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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세에 나타날 현상 6~9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의 범죄10~12 핍박을 견뎌라. 13~14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
15~17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말씀을 지켜 행하라. |
제3장 말세에 나타날 악에 대한 예언과 성도의 고난
Ⅰ . 고통 하는 때 (1)
A . 말세에 성도들이 기억해야 할 것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본 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것을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시대명사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올 것이라>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세>란 종말론 적 시제인데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직전까지를 말 세라고 하였으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까지를 말세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 절에서 언급한 <말세>란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그리스도의 강림 때 까지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래에 닥아 올 날 보다는 현재를 강조한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는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이 이런 사실을 모르고 고통 한 때를 맞이하게 될 때 낙심하거나 매우 당황하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사는 성도들이 세상 풍조와 유행을 다스리지 못하고 휩쓸리게 되면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24:3~13] 에는 말세의 나타날 현상 현상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예수께서 감람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4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B . 고통의 의미
<고통>이라는 원어는[헬.χαλεποί 칼레포이] 라고 하는 단어로 “사납다,” “다루기 어렵다.” “위험하다.” 라고 하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통 하는 때란 영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기 어려운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지금까지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있음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Ⅱ . 말세에 나타날 죄악상의 구도 2~5
마지막 때에 나타날 죄악상이 18가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분류로 나눈다면 개인의 이기적인 죄와 , 공동체를 손상 시키는 죄 , 또한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죄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A . 마지막 때에 일어날 죄악상들 (2~4)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첫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자기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추위에 얼어 죽든 굶어 죽든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이 선이기는 하지만 이웃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한 사람이 될 수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겔16:49~50]에 보면은 <49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50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당했던 소돔성의 죄악은 첫째 교만 둘째 식물이 풍족했으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음 셋번째로는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돈을 사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곧 탐심인 것입니다.
[딤전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그것 말세의 특징 것입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게 되고 돈 앞에 신앙도 , 인간의 도덕성도 돈보다 앞설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부지런함과 수고도 아끼지 않으나 , 신앙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단 몇 시간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자긍하는 죄>입니다.
자긍이란 자신을 자랑하는 교만을 말합니다.
반대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선행이나 업적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겸손치 못한 교만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합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남을 무시합니다.
네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교만>입니다.
겸손한 자의 특징은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자기를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부풀려 어시 되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런 자들은 진실한 자들이 대하기 아주 어려운 자들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훼방하는 죄>입니다.
훼방이란 언어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과 이웃의 권위를 무시하는 언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사람들은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좋게 여깁니다.
선한 사람은 가능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남의 약점에 대해 침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남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며 심지어는 남에게 없는 약점까지도 만들어 내어 비방하기도 합니다. 장차 다가올 어려운 시대에는 사람들은 훼방하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부모를 거역하는 죄>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인간의 기본적 의무인 것이다.
구약성경 [출20:12]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하였으며 [잠23:25]에서도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마지막 시대에 불경건하고 교만한 자들은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합니다. 자기를 낳은 부모를 돌보지 아니합니다. 이는 배은망덕하고 패륜에 이르는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감사하지 않는 죄>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불경건한 인생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습니다. 그 외에도 우리를 이 땅위에 있게 해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고 또 우리에게 혜택을 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는 사람들이 불평만 하지 감사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살전5:18]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덟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거룩치 않는 죄>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오는데 그 때는 사람들이 죄에서 떠나지 않고 불경건한 세속적인 삶에 어울려 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지식적으로 , 그리고 도덕적으로 ,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홉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무정함을 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정하다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함이 없습니다.
열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않는다. 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려 하지 않고 서로 화해하려 하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에는 악한 보복심이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5:23~24]에 <23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열한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참소하는 죄>입니다.
참소란 거짓되고 추악한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을 말합니다.
참소는 거짓으로 남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나 자기에게 손해를 줄 만한 경쟁자라고 생각되는 자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판단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기적 동기에서 나오는 비난인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약4:11]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열 두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절제하지 않는 현상>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절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제는 여러 방면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술의 절제 , 또한 말에 대한 절제 , 감정에 대한 절제 , 오락에 대한 절제 등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제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 것들을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열 세 번 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 사나워 진다.>는 것입니다.
사납다고 하는 것은 포학한 동물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것은 온유하고 양순한 성품과 정반대되는 성품인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 심판 직전에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창 6:11~13] 보면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열네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선한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11:17]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좋은 일을 함께 하자고 하여도 사람들은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열다섯번 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배반하여 판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의리를 깨뜨리고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의롭고 선한 일인 줄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배반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인신매매를 거리낌 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것이 말세에 나타날 현상인 것입니다.
열 여섯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조급해 진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일에 깊이 생각하고 실행해 옮기지만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는 사람들이 앞뒤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이 귀하다는 것을 말하니다.
열일곱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자고>해 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긍함과 교만과 비슷한 말입니다. 높은 마음은 곧 교만인 것인 것입니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남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또 그런 자는 무례한 말을 하고 서슴없이 하며 행동으로 옮깁니다.
열 여덟 번째 말세에 나타날 현상은 사람들이 <쾌락을 좋아 한다.>고 하였습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오면 사람들이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하였다.
쾌락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도 있습니다
전도자는 [전 5:18]에서<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운동이나 , 등산이나 , 여행이나 , 외식이나 쇼핑이나 , 텔레비젼 시청을 위해서는 돈도 쓰고 시간도 쓸 것이지만 ,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 성경 읽고 , 기도하거나 ,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들 , 곧 전도와 봉사 등을 하는 데는 시간도 돈도 쓰려고 하지 않는 다는 이것이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Ⅲ. 말세에 사는 성도들에게 대한 권면 5
A . 돌아서라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위에서 우리는 말세에 나타날 죄악상 18가지를 보았습니다.
이와 같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찾아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교회 다니는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또한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있으나 실상 무신론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무서운 죄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말세의 나타날 죄악상 18가지를 열거하면서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돌아서라>는 말은 “그것들을 피하라” 뜻입니다. 그들과의 교제를 끊으라. 는 뜻입니다. 이른 것들을 행하는 자들과 교제를 끊고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15:33] 에서<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Ⅳ. 이단들의 범죄 6~9
A . 어리석은 여인을 유인하는 자(6)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7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저희>라고 대명사는 당시에 교회 안에 침투한 이단들로 영지주의 자들을 신봉하고 따르는 거짓교사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을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부는 엄격한 금욕주의를 취하였으며 또 다른 일부는 사회의 도덕을 무시하고 성적인 방종에 빠져 있었습니다. 본문은 두 번째 분류에 속한 자들로 이들의 추잡한 형태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 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유인한다는 말은 나쁜 것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여자>란 헬라어 단어로 [헬. ͺγυναικάρια 귀나이카리아] 라고 하는 단어인데 “작은 여자들” , “보잘 것 없는 여자들”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어리석은 여자들은 도덕적 정조관념이 없고 매사에 자기 결단 약한 자를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어리석은 여자>들이란 영지주의 자들에 이용당하고 있는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이 어리석은 여자들을 자기 결단이 약하므로 이단들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기 때문에 이단들이 쉽게 접근을 했던 것입니다.
B . 이단에 빠진 어리석은 여자들 (6하~7)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7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어리석은 여자들의 특징 입니다.
그들은 <죄를 중히 진 자>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를 중히 진 다.> 란 표현에서 “중”이란 글자는 한문으로 거듭 중자 입니다.
여러 번 같은 죄를 짓는 것을 뜻합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죄를 지으면 마음이 무거워 집니다. 반복되어 지으면 마음이 더 무거워 집니다. 항상 어디에서나 죄에 짓눌린 마음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행복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해 지려면 죄를 버려야 합니다.
[시32:3~5]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 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 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 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를 버리는 방법은 죄를 토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합니다. 죄를 회개 하면 죄에서 자유 함을 얻게 되어 마음이 가볍습니다.
죄에서 자유 함을 얻으면 그때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숨기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항상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또한 왜 어리석은 여자들이 죄를 짓게 되는 가에 대해 언급 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욕심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은 어리석은 여인이 미혹에 빠지기 전 상태를 말합니다.
마음에 욕심이 있기 때문에 욕심을 채우기 위해 미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약1:15]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어리석은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범죄 하였습니다.
그들의 욕심은 다른 진리를 배우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요1:17]에서 사도 요한은 증거 합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어리석은 여자들은 진리이신 예수 외에 다른 진리를 알기 위해 항상 배우지 만은 결코 진리에 이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새로운 지식의 탐구욕이 그들을 영지주의 이단 사상에 포로가 되게 하였고 더 나아가 성적인 탈선까지 하게 되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마침내>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헬,μηδέποτε 메데포테] 라고 하는 단어인데 그 뜻은 “결코”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죄를 버리고 죄 씻음을 받으라는 교훈이므로 회개가 없이는 절대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참된 성도들이 진리에 이르는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아무도 영생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 사함과 영생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깨닫고 깨달은 지식을 자기 것으로 소유함으로 참 믿음에 이르는 되는 것입니다.
Ⅴ . 믿음에 관하여 버리운자 (8~9)
A . 모세를 대적하였던 대표적 인물 (8)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사도 바울은 당시의 영지주의 자들을 구약시대에 모세를 대적하던 <얀네와 얌브레>를 빗대어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구약성경에 직접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문헌이나 이방인의 문헌 , 그리고 초대 기독교의 문헌에는 자주 그 이름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들은 [출7:11]에서 애굽 바로 왕 앞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10가지 이적을 행할 때 이에 대항하여 마술을 행한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던 거짓교사들을 구약시대 때 모세를 대적하던 <얀네와 얌브레> 와 비슷하다고 지적하면서 저들의 악행을 두 가지로 열거 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의 악행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지금 바울과 디모데가 전한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이 그것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진리인데 반하여 그 진리를 믿고 순종하지 못하도록 사람들로 복음을 불신하고 , 거절하게 하고 , 대항하게 만드는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번 째 그들은 악 <부패한 마음>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헬.νου̑ς 누스]라고 하는 단어로 “생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이 아주 중요합니다. 사람의 잘못된 생각은 마음의 부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패>에 해단 되는 헬라어 단어는 [헬 . κατεφθαρμένοι 카테프다르메노이]라고 하는 단어로 “멸망하는” , "완전히 파괴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양심이 망가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상태는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 진리에 대해 이해력이 완전히 사라져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생각이 새로워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죄악의 무서운 정체를 알고 , 죄를 미워하고 떠나는 생각에 대한 변화가 없이는 진정한 회개도 참된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바른 생각 , 바른 사상, 바른 정신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은 거짓교사들에 대해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바로 서지 못하고 거짓된 사상을 가르침으로 믿음에 관하여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야 마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자들로 판명되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라고 [살후3:2]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전할 때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여러분들은 만세전에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예수를 믿을 것이나 택하시지 아니한 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요 예수 믿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인 것입니다.
B . 악한 자의 결과 (9)
<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
<얀네와 얌브레>같은 거짓교사들은 진리를 대적하고 , 생각이 부패하고 , 믿음이 없는 자들로 행동하고 있는데 결국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은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53: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누구나 어리석은 자입니다. 또한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죄를 짓는 자 역시 어리석은 자입니다.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자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자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저들의 어리석음은 마침내 다 드러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Ⅵ . 환란 가운데 건지신 하나님. 10~12
당시에 거짓교사의 특징은 남의 집에 가만히 숨어 들어가 어리석은 여인들을 꾀어 죄를 짓게 만들었고 꾐에 빠진 이 어리석은 여인들은 하나님 말씀 외에 더 무엇인가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얻으려고 두루 찾다가 거짓교사를 만나게 되어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되었고 그들은 결국 자기들의 기대에 이르지도 못하고 죄악에 길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 날수 없게 된 입니다.
A . 바울이 보여준 9가지 모본(10~11)
<10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11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 셨느니라>
모본이라고 하는 말은 바른 신앙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본보기를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신앙의 본 보기를 보여 준 내용은 “교훈 또는 행실”을 말합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나의 교훈>을 통해 본을 보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교훈>이란 말은 바울이 설교를 통해 가르친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도 바울 <행실>을 통해 본을 보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 가르진 말씀을 자신이 솔선수범하면서 성도들에게 바른 신앙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약1:22]에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말라>고 하였고
[약2:26]에서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약2:22]에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말씀에 대한 지식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아는 지식만큼 말씀을 좇아 생활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 사도 바울 <의향>이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의향>이라고 하는 뜻은 행위의 의도를 말하는 것으로 믿음으로 설정한 목표를 좇아 실천 하는 동기를 말하는 것으로 바울이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믿음의 실천행위에 대한 의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로는 사도 바울은 <믿음>의 본을 보였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변함없는 신앙과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바라는 것은 불변의 신앙입니다.
[히11:6]에서 히브리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역의 근본은 믿음에서 출발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복음사역에 따르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 사도 바울은 <오래 참음>의 본을 보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이 약속에 대한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고 끝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행1:10~11]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광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가로되 갈릴리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 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성도들은 어떠한 환경에 처할지라도 이 약속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할지라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것은 주님의 재림은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마10:22]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하였습니다.
한 가지 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그분 은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 때문인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믿고 끝 까지 인내하는 성도입니다.
여섯 번째 사도 바울은 <사랑>의 본을 보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믿음의 요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13 34]에<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근본은 사랑입니다.
[고전16:14]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하였습니다.
[갈5:6]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실체 모든 것이 위선입니다.
일곱 번째 사도 바울은 <인내>의 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내>는 사랑에 따르는 필수적인 덕목인 것입니다.
믿음에 오래 참음이 뒤따르듯이 사랑에도 인내가 뒤따르는 것입니다.
[고전16:14]에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13:1]에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도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의 본입니다.
여덟 번째 사도 바울 <핍박>을 통해 본을 보였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따라 복음사역자로서 핍박을 받아도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5:10]에서 예수님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핍박을 받아도 견딜 수 있는 것은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
[골3:1~2]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 사도 바울은 <고난>의 본을 보였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골1:24]에서 <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핍박과 고난에 견디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들에게 참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B .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 (11)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 셨느니라>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들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아홉 가지 예를 든 것들입니다.
[행13:50]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안디옥이라고 하는 곳은 두 곳이 있는데 수리아안디옥과 비시디아 안디옥이 있는데 수리아안디옥은 바울의 이방선교의 출발지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안디옥은 비시디아 안디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소아시아 지방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시기하여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의 유력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한 사건입니다.
[행14:5]에 보게 되면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고니온 이란 곳에서도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을 학대하고 돌로 치려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행14:19]에서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라고 하는 것을 보아 이런 사건들을 디모데도 알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다>라고 하는 헬라어 단어는 [헬.παρηκολούθησας 파레콜루데사스]라고 하는 단어 인데 “가까이 따라왔다, 완전히 알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게 되면 디모데는 바울의 초기의 전도여행 때부터 그를 따라다녔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디모데는 바울이 말한 간증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과 함께 활동하면서 무엇을 가르쳤는지 또한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가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어떻게 오래 참고 인내했는지 또한 그가 어떤 핍박과 고난들을 받았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 못 할 극한 고난들을 겪었지만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롬9:21]에서 사도 바울은 토기장이의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토기장이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며 그릇은 인간을 비유한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문에 인간의 생사 결정권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 치며 잘살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잠3:16]에서 잠언서 기자는 <그(하나님)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잠8:18]에서도 잠언서 기자는 <부귀가 내(하나님)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C .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 (12)
<12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이말 은 바울 자신이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진실한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때문에 고난을 겪게 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마16:24]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고난의 상징이요 . 사랑의 상징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수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3:14]에서 <13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14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의 끝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각자의 공력에 따라 주실 것을 확신 합니다.
Ⅶ . 성도들의 삶의 태도 13~14
A . 악한 사람 (13)
<13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요일 3:8]에서 사도 요한은<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라고 하였고 [요일 5:19]에서는 <19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그 소속을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엡2:2]에서도 사도 바울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공중권세 잡는 사단을 가리킵니다.
악한 사람은 사탄에 속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을까요?
[엡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 현재사로 우리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우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빛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빛은 누구일 까요?
[요일1:5]에<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자들 빛의 자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라고 말씀 하고 있습니다.[요12:46]
[요3:19] 에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러 빛으로 오셨지만 어둠속한 어둠의 자식들은 빛을 싫어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어둠의 세력이 빛을 미워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악한 행실이 드러남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교회와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요?
교회는 빛에 속한 자들의 공동체이며 , 세상은 어둠에 속한 공동체입니다.
본문에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어두움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로 그들은 회개 할 줄 모르고 점점 더 악해지고 다른 사람을 속기도 하며 또한 속기도 한다. 는 것입니다.
단순히 이들은 자신들의 사악함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악함을 온 사회와 공동체 안에 바이러스가 균을 퍼뜨리듯 사회에 불신을 조장시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을 이유 없이 핍박하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벧전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고 하고 있습니다.
B.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14)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 서 배운 것을 알며>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한다>라고 언급한 후에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라고 하고 있습니까?
바로 뒤에 따라오는 <네가 뉘게 서 배운 것을 알며>라는 한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딤후1:5]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의 말씀을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로 부터 배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깊은 복음의 진리의 말씀은 사도 바울을 만나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뉘게 서 배운 것>이란 사도 바울 자신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훌륭한 제자는 좋은 스승 밑에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어떤 성도가 제일 행복한 성도일까요?
좋은 목사를 만난 성도가 제일 행복한 성도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깊이를 아는 목사 , 기독교 교리체계를 제대로 갖춘 목사 , 믿음의 생활의 본이 되는 목사 이런 목회자 밑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는 참 행복한 성도인 것입니다.
이러한 목사는 양들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참 목자라고 볼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잘 배우고 바른 교리에 선 성도는 세속적인 풍조와 악한 사상에 절대로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바로배우지 못한 성도는 말씀에 확신이 없어 악한 사상에 물들기 쉬고 , 세상 풍조에 섞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하나님 말씀에 바로 서야 합니다.
Ⅷ . 인간에 성경을 주신 목적 15~17
A . 유대인의 자녀교육 (15)
<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유대인의 교육 중심 사상은 바로 [잠1:7]과 [잠9:10]의 기록 되어 있습니다.
[잠1:7]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 이어 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하였고 [잠9:10]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으로 알기 때문에 철저히 어려서부터 하나님 성경을 배우고 가르쳤습니다.
B .성경의 본질 (15~17)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이 그 말씀을 읽고 구원을 얻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지혜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전1:21]에<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엡1:17]에서 말씀하는 <계시의 정신>을 말합니다.
<계시의 정신>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계시의 정신>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대해 바로 알 수가 없습니다. <계시의 정신>의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도록 성령님이 믿는 성도들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성경을 통해 인생이 구원 얻도록 위해서 인 것입니다. 이 구원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인 것인데 [요20:30~31]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30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하고 분명히 성경의 기록 목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식에 의해 자기 생각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벧후1:20]에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21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말씀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몇 권의 책으로 되어 있습니까?
66권의 책으로 되어 있으며 , 장수로는 1,189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기까지는 1, 600년이란 기간이 걸려 완성 되었으며 , B.C 1500년 모세에 의해 쓰여 지기 시작하여 A.D 100년경 사도요한에 의해 요한계시록이 쓰여 진 것이 끝이 였 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성경의 주제는 [요5:39]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 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두 번째로 성경은 읽는 이에게 유익을 줍니다.
성도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주게 됩니다.
성경 하나님 말씀이 읽는 자에게 주는 유익은 본 절에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훈>이란 교리적인 방면과 윤리적인 방면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교리와 윤리 , 믿음과 행위는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교리만 좋아하거나 윤리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이는 지성적이고 어떤 이는 감성적이며 또 어떤 이는 의지적이지만 신앙생활에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균형이 잘 맞아야 합니다.
<책망>이라고 하는 단어는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된 사상을 지적합니다. 성경은 또한 우리의 잘못 된 행위를 지적합니다.
사람은 사상적으로나 행위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잘못과 결함이 많다는 것 부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3:10] 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람의 사상과 인격을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때때로 아니 빈번히 죄악 된 사상과 행실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 부분은 완전한 성화가 아닌 성화가 되어 가는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의 고질적 결함들을 고치기 위해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배우고 듣고 생활에 적용해야 합니다.
성경의 책망을 듣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부족을 지적받지 못하기 때문에 성화의 기회를 놓치게 되므로 나쁜 습성에 대해 고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르게 함>이란 잘못된 것에 대한 교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잘못된 곳에서 바른 곳으로 이끕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바른 사상 , 바른 지식 , 바른 인격 , 바른 행동, 바른 생활을 하도록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의로 교육함>이란 구원받은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위한 , 성경기록의 궁극적 목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성도들이 의로운 인격자가 되기를 요구 하시는 것입니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가 실제적으로 인격과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교육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야 합니다.
세 번째 성경은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온전히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온전케>라는 말의 원어는 [헬 . ἅρτιος 알티오스]라고 하는데 “온전하고 구비된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성도들을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구비된 일군을 키우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은 현세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성도들이 완전 성화된 상태이므로 흠과 결함이 없고 죄와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성도들에게 의의 훈련이 필요하고 성경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13절로 17절까지의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진리들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하기 위해서 두 가지 도움이 되는 내용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누구에게서 그 바른 진리들을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며 두 번째 성경의 효능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성경의 몇 가지 효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경은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둘째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를 의로운 인격이 되게 훈련시킨다. 셋째로는 성경은 성도들을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시킨다. 이 세 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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