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싯다르타는 어디로 갔는가?
김덕남
수행자의 나라, 인구 14억에 3,000종이 넘는 종교를 가진 인도는 순례자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천성산 미타암 주지 동진스님 주선으로 불자 22명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로 했다. 싯다르타가 태어나고 출가하고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고 설법 후 열반에 드신 인도·네팔 8대 불교 성지를 찾아간다. 걸으며 명상하며 자신을 돌아보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기에 순례길에 동참했다.
11월 30일 오후 6시,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을 나오니 광장에서 들려오는 새소리의 합창에 귀를 쫑긋한다. 대기한 버스로 걸어가니 차들은 빵빵거리고 코끝은 매캐하다. 싱(현지 가이드)의 꽃목걸이와 “천천히 싸게싸게 오세요”라고 유창한 한국말 환영 인사가 마음을 녹여준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 같이
안개가 자욱한 이튿날 아침, 델리 공항에서 2시간을 날아 바라나시에 닿았다. 첫 순례지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첫 설법을 한 사르나트(녹야원)다.
입구에 들어서니 푸른 잔디에 힌두 왕이 궁전을 짓는다고 뜯어간 탑의 기초석이 둥글게 남아 있다. 승원, 사리탑 등 각종 유적을 지나 거대한 초전법륜탑(dhamek stupa : 진리를 보는 탑. 높이 42.6m 지름 28.5m) 앞에 섰다. 아직도 문양이 선명한 돌무늬가 남아 있는 붉은 사암의 둥근 탑이다. 애초에는 탑의 돌마다 무늬가 있었으나 훼손된 곳을 복원하면서 벽돌을 붙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나시의 왕은 날마다 사슴 사냥을 즐겼다고 한다. 사슴왕은 매일 한 마리씩 사슴을 올릴 테니 사냥을 하지 말아 달라고 왕에게 요청했다. 하루는 공양으로 바친 사슴이 임신 중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슴왕은 자신이 대신 죽겠다며 왕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크게 깨닫고 다시는 사슴을 잡지 못하게 하고 마음껏 뛰놀게 했다는 곳이 바로 사르나트다. 이 이야기는 부처님 전생 편에 나오는 것 중 하나로 부처님은 전생에 사슴왕이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 같이 고행하던 다섯 도반을 찾아 이곳에 왔다. 그들에게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도로 가라는 말씀과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를 설법하셨다고 한다. 또한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은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수타니파타)”고 하셨다. 설법을 들은 다섯 도반은 7일 안에 모두 깨닫고 제자가 되었다. 그 말씀이 사방으로 향기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설법을 듣는 사람이 늘어나고 부처님께 귀의한 제자가 60명이 되었다고 한다.
첫 설법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아소카 석주 기둥은 파손된 채 남아 있고 꼭대기의 4마리 사자상은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사자상은 인도를 상징하는 국장國章이 되었으며, 화폐 루피의 대표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다. 초전법륜탑과 석주는 부처님 열반 뒤 B.C.3세기에 아소카왕(마우리아 3대 왕)이 부처님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건너간 신라 혜초스님도 이곳을 방문한 기록을 「왕오천축국전」에 남겼다.
여러 나라의 순례객들이 탑돌이를 하고 잔디밭에는 군데군데 단체로 예불을 올리고 있다. 우리 일행도 합장으로 세 번 탑돌이하고 탑을 향해 앉았다. 천광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일심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동진스님의 세계 평화와 성지순례 동참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불이 있었다. 일행의 독송은 유장하게 울려 퍼져 녹야원을 물들였다. 2,500여 년 전 첫 설법이 이루어진 곳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사슴뜰 울려퍼진 첫 음성 듣습니다
사방으로 퍼져가다 심방을 두드리는
헐벗은 영혼 자락에 방울 하나 답니다
귀 열어 당신 말씀 전율로 다가오는
눈 열어 저 높은 곳 심연에 파문 이는
떨림은 눈동자 싸고 물결치며 흐릅니다
숲에서 걸어나와 생의 근원 찾아가신
거룩한 발자국을 한 발 한 발 따라가며
한소끔 끓는 심처에 눈부처를 심습니다
- 졸시조 「녹야원에서 무릎 꿇다」
부처님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 후 이곳 사르나트로 오기 위해 갠지스강에 닿았다. 강을 건너야 하나 뱃삯이 없어 허공을 날아 건넜다고 한다.
갠지스는 히말라야 빙하가 녹으면서 인도, 방글라데시를 거쳐 벵골만으로 흘러간다. 2,500km가 넘는 갠지스강은 힌두교도들에게는 최고의 성지이다. 전설에 의하면 천국에서 흐르던 강이 시바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지상에 내려왔다고 한다. 인도인 80%가 넘는 힌두교도들은 단 한 번만이라도 이 강에 몸을 담그거나 죽어서라도 재가 되어 뿌려지기를 소망한다.
갠지스가 눈앞에서 유유히 흐른다. 보트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날은 어두웠으나 강가에는 중세분위기의 건물들이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강물에선 머리를 감고 몸을 담그며 그들의 업을 씻는 성스러운 의식을 하고 있다. 제사가 한창인 가트에서는 간절한 주문들이 강물 위에 쏟아진다. 불꽃이 일곱 군데나 치솟는다. 먼저 시신을 강물에 담가 죄를 씻는 의식을 하고 장작더미로 화장을 한다. 그들의 일생과 함께 육신은 재가 되어 갠지스를 흘러 시바신의 품으로 흘러가겠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강, 눈 뜨고 감는 사이 죽음이 오고, 죽은 자의 삶이 산 자에 이어지는 것을 본다. 우리 일행이 물 위로 띄운 꽃불도 각자의 소망을 싣고 갠지스 물결을 타고 한 번도 닿아보지 못한 시간 밖으로 흘러가겠지.
산산조각 깨어진 나, 산산조각 흩어졌다
엉겁결 발을 들고 갈 곳 몰라 서성이다
자욱한 안개 속으로 갠지스를 굽어본다
깨어진 얼굴 위로 떠내려가는 기도들
소용돌이 까르마가 나를 덮쳐 오는 날
꽃불의 간절함마저 재가 되어 떠 간다
- 졸시조 「갠지스강」
한참 가면 금방 도착하는 나라
바라나시에서 부다가야(Buddha Gaya)로 가기 위해 새벽부터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도로를 달린다. 수천 년 시신을 태운 연기가 갠지스강 안개로 태어난 것일까. 안개 속 오토바이, 릭샤, 차량이 뒤엉켜 사방에서 경적을 울려댄다. 개와 말, 염소, 물소도 함께 가는 길이다. 버스 지붕 위에 올라탄 사람들도 간혹 보인다. 도로변의 건물은 짓다 만 것인지 허물다 만 것인지 구분이 안 되는 데도 빨래는 펄럭이고 아이들은 뛰어논다. 한참 가면 금방 도착한다는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15세기부터 도로를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확장 공사 중이라고 한다.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출발하여 인도를 관통하고 방글라데시로 가는 도로다. 경운기가 지나가고 물소가 머리를 땅에 붙이고 누워있다. 우리 버스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우회하여 지나간다. 모든 게 노플러브럼이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자 톨게이트를 빠져나온다. 심하게 흔들리다 울퉁불퉁 튀기 시작한다.
보리수 아래 앉다
전날 밤 마하보디 대탑을 순례하였으나, 이튿날 한 번 더 순례하기로 했다. 어두컴컴한 새벽 4시다. 숙소에서 릭샤를 타고 마하보디 대탑에 닿았다. 대탑에 들기 위해서는 두 차례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검색대에 너도나도 던져넣은 가방을 찾느라 북새통이다. 무유스님의 숄더백(바랑)을 끝까지 찾지 못했다. 그 속에는 예불할 때 입는 붉은 가사가 들어 있었는데, 무유스님은 보시했다며 웃었다.
55m의 대탑이 순례객을 맞는다. 대탑 네 모서리엔 작은 탑이 대칭으로 솟아있다. 탑이라기보다 탑 속의 사찰이라 하는 편이 낫겠다. 웅장, 정교, 세련미가 넘친다. 맨발로 탑돌이를 하며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독경 소리를 들었다. 대탑 속의 법당으로 들어갔다. 미타암에서 준비해 간 노란 가사를 부처님의 몸에 둘러드리고 시주금과 연꽃을 올리는 스님들 뒤를 따라 참배했다. 대탑 바로 뒤 부처님 당시로부터 몇 대 손자에 해당할 보리수나무는 돌난간을 둘러 신성시하고 있다. 사람들로 붐볐으나 스님 뒤를 따라 이 보리수 아래 앉았다. 눈을 감고 명상에 들었다. 목에 건 염주를 하나하나 굴리며 흐트러진 마음을 한 곳에 집중했다. 보리수 가지 사이 해와 달이 지나가고 계절이 지나간다. 잎사귀마다 부처님의 생애가 겹쳐 떠오른다.
뉘신 지, 날 부르며 별을 안고 아롱이는
어둠 속 길 잃을까 천 개의 눈을 뜨는
아득한 기억 밖에서 나를 향해 반짝이는
눈시울 굴러내려 가슴에 맺혀 있는
살여울로 부서지다 은하로 흘러가는
눈 한번 감는 사이에 그렇게 왔다 가는
- 졸시조 「이슬 - 부다가야 마하보디 대탑」
싯다르타는 29세에 카필라성을 나와 사냥꾼의 낡은 옷과 바꿔 입었다. 이 옷이 황색 가사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둥게스와리의 전정각산前正覺山에서 6년간 고행 후 이곳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 길상초를 깔고 앉아 선정에 들었다. 마왕의 세 차례 유혹을 물리치고 7주 만에 깨달음(Buddha)을 얻으셨다. 이 대탑은 아소카왕이 세웠다. 12세기 무슬림의 큰 침공으로 폐허가 되고 불교가 사라지다시피 했다. 붓다가 비슈누신의 여덟 번째 화신이라 믿는 힌두교도들은 이 사원을 자기네들 사원으로 만들었다. 다시 부처님 성도지로 밝혀진 것은 1880년 영국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에 의해서였다. 현재는 힌두교, 불교 반반으로 마하보디 소사이어티에서 관리한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도는 0.5 ~ 0.8%에 불과하다.
영축산이 있는 라즈기르(왕사성)로 향했다. 영축산靈鷲山은 독수리 모양의 바위에서 이름을 따 왔다고 한다.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께 무릎을 꿇은 곳으로 알려지기도 한 이곳은 한때 마가다 왕국의 수도였다. 부처님께서는 1,000명의 제자를 이끌고 영축산에 올라 법화경과 반야심경을 설하셨다.
발걸음 소리에 집중하며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한낮은 12월인데도 28℃를 오르내린다. 땀이 줄줄 흐른다. 온몸에 염주를 걸친 장사꾼이 부채질해주면서 따라온다. 사양해도 소용없다. 구걸하는 사람들은 길옆에 줄지어 앉아있고 목마른 원숭이는 순례객의 물병에 매달린다. 금박으로 환한 아난존자 석굴을 지나 수보리존자 석굴에 앉았다. 금강경, 반야심경을 독송하면서 버리고 비워야 할 것에 대해 자문자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영축산을 돌아 빔비사라왕의 감옥터에 도착했다. 방형의 붉은 돌담이 남아 있고 담장 위에서는 원숭이 가족들이 우리를 지켜본다.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이 아버지 빔비사라왕을 이곳 감옥에 가둬 굶겨 죽인 곳이다. 왕이 갇히자 왕비는 몸에 꿀반죽을 얇게 펴 바르고 포도주를 넣은 장신구를 두르고 찾아갔다. 꿀반죽을 벗기고 장신구 속 포도주로 목숨을 이어가게 했다. 이 사실이 탄로 나 생모인 왕비도 가둬 버렸다고 한다. 권력의 비정함이 어딘들 없으랴만 부모와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 권력인가 보다.
영축산을 내려와 최초의 사찰인 죽림정사에 다다랐다. 빔비사라왕은 아들에게 감금되기 전 붓다에게 귀의했다. 왕은 붓다를 위하여 성 밖 대나무숲에 죽림정사를 지어 1,200여 명의 제자와 함께 머무르게 했다. 대나무가 가득할 줄 알았는데 유클리트, 반얀트리가 하늘을 찌른다. 연못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2천 5백여 년 전 부처님의 발자국은 어디에 찍혔을까 생각하며 걷는데 머플러 장사꾼이 계속 따라온다.
오후에는 최초 불교대학인 나란다대학 유적지로 향했다. 나란대대학은 5세기 굽타왕조가 세운 불교, 철학, 수학 등 전 학문을 아우르는 종합대학이다. 7세기 당의 현장법사가 이곳에 왔을 때는 교수 천오백 명, 학승 만 명에 달했다고 「대당서역기」에 기록해 놓았다. 사원과 강당 침실 도서관 목욕탕 등 다양한 건물 벽체가 하늘이 뻥 뚫린 채 서 있다. 신라 혜초스님도 여기에 왔었다며 그 방을 찾아보라고 말해 보물찾기하듯 둘러보았다. 그 방은 어디쯤 있었을까. 승방과 강의동이 함께하는 구조를 띠며 학년에 따라 방의 높낮이를 달리하였다고 한다. 입학하려면 세 명의 교수로부터 동시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 재수, 삼수는 다반사고 10년을 공부하여 입학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발굴된 것은 겨우 10분의 1에 불과하며 학교의 넓이가 5km×10km나 된다니 그 규모를 상상해본다. 10세기까지 대번영을 이루었으나 12세기 무슬림의 침공으로 건물, 서적이 타는 연기가 6개월이나 피어올랐다고 한다. 구도를 위해 모여든 승려들은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니 종교란 과연 무엇일까? 누구를 구원하기 위한 것일까?
여래는 육신이 아니다, 깨달음의 지혜다
파트나에서 출발하여 바이샬리로 향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서로 자기 나라로 모시려는 바람에 여덟 등분했다. 이에 최초로 리차비족이 모신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대림정사로 이동했다. 보름달을 반을 갈라 지구 위에 엎어 놓은 것 같은 아난존자 사리탑 앞에 섰다. 아소카 석주 기둥에는 영국인들이 낙서한 흔적도 있다는데, 석주 위의 사자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며 말없이 앉아있다. 아소카왕은 부처님이 머무셨던 자리마다 석주를 세워 부처님의 성지임을 기념하였다. 이곳은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을 올린 곳이라 하여 ‘원후봉밀터’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네 개의 강이 있지만, 바다에 가면 하나가 되듯이, 세상에는 네 개의 계급(카스트제도)이 있지만 내 법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라고 하시며 처음으로 비구니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500명 비구니가 여기에서 탄생했다. 삼종지도를 따르던 그 시절 여성이 누구의 소유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가 된 것이다. 비구니들 사리탑이 구도하는 자세로 아난존자 사리탑 곁을 지키고 있다.
대림정사를 나와 부처님이 걸어갔을 법한 마을 가운데로 걸어갔다. 한 40명쯤 되는 아이들이 볼품없는 미니 학교 마당에서 입을 맞추어 큰 소리로 공부하고 있다. 선생님을 만나 사진을 찍고 약간의 성금을 내려고 하는데 거리의 아이들이 떼로 몰려 손을 벌리는 게 아닌가. 일행은 보이지 않고 벌린 손과 눈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부리나케 뛰기 시작했다. ‘13인의 아해’가 따라 뛰었다. “Go, Go, Go to school! Go study!” 급한 김에 나오는 대로 소리 질렀더니 갑자기 애들이 ‘A, B. C, D’를 합창한다. 그러더니 석가모니불로 떼창을 바꾸며 따라온다. 아, 이 난감을 어이하나. 일행의 꽁무니를 찾아 허겁지겁 뛰었다. 숨을 몰아쉬니 세계에서 제일 큰 케사리아 대탑(발우탑)이 멀리 보인다. 1997년부터 발굴하기 시작했는데 앞쪽만 발굴한 상태다. 산 하나가 다가와 우뚝 선 느낌이다. 두 눈에 담기도 벅차다. 부처님께서 3개월 후 열반하실 거라 말씀하시고 바이샬리를 떠나실 때 리차비족들은 부처님을 계속 따라왔다. 강을 건너는 부처님을 안타까이 바라보는 작별의 눈물이 내 눈에 와 어린다. 부처님은 이별의 증표로 발우를 떠내려 보내셨다. 그 발우를 묻은 탑이 케사리아 대탑이다.
오후, 쿠시나가르의 부처님 열반지에 도착했다.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올린 마지막 공양(야생 토란죽으로 추정)을 드시고 부처님은 이곳 사라수 두 그루 사이에서 열반에 들 준비를 했다. 그때 하늘에서 아름다운 음악이 들리고 나무에 꽃들이 하얗게 피었다. 곁에 있던 아난다가 신기해서 쳐다보니 “아난다여 이것은 여래에게 올리는 마지막 공양이니라. 그러나 아난다여, 이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제일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저녁 열반에 들리라.”라고 하시며 서쪽을 향해 누우셨다. 아난다가 슬퍼하니 “아난다여 슬퍼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 있으리라.”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라는 말씀을 남기고 편안한 상태로 출가한 지 51년, 성도한 지 45년 만에 열반에 드셨다.(법륜스님 법문을 듣고 재구성)
일행은 목탁 소리에 맞춰 석가모니불을 독송하며 부처님께 올릴 가사의 네 귀퉁이와 가장자리를 잡고 열반당에 도착했다. 열반당 외부와 내부를 합장으로 세 번 돌고 누워계신 부처님께 가사를 덮어드리는 공양을 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드리기 시작했다. 콧등이 시큰하다. 열반당을 뒤로하고 부처님 다비장(라마바르총)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니 삶과 죽음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육신의 문을 열자 살별이 날아온다
산란한 별빛으로 카스트를 불사를 때
저 환한 기쁨을 꿰어 인드라로 비춘다
천둥도 잠재우고 번개도 눈 감기고
찰나에서 영겁으로 꽁지별이 스쳐가듯
광배로 뿜어나온 빛 해탈교를 건넌다
- 졸시조 「거푸집 - 쿠시나가르 열반당」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싯다르타를 씻기다
부처님 탄생지 룸비니로 가기 위해 어두컴컴한 새벽에 네팔 국경에 도착하여 출국 수속을 밟았다. 줄을 서느라 오래 지체하였으나 그냥 이웃 동네를 지나가는 느낌이다. 인도보다는 쾌적하여 숨쉬기가 좋다.
룸비니 동산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개똥으로 발밑을 조심해야 했다. 원숭이들이 펜스 위에 앉아 묘기를 부린다. 바나나를 주니 한 손으로 잽싸게 받아 냉큼 까먹는다.
싯다르타는 B.C. 6세기(자료에 따라 100년 정도의 탄생 시차가 있음.) 인도가 16개국으로 난립할 때 코살라국 카필라성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태자로 태어났다. 전통대로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는 길이었다. 룸비니를 지나던 중 산기를 느낀 마야부인은 무우수無憂樹 아래에서 싯다르타를 출산했다. 싯다르타는 불행히도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만다. 새어머니가 된 이모의 손에서 영적인 존재로 자라났다. 17세에 코리야족 야쇼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차기 왕위 계승권자였으나 생로병사의 고에서 벗어나고자 29세에 문득 집을 나섰다.
룸비니 동산 탑 안에는 성스러운 바윗돌이 있다. 싯다르타가 그 바윗돌 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난간 위에서 유리 밑 바위를 내려다보도록 해 놓았다. 방문객들이 거기에다 돈을 던져 바윗돌을 볼 수 없으니 못내 아쉬웠다.
룸비니 동산 아소카 석주에는 이곳이 부처님이 태어난 룸비니임을 명시하고 있다. 밀림 속의 석주를 1896년 독일 고고학자 퓨러가 발견했다고 한다.
아기가 태어난 곳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싯다르타를 씻겼다는 연못을 한 바퀴 돌고 보리수 아래 앉았다. 탑을 향해 예불을 올리기 시작했다. 2시간의 예불에 주변이 캄캄해졌다.
당신이 오실 길에 옷을 벗어 깔게요
긴 머리 모두 풀면 사뿐 밟고 오세요
마음눈 환히 뜨고자 발끝으로 갑니다
수미산 머릴 베고 바다에 발을 뻗쳐
해와 달 나눠 쥐고 불새로 오는 당신
보랏빛 연꽃 송이를 무릎 아래 바칩니다
- 졸시조 「룸비니로 가는 길」
손가락 1,000개로 염주를 만들어라
네팔 국경에서 출입국 절차를 밟고 다시 인도로 넘어왔다. 쉬라바스티(사위성)로 이동하여 천불화현탑을 찾았다. 부처님 탄생 후 7일 만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천상의 사람들에게 설법하기 위해 도리천으로 올라간 곳이다. 작은 동산으로 이루어진 탑을 올랐다. 가파른 동산을 올라가니 봉우리에 붉은 벽돌 탑 유적이 있다. 동산 전체가 탑이다. 제대로 발굴도 관리도 안 되니 마구잡이로 올라간다. 사람들은 부처님이 깨쳤음을 믿지 않고 시험하기 위해 망고 기적을 보여줄 것을 주문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망고 씨앗을 뿌려 열매가 열리게 하고 그 열매가 천의 부처로 화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도리천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이어서 수닷타탑과 앙굴리말라탑을 방문했다. 앙굴리말라는 인물이 수려하고 똑똑하여 스승의 부인이 사랑하게 되었다. 앙굴리말라의 거절에도 부인의 사랑은 집요했다. 끝까지 거절하자 앙심을 품은 부인이 앙굴리말라가 자신을 성추행하려 했다고 남편에게 거짓 보고를 한다. 질투에 눈이 먼 스승은 앙굴리말라에게 “100명의 손가락을 잘라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면 너의 수행은 완성될 것이며 승천할 수 있다”라고 한다. 이에 천국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 앙굴리말라가 사람을 99명까지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쉬라바스티의 왕이 1,000명의 군사를 풀어 범인을 잡겠다고 하자 앙굴리말라의 어머니가 만류하러 나섰다. 앙굴리말라는 어머니마저 살해하여 100명을 채우려 했다. 이 사실이 부처님께 알려지자 부처님은 말씀으로 살인을 멈추게 하였다. 그후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앙굴리말라를 돌로 쳐 죽였다고 한다. ‘앙굴리’는 손가락이며 ‘말라’는 염주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이다. 부처님은 과거에 어떤 일을 했더라도 깨우치기만 하면 다 해탈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수행자의 과거는 묻지 않는가 보다.
기원정사로 들어섰다. 부처님은 45안거 중 24안거를 쉬라바스티에서 보냈다. 입적하기 전 19안거를 한 곳이 기원정사다. 금강경 등 경전 중 40%가 여기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교만한 자는 지혜의 칼날로 깨트리고, 고통받는 자는 자비의 손길로 보듬어주라는 교화나, 남에게 폐가 되지 않아야 본인도 자유로워진다는 붓다의 삶이 녹아난 곳이다. 기원정사 터는 원래 제따왕자의 숲이었다. 수닷타장자가 부처님을 모시기 위하여 땅을 구하던 중 왕자에게 팔기를 원했으나 팔지 않았다. 재차, 삼차 간청했으나 팔 마음이 없어 이 땅을 덮을 만큼 금을 가져오면 주겠다고 했다. 수닷타장자는 자신의 전 재산과 친구의 돈을 빌려 들어오는 길부터 금을 깔기 시작했다. 이를 본 왕자가 감동하여 나머지 땅을 기부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 수많은 유적 터와 야단법석, 승원 터가 있고 여래향실이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아들 라훌라존자의 승원 터도 있다. 여래향실을 향해 잔디밭에 앉았다. 금강경 3회와 반야심경을 독경하고 동진스님의 긴 발원이 있고 난 뒤 30분간 명상에 들었다. 해는 이미 지고 천지는 캄캄하여 앞 사람의 뒤를 따라 조심조심 발자국을 옮겨야 했다.
걱정 마세요, 금방 갑니다
도리천으로 올라가 3개월 만에 하강한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 상카시아로 향했다. 버스로 6시간 달려야 한다는데 “걱정 마세요, 금방 갑니다”라고 싱이 말한다. 졸다깨다 밖을 보니 가도가도 감자밭이다. 수확하는가 하면 심는 곳도 있다. 감자밭을 지나니 삼성, 현대의 간판이 보인다. 인도공과대학(IIT)을 졸업하기도 전에 현지의 LG, 삼성, 현대와 취업을 계약한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자국어처럼 배우고 중고과정에서는 고대언어(산스크리트어)도 배우며 학구열이 대단하여 초등 때부터 구글에 접속하여 공부한다고 한다. 특히 대입 시험은 수학이 중점적이어서 인도공과대학 출신자들이 구글과 IBM,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보다폰 등 글로벌 정보통신 기업의 최고경영자 및 창립자를 배출했다고 싱이 자랑스레 말한다. ‘1, 2, 3’의 숫자도 인도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으나 아라비아인이 유럽에 전하였기 때문에 아라비아 숫자란 이름이 생겼으며, 0의 개념을 찾아 10진법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곳도 인도다. 파이값의 근사치를 구해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는 등 인도는 일찍부터 수학이 발달하였기에 IT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도는 오랜 역사와 문명을 가졌음에도 1611년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위한 동인도회사 설립으로 영국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으로 무력 진압당했으며, 1858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빅토리아여왕에게 통치권을 이양하면서 완전 속국이 되었다. 2차 대전 후 1947년 8월 15일 독립이 되었으니(다음백과 참조) 긴 세월 동안 영국의 지배가 낳은 영어 사용이 아이러니하게도 인도를 하나로 소통하고 묶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종교적인 갈등으로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로 분리되었다.
상카시아에 닿았다. 상카시아는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3개월 만에 내려온 곳이다. 아직 제대로 발굴과 관리가 안 된 채 허물어진 상태다. 올라가는 언덕에는 탑의 잔해가 흙 밖을 삐죽삐죽 나오고 있으며 이미 나온 벽돌은 사방에 흩어져 있다. 주위의 나무에는 흰 스카프가 가지마다 타르초처럼 걸려있다. 종도 매달렸다. 누구나 댕댕 울려보고 마음의 땟국을 벗으라는 뜻인가. 코살라국 카필라성은 멸망하고 조잡한 당집 같은 힌두교의 탑 안에 저들이 모시는 신이 있다. 현재 상카시아에는 석가족 이삼백 명이 모여 사는데 20% 정도가 불교로 개종해 살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 하강한 곳의 의미와 마지막 순례지라 그런지 예불 시간이 더 길고 엄숙하다. 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울기 시작한다. 독경 소리와 어울려 박자를 맞추는 것 같다. 아무 탈 없이 순례 일정을 소화한 데 대한 동진스님의 감사 인사가 있었다. 늘 독경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초기 경전대로 하면 곧 깨달음이 올 것이라고 한다. 언덕 위로 올라갈 때나 내려올 때나 똑같은 자세로 주황색 가사 차림의 스님들이 앉아 염불로 탁발하고 있다. 탁발도 수행의 하나로 부처님 시기에도 있었으니 그 전통을 이어받은 것일까.
여기 아소카 석상 상륜부에는 코끼리가 앉아있다. 그 앞에는 동네 조무래기 천사들 30명쯤 줄지어 앉아 석가모니불을 외치며 손을 벌리고 있다. 우리 버스가 움직이자 지폐를 얻은 그들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숙소에서 룸을 배정받고 들어가니 침대 밑에서 도마뱀이 조르르 나와 반긴다. 깜짝 놀라 너희 집이 아님을 말하고 빗자루로 멀리 내보냈다. 지금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한국 음식을 제공한 현지 요리사 두 명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눈을 감으니 모기떼가 앵앵거린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베개를 양쪽에 세우고 얇은 스카프로 모기장을 쳐서 그 속에 얼굴을 밀어 넣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
길에서 시작하여 길에서 생을 마감한 붓다의 발자취를 따른 11일간의 순례가 끝났다. 길 없는 길을 만들고 길 위에 길을 낸 한 인간의 고뇌와 수행, 그 고행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스치며 한바탕 꿈을 꾼 것 같다. 부처님의 일생은 나무 아래에서 시작하여 나무 아래에서 마치셨다. 룸비니의 무우수 아래에서 태어나시고,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시고, 쿠시나가라의 사라 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셨다. 태자의 몸으로 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벗어던지고 길에서 생을 마친 그는 인간일까, 신일까.
순례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꼈나. 욕망만 가득한 채 살아온 게 보인다. 이제 내 안의 욕망을 그러려니 하고 알아차림을 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매 순간 충실한 삶이 바로 내 인생의 주인임을 어렴풋이 느낀다.(자료는 Banarasi Singh의 도움을 받음)
김덕남 : 2011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조집 『젖꽃판』 『변산바람꽃』 『거울 속 남자』 현대시조100인선 『봄 탓이로다』. 올해의시조집상, 이영도시조문학상 신인상, 오늘의시조시인상 수상 등
- 《문학도시》 202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