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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운 축제 하나가 지역경제를 완전히 살렸다. 지역경제뿐만 아니라 그 지역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구룡포 과메기축제의 경우다. 사람들은 구룡포는 몰라도 과메기는 안다. 과메기가 전국에 알려진 뒤부터 구룡포라는 이름도 알게 됐을 정도다. 구룡포에서 생산되는 과메기가 전국 과메기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불과 2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과메기가 전국의 별미가 됐다. 덩달아 관광지로서도 명성을 얻게 됐다. 인구도 몇십 년 만에 다시 늘어나고 있다. 다 잘 키운 축제 덕분이다.
구룡포 과메기 축제. 올해로 17회째다. 11월 15, 16일 이틀간 개최하기로 예정돼 있다. 2010년 기준 경제 파급효과만 3,628억 원으로 평가됐다. 과메기 생산판매금액이 625억 원, 미역·김·야채류 판매 72억 원, 택배 등 물류비 31억 원, 고용 인건비 91억 원, 그리고 음식점 등 2차 부가적인 창출금액이 2,809억 원 등이다. 구룡포에서는 과메기가 돈줄을 끌어내는 노다지다.
과메기 생산업체는 전국 400여 곳이 있으나 대부분 구룡포, 장기, 대보, 호미곶 등 포항 일원이다. 전국 과메기 생산량의 90% 이상이 포항지역에서 생산되고 있으며, 이 중 80%가 구룡포 인근이 차지한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매년 매출도 조금씩 늘어난다. 2006년 4,430여t에 400억 원가량 되던 총 생산량과 판매금액이 2013년에는 5,770t에 750여억 원에 이르게 됐다. 7년 만에 거의 2배에 달하는 매출실적을 올린 것이다. 그 사이 수출도 미국·일본·태국·필리핀·중국 등지로 확대됐다. 수출시장 다각화로 매출실적은 더욱 늘어난다.
과메기의 원래 이름은 ‘관목청어’
과메기는 원래 11월에서 2월 사이에 먹는 계절적 겨울 별미다. 코끝이 찡할 정도로 추운 날씨에 미역·파·고추와 더불어 톡 쏘는 고소한 맛을 느끼며 먹을 때가 제맛이다. 옛날에도 매년 겨울에 임금님께 올린 다음에야 먹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 영일현편에 ‘매년 겨울이면 청어가 맨 먼저 주진(注津·지금의 영일만 하구)에서 잡힌다고 하는데, 먼저 이를 나라에 진헌(進獻·임금에게 예물을 바치던 일)한 다음에야 모든 읍에서 고기잡이를 시작했다. 잡히는 것이 많고 적음으로 그해의 풍흉을 짐작했다’고 나온다.
<경상도읍지> (1832년)에도 ‘영일만의 토속식품 중 조선시대 진상품으로 선정된 관련 식품은 영일과 장기 등 두 곳에서만 생산된 천연가공의 관목청어뿐이다’고 돼 있다. <규합총서>(1815년)에도 ‘비웃(청어) 말린 것을 세상에서 흔히들 관목이라 하니 잘못 부름이요. 정작 관목은 비웃을 들어 보아 두 눈이 서로 통하여 말갛게 마주 비치는 것을 말려 쓰며 그 맛이 기이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같이 과메기는 아주 오래된 우리 전통음식이다.
과메기를 언제부터 먹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름의 유래로 봐서는 구룡포 인근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겨울음식을 즐겼던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인다. 과메기는 원래 ‘관목청어(貫目靑魚)’에서 나온 말이다. 꼬챙이 같은 것으로 청어의 눈을 뚫어 말렸다는 뜻이다. 영일만에서는 ‘목’이란 말을 흔히 ‘메기’ 또는 ‘미기’로 불렀다. 이 때문에 ‘관목’은 ‘관메기’로 불리다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관’의 ‘ㄴ’받침이 탈락되고 ‘과메기’가 됐다고 한다.
요즘은 청어잡이가 별로 시원찮지만 예로부터 동해는 청어의 주요 어획기지였다. 겨우내 잡힌 청어를 냉훈법이란 독특한 방법으로 얼렸다 녹였다 하면서 건조시킨 것이 과메기다. 청어과메기의 건조장은 농가부엌의 살창이라는 곳이었다. 농촌에서 밥을 지을 때 솔가지를 많이 사용한다. 이 살창은 솔가지를 땔 때 연기가 빠져나가게 하는 역할을 했다. 살창에 청어를 걸어두면 적당한 외풍으로 자연스럽게 얼었다 녹았다 하는 과정이 반복되고, 살창으로 들어오는 송엽향까지 첨가됐다. 지금은 꽁치를 그냥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걸어두어 자연 건조되는 것과는 달리 냉훈법에는 조상의 슬기와 지혜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구룡포는 꽁치를 말리기에 적당한 바람과 온도 조건을 지녀, 다른 지역보다 과메기 생산에 유리하다. 과메기는 온도가 너무 높을 경우 꽁치의 지방분이 수분과 함께 빠져나오고, 너무 낮을 경우 과메기 전체에 골고루 스며들지 않는다. 구룡포 일원은 겨울철 날씨가 영하 5℃~영상 10℃의 적절한 온도조건을 유지, 과메기를 건조하는 데 아주 좋다.
하지만 구룡포에서 1960년대부터 청어수확량이 점차 줄어들었다. 청어과메기를 계속 생산했지만 꽁치로 대체할 아이디어를 내지 않았다. 과메기 생산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째 포항에서 과메기 사업을 하고 있는 포항 구룡포과메기사업협동조합 김점돌 이사장도 마찬가지였다.
“20여 년 전에는 통과메기였다. 통과메기는 청어로만 했다. 통통한 청어를 내장이 있는 그대로 말렸다. 날씨가 춥지 않으면 내장과 고기가 상하기 때문에 영하의 날씨 때만 기다려 25~30일씩 말리는 작업을 했다. 말리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과메기 생산량도 많지 않았고, 수익성도 별로 없었다. 통과메기는 내장이 있어 노년층은 고소한 맛이 있다고 했지만 젊은층에서는 비린내가 난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청어 통과메기는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리는데 한 달가량 걸리기 때문에 겨울에 한 번밖에 팔 수 없었다. 이상난동으로 겨울날씨가 춥지 않으면 그해 과메기장사는 끝이었다.
그 뒤 청어 어획량도 줄자 비슷한 어종인 꽁치로 대체했다. 꽁치는 청어보다는 날씬하지만 내장을 전부 꺼내 살만 말렸다. 말리는 데도 3~4일밖에 안 걸렸다. 빠른 시일 내 출하가 가능했다. 내장을 없애니 비린내가 나지 않아 모든 계층이 좋아했다. 꽁치는 원양어선으로 공급이 됐다. 청어와 같이 어획량이 들쭉날쭉하지 않았다. 생산량을 맞출 수 있었고, 과메기 공급량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단지 내장을 갈라내는 작업과 말리는 과정을 수작업으로 해야 했다. 일손이 많아졌지만 오히려 지역경제에는 크나큰 도움이 됐다. 노인들은 아예 물량을 집에 가져가서 밤늦도록 작업했기 때문에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출하량이 늘어나 소비자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덩달아 맛있는 과메기를 저렴한 가격에 전국에 공급할 수 있게 됐다. 20여 년 전 포항 박기완 시장과 함께 과메기 홍보하러 전국 가보지 않은 시도가 없었다. 방방곡곡 누볐다. 박 시장이 전국에 홍보도 중요하지만 지역축제를 열어 더욱 알리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그게 과메기축제의 발단이 됐다.”
올해는 원조 과메기 청어어획량 늘듯
과메기가 성인병과 고혈압, 동맥경화 예방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급속도로 수요가 늘어났다. 꽁치는 고도 불포화지방산인 EPA와 DHA함량이 특히 높다. 이들 EPA와 DHA는 혈관확장작용, 혈소판 응집억제작용, 혈압저하작용, 혈액 중 중성지방 저하작용, 혈액 중 저비중 콜레스테롤 저하작용, 혈액 중 고비중 중성지방 저하작용, 혈액점도 저하작용, 심근경색방지, 뇌경색방지 등 성인병 예방의 생리적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하면 심근경색방지와 콜레스테롤 함량을 낮추어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고, 어린이 성장과 여성들 피부미용에 좋다는 것이다.
단백질 성분인 아스파라긴산이 많아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으며 숙취해독에 좋다. 또 성장기 어린이에 필수적인 알기닌과 메치오닌도 다른 식품에 비해 많이 함유되어 있다. 더욱이 필수 아미노산인 리신과 트레오닌도 다량 함유돼 밥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 국민에게 부족하기 쉬운 영양분을 보충해 준다.
핵산 성분도 많다. 핵산은 과메기로 숙성되는 과정에서 양이 늘어나며, 노화현상과 체력 저하, 뼈의 약화, 뇌의 쇠퇴, 피부 노화 등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혈관을 튼튼히 하여 장내출혈을 막아주는 비타민P와 빈혈치료제인 비타민B12 등도 있다. 그 외에도 성장기 어린이에 필수 영양소인 무기질과 중년기 남자와 갱년기 여성기에 뼈를 튼튼히 해주는 칼슘은 쇠고기의 5배나 돼, 골다공증 예방에도 특히 좋다. 이렇게 풍부한 영양성분을 지닌 과메기를 과메기 무침, 과메기초밥, 과메기튀김, 과메기구이, 과메기볶음 등 다양한 요리로 겨울 입맛을 돋운다.
김점돌 조합 이사장은 “올해는 원조 과메기인 청어가 잘 잡히고 있어, 청어과메기도 공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물론 가격은 꽁치보다 조금 더 비싸다.
구룡포에서는 매년 10월10일부터 꽁치과메기를 출하한다. 올해도 이미 시작했다. 아직 날씨가 추워지지 않아 말리는 데 애로사항이 많다. 11월 말쯤부터 제대로 추워지고 미역이 나올 때쯤 되면 과메기 수요가 본격 늘어날 것으로 구룡포과메기조합은 기대하고 있다. 출하가 시작된 지 한 달여 지날 즈음 과메기축제를 한다. 수익이 많이 생기게 해달라는 기원제와 함께 지낸다.
구룡포 주민들의 길놀이로 오프닝을 한 축제는 과메기 풍년기원 민속놀이로 이어진다. 다양한 행사가 이어진 뒤 다음 날 구룡포 과메기가요제로 이틀간의 축제의 막을 내린다. 축제 기간 중 상시행사는 특산품 판매 및 시식회가 있고, 참여행사는 특산품 퀴즈대결, 특산품 깜짝경매, 관광객 노래 및 장기자랑, 민속놀이, 특산품 다트게임 등이 있으며, 체험행사로는 꽁치구이, 과메기 비누체험, 과메기 페이스페인팅 등의 이벤트를 벌인다. 축제기간 중 방문객은 이틀 동안 3만 명 내외이다. 하지만 판매와 홍보가치는 금액으로 환산할 수 없을 정도다. 구룡포 주민에게는 과메기축제기간이 대목이다.
과메기 경제효과 3,000여억 원 평가
겸재 정선 내연산 보며 진경산수화 그려
축제를 즐긴 뒤 포항을 대표하는 내연산에 조성된 아름다운 내연산숲길을 걸어보자. 가을을 만끽하면서 포항의 속살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내연산은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있으면서 진경산수화를 그린 장소이기도 하다. 그만큼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내연산계곡을 이루고 있는 12폭포는 여느 산의 풍광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오죽하면 금강산에 빗대 소금강이라고 했겠나. 내연산숲길을 포항시 도시녹지과 정성진씨가 보경사 입구에서 12폭포를 거쳐 경북수목원까지 12.9km(GPS)를 안내했다. 정씨는 노선확정과 길 조성까지 관여했던 담당자였다.
오전 보경사의 하늘은 전형적인 가을 날씨를 보이면서 더없이 푸르고 높았다. 전날은 일본에 몰아친 태풍의 간접영향으로 비바람이 몰아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하루 만에 청명한 하늘로 바뀌었다. 계곡엔 물이 철철 넘쳐흘렀다. 보경사 뒤로 내연산이 휘감고 있다. 예로부터 명산이라 불리던 산이고 아늑하다.
보경사는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창건한 고찰이다. 지명법사가 중국 유학 때 도인으로부터 받은 팔면보경(八面寶鏡)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외국의 침입을 막고 삼국을 통일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왕에게 이 사실을 고하자, 왕은 기뻐하며 그와 함께 동해안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해아현 내연산 아래 있는 큰 못 속에 팔면경을 묻고 금당을 건립한 뒤 보경사를 명명했다고 전한다.
내연산은 군립공원이다. 아니, 보경사 군립공원이다. 내연산 전체가 군립공원 지역이 아니고 보경사 터만 군립공원으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노송들이 길을 뒤덮고 햇빛을 가려줘 운치를 더한다. 여름에 어느 길보다 시원한 숲길이 되겠다. 동행한 정씨는 “내연산숲길은 봄에 신록이 파릇파릇하게 나올 때 물소리 들으며 걸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며 추천했다. 물론 계곡 따라 조성했기 때문에 여름에도 좋고, 가을엔 낙엽을 밟으며 걷기 때문에 이 또한 운치 있다고 자랑한다. 겨울을 제외하고 다 좋다는 말이다. 실제로 주변을 살펴보면 겨울에도 노송과 어울린 눈과 계곡, 그리고 길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할 것 같다.
보경사를 지나자 본격 계곡 옆으로 물소리를 들으며 올라간다. 물소리가 매우 우렁차다. 바위도 굴러 내릴 것같이 흐른다. 계곡은 양쪽으로 능선을 끼고 있다. 한쪽은 내연산, 다른 쪽은 신구(천령)산이라고 한다.<미니박스 참조>
길옆 바위 밑에 비석 두 개가 있다. ‘內延山山王大神之位(내연산산왕대신지위)’와 ‘故母堂神之位(고모당신지위)’라고 돼 있다. 내연산을 지키는 남녀 산신이라고 한다. 새로 세운 지 얼마 안 되는 듯 새것이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다.
정씨는 “내연산숲길은 내연산의 자랑인 12폭포를 따라 조성했다. 길을 걸으면서 폭포 8개를 바로 볼 수 있고, 나머지 4개는 200~300m 걸어가면 된다. 그 중간쯤 내연산 풍광의 하이라이트인 연산폭포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능선 사이로 깊게 나 있는 계곡이 길게 뻗어 있다. 아직 단풍이 내연산까지는 남하하지 않았다. 계곡 초입부만 조금 물든 듯하다. 내연산의 첫 단풍은 이제부터 시작이지 싶다.
드디어 첫 폭포가 길옆으로 모습을 살짝 드러낸다. 두 개의 폭포가 나란히 흐르는 ‘상생폭포’다. 폭포이정표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금은 상생폭이란 명칭이 통용되고 있지만 ‘쌍둥이폭포’란 의미의 ‘쌍폭’이란 명칭이 오래전부터 쓰였다. 1688년 5월에 내연산을 찾은 정시한의 <산중일기>에 보면 현재의 상생폭포를 ‘사자쌍폭’이라 적고 있는데, 그 당시에도 쌍폭이란 명칭이 널리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상생폭이라 한들, 쌍폭이라 한들 어떠리. 폭포의 모습은 수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한결같이 흐르고 있는데…. 괜히 인간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하는 듯하다.
상생폭의 남쪽 바위더미를 ‘기화대’라 하고, 폭포수가 이룬 못을 ‘기화담’이라 한다. 이곳은 옛날 시인묵객들이 기생과 더불어 가무음곡을 즐기다가 취한 기녀가 춤을 추다 실족,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은 후로 명명됐다고 전한다.
길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더욱 반짝인다. 쉬어갈 때쯤 됐는지 쉼터가 나온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대화를 하며, 간식도 나눠 먹고 있다.
상생폭에서 불과 100m쯤 떨어진 곳에 폭포가 연이어 나온다. 보현폭포다. 보현암 아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원래는 세 줄기로 낙하하던 폭포였기에 삼보폭이라 전해지나 언제부터, 왜 바뀌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폭포 옆으로 주상절리 같은 기암절벽도 계속된다. 이어 물길이 세 갈래인 삼보폭포(三洑瀑布) 모습도 보인다. 맞은편엔 해골같이 생긴 바위가 있다. 오랜 침식으로 생긴 듯한데 눈같이 생긴 장소엔 사람 한 명 앉을 만한 공간이 있다.
네 번째 폭포인 잠룡폭포가 암벽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 우렁차게 쏟아지는 물소리만 들린다. 잠룡폭포 아래는 거대한 암봉인 선일대(仙逸臺)를 낀 협곡이다. 여기에 용이 숨어 살다가 선일대를 휘감으면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잠룡은 이곳에 아직 승천하지 못하고 숨어 있는 용이 있다는 의미다. 선일대는 신선이 학을 타고 비하대로 내려온 뒤 이곳에 올랐다가 선경에 취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선일대의 암벽은 마치 주상절리같이 하늘로 쭉쭉 뻗어 있다. 용이 하늘로 올라가기 좋은 바위 같다.
12폭포의 하이라이트는 연산폭포
잠룡폭포부터 관음, 연산폭포까지 세 개의 폭포를 ‘내연삼용추’라고 한다. 겸재 정선이 청하 현감으로 있으면서 그린 명승 5점 중에 하나가 바로 ‘내연삼용추도 1, 2’다. 정선은 청하에서 총 5점의 명승을 남겼다. ‘청하성읍도’ ‘내연삼용추도1, 2’ ‘내연산폭포’ ‘고사의송관란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내연삼용추도’는 조선시대 회화로서는 보기 드문 대작으로 가히 진경산수의 본격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청하와 내연산은 겸재의 화력에서 기념비적 이정표가 되고, 특히 연산폭포 일대를 진경산수의 발현지로 본다.
잠룡폭포 바로 위에 바람을 맞지 않은 폭포란 의미의 ‘무풍폭포’, 경치가 너무 빼어나 관세음보살이 금방이라도 나타나 중생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만 같은 ‘관음폭포’ 등이 잇달아 나타난다. 무풍폭포는 폭포의 규모가 작아 폭포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계(溪)’를 붙여 무풍계라고도 한다. 관음폭포도 조선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중폭’이라 했다. 상생폭포를 하폭, 연산폭포를 상폭이라 불렀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음폭포는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비하대 아래 있다. 선녀들이 반해서 넋을 놓고 하늘로 올라가지 못할 만큼 경관이 아름다운 곳이다.
관음폭포에는 또한 물이 쏟아져 내려오는 소(沼)를 감로담이라 하고, 감로담을 에워싸고 있는 해골 같은 바위를 관음굴이라 한다. 감로담은 한 방울만 마셔도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고, 산 사람은 장수하고 죽은 자는 부활한다는 천상에서 이슬만 모아놓은 도리천의 감로수에 비유하여 이름 붙였다. 관음굴에서는 30여 년 전만 해도 수도하는 승려가 있었다 한다. 폭포 소리에 온갖 상념을 날려버리기 좋은 장소다.
이어 내연산의 하이라이트인 연산폭포. 이정표에는 ‘내연산 12폭포 중 가장 규모가 큰 폭포다. ‘내연산(內延山)’에서 ‘내’자를 뺀 명칭이다. 정시한의 <산중일기>에서는 내연폭포라 했다’고 안내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산책하러 왔다가 연산폭포까지 보고 돌아간다. 정씨는 “여성들이 미니스커트에 힐을 신고 여기까지 오는 경우가 가끔 눈에 띈다”며 “원체 경치가 좋으니 정신없이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관음폭포에서 구름다리를 건너 연산폭포로 간다. 들어서는 순간 엄청난 수량의 폭포가 쏟아진다. 전날 비가 내린 탓도 있지만 원래 물이 끊이질 않는 폭포라고 한다. 쏟아지는 물보라에 무지개까지 생길 정도다. 바로 그 옆 바위에 ‘鄭善(정선)’이라고 새긴 각자(刻字)가 있다. 연산폭포 바위벽에는 정선뿐만 아니라 많은 인물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청하현감 21명과 흥해군수 6명, 경상도관찰사 11명 등 지방수령이 70%, 우담 정시한, 좌의정 이존수, 우의정 오명항, 영의정 조인영, 추사 김정희의 부친인 김노경, 좌·우의정을 두루 지낸 이은 등 대부분 18~19세기 인물들이다. 이는 조선말에 이미 내연산은 명승지로서 각광받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리들 외에 유일한 여자 이름이 있다. 기생으로서 관리와 함께 놀러와, 관리가 기념으로 이름을 새겨준 것으로 전해진다.
연산폭포와 관음폭포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쉬거나 간식을 먹는다. 그리고 돌아갈 사람과 계속 올라갈 사람이 나뉘는 지점이기도 하다.
관음폭포에서 급경사의 계단을 오르면 학소대와 비하대가 바로 옆에 있다. 그 사이로 길은 계속된다. 조금 위로 올라갈수록 단풍이 서서히 물드는 모습이 보인다. GPS로 확인하니 고도가 300m쯤 된다.
앞에는 은폭포가 물을 흘려보내고 있다. 원래는 여성의 음부(陰部)를 닮았다 해서 ‘음폭포’였으나 상스럽다고 해서 은폭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또 다른 설은 용이 숨어 산다 하여 흔히 ‘숨은 용치’라고도 하는데, 이에 근거하여 은폭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자세히 쳐다보니 여성 음부와 닮은 듯도 하다.
계곡을 가르는 조그만 구름다리를 건넌다. 계곡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한다. 때로는 나무 데크 길로도 간다. 길이 계곡 따라 계속되기 때문이다. 곧이어 복호1, 2폭포가 나온다. 호랑이가 곧잘 출몰하여 바위 위에서 엎드려 쉬고 있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산은 높지 않지만 깊은 계곡이 있어, 옛날에는 호랑이가 충분히 출몰했을 만하다.
화전민이 살던 시명리로 가기 전 잘피잘골짜기에 접어든다. 그 위로는 마치 벼랑에서 실타래같이 물을 풀어내리는 듯한 폭포가 하나 있다. 그 이름 실폭포. 실같이 가늘기도 하다. 곧이어 12폭포 중 마지막 시명폭포가 저 아래 있다. 골짜기 깊은 곳에 있어, 위험해서 접근하기 힘들다. 물소리만 듣고 그대로 간다.
시명리는 지금은 없어진 화전민터다. 이 깊은 골짜기에 40여 년 전 30여 가구나 살았다. 그 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돌담과 집터가 그 흔적을 대신한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불과 몇십 년 전의 세월인데,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돌담 주변으로는 낙엽송이 군락을 이뤄 하늘 높이 자라고 있다. 속성수이기 때문에 화전민을 보내고 그 자리에는 전국적으로 일제히 낙엽송을 심었다.
계곡길 끝나면 임도 따라 경북수목원으로 이어져
내연산 향로봉으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경북수목원까지는 6.6km 남았다고 돼 있다. 이제 볼거리는 없다. 단지 숲길로 계속 걷기만 하면 된다. 계곡도 끝이 나고 임도로 연결된다. 마치 깊은 숲속 같다. 이 길은 이미 경북수목원 원내다.
다시 이정표는 뒤로는 ‘보경사 8.2km’, 앞으로는 ‘경북수목원 4.6km’로 표시돼 있다. 산 넘고 물 건너 8.2km 왔고, 그냥 앞으로 묵묵히 걷기만 하면 되는 길 4.6km다.
내연산숲길, 걷기엔 참 좋다. 숲과 물과 폭포와 어우러진, 그리고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를 그린 빼어난 경치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봄, 여름, 가을까지 다 걷기에 좋을 듯하다. 보경사는 입장료를 받지만 경북수목원은 무료입장이다. 내연산 가는 길에 등산보다 숲길로 걷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뭔가 조금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순 없다. 일단 시·종점은 보경사와 경북수목원으로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보경사에서 시명리 화전민터를 지나고 나서부터는 무미건조하다. 단순히 숲속을 걸을 뿐이다. 때로는 걷기만 하는 길도 필요하지만 왠지 아쉽다. 보경사에서 연산폭포까지의 경치에 취해 오다가 나머지 절반 가까이를 그냥 걸으려니 상대적으로 심심한가 하는 생각도 해봤다. 또 있다. 보경사까지는 접근성이 좋은데, 경북수목원에서 보경사로 돌아오기가 영 불편하다. 대중교통도 원활하지 않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려면 교통비만 4만 원쯤 든다. 보경사에서 원점회귀 하든지, 경북수목원에서 원점회귀 하는 코스를 따로 만들든지 하는, 뭔가 대책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찾아가는 길
교통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중부내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김천분기점 이후 경부고속도로에서 다시 포항익산고속도로로 갈아타고 포항IC에서 나와 감포·구룡포 방면으로 영일만대로를 따라 가면 된다. 고속버스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오전 6시 첫 출발하며, 30분 간격으로 왕복운항 한다. 요금은 일반 2만1,400원, 우등 3만1,800원, 심야 2만3,500원, 심야우등 3만4,900원. 소요시간은 4시간 30분 내외. 구룡포에서 보경사까지는 간선200번과 좌선500번, 청하↔보경사까지 왕복운항하는 지선버스를 타면 된다. 시간은 2시간 남짓. 거리는 약 60km로 승용차로는 40분가량 소요. 청하에서 경북수목원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3차례 왕복운행 한다.
숙식(지역번호 054) 보경사 바로 앞에 연산온천파크(262-5200)가 있다. 하루 숙박객에게 온천이용권을 무료로 준다. 포항의 별미는 이미 언급한 대로 단연 과메기. 그 외는 오징어, 개복치 등을 꼽는다. 구룡포 항구에 가면 횟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과메기는 한빛수산(010-8594-1321 또는 276-1321)에 주문하면 전국으로 배달해 준다. 과메기뿐만 아니라 대게, 건오징어, 피데기 등도 주문 가능.
내연산은 어느 봉우리인가?
봉우리 불명확… 종남산·신구산·내영산 등 명칭도 다양
내연산 이름에 대한 기록이 들쭉날쭉하다. 내연산의 정확한 봉우리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기록에 대한 사실여부를 차치하고 내연산에 대한 기록을 한 번 살펴보자.
먼저 내연산에 대한 첫 기록은 지금 보물로 지정된 ‘원진국사비’에 있다. 원진국사(1172~1221)는 고려중기의 승려. 원진국사비에는 ‘원진국사 유골이 신귀산에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원진국사 유골이 있는 부도는 보경사 뒤쪽 507m 봉우리의 기슭에 있다. 지금의 문수봉쯤 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전의 기록이다.
조선시대 1481년(성종 12) 성종의 명을 받아 노사신·양성지·강희맹 등이 각 도의 지리, 풍속 등을 기록한 관찬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한다. ‘보경사는 내영산(內迎山)에 있다. 이 산에 대·중·소 세 개의 바위가 솥밭처럼 벌어져 있는데, 사람들이 삼동석(三動石)이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지만 두 손으로 흔들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1530년 중종 때 제작된 대표적인 관찬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똑같은 기록이 나오며, 간혹 내연산이란 표현도 나온다.
사명대사(1544~1610)가 쓴 보경사 법당 기문에는 ‘옛날엔 종남산(終南山)이라 했는데, 내연산(內延山)으로 고쳤다. (중략) 고친 때는 신라시대이다.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이 산에서 피한 인연으로 뒷날 사람들이 내연이라 일컬었다. 내연산에는 암자와 사찰이 50여 개, 삼귀석, 삼동석, 12폭포, 무풍계, 낙하교, 습득대, 한산대, 기화대, 학소대 등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조 33년(1757)부터 8년에 걸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은 전국읍지인 <輿地圖書(여지도서)>와 김정호가 1861년 제작한 한국 최고의 지도인 <대동여지도>에도 ‘내연산은 현 북쪽 11리에 있는데, 주된 산줄기는 응봉산에서 온다. 신라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이 산에 머물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1600년대 조선 중엽의 성리학자인 우담 정시한이 내연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돌아온 산행기 성격인 <산중일기>에도 내연산이 등장한다. 겸재 정선도 <내연용추도>를 그린 사실을 보면 조선시대부터는 내연산으로 어느 정도 굳어지지 않았나 여겨진다.
기록을 정리하면 내연산은 내연산뿐만 아니라, 종남산, 내영산, 신구산 등으로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제는 같은 산을 두고 그렇게 불렀는지의 여부다.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원진국사비’에 나오는 신구산은 사명대사 기문과 <여지도서>에 나오는 내연산과는 완전히 다른 산을 지칭하는 듯하다. 지금 현재 신구산은 내연산 맞은편 천령산(옛날 하늬재)이라는 사실이다. 반면 원진국사비에 나오는 신귀산은 보경사 뒤쪽에 있다.
사명대사 기문에 나오듯이 산 이름은 종남산에서 내영산, 내연산으로 변할 수 있지만 신구산과 내연산의 구분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지역 향토전문가들도 정립이 안 된 상태라고 한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지도에서는 보경사 뒤쪽 봉우리는 문수산, 그 뒤의 봉우리가 내연산(삼지봉·710m)이고, 정상 향로봉(930m)이 능선으로 연이어 표시돼 있다. 그리고 신구산은 아예 없고, 동네 사람들이 신구산이라고 부르는 봉우리는 천령산(우척봉)이라고 표시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도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본질은 원진국사비에 나오는 ‘국사의 유골이 신귀산에 있다’는 대목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이에 대한 설명만 해결되면 내연산의 명칭논란은 끝이 날 것 같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틀린 한 부분을 지적하면, 진평왕이 견훤의 난을 피해 내연산으로 들어왔다는 대목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진평왕은 신라가 통일을 하기 전의 왕이고, 견훤은 후삼국 시대의 인물이다. 시기적으로 3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진평왕을 진성여왕으로 바꾸거나, 견훤을 고구려로 바꾸면 어느 정도 역사적으로 맞지 않을까 싶다.
글·박정원 부장대우
월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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