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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
손병희 |
김연국 |
생몰연대 |
1861~1922 |
1857~1944 |
출생지 |
충청북도 청원군 |
강원도 인제군 남면 무매리 |
학력 |
-정규 교육 -해월(海月)신사에게 수업 |
-숙부로부터 기초학문 습득 -해월(海月)신사에게 수업 |
생활정도 |
비교적 부유한 생활 |
숙부에 의탁하여 생활 |
성격 |
-진보적이며 강건 개혁파 |
-보수적이며 온건 수구파 |
동학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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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입문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시에 교도 대표로 참여 -농민전쟁 당시 두령으로 참가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北接統領)으로 공주 전투에 참가) -동학(東學)의 재정 전담 -1897년 자진하여 제3대 교주가 됨 -1901년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나, 후진 양성을 위하여 일본유학을 지원 -귀국하여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대도주가 됨 -독립운동과 함께 학교교육에 전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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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입문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시에 청수(廳首)로 참여 -농민전쟁 당시 대도소장(大都所長)으로 참가 -해월(海月)의 참모로 최 측근에서 보좌 -해월(海月)의 가사(家事) 전담 -국내에서 피신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종신형에 처함 -일진회(一進會)의 도움으로 석방됨
-1907손병희의 뒤를 이어 대도주가 되었으나, 갈등관계로 이듬해 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로 취임 -1912년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를 조직 -1925년 충청남도 계룡산에 들어가 신도안에 새로운 종파를 세워 상제교(上帝敎)라 칭하고, 스스로 교주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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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海月)과의 관계 |
-매제(妹弟)간. 손 위 처남 |
-사위. 첫째 부인(海月의 庶女) |
5.김연국(金演局)의 의식(意識)
김연국(金演局)선생은 1873년 동학(東學)에 입문(入門)한 후 해월(海月)신사의 총애를 받아, 신사의 서녀(庶女)와 혼인을 하고, 1896년에는 신사로부터 전발심법(傳鉢心法)을 받아 종통(宗統)전승을 하였으나 1898년 신사께서 관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하자 김선생은 자연히 동학(東學)의 수령으로 지목되어 피신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0년 6월 2일 공주(公州) 무성산(武盛山)에서 해월(海月)신사의 향례(享禮)를 거행하던 중 관헌에 체포되어 4년간 옥살이를 하다가 1904년 12월에 석방되었다. 그 후 손병희(孫秉熙)선생과 다시 손잡고 의논을 거쳐 1905년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기도 하였으나 뜻이 서로 맞지 않아 이용구(李容九)가 창도(創道)한 시천교(侍天敎)에 들어가 대례사(大禮師)가 되었다. 그러나 이용구가 죽은 뒤 송병준(宋秉俊)· 박형채(朴衡采) 등이 교권(敎勸)을 마음대로 좌우하게 되므로 여기서 다시 탈퇴하여 1913년 서울 가희동에 시천교총부(侍天敎總部)를 세웠다.
선생께서는 1920년 김두한(金斗漢)· 정창신(鄭昌晨)· 유인영(柳仁榮)· 등을 충청남도 계룡산 신도안〔新都內〕으로 보내 장차 시천교(侍天敎)의 본부를 이곳으로 옮길 준비를 시켰다. 그리하여 1921년에는 용동리(龍洞里)에 대본원(大本院)을 건립하였고 1922년에는 석계리(石溪里)에 본 교당을 건립하였다. 4년여의 준비작업 끝에 2천여 명의 신도들을 이끌고 1925년 6월에 계룡산으로 이전하여 교명을 상제교(上帝敎)로 바꾸었다. 그 뒤 활발한 경제활동 교육활동 사회사업을 전개했다. 신도안 일대의 토지가 대부분 본교 소유였으며 10정보나 되는 상전(桑田)을 경영하기도하고, 신도초등학교의 전신인 신도유신학교를 세워 교육에도 종사했다. 자성보양원(自省保養院)이라는 자선기관과 수예원(手藝院)이라는 인재양성 기관도 운영했다. 이같이 다양한 활동을 하다가 1944년 8월 7일 신도안에서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운 상제교(上帝敎:일명 天進敎)의 신앙의 대상은 한울님(上帝, 天主)이다. 수운(水雲)· 해월(海月)· 구암(龜菴)을 삼성인(三聖人)이라 하여 한울님의 화신으로 신봉 한다. 천단(天壇)을 설치하여 여기에 제세주(濟世主) 최수운(崔水雲) 대신사(大神師)· 최해월(崔海月) 대법사(大法師)· 김구암(金龜菴)선생의 영정을 안치하고 있다. 제세주(濟世主)는 무궁무극(無窮無極)하고 지령지성(至靈至聖)한 천령(天靈)으로 지기지령(至氣至靈)의 조화권능(造化權能)을 수출(首出)하여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세상에 널리 펼 책임을 가졌으며, 대법사(大法師)는 선사(先師)의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대도의 종통(宗統)을 계승하고 본교의 모든 것을 주재하며 교주의 위(位)를 갖는다. 이 삼성(三聖)이 각기 역할을 분담하면서도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상제교(上帝敎)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상제교(上帝敎)의 근본교리와 우주관(宇宙觀)이나 인간관(人間觀) 등이 대체적으로 천도교(天道敎)의 사상과 이념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천하만물(天下萬物)이 한울림의 기운으로 화생하니 뭇 생령이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無非侍天). 사람과 한울의 이치를 따로 찾을 수 없고(天人一理), 사람 외에 하늘이 없으며(人外無天), 한울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天外無人). 몸과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한울님의 기운으로 영육혼연일체(靈肉渾然一體) 속에 이루어진 것이라 사람이 곧 한울인 것이다(人是天). 그러므로 그동안의 종교에서와 같이 관념적(觀念的)· 미신적(迷信的) 신앙을 할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발견 할 수 있는 우리 인간을 믿고 사랑하고 아낌으로써(事人如天) 공익을 실현하는 지상천국 건설을 목적과 이상으로 한다. 사후(死後)의 천당이나 극락을 꿈꾸며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을 지양하고 스스로 윤리적 도리를 자율적으로 행하여 상부상조(相扶相助)· 동아수명(同我壽命)· 동아복락(同我福樂)· 할 것을 큰 이상(理想)으로 한다. 즉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하여 민족 계급 귀천(貴賤) 등 일체 차별을 타파하고 현세를 성세화(聖世化)함으로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제세주(濟世主) 최제우(崔濟愚)대선사의 ‘시천주(侍天主)’라는 신관(神觀)에서 비롯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이나 『용담유사(龍潭遺詞)』에는 두 가지 신앙대상에 대한 명칭이 ‘천주(天主)’와 ‘하느님(한울림)’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수운(水雲)대선사께서 순도(殉道)하기 전에 천주(天主)와 하느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규정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시천주(侍天主)’에 대한 두 가지의 해석을 단서로 살펴보아야 한다. 두 가지의 해석이란 즉 하나는 하느님은 초월자(超越者)이나 부모님 같이 섬길 수 있는 인격적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고, 다른 하나는 사람은 누구나 나면서부터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어서, 곧 하느님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함과 동시에 인간밖에 존재하는 초월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점이 수운(水雲)대선사의 신관(神觀)이라 하는 점에서 대선사의 신관(神觀)은 무속적인 원천(源泉)에 근간(根幹)을 두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상제교(上帝敎)의 교리(敎理)는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음으로 사람이 곧 한울이라, 사람 섬기기를 한울 섬기듯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세를 성세화(聖世化)함으로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 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그런 면에서 무속적인 신앙에서 현실주의적 신앙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다. 그러나 종통(宗統)은 역시 동학(東學) 사상인 ‘시천주(侍天主)’에서 비롯함으로 천도교(天道敎)의 교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김연국(金演局)선생은 결국 동학(東學)사상으로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꾀하고자 하는데 전념한 것이다. 그리하여 평생을 쫓기는 몸이면서도 교역자(敎役者)로서의 길을 버리지 못하고, 그 길을 스스로 택했던 것이다.
손병희(孫秉熙)선생과 결별한 이유도 종교적인 활동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치우치는 행태에서 비롯되었으며, 시천교(侍天敎)에서 출교(出敎)할 때도 역시 송병준(宋秉俊)이나 박형채(朴衡采)등이 다분히 정치적 목적으로 교권(敎權)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김선생이 추구하는 동학(東學)정신을 지키기 위한 종교 지향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김선생을 친일세력(親日勢力)으로 매도(罵倒)하는가 하면 개인의 부(富)나 챙기는 부도덕한 종교인으로 폄하(貶下)하고 있다.
김연국(金演局)선생이 친일세력(親日勢力)이었다면 왜 일경(日警)으로부터 심한 감시를 당하며, 평생을 은둔(隱遁)자로 쫒기며 살아야만 했을까? 선생의 말년에 있었던 일경(日警)의 감시 활동이 어떠했는지 그의 후손인 명기(明起)씨의 증언(證言)을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돌아가실 때는 일본순사들이 집을 에워싼 상태에서 자손대표, 할아버지 한 분, 손자 하나 교인 대표 한 명만 불러 임종하시면서 말씀하신 것은 밖에 나가서 발설하시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교인들을 전부 격리시키고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그 내용은 못 들었지요. 신도안에서 서울을 가려면 두계역으로 8km를 나가야 해요. 두계 파출소가 있는데 우리 집을 지키기 위해서 신도안에다 지소를 하나 세워놓고 아침마다 출근해서 지키고 있다가 서울에 출타를 하면 두계역까지 따라 나온대요. 기차 타신 것을 보려고. 서울역에 딱 내리면 거기서 또 일본형사가 따라 붙는데요. 이렇게 요시찰 인물로 평생을 사신 거요.
그뿐만이 아니다.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日帝侵略下韓國36年史)』에 기록된 자료를 보면 1921년 9월9일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대한민족대표단명단(大韓民族代表團名單)에 혈성단(血誠團)의 일원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동년 11월 19일자 독립신문(獨立新聞) 1면에는 시천교(侍天敎)대표로 명단에 올라있다. 이 두 자료를 보더라도 김선생은 친일파(親日派)인 이용구(李容九)나 송병준(宋秉俊)등과 뜻을 같이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천교(侍天敎)대표직에 있으면서도 혈성단(血誠團)의 일원으로 대표단 명단에 올라있음을 알 수가 있고, 이보다 앞서 같은 해 7월 9일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慶尙北道高等警察要史) 조선총독부편 조선의 유사종교(朝鮮總督府編朝鮮의 類似宗敎)에 <이달 중에 金派侍天敎를 分設한 金演局>의 내용을 보면
이달 중에 金派侍天敎를 分設한 金演局은 종래 侍天敎가 一進會의 後身으로써 政治的色彩가 있고 또 賣國奴 등의 評이 있어 布敎上世人의 誤解를 避하기 위하여 上帝敎라 改稱하고 京城 堅志洞에서 忠淸南道 論山郡 豆磨面에 本部를 移轉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 예문(例文)에서 ‘정치적 색채가 있고, 또 매국노(賣國奴) 등의 평이 있어 포교(布敎)상 세인(世人)의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상제교(上帝敎)라 개칭하였다고는 하나, 당시에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유사종교(類似宗敎)단체가 생겨남으로, 정부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이를 승인(承認)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 한다면, 시천교(侍天敎)가 지향하는 것이 종교적이기 보다는 오히려 친일(親日) 지향적이기 때문에 분파(分派)하였다는 점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또 개인의 부(富)나 챙기는 부도덕한 종교인으로 보는 것도 그렇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신도안에 상제교(上帝敎)를 세우고 나서 경제(經濟)와 교육사업(敎育事業)에 힘쓰면서 상제교(上帝敎)의 재정(財政)이 급격히 확충되어 신도안 일대의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고, 10여 정보의 상전(桑田)을 경영하기도 하였다고는 하나, 이는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두가 본교(本敎)의 소유였다. 그리고 개인의 부(富)를 챙겼다면 교육 사업은 무슨 목적으로 전개했을까? 하는 점에서 선생을 친일세력이나 부도덕한 종교인으로 단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를 반증(反證)이라도 하듯 장병길(張秉吉)씨는 <계룡산하의 신앙>이란 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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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계룡산 신도안을 중심으로 한 신앙과 풍수도참이 대단히 성행했으나, 대한제국 말기까지 이 신도안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못했다. 누구든지 이곳에 들어와 득세하는 기미만 보이면 〈정감록〉을 꿈꾼다 하여 관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도안은 일반인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으로서 대부분의 토지가 황무지로 남아 있었다. 신도안이 집단적 거주지가 된 것은 1924년 동학 계통의 신종교인 상제교(上帝敎) 교주 김연국(金演局)이 황해도·평안도의 신도 2,000여 명을 이끌고 이주해온 이후부터였다. 상제교는 갑오농민전쟁 당시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북접(北接)의 간부로 활약했던 김연국이 손병희의 천도교에서 분립하여 시천교(侍天敎)를 창립했다가 1924년 새롭게 개정한 명칭이다. 그 당시의 인구자료를 보면, 신도안에는 1918년 이전에는 584호에 2,667명이 살았으나, 김연국이 본격적인 이주 준비를 한 1921년에는 1,428호에 6,275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상제교는 천도교와 결별한 김연국에 의해 주도되면서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중지할 것을 표방하고 신도안으로 이주해왔다. 따라서 김연국은 계룡산과 신도안이 갖고 있는 정치·혁명적 함의(含意)를 배제하기 위해 애썼으며, 신도안을 새로운 국가의 서울이 아니라 종교의 서울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 혁명적 성격의 탈색은 이후 이곳에 자리 잡은 많은 신종교나 민간신앙 단체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이곳에 자리 잡은 단체들은 모두 현실사회의 부정과 십승지지로의 피난 및 은둔, 그리고 후천선경(後天仙境)의 도래를 확신하면서도 이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탈정치화의 특성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
라고 적고 있다.
김연국(金演局)선생은 태어나던 해에 부친이 사망하여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야 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모친마저 잃게 되자 숙부인 병내(秉鼐)씨 집에 의탁하여 살다가 동학(東學)에 입문한 인물이다. 동학(東學)에 입문한 대부분의 교도(敎徒)들이 그렇듯이 집안이 어렵거나,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서민층이었기 때문에 사사로이 부(富)나 챙기었다면 과연 포교(布敎)가 가능했으며, 교도(敎徒)들이 스스로 따랐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임으로 이를 잘 아는 김선생은 교도(敎徒)들에게 무리하게 강요할 수 없었다는 점을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동학(東學)당시에 각종 의식행사나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간행비용 등을 교도(敎徒)들이 스스로 부담하고. 천도교(天道敎)에서 시행한 성미법(誠米法)제도에 따른 것도 오로지 교도(敎徒)들의 자의적이었듯이 상제교(上帝敎)의 재정(財政) 또한 순전히 교도(敎徒)들의 자율적인 참여에서 이루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이제 김연국(金演局)선생에 대하여 친일세력이라거나 비도덕적 종교인이라고 폄하(貶下)하기보다는 동학(東學)의 제3대 지도자로서의 김선생은 종교적인 면에서 실로 새롭게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6.김연국의 연보
1세(1857년):강원도 인제군 남면 신월리 에서 출생(2월13일).
부친 사망(4월27일)
4세(1861년):숙부 집에 의탁(인제군 남면 무의매리)
15세(1872년):해월(海月)신사의 제자가 되어 항시 곁에서 보좌함
19세(1876년):모친 사망(4월27일)
26세(1883년):동학교단의 핵심적 인물이 됨
36세(1893년):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때 청수(廳首)로 참가
해월(海月)신사로부터 구암(龜菴)이란 도호(道號)를 받 음
37세(1894년):제2차 동학농민 봉기 때 대도소장(大都所將)으로 참가
44세(1900년):강원도 양구군(楊口郡) 사명산(四明山)아래로 이사
45세(1901년):이민직(李敏稷)에 이하여 피착(被捉) 종신형을 받고 경성 감옥에 수감
48세(1905년):일진회(一進會)의 도움으로 석방
손병희 선생과 함께 천도교(天道敎) 창도(創道)
49세(1906년):천도교(天道敎) 대도주(大道主) 승계(12월 일)
50세(1907년):시천교(侍天敎)의 대례사(大禮師)로 취임
56세(1913년):시천교총부(侍天敎摠部) 조직
68세(1925년):충남 계룡산으로 이거(移居). 상제교(上帝敎)를 세우고, 교주(敎主)가 됨
87세(1944년):8월7일 지병으로 사망.
7.문을 닫으며
김연국(金演局)선생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동학(東學)이나, 천도교(天道敎)의 교리(敎理)에 대한 상식이 전혀 없는데다,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없는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일부 자료에만 국한하여 살폈음으로 다소 불충분한 마음 없지 않으며, 지나치게 편견(偏見)은 없었는가 자문(自問)도 해본다. 그러나 인제지역의 동학(東學)운동하면이제까지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 곳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정선(旌旋)이나 영월(寧越)과 더불어 강원도 동학(東學)활동의 거점지역 이였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관련 인물들도 김연국(金演局)선생을 비롯하여 김계원(金桂元)· 김병내(金秉鼐)· 김연순(金演順)· 김연순(金演淳)· 김현수(金顯洙)· 장춘보(張春甫)· 이명수(李明秀)· 최영서(崔永瑞)· 허찬(許燦)· 김연호(金演鎬)· 김현경(金顯卿)· 김윤경(金允卿)등을 알게 된 것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따라서 기회가 되면 인제지역의 동학활동과 관련인물들에 대해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보기로 하고, 아쉬운 대로 문을 닫고자 한다.
<參考資料>
『大先生 事蹟』
『海月先生文集』
『上帝敎歷史』
『시천교종역사』
『崔先生文集道源書記』
『天道敎敎會史草稿』
『韓國獨立運動사』자료2(臨政編)
『日帝侵略下36年史』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江原道麟蹄地域崔時亨의行蹟과東學記念物』연세대학교교육대학원 한승봉의 석사학위논문
『麟蹄郡史』
『東學史』
『天道敎創建史』
<계룡산하의 신앙>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http://members.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1g3365a>[2011. 2. 18자 기사]
김성철.웹문서에서인용
.www.wth.or.kr/dictionary/dic_view.asp?lm=word&n=4535&ok=1&om=0&...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대단하십니다. 잘 읽었습니다.
혹시 호를 '귀암'이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귀암으로 읽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 문제에 대해선 더 공부를해야겠군요.
거북이라는 뜻이라면 '귀'로 읽어야 합니다.
'거북 귀'자는 거의 귀로 읽어야 하는 것을 요즘은 '구'로 읽는데 이는 '귀감'이라는 단어를 상고하면 오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