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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행궁의 정문 한남루 | 남한산성행궁 | 남한산성행궁의 일월오봉도 |
1) 곤지암
곤지암은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에 있는 바위이다. 옛날에는 고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묘(猫)바위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의 시신을 모시고 와서 이 근처에 무덤을 썼다. 그 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누구든지 말을 타고 이 바위 앞을 지나가면 말발굽이 땅에 붙었다. 어느 선비가 바위를 향해 “장군의 원통함이 아무리 커도 행인이 불편하게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외쳤다. 뇌성벽력이 치더니 바위 윗부분이 땅에 떨어졌다. 그 뒤에는 말을 타고 지나가고 아무 일 없었다.
2) 하늘이 정한 배필
광주 동 초월읍에 지월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설월리라고도 한다. 그 마을에는 물이 깊고 차고 맑은 가마소 또는 가마수라고 하는 소(沼)가 있다. 가마소에는 하늘이 정해 준 배필을 버리고, 부모가 정해준 곳으로 시집을 가다가 애통하게도 죽어야 했던 한 처녀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져 있다.
지월리에 초로에 접어든 부부가 살고 있었다. 재산이 많고 금실도 좋아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부인은 뒤뜰에 칠성단을 모시고 자식을 점지해달라고 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다. 머리와 수염이 하얀 노인이 나타났다.
“너희들 부부의 소원이 간절하고, 또한 정성이 지극하므로 내가 아이를 얻을 방도를 가르쳐 주겠노라. 이 마을 흐르는 냇물 중에서 가장 깊은 곳에 다리를 놓고 매일 새벽에 그 다리 위에서 치성을 올리도록 해라. 그러면 자식을 얻을 수 있다. 장성하여 혼사를 치르게 될 때에는 하늘의 뜻을 거역치 말지니라.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이로다.” 이렇게 말하고, 노인은 학을 타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꿈에서 노인이 지시한 대로, 이들 부부는 그 날부터 사람들을 모아 다리를 놓는 공사에 착수하여 한 달이 지난 후에 마침내 다리가 완성되었다. 다리를 놓고는 매일 새벽에 그 위에서 치성을 올렸다.
이렇게 한 지 백일째 되던 날 부인은 태몽을 꾸었다. 하늘에서 찬란한 빛을 내는 구슬 하나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더니 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열 달 후 부인은 귀여운 딸을 낳았다.
그런데 머슴인 박서방도 한날 한시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주인은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내색하지 않고 박서방에게 곡식을 한 말 주었다. 박서방은 몇 번이고 절을 하며 죄송하다는 말을 했다.
세월은 흘러서 구슬아기는 정말 구슬처럼 곱게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예의범절이 밝았으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또한 지극했다. 늙은 부모는 온갖 정성을 다해 딸을 키웠다. 돌쇠라고 이름 지은 박서방네 아들도 잘 자랐다. 미천한 출생이라 잘 가꾸지는 못했지만, 생김새는 훌륭했다.
구슬아기의 부모는 사윗감을 정했다. 건너 마을 김초시네 아들이었다. 가세는 그리 왕성치 못하지만, 똑똑하고 인물이 잘 생기고 수재라고 소문이 난 총각이었다. 혼인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구슬아기는 기대에 부푼 가슴으로 밤새 잠을 못 이루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하늘이 갈라지며 눈부신 빛이 흘러나와 구슬아기의 얼굴을 비추었다. 빛이 나오는 곳을 쳐다봤다. 거기서 말소리가 흘러 나왔다.
“구슬아기야 듣거라! 너는 나 옥황상제의 딸이니라.”
“예? 제가요?”
“그렇다. 그런데 너는 너의 정해진 배필을 두고 어디로 시집을 가려고 하느냐?”
“무슨 말씀이오신지. 소녀는 그저 부모님이 정해주신 대로 따를 뿐이옵니다.”
“너의 배필이 될 사람은 김초시네의 아들이 아니라, 너의 집 머슴 박서방의 아들 돌쇠이니라.”
“예? 돌쇠라고요?”.
“그렇다. 내가 너의 부모의 정성이 갸륵하여 너를 하계로 내려보낼 때 너의 배필로서 돌쇠도 함께 하계로 내려보냈느니라. 그렇거든 너는 어찌하여 하계의 인간과 혼인을 하려 하느냐?”
“소녀는 아무것도 모르옵니다.”
“지금의 혼인을 파하고 돌쇠와 결혼을 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당장 너와 돌쇠를 다시 하늘나라로 불러올리겠노라.”
구슬아기는 놀라서 소리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땀에 배어 축축했다. 구슬아기의 비명소리에 어머니가 달려왔다. 딸의 꿈 얘기를 들은 늙은 부모는 대경실색을 했다. 십육 년 전 구슬아기를 배게 되었을 때 꿈 속 노인이 한 말이 생각났다.
“여보 영감. 이 일을 어쩌면 좋지요?”
“흐음,..”
“여보, 혼약을 파기하고 옥황상제님의 말씀대로 따르기로 하십시다.”
영감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이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아니야 안 돼. 그건 애기가 너무 긴장해서 꾼 개꿈이야, 개꿈. 세상에 자기 집 머슴의 아들과 혼인을 맺는 데가 어디 있단 말이요. 원 머슴녀석하고 혼인을 하다니 상제님도 망령이시지, 자 걱정 말고 어서 준비나 해요. 아가야 넌 잠이나 더 자거라.”
영감은 딸에게 다정스럽게 말하고서 호탕하게 웃으며 나가 버렸다. 어머니와 딸도 영감의 말을 듣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혼인은 무사히 치렀다. 신부는 신랑을 따라 가마를 타고 신행을 가게 되었다. 달 밝은 밤이었다. 밝은 달이 순식간에 먹구름에 가리워 온 누리가 깜깜해지더니 눈보라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바람까지 세차게 일어나 다리위의 일행을 휘말아 갈듯했다. 일행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우왕좌왕하며 떠들기 시작했다.
“이거 원 앞을 분간할 수가 있어야지.”
“아이쿠! 밑이 미끄러워서 한 발짝도 발을 뗄 수가 없네.”
모두들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때 가마꾼들이 소리를 쳤다.
“아이쿠 가마, 이거 가마가 미끄러지는데 야단났군.”
이상한 일이었다. 메고 있는 가마가 아무리 힘을 주어도 미끄러져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하늘이 하는 일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가 없었다. 가마는 신부를 실은 채로 스르르 미끄러지더니, 다리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깊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 하늘은 씻은 듯이 개이고 다시 밝은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 시각 이후로 머슴 돌쇠도 보이지를 않았다. 영감 내외를 빼고선 그 까닭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구슬아기가 가마를 타고 빠진 깊은 웅덩이를 가마소(駕沼) 혹은 가마수라고 부르게 되었다. 눈 내리는 달밤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설월리(雪月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놀라운 이야기인데 미비점이 있어 보충해야 한다. 다리를 놓는 것과 자식을 잉태하는 것은 어떤 관계인가? 다리를 놓아 많은 사람이 이용하도록 하는 공덕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된다. 구슬아기와 돌쇠가 서로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자랐는지 말하지 않고 하늘이 정한 배필이라고 한 것은 하늘의 횡포이니 시정해 이야기를 다시 해야 한다. 이런 미비점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사람을 신나게 한다.
남한산성 |
3) 남한산성
1624년(인조 2년) 수어사 이서(李曙)가 성을 쌓을 때 서남쪽은 이회(李晦)에게, 동북쪽은 벽암(碧巖)대사에게 맡겼다. 벽암은 기한 내에 성을 쌓았으나, 이회는 성을 튼튼히 쌓느라고 기한을 어겼다. 이회는 무고로 수어장대 앞에서 참형되었다. 이회가 죽기 전에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목이 떨어진 자리에서 매 한 마리가 날아올라 근처 바위에서 슬피 울다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발톱 자국이 남았다. 뒤에 벽암이 쌓은 곳은 무너졌으나 이회가 쌓은 곳은 튼튼하여 무너지지 않았다.
나라에서는 이회를 위해 사당을 지어 억울함을 위로하였다. 이회의 부인이 남편을 대속하기 위해 영남 지방에서 돈과 곡식을 구해 오다가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쌀을 버리고 통곡하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송파나루 앞에 있던 쌀섬여울[米石灘]이 이회 부인이 빠져 죽은 곳이다. 삼전도 아래 이회의 유씨와 송씨 두 부인을 모신 당집이 있어 무녀가 굿하고 부녀자가 치성하였다. 뒤에 당집이 사라지면서 두 부인은 청량당으로 모셨다.
인조가 남한산성 남문에 당도한 시간은 새벽 2시경이었고 한다. <<남한지>>(南漢志)에는 당시 임금이 노복 출신의 대장쟁이 서흔남(徐欣男)의 등에 업혀 산성에 올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무리 장정이라 한들 길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밤에 임금을 등에 업고 허겁지겁 산길을 오를 때야 얼마나 힘겨웠을 것인가. 서흔남은 인조를 피신시킨 뒤 변복을 하고 산성을 몰래 빠져나가 걸인 행세를 하며 영남지방에 군령을 전달하는 공을 세웠다.
인조는 전란이 끝난 뒤 천민 출신인 서흔남에게 벼슬을 내렸다. 남한산성의 동문에서 관리사무소로 가는 길 중간에는 “嘉義大夫同知中樞府使 徐公之墓(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 서공지묘)”’라고 새긴 서흔남의 묘비가 남아있다. 충절이 벼슬아치의 전유물이 아님을 일깨워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파천을 하는데, 전세의 불리한 소식이 전해지자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하나 둘 도망하여 인조는 얼마 남지 않은 신하들을 데리고 겨우 송파강을 건넜다.
강은 건넜으나 날은 어두워지고 눈까지 내려 남한산성에 오를 일이 아득하였다. 인조는 신하의 등에 번갈아 업혔다. 지친 군신은 중간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때 나뭇짐을 지고 오던 서흔남이 사정을 듣고 인조를 업어 남한산성으로 모셨다. 인조가 그 공을 치하한 뒤 소원을 묻자, 인조의 곤룡포를 갖고 싶다고 했다.
신하들은 무례한 그를 꾸짖었으나 인조는 곤룡포를 하사하고, 이에 서흔남은 죽을 때까지 이것을 간직하했다. 죽은 뒤 유언에 따라 곤룡포를 무덤 속에 함께 묻어주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찬양하여 별군관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관원들이 그의 무덤 앞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해서 항전하다가 패배하고 성을 나가 항복을 했다. 그 경과가 <<인조실록>>(仁祖實錄)에 기록되어 있으나, 충분하지 않다. 수난의 내막과 이면의 진실은 그리 높지 않은 지위에서 국정에 참여해 남한산성에 들어갔던 사람들의 체험 기록에서 증언했다. 나만갑(羅萬甲, 1592-1642)의 <<병자록>>(丙子錄)이 그런 것이다. 파직당해 고향에 머무르고 있다가 남한산성으로 자진해 들어가 정3품직으로 복귀해 군량 공급의 책무를 맡아 분투하면서 나만갑은 사태의 전모를 자기 나름대로 파악했다.
<<병자록>>을 써야 하는 이유를 말미에 붙인 발문 비슷한 글에서 밝혔다. 임진왜란은 실기가 여럿 있어도 미흡한데, 더욱 참혹한 변란을 겪고 자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면 후세에 어찌 진상을 알릴 수 있겠는가 하고 탄식했다. 다른 사람들도 사건 당사자와의 친소관계에 구애되지 않고 사실을 보완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대로 덮어둘 수 없는 내막을 샅샅이 드러내면서, 치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바란다고 한 비장한 결단이 깊은 감명을 주지만, 사태는 명분론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고 했다. 임금과 관원들이 두 달이라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군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굽히지 않고 적병과 대치하며 싸운 덕분임을 밝혔다. 군사들이 지휘부를 불신하자 거듭되던 논란의 결말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6품직의 관원 석지형(石之珩, 1610-?)이 남긴 <<남한해위록>>(南漢解圍錄)에는 하층의 불신이 심각하게 나타나 있다. 군사들이 적을 상대로 해서는 용맹스럽게 싸우다가도 조정 관원들을 보면 주저앉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난리가 끝나면 10년 동안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주겠다고 해도 위급해서 하는 말이니 믿지 못하겠다고 했다고 했다.
종9품의 말직에 종사하던 남업(南業, 1592-1671)의 <<병자일기>>(丙子日記)에서는 반란을 증언했다. 군사들이 들고 일어나, 고담준론만 일삼는 문사들이 적병을 막도록 하라고 하면서 임금을 만나자고 들이닥쳤다. 승지가 칼을 뽑자, 비웃으며 “이런 인재를 적진에 보내면 모든 일이 잘 되겠다”고 하더라고 했다.
<<산성일기>(山城日記)는 국문본이다. 작자가 밝혀지지 않았으며, 체험의 기록이 아닌가 하지만 후대인의 저작일 가능성도 있다. 남한산성에서 겪은 수난을 긴박하게 서술하고, 독자가 울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그것이 국문을 능숙하게 사용한 문장의 힘이다. 나라의 치욕을 국문만 읽을 수 있는 부녀자나 하층민들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쓴 책이라고 생각된다.
나만갑의 <<병자록>>을 저본으로 했다고 할 수 있으며,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은 없다 하겠으나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김상헌이 국서를 찢고서 자결을 하려 한 것은 누구나 비장한 느낌이 들게 이야기하고, 강화파는 속임수나 잔재주를 일삼는다는 인상이 들도록 했다. 인조반정의 공신으로서 당시에 대권을 장악한 김류(金瑬)를 특히 미워해 사소한 거동이라도 패전의 책임과 연결시켰다. 김류가 전사자를 줄여 보고하자 군사들이 싸울 뜻을 잃어 강화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병자호란때 경상 좌병사 허완(許完)과 우병사 민영(閔瑛)이 많은 군사를 이끌고 와서 남한산성 밖 언덕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근처 백성들이 몰려와서 보호를 요청했다. 오랑캐들이 가는 곳마다 살육과 노략질과 부녀자들에 대한 겁탈에 혈안이 되고 있어서 부녀자들만을 한곳에 모아 보호했다.
마침내 적군은 대병력을 몰아 쳐들어 왔다. 좌우병사는 전군에 명을 내려 양군은 서로 어울려서 한참 격전을 벌였다.
우병사 민영이 부하들에게 소리를 쳤다.
“아녀자들은 산성 안으로 피신시켜라.”
“안됩니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혀 뚫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뒷산 제일 높은 곳으로 대피시키도록 하라.”
차츰 아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승전의 기색을 알게 적군은 더욱 사나워졌다. 우리 편 군사를 전멸시키려고 대들었다. 우병사가 부하 군졸들에게 소리소리 호통을 쳤다.
“사직의 존망이 걸려있는 싸움이다! 물러가는 자는 한 칼에 벨 것이니,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일단 전의를 상실한 군사들은 자꾸 밀리기만 했다. 좌병사 허완은 단신으로 말을 몰아 성난 사자처럼 장창을 휘두르며 적진을 누비면서 순식간에 적병을 수 없이 찔러 쓰러뜨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사했다. 그 광경을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던 여인들은 절망과 비탄에 빠져 간간이 비명만을 지르고 있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어지자, 산 아래까지 도달한 적병들은 산 위에 있는 여자들을 보고 제각기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 한 여자가 나서서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싸움은 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녀자들은 이대로 오랑캐 놈들에게 붙잡혀서 더러운 굴욕을 당하느니 보다는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것이 옳은 일일 것입니다. 오랑캐 놈들에게 더럽힘을 당하느니 차라리 백제시대의 삼천 궁녀들처럼 깨끗하게 죽음을 택합시다.”
말을 마치고는 산 뒤쪽에 있는 벼랑으로 가서 몸을 던져 버렸다. 다른 여자들도 몸을 던졌다. 그 광경을 바라본 우병사 민영 이하 전 장병들은 이를 갈며 다시 적병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에 가면 쌍령리라는 곳에 부녀자들이 몸을 던진 바위가 있다. 뒤에 나라에서 사당을 짓고 원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냈다.
=> 남한산성은 복합적인 전승문화의 보고이다. 국가의 기록, 개인의 회고, 구전이 같은 사건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자료를 거대한 규모로 모아, 역사 서술, 소설, 영화, 그 어느 것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전승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론을 이룩할 만하다.
4) <눈 속의 남한산성> 박철구
동장군 가슴 속에 찬바람이 몰아친다
새하얀 눈꽃들이 온산을 뒤덮었다
노송은
흰 투구를 쓰고
기백을 자랑한다
군신이 피난 와서 추위 속 벌벌 떨며
오랑캐 무리 앞에 치욕을 당하던 일
가슴에
사무친 한을
흰 눈 속에 새겨본다
붐비던 등산객들 발길이 뜸해지고
즐비한 음식점들 손님이 끊어졌다
조용한
눈 꽃 동산에
산새들만 날고 있다
=> 오늘날의 시인의 이런 노래가 남한산성에 관한 전승문화에 추가된다.
한국, 신명나라
韓國, 別有天地
Korea, Wonderland
<한국신명나라 http://cafe.daum.net/koreawond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