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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속리산
2023년 04월 16일(일요일)
산행코스 : 화북주차장(09:20) - 문장대(10:50) - 신선대(11:30) - 천왕봉(12:40) - 상고암(13:10) - 세심정(13:55) - 법주사(14:25) - 주차장(15:00)
산행거리 : 16.6km
화북주차장
화북탐방지원센터
문장대 3.3km
성불사 갈림길
오송폭포 0.1km, 문장대 3.1km
오송폭포
속리 05-01 이정목 해발449m
문장대 1.8km, 화북주차장 1.5km
문장대 1.6km, 화북주차장 1.7km
속리 05-03 이정목 해발708m
쉴바위
문장대 1.7km, 화북주차장 2.1km
문장대 0.6km, 화북주차장 2.7km
속리 05-05이정목 해발888m
문장대사거리로 가는 데크계단
문장대 사거리에 도착합니다.
문장대 사거리
화북주차장 3.1km, 천왕봉 3.2km, 법주사 5.8km, 문장대 0.2km
문장대로 가는 돌계단
문장대
문장대는 바위가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라 불렸었으나,
세조가 이곳에 올라 신하들과 강론을 하고, 시를 읊었다고 하여 문장대(文藏臺)라고 바뀌었다고 합니다.
문장대 정상으로 올라갑니다.
문장대에서 바라본 관음봉 방향 파노라마
좌측 법주사, 812봉, 묘봉, 상학봉
좌측 812봉, 묘봉, 상학봉, 두류봉, 관음봉과 우측 운흥리
상주시 화북면 운흥리, 낙영산, 도명산
문장대에서 바라본 칠형제봉 방향 파노라마
밤재로 내려가는 백두대간길과 그 뒤로 백두대간 능선 청화산, 조항산, 대야산
칠형제봉
문수봉, 신선대, 입석대, 비로봉, 천왕봉
좌측 천왕봉, 구병산
문장대에서 바라본 법주사 방향 파노라마
법주사 방향
수정봉, 812봉, 묘봉, 상학봉
천왕봉으로 가는 길
천왕봉 3.2km
칠형제봉
신선대, 비로봉, 천왕봉이 보입니다.
신선대휴게소
신선대 정상석
신선대휴게소에서 바라본 신선대
문장대, 칠형제봉
경업대 갈림길
경업대 0.4km, , 법주사 5.1km, 문장대 1.1km, 천왕봉 2.1km
천왕봉 1.5km, 문장대 1.9km
속리 04-09이정목 해발1000m
입석대
속리산 동릉과 동릉 뒤로 도장산
고릴라바위(상고외석문)
속리 04-08 이정목 해발1047m
비로봉
천왕봉 1.2km, 문장대 2.2km
도룡뇽바위
가야할 천왕봉
상고석문
속리 04-07이정목 해발973m
천왕봉 갈림길
천왕봉 0.6km, 법주사 5.1km, 문장대 2.8km
장각동 갈림길
천왕봉 0.3km, 문장대 3.1km, 장각동 4.0km
속리 04-06 이정목 해발1017m
천왕봉 아래 장각동 갈림길 헬기장
가야할 속리산 천왕봉
천왕봉 정상
천왕봉에서 바라본 관음봉 방향 파노라마
법주사, 수정봉, 812봉
812봉, 묘봉, 두류봉, 관음봉
당겨본 관음봉
관음봉, 문장대, 칠형제봉
당겨본 문장대
천왕봉에서 바라본 청화산 방향 파노라마
비로봉, 저멀리 청화산
청화산 시루봉, 연엽산과 그 뒤로 희양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도장산
천왕봉에서 바라본 구병산 방향 파노라마
두리봉, 형제봉 방향
우측 구병산
구병산, 삼가저수지
민주지산, 덕유산, 지리산 방향
다시돌아온 법주사 갈림길
문장대 2.8km, 법주사 5.1km, 천왕봉 0.6km
상고암 갈림길
상고암 0.2km, 천왕봉 1.2km, 법주사 4.5km
상고암 마애불상군(法住寺 上庫庵 磨崖佛像群)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
자연 암벽에 6구의 마애불이 상, 하 2단으로 배치되어 조각되어 있습니다. 하단에는 칼과 보탑, 용, 방망이, 비파를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4구가 왼쪽으로부터 나란히 서있고, 그 오른쪽에는 양손을 가슴에서 합장하고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좌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 상의 머리는 승려의 상과 같은 민머리이며, 그 위로 화염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의 화관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단에는 이들 마애불상군 가운데 조각이 가장 뚜렷한 좌상이 있는데, 머리에는 관을 쓰고 목에는 영락이 장식되었으며, 양 손에는 긴 줄기가 달린 연꽃봉우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음보살상으로 추정됩니다.
거북바위
상고암(上庫庵)
사내기록에 의하면 상고암은 신라 성덕여왕 19년(720년)에 의신(義信)조사께서 창건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 고종 13년 병자년(1876년)에 인명(仁明)대사가 중창하였고 1897년 보봉(普峰)대사가 중수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속리산 법주사를 창건할 당시 그 자재를 구하기 위해 속리산 산속에 3곳의 창고를 짓고 각각 상고, 중고, 하고라고 불렀는데 법주사 창건이후 이들 창고가 모두 암자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중 중고암과 하고암은 조선말에 모두 폐사되었고 오직 상고암 만이 옛 역사를 이어간다고 합니다.
속리산 여러 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930m에 위치한 상고암
상고암 극락전
상고암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신선대 방향 파노라마
중앙 문장대
당겨본 문장대
중앙 신선대, 경업대
관음암
당겨본 신선대
입석대
당겨본 입석대
비로봉
상고암 0.4km, 세심정 1.6km
세심정 1.2km, 상고암 0.8km
경업대 갈림길
경업대 1.2km, 법주사 3.6km, 상고암 1.1km, 관음암 2.9km
비로산장
법주사 3.2km
경업대/천왕봉 갈림길
경업대 1.9km, 상고암 1.6km, 관음암 1.8km, 비로산장 0.4km, 천왕봉 3.2km, 상환암 0.6km
세심정
문장대 3.3km, 중사자암 2.9km, 복천암 0.5km, 천왕봉 3.4km, 신선대 2.7km, 상고암 2.0km, 관음암 2.0km, 상환암 0.8km
세심정앞 세조길
법주사 주차장 가는길
속리 13-06 이정목 해발437m
속리 13-04 이정목 해발404m
법주사 1.3km, 세심정 1.4km
수정봉
속리 13-02 이정목 해발360m
법주사 팔상전(국보 제55호)
팔상전(5층 목탑)은 국보 제 55호인 법주사 팔상전(捌相殿)입니다. 높이가 21.6m나 되는 팔상전은 법주사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는 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나 정유재란 당시 불에 탔으며, 인조 2년인 1602년 사명대사(泗溟大師)와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복원된 것 입니다.
팔상전 안에 모셔진 팔상도와 불상
금동미륵대불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은 용화정토(龍華淨土)에 이르러 깨달음의 법을 전하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의 현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화강석으로 만든 높이 약 8m의 기단 위에 세운 높이 25m의 이 청동대불은 국내 불상 가운데 최대규모이며 제작에 소요된 청동이 160톤에 이른니다.
최초는 통일신라시대 때 진표율사에 의해 금동미륵대불로 조성되었으나 흥선대원군때 경복궁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서 없어졌다가 일제치하인 1939년 조각가 김진복에게 의뢰하여 시멘트 부처님을 조성 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동란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로 다시 조성하였고,1986년 류월타 주지스님 당시 붕괴직전의 시멘트미륵부처님이 해체되고,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님을 다시 조성해 모셨습니다. 기존 조성 시멘트 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입니다. 2002년 6월 7일에 금동미륵불상으로 다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데, 높이가 약 3m에 이르는 8각의 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뒷발로 하대석(下臺石)을 디디고 서서, 앞발과 입으로 상대석(上臺石)을 받치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의 사자가 디디고 선 하대석은 8각의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상대석 둘레에는 연꽃잎이 이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이 쌍사자석등은 신라 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신라 시대의 석조예술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보 제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은 법주사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은 단면이 8각형인 받침돌과 화사석(火舍石), 지붕돌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국보인 쌍사자석등에 비해 단순하나,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높이 3.9m의 석등으로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은 법주사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커다란 두 그루의 느티나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대웅보전은 면적이 402.8㎡에, 높이가 19m나 되는 큰 규모로서 부여 무량사의 극락전,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불전의 하나로 손꼽힙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편액은 조선 숙종의 글씨라고 합니다.
대웅보전 주련
佛身普邊十方中(불신보변 시방중) 부처님은 이 우주에 두루 다 계시니
三世如來一切同(삼세여래 일체동) 삼세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廣大願雲恒不盡(광대원운 항부진) 광대 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고
汪洋覺海妙難窮(왕양각해 묘난궁) 넓고 넒은 깨달음의 세계 너무 오묘해서 다 말할 길 없네
威光邊照十方中(위광변조 시방중) 부처님의 위광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月印千江一體同(월인천강 일체동) 천 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 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四智圓明諸聖士(사지원명 제성사) 사지에 모두 통달한 많은 성인들
(사지 : 성소작지, 묘관찰지, 평등성지, 대원경지)
賁臨法會利群生(분임법회 이군생) 법회에 임해서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네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報恩 法住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0호)
법주사 대웅보전에 모신 삼신불로, 비로자나불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아미타불상, 오른쪽에 석가여래상을 배치한 삼불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흙으로 빚어낸 불상이라고 합니다.
인조 4년(1626년)에 현진, 청헌, 연묵, 양묵 등이 만들었으며, 영조 23년인(1747)년에 새로 금칠을 했습니다.
17세기 전반에 제작된 불상은 목조 불상과 소조 불상이 주류를 이룹니다. 대부분 네모반듯한 모양의 장중한 형태이며 신체의 굴곡이 거의 없습니다. 법주사 소조 비로자나 삼불 좌상은 이러한 시대적 특징을 잘보여 주고 있고 제작 연대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 불교 조각의 기준이 되는 불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높이 5.5m로 국내 소조불 좌상에선 가장 크다고 합니다. 보물 제136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와 무릎을 하여 괴체적인 느낌을 줍니다. 왼손은 오른속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으며, 양어깨를 모두 덮은 옷은 대의 자락이 팔목에서 대칭되게 흘러내려 장식적입니다.
보은 법주사 석조희견보살입상(報恩 法住寺 石造喜見菩薩立像)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은 법화경을 공양하기 위해 몸을 불태워 소신공양을 올렸다는 보살입니다.
보상상은 전체높이 213m 규모로 크게 신체, 공양물, 대좌의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연 암반으로 이루어진 지대석 위에 가로 네모 반듯한 모양의 받침돌을 그 위로 중심부에 해당하는 몸통을 세워 고정시겼습니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하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쳐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습니다.
향로를 받쳐 든 두 팔의 모습이나 가슴부위의 사실적 표현과 함께 배면 옷의 표현기법은 절묘하여 같은 경내 쌍사자석등을 제학한 동일한 시기인 720년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원통보전(報恩 法住寺 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정방형에 가깝지만, 정면이 조금 더 크다고 합니다. 고대 불전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 91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보은 법주사 목조관음보살 좌상(報恩 法住寺 木造觀音菩薩坐像) (보물 제1361호)
복장 안에서 나온 불상조성기에는 효종 6면(165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불상의 넓적하고 편평한 얼굴, 작은 눈과 짧고 납작한 콧날, 두꺼운 옷 주름 등은 이 시기 조각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꼽힙니다. 머리에 호화롭게 꾸민 화관(花冠)을 쓰고 있는 등 전체적으로 장식성이 돋보이고, 제작 시기가 확실하여 조선 후기의 불상 연구에 기준이 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상은 목조로 높이는 280cm이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화관을 썼습니다. 그 중앙에는 아미타불의 화불을 나타냈으며, 입가에 머금은 미소는 중생의 아픔을 달래 주는 듯합니다. 무릎 아래 좌우에는 남순동자(南巡童子)와 해상용왕(海上龍王)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사찰의 삼문(三門) 체계가 자리 잡으면서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등이 나타났습니다.
금강문은 야차신을 거느리고 불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를 모신 문이며, 천왕문은 사천왕(四天王)상을 두고 외부의 사악한 모든 것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천왕문 (보물 2024년 04월 지정)
천왕문(天王門)은 봉황문이라고도 하며 본래 맑고 깨끗해야 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모신문입니다.
동쪽의 持國天王(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 남쪽의 증장천왕(增長天王),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깨서 삼보(三寶)를 지키시는 문입니다.
'보은 법주사 소조사천왕상' 역시 전란 이후 조성됐으며, 17세기 중엽에 완성했으리라 추정됩니다.
국내 사천왕상 중에서는 매우 드문 입상 형태이며, 크기가 5.7m에 이릅니다.
특히 법주사 사천왕상 발밑에는 생령으로 청나라 관리와 조선 관리를 둬 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고 교훈을 주고자 한 최초의 조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법주사 소조사천왕상(보물 2023년 09월 지정)
북쪽 다문천왕은 비사문천이라고도 하며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설법을 듣고, 왼손에는 비파를 들고 있으며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동쪽 지국천왕은 안민의 신으로서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한 천왕입니다.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바닥에는 보석을 올려놓고 있으면 건달바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서쪽 광목천왕은 잡어, 악안으로 불리는데, 이는 웅변으로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거나 눈을 크게 부릅뜬 위엄으로 나쁜 것을 물리치기 때문입니다. 왼손에는 보탑고 오른손에는 삼지창을 들고 있고 용과 비사사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남쪽 증장천왕은 자신의 위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운 천왕입니다. 오른손은 용을 잡고 왼손은 용의 여의주를 들고 있습니다. 구반다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보은 법주사 당간지주
법주사 당간지주(幢竿支柱)은 22m 높이의 이 당간지주(철당간)는 고려 초인 목종 9년(1006년)에 16m의 높이로 조성된 것인데, 1866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한다는 명분으로 모든 사찰의 금속물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가, 1910년에 다시 조성된 것입니다.
보은 법주사 석련지(국보 제64호)
석련지(石蓮池)는 통일신라 시대인 8세기 경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체적으로 비례가 우수하며 대단히 세련되었습니다.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석련지 비각 안에 높이 1.95m, 둘레 6.65m의 석련지(石蓮池)가 들어 있습니다. 석련지는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예전에는 물을 담고 연꽃을 띄워 두었다고 합니다.
보은 법주사 철솥(보물 제1413호)
철솥은 법부사 공양간 근처에 있던 것으로 규모는 높이 1.2m, 지름 2.7m, 둘레 10.8m이 두께 10cm에 무게는 20톤에 달합니다.
뒤돌아본 법주사
금강문
금강문(金剛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겹치마 맞배지붕 건물로, 건물 좌우로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가운데 부분은 통로이고, 내부에는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 등 2기의 금강역사상 및 보현보살 상과 문수보살 상을 안치하고 있습니다.
금강문(金剛門) 편액을 올려다 보았더니 낙관엔 만당(晩堂). 이규환(李圭桓 1858~?)선생으로 자는 공집(公執), 호는 만당(晩堂)입니다.
일주문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충청도를 통틀어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뜻입니다.
‘호서(湖西)’는 ‘금강(錦江)’의 서쪽에 위치한 ‘충청남북도’를 일컬을 것이고,
‘가람(伽藍)’은 승려가 사는 사찰이니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이란 충청남북도를 통틀어 가장 큰 사찰이라는 말일니다.
낙관엔 '계묘 춘 벽하(癸卯 春 碧下)'. 지금부터 120년 전인 1903년(계묘년)에 벽하 조주승(碧下 趙周昇)이 쓴 글씨입니다.
일주문 안쪽에 걸린 또다른 편액은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大'자를 두 개 붙여 놓은 듯합니다.
맨 좌측 '광무6년 임인 4월(光武六年壬寅四月)'과 '중술(重述, 다시 씀)'이라 쓰여져 있어 광무6년(1902년)에 다시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 쓴 조주승의 글씨보다 1년이 빠릅니다.
매표소
속리산 자연보호탑
속리산 상가지역
오리숲길
주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