날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와 가례를 올렸지요. 불우한 환경이었으나,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양조부이던 은신군의 처조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에게 글과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대원군이 그림과 글씨에도 능한 문장가였던 것이었겠지요. 그러던 17세에 아버지 남연군 마저 여의면서 '사고무친(四顧無親)'이 되어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게 됩니다.
그러던 21살이 되던 헌종7년(1841년), '흥선정(興宣正)'과 '흥선도정(興宣都正)'을 거쳐, 헌종9년(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집니다. 1846년에는 '수릉천장도감(綏陵遷葬都監)'의 '대존관(大尊官)'이 되어 천장에 참여한 공로로 품계를 올려 '가자(加資)'가 되었으며,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 有司堂上)'이 되어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그 즈음, 수릉의 천장을 감독하며 풍수지리를 신봉하게 된 흥선군은 충남 가야산 자락의 '2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의 명당, 즉 ' 2대에 걸쳐 왕을 낼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99개의 암자를 거느렸던 큰절 가야사를 불태워 없애고, 명혈에 있던 금탑도 허물고는 금탑의 자리에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가야산으로 이장합니다. 결과론이지만, 어찌됐든 자신의 아들 고종과 손자 순종이 왕위에 올랐기는 합니다만, 문제는 그들이 조선의 마지막을 장식한 비운의 왕이었다는 것이지요. 이즈음 장남 '완흥군 이재면(完興君 李載冕, 1845~1912)'이 태어 났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아래 숨죽이며 살아가고 있었으며, 둘째형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1815~1848)'마저 세상을 뜨자, 생계를 위하여 '석파난(石坡蘭)'이라 하여 난과 그림을 그려 양반가에 팔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도정치의 안동김씨들의 권력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헌종의 후사를 정할 정도의 권력을 가진 일파들로서 한때 헌종의 후사로 물망에 올랐던 종친 '경원군 이하전(慶原君 李夏銓, 1842~1862)'이 철종앞에 나아가,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김씨의 나라인가' 라 했던 발언을 문제삼아 안동김씨들의 비난을 받으면서 결국 역모죄로 몰려 사사될 정도였지요. 세도정책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갈것 같으면 즉시 없앨수 있는 힘을 가진 일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족들은 안동김씨들의 발 아래서 숨 죽이며 살아갔으며, 흥선군 역시도 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파락호(破落戶)'행세를 하며, 시정잡배들과 어울리면서 난행을 벌리는 가 하면, 투전에 가담하면서 늘상 술에 절어 지내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또한, 안동김씨들의 잔치를 찾아 걸식을 하기도 하면서 '궁도령'이라는 조롱을 받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파락호 생활은 민초들의 삶을 직접 경험한것으로 백성들의 삶과 바램이 무엇인지를 알수 있게 된 계기가 되겠습니다.
자, 그런데 이쯤에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바로 '흥선군이 진짜 가난하여 파락호 생활을 하였는가?'라는 것이지요. 지독히도 가난한 왕족으로 알고 있던 흥선군이 무슨 돈이 있어 경기도 연천에서 충남 예산까지 천장을 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각 마을마다 의무적으로 동원된 노역이 있었으나, 이장의 기간동안 많은 돈이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 즈음, 헌종은 흥선군에게 노비들과 밭 50결을 하사하게 됩니다. 즉, 땅을 주고 경작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 땅에세 세금을 받을 수 있게 해준 것이지요. 그리고 1결의 기준이 벼 천단을 얻을 수 있는 땅으로 50결이면 어마어마한 땅입니다. 결국, 흥선군은 가난뱅이는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파락호 행세로 정신이 약간 나간듯,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는 행동들을 한것이지 집 자체가 살지 못할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숨기기 위한 치밀한 계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 해 주는 것이지요. 헌종대에는 풍양조씨 일파가 잠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면서 왕족에 대한 견제가 덜 하였으나, 철종대에 들어서면서 안동김씨의 집권기로 왕족에 대한 감시가 대단했었다는 것이지요.
'국태공원소(國太公園所)' 흥선 대원군을 부르던 또 다른 이름중 하나였던 '국태공'입니다. 바로 그가 잠들어 있다는 뜻으로 곧, 흥선대원군의 묘라는 의미가 디겠습니다.
철종의 즉위 후, 시름시름하던 철종을 보며 흥선군을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첫 걸음으로 종친 '이호준(李鎬俊, 1821~1901)'과 교분을 쌓게 됩니다. 이호준은 정실에게서는 자식이 없었고, 첩에게서 아들 '이윤용(李允用, 1854~1839)'만이 있자, 친적벌인 이호석(李鎬奭)의 아들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을 양자로 들입니다. 흥선군은 이호준과의 돈독한 관계를 위하여 자신의 서녀를 시집을 보내고 이윤용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완용과는 사돈이 되는 셈이지요. 또한 흥선군은 이호준을 통하여 '조성하(趙成夏, 1845~1881)'와 6촌동생 '조영하(趙寧夏, 1845~1884)'와도 접촉을 하게 됩니다. 바로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 趙氏, 1808~1890)'의 친정조카들입니다. 신정왕후는 아들 헌종이 승하하면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1857)'가 안동김씨와의 결탁을 통해 철종을 옹립하는 과정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안동김씨 세도정치 60년의 중심인물이었지요. 그런데 철종8년(1857년),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대왕대비(大王大妃)'가 되었지요. 또한, 안동김씨의 모략으로 종친 이하전이 사사됨으로서 왕위계승감을 찾고 있던 중, 조카인 조성하가 종친이라는 명분으로 흥선군을 조대비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대비는 왕의 유고시에 후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인물이었지요.
병든 닭마냥 시름시름 알던 철종, 언제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흥선군에 그에 맞게 걸음을 재촉합니다. 반면 안동김씨 가문들은 여유를 부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철종의 비 철인왕후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철종이 잘못되더라도 왕비가 있었기에 자신들의 의도대로 후사를 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궁궐의 환관과 궁녀들을 포섭하여 대전의 분위기를 살폈고, 이 내 흥선군은 조대비와 마주하게 됩니다. 우선 주상의 승하시 옥새를 먼저 챙길것을 알렸고, 언문교지에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효명세자(孝明世子=익종翼宗)'의 사왕(嗣王)으로 삼아 영돈령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을 원상(院相)으로 삼도록 합니다. 그러나 조대비는 승통을 문제 삼게 되지요. 즉, 철종이 승하한다면 철종의 대가 잇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윗전인 익종의 승통을 잇는다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흥선군은 헌종은 순조의 뒤를 이었으며, 철종 역시도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므로, 이제 새로운 왕이 철종이 아닌 익종의 대를 잇는다해도 문제 될것이 없다고 말을 하지요. 결국, 조대비 자신의 양자가 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조대비 자신이 어린 명복을 위해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 가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 철종14년(1863년), 철종이 승하게 됩니다. 그 곁에는 조대비가 그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안동김씨와 풍양조씨는 옥새를 챙기려 부산하였으나, 이미 조대비의 손에 들어간 옥새였지요. 그리고 대신들을 불러 모읍니다. 그 때 원상 정원용이 후사를 정해줄 것을 종용하자, '흥선군의 2남 명복을 익종대왕의 대통을 잇게 한다.'고 선포합니다. 안동김씨들에게는 날벼락이었지요. 흥선군의 아들이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에 오른다는 것에는 별다른 문제가 되질 않았으나, 입적이 되더라도 철인왕후의 아들로 입적 되어야 함이 맞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유교적 예에 어긋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동김씨들은 반발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 철종의 옹립에서도 이미 그러한 관례를 깨트린 전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로서 병권을 장악하는데 실패한 안동김씨는 더 이상의 세도를 할수가 없게 되었고, '흥선군(興宣君)'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봉해지며,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하자 신정왕후는 잠시의 수렴청정을 하게 되지만, 대원군에게 고종을 보필하라는 형식상의 청정으로 실질적인 집권은 흥선대원군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분쇄하는데 역점을 둡니다. 그리하여 쇠락해진 왕권을 되찾는 동시에 조선을 압박해 오는 열강에 대적하기 위하여 개혁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면서, 조선 역사상 전례가 없던 종친들을 요직에 등용하는가 하면, 서얼들의 관직 진출도 확대합니다.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였으나, 그 중 '김병학(金炳學, 1821~1879)', '김병국(金炳國, 1825~1905)'을 각각 이조판서, 호조판서로 임명하였고, 원상 정원용의 아들 정기세(鄭基世, 1814~1884)를 병조판서에 등용합니다. 발빠르게 요직을 점령한 흥선대원군은 노론의 독재를 부수고, 소외된 유림들을 고르게 등용하게 됩니다. 또한, 당쟁의 뿌리를 뽑기 위해 '서원(書院)'을 47개를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여 민심을 수습하는가 하면, 양반과 토호의 면세전결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국가재정을 확립하기도 합니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름없는 세금들을 없애면서, 궁중에 특산물을 올리는 '진상제(進上製)'를 폐지시킵니다. 또한 은광산 개발을 허용하여 경기를 살리고자 했으며, 복식을 간소화하였고, 군포세를 호포세로 전환하여 양반도 세금을 부담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법질서의 확립을 위해 법전'대전회통(大典會通)', 관아와 관사의 시행규정을 정한 '육전조례(六典條例)', 문신과 무신의 인사행정을 정한 '양전편고(兩銓便攷)'등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국정을 담당하던 관청인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를 부활시키면서 삼군부를 둠으로서 정무(政務)와 군무(軍務)를 분리시켰습니다. 이렇듯,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수습하면서 국가재정을 확립시키는등 세도정치로 얼룩진 사회분위기를 일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하는 과정에서 모순이 나타납니다. 일종의 기부금제도인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고, 한양 사대문을 지나면서 통행세를 받는 '문세(門稅)'를 거두는가 하면 주인이 있음에도 거목과 거석을 징발하여 궁궐 건설에 사용함으로서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합니다. 그리고, 러시아인이 월경하여 함경도 경흥부에 와서는 통상을 요구하여 조정이 당황을 하자, 천주교 선교사들은 포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 영국과 함께 3국동맹을 맺으면 러시아를 막을 수 있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즉 '오랑캐를 오랑캐로 막는다.'는 논리를 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정적들에게 탄핵의 빌미가 되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박해령을 내립니다. 그리하여 1866년 1월, 천주교 탄압교령이 내려지고 이로 인하여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천여명의 천주교 신자가 순교하게 되는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납니다. 그러자 같은해 10월 프랑스는 이에대한 보복으로 군함7척과 병력천명으로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제주목사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으니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고 합니다. 또한, 같은해 8월에는 대동강을 따라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거절을 당하자 횡포를 부렸고, 화가 난 평양군민들의 화공으로 불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5년 뒤 '신미양요(辛未洋擾)'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던 고종2년(1865년), 조대비는 안동김씨에 빼았겼던 세력을 되찾고자 고종의 비를 자신의 일가 조면호의 딸을 간택할 것을 권유하지만 흥선대원군은 반대를 합니다. 이유인 즉, 순조, 헌종, 철종의 60년간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왕실과 정권이 온전치 못하였음을 들어, 외척의 득세 가능성이 없는 집안의 왕비를 들임으로서 외척의 세도정치를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면이라면 풍양조씨 역시 만만치 않은 가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부인 민씨의 권유와 간택당시의 매우 얌전한 규수의 모습이었던 민씨의 모습도 한 몫 합니다. 그리고 안동김씨와 풍양조씨가 아닌 혈육과 형제들이 없는 민자영을 택하게 된것이지요.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민자영의 간택은 도리어 자신이 정권에서 축출 당하는 단초이자, 나아가 나라꼴이 개판이 되는 사단이 됩니다.
흥원 근경
명성황후가 처음부터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 대립 구도를 가진것은 아니었지요. 그러나 민자영은 충분한 학문을 익혔으며, 궁궐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등을 다룬 소설을 즐겨 읽었습니다. 즉, 정치적인 야욕이 있었다는 것이 되겠지요.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나서 민씨는 대원군의 생각처럼 온순한 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의 총애를 받던 후궁 이씨가 완화군을 낳으면서 부터 시아버지와 틀어지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첫손자인 완화군을 왕세손에 책봉하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한 대립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원자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원자의 죽음에는 흥선대원군이 인삼을 너무 많이 달여먹어서라는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원자도 죽고, 완화군마저 세상을 뜨자, 명성황후는 후궁 이씨를 궁 밖으로 내쳐버리지요. 이쯤되면 명석하고 차가운 조선의 국모로서의 모습이 아닌 한 낮 질투심에 눈이 먼 여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거기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고종의 친정을 유도해내지요. 이는 철저하게 준비된 사전 준비로, 민씨에게 등용 된 '최익현(崔益鉉, 1833~1906)'에 의한 퇴직 상소에 의한 것입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에 대한 비판상소를 올렸다가 관직을 삭탈 강했던 인물입니다. 또한, 고종의 집권에 함을 실어주었던 안동김씨 일파들도 사실상 등을 돌렸습니다. 고종의 비로 안동김씨 가문의 딸을 얻기로 약조하였었는데, 이를 무시하고 민씨가 간택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적들을 교묘히 이용한 명성황후였지요. 고종10년(1873년) 11월, 결국 최익현의 탄핵으로 흥선대원군은 정권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민씨일가의 권력은 안동김씨에 견줄만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민씨일가가 권력을 독식하면서 부정축제가 만연하였고, 결국 민초들은 대원군의 칼날같은 정치속에 혹여나 법에 저촉될까 노심초사하다가 대원군이 물러나자 환영을 하였지만, 민씨일가의 작태를 만나게 되면서 다시 대원군을 찾기 시작합니다. 대신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항로(李恒老, 1792~1868)'에서 '최익현(崔益鉉)'으로 이어지는 노론 학자들도 처음에는 명성황후의 입장에 섰으나, 개화파들에 대한 탄압과 차별에 대원군 지지로 돌아서게 된것입니다. 그러던 고종11년(1874년) 명성황후의 친정집에 폭발사고가 나서 '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 양오빠 민승호(閔升鎬, 1830~1874), 어머니 '감고당 한산이씨(感古堂 韓山李氏)'가 그 자리에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배후로 흥선대원군이 지목되었고 명성황후는 대원군에 이를 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고종12년(1875년) 11월, 이번에는 흥선대원군의 셋째형, '흥인군 이최응(興寅君 李最應, 1815~1882)'의 집에 방화가 일어납니다. 이최응은 동생 이하응에게 평소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이를 명성황후가 이용, 자신에게 끌어들입니다. 이 방화사건도 역시 배후인물로 흥선대원군이 지목이 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음모로 여길뿐 혐의점을 찾지는 않았습니다.
이 후, 흥선대원군은 기회만 닿으면 정계에 복위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1881년 9월 13일,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 '이재선역모사건'이 일어납니다. 경기도 향시를 기회로 유생들을 동원하여 민씨일파를 처단하려 했지만, 음모는 내부의 고변으로 실패하고 주동자였던 '안기영(安驥永)', '강달선(姜達善)', '이철구(李哲九)', '권정호(權鼎鎬)'등은 처형되었고, '이재선(李載先 ? ~1881)'은 제주도로 유배된 후 사사되었습니다. 고종19년(1882년) 6월 10일에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합니다. 이는 민씨일가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구식군대의 하급군사들과 한양의 빈민층의 민씨정권에 대한 투쟁이었습니다. 당시 대원군의 측근인 '허욱(許煜, 1827~1883)'이 병사복장을 하고 대궐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차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계훈(洪啓薰, ? ~1895)'의 누이행세를 하며 궁궐을 빠져 나간 뒤였지요. 미처 피하지 못한 대원군의 셋째형 이최응(李最應), 민씨의 외척이자 임오군란의 시초를 만든 도봉소사건의 원인제공자 '민겸호(閔謙鎬, 1838~1882)', 선혜청 당상 '김보현(金輔鉉, 1826~1882)'등은 난병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됩니다. 이미 궁궐을 빠져나간 명성황후를 찾을 수 없자 대원군은 '민씨가 죽었다.'고 거짓 발표 뒤, 황후의 옷을 관에 넣어 장례를 치르게 합니다. 이로서 고종으로부터 임오군란의 사태수습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고 정권을 회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군사적 압력에 군란이 진압이 되어 재집권 1달만에 실권하였고,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의 보호아래 대궐로 들어 섰습니다. 한편, 대원군과 군사문제를 회담하던 청나라 장수 '오장경(吳長慶, 1833~1884)'과 '마건충(馬建忠, 1845~1899)'은 '오늘밤, 텐진에서 황제의 유지(諭旨)을 받아야 한다.'고 했으나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였고, 결국 강제로 납치되어 인천을 통해 텐진으로 압송됩니다. 청나라에서 이홍장등과 국제정세에 대하여 실랄한 격론을 벌였으며, 납치를 한 마건충에게는 '뙤놈'이라며 호통을 치는 등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는 흥선대원군을 '음흉한 조선의 폭군'이라며 '흉선군(兇鮮君)'으로 부르며 조롱하였고, 며느리를 제거하려는 악랄한 시아버지라며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웃으며 조롱들을 감수합니다.
그러는 동안 조선에서는 임오군란 이후로 민씨일파들은 개화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민씨 척족 입장에서는 급진 개화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일파라는 것이겠지요. 민씨의 친정수구세력들은 날로 횡포를 더해가게 됩니다. 더욱이, 청나라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조선을 식민지배하려는 의도를 비춤으로서 급진개혁파들의 위기의식은 더해쟈져 갑니다. 이에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등의 급진 개혁파들은 10월7일 우정국 개국축하를 기념하는 현장에서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나라와이 종속관계를 청산하자며 정변을 일으키게 되니 '갑신정변(甲申政變)'입니다. 청나라에 주도권을 빼앗겼던 일본의 도움을 받아 실행에 옮겨집니다. '민태호(閔台鎬, 1834~1884)', '민영목(閔泳穆, 1826~1884)', '조영하(趙寧夏, 1845~1884)', '이조연(李祖淵, 1843~1884)'을 살해하고, 민씨의 조카 '민영익(閔泳翊, 1860~1914)'에게는 큰 부상을 입힌 후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일본으로 하여금 경우궁에 일본 중대로 하여금 감금합니다. 명성황후는 또 다시 청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였고, 이에 청나라 공사 원세개가 간섭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다시 창덕궁을 옮겼고, 15백명의 청나라 군사와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민씨 일파들에 진절머리가 난 군중들은 그들을 지키고 섰던 일본군들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일본군은 싸움도 없이 물러 납니다. 정부군 역시도 청나라의 수적 열세를 견디지 못하였지요. 그 사이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호위속에 청군의 진영으로 들어 갔으며, 이로서 일본의 편에 섰던 '김옥균(金玉均, 1851~1894)', '박영효(朴泳孝, 1861~1939)', '서재필(徐載弼, 1864~1951)', '서광범(徐光範, 1859~1897)', '유혁로(柳赫魯, 1863~1940)', '변수(邊燧, 1861~1892)'등은 다케조에 일본공사의 뒤를 따라 일본군의 호위속에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결국, 또다시 명성황후의 원병요청에 의한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이 나게 됩니다.
고종22년(1885년), 명성황후가 이번에는 친러, 친일 정책을 펼치면서 청나라를 견제하기 시작하지요. 이를 눈치챈 청나라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하여 대원군을 귀국 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민씨는 러시아공관에 대원군의 귀국을 막아달라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와 '위안스카이(Yuan Shihkai=원세개袁世凱, 1859~1916)'의 정치적인 계산으로 결국 4년만에 조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해 8월, 인천항에 도착한 흥선대원군,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고종이 나왔으나 대원군은 그를 외면하였고, 기생 출신의 애첩 추선이 죽었다는 소식에는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제 며느리 명성황후뿐만 아니라 고종 조차도 보기 싫다는 의미이겠지요. 이후, 운현궁에 거주하며 또 다시 재기를 노리게 됩니다.
흥원 봉분과 상석 상석을 바치고 있는 고석의 귀면은 문고리를 물고 있습니다. 즉, 상석 아래로 혼령이 드나든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후로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며느리 민시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우우부단한 고종은 명성황후와 민씨수구정책에 끌려가고 있다는 판단에서이지요. 그리하여 이후에는 민씨는 물론, 고종까지도 함게 견제를 합니다. 고종을 폐위하고 장남 이재면이나, 서자 이재선을 옹립한다는 게획입니다. 그러나, 1887년 청나라와 함께 계획했덩 니재명의 옹립이 실패로 돌아가고, 이 후 이재선의 옹립기도도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게획을 계속 이어가제 됩니다. 손자인 이준용은 이재면이나 고종과 달리 성격이 자신과 많이 닮았다는 점이 있었지요. 고라고라한 성격에 대원군의 꾸지람에도 주눅들지 않았던 것이 대원군의 마음에 들게 된것이지요. 그러던 1893년, 민씨 일파의 세도정치는 계속 되었고, 백성들의 삶은 점점 가난과 굶주림, 수탈속에 머물게 됩니다. 반복적인 민생고속에 그해 2월, 동학 접주 녹두장군 전봉준이 운현궁에 머물던 흥선대원군을 찾아옵니다. 과거 자신의 식객이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을 하였다지요. 그리고 3월, 보은집회를 통하여 반봉건, 반부정, 반침략의 정치적운동을 벌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일부 한양으로 오른 동학도 농민군이 집회를 가졌는데, 흥선대원군은 이 기회를 빌미로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농민들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사람을 보내었으나, 이들은 도리어 농민군을 동학폭도라며 농민들을 잡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전봉준을 중심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니,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입니다. 1월에 일어난 봉기는 4월 전주성까지 함락하자, 명성황후는 또 다시 청군의 원병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일본 역시도 자국공사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파견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외세의 개입으로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하여 '외세의 출병구실을 없애며,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27개조의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였고, 관군이 이를 수락, 1894년 6월 10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으며, 전쟁을 중지하게 됩니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폐서에 대해 일본의 도움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명성황후 폐서의 정당성을 담은 문건을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였으나, 일본측에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준용 역시도 일본공사를 방문하여 민씨 폐출에 대한 동의를 구하였으나 역시 거절을 당하였지요.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은 철수를 거부하고 오히려 군대를 늘렸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일본군이 농민군을 학살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양반, 부호층들과 함께 연계하여 전쟁에서 진 농민들의 토지등의 재산을 빼앗고 일본군과 함게 농민들을 색출하여 학살하도록 하였다는 점입니다. 이로서, 일본군과 기득권 양반부호들의 연합이 이우러진 것으로 '식민지 지주제(植民地 地主制)'라는 민족분열정책이 되었습니다. 이에 농민군은 다시 2차, 3차 봉기를 하였으나, 일본의 화력앞에 실패하였고, 전봉준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다가 1895년 3월 처형됩니다. 이러한 동학혁명은 결과적으로 청,일전쟁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였지요. 이로서 민씨일가를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은 일본의 의해 다시 집권을 맡게 됩니다. 그렇지만 꼭두각시에 불관한 집권이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그러한 와중에 이준용을 추대하려 하면서 대원군은 농민군을 끌어 모으고, 청나라를 끌어들여 일본을 몰아내기 위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나면서 계획은 실패로 끝이 납니다. 이 후 일련의 사정들은 결국 일본을 몰아낸다는 이도로 비추어져 일본에 의해 추궁을 당하였고, 결국 흥선대원군은 일본공사에 자신의 추진계획었던 항일운동에 사과하는 대신 손자 이준용의 장래를 부탁하게 됩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은 이선으로 물러나게 되고 새로운 '김홍집(金弘集, 1842~1896)'내각을 내세워 '경장사업(更張事業)'을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던 1895년 3월, 이준용에 의해 김홍집내각의 '김학우(金鶴羽, 1862~1894)'를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에 '박영효(朴泳孝, 1861~1939)'등이 나서 대원군파를 몰아내려 이준용을 사형시킬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절박한 부탁은 각국의 영사와 일본공사에 전해졌고, 이준용은 사형을 면한 종신형을 선고 받았으나, 대원군과 일본공사의 밀약으로 2개월 뒤 왕명으로 10년형으로 감형이 되었고, 3년간 일본으로 유학을 가기로 합니다. 어떠한 밀약일까요?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흥원 봉분 낮은 호석을 둘렀는데, 성하지가 못합니다.
일본에 의해 집권 당한 조선, 민씨는 이번에는 친러정책을 펼칩니다.바로 '인아거일(引俄拒日)'정책입니다. 바로 '러시아를 끌여들여 일본을 막는다.'라는 정책이지요. 민씨는 러시아공관을 만나 조선에 도움을 주기를 요청하였고,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과 함께 일본을 압박하기에 이릅니다. 청일전쟁을 치룬지 얼마되지 않은 일본으로서는 러시아와의 전쟁은 부담이 컸습니다. 결국 삼국연합의 압박에 의하여 요동성을 청나라에 돌려 주었고, 일본은 조선의 침략야욕을 접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일본내에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민씨의 제거가 그 첫번째로 판단,
1895년 8월 15일, 일본공사관 지하 밀실에서 민씨살해를 계획합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들에게 명황후 폐서를 주장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 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거절을 하였지요. 자신의 손자 이준용이 김학우살해사건과 연루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어진데 따른 불만이었습니다. 그러자 일본공사는 대원군과 밀약을 하게 된것입니다. 이로서 이준용은 3년간 일본 유학을 떠나도록 만든 계기가 되는 것이지요. 16일에는 대원군을 일본공사가 찾아옵니다. 명성황후 제거와 관련된 4개항의 각서를 내민것입니다. 즉, 거자 이후에는 대원군은 국왕을 보필하여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새로운 김홍집내각에게 맡기는 것으로 대원군의 정치에 대한 간섭을 비리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원군은 자신의 장남과 장손을 중용할것을 조건으로 각서에 대원군이 자필서명을 하였고, 그 자리에는 장남 이재면과 장손 이준용도 함께 있었습니다.
1895년 8월 20일 새벽, 원래의 계획보다 이틀을 앞당긴 일본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도록 하고,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훈련대장 홍계훈(洪啓薰)이 막아섰으나 역부족이었고, 이미 왕궁을 호위하던 일본의 지휘아래 일본인들은 고종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미리 준비된 민씨의 '폐출조서(廢黜詔書)'를 고종에게 내밀며 서명을 강요하였지요. 이를 거부하자 왕세자에게 칼을 휘두르며 고종을 압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옥호루(玉壺樓)에 변복하고 있던 명성황후를 찾아내어 무참하게 살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홑이불을 덮어 향원정에서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릅니다. '을미사변(乙未事變)'입니다. 이러한 야만적인 행동을 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알리바이를 위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훈련대와 대원군측의 크테다로 일본군은 고종의 요청에 의해 출종하여 이를 진압하였을 뿐, 왕비 시해는 아는 바 없다.'며 김홍집 내각을 세운 후, 민씨 폐위조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행을 목격한 외국인들은 외교관들에게 이 사실을 폭로하였고, 러시아와 미국은 각각의 공사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하면서 민씨폐위조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적인 야만인이 되어 버린 일본은 즉각, 자신들이 난처해지자 관련자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지극히 형식적인 재판을 벌입니다. 그런데, 을미사변 당시 이완용등의 친러인사들이 고종을 궁궐에서 빼내려했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알려지면서 이는 러시아등의 외국의 개입이 있던 것으로 보면서 을미사변의 주동자 48명을 '황후를 살해한 점은 인정되나, 증거가 없다.'는 희안한 이유를 들어 석방이 됩니다. 결국 12월 1일, 고종은 왕비의 죽음을 정식으로 알렸으나, 일본에 대한 관련은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대원군을 물러나게 하고, 그의 장손 이준용을 일본으로 망명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하려 하면서 대내외적인 비난을 피하려 개혁정책을 발표합니다. 그러나, 을미사변은 그렇지 않아도 반일감정이 한창이던 때에 기름을 분 격으로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게 됩니다.
이 후, 흥선대원군은 일본이 원하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소신대로 개혁을 추진하려 합니다. 그러자 은퇴를 강요당하게 되지요. 그러나 대원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대원군의 행동을 제약하는 법, '대원군존봉의절(大院君尊奉儀節)'을 제정하면서 인사들과의 접촉에 제한을 받았고, 사신들과의 만남도 관헌의 입회에서만 가능하게 됩니다. 사실상의 유페생활이지요. 그러나 대원군은 그러한 와중에도 계속적인 일본의 경계와 함께 정치권으로 도약을 계획합니다. 그러던 1896년,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자 대원군은 은퇴를 하여 양주 곧을골에 기거를 하게 됩니다. 1898년 1월, 부인 여흥부대부인이 죽음을 맞이하였고, 자신은 같은해 2월 운현궁 별장 아소당에서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7일장의 장례로서 예를 갖추었는데, 고종은 끝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서 조선말기의 독재정치가 막을 내립니다. 쇄국과 개혁에 대한 '역사를 역행하는 시대적 착오'라는 비평과 '왕권강화로 국가의 권력을 노피려 했던 개혁가'라는 극과 극의 엇갈린 평가속에서 현재까지도 독재가와 개혁가의 사이에서 말들이 많지요. 길손의 사족으로는, 흥선대원군은 지나친 권력욕으로 인한 부작용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자신이 섭정이 가능한 인물들로 왕위에 옹립하려했던 수많은 쿠데타 기도는 그러한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대원군의 욕심의 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한가지, 며느리 민씨와의 대립입니다. 한사코 외척의 득세를 막고자 간택한 민씨였건만, 도리어 그녀에 의해 정권에서 밀려났고, 민씨일파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지요. 결국 명성황후의 등장은 곧, 대원군과의 대립이었으며, 뻔질나게 원병을 요청하던 청나라에게 조선의 내정을 내준 꼴이 된것입니다. 그리하여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조선을 쥐락펴락 할 수 있는 단초를 만들기도 했던 것입니다. 자, 역사는 어차피 실록의 의존이고, 개개인의 생각차이입니다. 저 조차도 틀릴수도, 아닐수도 있겠지만, 저의 생각은 그러하다는 것이지요. 글을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이 되어 갑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조선의 국모'로서 아름답고 당찬 여인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데.....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흥원 장명등
흥원 망주석 망주석의 세호는 좌측은 아래로 향하고, 우측은 위로 향하는 모습입니다.
흥원 문인석과 석마
잉에서 바라본 흥원
대원군 가족 납골묘, 운현궁가(家)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뒷줄 좌로부터 시계방향, '흥친왕(興親王=맏아들 완흥군完興君 이재면李載冕)', 양조부 '은신군(恩信君=이진李?), 양증조부 '낙천군(洛川君=이온李縕)' 앞줄 우로부터 반시계방향 흥친왕의 장남 '이준공(李埈公=영선군永宣君 이준용李埈鏞)', 흥친왕의 차남 '이문용(李汶鏞)', 의친왕의 차남 '이우공(李?公)', 이우의 장남 '이청공(李淸公)', 이우의 차남 '이종(李淙)' 비석에는 이준용이 '이준公'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생부 흥친왕이 죽자 이름을 '준(埈)'으로 개명하였고, 고장의 지위를 상속받아 이름뒤에 '公'을 붙인 이유입니다. 흥친왕의 차남 이문용의 이름중 가운데 '문(汶)'가 사전에는 '土+汶'으로 표시되나 비석에는 '汶'자로 표시되어 있어 이를 따랐습니다.
납골묘 석물들 망주석, 문인석, 석마, 그리고 뒤로 석양과 석호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잉에서 바라본 가족 납골묘
대한헌의대원왕 신도비
by 박수동 |
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