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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서늘하여라, 연화장이여 - 봉화 청량산 산행기
2013년 7월 9일, 경북 봉화 청량산(869.7m)으로 산행을 나선다. 산행 코스는 입석 - 응진전(외청량사) - 유리보전(내청량사) - 김생굴 - 보살봉(자소봉) - 뒤실고개 - 하늘다리 - 정상(의상봉) - 두들마을 - 하청량(주차장)으로 산행시간은 약 4시간으로 잡았다.
작은 금강산(小金剛), 청량산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따라가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 퇴계 이황의 청량산가(淸凉山歌) -
속세를 벗어난 듯 고요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마음이 맑고 시원한 곳 봉화군 청량산. ‘청량산가’를 보면, 퇴계 선생은 자신의 정신적 고향인 청량산에서 고요히 말년을 보내고자 한 듯하다. 복숭아꽃이 떨어져 강물에 흘러가, 이를 본 어부가 무릉도원인 청량산으로 찾아올까 염려할 정도로 이곳의 빼어난 경치를 몹시 사랑했던 것 같다. 고향인 안동시 도산면에 도산서원을 세웠지만, 청량산에 서원을 지으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올 만큼 퇴계 선생은 청량산에 애정이 많았던 것 같다. 주자(주희,朱熹)가 무이구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물아일체의 삶을 살았듯이, 퇴계와 율곡, 우암 등 조선의 성리학자(주자학자)들은 세속을 벗어난 깊은 산수 간에 소박한 집을 짓고 학문과 인격 완성에 정진을 했다. (중국 10대 명산 가운데 하나인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 무이산시에 있는데, 1999년 유네스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착안하여 봉화군은 무이산시와 교류 협력을 강화하여, 청량산 일대에 세계유교선비문화공원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청량산(淸凉山)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대간에서 낙동정맥이 갈라져 나간 지점 아래에 우묵하게 숨어 있는 명산이다. 그 사이를 낙동강이 흐르는데, 청량산은 낙동강이 안동댐을 향해 휘돌아나가는 강가에 우뚝 솟은 명산으로서, 산세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小金剛(작은 금강산)’으로 불리었다. 일찍이 조선후기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백두대간의 8개 명산 외에 대간을 벗어난 4대 명산 중 하나로 청량산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또 청량산은 영암 월출산, 청송 주왕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악(奇岳)에 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2007년 3월 13일,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소재 ‘봉화 청량산(奉化 淸凉山)’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한 바 있다.
청량산은 해발 800m 내외에 12개 암봉(六六峰 : 장인봉, 선학봉, 자란봉,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탁립봉, 금탑봉, 축융봉)과 최치원이 글을 읽었다는 독서대를 비롯한 청량산 12대(어풍대, 밀성대, 풍혈대, 학소대, 금강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 청량산 8굴(김생굴,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및 청량산 4우물(총명수, 청량약수, 감로수, 김생폭)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지질학적으로 볼 때, 청량산은 중생대 백악기에 퇴적된 역암, 사암, 이암층이 융기·풍화·차별침식 등의 작용을 거쳐 다양한 지형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진안 마이산과 같이 많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역사 문화적으로도, 청량산 일대는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무궁무진하게 간직한 보물창고라 할 수 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2차 홍건적의 난(1361년)을 피해 안동지방으로 몽진했을 때 청량산에 머무르며 축조하였다는 청량산성 흔적, 청량산에 머물던 공민왕이 환도 후에 승하하자 봉화 백성들이 공민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사당이 산성 남쪽에 남아 있다. 또한 신라의 원효(유리보전, 원효굴), 의상(응진전, 의상봉), 김생(김생굴), 최치원(총명수, 치원대)과 조선 중기의 이황(청량정사), 주세붕(풍기군수, 12봉 명칭을 일부 바꿈) 등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장소와 설화들이 많이 남아 있어 청량산은 불교의 도량인 동시에 유학의 성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청량산 일대는 16세기 사림파의 등장 이후 산수경치를 사랑하고 유교와 퇴계를 숭상하는 영남학파 유생들의 정신적 고향이 되어 왔다.
사색의 물길, 구도의 산길
10:10 도산서원 이정표가 나타난다. 안동호를 오른쪽에 두고, 예안향교를 지난다. 예안향교에서 청량산박물관은 3.4km, 도산서원은 4km 거리에 있다. 도산면 원천리에 시인 이육사의 고향마을이 있고, 2004년에 준공된 문학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오늘은 들를 수 없는 아쉬움을 안고 지난다. “내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시인의 마을에 청포도가 영글었을까, 민족적 염원을 담은 전설이 하늘빛으로 익어가고 있을까? 내 마음의 은쟁반에도 하이얀 모시수건을 마련하리라.
10:45 안동 도산면을 향해 가면서 버스기사가 10km 남았다고 말하니 회원들이 산행 준비를 하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낙동강과 청량산이 어우러진 승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먼 길을 달려오느라 지친 몸과 마음의 피로가 금세 사라진다. 도산면을 지나며 퇴계의 태실, 묘소, 도산서원을 떠올려 본다. 퇴계의 태실과 묘소, 그리고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면에서 도산정사가 있는 청량산을 잇는 35번 지방도를 퇴계길이라 하고, 낙동강물을 따라 ‘단사 - 면천 - 학소대 - 가송리 농암고택 - 올미재 - 고산정 - 청량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트래킹로를 ‘퇴계 오솔길’이라 이름지었다. 퇴계 선생이 걷던 산과 강, 그리고 사이로 난 길을 보며, 도학자로서 바른 삶을 살려 했던 조선 선비들을 떠올린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古人) 못 뵈 고인(古人)을 못 봐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쩔고 -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 中 제9곡 -
길은 만남이다. 우리가 길을 나서는 첫째 이유는 만나기 위해서이다. 길에서 벗을 만나고, 내 앞에 걸어갔던 스승을 만나며, 나를 만나게 된다. 고인을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퇴계의 학문은 청량산 육육봉처럼 아름답게 솟고, 정신세계는 낙동강처럼 맑고 푸르게 흘러 오늘도 우리의 마음을 청량하게 해 주지 아니한가? 언젠가 다시 이곳에 들러, 퇴계가 예던 길을 천천히 걸으면서 옛 선인의 정신세계를 음미해 보는 것도 행복하리라.
명호면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우회전을 해 도립공원 청량산 안으로 들어간다. 낙동강을 가로질러야 산문(山門)에 들어서는 구조가 인상적이다. 이 넓고 깨끗하며 유장한 강물에 마음의 티끌을 씻고 성스러운 공간 안으로 들어가니 어찌 마음이 청량하지 않겠는가!
강을 건너 문 없는 문을 밀고 들어간다. 중생 누구나 들어오라고 일주문에는 기둥만 세우고 대문이 없다. 자비심, 개방적 태도가 느껴지는 건축 양식이 아닐 수 없다. 신라 명필 김생의 필치로 淸凉之門이라 쓴 일주문 현판이 우리를 반긴다. 현판의 왼쪽에 김생서집(김생의 글씨 가운데 모았음)을 밝혀 놓고 있는데, 여백의 미를 잘 살린 해서체 글씨가 '청량'이란 말과 잘 어울린다. 청량산 청량사 산문에 들어서면 번뇌가 사라져 정신이 맑고 서늘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1:00 오늘 산행의 출발점인 입석(立石)에 도착했다. 퇴계의 ‘청량산가’를 소개하는 글, 권성구(權聖矩)의 한시를 돌에 새긴 시비가 있다.
聞說金剛勝 금강산 좋다는 말 듣기는 해도 此生遊未嘗 여태껏 살면서도 가지 못했네 淸凉卽其亞 청량산은 금강산에 버금가니 呼作小金剛 자그마한 금강이라 이를 만하지
입석에서 아스팔트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축융봉, 공민왕당, 청량산성으로 가게 된다. 우리는 나무 계단으로 새롭게 조성한 왼쪽 숲길로 들어선다. 청량사 1.3km 표시가 있는 ‘원효대사 구도의 길’이다.
원효(元曉), 새벽을 연 사람
숲은 고요했다. 단풍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투명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다. 이제는 등산로를 정비해서 그리 험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원효와 의상이 걷던 이 길은 조금의 번뇌망상도 허용되지 않는 가파른 길이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350년 전인 서기 663년, 한 사내가 소를 끌고 이 길을 오른다. 인시(3~5시)에 새벽 예불을 올리는 정결한 마음으로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긴다. 어둠에 싸여 그 빛을 잃은 세상에서 좀 더 멀어지려는 듯 그는 자꾸만 깊은 산속으로 길을 잡는다. 노래하는 새, 비상하는 날개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로부터 보시를 받아 길들인 뿔 셋 달린 검은 소만이 멍에에 짐을 지고 묵묵히 그를 따르고 있을 뿐. 요석공주의 눈가에 흐르던 두 줄기 눈물, 아들 설총의 눈망울에 고인 맑은 샘물.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위로 보리(지혜)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고자 청량산 문수보살께 간구하였으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조사의 가르침처럼, 미망에 빠뜨리는 모든 것을 그는 버리고 이 산길을 올랐으리라. 단란한 가정, 세상의 명성,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의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려다보면 무간지옥인듯 어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마음의 절벽길을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 있다. 얼마나 만행(萬行)을 거듭했을까, 그의 승복은 낡고 머리도 제법 자랐다. 자신의 업을 떨치려는 것일까, 아니면 중생의 고통을 대신 짊어진 것일까, 머리에 세 개의 뿔이 돋아 있는 검은소는 무거운 멍에를 메고 묵묵히 스님의 뒤를 따르고 있다. 원효를 만나 소의 뿔은 점점 더 자랐다. 원효는 낙동정맥의 산길을 넘고, 낙동강의 물길을 건너, 마음의 지도를 따라 마침내 청량산 계곡 깊숙이 들어섰으리라. 삼국 통일 전쟁의 피비린내가 진동한 서라벌, 계율의 형식만 남은 신라 불교,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신라 귀족들을 멀리 떠나고 싶었던 것일까? 금탑봉을 지나 연화봉 아래에 이르러 원효는 비로소 걸음을 멈추었다. 봉화산 12봉우리들이 이들을 둘러싸고 연꽃처럼 투명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원효는 연꽃 모양을 한 이 우주의 중심에 연대사(蓮臺寺)라는 절집, 가르침의 탑이 서는 모습을 상상하며 선정에 들어간다. 사방이 다시 적멸의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소를 찾던(尋牛) 소도 마음의 고요(安心)을 얻은 것일까, 지상의 가쁜 숨을 멈추고 원효의 곁에서 눈을 감는다. (소가 묻힌 곳에 가지가 셋인 소나무가 솟아나, 사람들은 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부른다.)
으뜸 원(元), 새벽 효(曉). 첫아침이란 법명이다. 새벽 효(曉)자는 日+土+土+土+元로 이루어진 것으로 해(日)의 기운이 터(元) 위로 土의 형상으로 뻗어 나오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해가 뜨면 삼라만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리심을 얻게 되면 어둠에서 벗어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인간과 세상, 우주에 대한 눈이 밝아진다. 번뇌(tharma)가 보리(THARMA)이듯, 마음의 어둠을 인식하고 빛을 소망하는 사람에게만 새벽은 열린다. 원효가 그러했듯이,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가야 비로소 밝아진다. 마음의 칼(心劍)을 품고 번뇌를 단칼에 베어야 자재로운 영혼이 될 수 있다. 환락과 풍요의 공간 서라벌을 버리고, 원효가 궁벽진 청량산으로 들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새벽이 없는 삶, 개벽하지 못하는 삶이 곧 죽음이요, 구원(천국)을 얻지 못한 삶이리라. 미명의 새벽 햇살에 석굴암 본존불이 미소짓듯, 원효가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효가 연 정신의 아침은 무엇일까? 청량사 5층석탑에서, 나는 이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 구원의 보편성이다. 그는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아미타불만 부르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저자거리에서 외쳤다. 어려운 교리나 불경을 몰라도 신분과 학식에 관계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파하여 귀족불교에 맞서 민중불교를 창시했다.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라 예수가 가르친 것처럼. 둘째, 사상의 독창성, 문화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의상과 당나라 유학을 가다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후, 당나라행을 포기했던 것처럼 그는 국내파 지식인이었다. 의상을 비롯한 대부분의 승려들이 인도나 중국에 유학을 다녀와 고승으로 추앙받은 데 비해, 특이하게도 원효는 국내파(비유학파)로서 독보적인 경지를 구축했고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점은 한국 지성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셋째, 무애행(無碍行)에 주목하게 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원효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 구도자였다.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불살생의 계율을 어겼다는 포항 오어사(吾魚寺) 전설에서 볼 수 있듯이, 원효는 계율의 형식을 해체하고 그 참된 의미를 새롭게 구성한 인물이다.(이 또한 바리새인들과 대립했던 예수님과 유사하다) 옷차림이나 외양에서 그는 승려와 속인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대처승으로 아내 요석공주, 아들 설총을 두었다. 원효는 겉치레, 형식을 중시하는 위선적 사회에 맞서 본질에 충실하려 좀더 파격적인 행동을 했던 분이라 생각한다.(최근에는 한국 가톨릭계에서 신부의 결혼 허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넷째,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다름, 차이를 존중하는 사고는 오늘날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의 화이부동(和而不同-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와 상통한다. 문화충돌의 시대에 자문화중심적 사고를 지닌 지식인, 배타적 종교인들이 새겨야 할 태도인 것이다.
응진전 -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슬픔
11:22 응진전(應眞殿)에 도착했다.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바위 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이 나이테를 두른듯 뿌리를 내리고 있다. 제비집처럼, 절벽과 절벽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고, 천길 낭떠러지에 걸려 있는 형국이다. 주세붕이 자신의 자(字)를 따서 경유대(景遊臺)라 하였다 전하는 것처럼, 법당 터는 좁지만 차경을 하여 풍경이 아름답다. 문득 구례 사성암, 관악산 연주암을 떠올리게 된다.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미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수행의 길은 험하고 깨달음에 이르기가 어려움을 말없이 가르치고 있는 절집이다.
응진전 절마당에 핀 불두화(수국)를 보며 외청량사라 불리는 응진암을 창건한 의상대사를 잠시 생각한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 선묘낭자의 사랑마저 뿌리친 사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인의 이야기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주 부석사(浮石寺 - 의상대사가 전국에 화엄 10찰을 세웠는데, 부석사가 종찰임, 전북은 김제 歸信寺가 화엄 10찰로 금산사를 말사로 거느리기도 했음)에 전해오고 있다.
응진전 내부를 둘러본다. 응진전 입구 좌우로 호위무사인 금강역사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내 등산모자와 비슷한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 이미지도 닮은 듯하여 웃음이 난다. 16나한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모기에게 물린 듯한데 표정이 환하여 깨달음을 얻은 분들의 경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응진전 좌우에 노국대장공주상을 모시고 있다. 원나라 양식의 의상을 하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응진전 맞은편에 축융봉(845.2m)과 이어져 있는 청량산성이 보인다.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지방, 청량산으로 피난을 왔고, 그 때 축성을 했다고 전한다. 몽진을 하고 왕비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공민왕 또한 승하하셨는데, 이를 슬퍼한 이곳 백성들이 산성에 공민왕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남편 공민왕은 축융봉 옆 사당에 모셔져 있고, 노국공주는 이쪽 금탑봉 아래 응진전에 마주보고 있다.
총명수, 외로운 구름(孤雲)을 생각함
11:34 총명수 이르렀다. 이 물을 마셔 최치원의 지혜가 밝아졌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과거를 준비했던 영남의 유생들이 찾아와 이 물을 마셨다고 한다. 육체의 갈증은 물론 영적 목마름이 해소되는 생명샘이길 바라며 목을 축인다.
최고운을 잠시 생각한다. 외로운 구름(孤雲)이란 호를 지닌 최치원은 해동 유학의 시조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당나라에 유학을 해서, 그곳에서 ‘토황소격문’ 등으로 문장을 날렸지만, 귀국 후에는 6두품 출신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소외되었다. 전북 정읍 태산현(현재 태인) 현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독서당에 은둔하면서 말년을 보낸다. 능력보다 혈통을 중시했던 신라 후기 사회에서 그는 외로운 구름이 되어 방외지사(方外之士)로 떠돌았다.
응진전에서 산모퉁이를 돌아 어풍대(御風臺)에 이르니 청량사의 진면목이 보인다. 어풍대는 외청량과 내청량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어 청량사 감상의 최적지다. 청량산 봉우리들이 연꽃처럼 절을 둘러싸고 있고, 그 화심(花心)에 절집이 다소곳이 앉아있다.
달마도를 그리는 산꾼 - 번뇌에서 깨달음으로
길을 재촉하니 청량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청량정사와 ‘산꾼의 집’이란 찻집이 나란히 있다. 청량정사는 퇴계 이황 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에 정진했다는 곳이다.
‘산꾼의 집’에 들어서니 주인장이 무료 차 공양 준비를 한다. 주인장 초막 이대실님은 대한민국 달마도 명장 제 1호로서, KBS 일요스페셜, 그곳에 가고 싶다, 생방송오늘, MBC 사람과세상 등 TV 프로그램에 종종 소개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일요스페셜 '만행'에서 현각스님과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지나칠 수 없었다. <하버드에서 화개사까지> <만행> 등의 책을 내신 현각스님은 하버드 대학원 출신의 승려로서 숭산스님의 제자로 출가했는데, 현재는 독일 선원에 계신다. 한국에서 너무 인기가 많아 수행에 지장이 있다 판단해 독일선원으로 가셨다고 한다. 최근 외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수행에 들어가신 혜민스님처럼.
일행과 많이 떨어진 듯해서 마음이 바빴지만, 차가 뜨거워서 빨리 마실 수도 없다. 이왕지사 느긋하게 마음먹기로 하고 차를 음미하기로 했다. 순간 8만4천 번뇌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마음이 고요해진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생각하니, 주인장이 그린 달마도며 도예 작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성들에게 주는 교훈인 듯, ‘넘치면 갈비만 남느니라’는 작품이 인상적이다. 차보시를 받고 기념촬영까지 한 답례로 작은 기념품을 하나 구입해 목에 걸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처럼, 우리 인연이 순간이었지만 영원에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연꽃, 그 중심에서 시간을 잊다
12:00 청량사에 도착했을 때 산우회 회원들은 절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산악대장님과 마주치기라도 했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등반을 멈추고 이곳에서 시간을 잊고 고요히 앉아 있고 싶었다.
나무 표주박으로 감로수를 마신 후, 법당인 유리보전으로 올라간다. 수미산(설산)의 형태를 본 떠 법당으로 갈수록 경사가 가파라진다.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진 琉璃寶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석가모니 전생불)를 주불로 모신 절이라는 뜻으로, 법당의 중앙에 약사여래(지불, 닥종이를 이겨 만든 불상)를 모시고, 왼쪽에 지장보살(보물 제1666호), 오른쪽에 문수보살(모시로 만든 불상 -국내 유일)을 모셨다. 문수도량인 중국 청량산을 본뜬 까닭에 협시불로 문수보살을 모신 듯하다.
법당 앞에 피어 있는 수련에 눈길이 간다. 청량산 6․6봉이 하나의 연꽃이요, 우리의 본성이 또한 연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꽃 한가운데로 가기 위해 5층석탑을 향한다. 청량산이 연꽃이라면 그 꽃술(화심)에 해당하는 곳에 있어 이채롭다. 우주의 중심에 부처와 그 가르침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젊은 탑이지만 자태가 아름답다. 가름하면서 탑의 상륜부가 뾰쪽한 팔등신 탑이다. 주지스님이신 지현스님의 안목이 느껴진다. 단순성이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생각하며 탑돌이 하듯 한동안 그 곁에서 맴돌았다.
청량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산사음악회가 열린 곳인데, 가수 윤도현도 2012년 10월 첫주 토요일 청량산 산사음악회에 와서 이곳 풍광에 반했다고 한다. 탑에서 범종각을 내려다 본다. 4음(범종, 법고, 목어, 운판)을 모두 갖추었다. 그 곁에는 경주남산의 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을 닮은 불상이 맷돌 연좌대 위에 모셔져 있고, 아래에는 ‘바람이 소리를 만날 때’라는 찻집이 있다. 공(空) 사상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청량사의 뒷모습을 보기 위해 유리보전 뒤 언덕을 오른다. 법당 뒤 언덕에서 바라보니 내청량사 전각들이 또 하나의 연꽃처럼 벙글어 있다. 유리보전 팔작지붕의 선과 소나무, 탑이 어우러져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덕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불교가 위축된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청량산 속에 33개의 사암(사찰과 암자)이 존재했다고 하니, 청량산 전체가 하나의 불국정토였던 것 같다.
붉은 조끼를 입은 중년 사내가 노모를 모시고 유리보전을 향한다. 청량산달마원 산꾼의 집에서 뵈었는데, 노모가 몸이 불편한 까닭에 이제야 도착을 한 것이다. 노모는 법당에 들어가 시주를 한 후 합장례를 올린다. 비록 오체투지를 하진 않았지만, 신심이 깊고 맑은 분으로 보였다. 소천하신 어머님 생각이 나 유리보전과 5층탑 근처에서 서성인다.
12:17 발길을 오래 붙드신 어머니, 유리보전, 5층석탑, 삼각우송, 그리고 금탑봉과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다. 일행과 많이 떨어져 있고,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장보살의 화현이었던 삼각우, 삼각우의 환생인 삼각우송을 돌아보며 세 개의 뿔, 세 개의 눈을 생각한다. 세상을 보는 두 개의 눈과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의 눈, 나는 그 눈이 얼마나 맑고 환한가?
하늘다리 가는 길
청량사에서 자소봉까지는 40분 거리가 된다. 덕실고개로 치고 올라가 일행과 만날까 생각했지만, 김생굴과 자소봉(보살봉)을 들르기 위해 다시 산꾼의 집으로 되돌아간다.
12:35 김생굴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서예를 9년 익히고, 부족하여 1년을 더 익혔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한석봉의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서기(書技), 서예(書藝)를 뛰어넘어 서도(書道)에 이르기 위한 피나는 정진을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다. 유희지(柳熙之)의 송시를 읽고, 다시 길을 나선다.
金生健筆世爭傳 김생의 웅건한 글씨 대대로 다투어 전해졌으니 此地探眞向幾年 묻노니, 여기서 공부한 것이 몇 년인고 古穴荒凉人不見 옛터 황량하고 사람도 없지만 至今遺蹟尙宛然 지금 그 유적은 오히려 완연하네
13:00 자소봉에 올랐다. 108 계단을 오르듯, 홀로 철계단을 올라 주변 풍광을 감상한다. 뒤로 탁필봉이 솟아있고, 경일봉, 탁립봉 등 외청량 봉우리들이 1시간 거리에 둘러싸고 있다. 탁필봉(820m)을 지나 길을 재촉한다.
13:13 연적봉 근처에서 후미팀을 만났다. 한 동안 홀로 산행을 하다 일행을 만나니 마음이 놓이고 반가움이 더한다. 후미팀들은 이미 식사를 마친 상태였지만, 나를 위해 시간을 늦추면서 내 식사를 돕는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기쁨보다 안도감으로 인해 편안해진다. 허기와 목마름을 일시에 해결하고 또 길을 나선다. 후미팀들은 완주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또 앞서 가기로 했다. 청량사와 바로 이어지는 뒤실고개를 지난다.
13:50 하늘다리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다리를 건너려는 대장님 일행을 만났다. 오늘 알프스와 처음 산행을 하는 수호신님도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함께 산행을 하려 했는데, 내가 보조를 맞추지 못해 하늘다리 - 의상봉 - 두들마을까지 하산길에만 동행하게 되었다. 하늘다리는 해발 800m 지점의 자란봉과 선학봉을 연결한 현수교인데, 길이 90m, 폭 12m로서 국내에서 가장 길고 높은 곳에 위치한 다리라 한다. 흐릿했던 하늘이 점차로 열려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신선처럼, 구름 위에서 노니는 신선처럼 하늘을 걸었다. 잠시 지상의 기억들이 지워진 듯하다. 후미 일행들이 도착하여 사진을 찍은 후 다시 길을 나선다.
의상봉(장인봉) - 불가의 계율과 유가의 호연지기
2:10 장인봉, 혹은 의상봉이란 하는 청량산 정상에 선다. 화엄학의 대가 의상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떠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산이다. 옆 전망대에서 보면,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너머에 문명산(894m)이 마주 우뚝 서 있다. 청량산과 대조를 이루는 부드러운 육산이다.
장인봉 표지석에는 주세붕의 시 ‘登淸凉頂’(등청량정 - 청량산 정상에 올라)이라는 5언율시 한시가 번역과 함께 새겨져 있다. 주세붕도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 등 청량산에 올라 그 아름다움에 경탄을 한 시문을 다수 남기고 있다.
청량산 꼭대기 올라 두 손으로 푸른하늘 떠받치니 햇빛은 머리 위에 비추고 별빛은 귓가에 흐르네 아래로 구름바다를 굽어보니 감회가 끝이 없구나 다시 황학을 타고 신선세계로 가고 싶네
일찍이 공자는 ‘동산에 올라 노나라가 좁은 줄 알았고, 태산에 올라 천하가 좁은 줄 알았다’하여 자신의 호연지기(浩然之氣), 학문과 인격의 높고 넓은 경지를 표현했다. 주세붕(周世鵬1459~1554)은 본래 대봉(大峯), 혹은 의상봉(義湘峯)이라 한 청량산 정상의 이름을 중국 태산에 있는 장악(丈岳)을 본 따 유교식 ‘장인봉’으로 바꾸고, 장인봉에 올라 자신의 호연지기를 표현한다. 풍기 군수였던 주세붕(周世鵬1459~1554)이 ‘오륜가’ 등을 지은 청백리로서, 최초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워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인재를 양성했던 인물임을 감안하면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와 비슷하게 퇴계 이황(1501~1570) 또한 ‘청량산 6․6봉’이라 부르며 ‘조선의 무이산’으로 삼아 불가의 산을 유가의 산으로 바꾸려 하였다.
이 땅에 불국정토를 만들고자 했던 원효, 의상이나 주자학적 세계관에 입각한 이상사회를 지향했던 주세붕, 이황 모두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조선 후기에 추사와 초의선사가 교류했던 모습에 비하면 주세붕의 태도는 아쉬움을 남긴다. 종교 간의 경계를 넘어 함께 지상에 이상사회를 만들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리라.
청량산에 피어나는 연꽃들
두들마을을 거쳐 청량폭포로 하산한다. 청량산 깊은 곳에 인가가 드문드문 있다.
14:55 커피숍 겸 게스트하우스가 있다 길래 하산길을 벗어나 들러 보았다. 운치 있는 집이지만 주인장이 출타한 듯 고적하기만 하다. 곶감을 걸어놓은 풍경, 커피 자루들을 활용한 인테리어가 인상적이었다. 백일홍에게 수인사 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15:10 하산지점인 청량폭포에 이르렀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마음을 청량하게 씻어준다. 하산을 하니 하늘이 말갛게 갰다. 외청량 내청량 6․6봉을 마음에 그리며 다시 한 번 뒤돌아본다. 외청량 주차장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풍경, 그 밑을 굽이치는 낙동강 푸른 물결이 마음을 맑고 서늘하게 한다.
저 청산에도 외청량, 내청량 연꽃이요, 내 마음의 청산에도 연꽃이 한창이다. 길도 없고 길 아닌 것도 없다. 귀로에 오른다. 길 밖도 연화장(蓮花藏)이며, 길 안도 늘 맑고 시원한 연화장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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