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왕씨 종친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계절은 입추가 지나 내일이 말복입니다.
선조들께서 이용하셨던 절기는 기후의 온난화로 점차 생명력을 잃어 갑니다.
2021년 12월 구축된 개성왕씨홈페이지(www.개성왕씨.com)에
그동안 글 올리다보니 까페 방문을 1년 훌쩍 넘겼습니다.
홈페이지는 인증이 필요하는 등 고령자에게 접근성이 어렵고
주 구독층이 종친들인지라 타 종중에 홍보 차원은 미약하다 생각되어
차후로는 선별하여 까페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지난 5월1일 홈페이지 자유게시방에 올린 내용을 복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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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명단 중 개성왕씨 인물 모두를 찾아 주세요.
1.비단장수 왕서방 2.왕산악 3.왕창근 4.왕식렴 5.왕희걸 6.왕희지
계절의 여왕 5월을 맞이한다.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월력을 보니 5월 초입 오늘은 근로자의 날이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초파일이 연이어 있고 휴무일은 아니지만 민주화를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민주화운동기념일이 18일이니 5월은 어느 날 보다 의미 깊은 달이라 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린, 부모님을 포함한 선조들의 공덕을 그리고 생명을 풀잎처럼 던진 열사들의 조국 사랑을 망각해서는 아니된다.
영전에 하얀 카네이션을 바친다.
철쭉이 한물가고 그 빈자리에 장미가 피어 오른다.
장미의 꽃말은 사랑이라 한다.
사랑의 최고 단계인 아가페를 그려 본다.
50여 년 전이니 중학교 2년차 이었던가.
당시 후손은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진주의 모 중학교로 열차 통학을 하고 있었다.
승객 한 명이 교복의 명찰을 보고 비단장수 왕서방 얘기를 들려 주었는데
그 당시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왕서방이 애첩 명월이에게 빠져 전 재산을 탕진하였다”는 줄거리이었는데
후일 알고 보니 고인이 되신 가수 김정구의 ‘왕서방 연가’라는 노래말이었다.
문제를 풀어보고 개성왕씨의 정체를 각인하여 보자.
비단장수 왕서방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씨 집단인 왕(王)씨의 상인 캐릭터이다.
중국 100대 성씨에는 임금 왕(王)씨 외에도 넓을 왕(汪)씨도 보인다.
개성왕씨와 무관하지만 과거 모 식품사에서 출시한 왕서방면이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비호감을 준다하여
중앙종친회에서 이름을 바꿀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성사 시킨 바 있다.
왕산악은
고구려인으로 중국의 칠현금을 본 따 거문고를 만든 악사이자 재상이다.
곡을 연주하니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하여 현학금이라 하였고
이후에는 줄여서 현금이라고도 불렀다한다.
가야금을 만든 대가야의 악사 우륵 그리고 조선조 귀화인 박연(네델란드인)과 함께
한국의 3대 악성으로 추앙받고 있다.
왕창근은
고려사 설화에 의하면 당나라인으로
궁예가 개국한 태봉국의 철원성 시장 거울 장사인이다.
그가 거사(환속한 승려)로부터 구입한 1척(1자/30센치미터)정도 크기의 오래된 거울 속에는 새 왕조(고려)의 창건을 예언하는 글귀가 있었다한다.
왕식렴은
고려태조의 4촌 아우인 고려 왕족이다.
태조는 원년에 그를 광평시랑(광평성 차상위 관직)에 임용한 후
고려의 북진정책을 중요시하여 서경(평양)의 총책임자로 중용하였다.
회자되는 인터넷 자료에는
태조에게 친형제자매는 물론 이복형제자매 조차 없는 외아들로
그리고 왕식렴의 부친이 왕평달이라 기술하였다.
그러나 고려성원록(고려황실족보) 4P 후면(사진)에는
왕평달이 태조의 친아우이며
왕식렴은 후백제에 볼모로 가 희생된 왕신과 함께
부친의 "이름이 문서에 전하지 않는다"(사일기명/史逸其名)며 다르게 기록하였다.
성원록에는 태조의 숙부가 세 분이며 사촌 아우는 네 분이다.
왕희걸(17세)은
족보에 의하면 세마공(15세) 할아버지(왕종의)의 직손으로
정실 남양홍씨 등 세 분의 부인 사이에 3남3녀를 두셨다.
1505년(연산군11년) 출생하시어 1534년(중종29년) 30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39세이던 1543년(중종38년) 계묘시에 개성왕씨인으로서 최초로 문과 급제하셨다.
한때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셨고 3살 연상의 퇴계 이황(1502-1571) 선생과도
교분이 있었다.
마지막 관직은 평안북도 의주목사로서
1553년(명종8년) 3월 3일, 49세로 관사(官舍)에서 별세하셨다.
그러나 선조실록에 의하면 1588년(선조21년),
왕희(전주왕씨)의 개성왕씨 본관 사칭이 탄로나 숭의전감 관직이 삭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희걸 할아버지께서 고려봉사손 차기 후보군 명단에 올랐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할아버지의 족보와 실록 행적(프로필)이 일치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35년전에 이미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종중의 역사를 품은 창간무오보(1798년) 발간 200여년전이고
족보보다는 국사를 기록한 실록에 신뢰도 한 표를 던진다.
추후 확인이 필요하다.
압록강에 접한 지금의 의주는 중국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다리를 건너면 단둥이다.
묘소의 위치는 화성시 남양 등곡리 쌍분으로
묘소에 갈석(비석 모양이 아닌 무덤 앞의 작은 입석)이 있다.
왕희지는
중국 동진의 정치가이자 시인 그리고 서예가이다.
본관은 중국 산둥성의 린이시이다.
천재형이 아닌 노력파로 알려줘 있다.
자료를 보니
영감이라 호칭하는 당상관은 어전회의 시 의자에 앉아 국정을 논하는 고위 관직으로
품계 종2품 상계 가의대부와 하계 가선대부 그리고 정3품 상계인 통정대부가 해당된다.
반면 정2품 이상은 대감, 실무자 격인 정3품 하계는 나리라고 각각 불렀다한다.
성씨가 널리 보급된 시기를 문헌에는 고려시대라고 본다.
태조는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사성(賜姓)정책을 펼쳤다.
개국공신인 홍술을 홍유로, 백옥을 배현경으로, 삼능산을 신숭겸으로,
복사귀를 복지겸으로 삼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들은 악계홍씨, 경주배씨, 평산신씨, 면천복씨의 시조가 되었고
숭의전대제 시 그들의 후손들은 참사하여 태조께 고마움을 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무송유씨, 문화류씨, 안동권씨, 안동김씨, 전의이씨, 파평윤씨 등 부지기수이다.
왕씨는 본관이 개성을 포함하여 강릉, 해주, 거제, 전주, 제남(중국) 등
여러 본이 전한다고 하는데 9할을 개성이 차지한다고 한다.
미확인 자료에 의하면 전주왕씨는
개성왕씨 평양공 후손으로 초기 입보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경공 후손으로 되어있다.
(개성왕씨홈페이지 자유게시방 게시글 34, 35 숭의전 봉사손 참고)
개성왕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왕건)이다.
그러므로 고려 개국 이전의 왕씨 인물은 본관이 개성이 아니다.
정답은 4, 5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