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어떤 의미에서 회개는 용서의 선행 조건인가
죄에 대한 증오심이 회개의 시초이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우리를 처음으로 접근하게 만든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상대자들은 가련하고 고통 받는 죄인들뿐이며, 신음하고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주리며 목마르고 슬픔과 불행에 시달리는 사람들뿐이다(사 61:1-3, 마 11:5, 28, 눅 4:18).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으려면 회개를 목표로 노력하며, 일생을 통해서 회개에 몸을 바치며, 끝까지 회개를 추구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나부르시는 목적은 회개시키려는 것이었다(마 9:13 참조). 그는 무가치한 자들에게 파견되셨으나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사악에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었다(행 3:26, 5:31 참조). 성경에는 이런 증언이 가득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하실 때에, 우리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 보통이다. 거기에는 그의 자비가 사람들이 회개하는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사 56:1). 또,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또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사 55:6-7). 마찬가지로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고 한다(행 3:19). 그러나 이런 조건은 우리의 회개가 근거가 되어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을 자격이 생긴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주께서는 회개시키고자 하시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결정하시고 만일 그들이 은혜를 얻고 싶으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되는지를 알리신다. 따라서 이 육신의 감옥에서 살고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의 결점과 아니 우리의 타고난 영혼 그 자체와 싸워야 한다. 플라톤은 죽음을 명상하는 것이 철학자의 생활이라고 했다.1120)
그러나 우리는 더욱 진실한 말을 할 수 있다. 즉, 육을 죽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며 훈련하여, 드디어 육을 완전히 죽이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되도록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일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를 심히 싫어할 줄 아는 사람은 많은 유익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자기를 싫어하되 진흙 구덩이에 박혀서 전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속히 가며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生)과 사(死)에 접붙임을 받아 계속적인 회개에 유의하게 되기 위해서이다. 참으로 죄를 진심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이는 먼저 의에 대한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면1121) 결코 죄를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생각은 가장 순수한 것인 동시에 성경의 진리와 가장 일치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개와 용서를 받을 수도 없는 죄들. 21-25)
21. 회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 나아가,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 이 점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분명하며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신 것을 보고 놀랐다(행 11:18, 고후 7:10). 바울은 디모데에게 불신자들을 부드럽고 관대하게 대하라고 명령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그들은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딤후 2:25-26).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회심을 원하신다고 선포하시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권고를 보내신다. 그러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에 달렸다. 이는 우리가 사람을 창조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자기 능력으로 더 훌륭한 본성을 입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생의 전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고 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구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으로 살리신다. 엄밀히 말한다면, 회개가 구원의 원인이 아니지만 그것을 믿음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사야도 증거한 대로 이미 밝혀졌다.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 59:20).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왕성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따라서 이사야서를 보면, 신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호소하고 슬퍼하면서, 버림을 받았다는 일종의 표지로서 자기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사 63:17). 배교자들을 구원의 소망에서 제외하려고 한 사도는 그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라고 그 이유를 제시한다(히 6:4-6).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멸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그의 은혜를 보이시며 이를테면 그의 고요하고 기쁜 얼굴로 그들을 그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불경하여 용서하실 수 없는 자들은 버림을 받은 자들의 마음은 강퍅하게 만드시며 그들에 대해서는 진노를 나타내신다.
의식적으로 배교하는 자들에 대해서 사도는 이런 벌이 있으리라고 위협한다. 이것은 복음에 대한 믿음을 버리며, 하나님을 조롱하며, 그의 은혜를 멸시하며, 그리스도의 피를 모독하며 짓밟으며(히 10:29), 참으로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다(히 6:6). 어떤 엄격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듯이, 바울은 모든 의식적인 죄에 대해서 용서받을 희망이 없다고1122)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배교만은 용서를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모독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용서의 여지없이 엄격한 벌을 내리시는 것은 당연하다고 가르친다. 그의 말을 인용한다면,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고 하였다. 다른 구절에서도 그는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만 있으리라."(히 10:26-27)고 하였다.
옛날 노바티아누스파(Novatianists)가 미친 듯이 날뛴 것은 이런 구절들을 오해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선량한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 나타난 냉엄한 태도에 반감을 가지고 이 서한에는 사도적 정신이 그 모든 부분에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거짓된 작품이라고 믿었다.1123)
그러나 우리는 이 서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상대로 논의하는 것이므로 이 말씀들이 그들의 오류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첫째로, 사도는 그의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마 12:31-32, 막 3:28-29, 눅 12:10).
다시 말하거니와 만일 우리가 사도를 그리스도의 은혜에 반대된 자로 만들려고 하지 아니한다면, 사도가 이런 예외에 대해서 만족하게 생각한 것이 확실하다. 이에 따라서 결론은 어떤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일이 없으나, 한 가지 죄만은 예외라고 할 수 있다. 이 죄는 절망적인 광기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연약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 사람이 마귀에게 사로잡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22. 용서할 수 없는 죄
그러나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마땅히 결코 용서를 받지 못할 이 가증한 죄의 성격을 규명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이 죄를 정의하기를, 용서를 믿지 않고 죽을 때까지 계속 고집을 부리는 것이라고 한다.1124) 그러나 이런 정의는 그리스도께서 이 죄는 이 세상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과(마 12:31-32)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헛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이 세상에서 범할 수 있거나, 두 가지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어거스틴의 정의가 옳다면, 죽을 때까지 계속되지 않으면 그런 죄가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에게 내려진 은혜를 시기하는 사람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다고 한다.1125) 그들이 어디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의 도움을 받아서 자연히 모든 다른 정의를 쉽게 능가할 수 있는 진정한 정의를 이제 제시하겠다. 하나님의 진리의 조명을 받아 무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으면서도 악한 의도로 하나님의 진리에 항거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것이다. 이런 항거만이 그들의 죄가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하신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서,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즉시 부언하셨기 때문이다(마 12:32, 눅 12:10, 막 3:29 참조). 그리고 마태는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 대신에 "훼방의 영"이라고 기록하였다.1126)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비난을 던지면서 어떻게 동시에 성령을 비난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무지해서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사람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되기만 하면 그 진리를 소멸시키려는 의식적인 의도는 없는 사람들,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자임을 알고 그에 대해서 한 마디라도 중상하는 말을 하지 않을 사람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 복음의 가르침을 극악한 말로 저주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것이 복음에서 온 것인 줄 안다면 기꺼이 진심으로 공경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논박하며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줄을 확신하면서도 그 양심이 여전히 반대를 계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사역인 조명에 반항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은 성령을 거슬려 훼방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유대인들 중에 그런 자들이 있었는데, 스데반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에 대적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항하였다(행 6:10). 그들 가운데는 율법에 대한 열성으로 부득이 그런 행동을 취한 사람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사악하고 불결한 생각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항해서 미친 듯이 날뛰는 자들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온 교훈인 줄을 알면서도 그 교훈에 항거한다. 주께서 책망하신 바리새파 사람들도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알세불(Beelzbud)"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중상하였다(마 9:34, 12:24). 그러므로 이것이 훼방의 영이다. 즉, 인간이 대담해져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적으로 비난한 것이다. 바울이 자신이 불신 앞에서 모르고 그런 일들을 저질렀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할 때에(딤전 1:13), 그는 이 점을 암시하는 듯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주의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무지와 불신앙이 합해서 바울이 용서를 얻게 했다면, 지식과 불신앙이 합한 경우에는 용서를 받을 여지가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23. "두 번째 회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자세히 주의해 보면, 사도가 말하는 것은 한두 번 하는 타락이 아니고, 버림받은 자가 구원을 버리는 그 보편적인 반역임을 이해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그의 서한에서, 선택받은 자들 사이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선택받은 자들에게 속하지 않았다고(요일 2:19)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결코 화해하시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요한이 여기서 반대하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교에서 떠났으면서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런 잘못되고 악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그들에게 권하면서 그는 큰 진리를 말한다. 즉,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의식적으로 또 고의로 배척한 자들에 대해서는 다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배척한다는 뜻은 방탕, 무절제한 생활로 단순히 주의 말씀을 어긴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가르침 전체를 고의로 또 의식적으로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만성이 "타락"과 "죄를 지음"이란 말들에 있다(히 6:6, 10 :26). 그래서 노바티아누스파는 "타락"을 해석할 때 그것은 주의 율법에서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고 배웠으면서도 절도 행위나 음행을 버리지 않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한다.1127) 그러나 나는 주장한다. 여기는 암시적인 대조법이 있어서 전에 말한 것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등지고 완전히 돌아서는 것, 이를테면 전인이 배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사도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후에 타락한 자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히6:4-5), 그것은 성령의 조명을 의식적인 불경건으로 없애고 하늘의 은사의 맛을 뱉어 버리는 자들은 성령에 의한 성화에서 스스로 단절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유린하리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의적이며 계획적인 불경건이란 뜻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해서 사도는 뒤에 있는 다른 구절에서 "고의로" 이라는1128) 말을 첨가한다. 진리에 대한 지식을 얻은 후에 의식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해서는 속죄의 제사가 다시없을 것이라고(히 10:26)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위한 계속적인 속죄의 제물이심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서신의 거의 전체가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설명하면서 이 점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회생을 거부하면 다른 희생은 없다고 사도는 말한다. 그뿐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명백하게 부정할 때에 사람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거부한다.
24. 용서받을 수 없는 자들은 회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빌면서 피난처를 구하는 사람들이 전혀 용서를 받을 기회가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냉혹하며 주의 자비와는 이질적인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이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히브리서 기자는 주께로 돌아가는 사람에게 대해서 용서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으로 영원히 눈이 어두웠고, 그 결과로 회개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에서의 경우에도 이 점에 반대되는 것은 조금도 없다. 사도는 후에 에서의 예를 이 점에 적용하여, 에서가 잃어버린 상속권을 회복하려고 눈물과 통곡으로 구했으나 헛수고였다고 말한다(히 12:16-17). 이것은 예언자가 한 경고에 버금가는 진리이다. 예언서에는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한다(슥 7:13). 이런 말들은 진정한 회심이나 하나님께 대한 호소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불경건한 사람들이 궁지에 빠졌을 때에 느끼는 불안을 표시할 뿐이다. 그들이 전에 태연하게 무시하던 일, 곧 그들의 모든 행복은 주의 도움에 달렸다는 사실을 궁지에 빠진 다음에야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주의 도움이 그들에게서 떠난 것을 괴로워하는 것이지 도움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의 "부른다"(슥 7:13)는 말과 사도의 "눈물"(히 12:17)이란 말은 절망 상태에 빠진 악인들을 괴롭히는 저 무서운 고통을 의미할 뿐이다.
여기에 깊이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악인이 회개하기만 하면 곧 자비를 베푸시겠다고 예언자를 통해서 선포하신(겔 18:21-22) 하나님께 자기 분열이 생기는 결과가 초래 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와 같이1129)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사람의 마음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또 구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은 결코 속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자들이 재난을 당해서 그 해결점을 찾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되겠다고 깨달으면서도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시면 여전히 도망하여 마음이 산란하고 맹목적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회심"이니 "기도"니 하고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5. 가짜 회개와 진짜 회개
그러나 문제가 있다. 사도는 가짜 회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아합이 용서를 받고 그에게 내리게 되어 있었던 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의 만년의 행동을 보면, 그가 다만 갑작스런 공포심에서 떨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왕상 21:28- 29). 그는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재를 쓰고 땅에 누웠으며(왕상 21:27), 그에 대한 증거로 보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여전히 완고하고 악의를 품고 있었던 이상 옷을 찢었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셨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위선자들은 이와 같이 얼마 동안 용서를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항상 그들 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다. 아합에 대한 벌은 경감되었으나 그것은 단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느끼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그에게 어떤 유익이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저주는 비록 은밀했으나 그의 집에 머물렀고 그는 영원히 멸망하고 말았다.
에서에게도 같은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는 거절을 당했으나, 그의 눈물로 인하여 현세의 축복은 허락되었다(창 27:40).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영적 상속은 두 형제 중에 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에서가 무시되고 야곱이 선택됐을 때에 에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동물적인 인간으로서의 위안은 남아 있었다. 즉,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로 기름지게 되리라는 것이었다(창 27:28).1130)
내가 방금 말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진지한 회개를 하도록 더욱 마음을 다하여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실하게 또 충심으로 회심할 때, 무가치한 자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면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꺼이 용서하시리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수단으로 강퍅한 자들 위에는 어떤 무서운 심판이 내릴 것인가를 배운다. 지금도 강퍅한 자들은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얼굴과 완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고를 멸시하며 무시하는 것을 하나의 재미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울음이 거짓이며 마음이 부정직한 것을 아시면서도, 자주 손을 내밀어 그들의 재난을 완화하셨다(시 78:36-37 참조). 그들이 곧 자기의 본성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시편에서 하나님께서 한탄하신 바와 같다(57절). 이와 같이 지극히 인자한 처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지한 회심으로 인도하려 하셨고 또한 그들을 변명할 여지가 없게 만들려고 하셨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일시 징벌을 중지하심으로써 항구적인 법으로 자신을 속박하시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위선자들에 대해서 더욱 엄격한 태도를 취하시며 벌을 배가하셔서, 그들의 거짓을 불쾌하게 생각하심을 알리신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용서하신다는 선례를 보이셔서, 경건한 사람들은 생활을 고칠 용기를 얻게 하시고 완고하게 핍박을 아는 교만한 자들은 더욱 엄한 정죄를 받게 만드신다.
제 4 장 그 복음의 순수성과 거리가 먼 스콜라 궤변가들의 회개론, 고해와 만족설(보속설)을 논함
(고백과 통회에 관한 스콜라 교리와 그 성경적 근거를 검토함. 1-6)
1. 스콜라학파의 회개에 관한 교리
이제부터 회개에 대한 스콜라학파의 궤변가들의 주장을 검토하겠다. 나는 이 책을 간단한 교과서로 만들려고 부심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를 추구함으로써 책의 체제가 깨뜨려지지 않도록 여기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별로 복잡하지 않은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은 무수한 책을 써서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미혹에 조금이라도 빠지면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우선 그들의 정의에 의하면, 그들은 회개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서 상투적인 말들을 인용하여 쓰지만 그런 말들은 회개의 힘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 예컨대, 회개는 이전의 죄를 뉘우치고 우는 것이며, 울어야 할 죄를 다시 짓지 않는 것이며 그리고 과거의 악행에 대해 통곡하는 것이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슬퍼하는, 즉, 과거 행동에 대하여 슬픔으로 자기를 벌하는 것이며, 자기가 하였거나 찬성한 악행에 대한 심령의 슬픔과 영혼의 괴로움인1131)것이다. 교부들의 이런 말들에 대해서 논쟁가들은 부인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합당한 말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부들이 이런 말을 한 것은 회개를 정의하려는 뜻이 아니었고, 구원을 받기 전에 짓던 죄에 다시 빠지지 않도록 듣는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한 것이었다. 궤변가들이 이런 종류의 말들을 정의로 바꾸고 싶다면, 첨가할 만한 그에 못지않게 훌륭한 말들이 달리 있다. 예를 들면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 중의 하나이다. 즉, 그는 "회개는 죄를 씻어버리는 약이며, 하늘에서 온 선물이며, 놀라운 힘이며, 율법의 힘을 능가하는 은총이다."1132)라고 말했다.
그뿐 아니라, 후기 스콜라 학자들이 가르친 교리는 이 교부들의 정의보다 더 졸렬하다. 그들은 외면적인 훈련을 너무 고집하기 때문에, 그들의 방대한 책들을 읽어도 회개란 일종의 고행이라는 것, 즉, 조금은 육(肉)도 길들이며 허물도 징벌하는 것이라는 인상밖에 받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말씀의 내면적 변화와 거기 따르는 생활의 진정한 개선에 대해서는 탄복하리만큼 입을 다물고 있다. 그들은 통회(contrition)와 성찰(attrition)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한다. 또한 사람의 영혼을 여러 가지 근심으로 괴롭히며, 불안과 고뇌와 번민의 바다에 집어넣는다. 사람의 심령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나서는 약간의 가벼운 의식을 행함으로써 그 모든 고통을 치료한다.
그들은 회개를 교묘하게 정의하여 심령으로 하는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으로 나눈다.1133) 그들은 삼단 논법을 구성하는 데 한평생을 보낸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구분법은 그들의 정의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가령 논리학자들의 논법에 따라 이 스콜라 학자들의 정의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추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입으로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울 수 있고 울어야 할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과거의 악행을 통곡할 수 있고 통곡할 행위를 다시는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슬퍼하는 과거 행동을 다시 벌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구분법을 유지하겠는가? 이는 그가 진심으로 참회하면서도 고백은 하지 않는다면, 고백 없이도 회개가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답변하기를, 이 구분법은 회개를 한 성례전으로 생각할 때, 또는 회개의 전체 완성에 관한 것으로 이해할 때 고해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런 해석을 그들은 정의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들은 나를 비난할 까닭이 없다. 좀더 정확하고 분명한 정의를 하지 않은 자신들을 비난해야 한다. 나는 미련해서 어떤 문제에 대해서 논쟁이 있을 때에는 모든 것을 그 정의 자체로 환원시킨다. 논쟁 전체의 요점과 기초는 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그 교사들의 임의에 맡겨두고 우리는 다만 여러 가지 부분을 순서대로 관찰하기로 하자.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신비한 비밀이라고 선전하지만, 나는 그대로 넘어갈 생각이다. 이것은 부지중에 하는 일은 아니다. 그들이 교묘하고 세밀하게 논한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을 검토하는 것이 내게는 그다지 힘이 들지 않을 것이나, 내가 그렇게 꼼꼼하게 하는 것은 아무 유익도 없는 사소한 문제로 독자들을 피로하게 만들뿐이다. 그들을 흥분시키는 문제들, 그리고 가련하게 그들이 번민하도록 만드는 문제들을 보면, 그들이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해 떠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다른 죄에 대한 고집은 그냥 있는데 한 가지 죄만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냐, 또는 하나님께서 내린 벌이 보속이 될 수 있느냐, 또는 큰 죄에 대하여 자주 회개를 반복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들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그들은 사람은 가벼운 죄에 대해서만 매일 회개한다고 추악하고도 불경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제롬(Jerome)이 한 말을 기초로 하여 회개는 "파선 후의 두 번째 판자"라고1134) 하는 심한 오류로 큰 고통을 받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동물적인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자기의 과오를 그 천 분의 일내지 그 이하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이런 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2. 스콜라학파의 회개의 교리는 양심을 괴롭힌다
그러나 이것이 당나귀의 그늘에 관한 싸움이1135) 아니고 가장 중대한 일, 즉, 죄 사함 받는 일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회개의 세 가지, 즉, 심령의 통회와 입으로 하는 고백과 행위로 하는 보속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세 가지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만일 신앙의 전분야에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죄 사함을 받는 문제이다. 즉, 무엇 때문에, 어떤 법으로, 어떤 조건하에, 얼마나 쉽게 또는 어렵게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가장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 지식이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으면 양심은 평안할 수 없으며 하나님과 화평할 수 없으며, 확신이나 안정을 얻을 수 없다. 도리어 양심은 끊임없이 떨며, 흔들리며, 불안하며, 고민하며, 동요하며, 증오하며, 하나님을 피해 도망한다.
그러나 죄 사함이 그들이 붙이는 조건에 달렸다면, 우리들에게 그보다 더 불행하고 비통한 일이 없을 것이다. 그들은 통회와 용서를 얻기 위한 첫 단계라고 하면서, 그것은 충분한 통회, 즉, 바르고 완전한 통회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1136) 그러나 동시에 언제 사람이 자기의 통회가 바르게 실천되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며 죄를 더욱 싫어하며 미워하도록 조심스럽게 또 날카롭게 격려해야 한다.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낳는 슬픔은 후회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후 7:10). 그러나 큰 죄에는 거기 해당하는 큰 슬픔이 있어야 하며, 그것은 사죄의 확실성과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고 요구할 때에, 참으로 통회하는 양심은 색다른 방법으로 고통을 받으며, 죄에 대한 충분한 통회를 하라고 하는 것을 보고 고민하게 된다. 자기가 진 빛의 분량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빚을 갚았는지 분간할 수 없다. 스콜라 학자들은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하라고 말하나 우리는 항상 같은 자리에 돌아올 뿐이다. 누가 능히 자기의 죄 때문에 통곡하는 데 전력을 다했노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양심은 오랫동안 자기와 씨름하며 오랫동안 싸우기 위해 힘쓰고도 쉴만한 피난처를 여전히 찾지 못한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안심하기 위해서 억지로 슬퍼하며 억지로 눈물을 짜냄으로써 통회를 실행하려고 한다.
3. 죄인의 통회가 아니라, 주의 자비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나의 비난을 잘못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이런 통회론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나, 진실하지 않은 거짓된 슬픔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회개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으며, 그 이유로서 죄를 깨닫고 고통과 상처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비를 진심으로 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회개는 죄 사함을 받는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첨가한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양심을 괴롭히는 것을 우리의 한 의무라고 하지만, 우리는 그런 일을 폐지하였다. 죄인은 자기의 통회나 눈물을 문제 삼지 않고 두 눈으로 주의 자비만을 주시한다고 가르쳤다.1137)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께서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과하며, 갇힌 자를 놓아주며, 슬픈 자를 위로하시기 위해서(사 61:1, 눅 4:18) 오셨을 때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마 11:28) 사람들을 부르셨다는 것을 죄인들에게 회상시켰을 뿐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의에 배가 불러 자기의 빈곤을 인식하지 못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악에 대한 치료법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은 일체 제외된다. 이런 사람들은 수고도 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도 지지 않았으며, 마음도 상하지 않았으며, 포로 되거나 그 몸이 갇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죄인이 결코 실행할 수 없는 공정하고 완전한 통회란 것을 하면, 그 공로로 죄의 용서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과 죄인이 자기의 불행과 동요와 피로와 포로된 상태를 인정하며, 새로운 원기 회복과 안식과 자유를 얻을 곳이 어딘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주리고 목마른 자같이 구하라고 죄인에게 명령하는 것, 결국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가르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 고백은 명령이 아니다 : 깨끗함을 받은 나환자들에 대한 스콜라파의 은유적 추리를 반박함
지금까지 교회법 학자들과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는 고백 문제에 대해서 항상 큰 분쟁이 있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교훈이 고백을 명령한다고 주장하고 법학자들은 교회법이 명령할 뿐이라고 주장한다.1138)
그런데 이 논쟁에서 신학자들의 파렴치함이 뚜렷하고 명백하게 나타났다. 그들은 논쟁을 위해서 성경의 구절들을 인용하나 모두 잘못 인용하며 그 뜻을 몹시 왜곡하였다. 이렇게까지 하고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것을 알자, 남보다 더욱 민첩하게 보이고 싶은 자들은 핑계를 만들어, 고백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법에서 나왔지만, 그 형식은 실정법에서 얻었다고 한다. 물론 가장 무능한 보잘 것 없는 법률가라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라고 부르신 것을 하나님의 법에 관련시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이의 제기도1139) 마찬가지이다. 아담은 이의를 말하듯이,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운운하고 대답했기 때문이다(창 3:12). 그러나 이 두 경우에 있어서 형식은 민법에서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떤 증거에 의해서 형식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고백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증명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주께서 나환자들을 제사장들에게 보내셨다고 말한다(마 8:4, 막 1:44, 눅 5:14, 17:14). 무슨 뜻인가? 고백하라고 보내셨다는 말인가? 레위족의 제사장들이 고백을 듣기 위해서(신 17:8-9)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은 사람이 있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은유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즉, 모세의 율법에 제사장들이 나병의 진행 정도를 분간하라는 규정이 있고(레 14:2-3),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이에 대해서 선고하는 것이 사제들의 의무라고 말한다.
나는 대답하기 전에 내친걸음에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이 구절이 그들을 영적 나병의 심사관으로 만든다면, 그들이 자연적, 육체적 나병을 심사하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들의 추리는 성경을 조롱하는 것이다. 즉, 율법에는 나병을 심사하는 일을 레위족 제사장들에게 위임하였으니 우리가 이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하자. 죄는 영적 나병이므로 우리는 죄에 대해서도 법적 심사관이 되자고 하는 논법이다!
이제 나는 대답하겠다. "제사 직분이 변역한, 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히 7:12). 제사장들의 모든 직분은 그리스도께로 옮겨져서, 그에게서 완전히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의 모든 권리와 명예도 그에게 옮겨졌다. 만일 그들이 은유를 따르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그리스도를 그들의 유일한 제사장으로 모시고 그의 심판 자리에 모든 일에 대한 무제한의 권한을 집중시키라. 우리는 이 일을 기꺼이 허용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이 은유로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민법을 예전과 하나로 인정하는 것이므로 적당하지 않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나환자들을 제사장에게 보내셨는가? 제사장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긴다는 비난을 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는 율법에는 병이 나은 나환자는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며 제물을 드려 속함을 받으라는 명령이 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된 나환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이 명령하는 대로 행하라고 하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눅 17:14).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마8:4). 참으로 이 기적은 제사장들을 위한 증명이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을 나환자라고 선언했었는데, 이제 그들은 나았다고 선언한다. 그들은 싫든 좋든 그리스도의 기적에 대한 증인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자기의 기적들을 검사하도록 허락하신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핑계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기적이 그들 앞에 증거가 된다. 그래서 다른 구절에는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라고 한다(마 24:14). 마찬가지로 "너희가…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저희와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하심이라"고 하신다(마 10:18). 다시 바꿔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강력한 유죄 선고를 받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자들이 크리소스톰의 의견에 찬성하고 싶다 해도, 그 역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 때문에, 즉, 율법을 어기는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으시기 위해서 하신 일이라고 한다.1140) 그러나 이런 명백한 문제에 대해서 사람의 지지를 구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법적 권리는 모두 제사장들에게 양도한다고 선언하실 때, 그들 가운데는 복음의 원수임을 공언한 자들도 있어서, 그 입을 막아 놓지 않으면 그들은 항상 복음을 반대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파의 사제들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강제로라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 편에 그들을 공공연히 가담하도록 하게 하자. 이것은 그리스도의 진정한 일꾼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5. 나사로를 풀어준 것을 악용한다
그들은 마치 교리를 확립하기 위해서 은유가 매우 중요한 듯이, 둘째 논거를 동일한 근원, 즉, 은유에서 끌어낸다. 중요시하는 것은 버려두겠으나 나는 같은 은유를 그들 보다 더 그럴듯하게 인용해 보일 수 있다. 그들은 주께서 제자들에게 부활한 나사로를 풀어주어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한다(요 11:44).1141) 우선 이런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 주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는 말은 아무 데도 없다. 오히려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셨다고 보는 편이 가능성이 더 많은 추측일 것이다(유대인들이 현장에 있었던 사실은 주의 기적을 사기라고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증명하며, 그의 큰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뜻이었다). 그는 죽은 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고 말씀만으로 살리셨다. 그래서 나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유대인들이 모든 사악한 의심을 버릴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다. 직접 돌을 굴려 젖히며, 썩는 냄새를 맡으며, 분명히 죽었다는 증거를 보며, 주의 말씀의 능력만으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을 보며, 살아난 사람을 제일 먼저 만져보게 하신 것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생각하였다.1142)
그러나 가령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다고 하면, 우리의 반대자들은 어떤 주장을 한 것인가? 주께서 제자들에게 풀어주는 권한을 주셨다고 할 것인가? 만일 이 사건을 은유적으로 해석한다면, 훨씬 더 적당하고 교묘한 처리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자 하셨다. 즉, 그가 살리신 사람들을 풀어주라고 하셨다. 풀어주고 그들의 죄, 즉, 하나님 자신이 잊어버리신 죄를 기억하지 않도록 또 하나님 자신이 용서하신 죄인들을 지옥에 보내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이 너그럽게 보신 일들로 죄인들을 책망하지 말도록, 하나님 자신께서 자비를 베푸시며 용서하고자 하시는데 신자들이 벌을 주겠다고 냉혹한 태도로 허물을 캐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확실히 우리에게 용서할 마음을 제일 확실히 일으키는 것은 재판관의 비유이다. 그는 너무 엄격하고 몰인정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경고하였다. 이제 그들을 보내서 그들의 은유적 해석을 퍼뜨리게 하자.
6. 성경적인 고백
그들은 성경에 있는 명백한 증거로 무장했다고 상상하고 접근전으로 다가온다. 곧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온 사람들은 죄를 자복(自服)했으며(마 3:6), 야고보는 우리가 "죄를 서로 고하며"라고 하였다고 한다(약 5:16).1143)
세례를 받고 싶은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요한이…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 1:4)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회개하는 증표로서 물세례를 주었다. 그러므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가 세례를 주었을까? 세례는 죄 사함에 대한 상징이다. 죄인들과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고서 이 상징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러므로 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였다.
야고보가 "죄를 서로 고하며"(약 5:16)라고 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바로 다음에 있는 말씀에 유의했다면, 이 구절도 그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서로 기도하라"고 하였다(약 5:16). 그는 상호 고백과 상호 기도를 결합하였다. 우리가 사제들에게만 고백해야 된다면 또한 그들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이다. 야고보의 말에서 사제들만 고백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 그가 우리에게 서로 고백할 것을 요구할 때에, 그는 서로 고백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말한 것이다.그가 사용한 "알렐로이스(ajllhvloi")란 말은 "서로", "교대로", "번갈아", 혹은 그들이 원한다면 "상호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고백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상호간에 고백을 실행할 수 있다. 그들은 이 특권을 사제들에게만 돌리기 때문에, 우리는 고백하는 일도 사제들에게만 위탁한다.
이런 하찮은 말들을 전부다 버리라. 우리는 사도의 견해를 취하자. 그것은 단순 명료한 생각이다. 즉, 우리의 약점을 서로 고백하여 서로 충고를 받으며 서로 동정하며 서로 위로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들의 약점을 알았으므로 그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하는데, 그들은 왜 야고보의 말로 우리를 비난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먼저 고백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과 교회, 즉,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저주를 선언한다. 그것은 주께서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기 때문이다(갈 3:22). 주의 뜻은 "모든 입을 막고"(롬 3:19),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롬 3:20, 고전 1:29 참조). 그러나 하나님만을 의로우시다고 하며(롬 3:4 참조)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
(비밀 고백의 후대 기원설의 증거. 7-8)
7. 고대 교회에는 의무적인 고백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반대자들이, 자기들이 말하는 고백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뻔뻔스러운 태도에 나는 놀란다. 물론 고백하는 관습이 대단히 오래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고대에는 자유로운 행동이었다는 것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들의 기록을 보더라도, 이노센트 3세(Innocent III)이전에는 고백에 대한 법이 전혀 없었다. 더 오랜 법이 있었다면 그들은 그것을 들고 나섰을 것이 틀림없고, 겨우 라테란 종교회의(Lateran, 1215년)의 명령으로 만족하여 어린아이들에게까지 조롱거리가 되는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허위 교서의 조작을 주저하지 않고 만들어내어 그것들을 가장 오랜 교회 회의가 정한 것이라고 하며, 고대에 대한 존경심을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속인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그들이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이 증명하듯이, 이노센트 3세가 고백을 해야 된다는 함정을 파 놓은 것은 겨우 300년밖에 되지 않는다.1144)
그러나 연대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그 법이 조잡한 말을 쓴 것 자체가 법의 위신을 불신하게 만든다. 이 선량한 신부들은 남여 양성1145)의 모든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자기의 사제 앞에서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명령하였다. 어떤 익살꾼들이 농담으로 이의를 제기하여, 이 명령은 양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고 양성체인 남성이나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자기의 사제"란1146)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들의 제자들은 더욱 큰 부조리를 폭로한다.
교황의 이 삯군 논쟁가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강요하는 이 법을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로부터 이런 법이 나올 때까지는 1200년이 경과했다. 경건과 교리가 소멸되고, 목회자의 망령에 불과한 자들이 모든 권한을 통틀어 떠맡은 후에 이런 횡포가 드디어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역사 서적과 그 밖의 다른 고대 저술가들의 분명한 증언을 보면, 고백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이 정한 법이 아니고 감독들이 제정한 교회 행정상의 한 규율이었다고 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될 만한 여러 증언 중에서 하나만 제시하겠다. 소조멘(Sozomen, 5세기 전반)은 감독들이 정한 이 법이 서방에서, 특히 로마에서 충실히 지켜졌다고 한다. 이것은 이 법이 모든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 직무를 위해서 장로들 중의 한사람이 특히 지명되었다고 한다. 교황주의자들이 하늘 열쇠는 사제 계급 전체에 공통으로 맡겨져 이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철저히 논박한다. 참으로 그것은 사제들에게 공통된 직책이 아니라, 특히 이 일을 위해서 감독이 선택한 사제 한 사람만의 직책이었다. 이 사람은 지금도 대성당에서는 청죄 사제라고 해서 중대 범죄를 조사하고, 징계로서 견책할 사람을 자문하는 일을 하고 있다. 소조메누스는 부언하기를, 콘스탄티노플에 이 관습이 있었으나 어떤 부인이 고백을 가장하여 어떤 부제와 애정 관계를 가졌던 것이 발견되어, 거룩함과 학식으로 유명하던 감독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이 사건을 이유로 고백의 행사를 폐지했다고 한다.1147) 이 미련한 자들아 귀 기울여 들으라. 만일 비밀 고백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무슨 까닭에 넥타리우스가 감히 그것을 폐지했겠는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며, 모든 교부들이 칭송한 넥타리우스에게 그들은 이단설과 분파의 죄명을 씌우려는가? 그러나 이런 선고를 내린다면 그들은 동시에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하게 될 것이다. 소조메누스의 말에 의하면, 이 교회에서는 고백의 관습을 일시 등한시했을 뿐 아니라, 아주 없어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비난할 뿐 아니라 만일 정직하게 말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령한 불가침의 법을 등한시했다는 이유로 동방 교회 전체를 비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8.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 고백하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백이 폐지된 것에 대해서 크리소스톰이 분명한 증언을 한 문구들은 심히 많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감독이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반대되는 말을 감히 중얼거린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가 한 말을 인용한다면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죄를 고백해서 씻어 버리십시오. 여러분이 지은 죄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창피하거든 자기의 영혼에게 매일 고하십시오.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르는 동료 하인에게 고백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고쳐 주실 하나님에게 고백하십시오. 침상에서 죄를 고백해서 양심이 매일 자기의 비행을 인정하게 하십시오." "그뿐 아니라, 증인 앞에서 고백할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죄를 검토하십시오. 이 재판에서 증인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만이 여러분의 고백을 보시게 하십시오." "나는 여러분을 연단 위에 데려다가 동료 하인들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죄를 폭로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양심을 들고 가서 그의 앞에 펼쳐 놓으십시오. 가장 훌륭한 의사이신 주님께 여러분의 상처를 보이고 그에게서 약을 얻으십시오.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책망하시지 않고 인자하게 고쳐주십니다"
"물론 사람에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분을 책망할는지 모릅니다. 동료에게는 아무것도 고백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을 퍼뜨릴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상처를 주님께 보이십시오. 주께서는 여러분을 돌보시는 친절한 의사이십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써 "나는 너희들이 강단 중앙에 올라와서 여러 증인들 앞에 서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죄를 나에게만 비밀히 말해서 나로 너희들의 아픈 상처를 고치게 하라"고1148) 하였다. 그들을 얽매고 있는 그 구속에서 하나님의 법으로 양심을 풀어주려고 크리소스톰이 이런 글을 쓴 것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할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며, 감히 필요한 것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성경에 있는 죄의 고백 : 공적 및 사적 고백. 9-13)
9. 하나님 앞에서 고백함
그러나 문제 전체를 더 분명하고 쉽고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어떤 종류의 고백을 배울 수 있는가를 충실히 이야기하려 한다. 그 다음에 그들이 만든 조작품들을 이야기하겠다. 물론 그 전부를 말할 수는 없다. 이렇게 큰 바다를 누가 능히 쏟아놓을 수 있겠는가? 다만 그들의 비밀 고백의 요점을 내포한 것만을 이야기하겠다.
부끄러운 일이나, 나는 옛날 번역가들이 "찬송한다"는 말을 "고백한다"는 말로 번역한 것을 회상한다는 것이 부끄럽다(시 7:17, 9:2, 95:2, 100:4, 117:1).1149) 이것은 가장 무식한 평신도라도 잘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이 대담한 짓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데 관해서 쓴 것을 그들의 포악한 법으로 옮겨 놓은 것은 폭로하는 것이 좋다. 고백에는 마음을 명랑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은 시에 있는 "기쁨과 찬송의 소리"란 말을(시 42:4) 끌어넣는다. 만일 이런 수정이 정당한 일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되었으니, 경건한 독자들은 그들의 담대한 것이 더욱 가중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공정한 징벌에 의해서 그들이 버림받은 자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성경의 단순한 가르침을 의지할 생각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런 가장(假裝)에 속을 위험성은 없을 것이다.
이는 성경에는 이 일에 관하여 고백하는 한 가지 방법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죄를 용서하며 잊어버리며 씻어버리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주께 죄를 고백하자. 주님은 의사이시므로 그에게 우리의 상처를 보이도록 하자. 우리의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며 노하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주께 화해를 구하도록 하자. 마음속을 아시며1150) 모든 생각을 아시는 이는 주님이시니(히 4:12 참조), 우리는 그의 앞으로 속히 가서 우리의 속마음을 쏟아 놓자. 끝으로 죄인들을 부르시는 이는 주님이시니 우리는 지체하지 말고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다윗은 말한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다윗의 다른 고백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 51:1) 다니엘이 한 말도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 9:5). 성경에 자주 나오는 다른 고백들도 있고, 또 이것을 인용한다면 거의 책 한 권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우리 죄를 사하시며"라고 요한은 말한다(요일 1: 9). 우리는 누구에게 고백할 것인가? 물론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괴로운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엎드려 고백해야 한다. 그의 앞에서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비난하며 정죄하면서, 그의 선하심과 자비로 무죄 선고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10. 사람들 앞에서 죄를 고백함
이와 같은 고백을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는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선포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언제든지 입으로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한 사람에게 한 번만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이 아니라,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자기의 수치와 하나님의 큰 자비와 영예를 진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을 들었을 때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하였다(삼하 12:13). 바꿔 말하면, 이제 나는 변명하지 않겠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죄인이라고 판정받는 것을 피하려 하지 않으며, 내가 하나님에게 감추려고 하던 일들까지도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비밀히 고백한 후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겸손을 위해서 필요한 때마다 사람들 앞에서 기꺼이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규례를 정하셔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일정한 말을 낭송한 다음에 백성이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하셨다(레 16:21 참조). 그것은 각 사람이 공정한 자기 평가를 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또 우리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고백함으로써 우리 사이에서와 온 세상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를 밝히 보이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11. 온 회중이 죄를 고백함
이런 종류의 고백은 교회에서 평상시에도 실행해야 하며 사람들이 어떤 공통된 죄를 지었을 때에는 특별히 실천해야 한다. 모든 백성이 에스라(Ezra)와 느헤미야(Nehemiah)의 지도아래 행한 것은 이 특별한 고백의 실례였다(느 1:7, 9:1-2). 그것은 그들이 모든 백성의 공통된 반역죄로 형벌을 받아 오랫동안 포로 생활을 했으며, 수도와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종교가 퇴폐하였기 때문에 우선 자기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면 해방의 은혜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회중 가운데는 소수의 죄없는 사람들이 있는 때도 있겠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약하고 병든 몸의 지체이므로 자기의 건강을 자랑해서는 안 된다. 그뿐 아니라 그들도 다소의 감염을 면할 수 없으며, 죄책의 일부를 담당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염병이나 전쟁이나 기근이나 그 밖의 재앙을 당할 때마다, 애통과 금식과 그 밖의 방법으로 우리의 죄지었음을 표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일의 근본이 되는 이 고백을 가장 중요시해야 한다.
평상시의 고백은 주께서 친히 권장하셨다는 사실 이외에, 고백의 유용성을 생각한다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감히 그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집회로 모일 때에, 우리는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 서 있는 것이므로 우선 우리 자신의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가장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혹은 그것은 모든 기도에서 하는 일이며 우리는 용서를 빌 때마다 우리의 죄를 고백한다고 말할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기만족과 우둔과 태만이 얼마나 크고 심한가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공적 고백의 행사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는 습관을 가진다면, 그것이 유익한 규례가 될 것이라는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주께서 제정하신 의식은 율법의 교육적 임무의1151) 일부였지만, 그 이면에 있는 실재는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에게도 관계된다. 또 사실 잘 지도되는 교회들이 이 관습을 지켜서 좋은 결과를 얻는 것을 우리는 안다.
즉, 주일마다 목사가 자신과 교인들의 이름으로 고백문을 작성해서, 모든 사람의 사악함을 고발하며 주의 용서를 간구한다.1152) 간단히 말하면, 이러한 열쇠로 기도의 문호를 개방하여 각 개인은 개인적으로, 온 회중은 공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12. 영혼의 치료에 있어서 개인적 고백
성경은 개인적 고백의 두 가지 형식을 인정한다. 하나는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니, 우리가 서로 자기의 죄를 고백해야 된다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약 5:16) 이 개인적 형식의 고백이다. 야고보가 말한 뜻은 우리가 자기의 약점들을 서로 알린 후에 서로 충고하며 위로함으로써 서로 돕는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형식은 이웃을 위한 고백이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가 어떤 해를 받았을 때에, 그의 노여움을 풀고 그와의 화해를 위해서 사용하는 형식이다. 처음 종류의 고백에서 야고보는 누구를 상대로 고백할 것인지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교우 중에서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택하는 자유를 남겨 놓았지만 누구보다도 적당한 사람은 목사일 것이므로 우리는 목사들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목사들이 더 적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께서 그들을 부르셔서 우리에게 죄를 이기며 교정하도록 말로 가르치며, 죄가 용서된다는 확신을 줌으로써 우리를 위로하도록 그 직책에 임명하셨기 때문이다(마 16:19, 18:18, 요 20:23). 상호 충고와 상호 견책의 의무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목사들은 특별한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를 확신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그 확신을 확고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모두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만, 목사들은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우리의 양심에 불어넣어 주는 증인과 보증인으로 임명된 사람들인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들이 죄를 용서하고 영혼을 해방한다고까지 말한다. 이런 직책이 그들에게 있다고 들을 때에, 그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1153) 그러므로 모든 신자는 죄의식으로 혼자서 마음속에 불안과 고통을 느낄 때 그리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해방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제시하신 대책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즉, 죄에서 풀려나기 위해서 자기 교회의 목사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하며, 위로를 얻기 위해서 목사의 적극적인 도움을 청해야 한다. 왜냐하면 목사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복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는 것을 직무로 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가 항상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분명히 명령하신 것이 없으면, 일정한 멍에로 사람의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고백은 자유 선택에 맡기며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권하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또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규정으로 강요하거나 술책으로 유도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도 된다. 고백하는 당사자들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고백하게 하여, 완전한 위로를 얻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직무에 충실한 목사들은 교회에 이 자유를 허용할 뿐 아니라, 이 자유를 수호하며 굳게 방위해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들의 횡포와 교인들의 미신을 피할 수 있다.
13. 원망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고백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에서 두번째 종류의 고백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이렇게 우리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함으로써 우리의 죄과로 인해서 깨어진 사랑이 다시 회복된다.
교회 전체에 해를 입히게 된 사람들이 그 죄를 고백하는 것도 이런 종류에 포함된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사람에게 사적으로 지은 죄를 중대시하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형제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먼저 공정한 배상으로 화해하기까지는 거룩한 예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셨으니, 악한 행동으로 교회에 죄를 지은 사람이 자기의 죄를 인정함으로써 교회의 화해를 얻어야 할 이유는 더욱 크다.1154) 이와 같이 고린도 교회 신자는 시정을 순순히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시 교회의 친교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후 2:6).
키프리안이 회상한 초대 교회의 고백 형식도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일정한 기간 참회한 후에 고백하러 와서 감독과 교직자들의 안수로 친교의 특권을 받는다."1155) 성경에는 이와 다른 형식의 고백은 전연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영혼을 속박하지 말라고 매우 엄격하게 금하셨으니, 새로운 올가미로 영혼을 얽매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아니다. 동시에 양들이 성만찬에 참가하기를 원할 때마다 목자 앞에 나가서 성만찬에 참가하는 것을 나는 반대하지 않고 도리어 각지에서 이 일을 행하는 것을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하면 괴로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혜택을 입으며, 견책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견책을 받을 마음의 준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압박과 미신은 항상 물리쳐야 한다.
(열쇠의 권한과 죄의 사면. 14-15)
14. 열쇠의 권한에 대한 그 성격과 가치
열쇠의 권한은 다음 세 가지 고백에서 적용될 수 있다. 즉, 교회 전체가 그 허물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용서를 간구할 때, 한 개인이 어떤 현저한 범행으로 일반적인 죄를 짓고 회개를 표명할 때, 또는 괴로운 양심 때문에 목사의 도움이 필요한 개인이 그에게 자기의 잘못된 점을 고할 때이다. 타인에 대한 죄를 제거해야 될 경우에는 방법이 다르다. 이런 때에는 양심의 평안도 고려되지만, 가장 중요한 목적은 증오심을 없애고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의 줄로 묶어 주는 것이다(엡 4:3 참조).
그러나 우리가 더욱 자발적으로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내가 말한 은혜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온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같이 그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에서 유일한 피난처를 구할 때에 화해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임석해서(고후 5:20 참조) 죄의 사면을 선언한다는 것은 평범하거나 사소한 위로가 아니다. 이미신이 그 임무를 공정하게, 바른 절차에 따라 그리고 경건하게 수행할 때에는 열쇠의 권한이 유익하다고 칭찬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약간 멀어진 사람이 용서를 받고 형제적 단결에 다시 참가하게 될 때, 그리스도께서 "너희가 뉘 죄든지 땅에서 사하면 하늘에서도 사하여질 것이요"라고 하신(요 20:23, 마 18:18의 융합) 그 사람들에게서 자기도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이다. 또 자기의 죄를 특별한 치료법으로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사면을 받을 때에, 그 효과와 은혜는 공적 사면에 못지않게 크다. 이는 어떤 사람은 신자 전체에 주는 일반적인약속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약간의 의심이 남아 있고 아직도 용서를 받지 못한 것 같아서 여전히 마음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목사에게 심중의 비밀을 털어놓고,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2)는 복음의 말씀이 특히 자기를 향해서 목사의 입에서 들려올 때 그는 마음에 확신을 얻으며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던 불안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열쇠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항상 주의해서 복음 선포와 관계없는 어떤 권한도 만들어 내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한다. 나는 교회 행정 관리 문제를 논할 때에 이 문제도 다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부여하신 매고 푸는 권리는 말씀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156) 이 점은 특히 열쇠를 사용하는 데 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주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의 은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인쳐진다는 사실은 열쇠의 권한은 완전히 이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이 사실은 복음 선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15. 고백에 대한 천주교 교리의 요점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들은 "양성"의 모든 사람은 분별 연령에 도달하는 즉시로 자기의 모든 죄를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은 자기의 사제에게 고백해야 하며, 그들에게 죄를 고백하겠다는 확고한 의도가 없으면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회가 제공될 때에 이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들 앞에 닫힌다고 한다. 그들은 사제에게는 죄인을 매고 풀어주는 열쇠의 권한이 있으며 이는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운운하는(마 18:18) 그리스도의 말씀이 헛된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157)
그러나 천주교회의 신학자들은 이 권한에 대해서 자기들끼리 맹렬히 싸운다. 어떤 학자는 열쇠는 본질적으로 하나뿐이라고, 즉, 매고 푸는 권한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열쇠를 잘 쓰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지식은 부속물일 뿐이고 본질적으로 권한과 결합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1158) 또 어떤 신학자들은 이것을 너무나 무제한적인 면허라고 보고 분별과 권한이라는 두 가지 열쇠를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런 완화책이 사제들의 부패를 억제하는 것을 보고 다른 열쇠들을 만들었다. 분별하는 권위라는 열쇠는 선고를 내릴 때 사용하는 것이고 권한이라는 열쇠는 그 선고를 실행할 때에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고문으로서의 지식을 첨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감히 매고 푸는 일을 단순히 죄를 용서하며 말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못한다. 그것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나 곧 나는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11, 25)라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누가 매이고 누가 풀릴 것이며, 누구의 죄가 용서를 받으며 누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가를 선언하는 것이 사제의 직무라고 한다. 또 고백을 받고 죄를 용서하거나 남겨둘 때, 또는 파문이나 성사 참가의 허락을 선고할 때, 이런 선언을 한다고 한다.1159)
끝으로 그들은 아직도 곤란한 문제를 제거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며 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사제들이 혹은 매며 혹은 풀어 주는 일이 있으며, 따라서 이런 사람들은 하늘에서 매이거나 풀리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항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런 때에 그들이 최후로 도피하는 수단은 다음과 같은 대답이다. 즉, 열쇠의 권한을 위탁하는 데는 한 가지 제한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사제들의 선고가 그의 심판대 앞에서 시인되리라고 약속하셨으나, 그 선고는 매이거나 풀리는 사람의 공로에 따라서 공정하게 표명된 것이라야 한다는 것이다.1160) 그런데 그들은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이 열쇠의 권한을 모든 사제에게 주셨고 사제들은 서품시에 주교의 손에서 받지만 그것을 자유로 쓰는 권리는 교회 직무를 행사하는 사람들의 수중에만 있으며, 파문을 당하거나 직권 정지를 당한 교직자들도 열쇠의 권한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열쇠들은 녹이 쓸고 묶여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겸손하고 정신이 올바른 것 같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모루 위에서 새로운 열쇠들을 만들어내고 교회의 창고는 이런 열쇠로 잠겨졌다고 한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후에 적당한 곳에서1161) 논할 것이다.
(천주교 교도들의 오류들을 그리고 고백과 보속에 관련된 유해한 관습을 서평함. 16-25)
16. 모든 죄를 열거하여 고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부터 문제점에 대해서 하나씩 간단히 대답하겠다. 여기서는 법으로 신자들의 영혼을 속박할 권리가 그들에게 있는가 또는 없는가 하는 문제는 말하지 않고 적당한 곳으로1162) 미루겠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죄를 말해야 된다는 법을 만들며, 고백하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없으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고 하며, 고백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낙원으로 들어갈 길이 없다고 지껄이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죄는 모두 고배해야 되는가? 다윗은 죄를 고백하는 문제에 대해서 많이 또 바르게 생각한 사람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라고 외쳤다. 다른 곳에서는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라고 하였다(시 38:4). 그는 우리의 죄의 구렁이 얼마나 깊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죄에는 얼마나 많은 얼굴이 있으며, 이 히드라(hydra, 그리이스 신화에 나오는 머리가 아홉인 뱀)에게는 얼마나 많은 머리가 있으며, 죄는 얼마나 긴 꼬리를 끌고 다니는가를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죄를 일일이 열거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악행의 깊은 구렁 밑에서 주를 향해서 나는 눌렸나이다, 묻혔나이다, 숨이 파히나이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시 18:5), 내가 "깊은 수렁에 빠지며"(시 69:2-3, 15-16), 원컨대 손을 내밀어 주소서, 나는 힘이 빠지고 죽어 가나이다 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면 다윗이 자기의 죄들을 낱낱이 세려고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누가 자기의 죄를 세려는 생각을 할 것인가?
17.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것은 무한한 고통을 준다
하나님의 경외하심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잔인한 행위로1163) 인해서 영혼에 가장 참혹한 고통을 받는다. 그들은 처음에 자신을 검토하여, 그들의 양식에 따라 죄를 큰 가지와 작은 가지와 잎으로 나눴다. 그 다음에 죄의 성질과 분량과 환경을 고려하여, 문제는 다소 전진하였다. 그러나 더 전진하여 사방이 하늘과 바다가 되었을 때에는1164) 항구나 정박지가 없었다. 가면 갈수록 눈앞에는 더욱 큰 덩어리가 나타났다. 참으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먼 우회로를 돌았어도 탈출할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케단과 칼 사이에 끼이게 되었다.1165) 드디어 결과는 절망뿐이었다.
여기서 이 도살자들은 자기들이 만든 상처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사람마다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여,1166) 치료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불안이 끼어들었다. 참으로 "나는 시간을 더 들였어야 할 것을 나는 정성이 부족했다. 나는 소홀해서 잊어버린 것이 많다. 내가 부주의해서 잊어버렸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다."라고 하는 새로운 고통이 가망 없는 영혼들을 혹독하게 책망했다.
그들은 이런 고통을 감하려고 또 다른 약을 사용했다. 너의 태만함을 회개하여라. 완전한 부주의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상처를 감싸지 못하며, 고통을 덜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꿀을 탄 독약같이, 처음 맛보기에는 불쾌하지 않으나 모르는 사이에 깊이 침투한다. 그러므로 "너의 모든 죄를 고백하라."고 하는 무서운 소리가 항상 그를 압박하고 귓속에서 울린다. 확실한 위로가 아니고는 이 공포심을 진정시킬 수 없다.
여기서 독자들은 생각해 보라. 일 년 동안에 한 모든 행동을 어떻게 계산할 수 있으며, 매일 지은 죄를 어떻게 함께 모을 수 있겠는가? 하루에 한 실수만을 밤에 생각하더라도 기억이 희미할 것이다. 우리에게 밀려드는 죄의 수와 종류는 그렇게 많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교적 중대한 죄를 서너 개 눈여겨보고는 이 고백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따위의 야만적이고 우둔한 위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기를 검토해서 압박됨을 느끼며,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하나님일까 보냐"라고(요일 3:20)한 요한의 말까지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한 지식을 가지신 심판자를 보고 그들은 떤다.
18. 완전한 고백을 요구하는 데서 오는 악영향
더욱이 이런 무서운 독약에 아첨하는 말을 섞어 많은 사람들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그들은 그런 감언이설이 하나님을 만족시킨다거나 심지어 자기들까지도 참으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는 대양 한복판에서 닻을 내리고 일시 항해를 정지한 것이나 지쳐서 길가에 주저앉아 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이 점을 증명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누구든지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이 스스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어떤 법인가를 요약해서 말하겠다. 첫째로, 그것은 전혀 실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멸망시키며 정죄하며 당황하게 만들며 파멸과 절망에 떨어뜨릴 뿐이다. 다음으로, 이 법은 죄인들에게서 자기의 죄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빼앗음으로써 그들을 하나님과 자기를 모르는 위선자로 만든다. 참으로 그들은 죄를 일일이 열거하는 데 온 정신이 팔려서, 자기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죄의 수렁과 비밀한 죄와 그 추악성을 잊어버린다. 이것을 알았다면 특히 자신의 비참함을 절실히 깨달을 것이다. 고백에 대한 확실한 지도 원리는 우리의 이해력이 우리의 죄의 심연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세리의 고백이 이 원칙에 따른 것임을 우리는 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눅 18:13). 그 말은 "저는 말할 수 없이 크고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저의 죄들이 얼마나 큰지를 저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없고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자비의 심연으로 저의 죄의 심연을 삼켜버리소서"라는 것과 같다.
무슨 일인가 라고 물을 것이다. 죄는 하나도 고백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는 간단한 말이 아니면 하나님께서는 고백을 받으시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주의 앞에 우리의 온 마음을 쏟아 놓도록 주의해야 한다. 죄인이라는 한 마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인정해야 한다. 우리의 죄의 오점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종류가 많은가를 잘 알고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불결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의 불결의 성질이 어떠하며, 정도와 종류가 얼마나 넓고 많은가를 고백해야 한다. 우리가 빚진 자라는 것뿐만 아니라 그 빛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며, 얼마나 많은 의무를 지고 있는가를 인정해야 한다. 상처가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얼마나 많은 심한 매를 맞았는가를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아 부은 때에도 아직 죄가 남아 있다는 것과 죄악의 깊은 속은 측량할 수 없다는 것을 죄인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윗과 함께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라고 외치는 것이 마땅하다(시 19:12).
그들은 고백하겠다는 생각이 확실한 때에만 죄가 용서되며, 고백할 기회가 제공됐을 때에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의 문이 닫힌다고 주장하지만 우리는 그 주장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죄의 용서는 과거나 현재나 다름이 없다. 그리스도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다는 말씀을 읽을 때에, 거기에 어떤 고해 신부의 귀에 대고 고백했다는 말씀은 없다. 고백을 받을 신부나 고백제도 자체가 없었으니, 그들은 고백을 할 수도 없었다. 그 후 여러 시대를 지나는 동안 고백 제도는 없었으며, 이런 조건이 없이도 죄는 항상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의심스러운 일을 오랫동안 논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며 영원히 서 있다.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이 말씀에 감히 무엇을 첨가하는 자는 죄를 결박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를 결박하는 자이다.
사건 내용을 듣지 않고서는 재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재판관으로 자처하는 자들이 이 직책을 맡은 것이 우선 경솔한 행동이었다는 것으로써 간단히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 원칙들을 그들은 태연하게 조작하여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들은 매고 푸는 직권이 그들에게 위임되었다고 자랑한다. 마치 그 직권이란 것이 어떤 재판권과 수사권인 것같이 말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교리 전체는 이런 권리가 사도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러나 죄인이 사면을 받았는지를 확실히 아는 것은 사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사면해 달라는 간구를 받으시는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은 죄의 목록을 들어도 그것이 정화하며 완전한지1167)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판을 받을 사람의 말만 듣기로 하지 않는다면, 사면은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사면 처분 전체는 믿음과 회개에 달렸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점은 사람이 사람에게 선고를 내려야 할 때에, 사람이 알 수 없는 일들이다. 따라서 매고 푸는 일의 확실성은 지상의 재판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직무를 합당하게 수행할 때에, 그는 다만 조건부로 사면할 뿐이다. 그러나 죄인들을 위해서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하는 말씀을 하셔서(요 20:23),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으로 약속된 용서가 하늘에서도 인정될까 하는 의심이 그들의 마음에 없게 하셨다.
19. 비밀 고백을 비판함
그러므로 우리가 귓속말로 하는 고백을 공격하며 우리 사이에서 추방하기를 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악한 제도는 여러 가지로 교회에 해를 끼친다. 비록 이 제도가 그 자체로는 무해하다고 하더라도 실지로 그것은 무익하고 무효할 뿐 아니라, 많은 불경과 모독과 과오를 야기했으니, 누가 그것을 즉시 폐지하려고 하지 않을 것인가? 그들은 대단히 유효하다고 해서 어떤 이용 가치를 선전하지만, 그것은 거짓 가치거나 전혀 무가치한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특히 한 가지 이용 가치만을 중시한다. 즉, 고백하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는 것이 큰 벌이되어 죄인은 그 후에는 더욱 주의하게 되며, 스스로를 벌함으로써 하나님의 징벌을 피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각 사람이 최고의 하늘 심판대 앞에 나가서 하나님의 심사를 받으라고 할 때에, 그것은 사람에게 크게 수치를 주며 충분히 그를 겸손하게 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 한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악한 양심에 대한 증인이 되실 때 부끄러워하지 않게 된다면 그 얼마나 이익이라고 할 것인가!1168)
그러나 그들의 선전 자체가 전혀 거짓말이다. 이는 신부에게 고백한 사람들이 입을 닦고 "내가 악을 행치 아니하였다."(잠 30:20)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에, 그들은 아주 대담하게 죄를 짓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일 년 내내 죄 지을 담력을 얻을 뿐 아니라 앞으로 일 년 동안은 고백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거나 정신을 차리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계속 죄에 죄를 거듭하면서 한 번에 모조리 뱉어버리겠다고 생각한다. 그 뿐만 아니라, 뱉어버린 때에는 짐을 벗은 것 같이 생각하며, 신부를 절친한 친구로 만들었으니 심판을 하나님에게서 신부에게 이양하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잊어버리시게 만든 것같이 생각한다. 참으로 어느 누가 고백하러 갈 날을 고대할 것이며, 어느 누가 기쁘고 간절한 마음으로 고백하러 갈 것인가?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같이,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신부들은 아마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악행을 재미있는 일화같이 서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나는 귓속말 고백에 관련된 무수한 몸서리치는 이야기로 많은 지면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하겠다. 저 거룩한 분이1169) 음행에 관한 풍설 하나를 듣고 자기 교회에서 아니 자기 교구민의 기억에서 고백을 제거한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면, 지금같이 수많은 매음과 간음과 근친상간과 음행 방조 사건이 있는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경고를 받는다.
20. 열쇠의 권한에 호소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고해 신부들은 이 목적을 위해 열쇠권이란 것을 주장하며, 그들의 왕국의 배를 전적으로 소위 "이물과 고물"을1170) 그 능력에 의존시킨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러면 열쇠를 주신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말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말씀은(마 18:18) 아무 근거도 없다는 말인가?1171)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포로 돌아가게 할 것인가? 라고 묻는다. 여기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열쇠를 주신 데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이 점은 내가 최근에 설명했고 다시 파문론에서 특히 자세히 논하겠다.1172)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의 이런 요구의 구실을, 그들의 신부들은 사도들의 대리도 아니며 후계자도 아니라고 한 칼로 잘라 버린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이 점도 다른 데서 다루게 될 것이다.1173) 그런데 그들은 방위 태세를 강화하려고 공성 병기를 가설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의 모든 장치를 파괴할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매고 푸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신 것은 성령을 주시기 전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선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에게 열쇠의 권한이 있다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우선 성령이 오셔서 가르치시며 무엇을 할 것인지를 지시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사람은 열쇠를 사용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들은 성령을 가졌노라고 떠들어대지만 실지로는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성령을 어떤 허무한 것,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술책으로 그들은 완전히 패배를 당한다. 그들이 열쇠로 열 수 있다고 자랑하는 문이 어떤 문이든 간에 그들에 대해서는 항상 성령을 가졌느냐, 즉, 열쇠를 판단하며 보관하시는 성령을 가졌느냐고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다시 성령은 잘못된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그들은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말은 하지만 감히 솔직한 대답은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서 매라고 하신 것을 풀며, 주께서 풀라고 명령하신 것을 매는 일을 아무 분별없이 반복하는 신부 따위에게는 열쇠의 권한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21. 사제가 매고 푸는 것은 불확실하다
해당되는 사람이나 해당되지 않는 사람을 분간하지 않고 매며 푼다는 극히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그들의 유죄가 드러나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지식이 없으면서도 권한을 남용한다. 권한을 선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권한 자체는 악한 행사자들에게 부여되었다고 그들은 글에 쓴다. 그러나 그 권한은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것이다(마 16:19, 18:18). 그리스도의 약속이 거짓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권한을 맡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매며 풀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매이거나 풀릴 사람의 가치에 따라서 제한된다고 말하는 것으로써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다. 매이거나 풀리는 데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매이거나 풀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들과 교회에는 이 해당 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복음 전도자는 믿음을 통해서 모든 기독교신자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 멸망을 선언할 수 있다. 이 말씀에 따라서 교회는 "음란 하는 자나…간음하는 자나…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고 선포할 수 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을 맬 때에 확실한 신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시 이 말씀으로 교회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풀어주며 위로한다. 그러나 무엇을 매며 무엇을 풀어야 할는지를 모르는 이 권한, 알지 못하면 매지도 못하며 풀지도 못한다는 이 권한은 대체 무슨 권한인가? 불확실한 사면을 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권위에 의해서 사면하노라고 그들이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이 상상적인 권한이 쓸모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도 불확실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도 상당수의 사제들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과 합당하게 쓰지 않으면 이 권한은 무효라는 것을 인정한다.1174) 그렇다면 나를 풀어주는 사람이 열쇠를 바르게 사용한다고 내게 믿게 할 사람은 누군가? 만일 그가 악한 사람이라면, 그는 허황된 사면을 하는 것이 아닌가? 즉, 그는 "그대에게서 무엇을 매거나 풀어야 할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열쇠를 공정하게 쓸 줄을 모른다. 그러나 그대에게 해당하는 일이 있다면, 나는 그대를 사면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평신도란 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을 차마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교도와 마귀라도 그만한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은 풀어주는 데 대한 확실한 표준인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없으나 그대에게 공로가 있으면 나는 그대를 사면할 권위를 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열쇠는 분간하는 권위요 실행하는 능력이라고 하며, 고문으로서, 즉, 고문으로서 이용하기 위해서 지식이 첨가된다고 설명했을 때에,1175)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배제하고 자기들이 정욕대로 무례히 지배하기를 원한 것이다.
22. 열쇠의 권한을 그릇되게 쓰는 것과 바르게 쓰는 것과의 차이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 의존하는 사면은 언제나 애매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정당한 사역자들도 그 의무 이행에 있어서 적지 않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죄인들의 신앙을 판단할 자격이 없는 사역자 자신이 그들의 사면에 대해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죄인들에게는 아무 위로도 아닌 위로까지도 없을 것이다. 만일 이렇게 항의한다고 해도 여기 대해서는 곧 대답할 수 있다. 그들은 사제가 죄에 대해서 들어 알기까지 죄는 용서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그들의 말에 의하면, 용서는 사제의 판단에 달렸고 그가 용서받을 만한 사람을 현명하게 분간하지 못하면 그의 행동 전체는 아무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들이 말하는 권한은 조사와 결부된 재판권이며, 용서와 사면은 이 재판권에 한정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확고한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사실 밑 빠진 수렁이 있다. 이는 고백이 완전하지 않으면1176) 용서받을 희망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죄인이 죄를 정직하게 말하는지 모르지만, 사제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끝으로 사제들은 너무나 무지하여 그들의 대부분은 구둣방 주인이 밭갈이하는 것만큼도 그 직무에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없다. 나머지도 거의 모두 당연히 자신을 의심해야 할 위인들이다. 이런 데서 교황의 사면에 관한 혼란과 주저가 생긴다. 그것은 그들이 사제라는 사람을 사면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사제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보고와 조사와 증명을 거친 문제에 대해서만 판단을 내리려고 한다.
그런데 만일 누가 이 선량한 선생님들에게 묻기를, 죄를 용서받은 후에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할는지 알 수 없다. 아마 그들은 사제가 방금 낱낱이 들은 죄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선언하든 간에, 비난받을 다른 죄가 아직 남아있는 동안은 그 선언은 효과가 없다고 고백해야 될 것이다. 고백하는 사람의 편을 보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는 사제의 재량에 의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그의 양심이 치명적인 불안에 매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가르치는 교리는 이런 모든 모순이 전혀 없다. 사면은 죄인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신다는 것을 신뢰하며,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서 대속을 구하며, 그가 베풀어주신 은혜로 만족한다면, 그는 이런 신뢰감을 조건으로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령으로서 행동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받은 명령을 죄인에게 전하기 때문에 잘못을 범할 수 없다. 주께서는 친히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셨다(마 9:29, 마 8:13참조). 주님 자신의 이 일반적인 원칙을 교황청에서는 사악한 생각으로 멸시하지만 죄인은 이 원칙에 따라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고 받기만 하면, 이 간단한 조건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죄 사함을 얻을 수 있다.
23. 그릇된 주장을 폭로함
열쇠의 권한에 대한 성경의 교훈을 그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뒤섞어 놓는가를 나는 다른 곳에서 논하겠다고 약속했다. 더욱이 적당한 곳은 교회 행정을 다루는 부분일 것이다.1177) 그러나 내가 독자들에게 기억하기를 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일부는 복음 전파에 관한 것이었고 일부는 파문에 관한 것이었는데(마 16:19, 18:15-18, 요 20:23), 그들은 이 말씀을 불합리하게 왜곡해서 비밀한 고백으로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제가 죄를 인정하며 용서함으로써 행사하는 사면권이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지만, 분명히 이런 원칙은 거짓말이며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에 도움을 주는 사유는 용서에 대한 증언에 불과하며, 이 증언은 복음이 값없이 주는 약속에서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의 규율에 의존하는 다른 종류의 고백은 비밀한 죄와는 상관이 없고, 교회에 대한 공적 범행을 제거하기 위한 징계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만 죄를 고백하거나 평신도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것은 사제가 조사관으로서 관여하지 않고서는 불충분하다고 하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기저기서 증거를 수집한다. 그들의 근면은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고대 교부들이 신자들에게 목자들 앞에 죄의 짐을 풀어놓으라고 충고한 것은 죄를 일일이 고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런 관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롬바르드와 그의 동료들이 너무도 패악해서 왜곡되고 고의적으로 위서를 이용해서 단순한 사람들을 그들의 거짓으로 속이려 한 것 같다. 참으로 그들도 푸는 일은 항상 회개에 동반하는 것이므로 회개한 사람은 아직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사실은 풀린 것이라고 바르게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죄를 용서한다기 보다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은 교활하게 이 "선언"이란 말에 조잡한 오류를 도입해서 교훈을 예식으로 바꿔 버린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용서를 받은 사람은 교회가 보기에도 사면을 얻은 것이라고 첨부한다. 이렇게 그들은 공동 훈련을 목표로 제정된 일을 각 개인이 사용하는 쪽으로 끌어갔으나 원래는 우리가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중대하고 알려진 허물을 저지른 죄를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겸비한 태도에서 타락하고 부패해져서 새로운 용서 방법을 덧붙인다. 즉, 벌과 보속을 명령한다.1178)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께서 항상 단일체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그들의 희생물들이 분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회개와 신앙을 요구하시므로 이 분할 또는 이의는 완전한 모독 행위이다. 이것은 마치 사제가 호민관의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을 상대로 개입하여1179) 우선 호민관 앞에 엎드려 매를 맞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순수한 자비심으로 은총을 베푸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효력이 있기 때문이다.
24. 요약
이 문제 전체의 귀착점은 이것이다. 즉,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이 거짓 고백의 창시자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들의 무익한 노력은 논박을 받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 그들이 여러 가지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들을 고의로 곡해한다는 것을 나는 증명했다. 이 법은 사람이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 명백하므로 나는 그것을 압제자의 악법인 동시에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공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그의 말씀에 붙들어 매시고 사람의 권력에서 풀어 놓으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애되지 않기를 원하신 일을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으로 사람이 규정할 때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는 모독 행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은 죄를 용서하는 데 있고 이 죄를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장 고유한 기능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포악한 제도는 세상이 가증한 야만 세력의 압박 아래에 있었을 때에 도입된 것임을 나는 밝혔다. 여기에 첨부하여 나는 이것이 유해한 악법인 이유를 말하였다. 이 법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현저한 곳에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사람들을 절망적인 상태에 빠뜨리며, 관심이 없는 곳에서는 허무한 감언이설로 쓰다듬고 달래어 사람들의 태만을 조장한다. 끝으로 나는 그들이 제시하는 완화책은 모두 그들의 불경건한 행위를 위장하는 것이며, 순수한 교훈을 혼란하게 하고 모호하고 불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5. 천주교의 교리를 개탄하며 논박함
그들은 고해성사에서 셋째 자리를 보속 교리에 둔다. 우리는 이에 대한 그들의 모든 공허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뒤집을 수 있다. 그들은 회개하는 사람이 과거의 악행을 그치고 행실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며, 그가 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보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보조적인 방법에는 눈물과 금식과 예물과 자선 행위 등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방법들로 우리는 주의 노여움을 풀며, 하나님의 의에 대한 우리의 빚을 갚으며, 우리의 범행에 대한 보상을 치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크신 자비로 죄책을 용서하셨으나, 공의의 법에 의하여 벌을 보류하신다. 보속에 의해서 속량되어야 하는 것은 이 형벌이라고 한다.1180) 이 모든 말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우리의 범행에 대한 용서를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행위의 공로가 그 사이에 끼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공로도 죄의 범죄에 대한 값을 치름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보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에 대해서 나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대립시킨다. 성경에는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이 없다(사 52:3, 롬 3:24-25, 5:8, 골 2:13-14, 딤후 1:9, 딛 3:5). 첫째로, 용서는 순수한 관용에서 주는 선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돈을 받고 영수증을 쓰는 채권자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받지 않고도 친절한 마음으로 기꺼이 빚을 말소하는 사람이 용서하는 것이다. 보속이란 생각을 일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거저"라는 말을 붙이는가? 그러면 그들은 어떤 신념으로 이렇듯 강력한 노호로 때려 부순 보속 교리를 여전히 일으켜 세우는가? 주께서 이사야를 통해서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실 때에(사 43:25), 용서의 원인과 근거는 그의 선하심에서만 찾아야 한다고 밝히 선언하시지 않는가? 또한 온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그의 이름으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행10:43). 이것은 다른 모든 이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용서를 "보속"이란 말로 해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인가? 그들은 보속을 보조 수단으로 도입하는 듯하지만 용서를 보속의 결과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성경에 있는 것은 우리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으며 우리 자신의 것을 주장하지 않으며 다만 그리스도의 위임만 의지할 뿐이라는 뜻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바울이 선언한 것과 같다(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곧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고후 5:21)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법과 이유를 첨부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에 대한 진정한 보속을 제공하며 양심에 평화를 준다. 26-27)
26. 그리스도는 완전한 보속을 제공하셨다
그러나 심히 패악한 그들은 죄의 용서와 화해는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됐을 때에, 단 한 번 있는 일이며, 세례 받은 후에는 보속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는 교회의 열쇠에 의해서 나눠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 나는 불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두 명이 아니고 모든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주 분명히 글로써 자기들의 오점을 폭로하였다. 그들의 선생은1181) 베드로의 교훈에 따라(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을 받으셨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 다음에 그 발언을 시정하는 예외를 덧붙인다. 곧 세례에서 죄에 대한 모든 현세적 징벌이 완화되지만 세례 후에는 회개의 도움으로 더욱 경감되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회개가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1182) 그러나 요한이 한 말은 훨씬 다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요일 2:12). 그는 분명히 신자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죄의 대속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 만한 다른 보속이 없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대들과 단 한 번 화해하셨고, 지금은 그대들 스스로 다른 방법을 강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영원한 변호자인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회복시켜 주시며,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는 영원한 화목 제물이라고 한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이 언제나 진리이기 때문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1:29, 1: 36 참조).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게 하시고 다른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만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므로 그는 죄를 위한 유일한 제물이시며 또한 유일한 화목의 제물이시며, 유일한 보속물이시다. 죄를 용서하는 권리와 권한은 아버지께 고유한 것이며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1183) 이 점에서 그는 아들과 구별되시지만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정도에 둔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맡으시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이루신 속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데, 다만 자신의 보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려고 하는 자들이 화해시키는 영예를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지 않아야 한다.
27. 로마 교회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탈취하며, 양심으로부터 확신을 일소한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고려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의 영광을 완전히 지켜 손상됨이 없도록 하며, 양심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얻어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1184)
이사야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시고(사 53: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게 하셨다고 한다(사 53:5-6). 베드로는 이 뜻을 다른 말로 반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고 한다(벧전 2:24). 바울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음이 되시고 하나님은 그의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고 한다(갈 3:1, 롬 8:3의 융합).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회생 제물이 되시고 그에게 우리의 죄 짐을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죽음의 벌을 모두 지웠을 때에, 그의 육신에서 죄의 세력과 저주는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들의 거짓말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면, 최초의 정화가 있은 후에 우리는 각각 회개에 의한 보속의 분량에 비례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력을 느낀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타락할 때마다 다만 그리스도가 가르친 보속을 회상하라고 한다.
이제 그들의 어리석고 흉악한 주장들을 눈앞에 놓고 보라. 그들은 처음 죄를 용서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은혜만 작용하나, 그 후에 우리가 타락하면 우리의 행위가 함께 작용해서 두 번째 용서를 얻는다고 한다.1185)
이런 원칙들이 성립한다면, 전에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던 기능은 손상됨 없이 여전히 그의 것으로 남아 있을까?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지우며 그를 통하여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 죄의 보상을 치른다고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의 제물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양심을 진정시키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죄는 보속으로도 속해 진다고 들을 때에 양심은 어떤 진정을 얻겠는가? 언제 사람은 보속의 분량에 대한 자신이 생길 것인가?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비하신 지를 항상 의심하며 항상 불안하며 항상 떨 것이다. 사소한 보속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며 죄의 큰 짐을 경시한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 말하겠다.1186) 적당한 보속으로 어떤 죄를 속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일 백 평생의 죄를 위한 보속을 바쳐도 부족하리 만큼 많은 죄에 압도될 때에는,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성경의 말씀이 죄의 용서를 선언할 때에 그 상대는 세례 지망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품안에서 오랫동안 양육을 받아 온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중생한 자녀들이다. 바울이 극찬한 사신의 임무, 즉, 나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는 이 말씀은 외부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중생한 사람들에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 작별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위탁한다. 그가 골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로…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할 때에(골 1:20) 그는 교회가 우리를 받아들인 순간에 이 일을 한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생을 통해서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은 글의 전후 문맥을 보아서 곧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는다고 그는 말한다(골 1:14). 이와 같은 구절들이 자주 나오는데, 그것을 더 많이 인용할 필요는 없다.
(여러 가지 차이점과 반대 의견을 비관적으로 검토함. 28-39)
28. 소죄와 대죄
여기서 그들은 한 도피 수단으로서 어떤 죄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즉, 소죄로, 어떤 죄는 죽을죄라는 대죄로 어리석은 구별을 한다. 대죄를 위해서는 무거운 보속이 필요하고 소죄는 더 쉬운 수단으로 주기도와 거룩한 물을 뿌리는 것과 미사에서 받는 사면으로 속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우롱한다. 항상 소죄와 대죄를 말하면서도 마음속의 불경과 불결을 소죄라고 하는 것 외에는 죄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한다.1187) 그러나 의와 불의의 표준인 성경의 교훈에 따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겔 18:20), 신자들의 죄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죽을죄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며(롬 8:1), 죄가 인정되지 않고 용서를 받아 말소되기 때문이다(시 32:1-2 참조).
그들은 우리의 이 주장을 중상모략하여, 죄들의 동등성에 관한 스토아파의 역설이라고1188) 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입으로 그들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이 대죄라고 하는 죄들 가운데는 비교적 가벼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나는 묻는다. 그렇다고 해서 대죄들은 동시에 다 같다는 결론이 곧 나오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율법에 대한 순종은 생명의 길이며(레 18:5, 겔 18:9, 20:11,13, 갈 3:12, 롬 10:5, 눅 10:28 참조) 법을 어기는 것은 죽음이라는(롬 6:23, 겔 18:4,20 참조) 정확한 언급이 있으므로 그들은 이 선고를 회피할 수 없다. 죄가 이렇게 많이 쌓여 있는데, 그들은 보속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 것인가?
한 가지 죄를 보속하는 데 하루가 필요하다면, 이 일을 생각하는 동안에 더 많은 죄를 짓는다. 가장 의로운 사람도 여러 번 넘어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잠 24:16 참조). 죄들을 보속하겠다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동안에도 많은 죄를 무수히 많은 다른 죄를 짓는다. 이렇게 죄를 보속할 수 있다는 보증이 제거되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주저하는가? 어떻게 감히 보속을 하겠다고 여전히 생각하는가?
29. 죄의 용서는 벌의 면제가 포함된다
그들이 몸을 빼려고 애쓰나 널리 알려져 있듯이 "물은 떨어지지 않는다."1189) 그들은 죄와 벌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죄책이 용서되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의가 요구하는 벌은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보속은 원래 벌을 면제받는 것과 관계된 것이라고 주장한다.1190)
이 얼마나 경박한 짓인가! 그들은 죄책의 용서는 값없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 벗을 위해서는 기도와 눈물과 그 밖의 각종 준비를 해야 된다고 거듭 주장한다. 그러나 죄의 용서에 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모두 이런 구별과 완전하게 반대된다.
나는 이미 이 점을 충분할 정도로 증명했다고 믿지만, 다른 증언들을 첨부해서 이 꿈틀거리는 뱀들이 다시는 꼬리도 사리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으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시지 않겠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다(렘 31:31, 34). 이 말씀의 의미를 다른 예언서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에서 배울 수 있다.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고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4),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1-22, 27 참조). 그들의 의로운 행실을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그들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그 행실들을 마음속에 새겨두는 일은 하시지 않겠다는 뜻과 사실상 같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은 죄에 대한 벌을 요구하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같은 뜻을 표시하는 다른 말씀들도 있다. "등뒤에 던지셨나이다"(사 38:17),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 같이…도말 하였으니"(사 44:22),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미 7:19),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우리가 이런 말들에 주의한다면, 거기에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설명하시려는 의미가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신다면 그것을 우리의 책임으로 계산하신다. 벌을 주신다면 죄를 기억하고 계신다. 재판에 붙이신다면 숨기시지 않는다. 죄의 가볍고 중함을 고려하신다면 등뒤로 던지시지 않는다. 검토하신다면 구름같이 쓸어버리시지 않는다. 죄를 드러내신다면 깊은 바다에 던지시지 않는다. 어거스틴도 분명한 말로 이 점을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으셨다면 죄를 보시지 않으려고 하신 것이다. 죄에 주의하고자 하시지 않았다면 벌하지 않으시려고 한 것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무시하시기를 원하셨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무엇 때문에 '죄를 덮었다'고 하시는가? 죄가 보이지 않게 만드시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보심은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191)
그러나 예언서의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어떤 법에 의해서 죄를 용서하시는가를 듣기로 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예레미야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이 말씀들의 뜻을 간단히 알아보고 싶은가? 한편으로 주께서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욥 14:17), 불의가 "봉함 되었고"(호13:12), 또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새겨 졌거늘"(렘 17:1)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런 어귀들은 벌을 내리시리라는 뜻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주께서 이와 반대되는 말씀들로 모든 벌을 용서하신다고 확언하신 것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나는 독자들이 내가 붙인 설명에 주의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기를 간절히 바란다.1192)
30. 그리스도의 특별 희생만이 벌과 죄책을 제거할 수 있다
나는 만일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 여전히 필요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가 나무에 달려 우리의 모든 죄를 그의 몸에 지셨다고 말할 때에(벧전 2:24), 우리는 그가 우리 죄에 해당한 벌을 받으셨다는 의미로 말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이 점을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사 53:5)라는 더욱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하였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계"란 것은 하나님과 화해하기 전에 우리가 받았어야 할 벌이 아니고 무엇인가?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죄에 대한 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을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죄에 대한 벌을 당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에 그것을 보통 구속(ajpoluvtrwsi")이라는1193) 말로 부른다(롬 3:24, 고전 1:30, 엡 1:7, 골 1:14 참조). 바울은 단순히 보통으로 이해하는 그런 의미의 구속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구속하기 위한 대가와 보속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속전으로서1194) 자기를 바치셨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딤전 2:6). "주님 앞에서 화해란 것은 회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회생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하여 드리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어거스틴은 묻는다.1195)
그러나 죄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에 확정된 것이 우선 우리에게 든든한 강력한 무기를 제공한다. 거기서 주께서는 이러 저러한 모양의 배상을 정하시지 않고 제물을 드려 완전한 대가를 치르라고 요구하신다.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모든 속죄의 의식을 극히 자세하게 또 엄격한 순서로 결정하신다(출 30:10, 레 4:1-7, 16, 민 15:22이하). 여호와께서는 전혀 죄에 대한 배상을 행위로 치르라고 명령하시지 않고 속죄의 제물만을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은 그의 심판을 무마하는 한 가지 보속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제물은 사람의 행위로 인정되지 않고 그 본질에 따라서, 즉, 그리스도의 특별한 회생에 따라서 판단되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어떤 배상을 요구하시는가를 호세아(Hosea)는 간단하게 웅변적으로 표현하였다.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라고 했으니, 이것은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라고 했으니(호 14:2), 이것은 참으로 보속을 의미한다.
그들이 더욱 교묘한 도피 수단을 강구해서 영원한 벌과 일시적 벌을 구별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일시적 벌을 해석하여 영원한 죽음을 제외한 모든 벌, 즉, 하나님께서 몸이나 영혼에 내리시는 모든 벌이라고 하지만, 이런 제한은 그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인용한 구절들이 명백하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책을 용서하심으로써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을 면제하신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다윗과 다른 예언자들은 죄의 용서를 빌 때마다 동시에 벌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한다.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빌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들은 주의 자비를 약속할 때에, 거의 항상 벌과 사면에 대해서 가르친다. 바빌론 포로 생활을 종결시키시겠다고 에스겔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에, 주께서는 그것이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신다(겔 36:22, 32). 이 말씀은 확실히 두 가지를 다 값없이 주신다는 뜻이다. 끝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책을 면하게 된다면 죄책에서 생기는 벌도 반드시 없어질 것이다.
31. 그릇된 해석을 폭로함 : 하나님의 심판에는 형벌적인 것과 교정적인 것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성경에 있는 증언들로 무장하고서 어떤 논거를 제시 하는가를 보기로 하자. 그들은 다윗이 선지자 나단에게 간음과 살인에 대한 책망을 듣고 죄를 용서받았지만, 간음으로 인하여 태어난 아들이 죽음으로써 후에 벌을 받았다(삼하 12:13-14)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용서된 후에도 받지 않을 수 없는 벌에 대해서 보속으로써 배상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에게 자선사업으로 죄에 대한 배상을 하라고 권하였다(단 4:27). 솔로몬은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기록하였고(잠 16:6), 다른데서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하였다(잠 10:12). 베드로도 이 견해를 인정한다(벧전 4:8). 누가복음에서 주께서는 죄인인 여인에 대해서 같은 뜻으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1196)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그들의 판단은 항상 이렇게도 패악하며 완고하다. 하나님의 심판에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관찰했다면 또 이것은 무시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윗에 대한 이 책망에 포함된 벌은 보복과는 훨씬 종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책망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징계의 목적을 깨닫기 위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징계가 하나님께서 불경한 자들과 버림받은 자들을 진노로 추궁하시는 것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알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는 충분한 이유를 근거로 문제 전체를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는 보복의 심판, 또 하나는 징계의 심판이 라고 부르겠다.
보복의 심판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신다. 즉, 그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며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시며 흩뜨리시며 좌절시키신다. 그러므로 이것은 보복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며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결합된 벌이다.
징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엄하심은 노여움에 이르지 않으며, 멸망시키려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벌이나 보복이라기보다 교정이나 경고이다.
하나는 재판관의 행동이며, 또 하나는 아버지의 행동이다. 재판관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그의 범행을 헤아려 범죄 자체에 벌을 가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을 엄격하게 징계할 때에는 복수나 학대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르치며 더 조심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이와 조금 다른 비유를 사용하지만, 결국 같은 뜻을 말한다. "아들도 채찍으로 맞고 노예도 맞는다. 그러나 노예는 죄에 대한 벌을 받고, 아들은 훈계를 받아야 할 자유인과 아들로서 징계를 받는다. 아들에게는 교정이 시련과 개선이 되며, 노예에게는 응징과 벌이된다.1197)
32. 하나님의 보복의 심판과 징계의 심판은 목적이 전연 다르다
이 문제 전체를 속히 요약하기 위해서 두 가지 차이점 중의 첫째 것을 들겠다. 벌이 보복인 때에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나타나며, 신자들에 대해서는 그런 것을 결코 내리시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징계가 하나님의 축복이며, 그의 사랑을 증거한다는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같다(욥 5:17, 잠 3:11-12, 히 12:5-6).
이 구별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통해서 충분히 지적되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현세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이를테면 일종의 지옥의 통로를 우리에게 묘사해 보이며, 거기서 그들은 자기의 영원한 저주를 이미 멀리 바라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생활을 고치거나 유익을 얻는 것이 아니고, 이런 초보적인 경험이 도리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무서운 음부를 위한 준비가 된다.
주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엄하게 징계하시지만 죽음에 내어주시지는 않는다(시 118:18).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채찍으로 맞은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하였고 자기들의 진정한 교육을 촉진시켰다고 고백한다(시 119:71). 우리가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성도들은 벌을 받을 때에 평온한 마음으로 임했으며, 항상 첫째 종류의 벌을 면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예레미야는 말한다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옵소서 주께서 나로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렘 10:24-25). 그뿐 아니라, 다윗은 "여호와여 주의 분으로 나를 견책하지 마옵시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라고 한다(시 6:1, 38:2).
그리고 주께서 성도들의 죄를 징계하실 때에 그들에 대해서 노하신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때가 많다는 사실에는 모순이 없다. 이사야서에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그 노가 쉬었고 또 나를 안위하시오니"라고 하는 말씀이 그와 같다(사 12:1). 마찬가지로 하박국에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미가에는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그의 노를 당하려니와"(미 7:9)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당한 벌을 받는 사람은 큰 소리로 불평을 말해도 무익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목적을 생각함으로써 슬픔을 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업을 욕되게 하셨다고(사 47:6, 42:24 참조) 하지만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는 영원히 욕되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또 이것은 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나 성질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엄한 벌을 받는 사람이 느끼는 그 심한 고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을 조금만 엄격하게 벌하며 찌르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처를 입히시므로 그들 자신은 지옥의 벌과 거의 다름이 없는 것같이 느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당연히 그의 진노를 받을 만하며 그래서 그들로서는 자기의 악행을 싫어하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려고 더욱 조심하게 되어, 간절한 마음으로 속히 용서를 비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을 증거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에서 진노보다도 자비를 더욱 분명히 증거하신다.1198) 하나님께서 신실한 솔로몬을 통해서 우리와 맺으신 계약은(삼하 7:12-13) 지금도 여전히 효력이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 이 계약의 효력은 말살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만일 그 자손이 내 법을 버리며 내 규례대로 행치 아니하며 내 율례를 파하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지팡이로 저희 범과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저희 죄악을 징책하리로다 그러나 나의 인자함을 그에게서 다 거두지 아니하며"(시 89:30-3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자비를 더욱 확신하게 하시기 위해서 솔로몬의 후손들을 단련하실 때에는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을 사용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삼하 7:14). 하나님께서는 이런 말씀으로 온화하며 친절한 태도를 보여주시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벌을 느끼는 사람들 편에서는 극심한 공포심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암시하신다. 예언서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이 관대한 징계를 중요시하신다는 것을 보이신다.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사 48:10). 은처럼 한다면 너희는 완전히 타버렸을 것이라는 말이다(사 43:2 참조). 주께서는 징계가 주의 백성을 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가르치시지만 백성이 과도하게 지치지 않도록 징계를 완화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대단히 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며 경건 생활에 전심할수록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더욱 민감해지기 때문이다. 악인도 하나님의 채찍을 맞으면 신음하지만, 그는 이 일을 숙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더욱 굳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심판하신 하나님께 대해서 불평을 말하며 반항하며 고함을 지르기 때문에, 그들은 격분과 정신 착란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다. 그러나 신자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경고로 생각해서 즉시 자기의 죄를 깊이 반성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용서를 간절히 구하게 된다. 가련한 영혼들의 이와 같은 고민과 슬픔을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의 진노의 징조만 보이더라도 백 번이나 기절할 것이다.
33. 보복의 심판은 벌하기 위한 것이며 징계의 심판은 개선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에는 둘째 차이점을 보기로 하자. 악인들은 하나님의 채찍을 맞을 때에,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 이미 벌을 받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짐의 진노의 이런 증거를 무시한다고 해서 벌을 면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벌을 받는 것은 바른 정신을 차리게 하시려는 뜻이 아니고, 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심판자시며 처벌자임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녀들이 지팡이로 맞는 것은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에게서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회개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이 일들은 과거보다 미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 뜻을 내 자신의 말보다 크리소스톰의 말을 빌어 표현하려고 한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벌을 내리신다. 과거의 죄를 벌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죄를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를 교정시키시려는 것이다."1199) 어거스틴도 "그대들이 받는 고통과 불평하는 일은 벌이 아니고 약이다. 정죄가 아니고 징계이다. 기업에서 배제되기를 원하지 않으면 채찍도 배제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형제들이여, 온 세상이 불행에 신음하고 있으나, 인류의 모든 불행은 처벌 선고가 아니라, 의약에서 오는 고통이다."라고 말한다.1200) 이 구절들을 인용하기로 정한 것은 내가 이상한 말을 쓴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이 패악한 마음으로 모든 처벌을 멸시하기 때문에 그들의 배반 행위를 자주 책하시며 분노가 섞인 불만을 말씀하시는 뜻도 여기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사 1:5-6). 예언서에는 이런 언급이 가득하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벌하시는 목적이 오직 교회를 겸손하게 만들며 회개시키려는 데 있다는 것을 간단히 밝히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나라를 빼앗았을 때에 그에게 보복의 벌을 내리셨다(삼상 15:23). 다윗의 어린 아들을 빼앗았을 때에(삼하 12:18), 그를 교정하시려고 질책하신 것이다. 바울의 말도 이런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 아버지의 손으로 고통을 받는 일이 있지만, 이것은 우리를 궁지에 빠뜨리기 위한 형벌이 아니라, 가르치기 위한 징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어거스틴은 분명히 우리 편을 든다.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받는 벌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야 된다고 가르친다.
성도들에게는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 벌이 분투와 노력의 기회가 되며, 악인들에게는 죄의 용서가 없으며 불의에 대한 처벌이 된다. 여기서 그는 다윗과 다른 경건한 사람들이 받은 벌을 열거한 다음에, 이 벌들은 그들의 자만을 꺾으며, 이 경험을 통해서 그들의 경건을 단련 내지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한다.1201) 이사야가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손에서 충분히 징계를 받았으므로 그 불의가 용서되었다고(사 40:2) 말한 것은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것이 벌을 치르는 데 달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말을 바꿔 말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는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다. 그 벌이 무겁고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너희는 이미 오랫동안 슬픔에 지쳤기 때문에, 이제는 완전히 자비를 베푸신다는 기쁜 소식을 들을 때가 되었고, 너희 마음이 기뻐하며 나를 아버지로 느낄 때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시며, 그 자식에게 조금 가혹한 벌을 주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을, 비록 그것이 정당하고 엄격한 처사였지만, 후회까지 하신다.
34.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신자는 낙망하지 말라
심한 고통을 받을 때에 신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마음을 무장해야 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렘 25:29),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느끼는 심한 고통이 보복이라고 믿는다면, 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손에 맞아 그를 처벌하는 자를 심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진노와 적의로 밖에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채찍을 저주와 영원한 정죄라고 해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은 아직도 자기를 벌하실 생각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채찍을 받아 결국 유익을 얻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죄에 대해 노하시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자비하시며 인자하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가 자기의 경험에 대해서 불평을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생길 것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시 88:16). 또 모세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라고(시 90:7-9) 한 것과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다윗은 신자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징계에 의해서 압박보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징계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여호와여 주의 징벌을 당하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시 94:12-13). 참으로 하나님께서 불신자들을 아끼시며 그들의 범죄를 무시하시면서, 자기 백성에게는 더욱 엄격하신 듯할 때에, 그것은 어려운 시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위로를 받아야 할 이유를 첨부한다. 즉, 율법으로 훈계를 받는다고 한다. 이 훈계에 의해서 신자들이 바른 길로 돌아갈 때에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불경건한 자들이 제멋대로 과오에 돌입하는 결과는 지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리라고 한다. 그 벌이 영원한 것인지 또는 현세적인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다.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과 질병이 악인들에 대한 주의 진노와 보복의 수단으로서 주어지게 될 때에는 영원한 죽음의 심판 자체에 못지않은 하나님의 저주이다.
35. 다윗이 받은 벌
하나님께서 다윗을 벌하신 목적을 이제 모든 사람이 다 안다고 나는 믿는다. 즉, 살인과 간음을 하나님이 노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하시는 충실한 종이 이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 대단히 노하신다고 선언하심으로써 다윗이 감히 다시는 이런 범죄를 하지 못하도록 가르치고자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에게 어떤 배상을 하도록 하기 위한 벌이 아니었다. 주께서 한 교정책으로서 무서운 전염병을 그의 백성에게 보내신 것도(삼하 24:15) 이렇게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인구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죄책을 거저 용서하셨지만, 이런 죄를 벌하는 것이 모든 시대에 본을 보이며 다윗의 교만을 깨기 위하여 합당한 처사라고 보셔서, 다윗을 채찍으로 심히 냉혹하게 징계 하셨다.
인류의 보편적인 저주에 대해서도(창 3:16-19 참조) 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은혜를 받은 후에도 우리의 처음 조상이 죄에 대한 벌로서 받게 된 그 모든 고통을 당할 때에, 우리는 이런 시련에 의해서 경고를 받는 것으로, 즉,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어기는 우리의 죄에 대해 얼마나 심히 노하시는가 하는 경고를 받는 것으로 느낀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가련한 처지를 생각하고 낙심하며 겸손하게 되어, 더욱 간절히 진정한 행복을 구한다. 현세에서 당하는 재난이 우리의 죄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연 어리석은 짓이다. 크리소스톰도 이런 뜻으로 기록했다고 나는 본다.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목적이 악행을 계속하는 자들을 회개시키는데 있다면, 회개한 후에는 벌이 이미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120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성질에 따라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더 엄하게 다루시고 어떤 사람은 더 친절하고 관대하게 다루신다. 따라서 얻어맞고도 죄를 그치지 않는 백성에 대해서는 그 굳고 완고한 마음을 책망하셔서(렘 5:3), 자기가 내리는 벌은 가혹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에브라임은 한쪽은 익고 한쪽은 익지 않은 번병과 같다고 책하신다(호 7:8). 교정이 그들의 마음속에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 죄를 익혀내어 용서를 받을 수 있게 만드시겠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은 누구든지 회개하기만 하면 곧 관대하게 대하시리란 것을 보이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엄격하게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의 완고한 태도가 그에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자진해서 고치면 그 엄격한 처사는 없어질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이 굳고 무지하여 징계가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지극히 현명하신 아버지께서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한 공통된 채찍으로 일평생 훈련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보셨다.
그러나 그들이 다윗의 예만 보고 많은 다른 예에 대해서는 아무 감동도 느끼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값없이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을 그들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세리가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는 말씀이 성경에 있다(눅 18:14). 거기는 아무 벌도 따르지 않았다. 베드로도 용서받았다(눅 22:61). 암브로시구스가 말한 것과 같이, 그가 울었다는 말씀은 있어도 속죄물을 바쳤다는 말씀은 없다.1203) 중풍병자는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마 9:2) 벌은 받지 않았다. 성경에 기록된 사면은 모두 값없이 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법칙은 특별한 양상을 가진 한 가지 예에서 취할 것이 아니라 빈번히 나타나는 이런 예들에서 찾아야 한다.
36. 벌에 대한 보속으로서의 선행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간하여 공의를 행함으로써 죄를 속하고 빈민을 긍휼히 여김으로써 죄악을 속하도록 설득했을 때에(단 4:27), 그는 그 공의와 긍휼을 하나님께 대한 화해의 제물과 벌에 대한 배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피 이외에 다른 몸값이1204) 있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라! 다니엘이 "속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말이 아니고 사람에 관한 말이다. 그의 뜻을 바꿔 말한다면 "오 왕이여, 당신은 지금까지 부정을 하였으며 포악한 지배를 했으며, 낮은 사람들을 압박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강탈했으며, 백성을 가혹하고 부당하게 다루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불법 징수와 포악과 압박을 제거하고, 그 대신에 긍휼과 공의를 행하십시오."라는 것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한다(잠 10:12).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 절을 전부 인용한다면,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는 것이다(잠 10:12). 대조법을 상용한 그는 여기서도 미움에서 생기는 악한 일들과 사랑에서 생기는 결과들을 대조시킨다. 그의 뜻은, 서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서로 물고 빼앗고 비난하고 손해를 입히고 매사에 트집을 잡지만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많은 일을 숨겨주며 보지 않는 체하며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허물을 옳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관대하게 보며 비난으로 악화시키지 않고 충고로 고쳐준다는 것이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인용하는 취지도 확실히 여기 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 말씀의 품위를 저하시키며 뜻을 간교하게 곡해한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벧전 4:8 참조).
솔로몬이 "인자와 진리로 인하여 죄악이 속하게 되고"라고 가르친 것은(잠 16:6), 하나님 앞에서 죄 값을 치른다든지, 또는 하나님께서 이런 보속으로 화해하시고 내리시려고 하던 벌을 용서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정신으로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악을 버리고 경건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에 대해서 자비를 베푸시리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죄가 그칠 때에 주의 진노도 진정되며 심판도 그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솔로몬은 용서의 원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치고 진정한 회심의 수단을 묘사한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사랑의 실천을 기뻐하시는데, 위선자들은 회개하지 않고 아우 소용도 없는 거짓된 예식을 하나님 앞에서 강행하는 것을 예언자들이 자주 비난하는 것과 같다. 히브리서의 저자도 같은 식으로 친절과 인정을 찬양하여 이런 제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생각하게 한다(히 13:16). 그리스도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접시를 깨끗하게 하는 데만 유의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무시하는 것을 비웃으시며, 구제를 함으로써 모든 것을 순결하게 만들라고 가르치셨을 때에(눅 11:3941, 마 23:25 참조), 속죄를 하라고 역설하시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오히려 주께서는 어떤 종류의 순결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우리는 이 말씀을 다른 곳에서도 논하였다.1205)
37. 죄인이었던 여인
누가복음에 있는 구절에 관해서는(눅 7:36-50), 주께서 제시하신 비유를 건전한 정신으로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대해서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않을 것이다. 바리새인은 주께서 그 여인을 선뜻 용인하셨으나 누구인지는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죄인인지를 알았다면 용납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이렇게까지 속는 그리스도는 예언자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주께서는 자신이 용서해주신 그 여인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빚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이러므로…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1-47). 이 말씀은 그 여인의 사랑이 사죄의 원인이 아니고 증거라고 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은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받은 사람과 비교한 것이다. 그 사람이 탕감받은 것은 많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이 비교는 다음과 같이 적용 되어야한다. 즉, 너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죄가 용서를 받았으니, 지금은 죄인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죄의 용서를 받고 그 고마움을 표시하는 저 여인의 사랑을 보고서 너는 당연히 그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귀납법인 증명, 즉, 결과적인 증거에 의해서 어떤 일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주께서는 그 여인이 어떻게 용서를 얻었는가에 대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라고 분명히 증거하셨다(눅 7:50).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사랑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증거한다.
38. 천주교회 교리는 교부들의 권위를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고대 저술가들의 책에 널리 나타나 있는 보속설은 나의 생각을 움직이지 못한다. 사실 그 중의 어떤 사람들은 저술이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은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으리만큼 이 점에서 타락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너무 날카롭고 귀에 거슬리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새로운 보속설 변호론파들이 생각하는 것 같은 의미에서 글을 쓸 정도로 야만적이고 무지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크리소스톰은 이렇게 기록했다. "자비를 간청하는 데서는 조사가 그친다. 자비를 탄원하는 곳에서는 심판이 진정된다. 자비를 구하는 곳에서는 벌은 용납되지 않는다. 자비가 있는 곳에는 심사가 없으며, 자비가 있는 곳에서 받는 대답은 용서된다."1206) 이런 말은 아무리 곡해된다 해도 스콜라 학자들의 주장과는 결코 부합될 수 없다. 어거스틴이 저술한 교회의 교리(The Dogmas of the church)라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다. "회개를 통한 보속은 죄의 원인을 끊어버리며 그 원인들의 시사를 허용하지 않는다."1207) 이 말을 보면 지은 죄에 대해서 갚는 것이 보속이라고 하는 주장은 고대에도 일반적으로 조소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이 그때에 보속을 후에 조심해서 죄를 짓지 않는 것과 항상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크리소스톰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앞에서 울면서 죄를 고백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고1208) 한 말을 나는 인용하지 않겠다. 이런 말은 그의 글과 다른 사람들의 글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어디선가 자선 사업은 "죄를 용서받는 방법"이라고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말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그는 다른 곳에서 이 항의에 대답한다. "그리스도의 육신은 우리의 죄를 위한 유일하고 진정한 회생이다. 세례에서 완전히 소멸된 죄뿐 아니라, 그 후에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잠입하는 죄까지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매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호소한다(마 6:12). 그리고 저 유일한 회생을 통해서 죄는 용서된다."1209)
39. 스콜라 학자들은 교부들의 교훈을 부패시킨다
그런데 그들은 대개 보속을 하나님에게 치르는 보상이라고 하지 않고 파문 선고를 받은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들어오고자 할 때에 행하는 일반적 증언이며 그 증언에 의해서 자기들의 회개를 교회에 확증하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에는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모종의 탄식과 그 밖의 의무를 지워서, 참으로 진심으로 이전 생활을 미워한다는 것을, 또 이전 행동을 완전히 잊어버리고자 한다는 것을증명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대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보속을 치렀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편람(便覽, Enchiridion)에서 라우렌티우스(Lauremtius)에게1210) 이 점을 바로 이런 말로 표현했다. 이와 같은 고대 의식이 현재 사용되는 고백과 보속의 근원이다. 이 훌륭한 형식의 그림자도 남지 못하게 한 무리는 참으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겠다(마 3:7, 12:34 참조).
어떤 고대 저술가들이 때로 다소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한 것을 나는 안다. 또 내가 이미 말한 것과 같이1211) 그들이 잘못한 것 같다는 것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 군데 오점이 있는 그들의 글을 이 사람들이 불결한 손으로 만질 때에는 전부가 더러워지고 만다. 또 교부들의 권위에 의해서 논쟁해야 된다면,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어떤 교부들인가? 그들의 지도자인1212) 롬바르드가 그의 편찬을 만들기 위해서 인용한 저술가들의 대부분의 저술은 수도승들의 무의미한 광적인 발언을 모은 것이고 이런 발언들이 암브로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크리소스톰 등의 이름으로 유포되어 왔다.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증거의 거의 전부를 어거스틴의 책 회개에 대하여(On Repentance)에서 취했다. 이것은 어떤 열광적인 문필가가 필자의 우열을 묻지 않고 되는대로 끌어 모아 서툴게 꿰매어 놓은 것이다. 저자를 어거스틴이라고 하지만, 다소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그의 저술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1213) 내가 스콜라 학자들의 미련한 행위를 명백하게 검토하지 않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나는 독자의 짐을 덜고자 한다. 그들이 지금까지 신비스러운 비밀이라고 자랑한 것을 폭로해서 웃음거리로 만들며 그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 칭찬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건설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냥 지나가겠다.
제 5 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1214)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1215)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1216)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1217)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1218)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참조).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1219)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1220)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1221)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 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1222)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참조).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참조).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1223)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참조).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참조),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1224)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1225)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연옥설 지지용으로 인용된 구절들을 바로 해석함으로써 연옥설을 반박함. 6-10)
6. 연옥설은 논박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도끼로 이미 그들의 "연옥"을 쪼개고 베고 송두리째 넘어뜨렸으므로 이제 더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 연옥 문제를 모르는 체하고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는 분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이 문제에서는 맹렬한 충돌이 생길 뿐이고 덕을 세우는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1226) 나는 그 심각성이 중대하지 않다면 이런 무가치한 것은 무시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그러나 연옥설은 많은 신성 모독으로 구축된 것이며, 매일 새로운 모독으로 지탱되며, 여러 가지 중대한 죄악을 선동하고 있으므로 도저히 묵인할 수 없다. 대담하고 경박한 자들이 호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과는 별도로 연옥을 구상했다는 사실을 혹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또 사람들은 연옥을 간교한 사탄이 조작한 일종의 "계시"로 믿었으며, 이 생각을 확립하기 위해서 무지한 자들이 성경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했다는 사실을 일시적으로 숨길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환난의 비밀한 곳에 침입하려는 인간의 무엄한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용인하시지 않는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죽은 자들에게서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엄격히 금지하셨다(신 18:11). 그의 말씀을 불결하게 타락시키는 것도 허락하시지 않는다.
이런 것은 모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해서 일시 허용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속죄를 구할 때나 보속을 다른 데로 돌릴 때에는 침묵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소리로 옥과 폐에서 나오는 큰 소리로 - 연옥은 사탄이 만들어낸 치명적인 거짓말이라고 부르짖어야 한다. 연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수포로 돌아가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에 참을 수 없는 모욕을 가하며, 우리의 신앙을 뒤집으며 부숴 버린다. 그 자들의 이 연옥은 죽은 후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죄에 대한 보속을 치른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므로 보속이라는 생각이 부서지면 연옥 자체도 송두리째 뽑혀지고 만다. 우리가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피가 신자들의 죄를 위한 유일한 보속과 유일한 속죄와 유일한 정화라는1227) 것이 분명하다면, 연옥은 그리스도에 대한 무서운 모독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연옥을 옹호하기 위해서 매일 모독적인 말을 하는 사실을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연옥이 종교 생활에서 빚어내는 비교적 사소한 죄악들과 이 불경건이 근원이 되어 흘러나오는 그 밖의 무수한 일들도 여기서는 말하지 않겠다.
7. 복음서에 연옥설을 증명하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성경 구절들을 거짓되게 해석하는 습관이 있으므로 우리는 그 구절들을 바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주께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마 12:32, 막 3:28-29, 눅 12:10), 그들은 주께서 동시에 오는 세상에서 어떤 죄는 용서된다는 뜻을 암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1228) 그러나 주께서는 여기서 죄에 대한 죄책에 대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누가 깨닫지 못하겠는가? 그렇다면 그것과 연옥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들은 죄에 대한 벌은 연옥에서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그들의 죄책이 이 세상에서 용서된다는 것을 무엇 때문에 부정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에게 대한 그들의 욕설을 막기 위해서, 더 분명한 논박을 하겠다. 이런 부끄러운 죄악에 대해서는 용서를 받을 희망이 전연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주께서는 그것이 용서를 결코 받지 못하리라고 만 말씀하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더욱 역설하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양심이 현세에서 경험하는 심판과 부활시에 공적으로 내릴 최후의 심판을 구별하셨다. 주의 뜻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악한 반역은 즉각적인 파멸이라고 생각하여 조심하라. 성령이 제시하는 빚을 고의로 끄려고 힘쓰는 자는 죄인들에게 회심할 기회를 주는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끝날에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끝날에는 하나님의 천사들이 양과 염소를 구별할 것이며, 천국에서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 버릴 것이다."(마 22:32-33 참조)이다.
그들은 또 마태복음에 있는 비유를 끌어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5-26).
만일 이 구절에서 재판장은 하나님이고 송사하는 자는 악마요, 관예는 천사요, 감옥은 연옥이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양보하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공정과 화합을 더 절실하게 역설하시기 위하여, 공정과 선한 생각으로 행동하지 않고 율법의 문자를1229) 완고하게 요구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위험과 재난을 자초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신 것이 누가 보든지 명백하다. 그렇다면 연옥은 어디서 볼 수 있을까?
8. 빌립보서와 계시록과 마카비후서에서
하늘에 있는 자나 땅 위에 있는 자나 땅 아래1230) 있는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게 된다고 한 바울의 말에서(빌 2:10) 그들은 증거를 얻으려고 한다. 그들은 "땅 아래"는 영원한 저주에 묶여 넘어간 자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생각이라고 전제하고 따라서 그 말을 연옥에서 고통하는 영혼들에 적용한다. 무릎을 꿇는다는 말로 사도가 진정한 경배를 의미했다면 그들의 추리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단순히 그리스도께 지배권이 부여되어 모든 피조물을 복종시키게 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땅 아래 있는 자"는 마귀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와서 공포와 전율로 심판자를 인정할 마귀들을 의미한다고(약 2:19, 고후 7:15 참조)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 예언을 이와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내가 살았으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롬 14:10-11, 사 45:23).
그러나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계 5:13)라고 한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이렇게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물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말하는 만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성이 없는 것과 무생물도 포함된 것이 확실하다. 이것은 세계의 모든 부분이 하늘 꼭대기로부터 지구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각각 제 모양대로 창조주의 영광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데 불과하다(시 19:1 참조).
그들이 마카비 가문의 역사에서 인용하는 것은(마카비후서 12:43)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성경의 정경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정경으로 인정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선 그는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인정했는가? 그는 "유대인들은 마카비서를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책들에 대해서 주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눅 24:44)고 증거하셨다. 그러나 이 책은 침착하게 읽거나 듣는다면 교회에 무익하지 않다."1231)고 말했다. 그러나 제롬은 아무 주저함이 없이 마카비서의 권위는 교리를 증명하는 데는 무가치하다고 주장한다.1232) 키프리안이 기록했다고 하는 고대의 저술인 신조의 해석에 관하여(On the Exposition of the Creed)를 보면, 마카비서가 고대 교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1233) 또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무익한 논의에 시간을 보내는가? 저자 자신이 끝에 가서 자기가 잘못 말한 것이 있으면 용서해달라고 간청함으로써(마카비후서 15:39), 자신이 충분한 존경을 받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자기가 쓴 글에 대해서 용서를 비는 사람은 확실히 그것을 성령이 하신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유다의 경건을 칭찬하는 이유도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예루살렘에 예물을 보냄으로써 종말의 부활에 대한 굳은 믿음을 보였다는 특색뿐이었다(마카비후서 12:43). 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은 유다의 행위를 구속의 대가라고 부르지 않고 조국과 종교를 위해서 죽은 다른 신자들과 함께 그 죽은 사람들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행동은 미신적인 것이었으며 잘못된 열성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강림 후로 율법에 의한 회생이 없어진 줄 알고 있는데, 그 옛날 관습을 현재까지 연장하려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자들이 하는 짓이다.
9. 고린도전서 3장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강력한 전투 부대를 제공하며, 이 군대는 쉽게 제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들이 인용한 바울의 말은"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고전 3:12-13,15)고 한 것이다. 이것이 연옥의 불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연옥의 불이 더러운 죄를 깨끗이 없애버리고 우리는 순결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대 저술가들 중에는 이 말의 뜻을 달리 해석한 사람이 매우 많다. 그들은 불을 환난 또는 십자가로 보며, 주께서는 이런 것을 통해서 그 백성이 육의 더러움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그들을 시험하신다고 생각하였다.1234) 그리고 이편이 공상적인 연옥보다 훨씬 더 가능성이 있는 해석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들과도 의견을 달리한다. 나는 이 구절을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해석을 소개하기 전에 반대자들에게 사도들과 성자들은 모두 이 연옥의 불을 통과해야 되느냐고 묻고자 한다. 나는 그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리라는 것을 안다. 사도들과 성자들의 공로가 모든 교인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준다고 상상하면서 그들도 연옥을 통과해야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전연 불합리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는 일부사람들의 업적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의 업적이 시험을 받으리라고 언명한다. 이것은 내가 하는 논박이 아니고 그런 해석에 반대한 어거스틴의 주장이다. 또 그들의 해석에는 더욱 어리석은 점이 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행위 때문에 불을 통과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그들이 지극히 성실하게 교회를 건설했다면 그 업적이 불로 시험을 받은 후에 상을 받으리라고 말한다.1235)
우선 우리는 사도가 사람의 두뇌로 고안해낸 주장들을 "나무와 풀과 짚"이 라고 비유적으로 부른다. 이 비유는 나무를 불에 넣으면 곧 타버리는 것과 같이, 이런 것도 시험을 받게 되면 견뎌내지 못하리라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이 하나님의 영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도는 자기의 비유의 줄거리를 따라 각 부분의 상호 관계를 종합하여 성령의 시험을 "불"이라고 부른다. 금과 은은 불에 가까이 두면 둘수록 그 순수성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된다. 그와 같이 주의 진리는 조심스럽게 영적 검토를 거치면 거칠수록 그 권위가 더욱 완전히 확립된다. "나무와 풀과 짚"은 불에 넣으면 즉시 타버린다. 그와 같이 인간의 조작품은 주의 말씀을 토대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에 의한 시험에 견뎌나지 못하고 즉시 몰락하고 소멸한다. 간단히 말하면, 조작한 교리는 "나무와 풀과 짚"과 같이 불에 타버리기 때문에 "나무와 풀과 짚"에 비교되지만 그런 교리를 태워 없애버리는 것은 주의 성령뿐이다. 따라서 교리들을 시험할 불은 성령이다. 이 성령에 의한 시험을 바울은 성경의 통례에 따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고전 3:13). 주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시는 때를 "주의 날"이라고 부른다. 주의 진리가 빛을 나타내는 때에 그의 얼굴이 가장 빛난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불"은 성령에 의한 시험을 의미한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공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은(고전 3:15) 어떻게 저 불을 통과하여 구원을 얻는가? 사도가 어떤 사람들을 겨냥하여 두고 말하는지를 알면, 이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사람들은 합당한 기초 위에 부적당한 재료로 교회를 세운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그들은 신앙의 중요하고 필요한 교리에서는 떠나지 않지만, 덜 중요하고 덜 위험한 교리에서는 곁길에 들어, 자기들이 생각해낸 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섞어 넣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조작품과 함께 그들의 공력까지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것처럼 겨우 구원을 받을 것이다(고전 3:15). 바꿔 말하면 그들의 무지와 망상이 주 앞에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총과 권능으로 그것들이 깨끗이 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의 금같은 순수성을 이 추악한 연옥설로 더럽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10. 초대 교회에 호소하는 것도 로마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교회가 지켜온 극히 오랜 관습이라고 말한다.
이 항의에 대해서 바울은 자기의 시대까지도 판단의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교회를 부적당한 기초 위에 세우는 사람은 모두 그 공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 선언한다(고전 3:11-15)
그러므로 나의 반대자들이,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과거 1300년 동안 있은 관습이라고1236) 항변하나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어떤 말씀에 의해서, 어떤 계시에 의해서, 어떤 전례에 의해서 그렇게 했느냐고 반문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성경에 증언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거기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의 예를 보더라도 이런 일은 전연 없었다. 애도와 매장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많으나, 이런 기도에 대해서는 일점일획도 볼 수 없다. 문제가 중요할수록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싸들을 위해서 기도한 고대 저술가들도 이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합법적인 전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1237) 그러면 그들은 왜 그런 일을 감히 했는가? 그들은 인간 본성의 약점에 굴복한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한 일은 모방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바이다. 바울이 가르친 것과 같이(롬 14:23), 신자는 양심에 확신이 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특히 기도에서 이 확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들을 강요한 것은 다른 이유였던 것 같다. 즉, 그들은 슬픔을 덜어줄 위로를 구했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자기들의 사랑을 하나님 앞에서 표시하지 않는 것은 몰인정한 것같이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을 가지는 것이 인간성이란 것은 누구나 체험으로 아는 일이다.
또 일반적으로 공인된 풍습이 불붙은 나무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모든 이교도들 사이에 옛날부터 죽은 자를 위한 의식이 있었고 매년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정결케 하는 의식이 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사탄은 이런 술책으로 우둔한 인간들을 속였지만, 그는 바른 원칙에서 그들을 속이기 위한 기회를 얻었다. 즉, 올바른 원칙이란 죽음은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이생에서 다른 생으로 넘어가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미신 자체가 이교도들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정죄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다고 공언하는 내세 생활에 생각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계속 사람들에 뒤지지 않기 위해서, 죽은 사람들이 마치 없어진 것같이 그들을 위해서 의식을 행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여기서부터 저 잘못된 정신이 생겨났다. 장례식이나 연회나 제사에 참석하지 않으면 큰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렇게 그릇된 경쟁심에서 시작한 일이 새로운 것을 추가함으로써 끊임없이 성장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있는 죽은 사람들을 돕는 것이 교황권의 신성성을 표시하는 중요 요지가 되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완전한 위로가 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주장한다(계 14:13). 그리고 그 이유로서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부언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인정에 빠져서 교회 안에 패역한 기도 풍습까지 장려한다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일이다.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고대 저술가 들이 기록한 일은 당시의 사회 풍습과 무지로 인해서 허용되었다는 것 을 쉽게 알 수 있다. 나는 교부들도 오류에 휩쓸려 들었다는 것을 단정한다. 부주의한 경신(輕信)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판단력을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을 읽어보면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권할 때에 그들이 많이 주저한 것을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제단에서 예식을 행할 때에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자기를 기억하라고 간곡하게 요망했다는 것을 그의 참회록(Confession)에서 밝힌다. 이것은 분명히 한 노인의 요구였고 아들은 그것을 성경의 기준에 의해서 시험하지 않고 자기의 자연적인 애정을 다른 사람들이 시인해 주기를 원했다.1238) 그뿐 아니라, 그가 쓴 사자(死者)를 위하여 할 일(The Care to Be Taken for the Dead)이라는 책에는 너무도 많은 의혹이 있어서, 그 냉정한 태도는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미련한 열심을 즉시 꺼버릴 것이다. 이 책에 있는 냉정한 상상들을 읽으면 정성이 있던 사람들도 성의가 없어질 것이다.1239) 이 관습에 대해서 이 책이 주는 유일한 지지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지금까지 있는 관습이니, 멸시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도우려는 것은 경건한 행동같이 생각된다는 점에서는 나도 교회의 고대 저술가들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지켜야 할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을 우리의 기도에 집어넣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해야 하며, 그것은 어떤 기도를 받으시고자 하는가를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나 복음에는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를 허락하는 말씀이 한 마디도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하시지 않은 일을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도를 더럽히는 짓이다.
그러나 우리의 논적들이 고대 교회가 이를테면 그들과 오류의 동지가 된다고 자랑한다면, 나는 거기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고대인들은 죽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버린 것같이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 죽은 사람들에게 대한 기념으로서 기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졌다는 것을 고백하였다. 연옥에 대해서 그들은 확신이 없었고 그것을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우리의 현재 논적들은 그들이 상상해낸 연옥을 하나의 신앙 조항으로 받아들이고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고대인들은 성만찬에서, 죽은 사람들의 일을 하나님에게 형식적으로 간혹 기도했을 뿐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죽은 자들에 대한 관심을 열렬히 추진하며, 끈덕지게 선전함으로써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보다 그것을 우선시킨다.1240)
참으로 고대 저술가들의 증언은 고대에 사용된 죽은 자를 위한 모든 기도를 분명히 부정한다. 그런 증언을 제시하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일례로서 어거스틴이 한 말을 들 수 있다. 육신의 부활과 영원한 영광이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으며, 사람은 죽은 후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면 모두 평안한 휴식을 얻는다고 어거스틴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신자가 예언자와 사도와 순교자들과 똑같이 죽은 후에 즉시 복된 휴식을 얻는다고 증거한다.1241) 그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면 우리의 기도는 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나는 묻고자 한다.
그들이 단순한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한 유치한 미신에 대해서 나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다. 이런 미신은 무수히 많지만 그 대부분이 너무도 괴상해서 도저히 점잖게 꾸밀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의 무지몽매를 이용해서 그들이 비열한 장사를 하며 그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도 나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이야기는 끝이 없을 것이며 그들의 추악상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선량한 독자들은 양심을 바로잡는데 필요한 것을 충분히 얻었을 것이다
제 6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 : 첫째로 성경은 어떤 논거로 우리에게 이 생활을 주장하는가?
1. 논설의 의도
이미 말한 바와 같이1242) 중생의 목적은 신자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의와 신자의 순종 사이에 조화와 일치를 나타내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받은 자녀로서의 자격을 더욱 확고하게 하려는 데 있다(갈 4:5, 벧후 1:10 참조).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 안에 그분의 형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 신선한 힘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둔하여 많은 자극과 도움이 필요하므로 진심으로 회개한 사람들의 열성이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토대로 생활을 설계하는1243) 것이 유익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떻게 규제할 것이냐를 서술함에 있어서 나는 문제의 내용이 복잡 다양한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 중대성으로 보아서, 만일 자세히 논하려면 방대한 저서가 될 것이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한 훈계를 기술하는 데도 옛날 교부들은 무수한 말을 한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 마디도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한 가지 덕목에 대해서 권장하려고 해도 재료가 풍부하기 때문에 자세히 논하지 않을 수 없고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것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생활지침을 제시하려고 하지만 개개의 덕목을 상술하거나 여러 가지 충고를 하는 등의 탈선을 할 생각은 없다. 이런 것은 다른 분들의 글에서, 특히 교부들의 설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정리된 생활로 인도될 수 있는가를 경건한 사람에게 보여주며, 그의 각종 의무를 결정할 어떤 보편적인 준칙을 간략하게 규정하는 것으로 나는 만족하겠다. 열변을 토할 기회가 있을는지 모르나, 내게 적당하지 않은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다. 나는 원래 간결한 것을1244) 좋아하며 더 많이 말한다고 해도 성공하지 못할는지 모른다. 더 길게 가르치는 것이 많은 환영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그뿐 아니라, 이 저서의 계획으로 보아서, 교리의 단순한 개요를 가급적 간단하게 제시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바른 것과 고상한 것의 한계를 정하고, 거기서부터 개개인의 의무와 수다한 덕목을 끌어낸다. 그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는 이 문제에 대한 고유의 질서가 있으며, 그 처리 방법이 지극히 아름답고 모든 철학적 방법보다 훨씬 확실하다. 유일한 차이점은, 철학자들은 명예욕이 강했기 때문에 자기의 민첩한 두뇌를 자랑하기 위해서 논술이 지극히 정연하고 명료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솔직하게 가르치셨기 때문에, 어떤 조직적 방법을 정확히 또는 부단히 따르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규정하실 때 그는 우리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암시하신다.
2. 그리스도인 생활의 동기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교훈에는 두 가지 중요한 양상이 있다. 첫째는, 우리의 본성에는 의에 대한 사랑이 전연 없지만, 그것이 우리 마음속에 주입되고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의에 대한 열의를 가지게 된 우리가 정처 없이 방황하지 않도록 준칙을 정하라는 것이다.
성경에는 의를 권장하는 심히 많고도 훌륭한 비유가 있다. 그 중에서 얼마는 이미 다른 곳에서 보았고 여기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겠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므로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는 경고의 말씀이 있다(레 19:2, 벧전 1:15-16). 의의 기초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는 길을 잃은 양들같이 흩어져서 이 세상의 미로를1245) 헤매고 다녔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모으셔서 자신과 만나게 하셨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이 그 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교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지 않고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게 굳게 결합되어야 하며, 그 결과로 그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주입되어 그가 부르시는 곳으로 우리가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악이나 불결과는 아무 접촉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그의 영광의 가장 특이한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표는 이것이라고 가르치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고자 하면 우리는 항상 이 목표를 주시해야 한다고 한다(사 35:8, 기타). 세상의 사악과 부패에 잠겨있던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에도 평생 거기서 주저앉아 있다면, 구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주의 백성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거해야 한다는 충고가 있다(시 116:19, 122:2-9 참조). 주께서 이 도성을 자신의 것으로 성별하셨으므로 주민의 불결로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막에 유할 자는 흠이 없고 의를 구하는 자라고 하였다(시 15:1-2, 24:3-4). 이는 그가 거하시는 성소가 마구간 같이 오물이 가득하다는 것은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가장 강렬한 동기를 그리스도 인격과 그의 구속 행위에서 얻는다
성경은 우리를 더욱 효과적으로 일깨우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셨을 때에(고후 5:18 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형상을 인치시고(히 1:3 참조), 우리가 그 형상과 같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면 도덕 철학을 철학자들만이 충분히 또 조직적으로 진술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이보다 더 훌륭한 처리방법을 찾아보라고 하자. 철학자들은 우리에게 특히 덕에 대한 교훈을 할 때에, 본성대로 살라고1246) 할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한 근원으로부터 교훈을 이끌어낸다. 또한 우리의 생명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생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기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창조 당시의 본연의 상태에서 타락했다는 것을 가르친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받게 된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세우셨고 우리는 그 모범을 우리의 생활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한 가지일보다 더 효과적인 어떤 것을 요망할 수 있는가? 아니, 이 한 가지 일 이외에 또 무엇이 필요한가? 주께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실 때의 조건은 하나뿐이었다. 즉, 우리의 양자 관계의 유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의에 몸을 바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이에게 반역하는 사악한 배신행위를 할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주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열거하고 그 은혜와 우리의 구원의 각 부분에 대해서 일일이 충고할 계기를 제공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아버지로서 나타내셨으므로 만일 우리가 자녀다운 생활을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감사하지 않는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말 1: 6, 엡 5:1, 요일 3:1).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씻어 정결하게 하셨고 세례를 통하여 그 정결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또다시 타락으로 우리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엡 5:26, 히 10:10, 고전 6:11, 벧전 1:15,1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에 접붙이셨으므로 우리는 그의 지체인 우리 자신에 오점이나 결점을 만들어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특히 주의해야 한다(엡 5:23-33, 고전 6:15, 요 15:3-6).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승천하셨으므로 우리는 세속적 욕망을 버리고 진심으로 하늘을 동결해야 한다(골 3:1이하). 성령께서 우리를 성전으로서 하나님께 바치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를 통해서 빛나도록 주의하며, 추악한 죄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우리의 영혼과 몸은 하늘의 불멸과 퇴색하지 않는 면류관을 받기로 정해졌으므로(벧전 5:4), 우리는 우리의 영과 육을 주의 날까지 순결하고 흠 없이 보존하도록 힘 있게 노력해야 한다(살전 5:23, 빌 1:10 참조). 이런 충고들은 우리의 생활을 건설하는 기초로서 가장 복된 것이다. 철학자들에게 가서 이와 같은 것을 구하려고 해도 무익할 것이다. 그들은 덕을 권장할 때에, 기껏 고상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인간 본래의 존엄성이란 생각을 결코 넘지 못한다.1247)
4.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혀의 문제가 아니고, 가장 깊은 마음의 문제이다
그리스도의 이름과 휘장 외에는 가진 것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 자칭하고 싶은 사람들을 여기서 책망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겠다. 그들은 그의 신성한 이름을 얼마나 염치없이 자랑하고 있는가? 참으로, 복음의 말씀으로부터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체득한 사람이 아니면, 그와의 친교를 가질 수 없다. 사도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교훈을 받지 않은 사람은 그를 올바르게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은 욕망에 속아 썩어가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엡 4:22,24). 그러므로 그들이 복음에 대해서 넓은 지식과 유창한 말주변으로 무엇이라고 지껄이든 간에, 그리스도를 아는 체하는 그들의 태도는 거짓이며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 증명된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고 생명의 교리이기 때문이다. 다른 연구 분야에서는 오성과 기억력만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을 해득하려면 복음이 영혼을 전적으로 점령하고 속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그 곳에서 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1248) 그러므로 아니면서 그런 체하며 자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그 모독 행위를 못하게 하고 교사인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처신하라. 우리는 종교 생활의 근원이 되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이 그 교리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리는 우리의 속마음에 들어가며, 다음에 일상생활이 되며, 우리를 개조하고 동화시킴으로써 복음의 결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철학자들은 철학을 인생의 스승으로 믿기에, 그것을 궤변술로 타락시키는 자칭 철학자들을 볼 때에 격분하여 그들을 철학계에서 축출한다.1249) 당연한 조치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혀끝에서 복음을 굴리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 천박한 궤변가들을 우리가 미워하는 것은 훨씬 더 당연하지 않은가? 복음의 효력은 마음속 가장 깊은 감정에까지 침투해서 영혼 안에 자리를 잡고 인간 전체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철학자들이 하는 충고보다 백 배나 더 심각한 영향을 주어야 한다.
5.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불완전과 노력
나는 그리스도인의 도덕 생활에서는 복음만을 호흡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원해야 하고 이것을 목표로 삼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내가 복음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복음적 완전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완전에서 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모두 교회에서 몰아내야 할 것이다. 목표에 조금은 접근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 사람들을 버린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을 눈앞에 세우라. 우리가 분투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표를 정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한 일들을 일부분은 실행하고 일부분은 우리의 생각대로 버리는 식으로 그 일들을 하나님과 우리가 나눈다는 것은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어디서나 그에 대한 경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성실을 요구하신다(창 17:1, 시 41:12 기타). 이 말은 마음의 진실한 단순성, 아무런 간사함이나 가장이 없는 마음, 두 마음과 반대되는 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올바른 생활의 출발점은 영적인 것이라고 하는 말과 같다. 이 영적인 생활에서는 거룩함과 의로움을 함양하고 체득하기 위해서 마음의 깊은 감정을 진심으로 하나님께 바친다.
그러나 지상 감옥인 육체를1250) 쓰고 있는 동안은 아무도 그것을 밀고 나갈 충분한 힘이나 충분한 열의가 없다. 신자의 대부분은 심히 약해서 그들은 비틀거리며 절름거리며 심지어 기어갈 뿐, 그 움직이는 속도가 아주 느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자기의 미미한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전진할 생각으로 우리가 시작한 여행을 떠나도록 하자. 비록 아주 짧은 거리일지라도 매일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그런 출발은 상서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길에서 다소라도 끊임없이 전진하도록 우리의 노력을 중단치 말아야 한다. 우리의 성공이 사소한 때에도 낙심하지 말라. 원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제보다 오늘이 나으면 무익한 노력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실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우리의 목표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자신의 악행을 변명하지 말고 종점을 향해서 계속 분투노력하라. 우리의 목적은 선한 일에서 평소보다 조금씩 나아 져 드디어 선 자체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생애를 통해서 추구하고 따라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을 벗어버리고 그분과의 완전한 친교에 들어가게 될 때에 만 우리는 거기 도달할 것이다.
제 7 장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핵심 : 자기 부정
(탈속과 자기 부정의 기독교 철학 :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다. 1-3)
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속하였다
인간 생활의 규율을 위하여 가장 잘 마련된 적절한 방법은 하나님의 율법이 제공한다. 그러나 하늘 교사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그 율법에 제시된 준칙과 부합하도록 더욱 명백한 계획에 따라서 인도하는 것을 좋게 보셨다. 그 계획의 출발점은 신자의 의무에 대한 개념인데, 그 의무는 "그들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합당한 예배라는 것이다(롬 12:1). 이것을 근거로 하여,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롬 12:2).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일은 이제부터 우리가 하나님에게 성별되며 바치어져, 금후로는 그의 영광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명상하며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속되게 사용하면 반드시 하나님께 현저한 손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고(고전 6:19 참조) 주의 것이라면 우리가 멀리 피해야 할 오류가 무엇이며, 일생의 모든 행동을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는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가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소유를 잊어버리라.
반면에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지혜와 그의 뜻이 우리의 모든 행동을 주관하게 하라.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우리의 유일하고 합당한 목표로 삼고 생활의 모든 부분이 그를 향하여 경주하도록 노력하라(롬 14:8, 고전 6:19 참조). 자기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배우고 자기의 이성에서 지배권을 빼앗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은 참으로 얼마나 큰 유익을 얻겠는가! 우리의 사욕을 도모하는 것이 우리를 가장 효과적으로 멸망시키는 해독이듯이 유일하고 안전한 피난처는 아무것도 아는 체하지 않으며 아무 일도 자기 힘으로 행하려 하지 않고 주의 인도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모든 능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자기를 떠나는 것이 것을 제일보로 삼으라,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 뿐만 아니라, 모든 육적인 생각을 버린 빈 마음을 하나님의 영이 명하시는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생명으로 들어가는 첫 문이건만, 철학자들은 이 변화를 몰랐다. 바울은 이것을 "심령으로 새롭게 됨"이라고 불렀다(엡 4:23). 저들은 이성만을 사람 안에 있는 지배 원리로 설정하고 이성의 소리만을 따르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생행로를 이성에게만 맡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1251) 이성에게 성령에 양보하며 항복하며 복종하라고 명령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사람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 살며 지배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게 한다(갈 2:20).
2. 하나님께 헌신함으로써 자기를 부정함
여기서부터 두 번째 요점이 나온다. 즉, 우리는 우리의 것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거의 잊어버리고 자신에 대한 걱정은 물론 경시하면서 우리의 열성을 하나님과 그의 계명에 신실히 바치려고 노력한다면, 그것은 위대한 전진을 했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에 대한 근심 걱정을 버리라고 명령할 때에, 성경은 소유욕과 권세욕과 명예욕을 우리의 마음에서 씻어버릴 뿐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에 대한 야심과 갈망 그리고 그 밖의 더 깊이 숨어 있는 해독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일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고1252) 충심으로 느낄 만큼 마음의 자세를 확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것을 모두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길 뿐 아니라, 하고자 하는 것까지도 양심적으로 온통 하나님께 맡길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항상 하나님을 우러러 볼 줄 아는 사람은 동시에 모든 허탄한 생각을 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부정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섬기려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사역의 출발점에서 가장 절실하게 요구하시는 자기 부정이다(마 16:24 참조)
이 자기 부정이 일단 제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것은 우선 자만이나 교만이나 허식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는다. 다음에는 탐욕이나 욕망이나 방탕이나 나약함이나 그밖에 우리의 이기심이 빚어내는 죄악들을 전연 허용하지 않는다(딤후 3:2-5 참조). 이와 반대로 자기 부정이 우리를 지배하지 않는 때에는 가장 추악한 죄악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횡행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보기에는 선한 것이 있다고 해도 타락한 명예욕으로 더럽혀진다. 주의 계명에 따라 자기를 부정하지 않은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친절을 베푸는 예가 있으면, 그런 사람을 내게 보이라. 자기 부정의 심정이 강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선한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칭찬을 받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덕은 덕 자체를 위해서 추구돼야 된다고1253)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안하무인격으로 거만하여 그들이 덕을 추구한 것은 자랑할 기회를 얻으려는 생각이었고 그밖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나타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속 풍조에 아부하는1254) 사람과 이런 교만한 사람들을 모두 아주 불쾌히 여기시고, 그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마 6:2,5,16), 창녀와 세리들이 그들보다 천국에 더 가깝다고 하셨다(마 21:31). 그러나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를 바른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이 얼마나 많으며 얼마나 큰가를 우리는 아직 분명히 설명하지 않았다.
"사람의 영혼 속에는 무수한 죄악이 숨어 있다."고1255) 한 옛말은 옳다. 그리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은 하나뿐이다. 즉, 자신을 부정하며, 자신에 대한 걱정을 버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추구하며, 다만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에 그 일들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다.
3. 디도서 2장에 나타난 자기 부정
잘 정돈된 생활의 각 부분에 대해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간단하나마 더 분명하게 설명을 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바울은 우리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했다. 다음에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하는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장 방해하는 두 가지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째는 불경건인데, 우리의 천성은 이쪽으로 너무나 많이 기울어져 있다. 둘째는 세상 욕심인데, 이것이 미치는 범위는 더욱 크다. 불경건이란 것은 미신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성실한 두려움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세상 욕심은 육의 정욕과 같은 것이다(요일 2:16, 엡 2:3, 벧후 2:18, 갈 5:16, 기타 참조). 이와 같이 율법의 두 돌판에 관련해서 바울은 우리의 본성을 버리며, 우리의 이성과 의지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거부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그는 인생의 모든 행동을 세 부분으로 묶어 둔다. 즉,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이다. 이 가운데서 근신은 정절과 절제뿐만 아니라, 세상 재물을 순결하고 검소하게 사용하며 빈곤을 참는 것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의로움은 모든 사람에게 그가 받아야 할 것을 주는1256) 공정성의 모든 의무를 포함한다(롬 13:7 참조). 다음으로, 경건은 세상의 불법에서 분리된 우리를 하나님과 결합시켜 참으로 거룩하게 만든다. 이런 일들이 서로 결합되어 서로 분리시킬 수 없는 끈으로 묶이게 될 때 완전무결한 상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우리가 육의 이성과 작별하고 우리의 정욕을 제어하며아니, 버린 후일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바치며, 세상의 더러움 속에서 천사의 생활을 명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올무에서 풀어내기 위해서 복스러운 영생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며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살전 3:5 참조). 우리 구주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나타나셨던 것같이 세상 종말에 오실 것이며 그 때에 그가 행하신 구원의 결과를 보이실 것이다. 이렇게 바울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는 것, 전력을 다해 하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유혹을 일소한다. 참으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있는 우리의 천국 기업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 세상을 나그네같이 살라고 가르친다.1257)
(우리와 이웃과의 관계자에서의 자기 부정의 원칙. 4-7)
4. 자기 부정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런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자기 부정이 일부는 사람과 관계되고 다른 부분, 즉, 그 중요 부분은 하나님과 관계된 자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인 관계의 행동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빌 2:3), 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롬 12:10 참조)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서 본성의 감정을 우선 버리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명령을 이해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기를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며 자기와 비교해서 남은 모두 멸시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부끄럽지 않은 것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믿고 곧 마음이 부풀어 올라 그 자만심으로 거의 터질 정도가 된다. 우리는 우리를 침범하는 죄악들을 사람들 앞에서 숨기려고 애쓰며, 한편으로는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다는 구실로 자기만족에 빠지거나 심지어는 선한 일이라고 착각하는 때도 있다. 우리가 감탄하는 재능이나 우리보다 우수한 재능을 다른 사람이 발휘할 때, 우리는 그것을 경시하며 배척해서 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려고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에게 과실이 있다면 우리는 엄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추악하게 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교만하여 자신은 평범한 운명에서 제외됐다는 듯이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기를 원하며 모든 인생을 거만한 태도로 욕하거나 적어도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보며 멸시한다. 가난한 사람은 부자에게, 평민은 귀족에게, 하인은 주인에게, 배우지 못한 사람은 유식자에게 양보한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는 자기가 더 낫다고 하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각각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그 가슴속에 일종의 왕국을1258) 가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인격과 도덕 생활을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충돌 점에 이르게 되면 독을 뿜는다. 모든 일에 명랑하고 유쾌한 동안에는 분명히 온화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괴롭히고 성가시게 굴 때에도 여전히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투쟁욕과 이기심은1259) 가장 무서운 전염병이다. 이것을 우리의 가장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뽑아버리는 것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다.
성결의 교훈은 이 전염병을 일소해버린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우리 자신의 소유가 아니고 거저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잊지 말라고 성경은 가르친다.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는 사람은 그의 배은망덕을 폭로한다. 바울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라고 묻는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의 허물을 돌아보며 겸손한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우리를 오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속에 남지 않을 것이지만 낙심하게 만드는 일은 많을 것이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재능을 받은 것을 보면, 그 재능을 높이며 그 사람들을 존경하라는 것이 우리가 받은 명령이다. 주께서 그들에게 영예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 영예를 그들에게서 빼앗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큰 죄악일 것이다. 그들의 허물에 대해서는 물론 좋은 말로 칭찬할 것이 아니나 관대히 보아주라고 우리는 배웠다. 결점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마땅히 호의와 존경으로 대할 사람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지 말라고 하셨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이대로 한다면, 우리는 관대하고 겸손하게 대할 뿐 아니라 다정하게 그리고 한 친구로서 대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친절을 체득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것이다.
5. 자기 부정은 이웃을 돕는 태도를 바르게 한다
그런데 이웃의 유익을 구하려고 할 때 자기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자신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말하자면 자기를 벗어버리지 않고서는, 그 방면에서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전적으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사랑의 일이라고 가르친 그것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말하였다(고전 13:4-5). 우리에 대한 요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라는 한 가지뿐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상당히 가혹하게 다루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원래 시기만을 위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해서 우리 자신과 재산을 무시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히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을 기꺼이 내놓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한다는 것은 우리의 천성으로 보아서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이러한 경지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는 모두 일정한 조건 아래 위탁된 것이라고 경고한다. 받은 은혜를 교회의 공익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이 그 조건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혜를 합당하게 사용하려면,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친절하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 전체는 우리의 이웃들의 유익을 위해서 분배하라는 조건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위탁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배웠다(벧전 4:10 참조). 이보다 더 확실한 규칙이나, 이 규칙을 지키기 위한 더 타당한 권고를 생각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성경은 일보 전진해서 우리의 은사를 신체 기관들의 능력에 비교한다(고전 12:12이하). 어느 기관도 자신을 위해서 그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며, 자신의 사사로운 필요만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각 기관은 다른 기관들을 위해서 그 능력을 쏟아놓는다. 온 몸에 공통적으로 유익하게 된 때에 비로소 각 기관은 자체 능력의 혜택을 받는다. 그와 같이 경건한 사람도 그가 가진 능력이 무엇이든 간에 그들을 위해서 일할 줄 알아야 하며, 교회의 전체적인 성장을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이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자기를 돌보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관용과 자선에 대한 우리의 규칙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웃을 도울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이며, 우리의 청지기 직책에 관해 하나님께 보고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올바른 청지기의 유일한 자격은 사랑을 표준으로 알아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이익에 대한 열심과 자신의 이익에 대한 관심을 결합할 뿐 아니라, 자기의 일보다 남의 일을 더 중요시하게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를 올바르게 관리하기 위해서 이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상고 시대에 그가 주신 가장 작은 선물들에까지 이 규칙을 적용하셨다. 곧 처음 익은 열매를 하나님 앞에 가져오라고 명령하시고 주시는 혜택을 우선 하나님에게 드리지 않고서 받아쓰는 것은 불법이란 것을 백성들이 증거하도록 하셨다(출 23:1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은사가 우리의 손으로 창조주에게 바친 때에만 거룩하게 된다면, 바치지 않고 쓰는 것은 분명히 부패한 남용이다. 그러나 자기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하나님을 풍부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인간의 관용은 하나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예언자의 말과 같이 세상에서 성도들에게 그것을 실행해야 한다(시 16:2-3). 그리고 율법의 규정에 해당하는 일을 현재도 행하기 위해서, 남에게 나눠주는 것을 거룩한 제사에 비교하였다(히 13:16).
6.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람의 종류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만을 우러러본다
그뿐 아니라 선을 행하다가 곧 낙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것을 막기 위해서(갈 6:9) 우리는 마땅히 바울이 말한 다른 생각을 더 첨가해야 한다. 그는 "사랑은 오래 참고…성내지 아니하며"라고 했다(고전 13:4-5).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신다(히 13:16). 그러나 사람은 그 자신의 공로로 판단한다면, 대부분이 심히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 성경은 최선의 방법으로 우리를 돕는다. 성경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사람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그 형상에 대해서 경의와 사랑을 표시하라고 한다.
그러나 특히 믿음의 식구들 사이에서(갈 6:10), 그리스도의 영을 통하여 중생하고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더욱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그를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예를 들면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표를 그에게 주셨다. 주께서는 우리 자신의 골육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셨다(사 58:7). 가령 "그가 비루하고 무가치하다"고 하자. 그러나 높으신 주께서는 낮은 그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형상을 주셨다. 그 사람에게 봉사할 아무런 의무도 우리에게 없다고 말하자. 그러나 우리에게 크고 많은 은혜를 주시고 자신에 대한 의무를 지우신 주께서는, 이를테면 그를 자신의 자리에 두시고 그를 향해서 우리가 받은 은혜들을 인정하라고 하신다. 그에게는 우리가 그를 위해서 조금도 수고해 줄 가치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그러나 그를 우리에게 추천하신 하나님의 형상에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전소유를 바칠 가치가 있다. 또 그는 우리의 호의를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불의한 행동이나 저주로 그대의 감정을 상했다고 하자. 그러나 이것까지도 우리가 그를 사랑으로 포옹하며 그를 위해서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중단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마 6:14, 18:35, 눅 17:3). "그는 당연히 나와는 아주 다른 취급을 받아야 한다."고 우리는 말하리라. 그러나 주께서 당하신 일은 과연 당연했는가? 주께서는 이 사람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라고 명령하실 때에, 자신이 그 죄를 맡겠다고 하시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악한 일을 한 사람을 유익하게 해주며,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에게 축복으로 대한다는 것은(마 5:44)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전혀 반대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할 수 있으려면, 확실히 한 가지 길밖에 없다.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악의를 생각하지 않고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1260) 주시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그 길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말소하며 삭제할 뿐 아니라, 그 아름다움과 위엄으로 우리의 마음을 끌어 그들을 사랑하며 껴안게 만든다.
7. 보이는 사랑만으로는 부족하고, 중요한 것은 의향이다
이런 자기 부정은 우리가 사랑의 의무를 수행할 때에 한해서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사랑의 의무를 다 실행하고 하나도 빠뜨린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완전히 수행했다고 할 수 없으며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이라야 그것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외면적으로는 모든 의무를 완전히 이행하면서도 진정한 의무 이행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후덕한 체하면서도 반드시 자랑하는 얼굴이나 심지어 거만한 말로 물건을 주어서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또 이 비참하고 불행한 시대에, 사람들은 구제품을 나눠줄 때에 대개는 멸시하는 태도를 취한다. 이교도들 사이에서도 이런 흉악한 짓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명랑한 얼굴이나 다정한 말로 유쾌하게 의무를 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한다. 우선 그들은 자기가 도울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의 처지에다 자기를 두고 그의 불행을 자기가 당하며 견디는 것같이 동정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비와 인자의 정에 이끌려 자신을 돕는 것같이 남을 돕게 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으로 형제를 도우려고 나서는 사람은 교만이나 비난으로 자기의 의무를 더럽히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곤란한 형제에게 도움을 줄 때에 그를 멸시하거나 자기에게 빚을 진 노예같이 만들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짓은 온 몸이 재생시키려고 애쓰는 병든 기관을 비난하거나 갚아줄 수 없으리만큼 많은 도움을 다른 기관들에게서 받았다고 해서 병든 기관에게 특별한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름없는 불합리한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기관들 사이에 배당된 일은 거저 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법칙에1261) 따라서 보답하여야 할 것, 거부하면 흉악한 결과가 될 그런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보아야 한다.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한 사람은 자기에게 다른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부자들은 자기 소유에서 얼마를 내어준 다음에는 다른 부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내맡기고 자기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아무리 위대할지라도 이웃들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것이며, 이웃에 대해서 친절한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재력이 미치는 데까지 계속할 것이다. 재물을 베푸는 범위가 넓은 때라도 사랑의 법에 따라서 한계를 정할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인간의 자기 부정의 원칙. 8-9)
8. 하나님께 대한 자기 부정은 그의 뜻에 대한 헌신이다
자기 부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 곧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을 향한 부분을 더 자세히 반복하겠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것이 많으므로 그것을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이 부분이 우리의 마음을 동정하고 관대하게 만드는 경로를 알리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선 우리가 현세 생활에서 평안과 평온을 얻으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주의 뜻에 맡기며, 우리 마음의 소원을 그에게 일임해서 길들이며 복종시키도록 하라고 성경은 권고한다. 재산과 명예를 탐하며, 권력을 추구하며, 재물을 쌓으며, 호화롭고 사치한 생활에 도움이 되는 듯한 일에 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의 욕망은 날뛰며 중단될 줄 모른다. 그와 반대로 가난한 살림과 낮은 가문과 이름 없는 처지를 우리는 경탄하리만큼 무서워하고 미워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이런 상태에서 빠져나가도록 우리는 자극을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정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 얼마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들은 야심이나 탐욕의 목표에 도달하며 한편으로는 빈곤과 비천을 피하려고 교묘하게 노력해서 지칠 정도에 이른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경건한 사람들이 취할 길이 하나 있다. 첫째로 주께서 주시는 복을 받지 않고서 어떤 다른 방법으로 번영하겠다는 욕망이나 희망이나 계획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1262) 그러므로 안심과 확신을 품고 주께서 주시는 복에 몸을 맡기며 거기서 안식을 얻으라. 육은 자체의 노력이나 근면에 의해서 또는 사람들의 호의에 의해서 부귀를 구할 때에, 아무리 자체만으로 충분한 듯하더라도 이 모든 것은 확실히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주나 노고도 주께서 도우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주의 축복이 있기만 하면, 모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우리에게 유리하고 기쁜 결과가 될 것이다. 주의 복이 전연 없어도 우리는 어느 정도의 영광과 재산을 얻을 수 있다(사악한 자가 굉장한 재산과 명예를 쌓아 올리는 것을 우리는 매일 본다).1263)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은 티끌만한 행복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면 우리가 얻는 것은 모두 우리의 불행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결코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것을 얻으려는 욕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
9.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의지하라
그러므로 일이 잘 되며 좋은 결과가 나타나려면, 그것을 위한 모든 수단은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만을 토대로 삼아야 한다. 이 복이 없으면 각종 불행과 재난이 우리를 괴롭힌다. 만일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민첩한 두뇌와 근면이나 사람들의 호의나 공상적인 행운을 믿고 부귀를 탐내어 애쓸 것이 아니라, 항상 주를 우러러보며 주의 지도를 받아, 주께서 정하신 우리의 처지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선 우리는 사악한 행동, 책략, 간계 그리고 탐욕 등의 수단으로 재물을 움켜잡으며 지위를 강탈하려고 날뛰어 이웃을 해하는 일이 없게 되고 우리의 순진성을 버리게 하지 않는 사업만을 하게 될 것이다.
사기와 강탈과 그 밖의 악한 술책을 쓰는 곳에 누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도움이 임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순결한 생각과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만 오며, 그것을 구하는 사람을 왜곡된 생각과 악한 행동에서 돌아서게 한다. 그리고 우리를 억제해서 재산을 모으려는 지나친 욕망의 불길이나 명예를 얻으려는 야심적인 갈망을 없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되는 것들을 바라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얼마나 파렴치한 짓인가?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하신 일을 복 주심으로 도우시리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끝으로, 일이 바라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초조하지 말아야 하며 자기의 더러운 처지를 혐오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런 일이 하나님께 대한 불평이며 빈부와 귀천은 일체 하나님의 뜻으로 배정되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기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만 의지하는 사람은 일반 사람들이 미친 듯이 구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악한 술책을 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자기에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일이 잘 될 때에 그것을 자기의 공로나 자기의 근면, 노력, 행운 등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여겨 하나님의 공로로 돌릴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은 사업이 번창하고 자기 일은 진척이 미미하거나 심지어 후퇴하더라도 그는 평온과 겸손한 마음으로 이 부진한 상태를 참고 견딜 것이다. 자기가 얻은 보통 정도의 성공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세속적인 사람이 경칩하는 심리에 비하면, 그의 마음은 더 평화로울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는 최고의 부귀보다 더 위대한 안식과 평화를 주는 위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위로는 나의 구원이 될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사업도 하나님의 섭리하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윗의 태도가 이러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자기를 하나님의 인도에 일임하면서 자기는 젖뗀 아이가 어미의 품에 안긴 듯하며, 그의 힘이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에 힘쓰지 아니한다고 증거하였다(시 131:1-2).
10. 자기 부정은 역경을 견디는 힘을 준다
우리가 말한 신자의 평화와 인내는 여기에서 한정될 것이 아니라, 현세 생활에서 당하는 모든일에 미쳐야 한다. 자신을 주께 전적으로 드리고 생활의 모든 부분을 남김없이 하나님의 뜻에 맡긴 사람만이, 자신을 온전히 부정했다고 하겠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일이 있더라도 태연한 사람은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하거나, 자기의 처지에 대해 하나님에게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심경이 얼마나 필요한가는 우리가 불의에 당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병이 우리를 거듭 괴롭힌다. 혹은 전염병이 만연하기도 하며, 전쟁의 참화를 입기도 한다. 얼음과 우박이 일년 추수를 전멸시켜 흉년이 들며 우리를 가난에 빠지게도 한다. 처자와 이웃을 죽음에 빼앗기며 집이 불에 타서 없어지기도 한다. 이런 재난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저주하며, 난 날을 미워하며, 하늘과 태양을 싫어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독적인 구변이 있는 자는 하나님이 공정하지 않고 잔인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당할 때에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우러러 보아야 한다. 따라서 설사 일가친척이 떠나고 집안이 적적하게 되더라도 그는 여전히 주를 찬양하며 내 집에 계신 주의 은혜는 내 집을 황량한 채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생각에 주의를 돌릴 것이다. 추수한 것이 서리나 우박을 맞으며, 혹은 얼어서 전멸하여 굶어 죽을 위험이 있을 때에도 그는 절망하거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여전히 굳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 할 것이다(시 78:47 참조).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시 79:13)전할 것이다. 그러므로 추수의 성과가 극도로 나쁜 때라도 주께서 식량을 주실 것이다. 병고에 시달릴 때에도 심한 고통에 용기가 꺾이거나 불안하고 초조하여 하나님에게 간언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징계는 공정하며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참고 견디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평온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견디며,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권한에 영원히 양도했기 때문이다.
특히 저 이교도들이 생각한 위안이란 것은 우매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는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배격해야 한다. 견고한 마음으로 역경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들은 역경을 운명에 돌렸다.1264) 운명은 소경이며1265) 사려 분별이 없기 때문에, 허물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에게 동시에 상처를 입힌다는 것이다.1266) 그와 반대로 경건 생활의 입장은 선악간 운명을 정하고 지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손은 무책임한 힘으로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행복과 불행을 가장 정연하고 공정하게 배정하신다고 믿는다.
제 8 장 십자가를 지는 것 : 자기 부정의 일부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각각 우리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1-2)
1.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십자가
그러나 경건한 마음은 더 높은 데로,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올라오라고 하시는 데로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제자가 각각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경지이다(마 16:24).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곤란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각양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그는 이 계획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자녀에 이르기까지 적용하신다.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하셨고 그를 심히 기뻐하셨지만(마 3:17, 17:15), 사실은 그를 관대하게 혹은 너그럽게 다루시지 않으셨음을 우리는 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생애에서 끊임없는 십자가의 시험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 전체가 일종의 끊임없는 십자가에 불과하였다. 사도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시는" 것이 합당했다고(히 5:8)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지키신 조건을 무슨 까닭에 우리는 모면하려고 할 것인가? 특히 그리스도께서는 그 조건을 지킴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친히 인내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사도는 가르치기를,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을 얻도록 정하셨다고 했다(롬 8:29). 따라서 불행과 재앙이라고 할 만한 궁지에 빠지더라도 우리에게는 큰 위로가 있다. 곧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서, 그가 복잡다단한 재앙의 미로를 통과하여 하늘의 영광을 얻으신 것같이, 우리도 각양의 고난을 통과하여 같은 영광으로 인도된다는 것이다(행 14:22). 바울은 다른 데서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줄을 알게 되는 때에 우리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를 알게 되며, 그의 죽으심을 본받게 될 때 그의 빛나는 부활에 참여할 준비가 된다고(빌 3:10-11) 말했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가혹한 성격을 완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주와 사귐을 가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2. 십자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믿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순종을 증명하려는 목적 이외에는 십자가를 지실 아무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을 계속적으로 십자가 밑에서 지내야 할 이유가 많다. 첫째로 우리의 천성은 모든 것을 우리의 육에 돌리는 경향이 너무도 강하다. 우리의 연약함을 눈앞에 보여주지 않으면 우리는 곧 자기의 선을 과대평가한다. 그리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우리의 선을 꺾어지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육을 믿고 의기양양하며, 이런 자신감이 허탄한 것임을 모른다. 또 자신의 선을 믿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아도 자기의 능력만으로 충분하다는 듯이 하나님에 대해서까지 오만 불손의 태도를 취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교만을 억제하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가 심히 무능함과 연약함을 증명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치욕, 빈곤, 근친의 죽음, 병 기타의 재난들로 우리를 괴롭히신다. 이러한 재난이 있는 동안 우리는 견뎌내지 못하고 곧 굴복한다. 이렇게 자만심이 건여 하나님의 힘을 구할 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힘만이 재난을 이기고 굳게 버티는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서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지극히 거룩한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더욱 깊은 지식을 얻게 하시지 않으면 자신의 용기와 지조를 과신한다. 이런 자기만족은 심지어 다윗의 마음속에까지 스며들었다.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시 30:6-7).1267) 다윗은 번영했을 때에 태만하여 감각이 마비되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를 믿어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고백한다. 이런 위대한 예언자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무슨 일인들 두려워하지 않으며 주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들은 평화로운 때에 자기의 위대한 지조와 인내심을 자랑했으나 역경에 처하게 되자 그 자만심이 꺾이고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자는 이렇게 자기의 병이 증명됨으로써 경고를 받아 겸손한 마음을 가지게 되며, 육에 대한 사악한 신뢰를 탈피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몸을 맡겼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를 체험하며, 이 점에서 풍성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는 보호를 받는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가르치기 위하여 필요하다. 3-6)
3.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실을 경험하는 기회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준다
바울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고"(롬 5:3-4) 가르친다. 환난 중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진실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꾸준히 참고 견디는 동안에 그들은 체험한다. 이런 인내는 자기의 힘으로는 전연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는 약속하신 도움을 주신다는 것을 성도들은 인내를 통해서 체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소망도 강화된다. 그들이 이미 경험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앞으로도 과거와 같이 확고부동하리라는 것을 기대한다면 은혜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가 서로 연결되어 십자가에서 솟아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칠에 대한 그릇된 과대평가를 바로 잡으며 우리를 기르게 하는 위선을 폭로함으로써 십자가는 육에 대한 우리의 위험한 신뢰를 없애버린다. 이렇게 교만이 건인 우리에게 십자가는 하나님만을 믿을 것을 가르치며 그 결과로 우리는 낙심하거나 항복하지 않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승리의 뒤를 이어 소망이 생긴다. 이는 주께서 약속을 지키심으로써 앞으로도 신실하시리라는 확증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만 가지고도 우리는 평소에 십자가를 질 필요가 얼마나 큰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1268)
그리고 자기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을 깨끗이 없애버리는 것은 적지 않게 중요한 일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기의 무능을 더욱 잘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의 무능을 느끼면 자기를 믿지 않게 될 것이요, 자기를 믿지 않으면 그 대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이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안심하면 그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끝까지 버티어 굴하지 않을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버티면 하나님의 약속이 신실함을 이해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무조건 확신하면 그만큼 소망이 더욱 견고하게 될 것이다.
4. 십자가는 우리의 인내와 순종을 훈련시킨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괴롭히시는 데는 다른 목적도 있다. 즉,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며 순종심을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순종 이외의 어떤 다른 순종을 그들이 표시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각종 은혜가 그들 안에 숨은 채로 무용지물이 되지 않도록 그것들을 오해할 여지없는 증명으로 밝히 드러내시기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종들에게 주신 인내력과 지조를 밖으로 드러내심으로써 그들의 인내심을 시험하신다고 한다. 여기에 여러 가지 말씀들이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며, 그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거절하지 않은 사실로 그의 경건을 증명하셨다(창 22:1,12). 베드로도 몸을 불로 연단하는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시련으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다고 가르친다(벧전 1:7).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가장 훌륭한 은사인 인내심을 활용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하고 명백하게 하는 것이 무익하다고 누가 말할 것인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는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각종 덕성을 주시고 그 덕성들이 사장되어 결국 소멸되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자극하며 발동시키시는 것이 옳은 일이라면, 성도들에게 고난이 없으면 인내력도 없을 것이므로 그들이 받는 고난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또 십자가에 의해서 순종을 배운다. 자기의 경박한 생각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들의 소원대로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따른다는 뜻을 깨닫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역경을 견디라."고 충고할 때에, 옛 속담은 "하나님을 따르라."고1269) 했다고 세네카(Seneca)는 회고했다. 이런 말로 고대인들이 암시한 것은 손과 등을 하나님의 채찍에 내맡기는 때에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이 지우시는 멍에를 참으로 멘다는 것이 분명하다. 모든 일에 하늘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우리는 백방으로 이 순종의 습관을 우리에게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결코 거부해서는 안 된다.
5. 십자가는 약이다
이와 같은 순종의 필요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항심을 생각해야 한다. 일순간이라도 부드럽고 관대하게 다루면, 하나님의 멍에를 벗어버리려는 우리의 육의 충동은 강렬해진다. 기운 좋은 말을 부리지 않고 먹이기만 하면, 며칠 후에는 더욱 날뛰어 길들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다. 그 말은 전에는 순종하던 기수도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시던 일을 우리는 항상 하고 있다. 살이 오르고 비대하게 되자, 우리를 먹여 살리신 이를 발로 찬다(신 32:15). 하나님의 은혜에 끌려 그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나 우리는 반대로 악의를 품고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을 받고도 계속해서 타락한다. 따라서 우리가 충동으로 날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징벌을 내려 억제시킬 필요가 있다. 한없이 풍부한 재산 때문에 방탕에 흐르지 않도록, 자신의 영예를 자랑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그밖에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또는 운 좋은 일들로 거만하게 되지 않도록, 주께서는 십자가의 치료법을 적당히 적용하셔서 우리의 광분하는 육을 제압하시며 굴복시키신다. 사람에 따라 건강 회복에 유익한 대로 여러 가지 방법을 쓰신다. 같은 병이라도 우리는 같은 정도로 앓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똑같은 거친 치료법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이런 십자가로, 저 사람은 저런 십자가로 시련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늘 의사께서는 어떤 사람은 부드럽게 치료하시고, 다른 사람은 거친 방법으로 깨끗이 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며 아무도 그냥 버려두시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병이 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6. 십자가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우리의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약점을 내다보시는 동시에, 우리의 지나간 죄들을 시정하실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하셔야만 우리가 합당한 순종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즉시 우리의 지나간 생활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이런 징계를 받을 만한 이유를 반드시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참고 견디라는 충고는 주로 죄를 인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훨씬 더 좋은 개념을 제공한다. 즉, 주께서 역경으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고전 11:32). 그러므로 심이 어려운 환난에서도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인자하심과 관용을 발견해야 한다. 그 분께서는 그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구원을 촉진시키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괴롭히시는 것은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이 받는 정죄를 면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 우리는 성경이 다른 곳에서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 3:11-12)고 교훈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채찍을 깨달을 때에, 악한 행실이 고질이 된 절망적인 사람들같이 교만해질 것이 아니라, 순종하며 잘 배우는 자녀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우리가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돌아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파멸에 몰아넣으신다. 그러므로 징계가 없으면 우리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하신 것은 옳은 말씀이다(히 12:8).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인자하심과 우리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견디지 못한다면, 우리는 심히 사악한 자들이다. 성경은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다. 불신자는 고질적이며 철두철미한 악의 노예와 같이 징계를 받으면 더욱 악하게 되고 더욱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신자는 자유의 몸으로 태어난 아들같이 회개할 줄 안다. 우리는 어느 쪽에 들기를 원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논의했으므로1270) 여기서는 이 간단한 언급으로 만족하고 더 말하지 않겠다.
(박해와 기타 재난에서 십자가를 짐. 7-8)
7. 의를 위하여 고통을 받음
그런데 의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 것은 독특한 위로가 된다. 하나님을 위한 군인에게 이 특수한 휘장을 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영예를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를 위해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노력을 계속하는 사람은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다. 그러므로 사탄의 거짓말에 대항해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든지 또는 악한 자에 대항해서 선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보호하든지 간에, 우리는 세상의 멸시와 미움을 받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에게 우리의 노력을 바치는 것을 슬퍼하거나 근심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복되다고 선언하신 일들을 하면서(마 5:10), 자기를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다. 빈곤까지도 그 자체로 본다면 불행이다. 마찬가지로 추방, 모욕, 감옥에 갇힘, 치욕 등도 불행이며 죽음은 최고의 재난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위에 있을 때 이 모든 것이 우리의 행복으로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거하심에 만족하고, 육의 그릇된 평가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사도를 본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행 5:41) 기뻐할 것이다. 우리가 무죄하고 양심에 부끄러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악한 불신자들 때문에 재산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물론 인간 사회에서는 몹시 빈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일을 통해서 우리의 진정한 재산이 불어난다. 자기 집을 쫓겨난다면1271)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더욱 친근하게 영접을 받을 것이다. 괴로움과 멸시를 당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만큼 더 견고하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게 된다. 모욕과 수치를 당한다면,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서 더 훌륭한 자리를 얻는다. 죽임을 당한다면, 복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이 우리 앞에 열릴 것이다. 주께서 크게 가치 있는 것으로 인정하신 일들을 현세의 허망한 일시적 유혹보다 낮게 평가하는 것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8. 십자가 밑에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안에서 더 위로를 얻는다
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치욕이나 재난을 받을 때에, 우리는 성경에 있는 이런 경고의 말씀에서 충분한 위로를 받는다. 따라서 주께서 주시는 이런 고통들을 기꺼이 또 즐겁게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은혜를 모르는 자들일 것이다. 특히 이런 십자가는 신자가 지는 것이 가장 적당하며, 베드로가 가르친 것과 같이(벧전 4:12이하), 우리가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고자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에게는 치욕을 받는 것이 백 번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딤전 4:10) 박해뿐 아니라 비난도 받으리라고 바울은 특히 경고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세평이 좋든 나쁘든 간에, 우리는 그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고후 6:8)
그러나 즐거운 태도를 취하라고 하는 것은 심신의 고통과 아픔을 전연 느끼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한 괴로움과 근심이 없다면, 십자가 안에서의 성도의 인내도 없을 것이다. 빈곤과 병과 치욕에 각기의 고통이 있으며, 죽음에는 공포심이 따른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들을 태연하게 견디는 것이 무슨 용기나 절제가 될 것인가? 이런 경험은 그 성질상 고통스러운 것,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통으로 인한 곤란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도리어 그 고통으로 연단을 받아 용감하게 저항하며 그것을 극복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용기가 나타난다. 날카롭게 찌르는 자가 있어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급하고 과격한 행동을 억제한다면, 거기서 신자의 인내가 나타난다. 비통한 일로 상처받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위안에서 안식처를 얻는다면, 거기서 신자의 즐거움이 빛난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당할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생각하나, 스토아적으로 무감각한 것은 아니다. 9-11)
9. 스토아 철학자들과 달라서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슬픔을 밖으로 표현한다
신자가 인내와 절제를 견지하기 위해서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과 싸우는 것을 바울은 이렇게 적절하게 묘사한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십자가를 참고 견딘다는 것은 완전한 마비 상태가 된다든지, 아무 고통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옛날 스토아 철학자들이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한 우매한 말과는 다르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인간성을 버리고 역경이나 순경(順境)에 대해서 슬픈 때나 기쁜 때나 똑같은 느낌을 가진다. 아니, 돌과 같이 전연 느낌이 없다고 하였다.1272) 이 장엄한 지혜가 그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는가? 그들이 묘사한 인내는 인간 사회에서 발견된 일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 엄격하고 까다로운 인내를 체득하려고 했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생활에서 인내의 힘을 추방하였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새로운 스토아 철학자들이1273) 나타나서 고통으로 신음하며 우는 것뿐 아니라, 슬픔과 불안에 시달리는 것까지도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불합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대개 한가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행동보다 사변으로 시간을 보내며, 이런 불합리한 생각 외에 아무것도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우리 주께서 말씀뿐 아니라 행동으로 배격하신 이 냉혹한 철학은 우리가 상대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주께서는 자신의 불행과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대해서 깊이 슬퍼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다. 제자들에게도 같은 뜻으로 가르치셨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요 16:20). 아무도 죄라고 하지 못하도록 주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 5:4)라고 밝히 선언하셨다. 당연한 말씀이다. 울음을 일체 배격한다면, 주님 자신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그의 몸에서는 눈물이 피방울 같이 흐르지 않았는가?(눅 22:44) 공포심은 모두 회의라고 낙인을 찍는다면, 주께서 심한 공포를 느끼셨다는 기사를(마 26:37, 막 14:33)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가 모든 슬픔을 싫어한다면, 주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8)라고 하신 말씀이 어떻게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인가?
10. 현실의 슬픔과 현실의 인내는 서로 충돌한다
경건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이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자연히 느껴지는 슬픔을 뿌리칠 수 없어 견디고 버티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내를 무감각으로 생각하고 용기와 지조가 있는 사람을 목석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다. 가혹한 불행이 괴롭혀도 굴복하지 않으며, 비통한 일이 있어도 영적 기쁨이 넘치며, 불안이 눌려도 하나님의 위안으로 소생하여 용기를 회복하는 성도의 인내를 성경에서 칭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참는 동안에도 성도의 마음속에서는 인간성에 배치된다고 느끼는 것을 피하며 무서워하는 자연적인 심리와 이 여러 가지 곤란까지도 헤쳐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진하겠다는 경건한 뜻이 서로 싸우고 있다. 주께서 이 상극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고 말씀하셨다.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필요가 있었을 때에 베드로가 저항하면서 억지로 끌려갔을 리는 없다. 그랬다면 그의 순교는 칭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큰 열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을지라도 인간성을 벗지 못한 그로서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의지에 끌렸다. 앞으로 당할 참혹한 죽음을 생각하면 공포심을 못 이겨 도망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생각하고는 자신의 공포심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서서 기꺼이 또 즐겁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와 순종으로 가득하여, 모든 반항하는 감정을 길들이고 극복하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괴롭히는 십자가가 무엇이든 간에, 또 마음의 고통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우리는 굳게 참고 버틸 것이다. 우리가 처한 역경은 가혹하게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우리는 병모로 신음하며 불안해하며 건강을 갈망하게 될 것이다. 가난에 시달려 걱정과 슬픔에 가슴이 아플 것이다. 치욕과 멸시와 불법적인 처사를 당할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을 묻으면서 자연히 흐르는 눈물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은 언제나 주의 뜻이니, 주의 뜻을 따르자는 그 한 가지일 것이다. 고통의 가시가 찌르며, 신음과 눈물이 그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우리 마음을 이렇게까지 요동하게 만드는 이 일들을 기꺼이 참도록 마음을 돌리자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11. 인내에 대한 철학적인 견해와 기독교적인 견해
십자가를 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데서 발견한 우리는 철학적인 인내와 기독교적인 인내의 차이를 간단히 정의해야겠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시련을 받는다고 이해하며, 이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성의 높은 견지이지만, 이 경지에 도달한 철학자는 극히 적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으니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다.1274) 이것은 하나님께 항거하려고 해도 무익하므로 그에게 양보하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필연적이라는 것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유라면, 도피할 수 있는 때에는 순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아주 다르게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뜻은 첫째는 의와 공정이요, 다음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이런 생각으로 인내를 권한다. 빈곤이나 추방이나 감옥에 갇힘이나 모욕이나 병이나 근친의 죽음이나 그 밖의 어떤 일이 우리를 괴롭히더라도 우리는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아니면 생기지 않으며 하나님께서는 질서가 정연한 정의1275) 이외의 아무 일도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우리가 매일 짓는 많은 죄악은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더 중한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우리의 육이 그 본성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그 정욕을 길들이며, 이를테면 멍에를 쓰는 습관이 생기게 하는 것은 완전히 공평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의 공정과 진실을 위해서는 우리가 고생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만일 하나님의 명백한 공정성이 우리가 받는 고난에 나타난다면, 우리가 거기 대해서 불평하거나 항거하는 것은 반드시 공정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불가피하니 양보해야 한다."는 효력 없는 주문은 이제 들리지 않고 우리는 생명력과 효력이 충만한 교훈, 즉, "항거는 불법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 초조와 불안은 하나님의 공의에 반항하는 무례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고 견뎌야 한다."는 교훈을 듣게 된다.
그런데 우리의 구원과 유익이 된다고 인정하는 것이라야 우리는 기뻐하기 때문에, 지극히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십자가로 고난을 겪게 하시는 바로 그 행동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을 마련하신다고 언명하심으로써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를 위로해 주신다. 우리가 받은 고난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감사한 마음과 평온한 마음으로 그 고난을 당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므로 고난을 참고 견딜 때에 우리는 필연성에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유익에 동의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가는 동안 우리가 자연히 그 가혹함을 느끼며 우리의 마음이 아무리 아프더라도 동시에 영적인 기쁨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다. 여기에서 감사하는 마음도 생긴다. 이는 기쁨이 없으면 감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께 대한 찬양과 감사는 유쾌하고 기뻐하는 마음에서만 올 수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마음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고통은 분명히 영적인 기쁨으로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 9 장 내세에 대한 명상1276)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현세에 대한 지나친 애착에서 멀어지게 하신다. 1-2)
1. 현세 생활의 허무성
어떤 환난이 우리를 압박하든 간에, 우리는 현세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지며, 그렇게 됨으로써 내세를 활발하게 명상하기 위한 그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이 이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강한 동물적인 애착심을 가지고 있는가를 하나님께서는 잘 아시고 우리가 이 애착심에 너무 오래 잡혀 있지 않도록 우리를 끌어내시며 우리의 태만을 없애버리기 위해 가장 적당한 방법을 사용하신다. 하늘의 영생불멸을 동경하지 않거나 그것을 얻으려고 평생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후의 영생을 바랄 수 없다면 우리의 처지는 야수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그것은 인간으로서 하나의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의 계획이나 노력이나 행동을 검토한다면, 우리는 흙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이 우둔함은 우리의 지성이 부귀영화의 허망한 광채에 마비되어,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탐욕, 야심, 정욕 등에 억눌려 더 높이 비약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영혼 전체가 육의 각종 유혹에 빠져 지상에서의 행복을 구한다. 주께서는 이 악한 사태를 없애기 위해서 현세 생활의 불행을 끊임없이 증명하심으로써 그 허무성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현세에서 깊고 든든한 마음의 평화를 얻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전쟁이나 소란으로, 강탈이나 기타 피해로, 그들의 마음이 불안하게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 그들이 곧 없어질 재물을 너무 탐내지 않으며, 이미 가진 것을 너무 믿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는 추방으로, 흉작으로, 화재로, 기타 방법으로 그들을 빈곤으로 몰아넣으시며, 적어도 풍족하지 못한 처지에 있도록 제한하신다. 그들이 마음 놓고 결혼 생활을 즐기지 않도록,1277) 주께서는 악한 처나 불량한 자녀나 가족의 죽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괴롭히며 교만을 꺾으신다. 이런 점에서 그들을 관대히 다루시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이 허영심으로 부풀고 자신감으로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들에게 병과 재난을 보내어, 이 모든 좋은 것은 없어지는 것, 불안정하고 무상한 것임을 눈으로 보게 하신다.
십자가의 훈련을1278) 통하여 현세 생활의 불안을 깨닫는 때라야 우리는 올바로 전진을 할 수 있다. 현세 생활은 그 자체만을 본다면, 불안과 동요와 불행이 무수히 많고 순수한 행복은 아무 데도 없다. 인생의 행복이란 것은 모두 확실하지 못하며 곧 없어지며 허망하며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이 섞여 있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동시에 현세 생활에서 우리가 바라며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분투노력뿐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우리가 얻을 면류관을 생각할 때에는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세 생활을 철저히 무시하지 않으면, 참으로 정신을 차려 내세를 원하며 깊이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2. 우리는 현세 생활의 허무성을 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참으로 우리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지나치게 사랑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 따라서 영원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전력을 다해서 이 악한 족쇠를 부수어 버려야 한다. 현세 생활에는 우리를 꾀는 것이 많으며, 즐겁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많다. 그러므로 이런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가끔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 유익하다. 우리는 재앙의 아픈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도 인생의 가련상을 고려할 만한 각성이 없는데 만일 부하고 행복한 기쁨이 장구히 지속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생은 연기나(시 102:3 참조) 그림자 같다는 것은(시 102:11 참조) 유식한 사람들뿐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제일 잘 아는 속담이다. 이 생각을 대단히 유익하다고 생각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놀라운 말로 표현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처럼 등한시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 우리는 마치 지상에서 영생 불사할 작정인 듯 모든 일을 시작한다. 시체를 묻거나 묘지를 통과할 때에는 죽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기 때문에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아주 훌륭한 철학을 생각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때도 우리의 철학은 일시적이어서, 돌아서면 곧 사라지고 전연 기억이 없다. 극장에서 좋은 장면이 있을 때에 일어나는 박수갈채와 같이 결국 증발하고 만다. 죽음을 잊어버릴 뿐 아니라 죽을 운명까지도 우리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우리는 경솔하게 지상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누가 "사람은 하루살이"라는1279) 속담을 말하면, 우리도 그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 없이 하는 일이고 존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다. 그러면 말로 충고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경험을 통해서 지상 생활의 가련상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 우리 모든 사람에게 대단히 유익하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는가? 우리는 확신하게 된 후에도 지상 생활에 최고의 선이 내포되어 있는 듯이 여전히 인생에 대한 어리석고 비열한 경탄을 금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실 때에는 우리의 태만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을 무시하고 전심전력하여 내세의 생명을 명상하도록 해야 한다.
(무상하고 불완전한 현세 생활을 바르게 평가하면 내세를 명상하게 된다. 3-6)
3. 지상 생활을 감사함
신자는 현세 생활을 무시하더라도 그것을 미워하거나 하나님께 감사할 줄 모르는 일이 없도록 습관화돼야 한다. 아무리 무수한 불행이 가득하더라도 현세 생활은 하나님이 주신 복 중의하나로 보는 것이 옳으며, 결코 경멸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인생에 하나님이 주시는 아무 은혜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중대한 배신의 죄를 짓게 된다. 특히 현세 생활은 신자들의 구원을 촉진시키는 데 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현세 생활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의 기업을 공개하시기 전에, 그보다 작은 증거로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받는 은혜이다. 이렇게 현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가치도 없는 듯이 무시한다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 생활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주시는 은혜 중의 하나로 생각하며, 결코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아주 많고 분명한 성경의 증거들이 없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자연 자체가 또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우리에게 권고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자연의 빛을 보게 하셨고 자연을 이용하도록 허락하셨고 자연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마련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이유는 이를테면 우리가 현세에서 하늘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께서는 앞으로 하늘에서 면류관을 쓸 사람들이 우선 지상에서 싸우고 노력하도록 정하셨기 때문인데 이는 그들이 싸움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를 얻기 전에는 개선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우리는 현세 생활에서 여러 가지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넓으신 인자하심을 맛보기 시작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완전히 나타나기를 간절히 원하며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상 생활이 인자하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확신할 때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는 동시에 그것을 기억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본성은 지상 생활에 애착을 느끼지만, 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 우리는 그 가장 불행한 상태를 생각하게 되며, 과도한 애착에서 해방되려고 할 것이다.
4. 영생에 대한 올바른 동경
현세 생활에 대한 잘못된 애착을 억제한 것만큼 더 좋은 생활에 대한 욕구를 강화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좋고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죽는 것이 다음으로 좋다고(전 4:2-3 참조)한 사람들의 판단이 건전하다는 것을1280) 나는 인정한다. 하나님의 광명과 진정한 종교가 없는 그들이 현세에서 불행하지 않고 추악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었겠는가? 친척의 생일이 돌아오면 슬피 울고 그들을 장사지낼 때에는 엄숙히 기뻐한 사람들의1281) 행동이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했다. 그들은 믿음에 대한 바른 교훈을 몰랐고 그 자체로는 복되지도 않고 갈망할 만 하지도 않은 것이 신자들에게는 유익하게 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포자기해서 생각을 그만두고 말았다.
따라서 신자가 죽을 운명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는 그것은 원래 비참한 것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 동시에, 더욱 큰 열성으로 곧 내세의 영생을 명상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내세의 삶에 비하면 현재의 삶은 무시해도 무방할 뿐 아니라, 완전히 멸시하며 싫어해야 한다. 하늘이 우리의 고향이라면 땅은 타향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세상은 무덤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살아 있다는 것은 곧 죽음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육신에서 놓이는 것이 곧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이라면, 육신은 감옥이1282)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면,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것은 곧 불행이 아닌가? 세상을 작별할 때까지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한다"(고후 5:6).
그러므로 지상 생활을 천상 생활과 비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곧 멸시하며 짓밟아버려도 된다. 물론 우리를 죄의 종으로 만들지 않는 한 현세 생활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죄로 우리를 사로잡는 현세 생활을 미워하더라도 현세 생활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여하간 우리는 현세에 대해서 염증이나 증오를 느끼며 그것이 끝나기를 바라더라도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세상에 남아 있을 각오를 하며 우리의 염증에 불평이나 초조감이 조금이라도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합당하다. 왜냐하면 현세는 주께서 우리를 배치하신 초소와1283)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소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초소를 지켜야 한다. 바울이 육신의 질곡에 너무 오랫동안 매여 있던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구속되기를 갈망하여 탄식한 것은 사실이다(롬 7:24).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느 쪽이라도 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언급한다(빌 1:23-24). 그는 생사간 어느 것을 통해서라도(롬 14:8) 하나님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어느 편이 하나님의 영광에 제일 큰 도움이 되는지는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이라면 우리는 죽고 사는 시간을 하나님의 결정에 일임하되, 죽음에 대한 열의가 뜨겁게 타올라야 하고 동시에 그침 없이 그것을 늘 명상해야 한다. 앞으로 있을 영생불멸과 비교해서 죄로 우리를 얽어매는 현세 생활을 경시하며, 주께서 기뻐하시는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버릴 수 있기를 갈망해야 한다.
5.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대항하여!
그리스도인임을 자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원하기는 고사하고 죽음에 대한 커다란 공포심에 사로잡혀, 말만 듣고서도 어떤 지극히 비참하고 불길한 그 무엇인 듯 벌벌 떠는 것은 이상한 현상이다. 우리가 죽어 없어진다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의 자연적인 지각이 공포로 긴장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더 큰 위안으로 그런 공포심을 극복하고 억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경건의 광명이 마음속에 없다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이 육체라는 장막은 불안전하고 불완전하며 썩을 것, 곧 없어질 것, 쇠퇴하는 것, 썩어가는 것이지만, 분해된 후에는 곧 새로워져서 견고하고 완전하여 썩지 않는 영광으로 결국은 하늘의 영광으로 빛나리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신념은 본성이 무서워하는 것을 우리가 도리어 열렬히 주하게 만들 것이 아닌가?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유랑 생활에서 소환되어 고국으로 돌아가, 즉, 하늘나라로 돌아가 살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사실에서 우리는 아무 위안도 얻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살아 있기를 갈망하지 않을 것도 없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으리라.1284) 나도 물론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미래에 있을 평생 불멸을 존중해야 하며, 거기서 우리는 지상에서 결코 얻지 못하는 견고한 상태를 얻으리라고 주장한다. 신자들이 죽음을 향해서 열심히 가고 있는 것은 옷을 벗고 싶어서가 아니라 더 완전한 옷을 입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라고(고후 5:2-3) 바울은 적절히 가르친다. 짐승들과 나무나 돌 같은 무생물까지도 자기의 현존 상태의 허무함을 느끼고 부활이 있을 마지막 날을 동경하며, 그때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허무성에서 해방되기를 갈망한다(롬 8:19이하). 그런데 우리는 오성(悟性)의 빛을 받았고 그 위에 다시 하나님의 영의 조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우리의 존망이 문제가 될 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리의 생각이 땅위에서 썩어가는 것을 초월하지 못할 것인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 해괴망측한 현상을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럴 장소도 아니다. 나는 맨 처음에 평범한 일들을 상론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소심한 사람들은 키프리아누스의 논문 죽음에 대하여(On the Mortality)를1285) 읽기를 바란다. 만일 그들을 철학자들에게 보낸다면, 철학자들이 죽음을 경시하는 것을 보고 얼굴이 붉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학교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기의 죽는 날과 종말의 부활을 기쁘게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진보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로 결론이 난 것이라고 생각하도록 하자. 바울도 이 점을 표준으로 신자들을 구분하고(딛 2:13, 딤후 4:8 참조), 성경은 완전한 행복을 증명하려고 할 때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지적한다. 주의 말씀에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고 하신다(눅 21:28). 묻노니, 우리 주께서 우리를 기쁘게 하며 밝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계획하신 일이 우리를 슬프게 하며 당황하게 만들뿐이라면, 이것은 이치에 맞는 일인가?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그를 우리의 주라고 자랑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더 건전한 견해를 가지고 육에 속한 우매하고 맹목적인 욕망이 항거하더라도 서슴지 않고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쁜 일로 생각해서 동경할 뿐 아니라, 신음과 탄식으로 기다려야 한다. 주께서는 구속자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악한 일과 불행한 일이 가득한 이 말없는 심연에서 우리를 구해내시고 그의 생명과 영광의 복된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6. 내세에 대한 열망은 신자에게 위로를 마련해준다
신자들은 누구나 자기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같이 되기 위해서 지상에 있는 동안은 모두 "도살할 양같이"(롬 8:36)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늘의 것에 전념하고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극복하며, 그 현존상태를 초월하지 못한다면(고전 15:19 참조), 그들은 심한 절망적인 비관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이 머리를 높이 들어 모든 지상적인 것을 초월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비록 악한 사람들이 부귀를 누리며 깊은 평화를 즐기며, 호사스러운 재물을 자랑하며, 온갖 환락에 젖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1286) 그뿐 아니라, 이런 사람들의 사악한 행동 때문에 신자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그들의 교만 때문에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탐욕 때문에 재산을 강탈당하며, 그밖에도 그들의 욕심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더라도 신자들은 이런 재난까지도 쉽게 견뎌낼 것이다. 이는 주께서 그의 평화의 나라로 그의 신실한 백성을 영접하실 날이 임박했기 때문인데 그 날에 주께서는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며"(계 7:17, 사 25:8 참조), "영광과…환희의 옷"을(집회서 6:31) 입히시며, 형언할 수 없는 그의 희락의 단맛으로 만족하게 하시며, 자신과의 숭엄한 친교에 들게 하셔서, 결국 그들이 자신의 행복에 참여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지상에서 창성한 악한 불신자들은 철저히 몰락시키실 것이다. 그들의 즐거움이 고통으로 그들의 웃음이 울음과 애통으로 변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평화를 양심의 가책으로 어지럽히시며, 그들의 방종을 꺼지지 않는 불로 벌하실 것이다(사 66:24, 마 25:41, 막 9:43,46, 계 21:8 참조).1287) 또 경건한 사람들의 인내를 모욕하던 그들을 경건한 이들 앞에 머리를 숙이고 굴복하게 하실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공의에 대해서 증거한 것과 같다. 즉, 그는 주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나타나실 때에는 부당하게 괴롭힘을 당한 불행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며, 경건한 이들을 괴롭히는 악한 사람들에게는 괴로움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하였다(살후 1:6-7).
이것은 참으로 우리의 유일한 위안이다. 이 위안을 빼앗긴다면 우리는 절망 상태에 빠지거나 이 세상의 허망한 위안에 사로잡혀 파멸할 것이다. 예언자까지도 악한 자들이 현세에서 번창하는 것을 너무 깊게 생각했을 때 거의 실족할 뻔했노라고 고백한다(시 73:2-3).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경건한 자들과 악한 자들의 말로를 볼 때까지는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시 73:17).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만일 신자들이 눈을 돌려 부활의 능력을 바라본다면,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귀와 육과 죄와 악한 자들을 결국 이겨 낼 것이다.
제 10 장 현세생활과 그 보조 수단들을 사용하는 법
(현세 생활에서 좋은 것들은 하나님의 선물로 생각하여 즐겨 사용하라. 1-2)
1. 두 가지 위험 : 잘못된 엄격한 금욕과 잘못된 방종
성경은 이런 초보적인 교훈으로 동시에 지상의 복리를 어떻게 이용하는 것이 좋은가를 우리에게 충분히 가르친다. 이 문제는 우리의 생활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등한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사는 데 필요한 보조 수단들도 이용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필요하다기보다 즐거움을 주는 듯한 것들도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필요나 즐거움을 위한 것이든지 그것을 깨끗한 양심으로 이용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정한 방침을 지켜야 한다. 주의 말씀에 이 방침을 정하신 것이 있는데, 현세 생활은 주의 백성들이 하늘나라로 가려고 서두르고 있는 나그네의 생활이라고1288) 한 것이다(레 25:23, 대상 29:15, 시 39:13, 119:19, 히 11:8-10,13, 16:13,14, 벧전 2:11).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단순히 지나갈 뿐이라면, 현세의 좋고 유익한 사물을 이용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갈 길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돕는 범위 내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바울은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고전 7:30-31)고 우리에게 올바로 권고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미끄럽고도 좌우로 경사져서 오류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하게 설 수 있는 곳에 발을 든든히 붙이도록 해 보자. 엄격한 제약을 가하지 않을 때에 무절제와 방종한 생활은 걷잡을 수 없이 극단으로 달음질한다. 이 미친 듯한 죄악의 위험성을 보고 무절제와 방종을 시정하고자한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점에서는 선하고 거룩한 이 사람들이 생각한 유일한 방안은 필요성이 요구하는 범위 내에서만 물질의 이용을 허락한다는 것이었다.1289) 그들의 생각은 경건한 것이었으나 지나치게 엄격하였고 주의 말씀에 비해서 사람의 양심을 더욱 구속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그런데 그들이 필요성이라고 한 것은 없이도 지낼 수 있는 것은 일체 멀리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맨 빵과 물 이외에 다른 음식물을 첨가하는 것은 일체 허락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사람들은 이보다도 더 엄격하였다. 테베사람 크라테스(Crates)는 재산을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 때문에 자기가 망하게 된다고 재산을 전부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1290)
물질 사용에 있어서 육의 무절제를 변명하며, 방종한 쾌락 생활의 길을 준비하려는 사람들이 지금도 많다. 그들은 내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일같이 생각한다. 이 자유에는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을 가할 것이 아니라, 각자의 양심에 맡겨 자기에게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대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정확한 법률 조문으로 양심을 구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합당한 사용에 대한 일반적인 표준이 있으므로 우리는 거기에 따라서 우리의 사용을 제한하는 것이 마땅하다.
2. 대원칙
우리가 다룰 원칙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지, 우리를 멸망시키시려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방향이 바르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주시하는 사람이 가장 곧은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양식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은 필요한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또한 즐겁고 유쾌하게 만드시려는 데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의복의 목적은 필요성뿐만 아니라, 외모와 풍습을 단정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풀과 나무와 열매는 여러 가지 이용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와는 별개로 모양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가졌다(창 2:9 참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언자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시 104:15)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을 성경은 반복적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만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보더라도 우리가 그것을 어디에 이용하며 어느 정도까지 이용할 것인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주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옷을 꽃에 입히시고 우리 코에 달콤한 향기를 풍겨 보내게 하셨는데, 우리의 눈이 그 미를 느끼며 코가 그 향기를 느끼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생각해 보라. 주께서는 빛에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아름답도록 구별하여 만드시지 않았는가? 금과 은과 상아와 대리석에는 그것들을 다른 금속이나 돌보다 더 귀중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주시지 않았는가? 한 마디로 주께서는 필요한 이용 가치를 떠나서 우리가 보기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드시지 않았는가?1291)
(우리는 하늘로부터 받은 이런 각종 은혜를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탐욕스럽게 재물을 탐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명을 따라 충실히 섬겨야 한다. 3-6)
3. 선물을 주신 분을 우러러보면, 옹졸한 생각과 방종을 막을 수 있다
그러면 피조물의 이용을 필요한 용도에만 제한하는 몰인정한 철학을 버려라.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의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우리에게서 빼앗는 사악한 생각이며, 인간을 무감각한 목석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육의 정욕을 억제하는 데도 이만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육의 정욕은 절제하지 않으면 한없이 흘러넘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1292) 육욕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유가 허용되었다는 구실로, 무엇이든지 육욕에 허락한다. 정욕을 억제하는 방법의 하나는 우리를 위하여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뜻은 우리가 그를 인식하며 그의 인자하심에 감사하도록 하시려는 데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만일 연락과 폭음 폭식으로 둔하게 되어 경건과 소명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의 감사는 어디 있는가? 만일 우리의 육의 힘이 끓어 넘치고 추악한 정욕이 정신을 침범하며, 죄의 더러움이 바르고 고상한 일들을 분간할 수 없게 만든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의복이 사치한 탓으로 우리 자신에 탄복하고 남을 멸시한다면, 또는 그 우아하고 찬란한 옷을 입고 부끄러운 일을 준비한다면, 의복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생각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찬란한 옷에 잡혀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디 있는가? 즐거운 일들에 모든 감각이 예속되어 정신이 압도된 사람들이 많다. 대리석과 금과 그림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은 대리석이 되었고, 말하자면 금으로 변했고, 색칠한 우상과 같이 되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방의 냄새와 그 좋은 향기에 마비되어, 정신적인 것은 전연 냄새를 맡지 못한다. 다른 것에 관해서도 똑같은 사태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의 남용을 허락하는1293) 것은 명백하게 다소간 억제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바울이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롬 13:14) 한 법칙이 확인된다. 만일 우리가 육욕에 너무 양보한다면,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무한정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4. 영생을 갈망하는 것도 우리의 외면적 생활을 바르게 결정한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은 현세에서의 생활을 멸시하고 하늘의 영생불멸을 명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두 가지 법칙이 나온다. 첫째는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라는 바울의 교훈이다(고전 7:29-31). 둘째는 빈곤을 조용히 참고 견디며, 부유함을 절제하라는 것이다. 세상 물건을 쓰되 쓰지 않는 것같이 하라고 충고하는 사람은 폭음 폭식과 식도락과 건물과 의복의 사치와 야심과 자만과 교만과 까다로운 성벽뿐만 아니라, 천국 생활을 생각하며 영혼을 함양하려는 우리의 열의를 방해하거나 탈선시키는 모든 관심과 취미까지도 끊어버린다. 옛날에 카토(Cato)가 "의복에 대한 관심이 크면, 덕에 대한 무관심도 크다."고 한 말은 옳다. 옛날 속담을 사용하면, 육체를 돌보는 데 시간을 많이 쓰는 사람은 영혼에 대해서는 대개 등한하다.1294)
그러므로 외면적인 일에 대한 신자의 자유를 고정된 조문으로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자유는 이 법에 복종해야 한다. 즉, 될 수 있는 대로 쾌락에 흐르지 말라. 오히려 불필요하게 풍요한 것은 형적도 없이 끊어버리도록 불굴의 정신으로 싸우라. 방탕한 것은 입에 담지 말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보조물들이 장애물로 변하지 않도록 부단히 경계하라는 것이다.
5. 검소와 위탁물인 지상 소유에 대하여
둘째 법칙은 가난한 사람은 물질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없이 지내며 견딜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절제의 법칙을 지킨다면 그들은 주님의 학교에서 많이 전진할 것이다. 또 조금도 전진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점에서는 주의 제자라는 증거를 보일 길이 없다. 대부분의 죄악이 물욕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제외하고라도, 빈곤을 참지 못하는 사람은 여유가 생기는 때 대개는 반대되는 증세를 나타낸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초라한 의복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비싼 옷을 자랑할 것이요, 빈약한 음식으로 만족할 수 없어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욕망으로 고통하는 사람은 그런 음식을 얻게 되는 때에 무절제하게 남용하게 될 것이다. 빈곤하고 낮은 처지를 부득이 참기는 하나, 마음이 평온하지 못한 사람은 명예를 얻는 때에 반드시 교만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저 사도의 모범을 따라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대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빌 4:12).
그뿐 아니라, 성경에는 지상 물질을 이용하는 데 대한 세 번째 지도 법칙이 있다. 사랑에 대한 교훈을 논할 때에 그것에 대해 언급한 일이 있을 때1295) 이 법칙에 의하면,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시며 우리의 유익에 충당되도록 하셨을 때에, 그 물질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으로 우리가 언젠가는 청산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눅 16:2) 말씀을 항상 귀에 들리게 하면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이 셈을 누가 요구하시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는 곧 극기와 단정한 정신과 검소와 절제를 권장하시고 무절제와 자만과 허식과 허영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이다. 유용한 물질을 분배하더라도 사랑이 동반되지 않으면, 그것을 시인하시지 않았다. 사람을 즐겁게 하는 물건이 사람의 정신을 정절과 순결에서 떠나게 하거나, 그 마음을 흐리게 할 때에는 친히 전적으로 배격하셨다.
6. 주의 부르심이 우리의 생활양식의 기초임
끝으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주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이 모든 행동에서 각각 자기의 소명에1296) 관심을 둘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께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큰 불안으로 타오르며, 얼마나 경박하고 방탕하며, 여러 가지 것을 한꺼번에 움켜잡으려는 야심이 얼마나 맹렬한가를 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매하고 경솔한 우리가 만사를 혼란에 빠뜨리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각 사람에게 그 독특한 생활양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한계를 경솔히 벗어나지 않도록, 그 다양한 생활들을 소명이라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각 개인에게는 주께서 지정하신 생활 방식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초소와 같아서,1297) 사람이 생각 없이 인생을 방탕하지 않도록 하시려고 지정하신 것이다. 이 구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주의 앞에서 이 구별의 표준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이나 철학적 이론과는 그 판단이 훨씬 다를 때가 많다. 철학자들도 조국을 압제자의 손에서 해방하는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고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사로운 개인이 직접 압제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정죄하셨다(삼상 24:7,11, 26:9).1298)
그러나 이 이상 더 예를 들지 않겠다. 모든 일에 있어서 선행의 시초와 기초는 주의 부르심에 있다는 것만 알면 넉넉하다. 주의 부르심에 전심하지 않는 사람은 의무의 길을 결코 바르게 걷지 못할 것이다. 간혹 칭찬할 만한 일을 할는지 모르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는 배척을 받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생활의 각 부분 사이에는 조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이 이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에 가장 잘 정리될 것이다. 소명의 한계를 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경솔하게 굴어서 소명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자기의 생활을 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열을 이탈하지 않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심을 알면, 걱정과 수고와 곤란과 그 밖의 짐이 있더라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게 될 것이다. 정치하는 사람은 더욱 기꺼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요, 일가의 가장은 그 의무에 전심할 것이다. 각자의 생활양식에서 받는 불편과 근심과 권태와 불안에 대해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것이라고 믿을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참고 견딜 것이다. 여기서 또한 소명임을 알고 순종하면, 아무리 낮고 천한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날 것이며 아주 귀한 것으로 인정받을 것이라는1299) 유일한 위안이 생길 것이다.
제 11 장 믿음에 의한 칭의 : 명칭과 문제에 대한 정의
(칭의와 중생 : 용어를 정의함. 1-4)
1. 칭의의 교리가 갖는 그 위치와 의미
율법 아래서 저주를 받은 인간을 위하여 구원을 회복하는 수단이 단하나 남아 있다는 것을, 즉, 믿음으로 회복하는 수단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 이미 설명했다고 믿는다. 믿음 자체는 무엇인가라는 것과 믿음이 사람에게 주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이 사람 안에서 일으키는 결과도 설명했다고 믿는다.1300) 이제 이 설명들을 요약하겠다.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그를 붙잡고 소유하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주로 이중의 은혜를 받는다. 첫째는 흠 없으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써 우리가 하늘의 심판자대신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소유할 수 있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성화됨으로써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생활을 신장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선물 중의 둘째인 중생에 대해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될 만큼 말했다. 칭의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보다 가볍게 논했다. 왜냐하면 먼저 믿음은 선행을 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편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얻는다. 그리고 이 문제가 부분적으로 관련된 선행의 문제를1301) 성도들의 선행의 성격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 문제들을 철저하게 토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토의를 진행할 때에, 이것이 종교 생활의 요점이라는1302)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문제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성격을 우선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구원을 세울 토대가 없으며, 하나님께 대한 경건을 수립할 기초도 없기 때문이다. 이 일을 알아야 할 필요성은 그것에 대한 지식에서 더 잘 나타날 것이다.
2. 칭의의 개념
우리는 출발점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모르는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할 때에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다음과 같은 표현들의 뜻을 설명하도록 하자.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과 믿음에 의해서 또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표현들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 의롭다고 인정되며, 의롭기 때문에 용납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미워하시므로 죄인이 죄인인 동안은 그리고 죄인으로 인정되는 동안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죄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죄인이 아니고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굳게 서며 모든 죄인들은 넘어진다.
무죄한 사람이 고소를 당해서 공정한 재판관 앞에 불려갔을 때에, 그의 무죄한 사실대로 판결이 나면, 그는 재판관 앞에서 "정당한 것이 인정되었다."("의롭다함을 얻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어떤 사람이 죄인들과의 교제에서 풀려나고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증거하시며 확인해주실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 같은 방식으로 어떤 사람의 생활이 순결하고 거룩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의롭다는 증언을 얻을 만할 때에는,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또는 그 행위의 완전성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와 반대로 행위에 의해서는 바르다는 증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신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나타날 때에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서 나타날 때에는 신앙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간단히 설명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3. 성경에 있는 용법
이 사실을 확인하는 명백한 증거가 성경에 많다. 우선 이것이 이 용어의 바른 뜻이며 가장 많이 통용되는 뜻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구절을 수집하고 비교하는 것은 너무 긴 작업이고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들의 주의를 환기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우리의 논제인 칭의를 특별히 다룬 구절을 몇 개만 소개하겠다.
누가복음에서는 일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했으며(눅 7:29), 그리스도께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의롭다함을) 얻느니라."고 하셨다(눅 7:35). 첫 구절에서(29절) 누가는 백성이 하나님께 의를 드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의는 하나님에게서 분리되는 일이 없으며, 온 세상이 빼앗으려고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35절에서도 누가는 구원에 대교리의 정당성을 변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그 자체가 정한 것이다. 누가의 이 두 구절은 같은 표현을 지니고 있다. 즉, 하나님과 그의 교훈에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드린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을 스스로 옳다(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라고 꾸짖으실 때에(눅 16:15), 말씀하시는 뜻은 그들이 선행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의가 없으면서 의롭다는 세평을 얻으려는 야심을 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이 뜻을 더 잘 이해한다. 히브리어로는 자기의 죄를 아는 사람들뿐 아니라, 정죄를 받는 사람들도 "죄인"이라고 부른다. 밧세바가 자기와 솔로몬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왕상 1:21)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와 아들은 수치를 당하며 죄인과 정죄받은 자들같이 인정되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문장의 전후 관계로 보아서, 라틴어로 읽을 때에도 이 말은 어떤 성질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해석해야 된다는 것을 곧 알 수 있다.3a)1303)
그러나 당면한 문제에 관련해서,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이방인들을 의롭다 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말할 때에(갈 3:8), 이것은 하나님께서 믿음에 의해서 의를 전가하신다는 뜻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지 않은가? 또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불경건한 자를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다고 말할 때(롬 3:26). 그것은 불경건하여 당연히 정죄를 받을 사람들이 믿음의 덕택으로 그 정죄에서 풀려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점은 그가 결론으로 외친 말에서 더욱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3-34). 이것을 바꿔 말하면 "하나님이 사면해주신 사람들을 누가 고소할 것인가? 그리스도께서 변호하며 보호하시는 사람들을 누가 정죄하겠는가?"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한다."는 뜻은 고소를 당한 사람에 대해서,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같이, 그 죄책이 없다고 무죄 석방을 선고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중재로 의롭다고 하시므로 하나님의 이 사면은 우리 자신의 무죄가 확증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이며, 그 결과로 우리 자신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도행전 13장에 있는 바울의 설교에 이런 말이 있다.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여기에 보면 죄의 용서를 말한 후에, 그에 대한 해석으로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말을 한다. 의롭다고 인정하는 것을 분명히 죄의 사면으로 해석하며, 의롭다함을 율법의 행위에서 분리시키고 있다. 의롭다함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받는다고 한다. 끝으로, 보속이 도입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죄의 용서와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 바울은 말한다. 그래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다고 할 때에(눅 18:14), 그가 어떠한 행위의 공로로 의를 성취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리가 옳은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행위가 옳다는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사면해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암브로시우스가 죄의 고백은 합법적인 칭의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었다.1304)
4. 칭의는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용납이며 죄의 용서이다
용어에 대한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말이 표현하려는 내용 자체를 주시한다면, 거기에는 아무 의심도 없다. 에베소서 1장 5-6절에서 바울은 확실히 "용납"이란 말로써 칭의에 대해서 말한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5-6).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고 한 것과 똑같은 뜻이다. 그뿐 아니라, 로마서 4장에서 그는 처음으로 칭의를 "의의 전가"라고 부르며 칭의를 죄의 용서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사함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7, 시 32:1)고 말하였다. 여기서 바울은 칭의의 일부분이 아니라, 그 전체를 논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이 죄를 값없이 용서받은 사람들은 행복하다고(시 32:1-2) 그 선언한 그 정의에 찬성한다. 이것을 보면 바울이 말하는 의는 단순히 죄액의 반대 개념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 가장 좋은 구절은, 그가 복음 전파사명의 요점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그의 은혜 가운데 기꺼이 받아들이시며,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기 때문이다(고후 5:18-20). 나는 독자들이 이 구절 전체를 심사숙고하기를 바란다. 이는 바울이 조금 뒤에 일종의 설명을 붙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 5:21) 화해의 수단이었다고 한다(고후 5:18-19 참조). 그가 "화해됨"이란 말과 "의로 인정됨"이란 말을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고 가르치는데, 이 주장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별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오시안더(Osionder)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을 논박함. 5-12)
5.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사상
그러나 오시안더(Osiander)는 "본질적 의"라는1305) 이상한 괴물을 도입해서, 값없이 주시는 의를 폐지하려는 것은 아니나 이 의를 깊은 안개 속에 묻어버리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른 문제들로 넘어 가기 전에, 이 황당무계한 공상을 반박할 필요가 있다.
우선 이 사변은 단순히 무기력한 호기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가 성경에서 많은 증거를 수집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하나이며, 우리는 그와 하나인 것을1306) 증명할 필요가 없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이 결합의 유대를 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속는다. 그가 빠진 난제들을 해결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의 신비한 힘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결합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본질을 사람 속에 이입하기 위해서 마니교와 비슷한 그 무엇을 생각하였다.1307) 여기서부터 다른 공상이 생겨났다. 즉,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리스도가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이미 인간성의 원형으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308) 그러나 나는 간단한 서술을 원하므로 그전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하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오시안더는 말하는데 우리도 그 말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본질이 혼합된다고 하는 데는 반대한다. 그리고 그는 이 원칙을 그의 기만적인 개념들에 잘못 적용한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바이다. 예컨대,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인인 것은 그가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의 의 자체이시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계획대로 다른 곳으로 넘겨야 할 문제를 여기서 간단히 다루는 것을 독자들은 양해하기 바란다. 그는 "본질적인 의"라는 용어에 대해서, 그것을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고 인정된다는 견해에 응답할 뿐이라고 변명하지만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적 죽음에 의해서 받는 의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생각을 분명히 발표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이 우리 안에 주입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본질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리스도뿐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맹렬히 주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나는 이것을 옳은 생각이라고 인정하지만 그는 이 생각을 패역하게 왜곡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내주의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 성령이 그리스도 안에 계시며, 신성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골 2:9), 그의 안에서 우리도 신성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아버지와 성령에 관해서 따로 제시하는 것은 단순한 사람들을 꾀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도록 도울 뿐이다.
그 다음에 그는 여러 가지 실체를 혼합하여,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우리 속에 주입하심으로 우리를 그의 일부로 만드신다고 한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자라며, 그가 우리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가 그의 지체가 되는 사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그리스도의 본질이 우리의 본질과 섞이는 것이 아니라면, 거의 아무 중요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서 말할 때에, 다음과 같이 자기 생각을 더욱 밝히 나타낸다. 즉, 우리는 중보자의 은혜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중보자 안에서 의가 단순히 또는 완전히 제공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와 본질적으로 결합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1309)
6. 오시안더는 죄의 용서와 중생을 혼합한다
가령 그가 한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실 때에, 본질의 결합에 의해서 그는 우리 것이 되시며 그것은 그가 사람이시므로 우리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신성의 본질이 우리 안에 주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상상해 보자. 그렇다면 그는 이런 진미를 먹어도 해(害)가 덜했을 것이며, 이 망상으로 인한 큰 싸움도 일어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검고 탁한 피를 뿜어 그 많은 꼬리를 숨기는 오징어와 같다.1310) 우리에게 구원을 자랑할 확신을 주는 유일한 의를 우리가 알면서 또 기꺼이 빼앗기고자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원칙을 맹렬히 배척해야 한다. 그는 이 논쟁 전체를 통해서 "의"라는 명사와 "의롭다함"이라는 동사의10a)1311)뜻을 두 방향으로 연장한다. 그래서 첫째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며 의는 값없이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 안에 거하면서 감동시키는 거룩함과 의로움이라고 한다. 둘째로, 그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죄를 속하고 하나님의 노여움을 푸셨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이 영원한 하나님이시며 생명이시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첫째 점을, 즉,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심은 용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중생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하신 후에, 그들의 악을 하나도 고치지 않고 그들을 본성대로 버려두시겠느냐고 묻는다. 이것은 대답하기가 매우 쉽다. 그리스도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없는 것과 같이, 그의 안에 있는 두 속성, 즉, 의와 거룩하심도 서로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신 사람에게 동시에 양자의 영을 주셔서(롬 8:15), 이 영의 힘으로 자신의 형상에 따라 사람을 개도하신다. 그러나 태양의 빛과 열을 서로 분리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는 태양의 빛이 지구를 덥게 하고 태양의 열이 지구를 비춘다고 하는가? 목전의 문제에 대해서 이 비교보다 더 적절한 것이 있는가? 태양은 그 열에 의해서 땅에 생명과 열매를 주며, 그 광선에 의해서 땅을 비추며 밝게 한다. 이에는 서로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쪽의 특성을 다른 쪽으로 옮기는 것은 이성이 금한다. 오시안더가 두 가지 은혜를 흔동하는 데는 그와 비슷한 불합리성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의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 사람들을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오시안더는 이 중생의 선물과 값없이 용납하심을 혼합해서 이 둘은 하나요,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 두 가지를 연결시키면서도 따로따로 기록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가 우리에게 더 잘 보이게 한다. 바울이 우리의 의와 성화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할 때에(고전 1:30), 그는 불필요한 말을 붙이지 않는다.1312)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하여 얻으신 구원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출발점으로 삼아우리는 거룩하며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논할 때, 그는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과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암시한다.
성경에 관해서 오시안더는 성경 구절을 인용할 때마다 그릇된 해석을 한다. "일하는 자"가 아니라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바울의 언명에 대해서(롬 4:4-5), 그는 "의롭다함"을 "의롭게 만든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똑같이 경솔하게 그는 로마서 4장 전장을 곡해한다. 우리가 조금 전에 인용한131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롬 8:33) 그는 동일한 속임수로 변질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 구절에서는 단순히 죄책과 무죄 방면이 문제가 된 것이 분명하고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 대조를 토대로 한 것이다. 결론에 있어서나 성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오시안더는 자기 자신이 무능한 해석자임을 증명하였다.
"의"라는 말에 대한 그의 논의도 이보다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로 인정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의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여러 가지 덕에서 뛰어나게 된 후였다고 주장한다.1314) 이것을 보면, 그는 두 개의 건전한 발언에서 출발하여 그릇된 생각으로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어낸 것 같다. 여기서 언급된 의는 아브라함이 소명을 받은 과정 전체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는 탁월하게 선한 사람이었고 장기간 그것들을 견지함으로써 더욱 선을 쌓았지만, 여기서 성령이 증거하시는 것은 다만 그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능숙하게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 사실에서 칭의에는 행위가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7. 칭의를 위한 믿음의 의의
믿음 자체에는 의롭다 할 능력이 없고 그 능력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고 오시안더는 항변한다. 나도 이 항의를 기꺼이 인정한다. 만일 믿음이 독자적으로 또는 어떤 고유한 능력에 의해서 의롭다 한다면, 믿음은 항상 약하고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의롭다 하는 일을 부분적으로밖에 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구원의 한 단편만을 주는 의는 불완전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상상을 하지 않는다. 올바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의롭다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음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하는 기능을 그리스도에게 옮긴다. 우리는 믿음을 일종의 그릇에 비교한다. 빈 영혼, 즉, 입을 벌린 영혼으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인다고 우리가 가르치는 것이, 의롭다 하는 권한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이 궤변가가 "믿음은 그리스도다."라고1315) 말하는 그 왜곡된 비유를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금이 들어 있다고 해서 질그릇을 보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이치는 마찬가지다. 믿음 자체는 가치나 값이 없는 것이지만,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를 의롭다고 할 수 있다. 돈이 가득한 질그릇이 부자를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나는 믿음은 의를 닫기 위한 그릇에 불과하며, 무지한 자들이 믿음과 그리스도를 혼동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위대한 은혜의 중요한 근거인 동시에 그 원천이자 분배자시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것으로 우리는 칭의를 고려할 때에 "믿음"이란 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문제를 처리하였다.
8.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오시안더의 주장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외면적인 말씀의 작용으로 내면적인 말씀을 받는다고 한다. 이런 주장으로 그는 우리를 제사장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켜 그의 외면적인 신성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양성을 분할하지 않고 그 육신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심으로써 우리에게 의를 주신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또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중보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하거나 우리를 위하여 의를 획득하실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시안더의 견해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므로 그의 신성에 의하여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그의 인성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 말이 신성에 관해서 옳게 적용된 것이라면, 특히 그리스도께만 국한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으로 적용된 것이다. 한쪽의 의가 다른 쪽의 의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본래 영원부터 계셨으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일관성이 없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의 의가 되셨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생각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가 되게 하셨다는 말과(고전 1:30) 어떻게 조화되는가?
이것은 중보자로서의 위격의 특이한 점이다. 이 위격에는 신성이 내포되지만 고유한 명칭에 의해 중보자는 아버지나 성령과는 구별된다.
오시안더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되시리라고 약속한 예레미야의 말 하나를(렘 51:10, 23:6, 33:16 참조) 어리석게도 기뻐한다. 그러나 그는 이 말에서, 우리의 의이신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시라는(딤전 3:16 참조) 사실 밖에는 추론해 내지 못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1316) 우리는 바울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한 말을(행 20:28) 인용했다. 이 말에서 죄를 대속한 피는 하나님의 것이며 신성을 가진 것이라고 추론한다면, 누가 이런 추악한 오류를 용인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시안더는 이 대단히 유치한 항변으로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의기양양해서 기뻐 날뛰며, 여러 장에 호언장담을 늘어놓는다.1317) 그러나 예레미야의 말은 곧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여호와가 다윗의 후손이 되실 때에 경건한 자들의 의가 되겠다고 하시는 것인데, 이사야는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라는(사 53:11) 의미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이는 아버지시라는 사실과 그가 의롭게 하는 일을 아들에게 맡기셨다는 사실과 그 이유로서 아들이 의롭다는 것을 부언하신 사실과 가르침 안에 그들이 말하는 대로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시는 그 방법과 수단을 두셨다는 것에 유의하자. 여기에 있는 다아트(t[d)라는 말은 피동형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당하다.1318) 그러므로 첫째, 그리스도께서 의가 되신 것은 그가 "종의 형체를 가진" 때이며(빌 2:7) 둘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스스로 아버지에게 복종하셨기 때문이다(빌 2:8).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은 그의 신성에 의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고 명령을 받은 직무에 따라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만이 의의 원천이시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우리는 의롭게 되지만, 불행하게도 하나님께 반대하여 그의 의에서 이탈되었기 때문에, 이 비교적 낮은 방법을 써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과 부활의 권능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게 할 수밖에 없다.
9. 중보자의 하시는 일로서의 칭의
만일 오시안더가 이 사역은 그 우월한 가치 때문에 인간성을 초월한 것이며 따라서 신성에 돌릴 수밖에 없다고 반박한다면 나는 첫번째 반박은 인정한다. 그러나 둘째 반박에 관해서는 그가 큰 망상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의 영혼을 그의 피로 정결하게 하실 수 없었을 것이며, 그의 회생으로 그의 아버지의 노여움을 풀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죄책을 사면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요약하면, 제사장의 직책을 다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육의 힘으로는 그 무거운 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 모든 일을 그의 인성에 따라서 수행하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었느냐고 물으면, 바울도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롬 5:19 참조). 그러나 그는 종의 모습을 취하시지 않고(빌 2:7) 어떤 다른 방법으로 복종 하셨겠는가? 이 사실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그의 육신에서 의가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결론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다른 말로서 바울은 의의 근원을 그리스도의 육신에만 둔다. 그런데 나는 오시안더가 바울의 이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오시안더는 하나님의 의를 큰 소리로 찬양하며,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유령 같은 "본질적 의"를 확인하시는 듯이 개선가를 부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속죄를 통해서 우리가 의롭게 된다는 말은 뜻이 훨씬 다르다.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 하나님이 시인하시는 의라는 옷이라는 것은 어린 학생들도 다 아는 일이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의 영광을 비교하는 것과 같다(요 12:43, 5:44).1319) 간혹 그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의의 근원이며, 그 의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인 것도 나는 안다. 그러나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분별력이 있는 독자들은 이 표현의 뜻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회생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오시안더가 우리와 의견이 일치한다면 용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서 속죄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속죄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의 신성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의와 구원에 인을 치시고자 하셨을 때에, 자신의 육신으로 확실한 보증을 삼으셨다.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부르시고(요 6:48), 그 이유를 설명하시려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라고 부언하셨다(요6:55). 이런 교수 방법은 성례전에서 볼 수 있다.1320) 성례전은 우리의 믿음을 부분적인 그리스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로 향하게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의와 구원의 두 가지가 그의 육신에 내주한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사람으로서 자신의 힘으로 의롭다 하며 생명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중보자 안에서 계시하시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평소에 그리스도는 우리를 향해서 열려 있는 샘이라고 말한다. 깊고 은밀한 샘 속에 숨겨져 있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을 것을 우리는 이 샘에서 길어내며 또 중보자라는 존재를 통해서 그것은 우리에게로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또 이런 의미에서, 만일 내가 제시한 확고하고 분명한 이유들을 오시안더가 수락한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으로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 이 일은 아버지와 성령께도 공통된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끝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나누게 하시는 의는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한 의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10.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어떤 성격을 가졌는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오시안더의 트집에 속지 않도록, 나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실 때까지 우리는 이 비할 데 없는 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므로 머리와 지체들과의 결합, 즉,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내주하심을 간단히 말하면, 신비로운 연합을1321) 우리는 최고로 중요시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자가 되심으로써 그가 받은 선물을 우리도 나눠가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봄으로써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옷 입으며 그의 몸에 접붙여지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서 그가 우리를 자기와 하나로 만드시기 때문에 그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의의 친교를 가졌다는 것을 자랑함으로써 믿음을 의로 생각한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중상을 반박하였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비우고 나가서, 그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그만이 우리 안에 계시게 한다고 우리가 말할 때,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권리를 빼앗는 것같이, 그는 우리를 중상한다. 그러나 이 영적인 유대를 멸시하는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혼합하여 큰 오류를 범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광적인 오류, 즉, "본질적 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쯔빙글리과(Zwinglian)"라고 불러 그의 악의를 드러낸다. 그것은 그들이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본체를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교만하고 자신의 기만에 걸린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을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나뿐 아니라 마땅히 겸손한 마음으로 공결해야 할 세계적 학자들까지도 공격한다. 나는 나 개인의 문제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공격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게는 아무런 악한 동기가 없기 때문에, 이 일을 더욱 진지하게 변호한다.
그가 그리스도의 본질적 의와 본질적 내주를 열광적으로 고집하는 사실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우선, 그가 성만찬에서 몸을 먹는다고 공상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일종의 조잡한 혼합물로서, 우리 속에 자신을 주입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불어 보내어, 우리가 그와 함께 참으로 의롭게 되게 하신다고 한다. 오시안더에 의하면, 이 의는 하나님 자신인 동시에, 하나님의 선 또는 거룩이나 완전성이라고 한다.
나는 그가 제시하는 성경의 증명들을 반박하는 데 많은 노력을 허비하지 않겠다. 그는 그릇되이 성경을 인용해서 그 뜻을 왜곡하여 하늘의 삶을 현세의 상태로 바꿔버린다.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너희로…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라고 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종말에 오실 때에 우리가 어떻게 되리라고 하는 복음의 약속이 현재 이루어진 것 같은 생각이다. 참으로 요한은,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요일 3:2).1322)
나는 한 작은 예만을 독자들에게 보이려고 하였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이 무가치한 일들을 무시한다. 반박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지루하고 무익한 수고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11. 오시안더의 본질적 의라는 생각은 구원의 확실성을 소멸시킨다
그러나 오시안더 사상의 둘째 단계, 즉,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의롭다고 하는 데는 더 많은 해독이 숨어 있다. 나는 총명하고 경건한 독자들이 이 가상을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그다지 유해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냉담하며 내용이 빈약하며 공허함에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약화시키며, 우리를 구름 위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고요한 기도, 즉, 속죄를 믿고 은혜를 받아들여, 고요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중 의라는1323) 것을 구실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불경건이다.
오시안더는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을 법적인 용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비웃는다. 우리는 실지로 의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비웃는 이유이다. 그는 또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을 무엇보다도 멸시한다. 그렇다면, 만일 하나님께서 무죄 방면과 사죄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 않으신다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한 것은(고후 5:19)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1절). 우선 나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에는 하나님께서 용서하심으로써 의롭다 하신다는 뜻이 포함되었다. 이것은 다른 구절에서 칭의가 송사와 대립되는 것과 같다. 이 대조법을 보더라도 이 표현이 법적인 용어에서 왔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히브리어를 조금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1324) 이 말의 근원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따라서 그 경향과 뜻이 여기서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허물의 사함을 얻고…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한 말은(시 32:1, 롬 4:7) 행위가 없이 받는 의를 묘사한 것이라고 바울이 말할 때, 이것이 완전한 정의인지 또는 불완전한 정의인지를 오시안더는 내게 대답하라. 바울이 예언자를 인용한 것은 죄의 용서가 의의 일부분이라든가 또는 사람을 의롭다 하는 일의 부수물에 불과하다든가 하는 주장을 지지하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바울은 값없이 받는 용서에 의의 전체를 포함시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죄를 덮어주시며, 그 불법을 용서하시고, 그 죄과를 그 앞으로 돌리시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바울이 판단하고 인정하는 이유는 그가 이런 방식으로, 즉, 자기의 원래의 본질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시안더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며, 그의 본성에 배치되는 짓이 된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이미 말한 것을 생각해야 한다. 즉, 칭의의 은혜와 중생은 서로 다른 일이지만 동시에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의인에게도 죄의 흔적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므로 그들의 칭의와 생활의 변화는(롬 6:4 참조) 매우 다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이 둘째 단계를 시작하신 후에, 평생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전진하시며, 어떤 때에는 그 전진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사람은 언제든지 그의 심판대 앞에서 항상 죽음의 판결을 받을 위험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부분적이 아니고 너그럽게 의롭다고 여겨주셔서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순결을 가진 듯이 하늘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기까지는 부분적인 의만으로는 우리의 양심에 평화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칭의에 대한 어떤 주장이 사람의 마음에 의혹을 불어넣으며, 구원에 대한 확신을 동요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자유롭고 담대한 기도를 방해하여 평화와 평온과 영적 기쁨을 주지 못할 때에, 그런 주장은 패악한 것이며 완전히 깨뜨려야 갈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반대 명제를 써서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며(갈 3:18),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헛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4). 행위에 중점을 두는 믿음은 흔들린다. 이는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행위에서는 의지할 것을 전연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칭의와 중생을 오시안더는 "이중의 의"라는 말로 혼동하지만, 바울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그는 자기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의에 대해서자기가 받은 바른 성품, 오시안더가 "본질적 의"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비통하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라고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한 의에서 피난처를 구하며, 거기서 생명과 사망과 비난과 기아와 전쟁과 기타 고난을 영광스럽게 극복하였다고 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롬 8:33). 아무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롬 8:38-3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위하여 완전하고 충분하며 유일한 의를 가졌으며, 그래서 그는 자랑할 확신이 감해지지 않으며, 그가 조금 전에 자기의 처지라고 통탄해 하던 비참한 노예 상태에서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 이 차이는 불의의 짐에 눌려 신음하지만 동시에 승리의 확신을 품고 모든 공포심을 극복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충분히 또 익숙히 살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오시안더의 항변을 와해시킨다. 그는 성도들에게 이 "이중의 의"를 털옷같이 입히지만, 역시 사람은 죄를 용서받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적어도 본래의 의가 없는 자들이 세상이 선하다고 인정하는 일정한 비례에 따라1325)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죄인이 인간적인 의 대신에 거저 주시는 의를 받는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까지 구분할 수 있는가? 한 근씩인가 또는 한 푼씩인가? 물론 그는 확신이 없을 것이다. 확신을 가지기에 충분한 의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 없을 것이므로 좌우로 흔들릴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한 재판관이 아니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말씀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최고의 심판자가 값없이 사면하실 때에 그를 정죄하며, "나는…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고 하시는 말씀이 그 완전한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큰 참람한 행위인가?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으로 견제하신 모세의 중보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용서하시지 말아 달라고 한 뜻이 아니라, 백성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책하지 말고 모두 한결같이 사면해 주시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멸망할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그가 의롭다고 하신 사람들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칭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 즉,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음으로써 자기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그들이 자기 자신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그들 자신으로 말미암는 의가 아닌 의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다.
12. 오시안더를 논함
오시안더가 독자들에게서 숨기고 있지 않다고 장담하는 그 신비에 대해서 나는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주목하도록 경고한다. 우선 그는 장황한 말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전가받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데(그의 말을 쓴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끝에 가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로서 주신 것은 그의 인성이 아니라, 신성에 의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의는 중보자로서의 위격에서만 발견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람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두 가지 의로써 그의 밧줄을 꼬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그리스도의 인성에서 의롭다 하는 직무를 제거해 버린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의 논쟁 방법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곳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가 되셨다고 하지만(고전 1:30), 이것은 영원한 말씀에만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는 의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참으로 그의 영원한 지혜였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이 이름을 그에게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그의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기 때문이다(골 2:3). 그는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것을(요 17:5 참조)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본질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습에 적용되며, 그리스도의 인성에 잘 부합한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도 빛은 암흑에 비취었으나(요 1:5), 그리스도께서 인성으로 의의 태양으로서 나타나시기까지는 그리고 자기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시기까지는(요 8:12), 그 빛은 숨겨져 있었다.
또 오시안더는 미련하게도 의롭다 하는 능력은 어느 피조물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천사와 인간을 훨씬 초월한 것이라고 반격한다. 천사들은 이 일을 위해서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께 보속을 치르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무 성과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인간인 그리스도께 속한 일이었다. 그는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율법에 복종하셨기 때문이다(갈 3:13, 4:4 참조)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것은 그의 신성 때문이라고 하는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시안더는 심히 비열한 비난을 가한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성중 한 가지 성은 버리고 더욱이 두 하나님을 만든다고 비난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고백은 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를 없애려고(히 2:14 참조)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보면, 우리는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가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라고 해서 그리스도께로부터 이 영광을 빼앗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해서 그 의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를 밝힐 뿐이다. 이 점에서 오시안더는 가증스런 오류에 빠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분명히 계시된 것이 하나님의 은밀한 은혜와 권능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의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우리를 위한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을 꾸준히 주장한다. 나는 그가 무분별하고 상식을 벗어나서 성경 구절들을 무수히 인용하여 독자들을 번거롭게 하며, 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본질적 의"라고 해석해야 된다고 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무시하겠다. 예컨대 다윗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하나님의 의에 호소할 때에 백 번 이상 호소하지만 오시안더는 번번이 서슴지 않고 그 뜻을 곡해한다.
그가 제기하는 다른 반대도 더 강력한 것이 못된다. 그는 우리를 바르게 행동하도록 움직이는 것이 의라고 정의하는 것이 정확하며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의욕을 일으키며 일을 행하게"(빌 J:13 참조) 하신다고 반박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를 개조하셔서 우리 생활을 거룩하고 의롭게 하신다는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로, 이 일을 하나님께서 친히 직접 하시는지, 그렇지 않으면 아들의 손을 통해서 하시는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성령의 모든 충만하심을 맡기셔서, 그의 풍성함에서 지체들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하신다. 다음에, 비록 의는 그의 신성의 은밀한 원천에서 우리에게 오는 것이지만, 우리를 위해서 육신으로 오셔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신 그리스도가(요 17:19) 그의 신성에 의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그리스도 자신도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의로우셨으며 만일 아버지의 뜻이 그를 밀어 주시지 않았다면, 그에게 부과된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1326) 오시안더가 첨부하는 내용도 이에 못지않게 불합리하다.
이미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 자신의 모든 공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했지만,1327) 이것은 오시안더 자신과 단순한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수단인 그의 공상에 아무것도 더 첨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의 의의 원천이며 시초이시므로 우리는 본질적으로 의로우며, 하나님의 의의 본질이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이런 추론을 누가 누구에게 허락하는가?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의로 호심경을 삼으신다"고 한다(사 59:17).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그리스도에게 이미 주신 무장을 빼앗으며, 그리스도를 완전히 구속자가 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는가? 예언자가 말하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자신 이외에서는 아무것도 빌려오시지 않으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아무 도움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뜻을 간단하게 다른 말로 바꿔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를 나타내 보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한다(롬 3:25). 그러나 이 말이 그가 다른 곳에서 "단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롬 5:19) 한 말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해서, 의를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하여 가련한 영혼들이 하나님의 순수한 자비에 전적으로 안주할 수 없게 만드는 사람은 희롱으로 그리스도께 가시 면류관을 씌우는 자이다(막 15:17, 기타).
(선행이 의롭다함을 위하여 유효하다고 하는 스콜라 사상을 논박함. 13-20)
13.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1328) 의는 믿음과 행위로 이루어진다고 상상한다.1329) 우선 믿음에 의한 의와 행위에 의한 의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즉, 한 쪽을 세우면 다른 쪽은 넘어져야 할 정도로 다르다는 것을 밝히기로 하자. 사도는 "모든 것을…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고 한다. 여기서는 반대 개념들을 비교하면서 그리스도의 의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의 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른 곳에서, 이것이 유대인들이 멸망한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우리 자신의 의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버리는 것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우리의 자랑이 없어진다고 말한다(롬 3:27). 여기서 행위에 의한 의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동안은 자랑할 이유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믿음이 모든 자랑을 없애버린다면, 행위에 의한 의를 결코 믿음에 의한 의와 관련시킬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4장에서 불평이나 구실의 여지가 전연 없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롬 4:2). 그러므로 그는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에 바울은 반대 개념을 써서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산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라고 다른 논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은혜로서 주시는 의는 믿음에 따라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행위의 공로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믿음과 행위의 두 근원에서 나와 합쳐지는 의, 이런 의를 생각 해내는 사람들의 몽상과는 작별해야 한다.
14. 중생한 사람의 행위도 칭의를 얻지 못한다
성경의 뜻을 곡해하며 무의미한 트집 잡기를 오락으로 삼는 이 궤변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교묘한 핑계를 발견했다고 자부한다. 그들은 "행위"의 뜻을 아직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 자기의 자유 의지의 노력으로 율법적인 문자에 따라서만 하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영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위가 사람 자신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선물이며 중생의 결실이라면 사람은 이런 행위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며, 우리 자비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이 자신의 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의를 가로채려고 하는 그들의 태도가 미련하다는 것을 설복한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대립시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도입하는 이 대오에서는 어떤 명칭이 그 행위들을 미화하든지 간에, 모든 행위가 배제된다(갈 3:11-12). 사도가 가르치려는 것은 율법이 명하는 것을 준행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율법에 의한 의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에 의한 의라는 것이다(롬 10:5,9).
그뿐 아니라, 후에 적당한 곳에서 알게 되겠지만1330) 그리스도의 은혜인 성화와 의는 서로 다르다. 따라서 의롭다하는 힘을 믿음에 돌릴 때에는 영적인 행위까지도 중요시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로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이유가 전연 없었다고 우리가 방금 인용한 구절에서1331) 한 바울의 말은 문자적이며 또는 외적인 유덕한 모양이나 자유 의지의 노력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의 생활은 영적이었고 거의 천사 같은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의를 얻기에 충분한 행위의 공로가 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5. 은혜와 선행에 대한 로마 교회의 교리
스콜라 학자들은 그들의 조작품을 유치하게 혼합한다. 더구나 그들은1332) 그에 못지않게 패악한 사상을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 감염시킨다. 두려움에 떠는 영혼을 진정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뿐인데도 그들은 영과 은혜라는 가면으로 하나님의 자비까지도 덮어버린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과 함께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의롭게 될 만한 특별히 유익한 행위가 없으므로 행위로써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황주의에 속한 일반 사람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속는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공로에 대한 보상을 기다리는 양심의 화신이 믿음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의를 전가해 주시는 일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성령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8)고 한 말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방법에 유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저술을 보면, "은혜"라는 말을 쓸 때에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롬바르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다함을 받는 길이 두 가지라고 설명한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의롭다 하며 동시에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이 자극을 받아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고 한다. 둘째로, 이 사랑을 통해서 마귀가 우리를 사로잡는 데 사용하는 죄가 소멸되어, 마귀가 우리를 정죄할 구실이 없어진다는 것이다.1333)
이와 같이 롬바르드가 칭의 안에서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지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에 의해서 선행으로 인도되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다. 분명히 그는 어거스틴의 견해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멀리서 따라갈 뿐이며, 바르게 본받지 않고 상당히 어긋난 쪽으로 가기까지 한다. 어거스틴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을 롬바르드는 모호하게 만들며 어거스틴의 생각이 다소 오염된 때에 롬바르드는 아주 썩게 만든다.
스콜라 학파들은 점점 더 타락해서 드디어 파멸에 빠지게 되었고 일종의 펠라기우스주의로 전락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를 적어도 그의 표현 방법을 우리는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는 사람에게 의를 얻을 자격이 없다는 것과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만 온다는 것을 훌륭히 가르치지만, 여전히 은혜를 성화에 포함시키며, 우리는 은혜로 인하여 성령을 통해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고 한다.1334)
16.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데 대한 성경의 판단
그러나 성경은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해서 이와는 훨씬 다르게 가르친다. 즉, 우리 자신의 행위를 보지 말고 하나님의 자기와 그리스도의 완전성만을 보라고 한다. 참으로 칭의의 순서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의 순결하고 값없이 베푸시는 인애하심으로써 죄인을 포용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다른 아무것도 찾으시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는 비참한 상태만을 보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을 돌보아주실 이유를 자신 안에서 찾으신다. 다음에 사람이 하나님의 인애를 느끼게 하셔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던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에서 구원 전체의 근거를 얻도록 하신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체험인데 죄인이 복음의 교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을 인정할 때에, 그는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소유하게 되며,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와 죄의 용서를 받아 의롭다함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한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중생하였으나 그가 받을 영원한 의는 그가 원하는 선행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의 안에 장만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들을 하나씩 숙고한다면, 우리가 표명한 의견이 분명히 설명될 것이다. 여기서 논술한 순서보다 더 좋은 순서로 배열할 수도 있을 것이나 여러 가지 점이 서로 부합하여 우리가 전체 사항을 바르게 설명하고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다면, 배열순서는 문제가 아니다.
17. 믿음의 의와 율법의 의에 대한 바울의 견해
믿음과 복음과의 관계에 대해서 위에서 확립한 것을 여기서 회상해야 한다. 복음에서 제시되는 의를 믿음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믿음이 의롭게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의가 제시된다고 하므로 행위에 대한 고려는 일체 배제된다.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밝히지만, 그 중에서도 두 구절에서 가장 명백하게 밝혔다. 그는 로마서에서 율법과 복음을 비교하여,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롬 10:5)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 10:6)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롬 10:9) 구원을 얻는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바울이 율법과 복음을 구별해서, 율법은 행위에 의를 돌리고 복음은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거저 의를 준다고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중요한 구절이며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의는 율법의 모든 조항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를 많은 곤란에서 구출해 낼 수 있다. 바울이 약속과 율법을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빈번히 대립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갈 3:18). 같은 장에는 이 생각을 표현하는 여러 구절이 있다.
그런데 물론 율법에도 그 자체의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하는 비교가 부적당한 것이 아니라면, 복음의 약속에도 어떤 특이한 점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약속은 값없이 주는 것,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는 것이지만, 율법의 약속은 행위를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 아닌가? 사람이 자기의 힘과 자유 의지로 하나님 앞에서 주책없이 의를 자랑할 때에, 그런 의만이 배척되는 것이라고 하여1335) 나를 반대하고 위협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바울은 오해할 여지가 없는 말로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은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다고 하기 때문이다(롬 8:3 참조). 보통 사람뿐 아니라,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는 없다. 물론, 율법의 극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여 이런 사랑을 품게 만들 때에 왜 그것이 우리의 의의원인이 되지 못하는가? 성자들도 사랑이 불완전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서는 상을 받을 공로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18. 칭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고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 구절은 이것이다.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 3:11-12 참조). 행위는 믿음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히 믿음에서 분리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 주장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바울은 율법과 믿음은 다르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율법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런 관계를 보면,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사람들은 행위의 공로와는 별개로, 즉, 행위의 공로가 없이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믿음은 복음이 말해주는 의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 복음이 율법과 다른 점은 의를 행위에 연결시키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만 맡기는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자랑할 이유가 없다(롬 4:2-3)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고 바울은 이 주장을 강화하는 의미에서, 보수를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에서 믿음의 의가 성립된다고 부언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참으로 그가 여기서 쓰는 말들의 뜻은 이 구절에도 적용된다. 그는 조금 후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유업을 받으며, 이 일은 은혜로써 오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또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니, 이 유업은 거저 받는 것이라고 추론한다(롬 4:16 참조). 믿음이 행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면, 바울의 추론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는 다른 구절에서도 확실히 같은 의미로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것이라"고 가르친다(롬 3:21). 그는 율법을 배제함으로써, 우리가 행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나 행함으로써 의를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다. 우리는 빈손으로 의를 받게 되는 것이다.
19. "믿음만으로" 통해서
사람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롬 3:28)1336) 하는 우리의 교리에 대해서, 궤변가들이 잡는 트집이 어느 정도로 공정한가를 독자는 이제 알 것이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말씀이 성경에 빈번히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감히 이 교리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만"이란 말이 성경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이 말을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바울이 거저 주시는 의가 아니면 믿음에서 오는 의라고 할 수 없다고(롬 4:2이하) 주장하는 데 대해서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하려는가? 거저 주는 선물과 행위가 어떻게 서로 어울릴 수 있는가?바울이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고(롬 1:17) 한 말을 그들은 어떤 기만 수단으로 회피할 것인가?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면, 확실히 그 의는 불구가 된 의나 반쪽 의가 아니라, 완전하고 충실한 의일 것이다. 그러므로 거기는 율법이 관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은 거짓된 구실, 분명히 어리석은 구실을 만들어서 이 "만"이란 말을 제거해야 된다고 고집한다. 모든 것을 행위에서 빼앗는 사람이 모든 것을 믿음에만 돌리는 것이 아닌가? 다음에 열거하는 말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롬 3:21),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롬 3:28).
여기서 그들은 교묘한 궤변을 쓴다. 그들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고 오리겐과 기타 고대 교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지만, 그것은 아주 미련한 구실에 불과하다. 그들은 율법의 의식적인 행위는 배제되지만, 도덕적 행위는 그렇지 않다고 지껄인다.1337) 끊임없는 언쟁으로 그 방면에 능숙하게 된 그들은 논리의 초보자라 이해하지 못한다. 사도가 자기의 견해를 증명하기 위해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할 때에 정신없이 지껄인 것인가?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갈 3:12, 3:18), 또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 그들이 미치지 않았다면, 의식을 행하는 사람에게 생명이 약속되었다거나, 의를 어기는 사람들에게만 저주가 선언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이 구절들이 도덕적인 면의 율법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의롭다 하는 권한에서 도덕적 행위가 배제된 것이 틀림없다. 바울은 같은 목적으로 다른 논법을 쓴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으로(롬 3:20), 의는 생기지 않는다. "율법은 진노를 키우게"하므로(롬 4:15),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양심에 확신을 주지 못하므로 의도 주지 못한다. 믿음을 의로 여기시므로 의는 행위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행함 없이 얻는 것이다(롬 4:4-5).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으므로 우리의 자랑은 제거되었다(롬 3:27).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1-22). 그러면 이런 발언들은 의식적 행위에 적용되고 도덕적 행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감히 지껄일 수 있으면 지껄여 보라. 어린 학생들이라도 그런 철면피를 야유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는 능력이 율법에 없다고 할 때에, 이 말씀은 확실히 율법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20. "율법의 행위"
사도가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율법의"라는 제한을 첨부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곧 설명할 수 있다. 행위는 귀한 것이지만, 행위의 가치는 하나님이 시인하시기 때문이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시인하시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행위에 대한 의를 하나님에 천거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시지 않았다면, 누가 감히 당연하게 보상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로 행위가 의라는 이름과 보상을 얻기에 충분하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또 사람이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에, 행위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사도는 다른 곳에서, 언약을 한 후 사백삼십 년이 지나서 율법을 주셨다고 선언한다(갈 3:17). 무지한 자들은 율법이 선포되기 전에도 의로운 행위가 있을 수 있었다는 근거를 들어 이 논법을 비웃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증거와 허락이 있어야만 행위에 큰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율법이 있기 전에는 행위에 의롭게 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사실로 생각한 것이다. 그가 칭의의 조건을 율법의 행위에서 빼앗으려고 할 때에, 율법의 행위라는 말을 한 분명히 이유는 율법의 행위만이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임이 명백하다.
그는 간혹 아무런 제한도 가하지 않고 모든 행위를 부정한다. 예컨대 다윗의 증거를 근거로 삼아서, 행위와는 별도로 하나님께서 의를 인정해주시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한다(롬 4:6, 시32:1-2).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트집을 잡더라도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저 특수한 표현을 일반적 원칙으로1338) 생각한다.
또 그들은 세밀하나 어리석은 구별을 하려고 무의미한 노력을 한다. 즉, 우리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으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사랑에 의존한다고 한다.1339) 사실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만이(갈 5:6) 의롭다함을 얻게 한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의 힘이 사랑을 행하는 데서 오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믿음이 의를 얻게 하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도록 인도하기 때문이고 그 외의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도가 역설하는 일이 모두 와해되고 말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빛으로 여기거니와"(롬 4:4). 바울이 그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당연히 보상을 받을 만한 행위가 없는 곳 이외에는 믿음의 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당연히 은혜를 베풀어야 할 경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의를 부여하는 곳에서만 믿음이 의로 인정된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죄가 용서된다. 21-23)
21. 칭의와 화해와 죄의 용서
믿음의 의는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 화해는 곧 죄의 용서라고 정의한 말이1340) 얼마나 옳은가를 이제 검토해야 하겠다. 우리가 항상 돌아가야 할 원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죄인인 동안은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사람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 원리를 이사야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1-2)라고 잘 표현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사람과 하나님을 분리시키니, 하나님의 얼굴을 죄인에게서 돌이키시게 한다는 말을 듣는다. 죄인을 상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는 이질적인 일이므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다시 받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원구라고 가르친다(롬 5:8-10). 그래서 주께서 받아들여 자신과 하나가 되게 하신 사람은 주께서 의롭다 하신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지 않고는 자신의 은혜 가운데 받아들이거나 자신과 결합시키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일이 죄의 용서로써 이루어진다고 부언한다. 주께서 자신과 화해시키신 사람들이 만일 행위에 의해서 판단된다면, 그들은 죄인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에서 해방되고 죄를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포용하시는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써 오점이 씻길 때에 정결하게 된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의는 한 마디로 "죄의 용서"라고 부를 수 있다.
22. 칭의와 죄의 용서 사이에 있는 긴밀한 관계를 성경에 의하여 증명함
내가 이미1341) 인용한 바울의 말은 이 두 가지 점을 아름답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하는 내용을 요약하여 말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기서 바울은 의와 화해를 서로 구별하지 않고 말하여, 서로 한 쪽이 다른 쪽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이 의를 얻는 방법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라고 그는 가르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하신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가를 더 의심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윗의 증거를 인용하여 로마 교회 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행위와는 별도로 의를 돌려주신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윗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롬 4:6-8, 시 32:1-2). 분명히 다윗은 여기서 의를 말하는 대신에 복을 말한다. 그는 죄가 용서되는 것을 복이라고 하므로 우리는 다른 정의를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구원을 아는 지식이 죄의 용서에 있다고 노래한다(눅 1:77). 바울이 안디옥 사람들에게 구원의 요점에 대하여 설교할 때에도 이 원칙을 따른다. 누가가 보고한 것을 보면, 바울은 설교를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로 끝맺는다. 바울은 죄의 용서와 의를 연결하여, 둘이 똑같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을 근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얻는 의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라고 바른 추론을 한다.
죄인은 행위에 의하지 않고 거저 용납해주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성경에서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며, 고대 저술가들도 간혹 그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어거스틴도 그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의 의는 완전한 덕성에 있지 않고 죄의 용서에 있다."1342) 베르나르드의 유명한 말도 이와 부합한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의다. 그러나 사람의 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1343) 그는 전에도 "그리스도는 죄의 사면에 있어서 우리의 의가 되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비로 용서를 받는 자들만이 의롭다."1344) 라고 말한 적이 있다.
23.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것이다
이 점을 보아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분명하다. 이 말은 사람이 자신만으로서는 의롭지 않으나 그리스도의 의가 그에게 전가되며 전달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과 같다. 이것은 신중히 고찰할 만한 점이다. 참으로 여기서는 저 경박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사람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하나님의 영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의롭게 되기 때문이라고1345) 하는 이 경박한 사상은 위에서 말한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며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다. 자기 밖에서 의를 찾으라는 지시를 받는 사람은 그 자신 안에 의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뿐 아니라, 사도는 극히 분명하게 주장한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1346)
우리의 의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의를 소유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기 때문이란 것을 여 기서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의를 완전히 또 풍부하게 가졌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의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율법의 의가 이루어졌다고(롬 8:3-4)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의를 이루는 방법은 다만 한가지이며, 우리는 전가에 의해서 그것을 얻는다. 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를 우리에게 나눠주시며, 놀라운 방법으로 자신의 힘을 우리 안에 넉넉히 부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이 조금 전에 한 말에서도 똑같은 뜻을 표명한 것이 명백하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다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고1347) 선언하는 것은 우리의 의를 그리스도의 순종에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의 순종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곱이 축복을 받은 것을 이 의의 한 예로 해석한 암브로시우스의 말은 아름답다고 나는 생각한다. 야곱은 자기에게 장자의 권리가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형의 옷 안에 숨고 향기 나는 형의 겉옷을 입은 후에(창 27:27) 다른 사람으로 행세하면서 아버지의 호감을 얻고 자기를 위하여 축복을 받았다. 그와 같이 우리도 우리의 맏형 그리스도의 고귀한 순결 밑에 숨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려고 한다. 암브로시우스의46x)1348)말은 이렇다. "이삭이 옷의 향취를 맡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육신의 연약은 행위를 방해하나 믿음의 광채는 죄의 용서를 얻게 하며 행위의 과오를 덮기 때문이다."1349)
참으로 이것은 진리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구원을 얻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취로 좋은 냄새를 풍기며, 우리의 악을 그의 완전성으로 덮고 묻어버려야 한다.
제 12 장 우리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칭의 교훈을 깊이 확신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대를 우러러보며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존엄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칭의를 논함. 1-3)
1.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아무도 의롭지 않다
이 모든 일은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완전히 사실이라는 것이 증명되지만, 이 일들이 얼마나 필요하냐 하는 것은 이 논의 전체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분명히 깨달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은 무리의 논의는 인간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늘 법정의 공의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행위의 성실성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는 척도로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통 놀랄 만큼 경솔하고 대담하게 하나님의 심판을 단정한다.
사실 행위에 의한 의를 가장 자신 있게, 가장 요란하게 떠드는 자는 현저한 병에 걸려 괴이한 모습을 보이거나, 피부 속까지 곪아서 뒤뚱거리는 인간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공의를 느낀다면, 그렇게 까지는 우롱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면 그것을 존중할 줄도 모르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해서 모든 부분이 완전무결한 것, 아무 부패나 오염이 없는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이렇게 완전한 사람은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수도원의 회랑에 앉아서 누구든지 사람을 의롭게 하는 행위 가치에 대해서 쉽게 지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되며, 경박한 언쟁을1350) 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유희를 버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진정한 의에 관해서 유익한 탐구를 하고 싶으면, 유의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나는 주장한다.
하늘 심판자가 우리에게 책임을 추궁하실 때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1351) 이것이 그 문제이다. 우리는 이 심판자를 우리의 마음이 본래 상상하는 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묘사하는 대로 마음에 그려야 한다. 그의 광채 앞에서는 별들이 어두워지며(욥 3:9) 그의 힘은 산들을 녹이며 그의 진노는 땅을 떨게 만든다(욥 9:5-6 참조). 그의 지혜는 지혜 있는 자들을 자기들의 간계에 빠지게 하며(욥 5:13), 그의 순결에 비하면 모든 것이 불결하여(욥 25:5 참조), 그의 의는 천사들도 감당할 수 없으며(욥 4:18 참조), 유죄한 자를 무죄하다고 아니하시며(욥 9:20 참조), 그의 복수에 한번 불이 붙으면 지옥 밑바닥까지 뚫고 들어간다(신 32:22, 욥 26:6 참조). 그가 사람들의 행위를 심사하기 위하여 심판대에 앉으셨다고 생각해 보자. 누가 그의 보좌 앞에 자신 있게 설 것인가? "누가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겠으며…누가 영영히 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도다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라고(사 33:14-15) 선지자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있으면, 누구든지 앞으로 나오라. 아무도 나오는 자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말이 들려온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시 130:3).
또 다른 곳에도 쓰여 있듯이 참으로 모든 사람은 곧 멸망할 것이다.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욥 4:17-20).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5-16)라고 하였다.
사실 욥기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를 말한다. 이 구별은 계속할 가치가 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모든 이해력을 초월하는 의 앞에서는 검사에 견딜 수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욥은 양심에 부끄러운 일이 없지만 천사들의 거룩도 하늘 저울로 달 때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연 실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의를 나는 논하지 않겠다. 나는 다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려고 한다.
기록된 율법의 표준에 따라 우리 생활을 검토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저주를 말씀하신 것에 공포와 고민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무도 둔감하다. 예컨대 이런 일반적인 저주가 있다.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갈 3:10, 신 27:26). 간단히 말하면, 만일 모든 사람이 하늘 재판관 앞에서 자기의 죄책을 인정하며, 용서를 받고자 기꺼이 엎드려 자기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논의 전체는 어리석고 무력하게 될 것이다.
2. 사람 앞의 의와 하나님 앞의 의
우리는 허망한 자랑을 할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위로 향하고 두려워 떨 줄 알아야 한다. 사람과만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지 못할 것을 가졌노라고 누구나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갈 때 우리의 그런 확신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만다. 또 우리의 육체가 눈에 보이는 하늘과 관련해서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 하나님과 관련해서 우리의 영혼에도 나타난다. 가까운 물건만을 볼 때에는 눈의 식별력에 자신이 있다. 그러나 태양을 볼 때에는 우리의 시력은 엄청난 광채로 마비되며, 땅에 있는 물건을 볼 때에 느끼던 강한 힘은 없어지고 무력함을 느낄 뿐이다.1352) 그러므로 우리는 빈껍데기뿐인 자기 자신에게 속지 말아야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동등하거나 또는 우월하다고 느끼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아무 가치도 없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일에 대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 이런 경고를 듣고도 우리의 야성이 길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하신 대답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5). 사람에게로 가서 당신의 의를 교만하게 자랑하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당신의 의를 미워하신다.
그러나 성령으로부터 참된 교훈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은 어떻게 말하는가?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다른 종은 조금 다른 뜻으로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과 쟁변하려 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욥 9:2-3)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성격이 어떻다는 것을 분명 히 듣는다. 곧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로는 결코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다. 우리의 천 가지 죄를 검토할 때에, 우리는 하나도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인 바울이 자기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이 없지만,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에(고전 4:4), 그는 이런 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3. 진정한 의의 증인으로써 어거스틴과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드
이런 예는 성경에 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저술가들도 모두 이것이 그들의 견해란 것을 표시하였다. 어거스틴은 "경건한 사람은 모두 이객을 육신의 짐을 지고 현세의 생명의 연약함 중에서 신음하면서 한가지 희망을 품고 있다.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시며,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이 되셨다는 것만이 그 희망이다."(딤전 2:5-6 참조)1353)라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행위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 있는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하였으니 다른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베르나르드는 "구주의 상처를 제외한다면 약한 자가 안전하고 든든하게 쉴 곳이 어디 있는가? 구주의 힘이 강할수록 나는 더욱 안심하고 거기서 산다.
세상은 위험하고, 육체는 내리누르며, 마귀는 올무를 놓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는다. 이는 견고한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나는 중대한 죄를 지었으며 나의 양심은 어지럽다. 그러나 나는 내 주의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1354) 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에서 그는 후에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주의 자비가 나의 공로다. 분명히 그에게 자비가 있으면 나에게도 공로가 있다. 주의 자비가 풍성하면, 나의 공로도 똑같이 풍부하다. 나는 자신의 의로운 행위를 노래할 것인가? 오, 주여, 저는 당신의 의만을 기억하겠나이다.
당신의 의는 또한 저의 의옵나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주를 나의 의로 만드셨다. 또 다른 곳에서 "사람을 전적으로 안전하게 만드시는 일을 전적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그의 완전한 공로가 된다."고 했고 같은 뜻으로, 그는 평화를 유지하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린다.
"당신의 영광이 여전히 쇠하지 않기를 바라나이다. 저는 평화가 있으면 만사가 형통하겠나이다. 또한 일체의 영광을 거부하나이다. 제 것이 아닌 것을 횡령한다면, 주신 것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더욱 분명히 말한 구절이 있다. "무슨 까닭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자랑할 더욱 확실한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에 있지 않은가? 무슨 공로로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이는 특히 예언서에 "주 여호와의 말씀에…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고 했기 때문이다(겔 36:22,32).
공로로는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는 것이 곧 넉넉한 공로이다. 그러나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넉넉한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는 것은 심판을 받기에 넉넉하다. 베르나르드가 선행에 대해서 공로란 말을 많이 쓰는 것은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서 용서해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목적은 위선자들의 가슴에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위선자들은 방자한 죄악 생활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하면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곧 이 점을 설명한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행복하다."
교회는 담대할 이유는 있으나 공로는 없다. 공로가 있으나, 가치 있는 공로가 되게 하려면 있는 체하지 않아야 한다.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공로가 아닌가? 그러므로 교회는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담대하게 자랑한다. 주의 풍성한 자비가 자랑할 까닭을 넉넉히 제공하기 때문이다.1355)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적인 자기비판은 선행이 있노라는 생각을 일체 버리게 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게 한다. 4-8)
4. 하나님의 엄숙한 심판을 생각하면 모든 자기기만이 없어진다
이것은 사실이다. 각성한 양심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에는, 이것만이 안전한 피난처이며 마음 놓고 호흡할 곳임을 깨닫는다. 밤에 찬란한 별들이 태양 앞에서 빛을 잃는다면, 인간의 가장 회귀한 순진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순결과 비교할 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비교는 지극히 엄격한 시험이 될 것이며, 마음속에 가장 깊이 숨어있는 의지까지도 드러낼 것이다. 바울이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라고 한 것과 같다(고전 4:5).
이렇게 되면 게으르게 숨어 있던 양심은 이미 잊어버린 일까지도 모조리 실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를 고소하는 마귀는 지금까지 우리를 시켜 짓게 한 죄악을 모두 알므로, 우리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밖에 보이는 선행만을 존중하며 자랑하지만, 곳에서는 그런 것이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서 요구되는 것은 순결한 의지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기도취에 빠져 담대하게 자기를 자랑하는 위선은 그 때에는 당황하며 붕괴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느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난 체 하는 그 위선뿐이 아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속이며 자기에게 아첨하는 그 위선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이런 광경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잠시 동안은 즐겁고 평화롭게 자기의 의를 구축할 수 있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판으로 빼앗길 것이다. 꿈에 많은 대물을 쌓았다가도 깨고 나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같이 진지하게 진정한 의미의 의의 규준을 탐구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행위를 그 자체의 가치대로 판단한다면, 모두 쓰레기와 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드시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보통 의라고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순전히 불의이며 정직이라고 보는 것은 부패이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은 치욕이다.
5. 모든 자기 찬양을 버리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생각해 본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와서 자기에 대한 아첨이나 맹목적인 사랑을 일체 버리고, 자기를 검토하는1356)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 점에서 본래 맹목적이다. 이는 아무도 잘난 체하는 악폐를 경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악폐가 우리 모든 사람의 본성에 내재한다고 선언한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라고 솔로몬은 말한다(잠 21:2).
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잠 16:2)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은 이 망상 때문에 무죄 방면이 되는가? 물론 되지 않는다. 같은 구절에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잠 16:2) 하였다. 바꿔 말하면, 사람은 자기가 쓰고 있는 의의 가면 때문에 우쭐해 하지만, 주께서는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불결을 저울에 다신다.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런 아첨에서는 유익을 얻지 못하므로 우리는 알면서 자기기만에 빠져 멸망해서는 안 된다. 자기 검토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심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불러내야 한다. 이는 우리의 패악성의 비밀한 곳을 심판대의 빛으로 철저히 드러낼 필요가 있으며, 너무도 깊이 숨어 있어서 다른 방법으로는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에 있는 말씀들의 가치를 분명히 깨달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부녀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하물며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랴"(욥 25:4, 6),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욥 15:16).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그 때라야 우리는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순전할지라도 나의 패괴함을 증거하리라."(욥 9:20)는 욥과 같은 체험을 할 것이다. 예언자가 이스라엘에 대해 불평한 말인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이란 말은 한 시대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에 적용된다. 참으로 그는 여기서 구속의 은혜를 받게 될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한다. 이 검토의 엄격성은 우리를 완전히 놀라게 할 때까지 되어야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한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선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꺾지 않는다면 속고 있는 것이다. 여기 유명한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약 4:6, 잠 3:34 참조).
6. 하나님 앞에서는 무엇이 겸손인가
그러나 우리가 겸손하게 되는 방법은 철저하게 가난하고 부족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가 아직 무엇을 가졌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그것을 겸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게 생각해야 하며, 우리의 의에 어느 정도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생각을 함께 가진 사람들은 지금까지 파멸적인 위선을 가르친 것이다.1357)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과 자기 마음에 느끼는 것이 반대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거짓말을 하는 악행이다. 그러나 올바른 느낌을 가지려면, 우리는 즉시 자기에게 있는 고귀한 듯한 것을 일체 짓밟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주께서 겸손한 백성을 구원하시며 교만한 눈을 낮추시리라는(시 18:27, 라틴역 17:28 참조) 예언자의 말을 들을 때에 첫째로, 우리는 모든 자랑을 버리고 완전히 겸손하게 되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닫힐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둘째로, 이 겸손은 어떤 점잖은 행동으로 우리의 권리의 털끝만한 부분을 주에게 양보하는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어느 정도의 우월감을 가졌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교만하거나 모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겸손하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다는 것은 우리 마음을 정직하게 바치며 복종하는 것을 의지한다. 자기의 비참함과 빈곤함을 알고 진실하게 굴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서나 겸손을 이렇게 설명한다.
주께서 스바냐서에서 "내가 너의 중에서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를 제하여…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1-12)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은 누가 겸손한 사람인가를 분명히 지적하시지 않는가? 그 사람은 자기의 빈곤함을 알고 고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자랑한다"고 하신다. 번영하여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자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하시려는 겸손한 사람에게는 주를 바라는 것만을 남겨주셨다. 이사야서에도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사 66:2)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손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고 하였다.
우리는 "통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땅에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판단에 따라 겸손한 사람과 함께 높임을 받으려면,1358) 우리 마음에 이런 통회로 인한 상처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있는 손에 교만이 꺾이며, 수치와 치욕을 당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신다
우리의 지존하신 주께서는 말씀으로 하는 설명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비유로 올바른 겸손의 모습을 그려 보이신다. 주께서는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고 설명하셨다(눅 18:13). 세리가 한 행동을 가짜 겸손의 표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더 가까이 오지 못한 것, 가슴을 치면서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은 거짓이 아니라 그가 충심으로 느낀 것을 고백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주께서 소개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보통 사람들, 즉, 강탈하거나 불의하거나 간음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매주 두 번씩 금식하며, 가진 것의 십일조를 바치기 때문에 감사하노라고 한다(눅 18:11-12). 그의 공개적인 고백에서는 그에게 있는 의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기를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 앞을 떠날 때에는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고 그의 미움을 받았다. 세리는 자기의 불의를 인정하기 때문에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눅 18:14). 그러므로 우리의 겸손을 주께서 심히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생각을 일체 버리고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즉, 우쭐하는 생각이 차 있는 동안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열리지 않으며 따라서 자비를 받을 수 없다. 아무도 이 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땅에 보내실 때 그리스도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슬픈 자를 위로하되…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사 61:1-3). 이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만을 불러 자신의 은혜를 받게 하신다(마 11:28). 그리고 다른 곳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말씀하신다(마 9:13).
8.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과 자기만족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막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면, 우리는 모든 교만과 자기만족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의를 미련하게 믿을 때, 하나님 앞에 추천할 만한 공로가 있노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교만하게 된다. 행위에 대한 자신이 없더라도 자기만족은 있을 수 있다. 많은 죄인들이 그 죄악 생활의 재미에 취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그야말로 취한 것처럼 자기들에게 베풀어진 자비를 얻으려고 애쓸 줄을 모른다. 자기의 의에 대한 확신과 같이 그런 태만도 버려야만 우리는 비워지고 주린 마음으로 거리낌 없이 주의 앞으로 달려가, 주의 주시는 좋은 것으로 배부를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불신하는 생각이 깊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충분히 믿을 수 없을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우선 우리 안에서 타도되지 않으면, 주를 향하여 충분히 비약할 수 없을 것이며, 우리 자신 안에서 이미 절망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위로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감을 완전히 뽑아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만 믿고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을 준비가 된다. 어거스틴은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선물을 받아 안을 때에"라고 말한다.1359) 그가 우리 안에서 공로를 구하신다면, 우리는 그의 선물을 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나르드도 이와 일치하는 뜻으로 교만한 자들을 불성실한 하인과 비교한다. 그들은 자기를 지나쳐 가는 은혜를 자기의 것인 듯이 생각하여 사소한 일에도 자기의 공로를 주장한다. 이는 마치 벽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면서 자기가 그 빛을 낸다고 하는 것과 같다.1360)
이 문제에 시간을 더 보내지 않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일반적이며 확실한 원칙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말하겠다. 즉, 자기를 비우는 사람은, 즉, 없는 의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허무한 가짜 의를 비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의 열매를 분배받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만족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이다.
제 13 장 거저 주시는 칭의에 관하여 유의할 두 가지 사항
1. 칭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계시는 그의 공의에 도움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일에 유의해야 한다. 즉, 주의 영광에 손실이나 지장이 없게1361) 하며, 우리의 양심이 주의 심판대 앞에서 평화로운 안식과 고요한 평온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
성경에서 의가 문제될 때마다 성경은 하나님께만 감사를 드리라는1362) 간곡한 권고가 매우 자주 나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시는 것이라고 증거한다(롬 3:25). 그러나 그는 곧 이 의를 나타내 보이신다는 뜻을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고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만이 의로우시다고 인정되며, 자격 없는 자에게 의의 선물을 거저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는 충분히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신다(롬 3:19). 이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호할 구실이 있는 동안은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소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스겔에는, 우리가 우리의 불의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겔 20:43),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겔 20:44).
만일 이런 일들이, 즉, 우리 자신의 불의를 알고 고민하며, 무가치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의 일부라면, 우리는 그의 거저 주시는 의롭다하심을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인데, 무엇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훔치려 하는가? 마찬가지로 예레미야도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렘 9:23), 그러나 "누구든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고전 1:31, 렘 9:24) 했을 때에, 그가 말하는 뜻은 사람이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된다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바울은 이 말씀을 이런 뜻에서 해석해서, 우리가 주만을 자랑하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다(고전 1:30-31). 그가 말하는 뜻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의 영광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진다는 것이다.
2.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다
물론 사태는 이렇다. 즉, 우리는 자신에 대한 자랑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참으로 하나님을 자랑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면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보편적 원칙으로 생각해야 한다. 참으로 바울은, 사람에게서 자랑할 구실을 완전히 빼앗은 때라야 세상은 하나님께 복종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롬 3:19 참조). 따라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으리라고 선포하면서, "자랑하리라"는 말을 첨가한다(사 45:25). 이것은 선민은 주를 자랑하며, 주 이외의 아무것도 자랑하지 않기 위하여 주께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러나 그는 앞에 있는 구절에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자랑할 것인가를 가르친다. 즉,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힘은 여호와께 있다고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다(사 45:24). 단순한 고백이 아니고, 맹세로써 확인된 고백을 요구하는 데 유의하라. 그렇지 않으면, 되는대로 겸손을 가장 하면서 고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기 때문이다. 교만한 생각이 없이 자기의 의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 자랑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이는 이런 자기 평가에는 반드시 자기 신뢰가 따르며, 스스로에게서는 반드시 자랑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에 대한 모든 논의에서 우리는, 의에 대한 찬양은 전적으로 주의 소유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의 말대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롬 3:26)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신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는 다른 구절에서 주께서는 그의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다고(엡 1:6) 말한 후에, 이 뜻을 반복해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고 부언한다.
그리고 베드로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벧전 2:9). 베드로의 의도는 분명히 신자들의 귀에 하나님께 대한 찬양만이 들려, 육에 붙은 모든 자만을 압도하며 침묵시키게 하려는 것이다. 요컨대, 사람이 의의 한 부스러기라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그는 불가피하게 모독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자기의 의를 보아서는 양심에 평안을 얻지 못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 앞에서 평안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닌 의를 하나님의 선물로서 받는 것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하게 하였다 할 자가 누구뇨"(잠 20:9)라는 솔로몬의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확실히 무한한 추악 속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가장 완전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양심 속으로 깊이 내려가서1363) 자기가 한 일을 검토한다면, 그가 얻는 결과는 무엇일까? 그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의 일이 모두 잘된 듯이 달콤한 안도감을 즐길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고민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인가? 행위대로 판단한다면 그는 정죄를 받아야 할 근거를 자기 속에 느낄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을 볼 때에 그의 심판 앞에서 확고한 평화를 느끼든지, 그렇지 않으면 무서운 지옥에 빠지든지, 두 가지 중의 하나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도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만큼 견고한 의를 확립하지 않는다면, 의에 관한 손익은 무익하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담대히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태연하게 받을 수 있는 근거가 있다면, 그런 때에 한해서 우리가 가진 의는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도가 이 점을 역설하는 것은 당연하다. 내 말보다 그의 말로 표현해 보자.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롬 4:14). 사도는 우선, 만일 의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의 행위의 공로를 조건으로 삼거나 율법을 준수하는 데 좌우된다면, 믿음은 무의미하게 되며 배제된다고 추론한다. 아무도 그런 약속을 믿을 수 없겠기 때문이다. 아무도 행위로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을 완수했다는 확신이 결코 생길 수 없다. 이에 대한 증명은 먼 곳에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눈으로 자기를 본다면, 누구든지 자기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 있게 제멋대로 생활하며, 심지어 서슴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에 자화자찬을 대립시켜, 하나님의 법적 절차를 중지하도록 강요하려는 듯이 행동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위선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깊고 어두운 곳에 파묻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하게 자기를 검토하는 신자들에게는 훨씬 다른 근심과 고민이 있다. 우선 모든 사람의 마음에 의혹이 잠입하고, 드디어 절망 상태에 빠진다. 이는 무거운 빛이 아직도 자기를 누르고 있으며, 자기 앞에 제시된 조건과는 거리가 먼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보라, 믿음은 벌써 눌리고 소멸되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흔들리거나, 변하거나, 상하로 동요하거나, 주저하거나, 불안해하거나, 망설이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변함없고 완전한 확신으로 마음을 강하게 하며, 쉴 곳과 설 곳이 있다는 것이다(고전 2:5, 고후 13:4 참조).
4. 자기의 의에 유의하는 것도 약속을 무용하게 만든다
바울은 약속이 무용하며 무효하게 되리라는 또 다른 점도 첨부한다. 우리의 공로에 따라서 약속이 실현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을 받을 자격이 생기는 경지에 언제 도달할 것인가? 실로 이 둘째 점은 첫째 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약속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실현된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으면 약속도 효력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은혜에 의한 약속을 확립하기 위해서 기업은 믿음에서 온다. 하나님의 자비만을 근거로 할 때에 기업은 풍성하게 확인된다.
자비와 신실은 영원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비롭게 약속하시는 것은 신실하게 실행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의 구원을 구하기 전에, 우선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의 자비에 있다고 말한다. "구하오니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이 나의 위안이 되게 하시며"(시 119:76). 이 순서는 바르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것은 다만 그의 자비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점을 근거로 삼고 그 위에 우리의 모든 희망을 깊고 든든하게 세우도록 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그 행위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어거스틴도 이와 같이 행하도록 가르친다. 그는 "그리스도는 그의 종들 안에서 그들을 영원히 지배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약속하셨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맹세하셨다. 약속은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확고하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 일을 선포할 때에, 아무도 불안을 느껴서는 안 된다."1364)라고 하였다. 베르나르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묻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대답하신다(마 19:25-26). 이것이 우리가 믿는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의 모두이다. 이것이 우리가 소망을 품는 이유의 전체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우리는 그의 의지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누가 아느뇨"(전 9:1 참조).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34, 사 40:13 참조). 여기서 믿음이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고, 진리가 우리를 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모르는 것, 아버지의 가슴속에 숨겨 있는 것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성령의 증거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롬8:16) 우리의 마음에 확신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을 통해서 우리를 거저 부르시며 의롭다하심으로써 설득해주실 필요가 있다. 확실히 이 일에 영원한 예정으로부터 미래의 영광에 이르는 중간 통로가 있다.1365)
간단하게 결론을 내리도록 하자. 양심의 완전한 확신으로 붙잡은 것이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은 확립되지 않는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의심이나 불안이 있으면 약속은 무효라고 성경은 단언한다. 또 성경에 의하면,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하는 약속은 흔들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의가 우리를 떠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행위를 문제로 삼지 않고 신앙만이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앙은 원래 눈을 감고 귀를 곤두세우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약속만을 들으려고 애쓰며, 사람의 가치나 공로는 전연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은 성취된다. 즉, 이 땅에서 죄악이 제거될 때에는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고(슥 3:10) 하였다. 신자들은 죄의 용서를 받을 때까지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리라는 것이 예언자의 뜻이다. 우리는 예언자들이 쓰는 비유를 깨달아야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논할 때에 하나님이 주시는 외면적인 복을 영적 은혜의 모형으로 제시한다. 그래서 양심의 모든 동요를 진정시키는 그리스도를 "평강의 왕"과(사 9:6) "우리의 화평"이라고(엡 2:14) 부른다.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푼 회생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면서 수행하신 속죄 행위가 하나님의 노여우심을 풀었다는 확신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떨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우리의 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심한 고통에서만 우리의 평화를 찾아야 한다.1366)
5.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를 믿어야만 양심이 평안하며 기도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나는 왜 비교적 모호한 증거를 사용하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고(롬 5:1) 확신하지 않으면 양심에 평화와 고요한 기쁨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바울의 시종 여일한 주장이 있다.
동시에 그는 이 확신의 근원을 밝힌다.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는 때라고 한다(롬 5:5).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의 영혼은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바울은 다른 구절에서 모든 신자를 대표하여,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묻는다(롬 8:35,39의 융합). 저 피난처에 도달하기까지 우리는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지만, 주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어 주신다면 죽음의 암흑 속에서도 안전할 것이다(시 23:1,4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중생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것이라고 지껄이는 자들은1367) 은혜의 감미로움을1368) 맛보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미래의 은혜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터키 사람이나 다른 불신 국민들같이 올바른 기도법도 모른다. 그것은 바울이 증거하듯이, 아버지의 아름답고 다정한 이름을1369)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 믿음은 우리 입이 저절로 열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갈 4:6, 롬 8:15) 하지 않는 믿음은진정한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이런 일은 중생의 선물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님이 확실하다. 육신에 있는 동안 중생은 항상 불완전하여, 의심을 일으키는 각종 원인을 내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해야 할 대책은, 천국의 기업에 대한 신자들의 유일한 소망의 근거는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받아 값없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에 관해서 믿음은 수동적인 것에 불과하다.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일에 무엇을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로부터 받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 14 장 칭의의 시작과 지속적인 발전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로 죽었으며 구속될 필요가 있다. 1-6)
1. 칭의와 관련하여 인간은 네 종류로 나누인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인간은 일생 동안 어떤 종류의 의를 가질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 좋겠다. 의를 네 가지로 구별하려 한다. 사람은 ⑴ 하나님을 전연 모르고 우상 숭배에 파묻혀 있거나, ⑵ 성례전에 참가하게 되었으나, 불결한 생활을 계속하여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이거나, ⑶ 그 사악한 마음을 헛된 의식으로 감추는 위선자이거나, ⑷ 하나님의 영으로 중생하여 진정한 성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누인다.
첫째 경우에 있어서 사람을 그 천품에 따라 판단한다면, 머리로부터 발바닥에 이르기까지 선한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성경의 증거를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면, 아담의 모든 자손에 대해서 성경이 판단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그들은 마음이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였다는 것이다(렘 17:9). 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온통 악하며(창 8:21), 사람의 생각이 허무하며(시 94:11),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며(시 36:1, 롬 3:18),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다(시 14:2). 요컨대 그들은 육이다(창 6:3). 이 말의 뜻은 바울이 열거한 행위를 모두 포함한다. 즉,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그밖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갈 5:19-21). 이런 것을 사람들은 자랑하며 의지할 가치가 있다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거룩하다고 인정되는 덕행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탁월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찬란한 겉모습을 전연 무시하기 때문에 의를 위하여 사람의 행위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하려면, 우리는 행위의 근원을 깊이 탐구해야 한다. 여기에 논의할 광범위한 분야가 있으나 이 문제를 간결하게 처리할 수도 있으므로 나는 될 수있는 대로 간단히 나의 주장을 서술하겠다.
2. 불신자들의 덕행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선 나는 불신자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현저한 재능은 모두 하나님의 선물이란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1370) 또한 티토나 트라얀의 공정과 온건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안의 정신 착란, 방탕, 잔인성 등과 다름이 없다든가 또는 티베리우스의 음탕한 생활과 베스파시안의 이 점에 있어서의 절제 생활이 다름이 없다든가 하는 것, 또는 개개의 덕과 죄악을 떠나서 일반적으로 바른 길과 법을 지키는 것과 어기는 것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할 정도로 내가 상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서 그 죽은 모습까지도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가 의와 불의를 혼동한다면 세계에 어떤 질서가 남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개개인의 마음에 착한 일과 악한 일의 차이를 새겨 두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의 경륜에 의해서 그 차이점을 가끔 확인하신다. 사회에서 유덕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현세의 복을 많이 주신다. 이것은 그런 덕의 겉모습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가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진정한 의를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서 비록 외면적이며 가장한 의일지라도 그에 대한 현세적인 보상을 반드시 주신다. 여기서부터 우리가 방금 인정한 주장, 즉, 이런 덕은, 더 적절하게 말해서 이런 덕의 형상은,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결코 칭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3. 진정한 믿음이 없으면 진정한 덕도 없다
그러나 어거스틴의 말은 여전히 옳다. "유일한 하나님을 믿는 종교에서 멀어진 사람은 그 덕망이 아무리 높을지라도 그 마음이 오염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에, 상보다도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의와 극기와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유지하지만 하나님의 이 선한 사업을 심히 망칠 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선행에 대한 진지한 열성보다도 단순한 야심이나 이기심이나 그 밖의 악한 동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한 행위는 그 근원인 마음이 불결하고 부패했으므로 덕과 비슷하여 사람의 눈을 속이는 악행과 같이 덕행이라고 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하면 바른 일의 목적은 언제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것을 목표로 삼은 노력은 "바르다"는 말을 들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가 명하는 목표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이 하는 일은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그 패악한 의도로 보아서 죄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훌륭한 행위를 했던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 카토와 유사한 사람들도 행위로 죄를 지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의 광명이 없었고, 그들의 행위는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는 그들에게 없었다. 그것은 의무 수행이 행동보다 의도에 의해서 그 가치가 판단되기 때문이다.1371)
4. 그리스도가 없으면 진정한 거룩도 없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고(요일 5:12) 하는 요한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또는 무엇을 하든지 간에 평생 멸망으로 또 영원한 죽음의 심판으로 급히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생각과 일치되는 말을 어거스틴도 했다. "우리의 종교는 의와 불의를 행위의 법에 의하지 않고 믿음의 법에 의해서 분별한다. 믿음이 없으면 선행 같은 것도 죄로 변한다."1372) 그는 다른 곳에서 이 생각을 비유로 아름답게 표현한다. 이런 사람들의 열성은 길을 벗어나서 달음질을 계속하는 사람과 같아서 힘을 다하여 달릴수록 더욱더 목표에서 멀어지며 더욱더 불행하게 된다.
따라서 바른 길에서 절며 가는 편이 길 밖에서 달리는 것보다 낫다고 그는 말한다.1373) 끝으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떠나서는 성화도 없으므로 분명히 그들은 나쁜 나무와 같다. 보기에 아름다운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은 맛도 좋을는지 모르나 몸에는 조금도 좋지 않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거나 계획하거나 실행하는 것이 모두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의에 대하여 무가치할 뿐 아니라, 확실히 정죄를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듯이 우리는 무슨 까닭에 이 문제를 논의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는(히 11:6) 사도의 말이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되는 의는 은혜에서 오며, 아무리 선한 행위일지라도 행위에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연 상태와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비교하면 그 증명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서 은혜를 베풀만한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전연 찾으실 수 없지만 우선 너그러우심으로 값없이 사람에게 오신다고, 성경은 도처에서 가르친다. 죽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아는 지식으로 우리를 비추실 때에 그는 우리를 소생시키시며(요 5:25),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 한다(고후 5:17). 특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너그러우심을 자주 이러한 비유로 찬양한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위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한다(엡 2:4-5). 다른 곳에서는 아브라함을 모범으로 삼아 일반 신자들이 부르심을 받는 데 대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한다(롬 4:17). 우리가 없는 자라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욥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만을 엄격하게 억제하여 말씀하신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바울은 이 말씀을 설명하는 의미에서(롬 11:35),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순전히 부끄러운 빈곤과 허무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차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언급한다.
그러므로 위에서1374) 인용한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행위에 의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엡 2:8-9 참조) 증명하려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우선 중생함으로 해서 오는 것이며, 누가 자기의 의로 하나님을 감동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천성대로 한다면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는 인간이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 듯이 감히 생각한다는 것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 위대한 도구와 함께 주께서 "우리를‥‥‥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임을(딤후 1:9) 인정해야 한다. 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을(딛 3:4-5,7) 인정해야 한다. 이 고백에 의해서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모든 의를 빼앗는다. 즉,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중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에게 털끝만한 의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만일 행위의 의가 우리를 의롭다 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이 거짓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가 의롭다 하심이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을 때에 분명히 그는 이 사실을 잊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구절에서 만일 행위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은혜는 벌써 은혜가 아닐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롬 11:6). 주께서 자신이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마 9:13) 말씀하신 뜻도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죄인만을 받아준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의를 가장하면서까지 들어가려고 애쓸 것인가?
6. 사람은 자기의 의를 위해서 아무것도 공헌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비를 주장하기 위해서 애쓸 때에, 나는 하나님의 자비가 의심스럽거나 모호하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자비에 부당한 위험한 일을 저지르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악의는 큰 압력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좀더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이 분명하므로 내 자신의 말보다 성경 말씀을 인용해서 주장을 세우겠다. 이사야는 인류 전체의 멸망을 모사한 다음에 회복의 순서를 아름다운 말로 첨가한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기뻐 아니하시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사 59:15-16). 하나님을 도와 구원 사역을 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예언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어디 있는 것인가? 다른 예언자도 죄인들을 자신과 화해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호 2:19,23). 이것은 분명히 우리와 하나님과의 첫 연합을 의미하는 계약이며,1375) 이 계약이 하나님의 자비를 근거로 한 것이라면 우리의 의가 설 곳은 전연 없다.
사람은 다소의 행위에 의한 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대체로 하나님이 용납하시는 의 이외에 어떤 다른 의가 있을 수 있느냐고 묻고자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친 짓이라면, 하나님께서 멸시하시는 원수들이 또 그들의 행위가 어떤 용납될 만한 것을 하나님 앞에 보낼 수 있겠는가? 의롭다함을 얻고 또 친구로서 영접을 받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대해 철저하고 노골적인 원수라는 것을 진리는 증거한다(롬 5:10, 골 1:21 참조). 칭의가 사랑의 시초라면, 어떤 행위에 의한 의가 그보다 먼저 있을 것인가? 이 악한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요한은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요일 4:10) 성실하게 깨우쳐 준다. 여호와께서도 이미 예언자를 통해서 똑같은 뜻을 가르치셨다. "내가‥‥‥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4).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기꺼이 우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 때문에 움직여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지한 대중은 이 뜻을 오해하여 아무도 그리스도께로부터 완전한 구속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며, 우리는 구속을 얻기 위해서 우리의 행위에서 도움을 받는다고 생각한다.1376)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속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들어가기까지는 암흑과 죽음의 상속자이며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불결을 깨끗이 씻는 일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 일을 하시기까지는 실현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고전 6:11). 베드로도 같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 성령의 성화의 사역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다고 주장하였다(벧전 1:2). 만일 우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는다면, 이 정결(淨潔)이 있기 전에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없는 죄인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출발점은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들어가는, 일종의 부활이라는 것이 사실임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을 받은 때에(빌 1:29), 드디어 우리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옮겨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위선자와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틀 받는다. 7-8)
7. 의는 심령의 문제이다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분류 중에서1377) 둘째 종류와 셋째 종류가 포함된다.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이 아직 하나님의 영에 의해 중생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불결한 양심이 증명한다. 그리고 중생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따라서 그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케 되지 않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이 두 가지 은혜는 믿음에 의해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죄인이 그의 심판대 앞에 가중하지 않은 것을 가져올 수 있겠는가? 모든 불신자들은, 특히 모든 위선자들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가득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착한 듯한 행동을 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멸시하시지 않으리라는 어리석은 확신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악한 마음이 지적되어도 여전히 자기들에게 아무 의도 없다는 고백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게 된다. 자기들의 불의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인정하는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기들에게 조금은 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주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허영을 명쾌하게 반박하신다.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학 2:11-14).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또한 우리 마음에 깊이 기억하기를 바란다. 일평생 악하게 산사람도 주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시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심히 악한 사람도 율법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행하면, 그것이 자기의 의로 인정되리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선 심령이 깨끗하게 되지 않으면 이 행위에서 성결을 얻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또 이 말씀만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죄인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위는 그 불결한 심령 때문에 오염된다고 언명하신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오염된 행위라고 하신 행위에서는 의라는 이름을 제거해야 한다. 또 주께서 이것을 설명하시는 비유는 얼마나 적절한가! 이는 주께서 명령하신 일은 필연적으로 거룩하다는 항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취하시는 입장은 다르다. 주의 율법에 거룩하다고 한 일도 악인의 불결 때문에 오염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고 하신다. 부정한 손이 만지면 거룩한 것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8. 사람과 행위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에서도 아름답게 다루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焚香)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困備)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사 1:13-16, 58:1-5 참조).
여기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께서 가증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확실히 주께서는 진실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멸시하시지 않으신다. 율법을 지키는 시초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그는 도처에서 가르치신다. 이 시초가 배제되는 때에는 그에게 드리는 것은 모두 무익할 뿐 아니라, 싫고 가증한 오물이 된다.
이제 위선자들이 가서 마음속에 악을 깊이 감춘 다음에 행위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게 하라. 그들은 하나님을 더욱더 노엽게 할 것이다. 이는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기" 때문이다(잠 15:8). 그러므로 참으로 성결하게 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빛을 드러낼 행위를 하여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되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죄로 인정된다. 이것은 성경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상식일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의심할 수 없는 진리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아무도 행위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때에만 그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1378) 가르친 이들은 참으로 옳은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우리를 인도하는 순서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라고 기록하였다(창 4:4).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보다도 그 사람을 먼저 열납하신다고 지적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을 순결하게 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하는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신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눈은 성실을 돌아보신다고(렘 5:3)한 말은 언제나 옳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은 믿음에 의해서만 순결하게 된다는 것은 베드로의 입을 통해서 성령이 선언하셨다(행 15:9). 그러므로 살아 있는 참 믿음이 첫째 기초가 된다는 것은 명백하다.
(중생한 사람들은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9-11)
9. 또 진정한 신자들도 자기 힘으로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하지 못한다
이제 넷째 종류의 사람들은 어떤 의를 가졌는가를 검토해야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해서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고,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욱더 죽이시는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성결케 된다.1379)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 바쳐진 자가 되어 참으로 순결한 생활을 하며, 우리의 마음은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섬기며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의 영광만을 증진시키는 것을 무엇보다도 먼저 원하게 된다.1380)
그러나 우리는 주의 길을 걸으며 자기를 잊고 교만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만, 우리의 불완전한 자취는 여전히 남아있어서 겸손해야 할 필요가 생긴다. 성경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전 7:21, 왕상 8:46 참조). 그러면 그들은 행위에 의해서 어떤 종류의 의를 얻을 것인가?
내가 우선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행위도 항상 육의 불결로 더럽혀지고 부패해지는데, 이를테면 찌끼가 섞여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종이라고 할 만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평생 한 일 가운데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을 선택하게 하라.
그리고 그 일의 여러 부분을 잘 검토하게 하라. 틀림없이 그는 그런 행동도 어딘가 육의 부패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선행에 대한 우리의 열심은 결코 그것이 지녀야 할 성격을 가지지 못하는데, 이는 우리의 큰 약점이 우리의 경주(競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행위에 묻은 오점은 비록 극히 작은 것이지만, 우리 눈에 분명히 보인다. 그렇다면 그 오점은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별들까지도 순결하지 못하다(욥 25:5). 성자들이 하는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 판단한다면, 공정한 보상으로서 치욕을 받아야할 것뿐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10. 자신의 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의 엄격성을 오해하였다
다음에 전적으로 순결하며 완전한 행위를 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예언자가 말하듯이 죄가 하나라도 있으면 종전의 의에 대한 기억이 말소될 수 있다(겔 18:24). 야고보도 "누구든지‥‥‥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약 2:10) 말하면서 이에 찬성한다.
그런데 이 인간 세상은 결코 순결하거나 죄가 없을 수 없으므로 우리가 어떤 의를 체득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 뒤를 잇는 죄악들로 인하여 부패해지고 억압되고 소멸되므로, 하나님 앞에 나타나거나 우리의 의로 인정될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하면, 행위에 의한 의가 문제될 때에는 우리는 율법에 의한 행위를 볼 것이 아니라 계명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한 의를 구할 때에 개개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율법에 대한 끊임없는 복종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미련한 신념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죄의 용서를 한 번 우리의 의로 인정하신 것은, 우리가 과거 생활에 대한 용서를 받은 후에는 의를 율법에서 찾으라는1381) 뜻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거짓 희망을 품게 되며 자신을 비웃으며 조롱하게 될 것이다.
이 육신을 쓰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할 수 없다. 그뿐 아니라, 율법은 완전히 의로운 행위를 항상 유지하지 않는 사람에게 죽음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언제든지 우리를 고발하며 정죄할 근거가 있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자비가 율법과는 반대로 우리의 죄를 끊임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우리의 무죄를 거듭 선언하신다면 사태는 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처음에 한 말은1382) 언제든지 성립된다. 만일 우리 자신의 가치에 따라 우리를 판단한다면,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실행하든 간에 또 아무리 많이 노력하며 수고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죽음과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11. 신자들의 의는 언제든지 믿음에 의한 의다
우리는 두 가지 점을 강력히 주장해야 한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의 행위일지라도 하나님의 엄격한 판단에 따라 검토할 때는 별로 정죄를 면할 수 없다. 둘째로, 그런 행위가 있다고(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가정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행위가 자신이 죄 짐을 지고 있어서 그 행위도 곧 약화되고 오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논쟁하는 중심점이다.1383) 칭의의 기초에 관해서는 비교적 건전한 스콜라 학자들과 우리 사이에 싸울 일이 없다.1384) 즉, 죄인은 정죄받는 것에서부터 값없이 해방되어 의를 얻으며 이 일은 죄의 용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다만 그들은 "칭의"라는 말에 새롭게 됨을, 즉,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우리가 율법에 복종하도록 개조된다는 것을 포함시킨다. 참으로 그들은 중생한 사람의 의를 고사하기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한번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은 선행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며 선행의 공로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138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정하셨다고 선언하신다(롬 4:3). 이것은 아브라함이 아직 우상을 섬겼을 때가 아니고, 그가 거룩한 생활을 다년간 훌륭히 계속한 후였다. 그러므로 그는 오랫동안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했으며 죽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율법에 순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을 보아서 우리는 바울의 추리에 따라, 그의 의는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고 단정한다(엡 2:9). 마찬가지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합 2:4) 예언자의 말은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주께서 믿음으로 전환시켜서 의롭다 하실는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 아니라, 신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며 신자들에게 믿음에 의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다. 바울도 이 생각을 확인하기 위하여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 31:1, 롬 4:7)라고 한 다윗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모든 의심을 일소한다. 다윗의 이 말이 불신자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자신과 같은 신자들에 대한 것임은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여기서 그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복을 한 번만 가질 것이 아니라, 평생 지녀야 한다. 끝으로, 값없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소식은 하루 이틀만 전할 것이 아니며, 이 전도 사명은 교회 안에서 항구적인 것이라고 바울은 증거한다(고후 5:18-19 참조).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죽는 날까지 여기서 묘사된 의 이외에 다른 의가 없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화해시키는 영원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영원히 효력을 나타낸다. 즉, 정화와 보속과 속죄와, 끝으로 우리의 모든 불의를 가리우는 완전한 순종을 실현할 수 있다. 에베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우리가 은혜에서 구원을 받기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고, 은혜를 통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한다(엡 2:8-9).
(믿음에 의한 의에 대한 스콜라 학파의 항의할 성자들의 잉여 공로설(supererogatory merits)을 검토·반박함. 12-21)
12. 반대자들의 핑계
이 문제에 관해서 스콜라 학자들이 도피 수단으로 사용하는 핑계는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선행에는 의를 얻기에 충분한 고유의 가치가 있지만, "받아들이는 은혜"인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고1386) 말한다. 따라서 그들은 행위에 의한 의가 항상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행위의 결함을 보충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일평생 죄의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범한 불법은 잉여 업적에 의해 보상된다고 한다.1387)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은혜"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선에 불과하다. 아버지께서는 값없이 베푸시는 선으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포용하신다. 그리스도의 무죄를 우리에게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인정하시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며 순결하며 결백하다고 인정하신다. 그리스도의 의만이 완전하며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대 앞에 나타나며 우리를 보증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의를 받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끊임없이 죄 사함을 받는다. 이 순결로 감싸여 있기 때문에 불완전한 우리의 추악과 불결이 우리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도록 묻힌 듯이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때가 오면 옛 사람이 죽어 분명히 파괴된 우리를 선하신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셔서 새 아담과 함께 복된 평화를 누리게 하실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주의 날을 기다리도록 하자. 그 날이 오면 우리는 썩지 않는 몸을 받아 하늘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고전 15:45이하 참조).
13. 직무 이상의 행위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요구의 가혹함과 죄의 무거움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만일 이런 일들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행위는 그 자체로는 확실히 우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하고 기뻐하실 만한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 행위 자체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죄의 용서를 받는 때만은 예외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개의 행위에 대해서 그 보상으로서 생명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의 일들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레 18:5). 그리고 모든 일을 꾸준히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저 유명한 저주의 말씀을 하셨다(신 27:26, 갈 3:10). 이런 말씀은 부분적인 의라는 공상을 철저히 논박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말씀들은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는 것 이외의 의를 하늘에서는 허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직무 이상의 행위"가 충분한 배상을 제공한다고 하는 그들의 상습적인 모호한 말은 건전치 못한 생각이다.1388) 왜 그런가? 그들은 벌써 쫓겨난 자리로 항상 되돌아가지 않는가? 즉, 부분적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하는 입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인정하지 않을 일을 그들은 뻔뻔스럽게 사실인 듯이 전제한다.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으면 행위에 의한 의를 전연 인정하시지 않는다고 주께서는 자주 확언하신다. 우리에게 의가 없으면서도 모든 영광을 빼앗긴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즉, 하나님께 절대로 굴복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소한 행위를 자랑하며, 다른 보속으로 자기에게 없는 의를 사려고 하는 우리는 얼마나 패악한가?
보속이란 생각은 이미 철저히 분쇄되었다.1389) 우리는 꿈에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무의미한 말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악한 것으로 보시는지를 깨닫지 못한 자들이다. 참으로 그들은 사람들의 모든 의를 한데 뭉치더라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한 번 범법한 것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그 결과로 동시에 구원을 회복할 능력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우리는 안다(창 3:17). 그러므로 사람은 보속을 치르는 능력을 빼앗겼다. 자기의 보속 능력으로 몸을 단장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하나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원수에게서 오는 것을 하나님은 결코 기뻐하시거나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가 있다고 단정하시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를 인정하시려면, 먼저 우리의 죄가 가려지며 용서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죄의 용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며, 보속을 밀어 넣는 자들은 그 은혜를 악하게 모독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를 모범으로 삼아,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경주를 하며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야 한다(빌 3:13-14).
14. 우리의 의무를 완벽히 수행한다하더라도 우리에게 영광이 되지 못하며, 그러나 이것 또한 전혀 불가능하다
잉여 업적을 자랑하는 것, 이것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며,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눅 17:10)는 교훈과 어떻게 부합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가장이나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하다고 믿는 것을 마음에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가 불필요한 의무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드려야 할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서 진지하게 깨달으며 생각하라고 명령하신다.
또 이것은 옳은 명령이다.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많은 종이며, 율법의 의무를 다하는 데 정신과 몸을 다 바치더라도 그 전부를 이행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주께서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의 모든 의로운 행실과 그 이상의 행실도 이 모든 일들 중의 하나에도 해당되지 못할 것이라는 말과 같다. 그러면 우리 각 사람은 이 목표에서 심히 멀리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책임 분량 이상으로 무엇을 축적했노라고 감히 자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혹은 항변하기를 비록 나는 필요한 의무들의 일부를 이행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의무들보다 더 많이 행하도록 노력하지 못할 것은 없다고1390) 할는지 모르나, 이런 말에는 근거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데1391) 공헌할 수 있는 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포함되지 않은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이 율법의 일부라면 부득이 할 수밖에 없는 일을 자발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5. 하나님은 현재 우리 자체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하여 권한이 있다. 그러므로 직무 이상의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은 이 일에 대해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자랑한 것을 부당하게 적용한다. 바울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자진해서 포기했노라고 자랑하였다.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 대해서 의무를 다했을 뿐 아니라, 의무의 한계를 넘어 보수도 받지 않고 봉사를 하였다(고전 9:1이하).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행동은 약한 형제들에게 장애가 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고 한(고전9:12) 그 이유에 유의하지 않는다. 거짓된 악한 일꾼들이 가장된 친절로 사람들의 호감을 얻으려 하며, 그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며, 복음에 대한 증오심을 일으키려고 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나 또는 그런 흉계에 대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피할 수 있으면서도 남에게 손해가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도는 주를 위해서 의무 이상의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복음을 맡은 지혜 있는 청지기는 그런 일을 회피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바울은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다. 끝으로 가령 이런 이유가 명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크리소스톰이 한 말은 언제나 옳다.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노예의 소유물과 같은 처지에 있다. 즉, 그것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다.1392) 그리스도께서도 비유에서 이 점을 숨기시지 않는다. 종일토록 여러 가지 노동을 하고 저녁때에 돌아온 하인에게 우리가 무슨 감사를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눅 17:7-9). 그는 우리가 감히 요구하지 못할 정도로 부지런히 일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종이라는 처지에 요구되어지는 일 이상의 것을 한 것이 아니다. 그와 그의 능력은 온전히 우리의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 하는 따위의 잉여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잉여 업적은 무가치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적도 없으며 시인하시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공로를 하나님 앞에 제출한다면 용납되지도 않을 것이다. 잉여 업적이 있다면 그 의미는 한 가지뿐이다. 즉, 예언서에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라고 한 것이다(사 1:12). 그들은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행위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야 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사 55:2). 참으로 이 한가한 랍비들이 그늘진 안락의자에 앉아서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고 심판자가 심판대에 앉으실 때 그런 허무한 의견들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그의 심판대 앞에 가서 우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확신을 추구해야만 하고 학교나 길목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1393)
16. 행위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영광도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두 가지 해독을 머릿속에서 뽑아버려야 한다. 즉, 행위의 의를 믿어서는 안 되며 행위를 자랑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결백에서 향기를 얻어 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악취를 풍긴다고 가르침으로써, 항상 우리에게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고 권한다. 하나님의 긍휼로 용서를 받지 않으면 우리의 행위는 그의 진노를 일으킬 뿐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다윗이 고백한 것과 같이 최고 심판자의 자비를 찾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에게 청산할 것을 요구하신다면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고 다윗은 말한다(시 143:2). 욥이 "내가 악하면 화가 있을 것이오며 내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하는 것은"이라고 할 때에(욥 10:15), 그는 하나님의 최고의 의에 천사들도 응답하지 못하는 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모든 인간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준다. 하나님의 엄격한 법도 앞에서 욥은 무용한 저항을 하지 않고 기꺼이 굴복할 뿐 아니라 그가 체험한 의는 모두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즉시 시들어버릴 것뿐이라는 것을 말한다.
자기 신뢰를 없애버리면 자연히 모든 자랑도 사라질 것이다. 행위에 대한 신뢰가 하나님 앞에서 붕괴될 때, 누가 행위에 의가 있다고 믿을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가 부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함을 얻고 자랑하리라"고 한다(사 45:25). 그가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사 61:3) 하는 말은 진리이다. 행위를 믿고 안심하는 일이 전연 없으며 행위의 영광을 기뻐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마음은 충분히 정화될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들은 항상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릇된 자신감에 속아 교만하게 된다.
17. 어떠한 경우에도 행위가 거룩의 원인이 될 수 없다
철학자들은 사물이 형성되는 데는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원인들을 살펴보면, 우리의 구원을 실현하기 위해서 행위는 어떤 원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동력인(動力人)은1394) 하늘 아버지의 자비와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선언한다. 물론 질료인(質料人)은 그리스도시다. 그는 순종으로 우리를 위해서 의를 지으셨다. 형상인은 믿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요한은 이 세 가지 원인을 한 문장에 포함시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목적인에 관해서는, 사도는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인애를 찬양하는 것이라고 증거하고 같은 곳에서 다른 세 가지도 명백하게 말한다. 로마서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엡 1:6 참조)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자비로 우리를 포용하신 것을 제일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라고 한다(롬 3:24). 우리의 의를 실현하기 위한 진료인이 여기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롬 3:25)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형상인을 가르친다.
끝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롬 3:26) 부언한 것은 하나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인을 가리킨다. 겸해서 이 의는 화목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바울은 화목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내어주셨다고 언급한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도 사도는 이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은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중재로 실현되었으며 믿음으로 받게 되며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이 완전히 빛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엡 1:3-14).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그 모든 부분이 우리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행위를 믿거나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아무리 반대하는 원수라도 만일 성경 전체를 부인할 생각이 없다면, 동력인이나 목적인에 대해서 우리와 논쟁을 일으킬 수 없다. 그들은 질료인과 형상인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졌고 마치 우리의 행위가 믿음과 그리스도의 의와 병행하여 자리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이 주장한다.1395) 그러나 성경은 이런 생각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반대한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의이신 동시에 생명이시며 은혜로서의 이 의는 믿음에 의해서만 우리의 소유가 된다고 가르칠 뿐이다.
18. 그러나 선행의 모습은 믿음을 강하게 해줄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자기의 결백과 정직함을 기억함으로써 힘과 위로를 얻으며, 때로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공언하기도 한다. 여기에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자기의 선한 입장과 악인들의 악한 입장을 비교해서 자기의 승리를 믿는 것이다. 자기의 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자들이 정죄받는 것이 당연하고 공정하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방법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검토할 때에 양심이 깨끗한 것을 느낌으로써 다소의 위로와 자신을 얻는 것이다.
첫째 이유는 후에 고찰하겠다.1396) 여기서는 둘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위에서1397) 한 말과 어느 정도로 일치하는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하나님의 심판 하에서 사람은 행위를 의지하거나 행위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말했다. 합치점은 이것이다. 즉, 성도들은 자기의 구원의 기초를 놓으며 굳게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행위를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선만을 우러러본다. 복의 시초는 하나님의 선에 있다고 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로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을 복의 완성이라고 믿고 그 안에서 안주한다. 이와 같은 기초 위에 수립된 양심은 행위를 생각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확립된다. 즉, 그 행위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를 무관하시는 증거인 때에 한해서 양심은 그 행위에 자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우선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의지하지 않으면, 행위에 대한 이 자신은 설 곳이 없다. 따라서 그것은 그 의지하는 기초와 상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위에 대한 신뢰감을 배척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행위의 공로가 구원에 대한 보조 수단이 된다는 생각으로 돌아가지 말고 값없이 의를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표징(表徵)에 의해서 이 믿음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는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선물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마치 하나님의 얼굴에서 비치는 광채와 같이 우리 마음을 비추어 선의 최고의 광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특히 선행의 은혜에 대해서 더욱 그렇게 말할 수 있는데, 그 선행은 양자의 영이(롬 8:15 참조) 우리에게 주신 것을 보여 준다.
19. 행위는 소명에 대한 열매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양심의 결백을 느껴 믿음을 강화하며 기뻐할 때에, 그들은 소명의 결과를 보고 자신들이 주의 자녀로서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라고 한 솔로몬의 말이나(잠 14:26), 성도들이 간혹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명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사실은(창 24:40, 왕하 20:3) 양심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를 놓는데 아무 소용이 없으며 다만 결과적으로 볼 때에만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런 발언들에는 완전한 확신을 확립할 수 있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성도들은 자기들에게 있는 성실은 많은 힘의 흔적이 섞여 있는 것뿐임을 의식한다. 그러나 중생의 결과를 성령이 내주하시는 증거라고 보며, 이런 신념에서 큰 힘을 얻어 모든 난관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대망하게 된다. 이는 이 중대한 문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체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체험조차 할 수 있으려면, 우선 확실한 약속으로 보장된 하나님의 선을 깨달아야 한다. 선행을 표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한다면 이 체험은 무엇보다도 불확실하고 약한 것이 될 것이다. 행위를 그 자체대로 판단한다면 그 불충분한 순결성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하는 것과 같이 그 불완전성은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할 것이다.
요컨대, 행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며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지 않는다. 이 은혜에는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다고 바울은 말한다(엡 3:18). 사도가 말하려는 뜻은 이것이다.
"신자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든지 간에, 아무리 높이 솟으며 아무리 널리 돌아다니더라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떠나서는 안되며 전적으로 이 사랑을 명상하는 데 힘써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것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지식을 초월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고 한다(엡 3:19).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신자가 모든 싸움에서 승리자가 된다고 자랑한 다음에 곧 첨부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이유를 말한다(롬 8:37).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신자들의 자기 확신의 기초가 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성도들이 행위를 의지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행위의 공로에 돌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행위는 오직 하나님의 선을 인식시키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자기들이 선택된1398) 것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징이라고 여길 뿐이다. 또 그들이 행위를 믿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얻는 의를 조금이라도 멸시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았다. 그것은 행위에 대한 확신은 값없이 받은 의를 의존하며, 이 의가 없으면 그 확신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생각을 간단하게 그러나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저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시 138:8) 말씀드리지 않나이다.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이다(시 77:2 참조). 그러나 저는 제 손이 한 일을 천거하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보시고 공로보다 죄를 더욱 많이 발견하실까 하나이다. 제가 말하는 것, 제가 바라는 것,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뿐이옵나이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저의 안에서 당신의 행위를 보시고 저의 행위를 보지 마옵소서. 저의 행위를 보신다면 그것을 정죄하실 것이오나, 당신 자신의 행위를 보신다면 거기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옵나이다. 제게 선행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에게서 온 것이옵니다."1399) 그는 하나님 앞에서 감히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로, 그에게 무슨 선행이 있다면 그것 안에서 자기 것은 조금도 볼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이런 행위도 무수한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양심은 확신보다 두려움과 당황함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행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은혜만을 보시며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완성하시기를 원한다.
21. 때때로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는 이유라고 말하는 의미
주께서 신자들에게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들의 선행 때문이라고 성경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이미 주장한 것을1400) 반박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즉, 우리의 구원을 위한 동력인(動力人)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며, 질료인(質料人)은 아들이신 하나님의 순종이며, 형상인은 성령의 조명인 믿음이며, 목적인(目的人)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1401) 이 네 가지 원인은 주께서 행위를 종속적인 원인으로 삼으시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영생을 상속하도록 자비로 예정하신 사람들을 주께서 인도하면서 영생을 소유하게 만드실 때에, 그의 일반적 경륜을 따라 선행의 수단으로 그렇게 하신다. 경륜의 순서에서 앞서는 것을 뒤따르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신다. 그래서 간혹 영생이 행위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그것은 영생이 행위의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사람들을 마침내 영화롭게 하시기 위해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롬 8:30), 앞에 온 은혜를 다음에 온 은혜의 원인으로 만드신다. 그러나 진정한 원인을 찾아야 할 때에는, 행위에서 피난처를 구하라고명령하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보게 하신다. 사도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영생이니라"고(롬 6:23) 가르치는 것은 무슨 뜻인가? 무슨 까닭에 그는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키는 것처럼 의와 죄를 대조시키지 않는가? 무슨 까닭에 죄가 죽음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처럼 의를 생명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게 했으면 완전했을 대조를 이렇게 변형하여 씀으로써 어느 정도 깨뜨렸다. 그러나 사도는 이런 비교법으로 한 가지 진리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즉, 죽음은 사람의 행위에서 오는 결과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달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말들은 원인보다도 시간적 전후 관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위에 은혜를 쌓아 올리심으로써 앞에 있는 은혜를, 다음에 따르는 은혜를 첨가하는 원인으로 삼아 그의 종들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너그러우신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만사의 근원이며 시작인 값없이 주신 그의 선택을 항상 주목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매일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을 사랑하시지만, 그 선물들의 근원은 선택에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값없이 우리를 용납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영혼을 지탱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후에 베풀어주시는 성령의 선물들을 저 제일 원인에 종속시키며, 그 선물들이 선택의 가치를 결코 손상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제 15 장 행위에 대한 공로를 자랑하는 것은 의로움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구원의 확신을 파기한다
(의롭다함을 얻으려면 인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교리는 성경뿐만 아니 라 어거스틴과 베르나르드도 반대한다. 1-4)
1. 잘못된 물음과 올바른 물음
우리는 이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를 처리했다. 즉, 의가 행위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없으며 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에,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따라서 오직 믿음에 제한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라는1402)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일반 사람들뿐 아니라 학자들까지도 망상에 빠져 끌려 들어가게 된다. 믿음의 칭의와 행위의 칭의가 문제가 되는 때에는, 그들은 곧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공로가 있다고 하는 듯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약간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증명된다는 듯이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는 위에서1403) 행위의 의는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준수해야만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완전성의 최고에 올라서서 가장 사소한 어떠한 범법도 없는 사람이 아니면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여기서 별개의 문제가 제기된다. 즉, 칭의를 위해서 행위는 결코 충분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가치는 있지 않은가라는 점이다.
2. "공로"란 말은 성경에 없으며, 위험한 말이다
우선 이 "공로"란 말에 대해서 서론적인 말을 하겠다. 하나님의 심판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사람의 행위에 이 말을 처음으로 적용한 사람은1404) 진실한 믿음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 물론 나는 말에 대한 논쟁은 피하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저술가들은 성경에 없는 말을 큰 해독을 끼치고 유익은 극히 적은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하기 바란다. 선행의 가치는 다른 말을 사용해도 잘 설명될 수 있고 폐해도 남기지 않을 수 있는데 "공로"란 말을 쓸 필요는 무엇인가? 이 말에 얼마나 큰 잘못된 원인이 내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 준 독을 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참으로 그것은 심히 강한 자존심을 표시하는 말이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가리며, 사람들에게 패악한 자만심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다.
고대 교회의 저술가들이 자주 이 말을 썼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며, 그들이 이 작은 말 한마디를 잘못 써서 후세에 잘못의 원인을 남긴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에서 그들은 진리를 상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증언한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아담으로 인해서 없어진 인간의 공로는 여기서 침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지배하게 하라." "성도들은 자기의 공로에는 아무것도 돌리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 당신께만 돌리리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선한 것은 모두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그는 자기에게 있는 칭찬할 만한 것도 모두 자기의 공로에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서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1405) 이와 같이 어거스틴은 사람에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고 함으로써 공로의 가치를 부정하였다.
그뿐 아니라, 크리소스톰도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우리를 불러주신 후에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빚을 갚는데 불과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들은 은혜와 인자하심과 위대한 관용이다."1406)
그러나 우리는 말보다도 일 자체를 보아야 한다. "공로가 있는 체하지 않는 것이 공로이므로, 공로가 없음은 심판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한 베르나르드의 말을 나는 이미 인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이 말에 대한 해석을 첨부해서 그 거친 표현을 완화한다. "따라서 공로가 있도록 유의하라. 공로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인 줄 알라. 결실을, 즉,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그러면 빈곤과 감사할 줄 모르는 망은과 교만 등의 모든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공로가 있어도 있는 체하지 않으며, 공로가 없어도 담대한 교회는 복되다." 이 말보다 조금 전에 그는 그가 사용한 공로란 말의 경건한 뜻을 충분히 설명했다. "무엇 때문에 교회는 공로에 관심을 두는가? 하나님의 목적이야말로 자랑할 더욱 견고하고 확실한 이유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다. 약속하신 것을 실행하실 것이다(딤후 2:13 참조)." 그러므로 '무슨 공로로 우리는 은혜를 바랄 수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다.
특히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는 말씀이(겔 36:22,32) 있기 때문이다. 공로로써는 불충분하다고 알기만 하면 그것 자체가 충분한 공로가 된다.1407)
3. 선행의 모든 가치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온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결한 것이 가득함으로 하나님의 주시하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은 우리의 행위에 어떤 가치가 있는가를 밝혀 준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어떤 보상을 받아야 할 것인가? 성경에는 우리가 명령받은 일을 모두 행한 후에도, 자기를 무익한 종으로 생각하라는 명령이 있다(눅 17:10). 우리는 주를 위해서 필요없는 일을 한 것이 없고, 다만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며 이에 대해서는 감사받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행을 주시고, 그것을 "우리 것"이라고 부르시며 그것을 받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서 상까지 주시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로서는 이렇게 위대한 약속에 감격해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도록(갈 6:9, 살후 3:13 참조)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큰 친절을 충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일 의무가 있다. 행위에 참으로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은혜이다. 당연히 우리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다.
이 점을 진심으로 성실하게 인정한다면 공로를 믿는 생각이 일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공로라는 개념까지도 없어질 것이다. 우리는 궤변가들처럼1408) 선행에 대한 공로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완전히 주의 것으로서 보존한다. 사람에게 돌리는 것은, 선한 일들을 그의 불결로 더럽히고 오염시킨다는 것뿐이다. 사람은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오점이 없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선한 행위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거기서 하나님 자신의 의를 보시는 동시에 사람의 불명예와 치욕을 발견하실 것이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 기쁨이 되며 행하는 사람에게 무익하지 않다. 그러나 사람이 일종의 보상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친절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런 가치를 붙여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을 받을 가치가 없는 행위에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태도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순전히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행위의 공로인 것같이 보이려고 애쓴다. 이 얼마나 모독적인 야심이며 사악한 생각인가!
나는 여기에서 각 사람의 상식에 호소한다. 너그러운 사람에게서 토지 사용권을 얻은 후에 그 토지의 소유권까지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렇게 배은망덕한 사람은 그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주인이 너그럽게 해방시켜 준 노예가 해방된 노예의 낮은 처지를 숨기고 날 때부터 자유인이었노라고 주장한다면 그런 사람은 이번의 노예 상태로 환원시키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받은 은혜를 바르게 누리는 방법은 받은 것 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은인에게 돌아갈 칭찬을 빼앗지 않으며, 그가 우리에게 넘겨준 것은 여전히 그의 것이라는 듯이 처신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대해서 이런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면 하나님께는 어떤 신중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우리는 각각 깊이 생각해야 한다.
4. 반증에 대답함
"하나님께 대한 공로"란 말이 성경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궤변가들이 성경의 말씀을 오용하는 것을 나는 안다. 그들은 집회에서 "행위의 공로에 따라 각 사람을 위하여 자비가 자리를 마련하라"고 한 말을 인용한다(집회서 16:15). 다른 구절은 히브리서에 있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한 말씀이다(히13:16).1409)
나는 집회서의 권위를 부정할 권리를 여기서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이 책의 저자가 그가 누구였든 간에 쓴 말을 충실히 인용하지 않는다. 희랍어 원본에는 이와 같다. pavsh ejlehmosuvnh poihvsei tovpon. e{kasto?gar kata; ta; e[rga aujtou' euJrhvsei("그는 모든 자비로운 행위에 자리를 주시리라. 각 사람은 그 행위에 따라 얻으리라" 집회서 16:14). 이것이 정확한 원문이며 라틴 역이 오역이라는 것은 이 낱말들의 구조뿐 아니라, 그 앞에 있는 문장의 문맥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히브리서의 인용문에는 그들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릴 만한 말이 한마디도 없다. 사도가 쓰는 희랍어의 뜻은 이런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용납하신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성경에 있는 정도 이상으로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그런데 성경에는 우리의 선행도 항상 불결한 점이 많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그것을 불쾌하게 여기시며 우리에게 대해서 노하신다고 가르친다. 우리의 선행은 도저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키거나, 우리에 대한 자비를 일으킬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를 검토하실 때에 그 최고의 법에 의하시지 않고 자비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마치 완전히 순결한 것같이 용납해주신다. 또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가치가 없는 행위지만, 이 세상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무한한 은혜를 보상으로 주신다. 경건한 학자들이 선행은 현세에서 우리에게 부여되는 은혜를 받을 가치가 있게 하며 영원한 구원은 믿음에 대한 보상이라고 하지만1410) 나는 이런 구별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께서는 거의 항상 수고에 대한 보상과 싸움에 이긴 면류관을 하늘에 두신다. 그러나 우리가 은혜 위에 은혜를 풍성히 받는 사실을 행위의 공로에 돌리고 은혜와는 절연시키는 것은 성결의 교훈과는 반대되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라고 하시며(마 25:29, 눅 8:18), 적은 일에 착하고 충성된 종은 많은 일을 맡게 되리라고(마25:21) 하시지만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신자들이 풍부하게 되는 것은 값없이 주시는 그의 자비의 선물이라고 가르치신다(요 1:16 참조). 그는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고 하신다(사 55:1). 그러므로 지금 경건한 자들이 구원을 위한 도움으로서 받는 것은, 복락까지도 모두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 복락과 성도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행위를 고려하신다고 증거하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위대한 사랑을 확실히 알리시기 위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선물까지도 이런 영예를 받게 하신다.
(인간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공로를 대치하는데 반대함. 5-8)
5.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근본이며, 창시자이시며, 완성자이시다
만일 이런 문제들을 과거에 올바르게 처리했다면 그렇게 많은 소란과 분열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교리를 형성하려는 사람은 그가 고린도 신도들 사이에 닦아 놓은 터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고전 3:10 참조). 그리고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다(고전 3:11). 그리스도는 어떤 터인가? 그는 우리의 구원의 시초였고 완성은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인가? 그는 길을 열어주셨을 뿐이고,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은 우리 힘으로 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바울이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를 우리의 의로서 받는다(고전 1:30).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의를 가진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든든하게 터로 삼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지신 이유는 우리가 의를 얻는 것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함이라고 한다(고전 1:30). 참으로 바울은 "창세 전에" 영원 전부터 우리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 "그 기쁘신 뜻대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였다(엡 1:4-5). 바울의 말들을 더 인용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죽음의 정죄에서 구속되고 멸망을 면하게 되었으며(골 1:14-20 참조), 하늘 아버지에 의해서 자녀와 후사로 선정되었으며(롬 8:17, 갈 4:5-7 참조),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었으며(롬 5:9-10),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아 멸망하거나 넘어질 위험성이 없게 되었고(요 10:28), 이렇게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았으므로(롬 11:19 참조), 이미 영생에 참가했으며 소망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 참여한 자이므로 우리 자신은 미련하지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지혜가 되셨으며, 우리는 죄인이지만 그가 우리의 의가 되셨으며, 우리는 불결하지만 그가 우리의 순결이 되셨으며, 우리는 약하며 사탄에 대항할 무장과 방비가 없지만 우리를 위해서 사탄을 가도하며 지옥문을 분쇄하시려고 그가 하늘과 땅에서 받으신 권세가(마 28:18) 우리 것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몸을 쓰고 다니지만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것이 모두 우리 것이며 그의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가졌으므로 우리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리가 주안에서 성전이 되기를 원한다면(엡2 :21 참조) 이 터 위에 서서 건축이 진행되어야 한다.
6. 로마 교회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힘과 영광을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것과는 다른 생각을 배웠다. 각종의 "도덕적"인 선행을 발견해서 그것을 행하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접목 붙임을 받기 전에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모두 죽음 속에 있다고(요일 5:12) 하는 성경의 말씀은 마치 거짓말인 듯이 말이다. 죽음에 처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생명이 있는 열매를 낳을 수 있겠는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는(롬 14:23) 말은 무의미하다는 것인가! 악한 나무에서 선한 열매가 생길 수 있다는 말인가!(마 7:18, 눅 6:43 참조). 이 가장 해악한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서 행사하실 수 있는 권능을 얼마나 남겨 놓았는가?
그들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그의 공로로 우리를 위하여 최초의 은혜를 얻어주셨다. 즉, 공로를 세울 기회를 얻어주셨다. 그러나 이 제공된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현재 할 일이라고1411) 한다. 아, 이 얼마나 거만하고 파렴치한 불경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자들이 이렇게까지 감히 그의 권능을 박탈하며 그를 사실상 짓밟게 되리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공통적인 증거는 그를 믿는 사람은 모두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궤변가들은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유익은 각 개인이 자력으로 의롭게 되는 길을 열어 주신 것뿐이라고 가르친다. 이 자들이 다음 구절들을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요일 5:12), "믿는 자는‥‥‥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6:40 참조),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어 영원한 생명의 주사가 되었다(딛 3:7, 롬 5:1-2 참조).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므로(요일 3:24), 그를 통해서 하나님께 굳게 연결된다. 그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은 하늘 자리에 앉는다(엡 2:6). 그들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으며(골 1:13), 구원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사한 구절이 무수하다. 그 구절들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의를 얻는 능력 또는 구원을 얻는 능력뿐만 아니라 의와 구원 둘 다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든지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으면 즉시 하나님의 자녀와 하늘의 후사와 의에의 참여자와 생명의 소유자가 된다. 그리고(여기 그들의 거짓을 더욱 잘 논박하는 점이 있다) 공로를 세울 기회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를 전부 옮겨 받는다.
7. 로마 교회의 신학은 어거스틴이나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모든 오류의 어머니인 소르본누(Sorbonne)의 학파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경건의 요점, 즉, 이신 칭의를 빼앗았다. 참으로 그들은 말로는 사람은 "내실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고백하나, 후에 이것을 설명할 때 선을 행하는 것은 의롭다 하는 능력을 믿음으로써 얻어진다고 하는 근거를 내세운다.1412) 그들은 믿음을 농담처럼 말하는 듯하다. 성경에 믿음이란 말이 자주 반복되므로 믿음을 말하지 않으면 대단히 거북하겠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그들은 선행을 찬양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것을 훔쳐다가 사람에게 넘겨준다. 선행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본다면, 그런 선행은 사람을 칭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하며 그것을 공로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돌에서 기름을 짜내려는 듯이 선행은 자유 의지의 능력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들도 첫째 원인이 은혜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유 의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 의지에 의해서 모든 공로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1413) 이런 생각은 후기 궤변가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피타고라스인 퍼터 롬바르드도 이렇게 가르쳤다. 이 사람을 그들과 비교한다면 정신이 바르고 건전했다고 할 것이다. 그런 롬바르드가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말하면서도1414) 이 교부가 선행에서 야기되는 영광을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으려고 심히 주의한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소경 같았음을 참으로 분명히 나타낸다.
위에서 자유 의지를 논했을 때1415)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어거스틴의 말을 몇 가지 소개했다. 그의 저작에는 비슷한 말들이 자주 나온다. 예를 들면 우리 자신의 공로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결코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또, 우리의 모든 공로는 은혜로써 온 것뿐이며 우리의 능력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혜를 통해서 있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1416)
롬바르드가 성경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성경에 대한 훈련이 잘됐던 것 같지 않은데, 그렇더라도 그와 그의 제자들을 논박하는 말로서는 사도가 한 말보다 더 명백한 것을 바랄 수 없다.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자랑을 금한 다음에 자랑이 잘못인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는‥‥‥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중생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서 선한 일이 나타날 수 없으며, 우리의 중생은 전적으로 일점의 예외도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했노라고 주장할 근거는 전연 없다.
끝으로, 그들 소르본느 학파들은 선행을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친절하게 고려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도록1417) 사람들의 양심에 가르친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공로를 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교훈으로 분명하게 신자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로를 준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확실히 하나님이 그것을 용납하신다고 신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믿음 없이 일을 계획하거나 실행하지 말라고 한다. 바꿔 말하면, 일을 하려면 그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를 반드시 먼저 마음에 확정하라고 가르친다.
8. 바른 교리를 기초로 한 충고와 위로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유일한 기초에서 손가락 넓이만큼이라도 어긋나서는 안 된다. 일단 기반이 놓이면 현명한 공사 감독은 그 위에 똑바로 건물을 짓는다.
우리가 교훈과 충고를 받을 필요가 있을 때에 사도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 준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이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 3:8-9),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며(벧전 4:3),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은 귀하게 쓰려고 택한 그릇이므로 모든 불결을 깨끗이 씻어버려야 한다(딤후 2:20-2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원하시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라고(마 16:24, 눅 9:23) 알려주실 때에, 모든 것이 단 한 번에 다 언급되었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은 악의 모든 뿌리를 끊어버렸고, 다시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 십자가를 진 사람은 모든 인내와 온유를 실행할 준비가 다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보이신 모범에는 인내와 온유 뿐 아니라, 경건과 거룩에 관한 모든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고(빌 2:8),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성취하셨으며(요 4:34, 눅 2:49 참조), 전심전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고(요 8:50, 7:16-18 참조), 형제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요 10:15, 15:13 참조). 그는 원수들에게 선을 행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눅 6:27,35, 23:34 참조).
만일 위로가 필요하다면 놀라운 위안을 주는 구절들을 들 수 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함이라"(고후 4:8-10),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딤후 2:11-12),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그의 고난에 참예하면 그가 부활하신 모양대로 부활할 것이다(빌 3:10-11)‥‥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러므로 "사망이나‥‥‥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우리를‥‥‥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며(롬 8:38-39),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과 구원으로 바뀔 것이다(롬 8:28 참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그의 행위에 의해서 의롭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모두 거듭나며‥(벧전 1:3),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고후 5:17) 죄의 나라에서 의의 나라로 옮겨간다고 말하는 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증언으로 그들의 부르심을 굳게 하며(벧후 1:10), 나무와 같이 그들의 열매에 의해서 판단을 받는다고(마 7:20, 12:33, 눅 6:44)1418) 우리는 말한다.
제 16 장 이 교리를 악평하기 위한 교황주의자들의 거짓된 중상에 대한 반박
1. 칭의의 교리는 선행을 배제하는가?
이 말은 어떤 철면피한 사람들의 중상모략을 한 마디로 넉넉하게 반박한다. 우리가 사람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니며, 행위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악한 사람들은 선행을 폐지한다느니, 또는 선행을 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유혹한다느니 하고 우리를 중상모략 한다. 또 우리가 칭의는 값없이 죄를 용서하시는 데 있다고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은 이것은 의로 가는 길을 너무 쉽게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또 우리의 교리는 시키지 않아도 이미 죄를 짓는 경향이 너무도 강한 인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1419) 이런 거짓된 비난들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간단한 발언으로 충분히 반박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 하나하나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하려 한다. 그들은 이런 칭의를 통해서 선행이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이 선행에 대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말하지 않으려 한다. 추악한 생활로 온 세계를 제 마음대로 더럽히면서도 이렇게 떠드는 그들을 우선은 내버려두겠다. 믿음을 찬양하면 행위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하면서 그들은 이 일을 슬퍼하는 체 한다. 만일 행위를 장려하며 강화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왜냐하면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하는 칭의를 꿈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곧 믿음과 선행은 굳게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는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를 곧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믿는 분이요 우리의 믿음은 그로부터 힘을 얻는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으면 동시에 거룩함도 붙잡지 않을 수 없다.1420)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기" 때문이다(고전 1:3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면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도 만드신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유대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지혜로 조명하신 사람들을 구속하시며, 구속하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와 거룩함이 문제가 되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려 한다. 우리는 둘을 구별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 안에 두 가지를 다 포함하시며, 그 둘은 서로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선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둘로 나누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13). 주께서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시며 우리가 이 은혜들을 누리도록 하시는 방법은 그가 자기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뿐이므로 그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함께 우리에게 주신다. 한쪽이 있으면 반드시 다른 쪽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행위와 떨어진 것이 아니면서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님이 사실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참여함으로써 의롭다함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참여한다는 것은 의에 못지않게 거룩함을 포함한다.
2. 칭의의 교리는 선행에 대한 열성을 쇠퇴하게 하는가?
또 그들은 우리가 공로에 대한 관심을 빼앗을 때에 세상 사람들의 마음은 선을 행하려는 생각을 버리게 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것도 거짓말이다. 후에 더 분명히 설명하겠지만1421) 여기서 우선 말한 김에 말하자면 독자들은 우리의 반대자들이 미련하게도 보상으로부터 공로를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주의해야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올바르게 행하는 능력을 주실 때나, 행위에 대한 상을 주실 때나, 똑같이 너그러우시다는 원칙을 그들은 모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문제는 차후에 적당한 장소로 미루겠다.
그런데 그들의 항의에 대해서는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지적하면 족할 것이다.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로, 보상을 받으리라는 소망을 보여주지 않으면 사람은 바른 생활을 하려고 주의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말하지만 이런 견해는 완전히 잘못이다.1422) 사람이 보상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노동을 파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익한 짓이다. 하나님께서는 값없이 드리는 경배와 값없이 하는 사랑을 받고자 하신다. 그리고 보상을 받을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용납하신다.
사람을 정녕 자극해야 된다면 우리가 구속과 부르심을 받은 목적을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주의 말씀이 이런 자극을 주는 예를 들어본다.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 이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사악한 배은망덕을 폭로한다(요일 4:19,10 참조).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죽은 행실을 떠나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히 9:14) 일단 깨끗함을 얻은 우리가 새로운 악에 물들며 저 거룩한 피를 모독한다면, 그것은 우리답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다(히 10:29).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눅 1:74-75). 우리는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죄에서 해방되었다(롬 6:18). "우리 옛 사람이‥‥‥십자가에 못박힌 것은"(롬 6:6)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4).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으면 그의 지체인 우리는 마땅히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며 지상에서는 나그네 같이 살아 우리의 보화가 있는 하늘을 사모해야 한다(골 3:1-3, 마 6:20 참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도록 작정지었다(살전 5:9). 우리는 성령의 전이며 이 전을 더럽히는 것은 불법이다(고전 3:16-17, 고후 6:16, 엡 2:21). 우리는 어두움이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이며,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한다(엡 5:8-9, 살전 5:4-5 참조).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불결한 생활이 아니라 거룩한 생활을 하기 위한 것이다(살전 4:7). 이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가 불법한 욕망을 버리고 성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4:3). 우리가 받은 것은 거룩한 부르심이며(딤후 1:9), 그 요구하는 것은 순결한 생활이요, 그 이하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된 목적은 의에 순종하려는 것이다(롬 6:18). 우리의 사랑을 고무하는 논법으로서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것을 생각할 수 있는가? 요한은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요 13:34 참조)라고 말한다. 사랑을 계속 실천하는 점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며, 마귀의 자녀인 암흑의 자녀들과 다르다(요일 3:10, 2:10-11). 다시 바울의 논법을 들으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떨어지지 않으면 한 몸의 지체가 되며(고전 6:15,17, 12:12), 서로 일을 도와야 한다(고전 12:15 참조). 거룩한 생활을 하라고 부르는 요한의 말보다 더 강력한 외침을 우리는 들을 수 있는가? 요한은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이다(요일 3:3). 마찬 가기로 바울은, 우리는 양자의 약속을 믿기 때문에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고후 7:1) 말한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의 모범으로 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신다는 말씀을 듣는다(벧전 2:21, 요15:10, 13:15 참조).
3.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자비는 행동의 동기가 된다 : 행위는 종속적인 것이다
이 몇 개의 성경적인 증명은 단순히 맛을 본 데 불과하다. 만일 모든 관련 성구를 인용한다면 여러 권의 책을 편집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도의 글에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모든 선한 일을 가르쳐주는 충고와 격려와 책망의 말이 가득하다(딤후 3:16-17 참조).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로를 말하는 일이 없다. 그들이 가장 강력한 충고를 할 때에 그 근거로 삼는 생각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자비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를 입지 않고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소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그의 서신 전체에 걸쳐 논한 다음에, 구체적인 권고를 하는 대목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권고한다(롬 12:1). 참으로 우리의 행실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리라는(마 5:16) 이 한 가지 이유가 있으면 족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도 마음이 강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면 넉넉히 선을 행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1423) 그러나 이 사람들은 공로를 역설함으로써 혹은 강제적으로 노예적인 율법 준수를 다소간 실현할는지 모르나, 우리가 그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는다고 해서1424) 우리에게는 선행을 권장할 근거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이런 율법 준수를 하나님이 친히 기뻐하시는 듯이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언명하시며, "인색함으로나 억지로"하는 것을 금지하신다(고후 9:7).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의 정신을 각성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해서 자주 사용하는 충고 방법을 멸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 하신다는 말씀이 있다(롬 2:6-7, 마 16: 27, 고전 3:8, 14-15, 고후 5:10 기타).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충고라든지, 가장 중요한 것이라든지 하는 것을 나는 부정한다. 또 우리는 이 점에서 출발해야 된다는 것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그것은 그들이 선전하는 그러한 공로를 전연 지지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 점은 후에 알게 될 것이다.1425) 끝으로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해서만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에 첫 자리를 주지 않는다면, 공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고 말하는 바이다. 의롭다함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음으로 붙잡음으로써 얻는 것이지 우리 자신의 행위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먼저 이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면 성화를 추구하기에 적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예언자가 하나님을 향하여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라고 하는 것은(시 130:4) 우리의 이 교리를 아름답게 시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의 기초가 된다고 예언자는 가르치기 때문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출발점은 그의 자비를 신뢰하는 데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교황주의자들이 공로가 있는 일이라고1426) 하는 그 경외는"공로"란 말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경외는 죄의 용서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칭의의 교리는 죄인을 선동한다
우리가 죄를 값없이 용서받는 것이 의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들은 죄를 짓도록 선동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1427) 중상모략 중에서도 제일 무가치한 것이다. 우리는 죄의 용서가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선한 것으로 값을 치를 수 없고 따라서 거저 주시는 선물로서 밖에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에게는 값없이 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값없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가장 거룩한 피를 흘리셔서 많은 값을 치르고 사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를 제외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만족시킬 만한 대속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배운 사람들은 자기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피를 흘리시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도 추악해서 이 가장 순결한 피의 샘이 아니면 깨끗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듣는 편이 선행을 뿌림으로써 깨끗해진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에 죄를 무서워하는 생각을 더 많이 일으킬 것이 아닌가? 또 다소라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 번 깨끗함을 얻은 후에 다시금 진흙탕에 뒹굴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이 샘의 순결을 흐리게 하며 더럽히는 것을 어떻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솔로몬의 말대로 믿는 사람은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고 말한다(아 5:3).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죄의 용서의 가치를 떨어뜨리며, 어떤 사람들이 의의 존귀성을 더럽히는지 분명히 밝혀졌다. 그들은 배설물에 불과한(빌 3:8)1428) 그들의 무가치한 보속으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진정시킬 수 있는 체한다. 죄책은 너무도 무거워서 이런 가벼운 쓰레기로는 대속할 수 없으며, 또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너무도 중대한 범과여서 이런 무가치한 보속으로는 사면을 받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만이 사면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한다. 그들은 의가 없어질 때에는 보속 행위로 회복되고 수리될 수 있다고 말한다.1429) 우리는 의는 너무도 귀한 것이어서 어떤 행위에 의한 보상도 충분히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에서 피난처를 얻을 수밖에 없다. 죄의 용서와 관련된 나머지 문제들은 다음 장에 속한다.1430)
제 17 장 율법의 약속과 복음의 약속과의 조화
(율법에 관련된 행위 : 고넬료의 예. 1-5)
1. 스콜라 논법을 언급하고 논박함
이신칭의를 뒤집어엎으려고 하고 또는 약화시키려고 사탄이 그 앞잡이들을 통해서 사용하는 다른 논법들을 이제 추궁하겠다. 나는 이 중상모략 자들에 대해서는 이미 논박했다고 생각하며 그들은 우리가 선행에 반대한다는 말을 못할 것이다. 행위에서 칭의를 분리시키려는 것은 선행을 하지 말라든가, 선행이 선하지 않다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행에 의지하며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으로부터 구원이 온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확신과 우리의 자랑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그리스도시며, 우리도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와 천국의 후예들이 되어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영원한 복락을 바라볼 수 있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은 또 다른 계략으로 우리를 공격하므로 우리는 반격을 계속하겠다. 우선 그들은 주께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하신 율법의 약속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 약속이 완전히 폐지되기를 원하는가 또는 완전히 유효하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폐지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우습고 모순된 것이므로 그들은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그들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추론한다.1431)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신 7:12-13),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왜하지 아니하면"(렘 7:5-7, 23) 내가 너희 중에서 다니리라. 이와 같은 구절을 천 개라도 들 수 있으나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 구절들은 뜻이 다르지 않고 내가 인용한 구절에 대한 해설로 그 뜻이 설명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율법에서는 복과 저주(신 11:26), 그리고 생명과 사망이 우리 앞에 제시되었다고 모세는 증거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복이 무용, 무익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칭의가 믿음에만 의한 것이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1432) 만일 우리가 율법을 붙잡고 그것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복을 잃고 모든 범법자들에게 예정된(신 27:26 참조) 저주가 우리 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주께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키는 사람이 아니면 아무것도 약속하시지 않았고, 그런 사람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는 전 인류가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으며, 이 저주와 진노에서 해방되려면 율법의 권능에서 떠나서 이를테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풀려 자유를 얻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이것은 육적인 자유가 아니다. 육적인 자유라면 그것은 우리를 율법 준수에서 이탈시키며, 모든 일에 방자하게 행동하도록 선동하며, 자물쇠가 부서지고 고비가 풀어진 것같이 우리의 육욕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적인 자유이므로 울며 회개하는 양심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율법의 결박과 족쇄에서 그리고 그 저주와 정죄의 압박에서 양심이 해방된 것을 알려준다.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붙잡을 때에 우리는 이 자유를 얻는다. 말하자면 율법에 대한 노예 상태에서 석방된다.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은 믿음으로 얻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이 한 일은 우리의 양심을 찌르고 괴롭게 하여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