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어느 날이었다.
쓸쓸한 그림자 하나 허허로운 벌판을 흔들리며 건너가고 있었다. 가슴에 와 닿는 것들이 모두 쓸쓸하고 허허로웠다. 마음까지 섬처럼 고립되었던 그때, 발아래 쌓이는 쓸쓸함과 발아래 쌓이는 허허로움과 발아래 쌓이는 그리움을 따라, 나처럼 고립된 섬을 찾아 길을 나섰다. 배를 타고 푸른 바다를 하얗게 가르고 가르는 뱃길 따라 닿은 곳이 서해 덕적군도의 어느 아담한 섬이었다. 기다리던 사람도 떠나는 사람도 없는 선창엔 해풍에 삭아 내린 목선이 삐걱거리고 있었다. 허한 바람만이 스치는 선창은 가뭇없이 쓸쓸했다. 그곳 저만치엔 푸른 융단 위에 금빛 융단이 고적했던 낯선 행려의 가슴에 위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숱한 퇴적의 시간이 빚어낸 해수의 매혹적인 풍경에 이끌려 카메라 셔터를 쉼 없이 눌렀던 그때 나는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났다. 달덩이처럼 곱던 그 여인에게 반한 나는 그녀가 소야(蘇爺)라는 참 곱고 예쁜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허허로운 벌판을 흔들려 건너가는 불혹의 한 사내에게 다가오는 매혹의 꽃이었고, 가슴에 청수처럼 젖어드는 여인이었다. 마지막 뱃고동 소리 선창을 울리며 길을 돌아설 때, 명주 옷고름 밟히듯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던 나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한 여인을 고립된 섬에 외롭게 남겨두고 떠나온 듯하였다.
회색빛 도회지의 메마른 일상을 살다가, 어느 날 가을이 허전하게 찾아와 붉은 단풍이 가슴으로 물들고, 산허리 돌아오는 바람이 공허하게 불어와 마음의 빈 뜨락에 낙엽이 흩날릴 때면, 세월 저편에 두고온 고혹한 그 여인은 남 모르는 내 가슴에 채송아처럼 꽃물을 물들이며, 허허로운 가슴에 달덩이처럼 떠오르곤 하였다.
나는 지금 그 여인을 만나러 홀연히 새벽길을 나선다.
바닷가 연안 대부도의 길은 해무가 자욱히 피워올라 있다.
짙게 내린 해무를 걷어내던 그곳 어디 쯤에서 깜박 길을 놓쳐 버린 사이 저만치 방아다리 선착장의 배는 뱃고동을 뿌리며 뱃머리를 풀고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배낭과 카메라를 맨 나는 두 손 흔들며, 떠나는 배를 향해 뛰었다. 바람으로 질주하여 까까스로 몸을 던져 뱃머리를 잡았을 땐, 호흡이 턱까지 차올라, 얼굴이 하얘졌다. 가파른 호흡을 가다듬고 갑판에 서니, 배는 푸른 바다 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하얀 파도를 부수고 부수며 자유의 몸이 된다. 선상은 온통 알록달록하게 차려 입고 8월의 마지막 피서지로 떠나는 청춘들의 세상으로 넘실거렸고, 그들의 들뜬 분위기는 여기저기서 웃음꽃을 폭죽처럼 터트리며 청춘의 피는 뜨겁게 끓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들을 보니 강물처럼 흘러버린 내 흑백시절이 아련했다. 그 들뜬 풍경 속에서 섬사람들은 삶의 무게를 진 듯 아무른 표정 없이 굳어 있었다. 더러는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고만고만한 등짐을 하나씩 진 허름한 차림의 그들은 유난히 검은 피부에 검게 탄 얼굴과 거친 손마디는 고단한 삶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이 땅을 먼저 살다간 시골길에서 마주치던 익숙한 이웃들과 다르지 않았다.
저멀리 푸른 바다 위에 바다역이 떠있다. 시골 간이역을 떠올리게 하는 그 바다역 앞을 지날 때, 바다기차에 몸을 싣고 끝없이 망망히 펼쳐진 푸른 융단 위를,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쉼 없이 가고 또 가고 싶었다. 파도의 아슴한 눈빛 그리워하며, 일렁이는 검푸른 파도에 달빛이 부서지고 별똥별이 지상의 삶의 텃밭으로 긴 꼬리를 그리는, 이승의 끝이랴 싶은 곳까지 가고 싶었다. 어쩌면 그곳은 생의 탯줄을 타고 들어가는 어머니의 자궁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훼리호는 그윽한 뱃고동을 뿌리며 선창에 서서히 몸을 누인다.
배가 대부도 선착장을 출항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 소야가 사는 섬에 발을 딛는 셈이다. 파도는 육지의 냄새를 묻혀온 내게 하얀 포말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끈적끈적한 소금바람으로 내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다. 생수를 싸기 위해 그곳의 허름한 부둣가 점방으로 다가가니, 늙은 개 한 마리가 다 된듯 여의고 파리한 몰골로 배를 땅에 깔고 두 발 위에 코를 묻고 있었다. 생전 낯선 이방인이 지나가는 데도 세상사에 관심을 놓은듯 허연 눈망울로 힐끗하더니 꿈쩍 않는다. 부두의 점방문을 밀자, 먼지만 뽀얗게 앉은 과자 봉지가 내 유년의 아득한 시절로 잠시 데려간다. 기침소리 몇 차례에도 기척 없는 그곳엔 고양이 한 마리만 조심스럽게 한쪽 발을 들고 고개를 내밀어 행려의 객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삶의 먼지를 뽀얗게 뛰집어 쓴 알전구엔 까맣 파리똥들이 번져 있는 그 점방을 빈 손으로 나올 때, 저만치서 몸이 불편하신 듯한 어르신 한 분이, “나, 시방 뒷 텃밭에 다녀오는 길이여.....” 한다. 여기는 다 이렇게 산다는 뜻으로 들린다. 온갖 문명의 때가 부유물처럼 떠다니는 탁한 도시를 외돌아 앉은 듯한 그곳은 그나마 자연과 인성人性의 오염도가 조금은 덜한 듯했다. 생수를 한 통 싸든 나는 그분께 떼뿌리 해변에 사는 소야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 했다.
"걸어가면 시간 반, 마을버스타고 걸어 들어가면 20분이라 한다." 그런데 마을 버스는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한다, 했다.
소야도
석등 정용표
이름처럼 곱고 예쁜 소야를 만나러 간다
불혹의 허전한 내 가슴에
채송아처럼 꽃물을 들이던 그녀는
오늘도 고립된 외로운 섬에서
고독과 허무의 몸짓으로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푸른 파도를 하얗게 가르는
뱃전의 피서객들 사이엔
함박웃음 폭죽처럼 터지는데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고만고만한 등짐 진
섬사람들은 지난한 삶의 무게를 진듯
아무런 표정이 없다
물 위에 떠 있는 바다역,
그곳을 지나,
온갖 새들이 소프라노를 뿌리는
산을 넘어 소야를 만나러 간다.
저만치 푸른 융단 위에
금빛 융단이 신기루처럼 펼쳐진 그곳에
그녀는 섬이 되어 있었다.
삶의 여운이
삶의 무게로 내려앉은 그곳엔
마디마디 사연들이 들리느니,
섬은 울음 섞어
눈물 섞어
목마른 가슴을 철썩이고 있었다.
나는 인고의 담석 같은
섬 바위에
등껍질 두터운 소라처럼 몸을 누인다
한 가닥 시간은 과거로 흐르고
한 가닥 시간은 현재에 머물고
한 가닥 시간은 미래로 흐르는데,
메마른 가슴으로
인고의 담석을 끌어안은 소야는
그립고 서러운 몸살만 앓고 있다.
<소야도> 기행편 중에서._ 석등 정용표._
예전엔 마을버스가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버스가 다니는 길이 되어 있었다.
마을버스를 탈까, 걸어갈까....., 그 길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이 잔잔한 망설임은 바람처럼 떠나온 형려의 객이 누리는 길 위의 작은 행복일지도 모른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뜨겁게 몸을 달구고 있을 8월의 해변을 가로질러, 오솔길 같은 산길을 걷기로 한다. 온갖 새들과 풀벌레들이 소프라노를 뿌리는 산을 넘어 떼뿌리 해변을 가로질러 가는 산길엔 기름기가 없었다. 바다 뻘내음이 바람결에 묻어오고 무성한 칡등굴에 덮힌 산길이 숨었다 나타났다 반복하면서 칡꽃의 향기가 8월의 뜨거운 햇살만큼 진한 내음으로 밀려와 행려의 볼과 피부를 부벼댄다. 온 몸에 땀이 감길 쯤 그곳 오솔길 한 켠에 보랏빛 향기로 치장한 처녀가 다소곳하게 서 있었다. 육지의 냄새를 묻혀온 허름한 날 보더니 서로 수런거린다. 두 해 전 속리산 자락 상주의 솔숲에서 한나절 함께했던 고매스런 몸빛을 품어내는 애구(愛韭)의 별칭을 가진 보랏빛 처녀다.
이윽고 그 옛날 명주고름 밟히듯 발걸음 떨어지지 않았던, 소야가 사는 그곳에 도착한다.
일렁이는 푸른 융단 위에 금빛 융단이 신기루처럼 펼쳐진 풍광은 그대로 인데......, 풍화된 하얀 머리로 나타난 행려의 객만 세월에 씻겨 온 듯했다. 해풍이 옷깃을 파고드는 인적 드문 해변을 천천히 거닐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금빛 융단 위에 몸을 누인다. 그리고 구름이 떠가는 하늘을 가뭇없이 바라본다. 이 삶도, 이 생도 어쩌면 저 뜬구름 같은 것인지도 모르리라. 이 삶이 가고 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터. 어쩌면 이 삶의 한자락도 저 뜬구름과 다름 아닐 지 모르리라. 적적한 생각에 젖어든다. 살아온 삶이 더할수록 그 쓸쓸함과 처연함도 깊어 가는 것일까. 언제였던가. 불혹의 이맘 때쯤 제천의 천등산(天燈山) 산마루에 홀로 들어, 그 산마루에 누워 저 하늘에 떠가는 뜬구름을 보았던 그날의 심정 보다, 오늘의 나는 그 골이 더 깊게 패여, 삶의 음영 또한 더 짙게 고여 있는 듯했다.
나는 다시 몇 천년 쯤 묵은 인고의 담석 같은 섬 바위에 소라처럼 몸을 누이고, 쉼 없이 부르는 소야의 해조음 짙은 노래를 듣는다. 철썩! 철썩! 철썩! 서러운 가슴 치듯 토해내는 그 노래는 춥고 허기진 삶과 그 사랑과 그 목숨이 빚어내는 뜨거운 기도요, 뜨거운 묵상이었다. 어쩌면 저 노래는 나의 노래요, 이 땅의 모든 생명의 목마름에 타오르는 뜨거운 몸부림인의 노래인지도 모르리라. 소야의 품에 드니 한 가닥 시간은 과거로 흐르고, 한 가닥 시간은 현재에 머물고, 한 가닥 시간은 미래로 흐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내 뜨거운 몸살의 기도에 소야는 풀내음 나는 젖가슴을 풀어 헤친다.
해는 싸늘하게 식어 바다 끝으로 떨어지고 어둠이 바다에 내린다. 막차는 기약 없이 떠나고, 마지막 뱃고동 소리 작별을 뿌리며 저만치 떠나는데....., 저기 저 어느 이의 떠나지 못한 나룻배엔, 떠나지 못한 사랑을 가득 싣고, 해풍에 삐걱거리며 그립고 서러운 몸살만 앓고 있다.
소야(蘇爺)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_석등 정용표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