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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以獨立 독후감”
제출자: 구연도<부산남지방 시온중앙교회 원로장로/010 2992 5637>
Ⅰ. 독서 후의 감사와 아쉬움
출이독립,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책 제목이다. “함께 읽는 독립운동가 신석구”(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보존위원회 기획, 이덕주 지음)라는 제목과 지은이 이름을 다 읽어야 이해가 되는 단어이다. 이번에 ‘출이독립’이 발간되어 독후감을 쓰라는 우리교회 담임자이신 김진흥 감독님의 말씀을 듣고, 존경하고 있던 3・1절 독립운동대표 신석구 목사에 대한 책을 탐독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감사한다. 나는 KBS대구방송총국으로 발령이 나 1987년 6월부터 약 3년간 대구제일교회(당시 김재황 감독 시무)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신석구 목사님의 손자로 몇 년 전 작고하신 고 신성균 장로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였었다. 신성균 장로님은 할아버지이신 신석구 목사의 자료 수집과 보존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분이셨는데 안타깝게도 그때 나는 신석구 목사님에 대하여 깊이 알 수 있는 그 기회를 놓쳐버렸었다. 이번에 출간된 ‘출이독립’을 읽으면서 새삼 그때의 좋은 기회를 놓친 일이 몹시 후회가 된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내가 후회하는 것은 ‘출이독립’을 읽으면서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정말 나에게는 큰 손실이다. 지금도 이렇게 훌륭한 분을 알 기회를 놓치고 있어서 나처럼 후회할 분들에게 나는 ‘이 책 ’출이독립‘을 읽으라고 꼭 권면하는 바이다. 내가 ’출이독립‘을 읽으며 안타까워한 다른 한 가지는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신석구 목사님을 읽으면 찾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이유에서다.
현재 기독교가 직면해 있는 전도의 어려움에 대하여, 가끔 장로님들과 만날 때 토론을 해 본적이 있다. 장∙감∙성 교파를 초월하여 모든 대형교회의 목회 세습과 교회가 교회 자신들만을 위한 바벨탑을 쌓는 모습들을 보여주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도리어 교회를 걱정하게 된 것이라는 말을 주로 많이 한다, 그러나 제대로 된 토론은 하지 못하고 서로 중구난방으로 자기 말들만 말하다가 ‘너나 잘 하세요.’하고 끝을 맺었었다. 이런 때에 신석구 목사님의 일대기 “출이독립”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를 깨닫게 하고 반성하게 하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II. 개종 과정 이야기에서
이 부분은 조금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자료의 한계가 있었겠지만 이전에 출판된 관련 서적들에서 아는 이야기들이었고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새로운 내용이 없긴 했지만 개종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보다 많이 알려주려 한 저자의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유교 집안에서 자라던 신목사님은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이셨다. 그는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느냐를 깊이 생각한 끝에 결심을 굳혔다. 이미 우리에게는 불교라는 종교가 있고 그때까지 인생의 도리를 가르쳐주는 유교가 있었지만 그 긴 세월 동안 이들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였고 외세에 꼼짝 못하는 나라가 되게 한 것이 아니냐? 하지만 기독교를 신봉하는 나라들은 모두 선진 국가를 이루고 있는 것만 봐도 나라의 미래를 여는데 기독교는 큰 도움을 주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사회적 상황은 1897년 5월8일 경기도 고양읍 교회, 1898년 5월 개성교회 등이 설립되고 있었고, 1907년 한국교회의 부흥운동과 평양 성령 대부흥운동 등을 통하여 도박과 사기, 간음과 강간, 횡령과 절도에 대한 죄를 고백하는 등 나라와 민족을 갱신하는 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유교가 지배하는 봉건적 윤리와 다른 근대적 윤리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 즈음에 먼저 기독교인이 된 김진우와의 만남은 목사님이 개종을 결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하나님은 나라와 자신을 위한 목사님의 고민과 당시의 시대상황, 돕는 사람 등을 통하여 일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이리라.
1907년7월14일, 신석구는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기 위해” 개종을 결심하고 처음으로 고랑포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주일예배를 드리고 돌아온 그날 밤 그는 엎드려 기도하면서 “7세 이후 33세까지 기억되는 모든 죄를 고하고” 회개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과 밤에도 같은 기도를 드렸다. 세 번째 같은 내용으로 기도하려는데 돌연 “하나님이 왜 귀가 어두우시냐? 한번만 고하여도 다 사하셨을 것인데, 세 번까지 기도할 것이 무엇이냐?” 라는 음성을 들었다. 신비로운 음성을 들은 후 목사님은 과거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며 목사님은 남다르게 철저한 사색과 결단, 그리고 특별한 은혜 체험으로 확신이 있는 신앙생활을 시작하시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진지한 고민과 자신의 모든 것을 건 결단, 은혜 체험 등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한다. 목사님의 개종과정에 비추어 보며 내 믿음도 정리할 수 있었다.
III. 개종 직후 받은 시련과 정춘수와의 만남 이야기에서
신석구 목사님은 개종 8개월 만인 1908년3월29일 주일, 개성남부교회에서 왓슨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분의 나이 34세이었다. 그해 먼저 신학을 하고 있던 정춘수의 적극적인 권면을 받고 4월부터 감리교 협성성경학원에 입학하였다. 당시 이 학교는 1911년 서울 냉천동에 교사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농한기에 2~3달씩 서울과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옮겨 다니며 수업을 하였는데, 신석구 목사님은 잦은 이동에 대한 부담과 가난한 생활로 신학교 과정을 제때 이수할 수 없어 입학 14년 만인 1922년, 48세에야 신학교를 졸업하였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신학생 시절의 목사님은 1908년7월5일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교회 일을 시작하였고 그해 12월6일 주일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남부교회 전도사로 있던 홍종숙의 소개로 북부교회의 크램 선교사를 만나 면담 후 1909년2월1일부터 북부교회에서 전도인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5월19일 홍천에서 개최된 구역회에서 정식으로 권사 직첩을 받았다.(권사는 평신도 직급이기는 하지만 설교권이 주어지는 ‘준 목회자’로 목사나 선교사가 없을 때 권사가 예배를 인도할 수 있다.) 그해 전도인으로 정식 파송을 받을 수 있었는데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되는 은행 부채 60원이 있음을 고백하는 바람에 파송을 받지 못하였다. 그 일에서도 목사님은 밝힐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였지만 기도하는 중에 잘못을 숨기고 거룩한 성직을 맡는 것은 맞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고 불이익을 감수하였다는 말씀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나라면 어찌하였을까? 쉽게 답을 하지 못하였지만 나도 그 길을 따르리라는 결심을 한다.
IV. 출이독립(出以獨立)
이 부분은 내년이 삼일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은 내용이었다. 이 책을 본부에서 출판한 것도 같은 이유라고 판단된다. 좋은 의도라 생각하며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삼일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에 임하면 좋을 것이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던 신석구 목사님은 친구 오화영의 권고로 3・1운동 민족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평소의 그 성품대로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목사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기독교인이 신조가 다른 천도교인, 불교인과 연합하여 일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제목으로 기도부터 하였다. 기도 중에, ‘수천 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빼앗긴 것도 큰 죄인데 이제 찾을 기회가 와서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닌가?’라는 음성을 듣고서야 결심하고 참여하였으며, 그렇게 기도 응답을 받은 후에 참여하였기에 변절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 모든 독자들의 마음에 큰 감동을 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도 각종 정치에 참여하는 목회자들이 각 종파들마다 많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사리사욕에 휩싸여 데모하는 군중에 참여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쉽게 볼 수가 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분들이 신석구 목사님처럼 먼저 간절히 기도하고 그것이 옳다고 하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다. 신석구 목사님에게 있어서 3・1 운동 지도자로 참여하는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나는 독립을 거두러 가는 것이 아니고 심으러 간다.”는 정치적 결단이었기도 하지만,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말씀을 기억하며 ‘죽기 위해’ 운동에 참여한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였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도 신석구 목사님의 그 자세에 100% 지지를 보내며 모든 성도들이 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그날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어 역사적 진실을 아는 데도 많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날 3월1일 오후 2시가 되어 한용운이 일어나 모임의 취지를 말하고 만세 삼창을 하려는 순간 경찰들이 들이 닥쳐 식이 중단되고 참석자 전원은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었다. 이후 선언서에 서명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심문이 있고 난 뒤 다시 이 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묻는 질문의 답변에서 목사님의 생각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문 : 어떠한 일로 독립을 하려고 하는가?
답 : 선언서와 같다.(이하 생략)
이 심문과정에서 우리가 잘 봐야 할 점은 기독교인으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마 5:44)에 근거하여 일본을 미워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독립을 추구하겠다는 의지 또한 버릴 수 없다고 한 목사님의 대답이다. 5월5일 경성지방법원 재판관 앞에서도 신석구 목사님의 입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한일합병에 반대한다고 하였으며, “조선은 4천년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다른 나라에 병합되는 것은 누구든지 싫어한다.” “병합한 후 조선은 식민지가 되었고, 조선 사람은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조선 사람들에게 행복이 올 리가 없다.” “우리는 독립을 원하고 언젠가는 독립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당시 재판을 취재한 동아일보에 활자로 남아 있는 사실이다.
이는 온 성도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되 특히 목회자들은 본 받아야 할 것이다.
근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있어 새벽기도회에 나가는 김해제일성결교회의 ‘Let's Change 새성전입당 및 창립91주년기념 부흥성회’에서 강사로 오신 송기성 목사님(정동제일교회담임)dml “변질되지 말고 변화되자!”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 현재 우리 국민 모두가 변질되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종교지도자들마저 변질되고 있는 것 같아 너무 너무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감리교 목회자들과 핑신도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신석구 목사님은 재판 과정에서 검사뿐 아니라 재판장과 논쟁을 벌이며 “기회가 주어지면 계속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출이독립 의지를 굽히지 아니하였음을, 즉 ‘변질’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시작할 때와 달리 중간에 변절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끝까지 변질되지 않았던 신석구 목사님은 지금까지도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V. 신석구의 옥중 서신과 파송기 낭독
신석구 목사님이 감옥생활을 하며 남긴 옥중서신은 그가 변질되지 않았고, 나아가 감옥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은혜의 자리로 만든 것을 보여준다. 유학을 한 분 답게 한시로 표현된 목사님의 신앙은 세습과 자리다툼으로 인한 재판으로 혼란한 오늘의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삼일독립운동 후 3년 징역형을 언도 받고 2년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은 공덕동에 있던 경성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그때 서신을 통해 전달된 목사님의 한시가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다음은 감옥에서 성탄절을 맞으며 희년이 멀지 않다는 소망과 감옥에까지 은혜의 기운이 가득함을 느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시다. 이 시는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불평하는 나 자신을 부끄럽게 하였다.
“救主降千歲(구주강천세)/ 구주가 강림하셨네 // 萬邦感頌恩(만방감송은)/ 만방에 찬송 가득해 // 喜年如不遠(희년여불원)/ 희년이 멀지 않으니 // 和氣滿乾坤(화기만건곤)/ 천지에 화기 가득해”
결단을 하고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지만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흔들리고 방황했던 나를 부드러운 손길로 잡고 격려하는 듯 하는 목사님을 느끼게 하는 시도 있었다. 결코 쉽지 않은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마음의 자유와 평안을 지키신 그 모습에 큰 감동을 주는 시다.
“兩人對坐一燈斜(양인대좌일등사)/ 희미한 등불 아래 둘이 마주 않아서 // 談說經書勝看花(담설경서승간화)/ 성경 말씀을 나누며 꽃을 즐기네 // 愛意見讎如故友(애의견수여고우)/ 원수라도 옛 친구처럼 대하라는 그 말씀에 // 安心處獄似吾家(안심처옥사오가) / 감옥이라도 내 집 같아 안심이 되네 // 淸凉氣味風生竹(청량기미풍생죽) / 상쾌한 바람 불어 대나무 키우듯 // 淡泊精神月映沙(담박정신월영사) / 담박한 마음은 모래 위에 비친 달 빛 같구나 // 夜久門庭山共寂(야구문정산공적) / 밤은 깊어 문과 뜰과 산이 고요하니 // 此身忘却在京華(차신망각재경화) / 내 몸이 번잡한 서울에 있음도 잊었도다”
옥중서신과 함께 신석구 목사님의 신앙 면면을 잘 보여주는 다른 한 가지는 ‘십자가 신앙’이다. ‘십자가’는 신석구 목사의 신앙과 삶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다. 1909년 화장사 산기도를 하던 중 ‘십자가 보혈’이 그의 머리에 떨어지는 환상을 체험한 순간 중생을 체험하였고, 그 후엔 목회와 가정생활에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십자가 은총’이 그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었다. 2년에 한 번꼴로 이삿짐을 싸는 ‘파송 목회’의 과정에서도 십자가는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 환갑이 넘어서도 여전히 ‘빈곤’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여 은퇴 후 살 집 때문에 불안해하던 중, 어느 날 새벽에 “내가 네게 좋은 집을 주지 아니하고 내가 지던 십자가를 주었다.”는 음성을 듣고 감격하기도 하였다. “목회 투신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다른 사람은 십자가를 괴로운 것으로 알지 모르나 나에게는 영광의 십자가이다”라는 목사님의 고백은 그의 신앙 핵심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말씀인가? 이런 음성을 듣고,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우리 주위에는 ‘변질자, 배신자’가 많고, 그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주님, 저희들도 변질되지 말고, 변화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책을 읽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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