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孟子)는 공자가 사망한 뒤 100여 년 뒤인 인물로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킨 대유학자(儒學者)이다. 孟母三遷之敎(맹모삼천지교) 혹은 三遷之敎 孟母斷機(삼천지교 맹모단기)란 말이 있다. 전자는 맹자 어머니가 자식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내용이고, 후자는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하고 짜던 베틀에 있던 비단을 끊었다는 뜻이다. 이는 곧 어미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지혜와 노고를 일컬음을 알 수 있다.
맹자 어머니 장(仉)씨는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가면서도, 어린 맹자를 훌륭하고 반듯하게 키우고자 하는 지극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다 보니 공동묘지 근처로 이사를 하여 살았던 것 같다.
공동묘지 근처에서 장례 치르는 모습을 보고 들은 어린 맹자는 상여꾼들이 상여를 메는 흉내, 무덤을 파고 다시 묻고, 곡하고, 절하기도 하면서 흙을 다지는 달구질의 노래를 흉내 내면서 놀았다. 이 광경을 본 맹자의 어머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자식을 기를 데가 못 된다.” 라고 생각했다.
하는 수 없이 맹자의 어머니는 짐을 정리하여 시장 가까이로 이사했다. 여기서는 가게를 벌여 놓고 장사꾼 흉내를 내며 물건을 사고파는 놀이를 했던 것이다. 맹자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 역시 자식 기를 곳이 아니다.”
이번에는 학교(당시에 서당 수준으로 추정) 옆으로 이사했다. 이곳에 오니 역시 맹자의 노는 형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기서는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는 흉내를 내고, 인사하는 흉내, 謙讓(겸양:겸손한 태도로 남에게 양보하거나 사양함)하는 흉내, 제기를 늘어 놓고 제사 지내는 흉내 등 학생들의 하는 행동을 흉내 냈다. 맹자의 어머니는 이곳으로 이사 온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이곳이야말로 자식을 기를 곳이구나” 라며 그곳에서 정착하여 맹자를 역사적인 인물로 양육하게 되었다.
맹자는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에게, 혹은 자사의 제자에게서 직접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어머니 곁을 떠나 스승을 따라 공부했던 것 같다. 맹자는 학업을 잠시 중지하고 어머니를 뵙고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어머니는 베틀에 앉아 맹자가 오는 것도 잊은 채 열심히 비단을 짜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어머니!”하고 맹자가 부르짖는 소리에 깜짝 놀란 맹자의 어머니는 베틀에 앉은 채로 절하는 아들을 내려다보면서,
“왜 벌써 돌아왔느냐? 학업이 이루어져 돌아온 것이냐?”
맹자는 어머니의 엄숙한 물음에 불안함을 느끼면서 대답했다. “학업이 그렇게 간단히 이루어집니까? 어머님이 뵙고 싶어 돌아왔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배틀(機)에 있던 칼을 들어 짜던 비단을 주저 없이 끊어버렸다. 맹자는 깜짝 놀라 어머니의 손을 붙들며 여쭈었다.
“왜 이러십니까? 제게 무슨 잘못이라도 있습니까?”
어머니는 목소리를 높이며 꾸짖었다.
“네가 학업을 중단하는 것은 마치 내가 짜던 비단을 끊는 것과 같다. 배움을 쌓으면 영예를 가져오고, 견문을 넓히면 생활이 지혜로워진다. 배움을 중단해 버리면 남의 부림을 받아야 하고, 위험에 빠져서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너는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어머니의 말씀에 크게 깨달은 맹자는 그 길로 스승에게 돌아갔다. 맹자는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업에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마침내 존경받는 대학자로서의 명성을 온 천하에 떨쳤으며,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여러분이 다 알고 있는 조선시대 최고의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는 ‘한석봉’의 이야기도 이와 유사하다. 한석봉은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교육으로 뛰어난 명필가가 될 수 있었다. 불을 끄고 자신은 떡을 썰 테니, 아들에게 글을 쓰라고 했던 한석봉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교육 방식은 너무나 준엄하면서도 진솔한 것이었다. 신야자 불과습자지문(神也者 不過習者之門) 즉 신기(神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자주 반복해서 익히는 길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는 한석봉의 어머니의 자식을 가르치는 방식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말이라 여겨진다.
맹자의 어머니와 한석봉의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훈육방식은 특이하면서도 조금 다른 면이 있다면, 맹자의 어머니는 맹자가 보는 앞에서 그야말로 충격을 주는 방법으로 냉정하고 엄하게 자녀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한석봉의 어머니는 자녀의 글 솜씨와 자신의 칼 솜씨를 빗대어 생생하게 현장에서 그려 나가는 모습은 준엄하면서도 깊은 애정이 듬북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공통점은 자녀에 대한 준엄한 사랑이다. 지역 주변의 교육환경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진솔하고 냉엄하면서도 깊은 사랑과 애정이 교육환경을 만들었다고 판단된다. 이 얼마나 위대한가?
이 세상에 자식을 올바로 키우지 싶지 않은 어머니가 있을 까요? 절대 NO일 것이다. 위에서는 교육환경이 중요함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교육환경은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교육환경이 좋은 곳에 사는 아이들이라고, 전부 다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외의 결과도 많다. 여기서 부가하여 교육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았던 사례를 들어 볼까 한다. 오래전에 방송에서 언급했던 사안이기도 하다. 서울에 살면서 자녀가 학교 다니는 길목에는 여관과 술집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고, 엄마는 그런 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지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엄마가 일하는 장소에 나와 엄마의 일을 거들기까지 하였다. 아이들은 그야말로 진흑탕 속에서도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워낸 연꽃처럼 공부도 잘하여 두 명 모두 명문대에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가 방송을 탄 적이 있었다. 주변 환경도 중요하지만, 무엇 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자녀와의 이심전심으로 교감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렇게 함으로써 엄마가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 자녀는 엄마의 고생을 지켜보면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동시에 싹트게 되는 단단한 인연의 고리를 만들어 낸 것이라 보여진다.
우리는 흔히 부모가 말 싸움도 하지 않고 서로 무난하게 사랑스럽게 잘 지내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자녀는 효자가 될 것으로 착각한다. 효자는 慈愛(자애: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도타운 사랑) 로운 가정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가정에서 효자가 나오는가? 노자는 肉親(육친: 부모 형제 같이 혈족관계에 있는 사람)이 화목하지 않을 때 孝(효)가 나온다고 하였다. 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는데 효자가 나올까? 의심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가정에 불화와 위기가 지속되면서도 부모들이 그 환경에 무너지지 않고 잘 극복해 나가는 것을 지켜볼 때에 자녀들의 효행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충신이 나라가 안정될 때에 나오지 않고 전시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온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리라.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이순신 장군, 맥아더 장군 등 수많은 인재가 모두 나라가 매우 혼란한 시기에 출현했다.
혹자는 왜 지금은 이런 휼륭한 사람이 나오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교육방식과 사회적 환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열악한 환경이었다. 지금과 같은 물질 만능시대, 집에 가만히 않아서 세계 각국의 사람들과 이 메일을 통하여 혹은 전화로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거나 교류할 수 있고, 전 세계 상품을 주문하거나 배달할 수 있으며,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음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주문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을 수 있는 완벽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간절하게 이루어야 할 것이 없는 그저 생활하기에 아쉬움이 없는 편안함에도 편안함을 모르는 편안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안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늘 불안한 세상을 살고 있다. 그 이유는 물질과 돈과 명예에 쫓아다니느라 너무나 바쁜 나머지 자신을 잃어버리고 시간에 쫓기는 허망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시대 환경이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보니 어른들과 아이들 사이에 갭이 너무 커서 세대 차이가 많이 난다고 불만이다. 경제성장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점을 감안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런 환경을 이해하면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잘 극복해 나가야 한다. 우리 한국의 어머니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열은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정말 대단하고 엄청나다.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무조건 좋은 대학에 만 보낼려고 하기 보다는 자녀의 적성에 맞고 좋아하여 즐길 수 있는 것을 스스로 찾게끔 하라. 이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자녀가 아직 어린 경우(유치원에서 중학생 정도)에는 자녀와 함께 도서관을 자주 들러라. 자녀가 좋아하는 책을 골라보도록 권유하고, 엄마 자신도 옛 추억을 기억하며 책을 골라서 잠시라도 독서하는 습관을 들여보라. 자녀가 독서에 관심이 없더라도 몇 번을 시도해 보라. 문제는 한 권을 선택하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면 분명 인생에 청신호가 작동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책 속에 들어있는 寶庫(보고)를 접하면서 자신과의 이심전심을 통하여 교류하고, 사유하며, 실천 방안을 찾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면 놀라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독서는 아무 책이나 재미 있는 것을 읽기 보다는 자신을 향상할 수 있고, 내면을 다스릴 수 있는 고전을 읽고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나(자녀)와 함께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도와 주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독서라고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독서를 하다보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과 통찰력이 길러지고 남의 말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慧眼(혜안)이 갖추어진다. 독서는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꾸준히 실천해 나가야 한다. 특히 학문을 터득하는 기술(2-1)을 탐독하고 실천할 수 있기를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독서를 왜 해야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단순히 책읽기만 좋아하는 독서광, 무조건 많이 읽는 것에만 욕심을 내어 나는 일만권을 읽었다 혹은 오천권을 읽었다며 자랑을 일삼고 다니는 사람은 그저 書生(서생:글만 읽어 세상일에 서투른 선비)에 불과하다. 이런 독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배움에 지나지 않는다.
율곡은 독서하는 까닭을 자경문과 격몽요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서 일을 행할 때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자경문). 독서할 때는 글의 의미와 뜻을 깊이 터득하여 글 구절마다 반드시 자기가 실천할 방법을 구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고 입으로만 글을 읽고 마음으로 본받지 않고 몸으로 행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이다. 예를들어, 아는 지식이 매우 많고 의술에 뛰어나 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세상에 나아가 뜻을 펴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독서를 하는 이유는 사리와 도리를 분별하고 일을 적용함에 있어 실천으로 옮길 수 있어야 함이다. 공부를 잘못한 사람은 義(의)가 아닌 삿된 길로 빠져들어 욕망의 노예가 되어 利(이)를 추구하고 利(이)에 끌려다니는 하찮은 존재가 된다. 반대로 올바른 공부를 한 사람은 욕망을 이겨내고, 義(의)를 추구하는 존재가 되어 사람다운 사람 즉 군자의 길을 가게된다. 이런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불의에 굽히지 않고 정의로운 길을 택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이라야 모든 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혜안과 자질이 갖추어져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필자는 가야 할 방향만 제시 했을 뿐이다. 가고 안 가고는 독자제위의 선택에 달려있다. 꼭 한 번 실천해 보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