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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우만,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키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1846년(헌종 12년) 8월 장성군 탁곡(卓谷; 현 황룡면 아곡리)에서 태어났다. 기우만은 여덟살 때 중국 초나라 때 제갈량이 쓴 출사표 같은 어려운 고문을 이해했으며, 열세살 때는 자치통감과 주자강목을, 그리고 16살 때에는 주역, 예기, 춘추 등을 독파했다고 한다.
기우만은 25세 때 사마시(司馬試-조선후기 생원 진사시험=소과)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29세 때 증광과(문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이후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곳이 황룡면 하사촌(下沙村)이었는데, 30세 때 고진원(古珍原)의 창촌(倉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진원면 월송리(月松里)으로 이사하면서 호를 송사(松沙)라고 지었다. 하사와 월송에서 한자씩 따서 지은 것이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1879년 조부 노사 기정진이 별세하였다. 기정진이 타계하자 그는 승중손(承重孫)인 춘도(春度)를 대신하여 상(喪)을 주관하였다. 2년 뒤 1881년 여름에 조부 기정진의 유문(遺文)을 편사(編寫)하였고, 1883년 봄에는 이를 <<노사집(蘆沙集)>>으로 묶어 편찬하였다. 그 사이 1882년 8월 익릉(조선후기 제19대 숙종의 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참봉(翼陵參奉)의 벼슬이 내려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기우만은 오직 조부의 유업을 계승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특히 기우만에 의한 노사문집의 발간은 그의 학문적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양회갑이 편찬한 노사 기우만의 행장에 따르면 1884년 그는 경상남도 삼가(三嘉) 물계(勿溪)로 정재규를 방문하고 단성의 신안정사에서 강회를 가졌으며, 돌아오는 길에 진주 월횡(月橫)에 들러 조성가를 방문하였다. 또 1889년 가을에는 능주로 가서 정의림을 방문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던 해 겨울에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이 찾아왔다. 척양척왜의 만인소를 올렸다가 유배까지 당한 김평묵과 기우만이 서로 뜻이 맞은 것이다. 당시 화서학파의 종장으로 김평묵은 1881년 신사척사운동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신안군 지도에 귀양갔다가 풀려나 돌아가던 길이었다. 김평묵이 귀양 중이었을 때 그의 사위인 홍재구(洪在龜)를 통해 기우만이 문집을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두 학파간에 주리론적 연대의식이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기우만은 재야에 뜻을 두고 강학을 열어 제자를 키우는 한편, 정재규, 정의림 등 노사학파의 핵심 인물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화서학파의 인물들과 교유하면서 노사의 학통을 뿌리내리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영남과 호남간의 노사학파의 단결이 더욱 공고화되었고, 노사학파 내에서 기우만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그러던 중 1894년 전봉준을 지도자로 내세운 호남의 동학농민들이 이른바 ‘갑오농민전쟁’을 일으켰다. 호남 전역에서 탐관오리와 악덕 지주와 양반에 대한 숙청이 일어나는 내전을 방불하게 하는 혁명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기우만 집안과 그가 사는 동네는 한 사람도 피해가 없었다. 그만큼 기우만 집안은 유생들은 물론 지역의 농민층 내에서도 명망 있는 집안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우만은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내려온 관군에게 군량과 고기를 모아 보내고 동학당의 숙청을 요청했다. 이듬해까지도 ‘동학도’는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 전라도관찰사로 내려온 이도재(李道宰)는 고민 끝에 기우만에게 편지를 내고 진압책을 물어왔다. 이도재는 갑신정변 때 관련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갑오경장으로 풀려나 동학란 진압의 특지를 받고 내려왔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괴수는 잡아 섬멸할 것이며, 협박에 못이겨 동원된 사람들은 너그러이 용서하여 은의(恩義)를 베풀어주어야만 그들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동학란’의 만연을 막는 방도입니다.”
척사파의 영수였던 노사의 정신을 계승한 기우만이 동학 또한 서학과 마찬가지로 악의 뿌리로서 척사의 대상이라고 인식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의 진압에 공을 세운 나주목사 민종렬(閔種烈)의 공덕을 기리는 ‘나주평적비’를 찬(撰)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등에 업은 개화파정권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개화정책을 강행하면서 정국은 더욱 혼미에 빠져 들었다. 1895년 8월 일본이 왕비를 시해하는 무리수를 둔데 이어 친일개화파 세력이 국왕을 협박하여 단발령을 공포하자, 분노한 백성들이 의병의 깃발 아래 ‘토역복수(討逆復讐)’를 외치기 시작했다. 강원도 춘천에서는 이소응이 의병을 일으켜 관아를 휩쓸었다. 해가 바뀐 1896년 1월의 일이었다.
이소응의 거의와 때를 맞춰 충청도 홍주에서 김복한 등이 일어섰고, 경상도 평해에서도 평민 출신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어 반일항쟁의 기치를 올렸다. 충청도 제천 유생 유인석, 이인영, 이강년 등이 전국에 창의(倡義) 격문을 띠우자 이에 호응해 맹영재(孟英在), 김백선(金伯善)이 지평(砥平)에서, 허위가 금산(金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정부에서는 선유사(宣諭使)를 각도로 보내 의병을 선유하여 해산하고, 백성을 안무하도록 했다. 한편으로는 서울, 지방의 병력과 일본 수비대 병력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제압하는 강온 양면 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의병들은 이들 선유사가 갖고 온 칙명이 역신들이 왕명을 빙자하여 만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선유사를 붙잡아 처단하기도 하였다.
제천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된 유인석이 2월 11일 각도 별읍에 보낸 격문이 장성에도 도착하였다.
“아아, 우리 팔역(八域)의 동포들이여! 지금 온 나라가 모두 죽게 된 이 판국을 그대로 버려둘 것인가? 할아버지, 아버지 그 누구도 5백년 조정 이 나라의 백성 아닌 자가 없는데 나라를 위해서나 집을 위해서나 어찌하여 한 두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 참으로 슬프도다....․(중략)...국모의 원수도 이가 갈리는데, 참혹함이 더 하여 군부의 지존에 또 형체를 헐리고 의관이 찢어지는 일을 당하였도다.(하략)”
유인석이 각도 별읍에 격문을 낸 시점에 서울에서는 새로운 사태가 발생하였다. 즉, 1896년 2월 11일 이른 새벽. 신무문(神武門) 밖에 러시아 군사 50명의 호위 하에 교자 4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때 맞춰 고종과 왕세자, 엄상궁 세자빈 등이 나와 가마에 올랐다. 왕을 맞이한 이는 이완용(李完用)과 이범진(李範晉) 등 친러파 대신들이었다. 가마가 옮겨간 곳은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새벽이 되자 국왕을 도둑맞은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이윽고 김홍집(金弘集) 등 대신들에게 러시아 공사관으로 오라는 고종의 소환장이 들이닥쳤다.
왕명에 따라 별도리 없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던 내각 대신들의 행렬은 도중에 군중의 피습을 받았다. 가장 먼저 피습을 당한 것은 정병하(鄭秉夏)의 가마였으며, 이를 본 조의연(趙義淵), 유길준(兪吉濬)은 일본군 막사 안으로 급히 몸을 피하였다. 김홍집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향하던 중 경무청 경무사의 칼을 맞아 숨을 거두었고, 그의 시신은 종로네거리로 끌려가 수일동안 방치되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魚允中)은 서울 탈출했으나 그의 고향인 충청도로 가다가 용인에서 피습, 살해되었다.
아관파천 이후에도 의병들의 항일투쟁은 계속되었다. 일본인에 대한 가해가 심해지고, 일본 앞잡이로 지목된 관리들이 여기저기서 살해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뒤부터 창의를 미루고 지내던 기우만은 유인석의 격문이 도달하자 마침내 창의할 결심을 했다. 유인석의 격문이 오기 전부터 기우만은 이미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 세력 규합에 나섰다. 그는 격문을 통해서 국모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는데 간신들이 개화를 빙자하여 단발까지 강요하니 이 이상 더 왜적의 횡포와 군주를 위협 강제하는 무리들을 좌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기우만은 또한 단발을 하면 망하고 상투를 보호하면 산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들은 친일내각에 의해 막혀 왕에게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러고 있던 차에 유인석의 격문이 오고 각처에서 의병 궐기의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1896년 2월 7일경 기우만은 분연히 일어서서 호남의 각처 유생들에게 격문을 보냈다.
“임금께서 피난을 하고 계시는데 시일만 헛되이 보낼 수 없도다. 역당들은 숨어버려 아직 그 뿌리가 뽑히지 않고 있다. 어안의 한줄기 눈물자국은 천만백성이 간뇌도지(肝腦塗地)하여도 속죄할 수 없고, 임금의 몇 걸음 파천 길은 억조 백성이 분골쇄신하여도 돌이키지 못할 것이다....”
격문에서처럼 기우만의 장성의병의 봉기는 다른 지역보다 늦게 고종의 아관파천 직후 결행되었다. 격문에서 말하는 역당이라 함은 김홍집내각 일파와 그에 동조하는 개화파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그 중 김홍집과 정병하, 어윤중 등은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죽었지만, 나머지 세력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고 있었다. 국왕이 외국 공사관에 피신한 것 또한 백성으로서 차마 두고 볼 수 없는 치욕이었다. 따라서 기우만은 군사를 일으켜 그 잔당을 숙청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다 보호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 참고문헌
- 송사집(1931)
- 松沙先生文集拾遺(1980)
- 김봉곤, 호남지역의 기정진 문인집단의 분석, 호남문화연구 44, 2009
- 김동수, 의병열전, 전남일보 1976. 11. 23.~1976. 12. 7.
2. 1986년 2월 장성에서 기우만 등이 창의할 무렵 나주에서도 의병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왕비시해 사건과 단발령으로 반일 감정이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에 나주관찰부 참서관(參書官)주1)으로 있던 안종수(安宗洙)의 주도하에 개화파 관료들이 순검을 동원하여 성내 주민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라내자, 양반 유생은 물론 민중과 이속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주1) 참서관은 1895년 내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된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동년 윤 5월 1일부터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신설된 직제이다. 각 부의 장관으로 관찰사를 두었는데, 참서관은 부 관찰사 다음 서열로 부관찰사(副觀察使)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23부제는 1년만인 1896년 8월(양력)에 폐지되었고, 8도를 조금 보완한 13도 체제로 행정구역을 다시 재편되었다.
바로 이 때 장성의 기우만이 각 고을로 보낸 격문과 홍주의 통문이 도착하자, 나주의 유생과 향리들이 창의 준비를 서둘렀다. 마침내 나주의 유생 이승수(李承壽) 등이 중심이 되어 전 주서(注書) 이학상(李鶴相)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나주의병에는 유생 뿐 만 아니라 향리들도 주도적으로 참여였는데, 향리층 가운데 의진 결성에 중심적 역할을 한 인물은 나주의 서리로 갑오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정석진(鄭錫振)이었다.
근왕을 창의의 목적으로 내세운 나주의병은 우선 개화에 대한 반대 입장과 안종수의 잘못을 낱낱이 기록하여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이어서 나주의병은 다른 지역의 의병과 통합을 시도하거나 연합에 노력하였다. 특히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과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 때 나주의 상황을 전해들은 기우만은 새로 결성된 나주의병진에 글을 보내 격려하면서 안종수에 대해서 10가지 죄목을 들어 성토하였다. 기우만이 지적한 안종수의 10가지 죄목은 개화당에 아부한 죄, 각 읍의 인신(印信)을 도용한 죄, 주민을 핍박한 죄, 향교를 철폐하려 한 죄, 단발로 문묘에 참배한 죄 등이었다. 기우만의 통문을 읽은 나주의병들은 곧 바로 안종수를 제거하였다.주2)
주2) 종전에는『송사집』>의 기우만 연보를 근거로 안종수가 피살된 다음 기우만이 나주에 글을 보냈다고 하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홍영기 교수에 의하면, 이 연보는 기우만의 문인들이 그의 스승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작성한 것으로 안종수의 피살과 관련해서는 기우만 자신이 쓴『정장군전』과 이병수가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금정정의록』의 기록이 더 믿을 만 하다고 판단된다.
기우만의 장성의병은 근왕북상을 위하여 나주에 내려와 제반 문제를 협의하려 했으나 나주의병은 이에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 그 후 기우만이 안종수를 단죄하는 통문을 보낸 후에 나주의병과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리하여 장성의병은 결성된 지 4일 만인 음력 2월 11일 기우만은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金翼中), 이승학(李承鶴), 이주현(李周鉉), 고기주(高琦柱), 양상태(梁相泰), 기동관(奇東觀), 기동준(奇東準), 기재(奇宰), 기동로(奇東魯) 등 노사학파의 의사들과 함께 의병 200여 명을 거느리고 나주로 이동하였다. 이로써 나주의병이 출범한지 하루 만에 나주향교에 두 의진이 집결하게 되었다.
나주에서 조우한 두 의병진은 임란 때 유명한 의병장이었던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의 사당에 나아가 제문을 바친 다음, 단을 쌓고 금성산을 향해 나라를 위해 적을 토멸할 것을 맹세하였다. 때마침 나주에는 내려와 있던 승지 박창수(朴昌壽)가 향교를 찾아와 이들의 거의를 치하하고 송사 기우만을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할 것을 제안하였다.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된 기우만은 이 사실을 열읍에 통보하는 한편, 거의(擧義) 사실을 국왕에게 상소하였다. 이 상소에서 기우만은 의병 해산을 위한 선유사의 파견이 국왕의 본의가 아니라 자신들의 화를 모면하기 위한 개화파의 농간이라고 주장하고, 또 안종수가 흉계를 부리다가 군중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을 고하였다. 물론 이 상소는 임금 전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명망 있는 인물을 선유사로 특별 임명하여 의병들을 회유하여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1896년 음력 정월 신기선(申箕善)을 남로(南路)선유사, 이도재(李道宰)를 동로(東路)선유사로 각각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신기선은 선유 활동을 위해 남하하던 중 한 때 제천의병에게 붙잡혀 감금 당하기도 하였다.
기우만은 각 고을에 통문을 돌려 시국을 구제하는 일이 급함을 재삼 설득하며 2월 30일(음력)을 기해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였다. 광주를 집결지로 정한 것은 광주가 호남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나주의병진에서는 호남의병의 총수격인 기우만이 나주에 머물러야 한다고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광주로 이동한 기우만은 광주향교인 광산관(光山館)에 본영을 설치하였다. 당시 참모였던 기삼연도 광주로 진영을 옮기는 것을 지지했다.
기삼연은 기우만의 재종숙(7촌형제)이었으나 나이는 5세 아래였다. 그는 기우만이 나주에 머물 때 백마를 타고와 사람들이 백마장군이라고 불렀다. 또 기우만이 광산관에서 회합할 때도 장성에서 의병 3백명을 규합하여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그 부대의 사기가 정명(精明)하고 군기가 엄하여 사람들이 참 의병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기우만이 광산관에 유진하고 있을 때 노응규가 지휘하던 진주의병을 해산시키는 데 성공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가 전라도 서남부지역으로 진출했다. 나주 참서관 안종수의 동생 안정수의 사주를 받은 이겸제는 전라도에 들어서자 먼저 정석진을 찾았다. 그를 참서관 안종수를 살해한 주모자로 지목하여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정석진은 갑오농민전쟁 때 나주 관리로 있으면서 나주목사 민종렬(閔鍾烈)과 힘을 합해 나주성을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인해 그는 해남군수로 발탁되었다. 민종렬은 담양군수로 자리를 옮겼다가 음력 1895년 11월 말(양력 1월) 면직되었다.
정석진과 민종렬을 체포한 이겸제는 중간에 사람을 넣어 뇌물을 바치면 살려줄 수 있다고 유혹하였으나 정석진을 이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하였다. 그는 임지에서 체포되어 나주로 끌려와 효수되었다. 이 때 광주향교의 재임(齋任)을 맡고 있던 박원영(朴源永) 또한 전주진위대에게 참변을 당하였다. 그가 광주향교를 기우만이 이끄는 의병의 집결지로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창의하고 나서 뚜렷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공론만 되풀이하던 의병진 내부에서는 차츰 동요의 빛이 떠돌기 시작했다. 때 마침 남로선유사로 임명되어 지방을 순회하고 있던 신기선이 2월 27일 전주에 도착하여 기우만에게 사람을 보내 은근히 설득하였다. 신기선이 선유한 내용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주상께서는 비밀 유시를 내려 의병을 권장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지금 세력을 잡은 자들의 협박하는 구실만 되고 있다. 주상께서는 그 때문에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어 환궁할 날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공들이 의병을 일으킨 것은 어가(御駕)를 받들어 모시고 돌아가 임금의 치욕을 씻으며 왜를 토벌하고 원수를 갚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임금과 신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호령이 통하지 않고 역적의 무리가 총명을 옹폐하여 성상의 뜻도 펼 수 없게 되었으니 오늘의 명령은 정말 부득이한 일이다. 성상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해산하는 일이 또한 충성을 다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신기선은 갑신정변 때 이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으로 개화당 정권에 참여하여 고흥 여도(呂島)에서 10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갑오개혁 때 다시 등용되어 김홍집 내각의 내부, 법부, 학부대신 등을 역임하였다. 이 일로 신기선은 한때 유림들의 배척을 받기도 했지만 단발 일부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개화파 인물들로부터 비난을 산 일도 있어서 친일파로 인식되기 보다는 완고파로 인정되어 보수적 유림으로부터도 신망을 지니기도 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신기선의 은근한 설득을 받은 기우만은 마침내 의병 해산을 결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1896년 음력 3월 초, 양력 4월 20일 경이었다.
지금 세력을 잡은 무리들의 마음이 음험하고 불측하니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이러한 염려가 있다면, 적을 토벌한다는 것이 도리어 우리 임금의 화를 재촉하는 일이 될 것이다. 차라리 자수하여 각자 뜻을 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서 기삼연 일부 참모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기우만은 마침내 통곡하며 의병을 해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독립신문 1896년 5월 2일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지난 달 스무 나흔 날(4월 24일) 전라도에 간 대대장 이겸제씨가 군부에 한 보고에 장성 기산림(奇山林)의 손자 기우만은 이왕 경향간 명망이 있는 이라, 본도 의병들을 영솔하였더니 향자(向者; 접때) 대군주 폐하의 칙교로 선유하옵심을 보고 하는 말이 위에서 불안해 하옵심이 심히 황송하다 하고 의병들을 보고 급히 돌아가 그 직업을 편안하라 한다더라.”
이로써 호남 일대에서 의병 활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고 이후 의병세력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매천야록에는 기우만이 정석진의 처형을 보고 의병을 해산하고 몸을 피했으나 붙잡히지 않았는데, 이는 신기선의 비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기우만과 기맥을 통했던 민종렬 또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겨우 목숨을 구했다.
■ 참고문헌
- 송사집(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병편(丙編),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호남의병장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수록)
- 홍영기, 대한제국기 호남의병 연구, 일조각, 2004.
3. 망국의 한을 ‘호남의병열전’에 담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기우만은 의병을 해산한 뒤 두 차례나 국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먼저 1906년 3월에 올린 상소에서는 단발령을 철회한 이후 애초에 단발을 주장했던 자들의 죄를 묻지 않은 것과 구제도를 복구하였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개화정책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점을 비판하였다.
이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을 처단하거나 체포하는 것과 자신에게 뜻밖의 누명을 씌워 체포령을 내린 것에 대해서 부당함과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기우만은 상소를 서울로 올라가 직접 전달하려 하였으나, 곳곳에 포교가 깔려 있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5월에 올린 두 번째 상소에서는 창의 전후로 세 번이나 올린 소장에 대한 비답(批答)이 없는 것은 언로가 막힌 탓임을 비판하면서, 창의의 정당성을 재차 밝혔다. 그러나 이 상소의 말미에 기우만은 간신이 전횡하여 충성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으므로 임금이 환궁하기를 기다리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기우만은 그 해 9월 장성군 진원면 삼성산(三聖山) 골짜기에 삼산재(三山齋)를 짓고 들어가 시를 지으며 울분을 달랬다. 이때 ‘삼산구곡(三山九曲)’과 ‘가훼악부(嘉卉樂府)’란 시를 지었다. 이듬해 고종이 환궁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 뒤 1900년 조정에서는 신기선의 천거로 기우만에게 중추원 의관을 제수하고 주임관(奏任官)에 임명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기우만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비각 증수 때 상량문을 써주고, 하동군 악양정(岳陽亭)에서 김굉필(金宏弼)과 정여창(鄭汝昌)을 배향할 때 축문을 써주는 등 글 짓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나이 59세 되던 해인 1904년 11월 기우만은 광주 주흥동(朱興洞)으로 이사했다. 이듬해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향약을 설치하고 기우만을 도약정(道約正)에 앉히려 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한편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켜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11월 을사오적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불법적으로 체결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기우만은 곧 바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유림들의 상소가 빗발치듯 조정에 날라 들었으나 모두가 한낱 휴지나 다름없이 되어버렸다.
그 때 마침 최익현과 정재규 두 사람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노성(魯城, 현 충남 논산지방)에서 강회(講會)를 가질 터이니 협조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기우만은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대신 제자 정시해(鄭時海)를 보냈다. 최익현은 이 강회에서는 선비들이 경기도 진위(振威) 향교에 모여 서울로 올라가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의 호소는 일제의 감시망 때문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또 1906년 정월에 정재규가 기우만을 찾아와 서로 의논 끝에 여러 동지들과 함께 곡성 도동사(道東祠)에 모이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에 저해하는 자가 있어서 계획을 취소하였다.
을사늑약이 알려지자 원주 제천 방면에서는 유인석의 문인 원용팔(元容八)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킨 다음 호응을 요청하는 글을 보내왔다. 최익현은 전북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더불어 창의 계획을 세우고 1906년 4월 실행에 옮겼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러나 최익현은 거의 직후 곧 바로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다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한 때 최익현과 거사를 논의하기도 했던 기우만은 그 해 여름 단신으로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기 위해 집을 나섰다. 육로는 감시가 심해 바닷길로 가기 위해서 무안까지 내려갔으나, 거기서도 감시가 심해 포기하고 말았다. 기우만은 당시 호남의 명유이었던 만큼 일제의 감시가 심했다.
을사늑약 이후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키자는 논의가 무성했으나 그다지 성과가 없던 참에 1906년 가을 광양의 산중에서 은거하던 전 주사 백낙구(白樂九)가 먼저 일어섰다. 백낙구는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천으로 진격하려 했으나 이 기미를 알아 챈 지방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해서 1913년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작성한 기밀문서인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06년 11월 4일(양력) 본도의 유생으로서 본디 최익현을 따르는 광양군의 백낙구, 장성군의 기우만, 창평군의 고광순·이항선(李恒善) 등이 관제개혁으로 실직한 전(前) 군리(郡吏) 등과 통모하여 구례군 중대사(中大寺)에 모여 총원 50여 명이 총기 10여 정을 가지고 다음날 5일에 거사하였다. 이들은 구례를 출발하여 광양군을 통과하여 7일 순천에 이르렀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다시 구례로 돌아갔다가 그들 중 백낙구 외 수명이 그곳 군수에게 체포되었다.”
실제로 기우만이 구례에서 백낙구 등과 거사를 모의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당시 일제는 기우만을 구례 의병 사건의 공모자로 지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백낙구를 체포한 왜경은 관련자 수사에 나서 그 해 음력 10월 16일 기우만을 광주군 갈전리(葛田里)에서 체포했다. 이튿날 기우만은 광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왜경은 기우만이 배후에서 백낙구의 창의를 사주한 것으로 간주하고 사실을 실토하라고 압박하였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백낙구의 창의로 말하면, 그는 먼저 내 마음을 알았다 하겠는데 의(義)는 대단하나 군사가 적어서 실패했으니 사랑스러워도 도울 길이 없다. 그러나 사람은 비록 망해도 의는 망하지 않을 것이니 그 기절(氣節)은 참으로 추앙할 만하다. 무릇 의가 같으면 마음이 같고, 마음이 같으면 가르치지 않아도 가르친 것과 다름없고, 시키지 않아도 역시 시킨 것과 같다.”
당시 기우만은 흰 갓(白笠)을 쓰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명성황후 인산(因山) 이후 10년 동안을 쓰고 다닌 갓이었다. 그는 흰 갓을 쓰고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 왜경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춘추전(春秋傳)에 적을 토벌하지 못하면 장사(葬事) 일자를 쓰지 않고, 장사 일자를 쓰지 않으면 상복을 벗지 않는다고 되어 있는데, 지금 나라의 원수도 갚지 못한 채 어찌 감히 대중들처럼 검은 갓(黑笠)을 쓸 수 있겠는가?”
20일에도 왜경은 또 다시 심문을 개시하였으나, 끝내 혐의를 밝히지 못하자 결국 기우만을 석방하였다. 왜경은 백낙구와 기우만간의 공모를 확신하고 있었으나 기우만의 자백을 통해 그 증거를 찾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해가 바뀌고 기우만의 나이 62세가 되던 1907년이었다. 두문불출하고 지내던 중 고광순, 김상기(金相琦), 이항선이 기우만을 찾아왔다. 이들은 지난해 기우만과 더불어 거의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는데, 순천에서 패한 것을 보고 복수와 함께 부끄러움을 씻을 계책을 서로 물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다. 전북 태인에서 일어났던 최익현과 충남 홍주에서 일어났던 민종식(閔宗植) 등이 지난 해 이미 체포된 지 얼마 안 된 터여서 의병세력은 잠시 정세를 관망하며 그 활동이 주춤하던 때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해 3월 서울에서는 이른바 을사오적을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낙안의 나인영(羅寅永)을 비롯하여 창평의 이광수(李光秀), 구례의 이기(李沂), 광주의 최동식(崔東植), 장성의 기산도(奇山度) 등은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였으나 을사오적의 암살은 미수에 그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암살단의 일원인 강상원(康相元)이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여 가벼운 부상을 입힌 채 체포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기우만은 다시 영광경찰서에 붙잡혀 들어갔다. 체포된 강상원의 입에서 기우만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으로, 왜경은 이 사건이 기우만이 시켜서 한 짓인지를 캐물었다. 이에 대해서 기우만은 을사오적은 죽어서 마땅한 인물들이라고 지적하면서도 배후 혐의에 대해서는 시인하지 않았다.
왜경은 기우만을 일단 광주경찰서로 압송하여 재차 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성과를 얻지 못한 왜경은 기우만을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서 목포로 끌고 내려갔다. 3월 28일 광주를 출발하여 4월 1일 목포경무서에 도착했다. 목포에서 하룻밤 지낸 후 기우만은 배로 압송되어 인천을 거쳐 4월 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도 강상원과의 관계에 대한 심문이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기우만은 혐의를 부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어떠한 모의를 막론하고 그 사람을 확실히 안 다음에야 더불어 꾀할 수 있는 법인데, 나를 끌어댄 자가 나를 모른다는 것은 그 진술을 보면 이미 명백하다. 그렇지만 오적은 만세의 죄인이니 과연 역적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죄로 삼을진대 나는 마땅히 그 괴수가 될 것이다.”
왜경은 마침내 강상원을 불러내 기우만과 대질심문을 하였다. 그러나 기우만을 마주 본 강상원이 “그 분인 것 같다”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얼버무림으로써 왜경은 끝내 기우만의 혐의를 입증하지 못 했다. 마침내 기우만은 서울에서 수감된 지 꼭 보름만인 4월 20일 풀려났다.
집으로 돌아온 기우만은 두문불출하며 지내다가 죽기 전 의병장 기삼연을 비롯하여 김준·전수용(전수용) 등 13명의 의병 활동과 공적을 담은『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을 찬술하였다.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호남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의병들의 항일투쟁에 관해서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바를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1916년 7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후손들은 그를 순창 무이산(武夷山) 기슭에 묻고, 고산서원에 배향하였다.
■ 참고문헌
- 송사집(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수록)
- 호남의병장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