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문 - 연구동기와 배경 –아주신씨(鵝州申氏)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1624)의 문집(유교책판)은 2015년 6월 유네스코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아주 신가와 오봉파 후손 모두의 자랑이 되어왔다. �오봉집(梧峯集)�은 1736년자손들이 모여 문집 간행이 논의되었고, 1739년 10월1일 고손자 진구(震龜)가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1740년 2월 장대서원에서목판본(木版本)으로 간행되었다. 문집은 1742년 별집(別集)이추가 간행되었으며, 목판본 문집은 소장처로서 규장각, 서울대성균관대 장서각, 연대 도서관, 옥산서원, 도산서원 등이 알려져 있다.
오봉 종가의 보관 분은 1950년 6ㆍ25동란으로 일부 산질(散帙)이되었고 유집(遺集) 20여점이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은행금고에 보관 중이었다. 197년 12월 20일 종손 병철(炳哲)이 �오봉집� 5권과 그의 아들 고송(孤松) 문집 2권을 합하며 오봉(梧峯)ㆍ고송 선생(孤松先生) 양대문집(兩代文集)을 70만원예산으로 30권을 인쇄하고 권당25,00원으로 배포한 바있다.
�오봉집�의 내용은 이때까지 한문으로 되어있어서 후손들이나 일반 연구자들도 쉽게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정부 예산으로 2018~2019년동안 국역사업에 착수하여 2019년 7월 �오봉집� 6권을 상(上)과 하(下) 2권으로 간행하게되었다. �오봉집� 국역 사업은 문중과 종원들에게 기쁨과긍지를 심어주고 있는데 �오봉집은 유네스코 세계 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점 이외에 오봉 신지제 선생은임진란 시기에 예안 현감으로 있으면서 도망으로 공석 중인 안동 부사직을 겸임(1592.5)하며 의병활동으로예안ㆍ안동뿐만 아니라 당시 경상 좌도 북부 지역(봉화ㆍ의성ㆍ비안ㆍ군위ㆍ의흥ㆍ안동ㆍ신녕ㆍ영천ㆍ경주)과 상주ㆍ문경ㆍ예천(용궁)등을지킨 공로가 지대하였다. 임진란이 끝나고 오봉 선생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과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2등에 서훈(敍勳)되었다.
이상 두 가지 사실이 이번 문집 국역 사업에 정부기관이 도움을 주는데 영향을 미친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2019년 5월 필자는 오봉 선생으로부터 14세인 자손으로서 문집교정 작업에 관여하게 되었는데 평소 존경하던 중시조(中始祖) 오봉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 새삼 감복하고 있다. 오봉 선생의업적은 �선조실록� 등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고문서 등귀중한 자료는 한국국학진흥원과 의성 조문국 박물관에서 위탁 관리되고 있다. 그러나 오봉 선생의 공적가운데 임진란 시기의 의병 관련 업적이 구체적으로 정리되고 있지 않아서 계속 고심하여 왔는데 이번에 문집 국역 사업이 끝나면서 전공이 아닌 나로서는무모하게 중대한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동안 임진란 정신문화선양회(2013,회장 류한성)가 연구 발표한 경북 지역 임진란사가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경북 지역가운데 의성(비안 포함)과 군위(의흥 포함)가 군(郡) 당국의 협조가 없어서 누락되고 있다. 의성 지역은 같은 경상좌도로서안동과 인접하고 있고, 특히이곳은 오봉 선생의 태어난 고향으로 부모님들이 일본군을 피하고 있었고, 형님(신지효)은 일본군의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지리적 여건 등으로 보아 이 지역의 의병 활동 또한 피해 상황에 대해서 오봉 선생의관심과 지원이 매우 컸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명예교수로서 보험학(민영보험ㆍ사회보험), 고용 및 노사관계론이 전공이다. 한학자(漢學者) 또는 국사학자(國史學者)들에게는 면목이 없는 일이지만 나의 조상에 관한 업적 조사를 내가 직접 하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건강을 보증할수 없는 현재 우리 나이로 80세를 바라보고있는 상황에서 계속 미루어서는 안 될 일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필자는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10년사(1905~205)를단독으로 편술하였고, 전공인 보험에 있어서도 한국보험사(박사학위논문 1974), 손해보험 사료(史料) 본문 6권, 부록2권, 생명보험사료 본문 4권을 1985년~192년 기간 동안 편찬하였으며 역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정년퇴임 후 아주 신씨 재경종친회 초대회장(2014~2016)을 지냈고50여년이 되고 있는 아주 신씨 집성촌 경북 의성군 봉양면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오봉선생은 13대 조부1)이지만 7대 조부 통덕랑 신근인(申近仁,1727~1791)이 둘째 아들 로서 종가로부터 분가하였다. 이 원고는 논문이라기보다 특히후반부 임진란 의병 활동에 있어서는 자료를 집성한 것으로서 훗날 본인이나 후손 또는 다른 학자가 연구하는데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있다. �오봉집�이 번역 해제(解題)되기 까지 오봉에 관한 소개 책자는 종가에서 만든 오봉종택지(梧峯宗宅誌) 이외에 특히 최근에 발표된 다음 두 편의 논문, 고송 신홍망 선생에 관한 논문 1편 밖에 없었다.
① 박명숙, 오봉 신지제 선생의 생애와 학문 , 도운회(陶雲會) 2016년도 학술발표논문,2016.4.30.
② 황만기, 오봉 종가의 고문서와 오봉의 학문, 그리고삶의 제 양상 , 2018년 의성조문국 박물관 학술대회(의성지역고문헌의 고찰), 2018.12.7.
③ 박채은, 울산 도호부사 신홍망(申弘望)에 대한 고찰 , 울산문화연구,2010 제 3집, 6~24쪽.
이제 오봉 선생은 그의 후손들이나 아주 신씨 3,00여명의 관심을 벗어나서 안동ㆍ예안을중심으로 경북 북도 지역 전체 임진란사와 의병 활동 연구에 중요한 대상 인물중의 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1) 대수(代數)와 세수(世數)에 대해서는현재까지 많은 논란이 있는데, 여기서는 조상과 자신의 간극(間隙)을 헤아리는 방식에 주목하여, 크게 대(代)와 세(世)를 다른 개념으로 보는 입장(異義)과대(代)와 세(世)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입장(同義)으로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① 대(代)와 세(世)를 다른 개념으로보는 주장(異義) : ‘대는 자신을 포함하지 않는다.[代不及身ㆍ己不代數]’와 ’조상은代라하고 후손은 世라 한다.[上代下世]’는 방식에 입각하여, 대수(代數)는 자신을제외하고 부친[父]부터 1대로간주하여 윗대로 올라가며 헤아리고(조부 2代祖ㆍ증조 3代祖ㆍ고조 4代祖) 세수(世數)는 기준이 되는 조상부터 1세(世)로 간주하여 자신까지 내려가며 헤아린다.(고조 1世, 증조 2世, 조부 3世, 부친 4世, 자신5世) 대수와 세수를 구분해서 사용하며, 세수가 대수보다 1이 더해져서 집계된다.(성균관 전례연구위원회,박수밀 교수,�박수밀의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성주이씨ㆍ광산김씨 대종회 등)
② 대(代)와 세(世)를 같은 개념으로보는 주장(同義) : ‘조(祖)는 자신의 선조’란 뜻이고, ‘손(孫)은 선조의 후손’이란 뜻이므로 선조나 자신을 대수(大數)나 세수(世數)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원래는 세(世)로써왔으나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피휘(避諱)하여 대(代)자로 바꾸어 쓴 것이므로 세(世)와대(代)를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조상의 대수[代祖]나세수[世祖]를 따질 때는 자신을 제외하고 부친부터 1대로 간주하여 올라가며 헤아리고(조부 2代/世ㆍ증조 3代/世ㆍ고조 4代/世), 후손으로서 대수나 세수를 따질 때는 기준이 되는 조상을 제외하고 자신까지 내려가며 헤아린다.(고조 0代/世, 증조 1代/世, 조부 2代/世, 부친 3代/世, 자신 4代/世) 또 후손으로서 자신을 지칭할 때 ‘〇세손’보다는 ‘조상으로부터 〇세’라고 칭하는것이 옳다고 여긴다.(성백효 교수, 전통문화칼럼 , 영일정씨ㆍ대구서씨 대종회 등)최근 학술적으로 대와 세를 같은 개념으로보는 동의(同義)에 무게가 실리고 있으나, 성씨별 문중이나 대종회에 따라 이의(異義)를 따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오봉신씨세계(梧峯申氏世系)�에 의하면 시조로부터 오봉 선생은 14세(世), 필자는 27세(世)가 된다. 여기서는 후손으로서 �아주신씨세보�를따라 세(世)로 나타내되,이의와 동의를 절충하여 오봉 선생이 필자에게 13대조(代祖)가 됨을 밝히고, 종가의 의견을 따라 필자는 오봉 선생으로부터 14세인 자손으로, 신명균은 오봉 선생으로부터 16세인 자손으로 표현하였음을 밝힌다. 참고로 �오봉 선생문집� 별집의 발문을 쓴 신체인(申體仁)은 별집개편후지(別集改編後識) 말미에서 “6세손 신체인이 삼가쓰다.[六世孫體仁謹書]”라고 하여 이의(異義)를 따랐음을 알 수 있다.
❚ 신지제(申之悌,1562~1624)
자는 순보(順甫), 호는오봉(梧峯)ㆍ구로(龜老),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1589년(선조2) 28세에증광 문과에서 대책문(對策文)으로 장원을 차지한 뒤, 사섬시 직장ㆍ세자시강원 문학ㆍ예조 좌랑ㆍ성균관 직강 등을 역임하였다. 예안현감 재직 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에게 대항하였으며, 창원 부사 재직 시에는 명화적(明火賊) 정대립(鄭大立)을 토벌하여 민습을 수습시켰다. 저서로는 �오봉선생문집�(본집 7권 4책, 별집 1책)이 있다.
❚梧峯 申之悌의 생애와 임진란 의병활동
인 쇄 2019년 12월 25일(음력)
발 행 2020년 1월 8일(음력)
발 행 인 신 명 균(오봉 선생으로부터 16세)
발 행 처 아주 신씨 오봉공파 문중
저 자 신 수 식
교열.윤문 김 기 엽
주 소 경북 의성군 봉양면 구미리 251번지
편집.제작 도서출판 성문기획
주 소 서울 중구 을지로 3가 259-1
중앙데코 플라자 1401호
TEL. 02-272-197
ISBN 979-1-85813-10-3 〈비매품〉
신수식 : shins@korea.ac.kr
010-207-1914
■집필자 : 신수식(申守植)
고려대학교 경영대학 교수(1968.2~207.8)
경영대학 학장, 경영대학원장, 노동대학원장
현재 경영대학 명예교수(207.8~)
오봉 선생으로부터 14세
초대 재경 아주 신씨 종친회장(2014~2016)
■윤문(潤文)ㆍ교열(校閱) : 김기엽(金紀燁)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한국국학진흥원 고전국역위원
�오봉선생문집� 번역위원(공동)
❚일러두기(범례)
1. 본문에 한자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 한자를 병기하되, 같은 단어가 인접해서 두 번 이상 나오는 경우에는 뒤에 나오는 단어의 한자는 병기를 생략하였다. 단, 한자가 있어야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는 경우는 반복하여 병기하였다.
2. 운문[詩]의 경우 오른쪽에 원문을 부기하고, 번역문에서는 한자를 생략하였다.
3. 한자 표기는 괄호쓰기를 원칙으로 하였지만, 경우에따라 원문을 인용하거나 주석의 용어는 한자를 그대로 노출하기도 하였다.
4. 한자 가운데 한글과 음이 다른 경우에는 대괄호[]로 표기하였다.
5. 관직명을 표기할 때, 한글은 관직에 따라띄어 쓰고 한자는 붙였다.
예)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 예안 현감(禮安縣監), 창원부사(昌原府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