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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장합동 인천노회 동시찰 원문보기 글쓴이: 예전인
고난주간 첫 째날 마 21장 1-11절
오늘은 고난 주간 첫째 날로서 '예루살렘 입성의 날'이라고 합니다. 이날 주님께서는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람에 입성하시면서
나귀새끼를 타는 장면을 통해서 몇 가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의 덕목을 발견합니다.
1. 첫째, 하나님은 순수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맡은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되 항상 아마추어리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2절을 보십시오.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을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그래서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함께 끌고 왔습니다(7절). 마태복음만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 어느 것을 예수님이 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본문이 있는 마가복음 11장과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에수님은 어미 나귀를 타지 않고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사람이나 짐을 태우는데 어미 나귀는 경험이 많습니다. 교회로 말하면 프로입니다. 위원회도 많고, 사람도 많고, 돈도 많습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는 완전 아마추어입니다. 사람 태워본 적이 없습니다.
교회로 말하면 돈도 없고, 사람도 별로 없고, 순수하고 깨끗한 것 하나 뿐입니다.
그러면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어미 나귀를 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태우고 가는 길은 경험 많은 프로에게 주어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돈을 목적으로 일하는 프로에게 주어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해야 하지만 주님의 일을 할 때 항상 아마추어리즘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 교회이 일이 돈이 앞서게 하지 말아야 하고, 목회자가 먹고살기 위해서 사역을 하면 하나님의 그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돈 문제를 개입시키면 축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아마추어를 돈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보다 더 축복하십니다.
2. 둘째,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을 쓰십니다.
인간적으로 보기에 별로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겠다고 하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21장 3절은 그런 상황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누군가가 부정적인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큰 교회 틈에서 작은 교회들이 배겨내겠어!" "지난 1년 동안 새벽기도회를 보라.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돼!"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고, 그런 풍문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하라고 하십니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됩니다. 연약하고 경험 없는 나귀 새끼도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 쓰임 받았습니다. 아무리 부족한 모습이라도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쓰임 받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쓰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갈대 시몬이 반석 베드로가 되는 원리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됩니다. 꾸준히 기도하며 준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기회를 주십니다.
3. 셋째,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는 겸손하여...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왜 주님이 겸손한 사람을 쓰십니까? 주님이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겸손한 자의 등에 타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님의 겸손함은 말씀을 이루려 하는 삶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4절) 마찬가지로 우리의 겸손함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에서 가장 잘 나타납니다.
순종하는 삶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예비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주목받은 다음에 착각에 빠지지 않는 것도 겸손함입니다. 큰 교회가 되면 목사들은 '자기가 잘해서'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공동체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어린 나귀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서 환호하는 군중들을 보고 자기가 대단해서 그런 것으로 어깨가 올라가면 이처럼 잘못된 착각은 없습니다. 그가 비뚤어져 예수님을 내리고 자기의 영화를 내세우는 순간 그 순간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 당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등에서 내리면 그 어린 나귀를 어느 누가 거들떠보겠습니까?
항상 겸손하게 등을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축복된 사람이 됩니다.
4. 넷째, 하나님은 헌신된 사람을 쓰십니다.
나귀 새끼가 준비되니까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그 위에 얹고 길에 펴고 주님의 길에 동참했습니다(7-8절). 등을 예비한 자가 있으면 겉옷을 예비하는 자도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등을 예비한 나귀 새끼라면 평신도들은 겉옷 정도는 준비해 목사 위에 얹어야 합니다. 조그마한 헌신이 모여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5. 다섯째,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9절)
무엇을 찬양했습니까?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누가복음 19장 37절)
그러니까 예루살렘 온 성에 소문이 났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뇨?"(10절) 우리도 이렇게 헌신된 모습으로 나가면 하나님은 소문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제단이 예수님 잘 태우는 제단으로 소문이 나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진짜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알고 싶다고 하는 거룩한 소망이 생겨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뇨?"하고 물을 때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준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체험한 삶의 간증이 항상 넘치도록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전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라는 듯이
주님에 대한 간증이 터져 나와야 합니다.
< 결론 > 여러분! 나귀 새끼도 쓰임을 받았습니다. 어린 나귀가 장신인 주님을 태우면서 많이 비틀거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용 받았습니다.
우리가 연약해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주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족해도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합한 사람이 되어 쓰임 받고 축복 받는 일생을 사시길 바랍니다.
고난주간 둘째날 말씀 마가복음 11장 12-19절
고난주간 첫째 날 주일은 종려주일이라고 하고 이 날은 '예루살렘 입성의 날'이라고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함께 끌고 오지만(마 21:1,7), 주님께서는 그 중에서 새끼 나귀를 탑니다(막 11:7; 눅 19:33).
인간은 프로를 선호하지만 주님은 아마추어를 선호하는 것을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교인들도 프로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실력은 프로이어도 정신은 아마추어 정신을 잃지 않는 곳을 선호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 둘째 날 오늘 월요일은 '성전 청소의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기 전에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고난 주간 둘째 날은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주님의 때를 앞세우는 삶이 중요하다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시장하실 때 열매를 구하러 무화과나무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을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지 않은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없을 것이다."(14절)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의문을 가집니다. 주님은 너무하신 것 같다는 것입니다. 열매 없는 때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인데 하필이면 그때 열매를 찾으시고 열매가 없다고 저주를 하시다니 너무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배가 고픈데 열매가 없어서 신경질적으로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 무화과 나무 열매가 맺히는 때도 모르시겠습니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하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자신의 때'를 너무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작 주님이 필요로 하는 때에 반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나를 필요로 하고 있는데 나는 항상 나의 때만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때가 아닌 것 같아도 주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때라고 생각하면 주여 나를 사용하옵소서라고 해야 열매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때를 앞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둘째, 주님은 종교적 위선을 싫어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특히 그 시대의 종교인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 나무처럼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런 메시지를 주고자 하셨습니까?
11절을 보면 전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예수님이 뭔가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 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예수님은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끔찍한 일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고, 제사장들은 앞에서는 제사를 드리면서
뒤에서는 매점을 운영하고 제사에 쓸 제물을 팔면서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는 이 위선적인 사람들에 대한 저주입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교훈은 우리들에게도 주는 메시지입니다. 무화과나무는 회개하지 않으면 그 다음 차례가 우리임을 가르쳐 줍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학생들이 떠들면 강대상을 칩니다.. 강대상 치는 것은 강대상이 잘못해서는 치는 것이 아닙니다. 떠들면 안 된다는 학생들에 주는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만약 학생들이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 경고를 조금 더 강하게 하기 위해서 한 명을 뽑아 매를 듭니다.
그 한 명이 크게 잘못했을 수도 있지만 억울하게 선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들도 조심하지 않으면 이 학생처럼 된다는 본보기가 된 것입니다.
가끔 주위에 보면 나보다 별로 죄인이 아닌 사람인 것 같은데 그 사람은 모든 고난을 한꺼번에 지고 정말 고생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꼭 죄가 나보다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경고성 메시지입니다.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3. 셋째, 교회를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성전을 와 보니 보통 난장판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이 아니라 관광 유원지에 온 느낌이었습니다.
곳곳에서 장사꾼이 제사와 관련된 매매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그 이면에서는 제사장들이 뇌물을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 안에서 사는 제물 값은 밖에서 살 때보다 거의 10-20배였습니다.
그래도 멀리서 제물을 들고 오기가 귀찮으니까 성전 안에 매점에서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이 많았다. 그것을 알면서도 묵인하며 제사장들은 뇌물을 받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전 청소를 감행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 여러분! 절대 교인들끼리는 피라밋 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이용해서 돈을 벌려는 생각은 되도록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다... 교회는 마음을 주고받는 곳(하나님과 의사소통-기도, 사람과의 의사소통-교제)이지, 물질을 주고받는 곳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장삿속으로 큰 교회에 등록하는 어리석음을 절대 범하지 마십시오.
결국 이 성전 청소는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결정적 동기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 밥그릇들을 건드렸으니 제사장들이 주님에게 원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것은 참아도 밥그릇 건드리는 것은 못 참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돈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무서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교인까리는 돈거래하지 마시고, 교회를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회는 물질을 주고 받는 장소가 아니라 마음을 주고 받는 장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는 자리에 들어가게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순수하게 주님을 찾아 주님 만나는 그날에 어엿이 주님 앞에 서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고난주간 셋 째날(3) 마가복음 11장 20-25절
고난 주간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둘째 날은 '성전 청소의 날'이라는 것을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날의 일과 셋째 날의 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왜 성전 청소 후에 변론이 있게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교권을 가진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렸는데 명색이 교권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가만히 물러서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 올무에 걸리는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질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질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하나같이 올무에 걸릴만한 질문이었습니다.
1)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막 11:28) 2)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합니까.(막 12:14)
3) 일곱 형제와 살았던 아내의 경우 누구의 아내입니까.(막 12:23) 4)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막 12:28)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해 첫째와 둘째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막 12:31) 예수님께서 이처럼 모든 질문에 대해 지혜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그 후에는 감히 더 이상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막 12:34).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나가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제자 중 하나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성전 돌들과 건물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막 13:1) 바로 그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막 13:2)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게 감람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바로 저 앞에 성전이 보였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곳에 앉았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 호기심많은 어린이처럼 졸라대며 물었습니다.
"어느 때에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겠으며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바로 그때 주님은 유명한 말세에 관한 감람산 강화를 하셨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바로 셋째 날, 화요일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셋째 날에 가장 먼저 벌어진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날 저주를 했던 무화과나무에 관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어떤 내용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셋째 날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다가 전날 주님이 저주한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주님! 정말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유명한 기도 응답에 관한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즉 기도 응답을 위해 '하나님의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믿음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주님께서 믿음에 관해 하신 말씀 중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22-23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을 우리의 믿음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유를 진단케 합니다.
왜 우리의 믿음이 위력을 발휘하지 못할까요? 여러 가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은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산을 옮기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첫째, 하나님이 소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그러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하나님 믿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기도한 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믿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뜻, 자기 믿음'이 지나치게 앞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런 순종하는 믿음이 있기를 기도해 보십시오.
2. 둘째, 믿음은 자란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을 훈련해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자란다는 것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믿음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을 먹는 것'과 다른 하나는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고 믿음이 생기면 그 믿음을 훈련(운동)시켜야 합니다. 덩치는 큰데 무거운 물건을 못 드는 사람이 있고 덩치는 작은데 무거운 물건을 드는 사람이 있듯이 믿음도 훈련하지 않으면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기도의 맹장 뮬러는 수천 명의 고아의 아버지였는데, 그 많은 고아들을 돌보기 위해서 수시로 엎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뮬러가 93세가 되었을 때,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처음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는 1달러를 구하기 위해 나의 모든 믿음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에는 50년 전 1달러를 구했던 믿음으로 아주 쉽게 1백만 달러를 믿음으로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의 기도도 다른 사람과 별 차이 없었습니다. 1달러를 구하기 위해서 그는 간절을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으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의 믿음 분량 이상을 처음부터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이 실패의 이유입니다. 1달러 지점부터, 사소한 일부터 기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변의 기도제목부터 믿음으로 처리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3. 산을 옮기는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믿음은 입으로 말해져야 합니다. 본문 11장 23절을 자세히 보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한 번 나오지만, 말한다는 단어는 세 번 나옵니다. 그리고 주님은 "믿음대로 이루리라!"고 단순히 말하지 않고 "그 말하는 것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기도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두가지를 살피십시오.
첫째는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그 다음에는 자기를 살피십시오.
그리고 자기를 살필 때 가장 먼저 살필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의 언어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이 무엇이고,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평가될 수 있습니다. 사실상 알고 보면 우리가 말한 것을 나중에 거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약 우리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패를 말하는 순간 실패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승리를 말하는 순간, 승리가 우리를 채찍처럼 휘감을 것입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점에 감긴 것이 풀어지면서 승리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절대 실패와 패배를 말하지 마십시오. 실패를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분이 여러분 안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요일 4:4).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와주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도움을 마음껏 받아 누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위해 믿으시고, 믿음을 훈련하시고, 믿음의 말을 하시길 바랍니다.
고난주간 넷째날(4) (옥합을 깨뜨리라) 본문/ 마가복음 14:3-9
사람이 어떤 때가 가장 아름다운가? 자아가 깨어질 때입니다. 내속에 옛 사람의 본성인 아담이 꿈틀거릴 때는 항상 속된 인간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나의 옛 자아가 깨어질 때마다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자라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형상을 닮아 가기 위해서는 삶의 여러 정황 앞에서 나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르기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에베소서 4:15)고 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옥합은 석고로 된 목이 긴 향유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러면 이 옥합에 담긴 향유는 어떠한 것인가? 매우 귀하고 값지고 순전한 향유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쏟아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옥합에 담아 준 것입니다. 옥합이 깨어지지 않는 이상 이 향유는 절대로 쏟아지지 않습니다. 이 향유는 여인이 평생을 모은 재산이요, 바로 여인 그 자체입니다. 여인은 이 향유를 위하여 살아온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서 이 향유를 깨뜨렸다는 주님을 위해 이 향유를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야말로 바울의 신앙적 고백과 맥을 같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님 앞에서 완전히 자기 자신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 옥합이 깨어짐으로 향기가 진동했습니다. 이 옥합이 향기를 날리는가?
첫째: 값지고 순전한 것이 깨져야 향기가 납니다.3-5
「때가 언제인가?」“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3)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2.6㎞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인데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찾아가는 순레자들이 머무는 마지막 휴식처입니다. 감람산 인근에 있는 마을로서 주님이 즐겨 찾으시는 곳입니다. 그곳에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이 옥합이 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아마 그가 이전에는 문둥이였는데 주님에게 고침을 받아서 성네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문둥병은 가장 추하고 더러운 냄새가 나는 불치병으로 성밖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레위기13:46). 그러한 집에서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으니 이것은 실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문둥병 같은 추하고 더러운 악취가 완전히 제거되고 향기가 그 집에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문둥병 보다 더 추하고 더러운 죄악의 도성에 주님 앞에서 당신의 자아가 깨뜨려질 때 예수의 향기가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옥합엔 어떤 향유가 담겼는가?」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3)을 깨뜨렸습니다. 이 여인이 깨뜨린 옥합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입니다. 그 가치가 삼백데나리온 이상되는 가격입니다. 삼백 데나리온이면 얼마 정도 되는 것인가? 당시 장정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입니다(마태복음 20:2). 유대인이 안식일과 주요 절기 몇날을 빼면 하루도 쉬지 않고 일년동안 일한 품삯인데 그것을 한푼도 쓰지 않고 그대로 저축하여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의 품삯으로서 계산할 때는 그보다 몇배가 적은 것입니다. 그녀가 생활하면서 저축하여 모은 것으로 생각할 때 그 옥합은 평생을 모은 그 여인의 전 재산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짜가 아니고 순전한 것입니다. 당시에도 향유에 포도주를 섞어서 파는 불량품이 난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깨뜨린 옥합은 순전한 향유였습니다. 그가 이 향유를 위해서 살아왔다고 하면은 그 인생이 어떠했는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향유를 주님앞에서 깨뜨렸으며, 주님을 위해 받쳤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삶은 이제 향유를 위한 삶에서 주님을 위한 삶으로 승화된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드렸는가?」“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4)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전 재산을 받치는 일인데 누가 한 마디로 격려와 위로를 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도리어 중상하고 모락하고 분노하여 꾸짖고 책망합니다. 심지어 예수님 곁에 계시는 제자들까지도 부질 없는 짓으로 알고 헛되게 낭비하는 것이다(마태복음 26:8)고 했습니다. 마치 스데반 돌에 맞으면서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신 것 처럼(사도행전 7:56) 이 여인은 그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보는 신령한 안목이 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감격스러운 눈물로 옥합을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9:8).
둘째: 좋은 일에 쓰임을 받아야 향기가 납니다.(6-7)
가롯유다입니다」남의 선행을 악의 도구로 삼으려는 자입니다.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롯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를 가리켜 “...그 사람은 차라리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문둥이 시몬입니다」지극히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이전에 문둥이 였습니다. 자신이 고침을 받았으니 댓가로 주님을 식사에 초대했으나 주님을 위해 발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며, 기쁨으로 입을 맟추며 영접하지도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 댓가로 대접을 하는 지극히 타산적인 사람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입니다」이 여인은 일생동안 자신의 향락을 위해 살아온 자입니다. 다시말하면 옥합을 위해서 살아온 여인입니다. 그러한 여인 주님을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게 됨으로 이전에 삶을 완전히 깨뜨리고 그 옥합의 자리에주님을 보시고 살고자 하는 변화된 사람입니다, . 수가성의 여인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 여인은 지금까지 세상 향락을 좇아서 살아왔습니다. 여섯 남편을 거느려 보았으나 그 마음에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제육시에 물을 길러러 우물가에 나왔다는 것은 그 여인의 마음에 평안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그녀가 주님을 만남으로 그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셋째: 힘을 다해 부어야 향기가 납니다.(8-9)
주님은 이 여인의 행한 일을 대단히 칭찬을 했습니다. 복음이 증거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이 알려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행한 일은 부활을 증거하는 예표입니다. 그러면 그 여인이 행한 사건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는가?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향유를 부어”(8)라고 한 것은 정성을 다하여 부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마태복음 22:3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최선을 다한 삶입니다. 누가는 그 여인에 대하여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누가복음 7:38)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이 행한 행위는 이 여인의 신앙고백입니다. ① 겸손한 여인입니다. 주님의 뒤로 가서 보이지 않게 부었습니다. ② 진실한 여인입니다. 눈물로 발을 씻었습니다. 그 옥합을 깨뜨릴 때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으며 그칠줄 모르는 눈물이 주님의 발을 적셨습니다. ③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입니다. 머리털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최상의 경외심을 표하는 행위입니다. 그녀는 주님의 자신의 주인으로 신랑으로 삼고 살겠다는 행위입니다. ④ 주님께 복종하는 여인입니다. 발에 입을 맟춘다는 것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행위입니다. 평생 주님의 종된 신분으로 살겠는 것입니다. 주님을 메시야로 모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자아가 완전히 완전히 깨어진 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에서 자아가 완전히 깨어졌습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이상 이삭을 드릴 수 없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완전히 자아가 깨어졌습니다. 민족을 향해 가슴에 품은 증오와 때늦은 부름에 대한 불만이 가시떨기 환상 앞에서 자신의 신을 벗어 던지고 말았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자아가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하고 물음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에 자신의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고난주간 다섯 째날(5) 요한복음 13장 1-11절
오늘은 고난 주간 다섯 째날입니다. 이 날에는 세족식이 있었고, 그 다음으로는 성찬식이 있었으며, 성찬식이 끝난 다음에는 다락방 강화가 있었습니다(요 14-16장). 다락방 강화란 주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다락방에서 하신 최후의 유언 설교를 말합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후 예수님의 위대한 중보기도가 있었고, 그 다음에 기드론 시내 저편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십니다 이 일들이 목요일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세족식을 하는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첫째,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시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못 끼면 얼마나 낭비가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잘 시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작한 것을 잘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시작과 끝의 밸런스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 낮은 곳을 향하여 내려가 살피는 것도 중요합니다.
거룩한 꿈과 비전을 세워 전진하고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꿈과 비전을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신앙인은 시작도 잘해야 하지만 마무리도 잘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무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사가고 난 다음에 과태료 영수증만 수북히 남으면 안됩니다.
더 나아가서 주위에 사는 이웃으로부터 그 사람 이사가서 정말 속시원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안됩니다.
이사간 후에 정말 아쉽다는 소리를 듣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비다처럼 그녀가 죽은 후 그녀의 빈자리가 크게 보였던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에 가든지 앓던 이가 되지 마시고 항상 건강한 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처음을 잘 하는 것은 성공에 꼭 필요한 조건이지만, 마지막을 잘 하는 것은 행복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는 생각입니다. 만약 그 말이 맞는다면 마무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를 잘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1절 을 보면 주님은 스스로 세상을 떠날 때가 된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침착하게 평소처럼 가르침을 행하십니다. 여러분! 내일 종말이 닥친다고 해도 흥분한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 종말이 닥친다고 해도 "아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마지막을 잘 준비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다가 소중한 것을 남기는 인생이 되면 족한 줄 알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2. 둘째, 사랑할 때 끝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돌아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신 주님께서 어떤 태도를 취하셨습니까?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주님의 품을 떠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분 안에 있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할 때 끝까지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사람이 확실하다고 생각하면 사랑의 노력을 포기합니다. 부부관계에서 "이 사람은 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있어도, 영원한 동반자라는 생각과 그로 인한 가정의 울타리가 견고해도 옛날 처음 연애하던 시절의 사랑의 노력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고 의지이다"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사랑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3. 셋째, 사명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항상 주님은 그렇게 사명적으로 사셨습니다. 3절 말씀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나에게 맡기셨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우리도 그런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 모든 것을 맡기셨다! 그래서 나를 이 시간, 이 자리, 이 위치에 서게 하셨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같이 정말 가치 있는 존재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로 사명적인 삶에 대한 정의 중에 나는 이 정의를 매우 좋아합니다. "사명적인 삶이란 '온 곳'과 '갈 곳'을 분명히 인식하는 삶이다!"라는 정의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갑니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얼마나 중요한 질문입니까?
안다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갑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항상 그런 인식을 염두에 두고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사명적인 삶입니다.
4. 넷째,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제자가 선생님의 발을 씻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섬김은 세상적인 섬김과는 다릅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섬기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섬길 때 이처럼 차원 높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는 축복을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는 것을 언뜻 생각해 보십시오.
섬김의 원리를 모르면 정말 수치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수치를 영광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위대한 분이고, 우리도 그것을 닮아 가야 합니다. 불신앙이 수치를 발견하는 그곳에서 신앙은 항상 영광을 발견합니다. 교만이 수치를 느끼는 그곳에서 겸손은 항상 영광을 느낍니다.
이 놀라운 역설의 은총은 주님의 온전히 믿는 자의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여러분! 이 시간에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우리가 교만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까? 여러분! 살아가면서 정말 위대한 것은 소박한 데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의 모습은 위대함의 씨앗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발을 딛고 있는 그 장소에서 겸손을 실천하며 최선을 다해 섬김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5. 다섯째, 서로 서로 발을 씻겨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주님은 선생님으로서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밥그릇 싸움은 그만 하십시오.
최대한 양보하며 사십시오. 꽃처럼 대접받기만 좋아하지 말고 꿀벌처럼 대접하며 사십시오.
주님의 산상팔복에서는 세 번째 축복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온유한 자, 주는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사자가 강해도 많이 살아남지 못합니다.
반면에 다람쥐는 약해도 사방 천지에 살아남아 있습니다. 온유한 자에게 많은 열매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잡아먹으려는 자가 되지 말고 대접하는 자가 되십시오. 나에게는 조금 인색하고 남에게는 조금 관대하십시오. 이웃의 상한 발을 씻어줄 겸손한 물수건을 항상 갖고 다니십시오. 우리 모두가 그런 심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우리, 우리 가정, 우리 제단, 우리 사회는 진정 소망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고난주간 여섯째 날(6)마가복음 15장 33-39절
고난 주간 첫째 날 주일은 "예루살렘 입성의 날"이었습니다. 둘째 날 월요일은 "성전 청소의 날"이었고,
셋째 날 화요일은 "변론의 날"이었습니다. 넷째 날 수요일은 "사랑과 배신의 날"이라고 부르며, 다섯째 날 목요일은 "최후의 만찬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고난 주간 여섯째 날 금요일은 "수난의 날"이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수난의 날에 주님이 수난은 당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특별히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자는 교훈입니다. 만찬과 마지막 설교가 끝나고 한밤중에 예수님은 철야 기도하러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을 따로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이 동산에서 예수님은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정말 죽어야 하는가 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얼마나 위대한 복종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위대한 결단입니까? 우리에게도 이런 복종과 결단이 있기를 힘써야 합니다.
2. 둘째, 어려움을 당해도 정신을 잃지 말자는 교훈입니다. 이 결단이 있고 나서 세 제자에게 일어나 가자고 하며 동산 어귀에 있었던 나머지 8명의 제자도 불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눈물과 피로 얼룩진 것을 보고 무엇인가 일어날 것같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대략 이때가 새벽 3-4시쯤으로 추정됩니다. 이어서 제사장이 보낸 무리들에 의해 예수님은 순순히 잡히셨다. 그 이유는 성경을 이루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삶은 이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라는 일관된 목적 하에 움직인 삶이었습니다. 주님의 두 어깨에는 인류 전체의 생명이 달려 있었고, 주님은 그것을 인식하고 일관된 삶을 사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삶을 보면서 무엇을 도전받습니까? 그러한 주님의 모습 앞에서 조그만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시험에 들면 죄송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에도 당당히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수치스럽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무력한 희생자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상황을 컨트롤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3. 셋째, 우리도 주님처럼 의의 십자가를 지자는 교훈입니다.
제자들이 다 떠난 고독한 상태에서 예수님은 홀로 남아 정신없이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 의해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이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단순한 십자가에 돌아가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에는 수많은 수치와 모욕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족한 면에 너무 많아서 주님께서 그렇게 많은 수치를 당해야 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만 생각해도 얼마나 죄송스러운 일입니까?
1) 먼저 주님은 채찍으로 맞으셨습니다. 이 채찍에 맞으면 등이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대부분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 채찍은 우리의 병든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대신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2) 병사들이 희롱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고, 갈대를 머리를 치고 침을 뱉고 조롱하기 위해 꿇어 절했습니다. 이 희롱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 주기 위해 주님이 대신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3) 그리고 직접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밤새 취조를 받았고 채찍의 고통 때문에 운반하다가 쓰러지셨습니다. 그때 북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시몬이라는 사람이 대신 십자가를 졌습니다.
4) 그리고 주님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거절하셨습니다 보통 십자가 사형수에게 몰약을 섞은 포도주를 마시게 합니다. 극심한 고통을 진정시키는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형수에게는 가장 필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거절하셨습니다.
죽음의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없는 십자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 3시, 오늘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 뒤 세시간, 해가 중천에 떠 있어야 할 때 어두움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에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순간 성전의 지성소를 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겼습니다. 순간 사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십자가는 결코 비극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낍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위대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여러분! 진정 승리의 삶을 원하십니까?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이 진정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십자가의 원리를 깨닫고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의 원리란 무엇입니까? 내가 죽음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원리! 그것이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깨닫지 못하고 "저 사람은 좀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합니다. 목회자들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교인들이 좀 이렇게 변화되었으면 좋겠다." 목회를 하면 상대하기 힘든 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그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내가 죽은 것이 빠르고 쉽습니다.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기도 중에서도 자신을 죽이려는 기도가 천하를 얻는 기도입니다. 목사는 교인을 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목사 한 사람이 죽으면 교인 전체가 목사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이 참다운 목회입니다.
목사가 죽으면 교인들은 따라서 편안히 죽습니다. 그러면 평안한 교회가 됩니다.
내가 죽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럽고, 가정이 시끄러고, 나라가 시끄럽고, 내가 속한 공동체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사실상 알고 보면 "저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이런 십자가의 신앙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어지럽히고 시끄럽게 만드는 데 앞장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이란 무엇입니까? 죽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죽지 않고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 하면서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많으면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원리를 아셨기에 십자가를 지셨고, 그 원리를 우리도 따르기를 지금도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 길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그 길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보면 압니다.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에는 대부분 기도가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위해서는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도전해 줍니까? 성공보다 십자가가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말이 아닙니까? 교회부흥보다 십자가를 하나님이 더 원하신다는 말이 아닙니까? 목사가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역은 오히려 조금만 기도해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는 기도에는 진액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나 성도들은 십자가의 기도는 안하고 너무 능력만 받으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없이 어떻게 능력이 주어질 수 있습니까?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최대의 신앙은 자기 죽음을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만약 놀라운 성공을 하고, 수많은 찬사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자기 죽음을 고백하지 못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는 자라면 그것은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는 성공이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됩니다. 십자가는 알고 보면 행복의 원천입니다. 십자가의 헌신을 통해 여러분들의 삶을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고, 여러분들이 속한 공동체를 살리는 거룩한 십자가의 무리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