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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는 국가적으로 행하는 제사를,
3산[山](현재 위치 불명), 5악[岳]과 같은 명산들,
그리고 큰 하천들을 기준으로
대, 중, 소사로 구분하였다.
三山, 五岳, 已下名山, 大川,
分爲大中小祀.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중사[中祀] 등급으로 행해지는 제사의 대상인 5악은,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현 팔공산)에 해당된다.
中祀, 五岳.
東吐含山, 大城郡. 南地理山, 菁州. 西雞龍山, 熊川州. 北太伯山, 奈已郡. 中父岳, 一云公山, 押督郡.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충청도는 본래 백제의 땅이다.
(중략)
도내에 존재하는 명산 중 하나로 공주에 있는 계룡산을 꼽을 수 있다.
忠淸道, 本百濟之地. (中略) 名山曰鷄龍山, 在公州.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또 삼가 생각해보건대,
이름난 산과 큰 하천에 제사를 지내 축원하는 것은 과거의 현명한 임금들도 두루 행했던 바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5악[岳]인 백두산, 금강산, 지리산, 태백산, 계룡산은 모두 나라를 안정시켜주는 명산들이니, 지성으로 기원한다면 국운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且伏念, 名山大川之禱祀祈祝, 古之哲王明辟亦皆行之.
我東之白頭, 金剛, 智異, 太白, 鷄龍五岳, 皆鎭國名山, 至誠禱祈, 則足以壽國脤祈天命也.
<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6월 17일 기축 2번째기사>
1393년 1월 2일, 파견되었던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가 돌아온 후
"전라도 진동현(현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길지[吉地]를 찾았습니다."
라 이르며,
태실 후보지의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와
양광도(현 충청도 대부분이 포함된 행정구역)에 위치한 계룡산의 도읍지도[都邑地圖]를 바쳤다.
胎室證考使權仲和還, 上言,
"全羅道珍同縣, 相得吉地."
乃獻山水形勢圖, 兼獻楊廣道雞龍山都邑地圖.
참고) 왕가의 후손이 출생한 후,
깨끗이 씻은 태반[胎盤]을 이중으로 봉안한 두 개의 항아리를 묻어 보관한 장소를 태실[胎室],
풍수지리적으로 태실로 삼기에 적합한 지역을 물색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임시 벼슬직을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라 하였다.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2일 무신 1번째기사>
삼사좌복야[三司左僕射, 권중화의 평소 직책] 권중화를 보내어
태실을 진동현에 마련하고,
그 현[縣]을 주[州]로 승격시켜 진주[珍州]로 개칭하도록 한 후,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이달 18일에 계룡산으로 직접 가보려 하니,
대성[臺省, 어사대의 대관과 중서문하성의 성랑의 합칭]에서 각기 한 사람씩과 의흥친군[義興親軍]으로 하여금 수행토록 하라."
遣三司左僕射權仲和,
安胎室于完山府珍同縣,
陞其縣爲珍州,
敎.
“將以今月十八日, 幸雞龍山,
其令臺省各一員, 義興親軍侍從.”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7일 계축 4번째기사>
임금이 송경[松京, 송악산 근방의 서울, 즉 개경]을 떠나, 계룡산의 형세를 친히 살펴보고 새로운 도읍지로 정하고자 하였다.
上發松京, 欲親見雞龍山形勢, 將定都.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1월 19일 을축 1번째기사>
동틀 무렵 임금이 계룡산을 향해 계속 나아가고자 수레를 준비하라 명하였는데,
마침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요가
도평의사사의 계본[啓本, 임금에게 보고하는 문서]을 가지고 경성[京城, 현 서울]에 도착한 후,
현비[顯妃, 신덕왕후,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태종의 계모]의 몸상태가 편치 못하고,
평주[平州, 현 황해도 평산]와 봉주[鳳州, 현 황해도 봉산] 등지에 초적[草賊, 마을 혹은 인근의 들에서 활동하는 도적떼]이 출몰하고 있다는 소식을 아뢰자,
임금이 불쾌해하며
"초적에 대한 내용은 변장[邊將, 변방을 지키는 첨사, 만호, 권관 등의 장수들] 혹은 누군가의 보고가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단지 소문에 불과한 것인가?"
라 되물었는데, 정요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임금이 다시
"도읍을 옮기는 일은 송경의 명문세족이라면 누구나 꺼려하는 바이므로, 온갖 핑계를 대서 이를 중단시키려는 의도를 다 알고 있다.
백관들은 송경에 오랫동안 살아서 이주하는 것을 꺼려할 테니, 도읍을 옮기는 일이 과연 여러분이 진심으로 동의한 바이겠는가?"
라 이르니, 문무백관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남은이
"신 등이 분수에 넘치게 공신이 되어 높은 지위와 은혜를 입게 되었사오니,
도읍지를 옮긴다 하더라도 무엇이 부족하겠으며,
송경에 있는 토지와 집 또한 어찌 아까워하겠습니까?
이미 행차가 계룡산 가까이까지 왔으니,
성상께서는 부디 발걸음을 돌리지 마시고 장래의 도읍지가 될 땅을 살펴주시옵소서.
신 등은 여기 남아서 초적을 토벌하겠나이다."
라 이르자,
임금이 다시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는 시점의 천명을 받은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겨왔는데,
지금 내가 계룡산을 하루속히 확인해보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왕위에 있을 때에 친히 새 도읍지를 정해버리고자 하기 때문이오.
만약 그렇게 신속히 처리하지 못한 채 나의 뒤를 이을 적자가 비록 내 뜻을 계승하여 도읍을 옮기고자 하여도,
대신들이 지금처럼 꺼려 한다면 적자가 어찌 이 대업을 완료할 수 있겠는가?"
라 이르고, 어가를 돌릴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남은 등이 이민도에게 점을 쳐 보도록 하였는데,
"현비의 병환도 반드시 나을 것이요, 초적 또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라는 점괘가 나오자,
서로 모여서 의논한 후 임금께 계속 계룡산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반드시 정요를 처벌한 뒤에 가자."
라 하니,
남은이 "꼭 그럴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라 아뢰었다.
임금이 마침내 길을 떠나 청포원 근교에서 머물렀다.
昧爽, 上命駕, 知中樞院事鄭曜齎都評議使司啓本, 來自京城,
以顯妃未寧, 平州, 鳳州等處, 又有草賊聞.
上不悅曰, "草賊有邊將報歟? 何者來告歟?" 曜無以對.
上曰, "遷都, 世家大族所共惡, 欲藉以止之也. 宰相久居松京, 安土重遷, 遷都豈其意耶?" 左右皆無以對.
南誾曰, "臣等濫與功臣, 蒙恩上位, 雖遷新邑, 有何不足, 松京田宅, 豈足惜耶? 今此行已近雞龍, 願上往觀營都之地, 臣等留擊草賊."
上曰, "遷都, 卿等亦不欲也. 自古易姓受命之主, 必遷都邑. 今我急觀雞龍者, 欲於吾身親定新都. 孺子雖欲繼志遷都, 大臣沮以不可, 則孺子何能哉?" 乃命還駕.
誾等令李敏道卜之, 曰, "病必瘳, 草賊亦不足慮." 相會議請往,
上曰, "然則必罪曜, 而後行." 誾曰, "何必罪之!" 上遂行, 至靑布院之郊留宿.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일 병자 1번째기사>
계룡산에 도착하였다.
至雞龍山下.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8일 계미 1번째기사>
임금이 계룡산을 떠나면서 김주와 동지중추[同知中樞] 박영충, 전 밀직[密直] 최칠석을 남겨 두고 새 도읍의 건설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上發雞龍山, 留金湊及同知中樞朴永忠, 前密直崔七夕, 監營新都.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2월 13일 무자 1번째기사>
대장군[大將軍] 심효생을 계룡산에 보내 새 도읍지 건설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중단하게 하였다.
경기 좌, 우도 도관찰사[都觀察使] 하윤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의견을 올렸다.
"도읍은 지리적으로 나라의 중앙에 위치하는 것이 당연한 바이나,
계룡산 지대는 상대적으로 남쪽에 치우쳐 있어서
국토의 동, 서, 북면과의 거리가 상대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신의 아버지 장례를 치르며 여러 풍수지리서들을 가볍게나마 접해보았는데,
계룡산의 지형은
건방[乾方, 북서쪽]에서 시작되는 산과,
손방[巽方, 남동쪽]에서 발원해 흘러나가는 하천
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이는 전형적으로 송[宋]나라 호순신이 일컬었던
‘물이 장생[長生]을 방해하여 쇠패[衰敗]가 닥치게 되는 땅’
에 해당되므로, 도읍지로서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이 해당 내용을 글로 작성해 올릴 것과,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권중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재 등으로 하여금 하윤과 함께 신중히 살펴 의논할 것,
또 고려왕조의 기록에 서술된 여러 산과 언덕들의 풍수적 길흉을 재조사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다.
이에 봉상시[奉常寺]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본 결과,
하윤의 계룡산에 대한 길흉 판단이 정확했으므로,
이에 효생에게 명하여 새 도읍의 역사[役事]를 중단토록 하니, 모두가 기뻐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술된 호순신의 글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임금이 명하여 고려 왕조의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된 비록문서[秘錄文書]들을 모두 하윤에게 열람할 수 있도록 허락한 후, 신중하게 살펴 도읍지가 될 만한 땅을 다시 알아보도록 하였다.
遣大將軍沈孝生如雞龍山, 罷新都之役. 京畿左右道都觀察使河崙上言,
"都邑宜在國中, 雞龍山地偏於南, 與東西北面相阻. 且臣嘗葬臣父, 粗聞風水諸書, 今聞雞龍之地, 山自乾來, 水流巽去, 是宋朝胡舜臣所謂, 水破長生衰敗立至之地, 不宜建都."
上命進書, 令判門下府事權仲和, 判三司事鄭道傳, 判中樞院事南在等, 與崙參考, 且覆驗前朝諸山陵吉凶以聞.
於是, 以奉常寺諸山陵形止, 案山水來去考之, 吉凶皆契, 乃命孝生罷新都之役, 中外大悅.
胡氏之書, 自此始行.
上命以前朝書雲觀所藏秘錄文書, 盡授崙考閱, 更覽遷都之地以聞.
참고) 봉상시[奉常寺]는 고려시대부터 존재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논해 정하는 일을 관장하였던,
서운관[書雲觀]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천문, 역수, 측후, 각루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
<태조실록 4권, 태조 2년 12월 11일 임오 1번째기사>
황해도관찰사 한준,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이
“전 수찬[修撰]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
라는 내용의 변서[變書, 역모와 같은 변란이 일어났음을 정부에 알리는 글]를 올렸다.
(중략)
이보다 앞선 1백여 년 전부터, 민간에서는
“목자[木子, 李의 파자]가 망하고 전읍[奠邑, 鄭의 파자]이 일어난다.”
는 예언이 떠돌고 있었는데,
여립이 요승[妖僧] 의연과 모의해 이를 옥판에 새긴 후 지리산에 있는 석굴 안에 보관하였다.
얼마 후, 의연이 문하의 도잠, 설청 등에게 함께 산을 유람하자고 둘러대고는 지리산에 이른 후
“저쪽 방향에 상서로운 기운이 보인다.”
라 하며 그 석굴로 함께 가서 옥판을 처음 본 것처럼 행동한 후 여립에게 갖다주니,
여립이 자신의 최측근에게만 몰래 보여주고는 절대 이 내용을 누설하지 않을 것을 신신당부하였다.
(중략)
"뽕나무에 말갈기 나자 집 주인은 왕이 되리."
와 같은 동요가 민간에 돌고 있으니,
여립이 의연과 몰래 정원의 뽕나무 껍질을 크게 벗겨내고 말갈기를 채워넣었다.
시일이 오래 지나 껍질이 아물고 그 형상이 자연스러워지자, 일부러 가까운 이에게 보여주고는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당부하고 바로 뽕나무를 없애버렸다.
조선 왕조가 열린 이래로
"연산현 계룡산 개태사 터는 얼마 후 정[鄭]씨가 도읍지로 삼을 장소이다."
와 같은 예언이 민간에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여립이 일찍이 의연의 무리와 함께 국내의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폐사[廢寺]의 벽에
“나그네로 남쪽 지방을 노닌 지 오래인데,
계룡산이 유독 눈에 환하게 들어오는구나.
무자, 기축년에 형통한 운수가 열리려니,
태평성세 이루는 데 그 무엇이 어려우랴.”
와 같은 시를 쓰게 되므로,
그 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黃海道觀察使韓準, 載寧郡守朴忠侃, 安岳郡守李軸, 信川郡守韓應寅等, 上變書言, "前修撰鄭汝立謀叛."
(中略)
先是百餘年, 民間有木子亡奠邑興之讖. 汝立與妖僧義衍謀, 刻之玉版, 藏於智異山石窟中.
衍與其徒道潜雪淸等, 諉以游山, 至智異山言, "某方有寶氣." 使同行, 尋得玉版, 歸之汝立, 密示同黨, 戒其勿洩.
(中略)
時有童謠云, "桑生馬鬣, 家主爲王," 汝立與義衍, 潛於家園桑木, 鉅剮其皮, 塡以馬鬣. 日久皮合, 故令隣近親密見之, 而戒以勿言, 卽削去.
自國初以來, 有讖說, "連山縣鷄龍山開泰寺基, 乃他代鄭氏所都." 汝立嘗與衍僧輩, 遍覽國內山川, 題詩廢寺壁, 有云: "客遊南國久, 鷄岳眼偏明. 戊己開亨運, 何難致太平?" 其詩多傳播.
참고) 전술된
“목자[木子]가 망하고 전읍[奠邑]이 일어난다.”
"연산현 계룡산 개태사 터는 얼마 후 정[鄭]씨가 도읍지로 삼을 장소이다."
라는 두 예언은,
작자 미상의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의 핵심 요지에 해당된다.
<선조수정실록 23권, 선조 22년 10월 1일 을해 5번째기사>
공주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곳에 계룡산이 있다. 전라도 마이산의 산줄기가 끝나는, 금강의 남쪽 부근에 위치한다.
(중략)
조선 초에 계룡산의 남쪽 골짜기를 도읍으로 삼으려 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州東南四十里爲鷄龍山, 卽全羅馬耳之盡脈也, 在錦江南.
(中略)
國初欲都而未果.
<택리지, 팔도론, 충청도>
산세가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향하다가 추풍령에서 크게 단절된 후, 령의 바로 남쪽에 위치한 황악산을 기점으로 다시 기세가 회복되어 전라도로 진입해 덕유산을 형성한다.
이렇게 덕유산으로 이어진 산세는 다시 장수, 남원 사이에서 크게 단절된 후, 서행하며 서서히 회복되어 임실의 마이산을 형성한다.
여기에서 다시 하나의 기세가 다시 북쪽으로 역행하여, 주류산, 운제산, 대둔산을 형성한 후 충청도로 진입해 금강을 등지고 돌아 계룡산으로 갈무리된다.
(중략)
이러한 기세 중 덕유산과 마이산의 사이에서, 동서에 위치한 고을들의 시내, 골짜기 물들이 합류되며 금강의 발원지가 되니, 이 근방의 금강 최상류 영역을 적등강[赤登江]이라 명한다.
俗離山南走, 大斷於秋風嶺, 起爲黃澗黃岳山, 入全羅爲茂朱德裕山.
又自德裕大斷於長水南原間, 西去而爲任實馬耳山.
自北石山一脈, 逆而北走, 爲珠旒山, 雲梯山, 大芚山, 入忠淸道, 背錦水而回爲鷄龍山.
(中略)
德裕馬耳之間, 東西諸邑川壑水, 合爲錦江之源, 名赤登江.
<택리지, 팔도론, 충청도>
빼어난 암석이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어야
비로소 산의 전체적인 형세도 수려하게 되고,
그를 발원지로 삼는 물 역시 맑을 수 있다.
또한 강과 바다가 서로 만나는 지역에 가깝게 형성된 산세일수록 잠재되어 있는 역량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조건들을 두루 갖춘 입지는 우리나라에 다음의 네 곳이 존재한다.
개성의 오관산
한양의 삼각산[三角山, 현 북한산]
진잠[鎭岑, 현 대전광역시, 충청남도 계룡시 일대]의 계룡산
문화[文化, 현 황해남도 삼천군 일대]의 구월산
(중략)
계룡산은
웅장함에 있어서는 오관산에,
수려함에 있어서는 삼각산에 미치지 못하며,
전면인 남쪽 영역을 흐르는 물도 적은 편이고,
단지 금강이라는 큰 한 줄기의 물이 용의 형상과 같이 주위를 돌면서 에워싸고 있을 뿐인데,
이와 같은 회룡고조[回龍顧祖],
즉 용이 돌다가 다시 출발 지점을 돌아보게 되는 형세는 기본적으로 잠재된 역량이 크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이는 유사한 형세를 띠고 있는 금릉의 역사, 즉
대부분 일부 지역에 국한된 세력만을 형성하는 데 일조한 근거지였을 뿐이며,
비록 명태조 주원장이 이곳을 기반으로 중원을 통일한 역사가 있긴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도의 지위를 다른 곳에 넘겨주게 된 사실들로부터도 유추할 수 있다.
게다가 계룡산의 남쪽에 위치한 골짜기의 기세 또한 한양, 개성에 비해 매우 떨어지며,
지세의 가운데에 위치한 평야의 면적도 협소하고,
해가 뜨는 동남향 또한 주위의 산세와 금강에 의해 둘러싸여 답답한 형국을 띠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세의 기운이 먼 곳에서부터 도래하는데,
골짜기는 좁으나 깊어서 이처럼 멀리서부터 도달한 기세가 고스란히 축적되는 형세이고,
북서쪽에 위치한 깊고 큰 용연[龍淵]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큰 시내가 지형을 관통하고 있으니,
이는 개성과 한양에는 없는 점이다.
또한 산의 남, 북쪽의 풍광은 매우 훌륭하며,
동쪽에 위치한 봉림사, 북쪽에 위치한 갑사와 동학사가 이러한 기묘한 멋을 가중시켜준다.
凡山形必秀石作峯, 山方秀而水亦淸. 又必結作於江海交會之處, 斯爲大力量.
如此者國中有四, 一卽開城五冠, 一卽漢陽三角, 一卽鎭岑鷄龍, 一卽文化九月也.
(中略)
鷄龍卽雄不及五冠, 秀不及三角.
前面又少朝水, 只錦江一帶周回龍身而已. 凡回龍顧祖之地, 本少力量.
故雖以金陵見之, 每爲偏覇之邦, 明太祖雖一統, 易世之後, 未免遷都.
故鷄龍南洞, 比漢陽開城氣勢逈遜. 又局中平地少, 而東南又不敞豁.
然其來旣遠, 而洞府深蓄, 局內西北有龍淵, 極深且大, 溢爲局中大溪, 此卽開城漢陽所無也.
山南北亦多好泉石, 東有鳳林, 北有岬寺及東鶴寺之奇勝.
참고) 본문의 금릉[金陵]은 현 남경[南京, 난징]으로,
역대 주요 왕조 세력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이 이곳을 지나다가, 제왕의 기운이 느껴진다 하여 소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기운을 억누르고, 이름마저 말릉[末陵]으로 개칭해버렸다.
2. 212년, 손권이 오나라를 세우며 이곳을 도읍으로 정하고 건업[建業]으로 개칭하였다.
3. 이후 위진남북조 시대, 남조의 한족 여섯 왕조의 수도를 거치게 된다.
4. 명나라의 태조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후 북벌을 단행해 중원을 통일하기 전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며, 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강남(장강 이남) 근거지 기반 통일이다. 이때 현재의 명칭인 남경으로 개칭되고, 명 건국 10년째인 1378년에 정식 수도가 되나, 3대 성조 영락제 때인 1403년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며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
<택리지, 복거론, 도읍과 은둔>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인접한 명산이자,
신라시대, 그리고 조선시대 고종 때의 오악[五岳]
신라시대에 이미 국가적 제사의 대상이었던
5대 명산 중 하나인
서악[西岳]
의 지위를 얻었으며,
그로부터 천여년 후인
조선시대 고종 때에도
국운을 좌우할 수 있는 5대 명산중 하나
로 간주되었었고,
조선 개국 초 태종 때에는
수도 이전 유력 후보지 중 하나로 언급될 만큼
높이는 1,000m에도 못미치지만
국가적, 공적 관점에서도
특유의 입지적 특성에 의한
풍수적 길지[吉地]로서의 명성이 높은 편이었는데,
<정감록>에 언급된 계룡산 개태사 터
이러한 풍수지리적 인식은
전술된 조선왕조실록의 내용과 같이
정여립의 난과 관련된
<정감록[鄭鑑錄]>
과 같은 민간 예언서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계룡산에 인접하고 있는 산맥과 강, 그리고 계룡산 기준 차령산맥, 금강발원지의 방위
또한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북쪽의 차령산맥
남쪽의 노령산맥
동쪽의 소백산맥
으로 둘러싸인 상대적 저지대에
산세가 형성되어 있으며,
해당 저지대에서는
금강이 산을 동 - 북 - 서에서 둘러싸듯
흘러가고 있다.
이 중 북쪽의 차령산맥은
계룡산 기준 북서쪽[乾方]에서부터 시작되어
북동쪽을 향해 뻗어나가며,
금강은
계룡산 기준 남동쪽[巽方]지점, 즉
마이산 근방의
소백산맥- 노령산맥 교차 지역
에 발원지를 두고 북쪽으로 흐르다가
∩ 형태로 꺾여 황해로 흘러나가는
형세를 띠고 있는데,
속리산에서부터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산세의 형태
위와 같은 형세에 대해,
전술된 것처럼 <택리지>에서는
소백산맥의 속리산에서부터 남하하다
황악산 북쪽의 추풍령에서 일시 단절된 산세가
황악산에서 회복된 후,
소백산맥 남쪽의 덕유산을 거치며
서쪽으로 방향을 틀다가
장수군의 금강 유역에서 한 번 더 일시 단절된 후
노령산맥의 마이산으로 계속 진출하여,
여기에서부터 금강을 동쪽에 끼고 북행,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에 걸쳐있는 대둔산을 지나
계룡산에서 갈무리된다는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택리지, 복거론, 도읍과 은둔>의 이해를 돕기 위한
남경과 북경의 대략적 위치,
그리고 남경의 회룡고조[回龍顧祖]적 형세는
다음과 같다.
북경과 남경의 위치, 그리고 남경의 회룡고조적 형세
04. 관모봉[冠帽峯]
백지도, 광역자치단체지도, 지형도 상 관모봉 조망도
관모봉의 행렬값 - (2.5, 8)
관모봉이 걸쳐있는 2개의 군
높이: 2,541m (한반도 제2의 고봉)
유관 광역자치단체: 함경북도
유관 기초자치단체: 경성군, 무산군
18x10 행렬값: (2.5, 8)
개마고원, 함경산맥 상의 관모봉 위치
한반도 제2의 고봉으로,
개마고원과 함경산맥의 동북단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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