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학의 인문학 산책] 논어의 인문학⑩
위(衛)나라 제31대 군주 영공(靈公)은 재위 기간이 41년인데 공자가 악평할 정도로 무능하고 방탕하였다. 영(靈)자 시호는 맹한 군주에게 붙인다.
영공은 미소년들과 동성애를 즐겼고, 부인 남자(南子)는 송나라 출신으로 이복오빠 송조(宋朝)-송나라 공자 조(朝)와 근친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남자를 암퇘지로 송조를 숫퇘지로 비유하여 노래하는 것을 들은 태자 괴외(蒯聵)가 분개하여 계모인 남자를 살해하려다 실패하여 송나라를 거쳐 진(晉)나라로 도주하였다.
이후 괴외는 당시 평이 좋지 않았던 조간자, 양호 등과 어울리며 아들 첩(輒)이 위 출공이 되자 12년간 왕위 쟁탈을 위해 투쟁하게 된다.
송조(宋朝)는 <춘추좌전>에 의하면 송나라 공자인데 미색으로 위나라에서 대부가 되었고 위 영공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음란하여 위 영공의 부인 남자와 남자의 시어머니인 선강과 불륜관계를 맺은 것으로 되어 있다.
<논어> ‘옹야편 제14장’에는 공자가 송조의 미색을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자왈(子曰) 불유축타지영(不有祝鮀之佞) 이유송조지미(而有宋朝之美) 난호면어금지세의(難乎免於今之世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축타의 말솜씨와 송조(宋朝)의 아름다움을 가지지 아니하면 지금 세상에 화를 면하기가 어렵겠구나.” 여기서 축(祝)은 제사를 관리하는 벼슬을 말하고, 타(鮀)는 위나라 대부의 이름이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가 다시 위나라에 머문 지 1개월 후 위 영공과 남자의 수레 뒤를 공자의 수레가 따랐는데, 위 영공이 호덕(好德)하지 않고 호색(好色)한 모습에 모멸감을 느껴 다시 진(陳) 나라로 떠났다.
<논어> ‘위령공 1장’에서는 위 영공이 진법(陳法)을 묻자 그 이튿날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는 제1차 수난을 당한 광(匡) 땅을 비켜서 조(曹)나라 쪽으로 돌아서 갔다. 공자는 송(宋)나라 율읍에 도착하여 선조 묘를 성묘하였다. 이곳에는 현재 공자 환향사(還鄕祠)가 있다.
공자의 6대조 공보가는 송나라에서 대사마를 지냈는데 태재(太宰) 화보독이 공보가를 죽이고 절세미인인 공보가의 부인을 빼앗았다. 공보가의 아들 자목금보(子木金父)도 죽이려 하자 노나라로 도망하였다. 자목금보는 아버지 공보가의 공보에서 공을 취해 성으로 삼았다. 자목금보의 손자가 공자의 증조부인 공방숙이다.
송나라는 주 무왕이 은나라 최후의 왕인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미자계(微子啓)에게 분봉한 나라이다. 미자계는 공자의 조상 미중의 형이다. 이러한 계보로 보면 공자는 송나라 귀족의 후예이고, 또 송나라는 은나라의 유민을 통치하기 위해 세운 나라이므로 은나라의 후예가 된다.
공자는 송나라 도성 상구(商丘)에서 송나라 제28대 경공(재위 BC516-BC469)을 만난다. 이때 송 경공은 부국강병책을 물었고 공자는 도덕 정치를 말하였으므로 뜻이 맞지 않았다. 송 경공은 과거 춘추오패였던 제6대 송 양공(재위 BC 651-BC637)의 아픔 때문에 인(仁)을 좋아하지 않았다.
송양지인(宋襄之仁)은 송(宋)나라 양공(襄公)의 인(仁)이라는 말이다.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거나 불필요한 동정이나 배려를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비유할 때 쓴다.
송 양공이 초나라 동맹국인 정나라를 칠 때 구원군으로 온 초 성왕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다. 송 양공은 잠시나마 회맹의 맹주를 맡은 패자(霸者)랍시고 초 성왕이 강을 건널 때와 건너서 전열을 정비할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송 양공은 대패하였고 부상으로 사망하였다.
초 성왕은 초 문왕과 식부인(息夫人)의 아들로 성왕의 손자가 춘추오패인 초장왕이다. 식부인은 진(陳)나라 명문 규(嬀)씨 가문의 둘째 딸로 식후(息侯)의 비가 되었다. 미모가 빼어나서 도화부인(桃花婦人)이라 불렸다.
초 문왕이 식 부인의 미모에 반해 식 나라를 멸하고 비로 삼아 아들 둘을 낳았으나 말을 섞지 않고 식 나라와 식후를 그리워하였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 송지문(宋之問), 왕유(王維)와 청나라 때 <홍루몽>을 쓴 조설근(曹雪芹) 등이 시를 지어 그녀를 기렸다.
공자는 송(宋)나라에서 실세 대부 사마환퇴(司馬桓魋) 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사마환퇴는 공자 제자 사마우의 형이다. 사마환퇴는 공자의 임용을 꺼렸다. 그는 공자가 소크라테스처럼 청년들을 타락시킨다고 보았다.
후에 환퇴는 송 경공과 불화로 반란했으나 실패하여 위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이때 송에서 일족이 추방되었고 사마우는 환퇴와 같은 나라에서 살기를 거부하여 노나라에 와서 공자의 제자가 되었다.
공자가 BC495년 57세 때 송나라에서 당한 수난이 제2차 수난인 ‘환퇴(桓魋)의 난(亂)’이다. 환퇴가 큰 나무를 쓰러뜨려 공자를 죽이려 하였다. 그곳이 현재 문아대의 단수갱 유적지이다.
<논어> ‘술이편 제22장’에 이때 공자의 당당한 외침이 나와 있다. “자왈(子曰) 천생덕어여(天生德於予) 환퇴기여여하(桓魋其如予何)“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낳게 하셨거늘 환퇴 따위가 나를 어찌하겠느냐?”
<사기> ‘공자세가’에는 이때 공자가 상갓집 개(喪家之狗)가 된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공자 일행은 환퇴의 추격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서 예정에 없던 진(陳)나라 북서쪽의 정(鄭) 나라로 도망하였다. 공자는 정 나라 도성인 신정(新鄭) 동문 앞에서 노숙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이 수소문하여 공자를 찾았다.
공자가 홀로 동쪽 성문 밖에서 제자들을 기다리는 데, 어떤 사람이 자공에게 말하길,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았고 목은 고요(皐陶)와 같았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허리 밑으로는 우(禹)임금보다 세 치나 짧았고, 그 초췌한 모습은 마치 상갓집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은 다른 제자들과 함께 공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공자에게 들려주니 공자는 웃으면서 탄식했다. “외모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하지만, 상갓집 개(喪家之狗)와 같다는 말은 맞는구나,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