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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대한제국 역사관)
1876.2.2.
구한 말, 시골 양반이
기녀와 술 마시는 모습.
개다리소반 위에.,양주병.
유사길(惟斯吉·위스키),
발란덕(撥蘭德·브랜디),
상백윤(上伯允·샴페인),
두송자주(杜松子酒·진),
당주(糖酒·럼)….
1876년 개항과 함께
이땅에 들어왔던 양주.
서양 술의 한자 표기명들.
1894년 겨울 청일전쟁 중 조선을
샅샅이 누비었던 영국 여성.,'비숍'
"프랑스풍 시계, 독일식 거울과 함께
양주(洋酒)에 대한 기호가 젊은 양반
자제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꼬집었다.
나라를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청년
양반층이 외국산 박래품(舶來品)으로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데 급급.
개화기 식민지를 거쳐 광복과 함께
모두가 '양반' 시민사회가 되었지만
사회적 신분 척도는 여전히., 겉 꾸밈.
신분 수직상승을 자축 또는 꿈꾸면서
자신의 욕망을 담아 위스키를 들이켰다.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도라지 위스키'는
입에 풀칠조차 어렵던
1950/60년대 미군 매점(PX)
위스키를 마실 형편이 안 되는
대중의 과시욕을 달래 준.,대체품.
소주 주정(酒精)에
색소와 위스키향 첨가.
위스키 원액(原液)은
단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 술은 위스키 이름 만으로
한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파트 평수와 자동차 배기량이
그 사람이 일구어놓은 성공의 크기.
1970년대 위스키는 출세지향주의자
꿈을 쫓는 이에게 바라는 사회적 지위를
얻은듯 위안을 주는 마취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추세와 갈망에
비례한 위스키 원액 함량
20%(1977년),
30%(1978년),
100%(1984년)
진화하며 고급화
2002년 우리나라는
소득이 두 배 이상인
일본을 제치고 위스키
수입액에서 세계 제4위.
2011년에는 17년산
이상인 고급 위스키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
'위스키 공화국'에 등극했다.
마시는 양주 주령(酒齡)을
자기 자신 신분의 척도로 삼는
천박함이 낳은 서글픈 현실이다.
1885년 독립문 & 정동 거리
1885년 정동.,'러시아 영사관
개화기.,러시아 공사관 정동시대
대한제국 최초 커피 전문점
.
한희순 상궁(1972년 별세)은
조선 마지막 주방장 최고상궁으로
1964년까지 순정효황후(1966년 승하)께
음식을 올리신 분이며, 삼축당 김씨는 고종의
아홉 번째 후궁이자 마지막 후궁으로 1970년 별세.
구한 말, 개화기.,'자전거~전차~배오개(광장)시장.
.
.
.......목차.......
구한 말, 개화기.
구한 말, 사진 모음
개화기., 자전거
개화기., 전차
배오개(광장)시장
.......................
구한 말, 개화기.
개화기 '대한제국의 황궁' 덕수궁.
원래, 덕수궁 터는 월산대군의 집터.
임진왜란 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 "경운궁".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며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덕수궁(德壽宮)".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이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 제12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개화기는 1876년(고종13년)
강화도조약 체결 후, 1945년 8.15 해방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인 시기를 말한다.
1886년 궁궐에 전기가 들어와
고종 집무실에 전등이 밝힌 뒤
호롱불과 램프에 의존하던 백성도
도깨비불(전등)이 점차 보급되기 시작.
1887년 경복궁에 처음 전기가 들어와
궁궐의 밤을 환하게 밝혔는데 백성들은
물불을 구경하려 궁궐 담으로 몰려들었다.
경복궁의 전기는 경복궁 향원정 연못가에
간이 발전소를 건설하여 사용해 일명.,"물불."
연못의 물을 끌어올려 발전기를 돌려 켠.,물불.
그러나, 발전기 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아
궐내 사람들이 짜증냈고 잦은 고장으로 인해
수리비가 많이 들기에 "건달불"이라고도 불렀다.
종로거리는 가로등이 켜져 밤길이 환해졌지만
전기를 사용할 수 없는 거리에서는.,석유 가로등.
석유 가로등 설치는 독립신문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세계 여러 나라 수도는 가로등이 환한데
조선 만 밤거리가 어둡다고 지적한 때문.
서양문물 가운데 백성들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전차.
1899년 한성거리에 괴물체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크고 네모난 상자' 괴물.
"앞에서 소나 말이
끌어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달리는 거야?"
"저거봐 시커먼 줄에
매달려 가잖아. 신기해."
한성 거리에는 처음 보는 전차를
구경하려 백성들이 구름처럼 운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차에 치여 사람이 죽었다.
“전차가 사람을 죽였다!”
“저 괴물이 사람잡는 요물,
사람들은 전차로 달려가, 불지르고
두들겨 부수기도 했고 또 한편에서는
전차 다니는 철길 위에 무당을 불러 굿.
지금으로는 이해할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1902년 3월 20일, 서울 인천 사이를 잇는 전화 개통
일반 국민들도 사용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공중전화.
전화기 ‘덕률풍’은 ‘텔레폰’과 비슷한 한자음을 붙인 것.
‘덕률풍’ 이외에도 비슷한 발음 ‘다리풍’,
혹은 말을 전하는 기계라는 뜻의 ‘전어기’,
‘어화통’ 등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전화기 표기법이 통일되지 못한 이유는
전화가 다른 나라에서도 들여온 것인 만큼
그 나라의 표기법에 차용해서 불렀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화 사용은 을미사변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등 여러 사회적 격변기를 겪으면서
그당시 그당시마다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전화가 들어온 것은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간
유학생 ‘상운’에 의해 도입되면서부터이다.
1884년 정식으로 도입된 전화는
임오군란, 갑오개혁, 을미사변 등
당시 불안정한 시국으로 인해 전화
사업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1896년 10월에 이르러서야
덕수궁 내부에 전화기가 설치.
당시 왕이었던 고종은 궁에서
직접 인천으로 통화를 하였다.
한국 최초로 이뤄진 이 전화 통화로
인천 감옥에 수감 중이던 김창수라는
인물이 사형 집행을 모면할 수 있었다.
당시 김창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조선인으로 변장한 일본인을 살해한 혐의로
사형 집행 직전 풍전등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에 고종은 여러 날이 걸리는
어명 전달 방식이 아닌 직접 ‘전화’를 걸어
사형 집행 정지명령을 내리는 파격적인 방법을 선택.
고종에 의해 목숨을 건진 김창수는
이후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평생을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
고종이 건 한국 최초의 전화로
사형을 면했던 인물이 김구 선생.
백범은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을
받았던 사실을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한국 첫 통신의 역사는 궁에서 시작했다.
당시 전화는 임금의 침소 등 궁궐 내부에 3대,
정부 각부처에 7대, 평양 인천에 2대 등 총 12대
<승정원일기> 139책(고종 35년, 1898년 12월 13일)
“‘전어기’가 있어 시시각각 소식을 전할 수 있다” 기록
.
또 <외무아문일기> 권12(고종 35년, 1월 28일)에는
“동일 하오 5시에 궁중에서 외무 협판이 대동하도록
전화로 외무부에 시달하였다는 사실과 인천 감리가
전화로 하오 3시에 영국 범선 3척이 입항할 것이라고
외아문에 보고한 사실...”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궁궐 내부와 정부 부처 사이에
전화 행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대변.
임금과 정부 부처 사이의 행정이
전화로 이뤄진 만큼 신하에게 전화는
곧 임금을 상징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임금이 전화를 하면 신하들은 벗어둔
관복,관모, 관대로 정장을 하고 큰 절을
세 번 올린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 받았다.
전화 한 통을 받는데도
별도의 복잡한 예절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당시 창덕궁 전화 교환수는
어명을 전달하는 고위급 직책인 신분.
구한 말까지 전화교환수는 인기 높은 직업.
홍정순 여사는 43년 나이 차이를
넘어 의친왕의 마지막 후실로 등극.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석'씨 생모.
"외할아버지 따라서 궁에 초청받으셨다가
아버님 의친왕 눈에 들어서 후궁이 되셨다.
아버님은 어머니 처소에만 들어 다른 후궁들이
불만이 많았는데, 이버님 의친왕이 62세일 때
홍정순 여사는 19세인 1941년에 저를 낳으셨다."
..........이석(李錫).........
대한제국 황족의 후손으로
대한제국 고종 광무 태황제
(高宗 光武 太皇帝)의 서얼
황자 '의친왕 이강'의 10남.
....................................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태평양전쟁이 발생.
일제는 진주만 공습 전 베트남과 캄보디아에
진출하여, 이미 인도네시아 반도를 차지하였다.
중국 연안일대도 차지한 일제는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욕심을 내자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은 독일 히틀러 군대가
프랑스를 이미 점령한 상황이었다.
세계 제1차대전 때도 점령 못하였던
프랑스를 독일의 히틀러 군대가 점령.
세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미국은 중립을 깨고 유럽과 연합해
태평양전쟁을 함께 벌이기로 결심했다.
일본 제국주의는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의 항공모항 7척 중 5척을 파괴
200여대 항공기 파괴, 2천 미군 사망.
미군의 해군을 무력화시킨, 일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인도의 일부분까지 점령을 한다.
미군은 맥아더 장군을 중심으로
해군을 조직화시켜, 일본이 점령한
인도네시아부터 공략하여 탈환 이후,
필리핀도 탈환 후 미군은 원자폭탄 사용.
일본제국주의 천황으로부터 항복을 받는다.
미군은 유럽에서도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프랑스를 탈환하고 이어
히틀러의 독일을 무너뜨린다.
미국 군사력은 양쪽으로 분산
전쟁을 치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다.
세계 제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미국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질서를 확립.
우리나라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한다.
....................
....................
개화기 궁에 전화가 설치된지 6년이 지난
1902년 3월 20일에는 기존 관용 전화와 달리
백성들도 사용할 수 있는., 첫 공중전화를 개설.
교환시설을 갖춘 관소인 전화소는
1902년 한성전화소와 인천전화소에서
시작해 개성전화소의 개설로 이어졌다.
이듬해에는 평양과 수원, 한성전화소 산하인
서울 경교, 도동, 마포, 시흥 등 9개소로 늘었다.
전화소 개설 증가로 개인전화 가입자도 80여 명.
하지만 1905년 4월 ‘한일 통신협정’ 강제 체결
조선은 통신 사업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만다.
이로 인해 민간 전화사용 80% 이상은 일본인.
게다가 나머지 전화는 정부 부처와 신문사,
극장 등에서 관용으로 사용되어 조선인들의
전화 사용은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잡지 <별건곤>(1927년 3월 1일치 발행)
‘극장만담’이라는 제목의 평론을 보면, ‘극장에 온
손님에게 전화가 올 때, 그것을 전달하는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질러서... 여기에는 완전치는 못하나마
스크린 옆 기둥에 유리등을 끼워놓고 그 유리에 (전화 온)
사람의 이름을 써 전등으로 신호하는 방식으로...’라고 썼다.
이 기록은 민간 전화사용의 제한으로 인해
관용전화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인들의
웃지 못 할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일본에 빼앗긴 통신 사업권은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 무려
40년간 되찾을 수 없었다.
1945년 광복이 되었지만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통신시설은 크게 훼손됐다.
1960년대 정부가 경제개발계획
통신사업도 단계적으로 개발됐다.
1970년까지만 해도 전화기를 들면
회선에 전류가 흘러서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를 점등시키면 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
하지만 이듬해인 1971년에 이르러서는
교환원 없이 가입자가 직접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걸 수 있는 장거리 자동전화가 처음 개통
사용하는 전화기에 따라
교환원을 거치는 수동식 전화인
‘흑통’과 교환원 없이 자동식으로
전화를 걸 수 있는 ‘백통’으로 구분.
특히 부유층이 사용한 ‘백통’은
당시 집 한 채 가격과 맞먹을 정도로
당시 부를 상징하는 대표적 물건이었다.
한국의 전화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
1982년 이후 매년 100만 이상씩 늘었다.
1987년 1000만 회선개통 ‘1가구 1전화’ 시대
1993년에는 2000만 회선을 돌파하면서
‘1인 1전화’ 개인 통신 시대로 접어들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시작된 휴대전화
서비스와 함께 1990년대 초반 ‘삐삐’는
무선 이동통신의 대중화도 열었다.
2000년대 후반 인터넷 서비스와 전화를
결합한 스마트폰 이후, 유선전화는 감소
반면, 국내 무선이동통신 가입자는 5900만
KT는 2002년 정보통신부 보고서
“주력 서비스업종인 ‘유선전화 퇴출’”
한국 민간전화 개통 후 100년 만의 일
............
............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쇄국정책을 고수.
외국과 왕성한 교역통상을 펼친 고려와 달리
'중국 일본' 두 나라와 사대교린관계 만을 유지.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
구미 자본주의 열강들이
통상무역을 요구하여 오자
더 완강한 쇄국정책을 실시.
................쇄국정책..................
조선에서는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위정척사사상에 의거, 단호한 쇄국정책
외래 자본주의 열강들의 침략을 적극 저지.
.
대원군은 중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 봉기 또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북경 침공 등의 사건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된 것은 문호를
개방한 때문이라 믿었다.
때문에 조선왕조를 수호하는 방법은
국내 인민에 대한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
대원군은 첫 집권 시기부터 청나라와의
사대적 외교관계 외 모든 대외관계를 차단.
대원군은 당시 도쿠가와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일본 메이지정부를
서양 오랑캐와 같은 무리로 인정하고, 종래
두 나라 간 전통적인 교린관계마저 거부했다.
대원군은 1866년(고종 3)에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당시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사건으로 프랑스와도 전쟁을 불사할 정도였다.
잇따라 1871년에는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 침입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
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단호한 쇄국정책을 천명하였다.
대원군의 쇄국정책도 외부로부터
나라를 격리함으로써 봉건왕조의
멸망을 막아보자는 봉건지배계급의
기대와 이익을 반영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외래 침략자를 격퇴했던
공적으로 찬양되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대원군이
쇄국정책으로 수호하려 했던
봉건적 지배질서는 역사적 장애물
당시 민중적 이해는 이미
봉건귀족들의 이해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모순이 첨예화되어 있었다.
당시 조선이 당면한 역사적 과제는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섭취하여
나라의 부강 발전과 근대화를 실현
외래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일.
..................................................
구한 말, 고종.
구한 말, 고종 행차
고종 장례식
광무제(光武帝), 高宗
출생 : 1852년(철종 3)~
사망 : 1919년 01월 21일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으로 왕위에 올랐다.
흥선대원군 집권 명암,
개혁 정책과 쇄국 정책
민씨 집권과 조선의 개항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갈등 속에 흔들린 조선
점점 커진 일본의 침략야욕
그속에서 꺼져 간., 조선의 국운.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염원을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비운의 왕.
재위 : 1863~1907년
조선 제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그의 '재위 43년'
시련의 세월 속에서
조선의 국운은 기울었다.
고종은 재임기간 내내
실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명목 상, 조선의 왕이었다.
명성황후 민자영은 남편 고종과 함께
서구 열강 세력들의 거친 파고 속에서
일제 침략자들의 야심에 정면으로 맞서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조선의 여걸이었다.
통치이념이 유교(儒敎)국가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여성으로는., 최초 국가 실권자.
................명성황후 삽화.......................
1898. 1.9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기사
해당 기사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힘썬던 미국인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가 명성황후의
장례식에 참관하고서 그 감상을 적은.,기고문
............................................................
그녀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장악한
조선의 왕권을 남편 고종에게 되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역사의 전면에 등장.
임오군란으로 절명의 고비를 넘긴
그녀는 조선의 근대화를 선도한다.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발판으로
조선을 삼키려 한 위급 상황에 이르자
그녀는 러시아와 미국 등을 끌어들이는
외교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국체를 보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 외세를 끌어들이고
다시 러시아 외세를 끌어들이고
또 다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들을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
그녀는 대원군 실각 후 척족을 앞세워 정권장악.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맺고 일련의 개화정책 시행.
먼저 개화사상가인 박규수(朴珪壽)를 우의정에 등용.
대원군 집권당시 쇄국정책을 담당했던
동래부사 정현덕, 부산훈도 안동준(安東晙),
경상도관찰사 김세호를 차례로 파면·유배했다.
개화를 위해 통리기무아문 설치
삼군부(三軍府)를 폐지했으며,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일본과 청에 파견하여
신식무기·공업 등을
학습하는 정책시행.
1881년 김윤식이 영선사로 청에 갈 때
밀명을 내려 청에 한미수교 주선을 요청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보내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대미
수교의 주선을 요청하기도 했다.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피신하여
고종과 비밀리에 연락하는 한편, 청군 요청.
임오군란 후 집권했던
대원군을 청으로 납치하게
한뒤 정국을 다시 장악했다.
그녀를 비롯한 민씨척족은
이때부터 친청사대(親淸事大)
일본측 조선 개화파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비의 화려한 외교.
그녀의 전략적 묘수는
일제의 소위 ‘여우 사냥’
즉, 을미사변 도발을 야기.
명성황후 초상화
민비는 일제에 의해 살해.
그러나, 그녀의 죽음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
대반전 승부수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구한 말, 개화기 결실로 맺어졌다.
구한말(舊韓末)
대한제국 개화기.
1900년대 초.,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고종황제 즉위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년(광무 원년) 10월 12일부터
1910년 8월 29일까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를 통치한 전제군주제 국가.
대한제국 공식 약칭은 대한(大韓)이며,
한국(韓國) 또는 한말(韓末)이라는 표현.
광무개혁 등 근대화를 추진했으나
1910년 일본 제국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 이름에 사용된 '대한'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거쳐,
오늘날 대한민국 국호로 계승.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을 구별하기 위해,
대한제국은 '구한국(舊韓國)'이라 부르고,
대한민국은 '신한국(新韓國)'으로 구분한다.
..........................................................
마지막 황실, 잊혀진 대한제국
영친왕 & 이방자 여사
덕혜옹주
구한 말, 궁녀
1896년 1월 1일은 대한제국이
서양식 태양력을 처음 채용한 날.
1894년 6월부터 1895년 4월까지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일본의 내정간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 살해(을미사변)
아울러, 고종은 감금 조처했으며
개화파 중심 김홍집 내각으로 개편
감금된 고종의 국정 간여를 배제했다.
김홍집 내각이 추진한 을미개혁은
태양력 사용을 비롯해 단발령 도입과
독자적 연호 사용 등 140여 건의 법령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이었다.
친일 내각과 그 배후 세력인
일본에 대한 분노는 백성들의
강한 반발로 이어져 전국에서는
유생들이 주도해 친일 내각을 응징
무력 투쟁인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고종의 아관파천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신변의 안전과
조선을 침입하는 일본 세력을 막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단행
...................아관파천(俄館播遷).....................
청일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한 일본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받아 대륙침략 발판 마련
그러자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던 것.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
배일친러 경향이 싹트게 되었던 것이다. .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민비세력에게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1895년 8월 20일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비를 학살, 친일내각은 단발령 실시를 비롯한 개혁사업 재개.
그러나
민비학살과 단발령은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으로 의병봉기.
민비가 시해된 후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에게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극비리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것.
민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
아관파천 전까지 고종은 이미 실권 상실.
일본에 의한 감금과 단발령 강요 등으로
군주로서 권위도 심각한 손상을 입은 상황.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한 고종은
즉시 친일 내각 김홍집과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 장박 등 5대신을
역적으로 규정, 체포 명령을 내렸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과 정병하,
어윤중 등은 성난 군중들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고 이를 계기로
친러파 세력이었던 이완용과 이범진
등이 중심이 된 새 내각이 구성됐다.
친러내각은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고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된다.
고종은 단발령을 폐지하고
지방 행정구역의 13도 환원 등을
골자로 한 갑오개혁도 무효로 했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 세력다툼의 결과.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이
벌인 제국주의 전쟁이 러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일본.
........................고종.................................
고종은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퇴위되었다.
고종 퇴위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은 헤이그 밀사 사건.
고종은 1907년 4월 20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 밀사를 파견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상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고 했던 것.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이 비밀외교 작전은 실패
고종은 일본에 의해 강제퇴위
.
고종은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倂呑) 이후인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68세 나이로 운명.
고종이 일본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러한 분노는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은 나라를 잃은 울분 속에서 죽어 간 것.
즉위 초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영향력 속에서,
친정을 시작한 후로는 민씨 척족 전횡 속에서
자신의 정치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고종.
세계 열강들의 이권 다툼의 와중에서
조선의 주권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일본의 불법적인 침략 행위를
세상에 알리려고 하는 등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해 노력한 점은 인정.
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의 차남.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헌종의 모후인
조대비와의 약속으로 삼종숙부(三從叔父)인
추존왕 익종의 양자로 입양되어 익종(효명세자)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위를 계승하였던 고종.
즉위 초기 10년은 흥선대원군의 섭정 단계
친정 후 민씨 일가 집권과 부패에 시달렸다.
1880년대 이후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요구에
개항한 이래 청-일-러 3국의 3파전 속에서
국권(國權)을 보존하려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 구실로
이완용과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1910년에는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덕수궁 함녕전에 유폐되시피 했다.
1919년 1월 21일에 사망 뒤,
"고종 독살설"이 시중에 유포
윤치호에 의해 기록으로 전한다.
2008년 12월에 고종 황제가
사용했다는 옥새가 발굴되었다.
2009년 일본 국회 헌정 자료실에서,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지시로
친일파 대신들이 “고종황제폐하께서 즐겨
마셨던 식혜에 독약을 탔다”는 주장이 적힌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 일기의 사본 발견.
고종은 1863년 12월 8일~
1907년 7월 20일까지.,재위.
재위하는 동안 1863년
12월 8일~ 1864년 1월 16일'
삼종숙모(三從叔母)이자 양어머니
신정황후 조씨(神貞皇后 趙氏)가 섭정.
'1864년 1월 16일~ 1873년 12월 3일'
생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섭정.
'1873년 12월 3일~1907년 1월 21일' 친정
1907년 1월 21일에서
1907년 7월 20일 퇴위까지
황태자 이척이 대리청정 했다.
.........................................
순종(황태자 이척)은 1874년(고종 11)
2월 8일 고종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출생.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두었으나
순종을 제외하고 모두 일찍 운명.
순종은 2세 때 세자에 책봉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자 황태자에 책봉
34세가 되던 1907년 7월 20일, 일본은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일본은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의 문호를 열게 하고
내정에 간섭하며 호시탐탐
조선의 주권을 위협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
조선 지배권을 확립.
1905년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했다.
을사조약이 그것이다.
외교권이 없는 것은
조선이 다른 나라와
동등한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던 중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사건이 발생.
고종은 세계의 여러 나라에
일본의 조선에 대한 주권 침해
부당성을 알리고자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일본은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에게 퇴위할 것을 종용했다.
고종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고종도 황태자도
참석하지 않은 양위식을
자기들 멋대로 거행했다.
어쨌든 이렇게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순종은
이름만 황제일 뿐 아무런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합병해 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26년 4월25일(음3월14일) 오전 6시 15분,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53세에 운명하며 피맺힌 한을 토하는 유언을 남겼다.
고종에게 전위 받은지 20년,
일제에 국권을 피탈 당하고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일명을 겨우 보존한 짐은
병합 인준의 사건을 파기하기
위하여 조칙 하노니 지난날의
병합 인준은 강린(일본)이
역신의 무리(이완용 등)와 더불어
제멋대로 만들어 선포한 것이요,
다 나의 한 바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유폐하고 나를 협제하여
나로 하여금 명백히 말을 할 수 없게
한 것으로 내가 한 것이 아니니 고금에
어찌 이런 도리가 있으리오.
나 구차히 살며
죽지 않은 지가
지금에 17년이라.
종사의 죄인이 되고
2천만 생민의 죄인이 되었으니,
한 목숨이 꺼지지 않는 한
잠시도 잊을 수 없는지라,
유인에 곤하여
말할 자유가 없이
금일에까지 이르렀으니…."
....................순종..................
'1874년(고종 11) 2월 8일 ~1926년 '
조선왕조 519년의 역사를 마감한.,순종
순종 즉위 직후 일본은 순종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완용(李完用) 등의 친일 대신과
한일신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권,
관리 임명권, 행정권 등을 빼앗아갔다.
1910년 8월에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
조선의 모든 통치권이 일본에 넘어갔다.
순종은 즉위 3년 만에 대한제국은 주권 상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건국한지
519년 만에 조선왕조가 망하고 만 것이다.
순종은 일본에 의해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창덕궁에 기거하다가 1926년 4월 25일에 죽었다.
순종은 살아 있는 내내 병약했고 판단력도 흐렸다.
순종의 장례식 날, 많은 국민들이
장례 행렬을 따르며 애통해 했으며
울분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순종의 능은
경기도 남양주
유릉(裕陵)이다.
....................
대한제국 군대 해산(大韓帝國軍隊解散)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다.
후에 순종 황제 조칙이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
궐 밖, 왕실 종친들
구한 말, 사진 모음
.
.
구한 말
서양인과 조선인.
구한 말, 호랑이
구한 말, 불국사
구한 말, 무악재.
1904년 한강의 잉어 낚시꾼.
구한 말, 신식군대.
구한 말, 황실
구한 말,
구한 말, 한양 도성
구한 말, 신식군대.
구한 말, 한양도성
구한 말, 기생
개화기.,개성.
1876년 강화도 조약 후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 종래 봉건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바뀌어 간 시기를 '개화기'라 한다.
개화기 요정
1876년 2월 27일(고종 13년 음 2월 3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강화도조약.
다른 명칭으로는 한일수호조약(韓日修好條約)
1897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는
서양에서 다양한 문물이 들어왔는데
백성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많았다.
궁궐에 전기가 들어오고
거리에 가로등이 생겼다.
또한 전차와 철도가 등장.
철도 개통은 조선의 발전을
앞당겼지만 왜세 침략의 발판.
전차에 이어 등장한 것은 철도
1899년 서울 노량진~인천 제물포
'서울~ 인천' 1시간.,경인철도 개통.
1899년 경인철도 개통식
서울역
1900년 사진
이후 철도는 전국으로 뻗어나가
짧은 시간에 먼거리까지 여행 가능
조선 백성에게는 처음 본 문명의 이기.
외국인들이 철도를 놓아 준 것은
조선의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배 이익을 챙기기 위한 수단이었다.
개화기 때 외국에서 들어온 믈건은
비단, 시계 사치품과 성냥 같은 소모품.
반면, 조선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물건들은
쌀 콩 금 은 등을 포함 도자기 유적 유물 문화재
구한 말, 웨딩 촬영.
조선 말,
개화기
구한 말, 한 학자는
이러한 세태를 한탄.
.
“심하도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아둔함이여.
대개 조선에 들어오는 물건은 기묘하고 기이한
물건에 지나지 않고, 나라에서 나가는 것은 쌀, 콩,
가죽, 금, 은 같은 평상시의 보배다. 이러고서야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전거
개화기
우리나라에
자전거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1890년대 초였다.
그당시 인력거나
서양마차보다 빠르고
간편하면서 자가용으로
안성맞춤 신식 탈것 자전거.
조선왕조 후반기에 개항과 함께
개화바람이 불기 시작한 구한 말,
선교사와 서양기술자들이 국내활동.
이때 우리나라는 도로가 매우 좁고
미개한 시기라 여기에 맞은 교통수단
자전거를 들여와 타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전거를 가장 먼저 탄 우리나라 사람은
조선시대 말 학부협판(현재 교육부 차관급)을
지낸 '개화파 거두' 윤치호(尹致昊)로 알려졌다.
그가 18세 때인 1882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가 서양 문물 견학.
영어를 배운 그는
이듬해인 1883년에
한미우호통상조약에 따라
초대 미국 공사로 부임하는
루시어스 H. 푸트 통역관으로
임명되어 귀국한.,윤치호(尹致昊)
그러나, 1년뒤인
1884년 갑신정변 실패.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
대학에서 신학문을 배워
4개 국어를 구사하던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그는 1895년 귀국할 때
주미 한국공사관에 있던
자전거를 가지고 왔다.
윤치영 전 서울시장
그의 저서 ‘나의 교우록’
그의 자전거 내력을
다음과 같이 기록.
‘윤치호가 미국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에서
자전거를 타보고 문명의 의미를 음미한 건
우리나라의 근대사에서 잊지 못할 일이다.
충정공 민영환 씨가 워싱턴에서
특명공사로 있을때 시승한 자전거를
얻어 귀국할때 갖고 온 것으로 생각된다.
윤치호 씨는 며칠동안 집의 뜰에서
연습하고 종로네거리로 타고 나갔다.’
하지만
윤치영이 언급한
‘충정공 민영환 씨가
워싱턴에서 특명공사로
있을 때 시승한 자전거’에
대해서는 약간 오해가 있다.
충정공은
특명공사로
미국에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충정공은 1895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
곧이어 일어난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
그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하여, 윤치호가 주미 한국공사관에서
가져온 자전거는 충정공이 아닌 다른
주미전권공사가 타던 것이 아닌가 싶다.
윤치호는 귀국한 뒤
서재필, 이상재와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우리나라 첫신문 ‘독립신문’창간 및
독립문을 세우기로 의견을 모았다.
1898년 가을, 서울 서대문 밖
무악재 청나라 사절 환송문이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獨立門)을 건축할 때의 일.
윤치호가 종로에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자
모두들 그것이 축지법을 쓰는
기계인 줄 알고 신기해 했다.
그는 자전거뿐 아니라
자동차도 제일 먼저 탄
민간인으로 알려져 있다.
자전거용
양복바지인
홀레바지를 입고
자전거를 타는 등
우리나라 개화에 앞장.
당시 윤치호에 버금가는
멋쟁이 왕족 의친왕 이강.
자전거 및 자동차광이었다.
이강 의친왕은 종종 윤치호와
자전거 경주를 즐기기도 하고,
청계천 수표교 다리를 넘나들며
자전거 탄 선교사를 만나면 경주.
장안에 심심찮은
화제거리를 제공.
1898년 독립신문에 ‘어떤 아이가
자행차(自行車)에 기름을 넣는 기계와
바람을 넣는 기계를 팔려고 가지고 다니거늘
미국 의사 에비슨이 보고 15전을 주고 사서
누가 유실한 것으로 알고 신문사로 보내어
임자 찾아주기를 원하거늘 잃은 자는
돈 15전을 가지고 와서 찾아가시오’라는
신문광고까지 난 것을 보면 자전거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보급된 것 같다.
에비슨은 당시
우리나라 첫 서양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미국인 의사.
이듬해인 1899년 7월
독립신문에 개리양행(開利洋行)
이라는 서양 상점이 자전거 광고를
낸 것을 보면 자전거가 이미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우리 양행에서는 미국에 기별하야
여러 가지 유망한 자행차를 수입하야
판매한다고 여러 번 광고하였거니와
지금은 아무 자행차에나 다 맞는 등불과
종과, 수레바퀴에 넣는 인도 고무통(튜브)과
공기 잡아넣는 무자위(펌프)와 자행차에 앉힐
자리(안장)와 바퀴의 살틀(포크)과 그 외에
여러 가지 기계가 많이 있으며……’
개리양행의 광고를 보면
자전거는 미국에서 수입 판매
부속품까지 들여와 팔았다는 것은
자전거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던 증거.
군대 장교들이
자전거 보급에 앞장서
자전거는 서양마차나
인력거보다 급속도로
늘어났다.
그러나 값이 비싸
서민에게 그림의 떡,
개화에 앞장선 중류층
청년들이 즐겨 타기 시작.
하지만 양반들에게는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양반은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봉건적 사고방식 때문.
양반 체면에 두 발로
페달을 밟아 타는 것은
경망스러운 일이었다.
초기에는 자전거를
자행차(自行車)라 불렀다.
자행차가 나타나면서
서울 장안의 한량들 사이에
기방 자행차(妓房 自行車)가
유행해 구경거리가 된 적도 있다.
조선 제23대 왕인 순조의 세자이며
헌종의 아버지로 사후 왕으로 추존된
익종의 비로서 고종이 즉위하기 전
세도를 부렸던 여걸 조대비의
친정조카인 조모 씨는
부귀영화를 누리며
개화 바람을 타고
한껏 멋을 부렸다.
그는 난봉꾼 기질이 넘치는 한량으로
수행원과 서생들인 술친구 건달 7∼8명에게도
자신이 입은 서양 옷을 똑같이 입혔다. 그리고
비싼 자전거를 한 대씩 사주어 한성 장안을 휘젓고
다니며 기방을 제집 드나들듯 출입해 큰 구경거리.
이들 자전거 패거리들이 기생방에 들러
한바탕 놀고 나면 같은 복장 때문에 누가
물주인지 몰라 기생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예사.
또한 춘삼월이 되면 뒤에 기생을 태우고
동대문 밖이나 한강으로 놀이를 가는 자전거
퍼레이드에 장안 사람들은 넋을 잃었다고 한다.
자전거를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중인 출신 혈기 왕성한 군 장교들
이들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개화풍류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지식과 멋 그리고 활동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휴일이면 장교 복장을 하고
20∼30명씩 장안을 돌며
자전거 퍼레이드를 연출해
사람들이 자전거의 편리함을
알도록 했다.
그렇다면 개화기
젊은이들의 전유물이었던
초기의 자전거 값은 얼마였을까?
1900년 4월
서울에 사는 이치호는
자전거 2대를 팔겠다고
황성신문에 광고를 냈다.
한 대는 140원,
다른 한 대는 70원.
쌀 한가마니에
5∼6원 할때였으니
쌀 30가마와 맞먹는 값.
이 무렵 러시아 출신 케리스키는
서울 정동 입구에 자전거 판매점을 열고
미국에서 자전거를 수입해 판다는 광고를 냈다.
‘자행차는 미국 시카고 상점에서
만든 렘블러(Rambler)라고 한다.
본인이 조선대리점인 바 금일 도착한
첫 자행차 발매 가격은 110원이니……’
이것을 보면 우리나라에
자전거를 정식 수입 판매한 것은
1900년 이전으로 미국 자전거가 대부분.
시골 사람들이 이렇게 비싼 자전거를
1대 사려면 논을 3마지기나 팔아야 될
판이라 동네 땅 부자가 자전거를 한 대
사왔다 하면 큰 구경거리였다. 그리고
그 집은 개화바람의 선봉장이 되었다.
요즘 소형차 값과 맞먹는 자전거도
1910년을 넘어서면서 관공서, 우체국,
파출소에 관용차로 대량 보급되었다.
게다가 일본인들이
많이 타기 시작하면서
차츰 값이 떨어져 중류층의
마이카로 자리를 잡았다.
자전거바람은 1906년에 이르러
새로운 자전거를 발명하게 만든다.
서울 누록골에
살던 기술자 박영준이
네 바퀴 자전거를 발명.
공업에 뜻을 두고 있던
그가 만든 네 바퀴 자행차는
기계가 정밀하고 운전이 신속했다.
1918년 부산에도 자전거 바람 불어
자전거는 1819년 영국에서 처음 등장.
나무로 만든 첫 자전거는
두 발로 땅을 밀어 갔으며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드라이지네 바이시클’
이라 불렀다.
드라이지네 바이시클은
지금처럼 페달이나 체인
같은 것이 달려 있지 않은
원시적인 것이었지만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크게 유행.
1905년 7월 일본 상인들이 주관한
‘한일상품박람회’를 통해 부산에도
자전거가 첫 선을 보였다. 박람회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문전성시.
관람객들은 자전거를 타고
전시장을 다니는 일본인을 보고
동물원의 원숭이 보듯 신기해 했다.
이후 부산에도 자전거 가게가
하나 둘 생겨났지만 초기에는
너무 비싸 선교사나 경찰서,
관공서 직원들이 주로 이용.
서울에서도 자동차 값이
비싸기는 마찬가지여서
판매상들은 일반인들에게
자전거가 편리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자전거경주대회를
개최하곤 했다.
1918년에는 부산에서도
자전거판매촉진을 위한
첫 자전거경주대회 개최.
이해 7월 개장한 부산시민운동장
(충무초교) 완공 기념으로 열린 자전거
경주대회는 부산 시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13년 전 한일박람회에서 선보였다가
까맣게 잊어먹고 있던 자동차가 눈앞에
되살아나 운동장을 쏜살같이 질주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주대회
참가 선수들의 모양새도
경망스러워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엉덩이를 하늘로 바짝 치켜든 채
방정맞게 두 다리를 휘저으며
자전거를 모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너나없이 킥킥거리면서 괴상한
꼬락서니에 혀를 차고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웃고만 있던 구경꾼들도
차차 손에 땀을 쥐면서 선수들이 달려나가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구경거리라고는
설이나 명절 때 등장하는 풍물꾼(농악놀이꾼)
이나 굿판 따위가 고작이던 시대였다.
사람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은
자전거경주대회 자체만이 아니었다.
숱한 일본인 선수들 틈에
두세 명 조선인도 섞여 달렸다.
부산시민운동장을
50바퀴나 도는 첫 경주
조선인이 우승을 차지하자
자전거를 질시하던 마음은
온 데 간 데 없어지고
서로 얼싸안고 울고
웃는 감격을 누렸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우승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리며 거리로 나가 ‘이겼다,
이겼다. 조선이 일본놈들을 물리치고 이겼다’며
목청이 터지도록 외치고 다녔다. 나라를 빼앗긴 뒤
8년 동안 일본인들의 억압을 받아온 백성들은
억눌렸던 감정을 맘껏 쏟아냈다.
이날 저녁 술집마다 만원을 이룬
부산시민들은 자전거경주대회에서
우승한 선수가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 청년 엄복동(嚴福童)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민족적인 긍지와
희열에 도취되어 마음껏
축배를 들었다.
엄복동 선수가
자전거경주에서 우승한 뒤
부산에서도 방정맞다고 외면하던
자전거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후 자전거 값이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해
웬만한 중류가정에서는 자전거를
한 대 갖는 것이 유행이었다.
엄복동의 자전거 감격시대
자전거는 일제 치하에서
압박받던 우리 민족에게
답답한 가슴을 터주고
다소나마 울분을 풀어주는
일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한일 자전거경주가 바로 그것이다.
1906년 4월 육군훈련장(동대문운동장)에서
권원식이 일본인 기치가와(吉川)와 우승상금
100원을 걸고 벌인 자전거경주 대회를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육군참위(장교) 권원식과
일본인 기치가와 양인은
4월 5일에 훈련원에서
자전거경주를 개최하고
춘풍호시절로 인하야
일대 운동을 거행하는데,
내·외국인을 막론하고
자전거경주를 하여
승리하는 자는
100원 이상의 상금을
급여한다더라.’
우리나라 첫 공식
자전거경주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경주용 자전거도 나타났다.
1909년 당시 학부에서 학무국장을 지낸
윤도오(尹到旿)가 자전거 1대를 도둑맞았는데
신문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제작일 밤 학부 학무국장 윤도오 집에
도적이 침입하야 윤씨의 아들이 탔던
자행차 1좌를 절취, 도주하였는데
그 자행차는 경주용으로서 영국에서
300원에 주문한 것이라더라’.
1910년 이후 전국에 자전거 판매상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경쟁이 심해졌다.
이 때문에 자전거 판매 선전을 하기 위해
자전거 상인들이 후원하는 자전거경주가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켰다.
1913년 4월 서울 용산의
연병장에서 벌어진 자전거경주대회에서
한국 청년 엄복동은 영국제 자전거로
일본인들을 제치고 당당히 1등을 차지해
한민족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엄복동에 이어 평양의 현몽주,
김다몽에 한준화라는 조선처녀
선수까지 나타나 대회를 휩쓸었다.
우리 국민들은 1919년 3·1 독립운동의 좌절로
쌓여가던 일제에 대한 울분을 자전거대회마다
연승하는 엄복동과 조선인들의 우승으로
가슴에 맺힌 한을 풀었다.
특히 엄복동은 1920년 5월
경성상공회의소가 주최한
한일간 대 자전거경주대회에서
또다시 1등을 차지해
민족의 영웅이 되었다.
엄복동의 자전거 신화가
1920년대를 휩쓸 때 우리나라
첫 비행사 안창남은 1922년말
서울에서 비행기로 마음껏
하늘을 정복했다.
하늘과 땅의 두 조선 영웅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떴다
보아라 하늘에는 안창남의 비행기,
땅위에는 엄복동의 자전거, 간다 못 간다
얼마나 울었나’ 하는 노래까지 생겨났다.
이후 자전거경주대회 규모가 커지면서
스포츠게임 성격을 띠게 되자 일본에서
쟁쟁한 선수들이 원정을 와 겨루었지만
엄복동을 당하지 못했다.
1925년 이후
전국에는
3만4천 여 곳의
자전거상점이 생겼고,
45만 대가 굴러다녔다.
1927년에는
조선인 자전거업자들로만
조직된 서울윤업회가 자전거 선전을 위해
해마다 11월 1일을 ‘자전거의 날’로 정하고,
제1회 기념행사로 자전거를 탄 3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서울에서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1930년을 넘어서자
일제 자전거들이 대량 들어와
자전거가 계속 늘어났다.
수탈에 혈안이 된 일제는
소위 ‘자전거 취체규칙’을 만들어
교통사고를 막는다는 명목으로
자전거도 경찰에 등록하고
번호판을 달게해
세금을 받았다.
전차
이 땅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도입된 전차는
백성들의 넋을 빼기에 충분했다.
1898년 11월 초순,
1단계 완공을 목표로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잇는 선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미국에서 분해식으로
도입한 전차의 조립이 끝나자
이듬해 5월 17일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이때 도입된 전차는
40인승 개방식 8대와
황실용 귀빈차 1대 등
총 9대였다.
1880년을 넘어서면서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 우리나라에
상륙한 서양 열강들은 조선의
이권 쟁탈에 혈안이 되어 큼직큼직한
개화사업을 독식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
그러나 이들에게
비록 재산은 강탈당했지만
우리 자존심마저 뺏길 수 없었다.
영토를 함부로 외국인들에게 내주어
백성들이 먹고 살 터전을 빼앗길 수
없다는 것이 조선정부의 자존심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먼저 러시아가
부산 앞바다 절영도(영도)를 빌려
그들의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조정을 압박,
시끄럽게 하자 독립협회가 완강히 반대하고 나셨다.
독립협회의 선각자들은
개화를 촉진시켜 나라를
개혁하자고 주장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주권침해를 당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걸고
완강하게 반대론을 펴나갔다.
그런데도 국민들 몰래 나라 이권이
외국 열강들에게 넘어가자 독립협회는
그 내용을 백성들에게 다음 같이 알렸다.
‘금광·철도·삼림채벌권이
계속 외국인 손에 넘어가고
가장 큰 이권인 철도 부설 중에
나라의 혈맥인 경인선은 미국에,
경부선·경의선은 일본에,
경원선은 프랑스에 넘어갔으며,
경춘선도 독일의 한국거상인
세창양행이 요구 중이라더라.’
이렇게 주요 간선철도
부설권을 다 빼앗긴 조정에서
서울과 동해안을 잇는 경춘선이라도
우리가 놓겠다고 완강히 주장하자
가장 탐을 냈던 독일영사 구리온은
화가 나 외부협판(외무부차관)
유진환을 영사관으로 불러
경춘선 부설관규(부설 규칙)를
협판 앞에 내던지며 우리를 모욕하는
사건이 일어나 민심이 매우 흉흉했다.
열강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바람에
복잡하게 얽혀 경춘선은 경부선 개통에
맞추지 못하고 결국 1938년 일본이 놓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서울의 전차부설권이
전격적으로 미국인 손에 넘어가
백성들을 실망시켰다.
1898년 4월, 서울의 전기와
수도부설권 허가를 받은 미국인
콜브런과 보스트윅에게 넘어가고 만 것.
문호를 개방하면서 거세게 불어닥친
서구의 과학문명과 새로운 제도는
몽매했던 우리 백성들을 놀라움과
호기심 속으로 몰아넣었다.
개화바람을 타고 낡은 풍습들이
하나 둘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우리 백성들의 넋을 뺀 것은
제 스스로 달리는 교통기기인 전차였다.
그야말로 우리의 미개한 육로교통을
바지저고리에서 양복으로 바꾸어준
교통의 혁명이었다.
전차는 전기가 없으면
운행할 수 없는 교통수단으로,
전기가 전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기와 전차사업이
본격화된 것은 1898년 2월 미국인
콜브런(Henry Collbran)과 보스트윅
(H. R. Bostwick)이 친미파인 한성판윤
이채연의 주선으로 전기가설과 전차부설
사업권을 획득하면서부터였다.
1896년 인천으로 들어온 콜브런과 보스트윅은
그곳에서 조선정부의 철도고문으로 활동하던
미국인 모오스(James R. Morse) 등과 합세해
경인철도 부설권을 얻는 데 가담했다.
모오스가 경인선을 일본에 팔아넘길 때
이득을 챙긴 이들은 서울로 들어와 서소문 안에
거주하면서 서울의 전기와 전차부설사업권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전차부설이 거론되자 조선정부는
처음에는 우리의 힘과 자본으로 놓으려 했다.
빈약한 국고와 기술 때문에 경부선·경의선·경인선 등
막대한 자본이 필요한 철도는 외국에 빼앗겼지만
서울의 전차만은 우리의 힘으로 놓으려 한 것이다.
정부의 무능으로 우리의 재산을
외국에 빼앗긴 백성들의 원성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서울의 전차부설과
운영권만은 서양인들에게 내줄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또한 막대한 국고가 들어가는 대 역사였다.
그런데 1898년 초, 이승만 씨가 발간하는
순수 민족신문인 매일신문에 느닷없이
한성 내의 전차부설은 조정에서 시공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서울장안은 환희의 물결.
‘황성전기철도회사는 일간에 민족의 힘으로
전기철도 부설을 시작하야 우선 새문안에서
대궐 앞까지 놓을 터인데, 11월 초순에 완성한다더라.’
8월 하순이나 9월 초순에 공사를 시작해
2개월 후인 11월 초순에 첫 단계를 완공할 계획으로
새새문안(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만 놓기로 한 것이다.
당초 계획은 청량리 밖 홍릉까지 놓기로 했으나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들어 1차로 동대문 안까지만
부설하기로 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전차부설은 조정의 계획대로
국고를 털어 우리의 힘으로 놓기로 했으나
시작에서부터 기술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결국 한성부윤 이채연과
미국공사 엘렌의 농간에 휘말려
호시탐탐하던 콜브런에게 국고까지
내주면서 전차 부설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전차 운행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개화사업이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전기철도 부설사업이 추진된 이유는
1896년도부터 시행되던 한성부 도시개량을
근대화하기에 알맞은 사업이며, 민비가 안장된
청량리의 흥릉까지 근대적 교통수단을 이용함으로써
고종의 행차를 간소화해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또한
전차 부설사업이야말로 정부가 적극 추진하는
경제발전을 위해 근대적 기술도입을 추진하고
있음을 드러내기에 적절했기 때문이다.
..........................
고종을 유혹한 전차
...........................
1895년 명성황후가
친 러시아정책을 펴도록
고종을 조종하자 친일파와 일본이
극도의 적대감을 품고 일본자객들을 시켜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이후 고종황제가 명성황후 민씨의 장례를 치른 뒤
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홍릉으로 행차할 때마다
한 번에 드는 경비가 무려 10만 원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콜브런은
미국전권공사 호레이스 알렌과
한성부윤 이채연을 앞세워 고종에게
미국과 유럽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는
전차를 부설하면 홍릉 행차에 드는 경비가
절감됨은 물론, 평소에는 일반 시민이
대중교통기관으로 이용할 수
있다며 전차 도입을 건의했다.
이에 동감한 고종은
육군총장 이학균을 시켜
콜브런과 계약을 맺고 한미합동으로
전차부설사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898년 2월 19일,
이학균과 콜브런·보스트윅은
황실에서 40만 원과 35만 원을
두 차례로 나누어 출자하기로 하는 등
전문 25개조에 달하는 계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1884년 우리나라에 들어온 의사이자
선교사인 미국인 호레이스 알렌은
처음에는 의사로서 조정과 친분을
맺으면서 한미 간 중요한 외교역할.
그러나 1897년부터 완전히 외교관으로 변신,
주한 미국공사가 된 그는 정치·문화·종교·사업·
의학방면에서 많은 활약을 하다가 일본에게
우리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1905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1898년 9월 5일,
이 나라의 교통에
대혁명을 일으킬 서울의
전차부설공사 시공식이
동대문안에서 거행됐다.
오후 5시에 연 착공식에는
한성판윤(서울시장) 이채연,
미국공사 알렌, 독립협회회장 윤치호와
미국인 부부 몇 쌍이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전차부설공사를 관장하던
한성전기회사 바로 옆인
동대문안에서, 그것도
오후 늦게 미국공사 알렌이
미국말로 개회식을 선언하는 등,
여러 면에서 의구심이 많은 착공식이었다.
특히 한성판윤 외에 우리 조정의 대신들이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미국인 위주의
착공식이어서 더욱 물의를 빚었다.
알렌은 개회사에서
앞으로 두 달 정도 공사를 하면
장안 백성들이 편리하게 전차를
타고 다닐수 있다고 했다.
이로부터 10일 후인
9월 15일 오후 4시,
또 한 번의 전차 착공식이
새문안 대궐(경복궁) 앞에서
거행되었다.
이 광경을 매일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작일 오후 4시경 대궐
홍화문(창경궁 정문) 앞에서
전기철도 개로식(開路式)을 거행한 바
이근배, 김두승 등 제씨가 황성전기철도회사를
조직하야 이 철도 역사를 간섭한다더라.’
이처럼 첫 전차의 착공식이
각기 다른 날 두 곳에서 열린 것은
우리로서는 국고와 민족의 힘을 기울일
개화의 대 역사에 우리의 주도권을
세계에 과시할 필요가 있었고,
미국으로서는 기술을 투자한다는
입장에서 미국의 저력을 조선에
유감없이 보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차궤도의 양쪽 시발점에서
미국과 한국이 따로 착공식을 가진 것은
일종의 힘 겨루기였으나, 우리 민족이 설립한
황성전기철도회사는 기술과 자본 부족으로 결국
한미 합작형태로 한성전기주식회사에 흡수되고 말았다.
이 전차부설공사에 참석한 이근배는
조정에서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부서장인 내장원경(內藏院卿)을 지낸
개성의 인삼거부요, 김두승은 종로에서
쌀장사로 거부가 된 한국자본가였다.
조정에서 부족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들과 합자.
시공식 후 나라의 정세는 뒤숭숭했지만
전차부설공사는 큰 차질 없이 추진되었다.
당시 종로는 서울 장안에서
사람과 말의 통행이 가장 빈번
전차궤도를 부설하기 전에 이미
확장 개축해 궤도를 부설한 데다,
전선주를 세우기 위해 민가를 헐어
보상을 해주었고, 전차궤도 부설
부지를 별도로 마련해야 하는 등의
골치 아픈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콜브런은 미국에 레일과 전차를 주문하는 한편
동대문 옆에 사옥을 짓고 일당을 주는 조건으로
장안백성들을 공사에 동원, 시민들의 반미감정을 해소
전차 부설로
백성들이 미국에 가지고 있던
나쁜 감정은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데
묻혀 점차 누그러졌다.
그런데 2개월 후 완공된다던 부설공사는
이듬해인 1899년 5월초에야 개통되었다.
동대문과 서대문간을
우선 개통하려던 당초 계획이
청량리, 홍릉까지 연장되고,
전차 도입이 늦어진 데다,
또 다른 걸림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작일 전기로 차를 동대문안으로
이동하야 시험한다 하였으나
미비한 사건이 유(有)한고로
운행할 날짜를 다시 작성한다더라.’
그 사건은 바로 조정과 콜브런간의
운영권에 대한 알력. 우리 조정은
엄청난 국고를 투자했으니 마땅히
우리가 운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입장.
콜브런은 조선정부에서
출자금을 제대로 내지 않아
미국의 돈이 많아 들어갔으며
미국의 기술로 완성했으니 당연히
운영권과 재산을 미국이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미묘한 알력이 대두되자
콜브런은 재빠르게 전차와 운영권을
미국 커네티커트 주에 미국재산으로
등록시켜 한동안 큰 물의를 빚으면서
우리 민족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했다.
결국 이 문제는 한일합방 후까지
법정문제로 비약했지만 일본이 강제로
운영권을 접수하는 바람에 끝나고 말았다.
...............
최초의 전차
서울에 등장
.................
콜브런과 보스트윅은
서울의 전차·전등 및 전화 가설과
운영권을 얻어내자 먼저 전차 궤도 부설을
시작하기로 하고 일본인 기술자들을 데려와
1898년 9월 17일 공사를 시작했다.
이해 12월 25일,
서대문에서 종로·동대문에 이르는 1단계 공사를 마쳤으나
레일 등 자재와 전차도입이 늦어져 단선궤도 전장 8km의
서대문∼종로∼홍릉간 궤도 부설과 전선가설 공사는
다음해인 1899년 4월에 완공했다.
이 때만 해도
서울에 신식 탈것이라고는
자전거와 인력거가 전부였고,
서양식 승용 마차(馬車)가
등장하기 전이었으니 시내에
철로를 깔고 그 위에 전기의 힘으로
전차를 달리게 한다는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요,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이 공사에
한국정부는
힘을 아끼지
않았다.
콜브런과 전차 계약을 맺은
일주일 후인 1898년 2월 26일과,
1단계 선로공사인 서대문∼동대문
간의 공사가 끝난 이해 12월 26일,
한성부는 처음에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나중에는 전차에 부딪쳐 사고를
내지 않도록 시내 각처에 방을 붙여
시민들에게 각별히 주의하라고 알렸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1899년 1월 말 어느 날 밤에 동대문 밖에서
전차용 전선 6간(약 12m)을 절취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날 회사로부터
이 사실을 보고 받은
경찰은 범인 두 사람을 잡아
재판에 회부하지도 않고
무조건 참형에 처했다.
콜브런은 전차 철로를 부설하는 한편
동대문 안에 전차용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를 건설하고 75kw 직류 600V 발전기 1대,
100마력의 증기발전기를 설치한 뒤 미국에서
분해식으로 도입한 전차를 조립,
1899년 5월 17일 성대한
전차개통식을 열었다.
1881년 독일의 베를린에
도시 교통수단으로 노면전차가
세계 최초로 등장한 이래
1894년 동양에서는 최초로
일본 교도에 등장했고, 이로부터
5년 뒤 서울에도 전차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서울에 처음 등장한 전차는
40인승 개방식 8대와 황실용
귀빈차 1대 등 총 9대였다.
개통식에는 귀족·고관·각국 사신과
관리 및 민간유지들을 초대해 화려하게
장식된 8대의 전차에 분승시켜 첫 시주를 했다.
때마침 석가탄신일을 맞아
놀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그 괴이함에 놀라 환성을 질렀고,
전찻길이 사람들로 메워지는 바람에
전차는 가다서다를 반복해야 했다.
초기에는 일본의 교도전차회사에서
데려 온 경험 많은 일본인 운전사에,
한국인 차장을 고용했으며 서대문∼종로,
종로∼동대문, 동대문∼청량리의 3구간으로
노선을 나누어 구간별 요금을 받았다.
1902년까지
창문이 달린
중간 상등실은
한 구간에 3전5푼,
창문이 없는 앞뒤의
하등 칸은 1전5푼 받았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80∼90전으로
그렇게 싼 요금은 아니었지만
전차를 타보려고 전국에서 몰려든
인파로 연일 만원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정거장이 없어
아무 곳에서나 승객이
손을 들면 정거했다.
전차가 개통되자
승객이 줄을 이어
한 번 타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한 번 승차했다 하면
하루종일 내리지 않아
전차 타보기를
단념하는 사람이
많았다.
........
천지를
개벽시킨
전차바람
1925년 하루평균
승차인원 10만여 명
...........................
1899년 5월 17일 개통식을 가진 뒤
10일 만에 교통사고를 일어나 서민들로부터
원성을 샀던 전차는 ‘효도전차계’, ‘전차타기’가
생길 정도로 차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승객이 계속 늘어나자 부산과 평양에도
노선이 만들어지고 전차 대수도 늘어났다.
1930년대에 이르자 승객은 더욱 늘어
경성전기는 최고 호황을 누렸다.
1899년 5월 17일
약 9개월 공사 끝에
우리나라 첫 전차가
서울 장안에 등장했다.
콜브런은 1차로
9대의 전차를 분해해
미국에서 배로 싣고 와
인천항에 내린 다음 다시
범선에 실어 한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마포나루터에 내린 전차는 소달구지에 실려
동대문 발전소 안에 세운 조립공장으로 운반되어
미국에서 함께 건너온 기술자들의 손길을 거쳐
이날 청량리∼서대문간에 부설된 궤도 위에
드디어 그 위용을 드러냈다.
9대의 개방형 전차 중 8대는
유리창도 없이 지붕만 얹고
벤치형 나무의자를 놓았으며,
이 중 고종의 어용으로 쓰인
한 대에만 가운데 유리창이 있는
VIP용 객실을 마련해
태극마크를 그려넣었다.
5월 17일 개통식 때
고종이 직접 전차를
시승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 진귀한
모습을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광화문과
종로바닥은 인산인해.
동대문 전차차고에서
광화문 네거리로 나와
대기하고 있던 어용 전차에
고종을 비롯한 20여 명의 대신과
외국 귀빈들을 태우고 미국인 운전사가
이끄는 전차가 청량리를 향해 출발했다.
공중에 매달린 전깃줄을 타고 가는
긴 쇠막대기 끝에서 번갯불을 튀기며
집채 만한 쇠 당나귀가 한꺼번에 20여 명을 싣고
스스로 굴러가는 모습에 잔뜩 겁을 먹은 구경꾼들은
세상이 개벽하는 듯 넋이 빠진 모습으로 이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워낙 많은 군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행여 백성들이 다칠까봐 염려한 고종의 분부로
임금님의 시승전차는 종롱[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광화문에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개통식 이후 1년 동안,
종로바닥은 전차를 보려고
전국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연일 성시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종로주변의
주막이나 여인숙, 음식점들은
크게 호황을 누렸다.
전차는 처음 몇 달 동안
낮에만 운행하다가 새문안
대궐 앞과 종로에 각각 3개의
전찻길 등(燈)을 마련하면서
야간운행을 시작했다.
..................
참혹한 최초의
전차사고에 경악.
,,,,,,,,,,,,,,,,,,...
처음에는 전차를
전기로차(電氣路車)
또는 전거라 불렀다.
그런데 서양 쇠당나귀가 나타나
조선에 교통혁명을 일으킨것까지는
좋았으나 궤도공사가 끝날때부터
전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았다.
막대한 조선황실의 돈으로 만든
전차를 전차회사 주인 콜브런이
자기 고향인 미국 코네티커트주에
등록해 미국재산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조선의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렸다는 것을 알게 된
장안 백성들은 전차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게다가 개통당시는 무척
가물어 농사짓기 힘들었다.
그런 참에 공중에 매달린
전차의 전깃줄이 번갯불을 튀겨
하늘을 메마르게 하여 비가 안 오고,
땅에 깔린 전차 철로가 땅 속의 물기를
전부 빨아먹어 가뭄이 계속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게다가 차비가 비싸 서민들이 타기에는
그림의 떡인 데다 돈 많은 양반들이나
서양사람, 혹은 천민인 기생들이
놀잇감으로 타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는 꼴이
역겨워 서민들은 차츰
전차를 질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차가 등장한 지 10일 만인
5월 26일, 끔찍한 교통사고를 일으켜
서울 장안 백성들을 경악케 했다.
이미 오래 전에 서양마차나 인력거,
자전거 같은 신식 탈것이 나타났지만
그동안 사람의 목숨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앗아간 사고는 없었다.
전차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 장안의 도로에는 사람, 소달구지,
자전거, 인력거, 강아지들이 뒤섞여 다녀
좁고 혼잡했지만 치명적인 인명살상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이날 전차가 구경꾼들의 혼잡을 헤치고
종로거리 포목전 앞을 지나갈 때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갑자기 전찻길로 뛰어들었고,
이를 미처 피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이는 그대로 즉사하고 말았다.
자동교통기관이 나타나면서
일어난 우리나라의 첫 교통사고였다.
길 가던 행인들과 구경하던 사람들은
난생 처음 보는 참혹한 광경에 기절초풍.
바로 그 순간, 현장에 있던 아이의 아버지가
철물전으로 뛰어 들어가 도끼 한 자루를
집어 들고는 분노를 터뜨리며
전차로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일본인 운전사와
조선인 차장이
전차를 팽개치고
뺑소니를 치려 하자
성난 군중들이
전차 주위를 에워싸고
‘아이를 죽인 전차를 때려 부셔라’고
고함치며 전차를 넘어트린 뒤
석유를 뿌려 불 질러 버렸다.
뒤따라오다가
얼떨결에 이 광경을 보고
주춤하던 다음 전차마저
뒤집힌 채 불태워졌다.
화가 끝까지 난 군중들
가운데 한 무리는 콜브런의 발전소를
부수러 동대문 쪽으로 몰려갔다.
피신해 온 운전사의
보고에 놀란 전차회사는
몰려오는 군중들을 향해 공포를 쏘며
미국과 일본 공사관에 수비대 파견을
긴급히 요청하는 한편 발전소 주위에
쳐놓은 철조망에 전기를 흘려
접근을 막았다.
결국 출동한 수비대와 전기 때문에
더 이상 쳐들어갈 수 없게 되자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사람들이 난폭하게 돌변했던 것은
그렇지 않아도 전차의 비리 때문에
잔뜩 상해 있던 감정이 어린아이를
즉사시키는 끔직한 사고가 일어나자
급기야 폭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사고로 당시의
한성부윤(서울 시장)인
이채연이 해고당하고
경무청장(경찰국장)도
문책 당하는 소동을 빚었다.
사고 다음날 보고를 받은 고종황제는
내무부로 하여금 전차 사고를 당한
아이의 부모를 찾아 보상금을 충분히
지급하도록 지시하고 농상공부(農商工部)와
경무청(警務廳) 및 한성부(漢城府)에 다시는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엄명했다.
농상공부 대신 민영기(閔泳綺)도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고발생
1주일만에 사표를 냈다.
한편 겁에 질린
일본인 전차 운전사들이
호신용 권총 휴대와 전차마다
순경을 배치시켜달라는 요구를
거절당하자 일본인 운전사 전원이 파업하고
귀국해 버리는 바람에 전차가 모두 멈춰 버렸다.
이에 콜브런이
미국에서 급히 불러들인
8명의 운전사와 2명의 기계공이
9월말에 도착, 전차마다 운전석 방호망과
경종(警鐘)을 달고 휴업한 지 4개월 만에
노랑머리 푸른 눈의 서양운전사가
전차를 운전하는 진귀한 광경이 벌어졌다.
이들 미국인 운전사 중 모리스는
계속 서울에 남아 1910년대 중반
미국에서 자동차를 수입해 파는
우리나라 첫 자동차 판매상이 되었다.
.........................
'장안의 명물' 전차
.........................
전차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동대문밖 청량리길 주변에는
인가가 드물었고 논밭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민비의 묘가 홍릉에 안치되고
전차개통과 더불어 대궐과 홍릉관리소
사이에 전언기(전화)가 가설되면서
명승지로 변해 휴일이면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청량리는 계속 번창해갔다.
그런데 전차가 등장하면서
빈부귀천의 반상제도와
구시대의 봉건적인 인간차별의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탈 수 있는 전차는 천민들이
양반들에게 기를 마음껏 펼 수 있고,
남녀간 장벽을 허물어 자유연애를
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또한 서대문∼청량리에 이어
광화문통, 남대문통, 황금정통(을지로),
용산, 마포로 계속 이어지는 전차궤도 부설공사로
서민들이 일거리를 얻어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전차는 차츰 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02년 차체에 전부 유리창이 달린
신형 전차가 도입되면서 상·하등 구별 없이
한 꼭지(한 구간)당 5전으로 올려 받던 전차 요금도
1905년을 넘어서자 3전으로 내려
웬만하면 쉽게 타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하루 세끼 나물죽으로
겨우 살아가는 빈민들은
전차 한 번 타려면 보리쌀
말 꽤나 내다 팔아야
소원 성취할 수 있는
형편이라 타고 싶어도
언감생심이었다.
노부모 살아생전에
전차 한 번 꼭 태워드리고
싶은 것이 서민들의
소원이요 효도였다.
그래서
초기에는
서민들 사이에
‘효도전차계’가
유행했다.
동네사람들 여럿이 모여
곡식을 일정량 거둬 모았다가
이를 판 돈으로 노부모를
차례로 돌아가며 태워 드렸다.
특히 초기에는
중류층 가정의 자제들
사이에 ‘전차타기’가 유행.
주먹밥을 싸들고
주말이면 하루 종일
타는 젊은이들도 많았다.
전차광들이 해가 질 무렵
종로통에 내려 대포생각에
어슬렁어슬렁 종로 뒷골목
피마골의 즐비한 주막으로
들어가면 주모는 반색을 하며
상석에 모셔놓고 술이며 안주며
푸짐하게 대접했다.
주막의 술청에 늘어놓은
안주 바구니를 지키는
‘중노미’라 부르는
떠꺼머리총각들은
전차도령을 만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주모 몰래
안주를 듬뿍
쥐어다 주고는
전차 한 번 태워
주라고 매달렸다.
전차도령이 들어왔다 하면
술 마시던 손님들이 도령주위로
몰려들어 전차 시승소감을 듣느라
밤새는 줄 몰랐고 전차도령은 입에
침을 튀기며 무용담에 신이 났다.
1906년 강원도 광산의 일본인 업주는
보너스로 광원 50여 명을 몽땅 서울로
데려와 하루 종일 전차를 타게 해주기도 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 와서
어쩌다가 전차 한 번 타보았다
하면 두고두고 자랑거리였고,
농삿일이 끝나는 저녁이 되면
그 집 사랑방은 전차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
일본에 팔아버린
한미전기회사
전차들
.........
처음에는
고종의 홍릉행차에
편의를 주기 위해 전차를
부설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차가 개통되자
고종은 홍릉능행에 그다지
이용하지 않았다.
전차의 모양이 상여(喪輿)를 닮아
불길하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초기의 전차는 나무의자에 창문이 없어
비가 오면 우산을 써야 했고 겨울철이면
찬바람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 타고 다니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전부 유리창이 달려
비바람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전차로 바뀌어 빠르고 편리해지면서
서울시민들로부터 선로를 연장하라는
요구가 일기 시작했다.
시민의 편리한 대중교통 수단으로 인기를 끌자
한성전기회사는 1899년 전차 선로를 종로 네거리에서
남대문을 거쳐 용산(원효로 4가)까지 연장하는 공사를
1900년 1월 준공하고 정부 고관들을 초청해
시운전을 가진 후에 개통했다.
마침 1899년 9월 18일에
경인철도의 인천∼노량진간이 개통되자
약삭빠른 일본인들이 노량진에서 용산까지
궤도를 깔아 손으로 레버를 저어가는 도록꼬라는
수압식궤도차(手押式軌道車)를 만들어
승객을 수송하는 운송업이 생겼다.
용산까지는 전차로,
거기서 노량진까지는 수압식궤도차로,
노량진에서 인천까지는 철도 기차를 이용했다.
전차 승객이 계속 늘어나자 1900년 4월에는
개방전차 6대와 화물전차 5대를 새로 도입하는 한편
동대문 발전소에 125kw짜리 직류·교류 병용의
발전기를 증설해 총 200kw로 늘렸다.
또한 1901년 7월에는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의주로 노선도 부설했으나 승객이 적어
수지가 맞지 않자 3년후 노선을 철거해버렸다.
1902년, 계속된 전차노선과 전기 확장사업으로
자금난에 빠진 콜브런과 보스트윅은 자금조달을 위해
한성전기회사를 미국 코네티커트주 세이부룩시에
재산등록을 한 후 엠파이어 트러스트사에
한성전기를 담보로 잡히고 자금을 조달했다.
콜브런은 이어 1904년 한미전기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고, 서울 본사를 지사로
격하시켜 대한제국의 재산을 빼돌렸다.
자금난이 점점 더 악화되자 콜브런과 보스트윅은
한미전기화사와 전차를 1909년 일본이 서울에 연료와
등화용으로 보급하기 위해 세운 석탄가스제조업체인
한일와사회사(韓日瓦斯會社)에 판 일본돈 120만 원을
착복한 후 영국으로 도피해버렸다.
한미전기회사를 팔 당시
37대의 전차와 13대의
화물 전차가 있었다.
한미전기회사를 매입한 한일가스와사회사는
1909년 7월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로 명칭을 바꾸고
마포발전소의 용량을 크게 늘린 후 전차·전등·가스
등의 사업으로 대기업이 됐다.
부산과 평양에도 전차 등장
부산의 첫 전차는
부산궤도회사가 1906년부터 운영하던
부산진과 온천으로 유명한 동래간 9.5km의 협궤열차.
이 노선은 원래 사설철도였으나
1909년에 조선와사전기회사가 매수하여
1915년 초량∼부산진간 10.4km의 전차궤도를 완공한 뒤
이해 11월부터 영업을 시작하면서 부산에도 전차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동래선에는 1934년까지
협궤열차가 전차와 함께 운행되다가
이듬해 협궤열차가 철거되면서 전차는
1973년 부산에서 완전히 퇴역할 때까지
부산∼동래간 교통을 도왔다.
1916년 9월 부산우체국 앞에서
대청동을 거쳐 부성교(富城橋)까지
개통한 데 이어 1917년 12월에는 대청동에서
장수통(長手通)을 잇는 시내 순환 전차가 개통되어
총 전차노선 연장은 19.2km로 늘어났다.
1924년에는 부산역 앞에서
영도까지 선로를 연장했다.
1934년에 와서 일부분을 제외한
모든 선로를 복선화해 시내 교통을 원활하게 했으며
1935년 2월에는 범일역까지 연장했다.
평양에서는 1906년 12월 일본인들이
평양시내철도합자회사(平壤市內鐵道合資會社)를 세우고
6인승 수압인력궤도를 부설하면서 전차가 첫선을 보였다.
1915년 3월 평양시가철도주식회사
(平壤市街鐵道株式會社)로
회사 이름을 바꾸었으나 경영 부진으로
1917년 8월 수압궤도차 운수사업을 폐지했다.
그후 1920년 다시 일본인 20여 명이
평양의 전차부설을 평양부에 요청해
1922년 2월 부의회(府議會)의 동의를 얻어
총독부에 신청했다. 이해 7월 총독부의 허가를 얻은
즉시 평양부에서 착공해 다음해 5월에 개통했다.
전차에 대한 시민들의 호응에
자신을 가진 조선와사전기회사는
1910년 8월 종로∼남대문∼동자동간의
단선을 복선으로 만들었다.이어 창경원선·
을지로선·왕십리선 등을 부설하는 외에
처음으로 부설된 서대문∼청량리간 가운데
종로∼동대문간의 복선화 공사도 대대적으로 벌렸다.
회사 규모가 커지자 조선가스전기회사는
1915년 9월 회사 이름을 경성전기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이때까지 서울에는 종로, 용산, 마포, 서대문, 청량리,
을지로, 왕십리, 충무로 등 8개간선 전차선로가
개통되었고 전차도 93대로 늘어났다. 이렇게 서울 장안
곳곳으로 뻗어간 전차는 빠르고 편리해
시민들은 점차 전차에 중독되어 갔다.
1916년부터 승객이 급속히 늘어나
1925년에는 하루 평균 승차인원이
10만 명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전차의 호황을
1924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는
‘경성전차의 1년 수입액은 160만 원에 달하고
전차 삯으로 지출하는 시민 1인당 평균 1일 금액은
5원43전의 거액이라 했으며 경성 전차객
(京城電車客) 격증’이라고 보도했다.
이처럼 전차가 호황을 누리자
1929년부터 전등, 전차, 가스를
경성부청에서 직접 경영하라는
시민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이들 세 가지는
시민생활의 기본조건이므로
시민의 공익을 위해 부청에서 직접
경영·관리하라는 것이었다.
전기, 전차, 가스의 부영논(府營論) 때문에
크게 위기를 느낀 경성전기회사는 총독부세력을 방패삼아
경성부에 100만 원의 거금을 기부하고
간신히 공영화(公營化)의 위기를 넘겼다.
1930년대 들어 승객이 더욱 늘어나
경성전기는 최고 호황을 누렸다.
‘전차승객 격증, 매일 평균 15만 명’,
‘매일 20여 만 승객을 100여 대 전차로 운송’,
‘돈 있어도 탈 수 없는 도시전차’ 등 당시의
신문기사들이 전차의 호황을 말해주고 있다.
...............
한국 전차
70년의 희노애락
1969년 경부고속도로
개통되면서 전차 사라져
..............................
늘어난 교통량과 경제의 호황으로
승객이 급증하면서 전차도 많아져
1945년 서울에만 101대가 있었다.
그러나 1969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자
70여 년간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싣고 다녔던 전차는 자취를 감추었다.
전차는 1932년 10월 첫 서울 교외선인
동대문∼왕십리∼뚝섬 노선이 개통된 이래
광복 후 교외선에는 전차 대신 휘발유 엔진을
마루바닥 밑에 단 기동차가 운행되어
서울의 명물이 되었다.
1899년 5월 3일 정오
전차가 종로 철길에 등장,
장안 백성들에게 경천동지
(驚天動地)할 사건을 안겨주었다.
고종이 첫 시승을 하기 위해
동대문 전차 차고에서 나온 전차가
광화문 앞까지 가는데 종로에는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사고 위험이 높았다.
‘작일 오후에 전기로 차를 운행하려는데
내거행인(來去行仁)이 전차로를 상할까
염려하야 병정 300명과 순검 250명을 파종하야
철로좌우에 행인을 금단 하야더라’.
전차라는 서양기계에 몽매한 우리 백성들이
사고 당할 위험이 높아 전차가 등장하기 전날
전차운행규칙(電車運行規則)이 처음으로
공포되었는데 다음과 같다.
일제시대 서울 전차의 운영업체인 경성전기회사는
창업 후 30년 동안 서울 시민대중교통에서 독점시대를 누렸다.
그러다가 1928년 경성부영(京城府營)버스가 등장하면서
1933년까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때 처음으로 대형 보기(bogie)전차를
일본 오사카에서 들여와 1929년 봄부터
운행하기 시작하는 한편 교통소통을 빠르게
하기 위해 러시아워에는 직행전차를 운행했다.
1933년에는 적자경영으로
어려움을 겪던 경성부청이 운영하던
사내버스인 부영버스에 이어 1934년 1월에는
청량리∼인천간을 운행하던 경인버스를 사들여
경쟁자를 없애고 버스사업에도 진출해 날로 늘어나는
서울의 대중교통을 다시 독점하기 시작했다.
1936년 들어 서울의 면적이 넓어지면서
교통량이 늘어나고 경제가 호황을 누리는 가운데
1937년 7월 중일전쟁까지 터지자 많은 일본인과
지방민들이 서울로 이사와 전차승객이 폭증했다.
갑자기 늘어난 승객을 해소하기 위해
1929년부터 점차적으로 소형전차 대신
대형 보기식 전차로 바꾸었다.
내부장치와 제동기 등도 크게 개선되어
1935년 현재 반강철제(半鋼鐵製) 대형 보기 23대,
중형 보기 10대, 소형 보기 30대, 소형차 91대 등
154대의 전차가 서울에서 운행되었다.
한편 전차운영업체인 경성전기는 호황을 누렸지만
서울시민들은 늘어난 인구 때문에 전차지옥으로 빠졌다.
아침저녁 러시아워마다
많은 승객이 전차로 몰려
전차를 타기가 겁날 정도였다.
‘사바세계의 아수라장’ 또는 ‘교통지옥’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연일 초만원 전차 때문에 생긴
교통지옥을 당시 신문들은 연일 보도했다.
그러나 1939년부터 2차 세계대전인
태평양 전쟁준비로 광분한 일제의 경제통제로
새로운 전차선로의 부설이나 자동차 도입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여서 전차지옥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침·저녁 러시아워 시간대에만
택시 속도와 같이 속도를 시속 30km로
높인 급행전차를 운행했다.
1940년 4월 1일부터 운행된
급행전차는 러시아워에는
119개 전차정류장 가운데
43개 정류장을 무정차로 운행시켜
교통지옥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다.
교통소통이 빨라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자 급행열차는 이해 8월부터
광복 직전까지 종일 운행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민의 발로
뿌리를 내린 전차는
서울에 이어 1922년 평양,
1916년에는 부산에도 나타나
대도시 교통은 전차가,
지방간의 장거리 교통은
기차가 맡았다.
1945년 광복 당시
서울에는 101대의
전차가 있었는데,
해방을 맞은 서울 시민들이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일주일동안
전차를 타고 다니며 만세를 외치는 바람에
50대의 전차가 부서지기도 했다.
하지만 69년 고속도로가 개통되자
70여 년간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싣고 다녔던 전차는 지하철로 변신해
어두운 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
사고뭉치로
변한 전차들
................
전차는 서울에 등장하면서부터
각종 사고를 연달아 일으켰다.
잦은 고장과 탈선사고, 빈번한 정전으로
전차가 정지해버리면 짧게는 5분에서 3∼4시간,
길게는 1∼2일씩 멈추기도 했다.
여름철이면 홍수 때문에
일주일이나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920년 7∼8월에 탈선, 정전 등으로
전차가 불통된 것을 이렇게 보도했다.
전차탈선 빈번, 30일 밤에도 종로에서 탈선’
‘명치정(明治町)의
전류소동-전류가
전차 안에 들어와서,
일시적으로 크게 혼잡해,
다행히 승객무사’
‘작일(昨日)운전한 전차는 근근 34대,
전부 운전은 아직도 1주간 걸려,
전기회사의 손해는 2만 원’
‘전차 회복--홍수로 인해
선로가 파손되었다가
금일부터는 거의 다 개통’
일제 때 도시 교통사고의 주종을 이룬 것은
사람과 자동차 및 자동차와 전차와의 충돌사고.
당시 전차는 다른 교통수단과 함께
사람이 다니는 도로 위를 달렸던 데다,
운전자의 부주의와 궤도를 횡단하거나
주행중인 전차에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 등
시민과 승객들의 부주의가 겹쳐 사고가 빈발했다.
이에 따라 신문지상에 보도된
서울의 전차사고만 해도 매월
평균 10건이나 됐다.
1923년 5월 ‘동아일보’는
‘교통의 이기(利器)냐 협위(脅威)이냐,
사고 많은 경성전차-작년(1922) 1년 동안에
경성 시내에서 일어난 전차사고가 도합 301건
그 중에 죽은 사람이 3명이요, 기타 중경상을
당한 사람이 298명’이라고 보도했다.
이렇게 전차사고가 갑자기 늘어나자
경기도 경찰부에서는 1922년 5월 사고를
예방하는 전차취체규칙을 공포했다.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899
1902년 '동대문~마포' 전차.
1903년 배오개시장
1903년 여인들의 외출,
1902년 소의문(서소문)을 나선 항아리 택배꾼
1911년
1910년대 이화마을 인근.,베버 신부
1920년대
배오개시장
................배오개시장....................
종로구 인의동 112번지 해운항만청 동쪽 고개
입구에 배나무가 여러 그루가 심어져 있던 데서
배나무고개,배고개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배오개
한자명으로 梨峴(이현)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옛날 이 고개에 숲이 울창하여
짐승과 도깨비가 많았으므로 도깨비고개.
대낮에도 혼자 넘기 무서워
백 명을 모아야 넘는다 해서
백고개,백재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백채라 하다가 배고개가
되었으며 다시 배오개가 되었다.
배오개는 지금 배오개길이 지나는 곳으로
길을 넓힐때 평탄해져 고개 흔적은 없어졌다.
배오개길은 종로4가에서 중구청을 거쳐
동국대학교 입구까지 폭 25m, 길이 950m.
인의동 112번지와 48번지 일대는
광해군이 즉위 전에 살던 梨峴宮터
이현궁은 이현본궁이라고도 하였다.
배오개시장은
예지동,인의동에서
종로5,6가에 이르는
종루 앞 시전상가였다.
배오개시장은
남대문 밖 칠패시장과
함께 조선후기 서울 3대시장
'광장시장'의 뿌리가 배오개 시장.
................................................
..............광장시장.................
종로4가 광장시장은 1905년 개장
100년이 넘은 역사적인 장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이다.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처럼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한복, 직물, 침구, 주방용품, 의류 등
다양한 품목들을 도/소매로 팔고 있어
서민들에게는 굉장히 밀접한 시장이다.
시장 안 가장 유명한 곳은
약 40년 역사의 먹자 골목이다.
소개할 전, 육회, 마약김밥을 비롯해
모듬회, 죽, 순대국, 수수부꾸미, 비빔밥,
떡볶이 등 싸고 다양한 음식들이 가득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평일이나 주말이나
이곳은 서민의 맛을 찾아온 사람들로 가득.
광장시장 대표음식은 전, 육회, 마약김밥이다.
약 50년 역사를 가진 광장 수입구제상가는
시장 입구에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여러 번
지나 작은 골목길의 건물 2,3층에 자리해 있다.
각 점포별 규모는 크지 않고 2,3층을 합해
약 100여 개 점포들로 구성, 운영되고 있으며
상인들은 구제시장과 함께 몇십년 터주대감들.
.............................................................
광장시장 2층 구제옷
ㄱ
...............광장회사............
1905년 7월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 사설(私設) 시장 경영 회사.
"도시(都市)" 말이 가리키는 것처럼
"시장"은 도시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조선 전기 서울에는 종로의 시전가(市廛街)와
더불어 골목골목에 여항소시(閭巷小市)가 있어
장작, 채소·생선·과일 부패하기 쉬운 식료품 거래.
조선 후기 상업 발달에 따라
남대문 밖 칠패(七牌)거리와
동대문 안 이현(梨峴)거리에
대규모 시장이 새로 생겼는데,
이들을 종로(鍾路)거리와 합해
‘도성삼대시(都城三大市)’라 불렀다.
그런데 이현과 칠패의 시장은 모두
새벽에만 잠깐 열렸다가 파하는 한시적
시장이었고, 그 경계도 뚜렷하지 않았다.
뚜렷한 경계가 있으며,
방범 청소 등의 관리가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좌고(坐賈)와 행상이
점포와 노상을 점유하는
도시 상설시장은 1897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정부는 1896년께부터
도시 정비 사업을 진행하면서
종로와 남대문 큰길가를 점유
하고 있던 가가(假家)들을 철거,
이들 상인 일부에게 조세금납화로
쓸모없게 된 선혜청 창고를
새 장사 터로 내 주었다.
이 시장이 신창안장,
또는 선혜청 창내장으로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서울의 군영, 관아 등을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남대문 정거장 바로 옆의
요지에 자리 잡은 선혜청
창내장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김종한(金宗漢), 박기양(朴箕陽),
신태휴(申泰休) 등의 고위 관리들과
홍충현(洪忠鉉), 박승직(朴承稷),
최인성(崔仁成) 등의 상인들이
회사를 설립하고 새 시장을
건설하기로 했다.
시장 부지는
개천 광교에서
장교 사이 구간을
복개하여 확보할 계획
이에 따라 회사 명칭을
광장회사(廣長會社)로 정했다.
김종한 등이 농상공부에
회사 인가를 청원한 것은
1905년 7월 10일 경이었고,
신청 직후 바로 인가를 얻어
복개 공사를 개시했다.
그런데 공사 도중 큰 비가 내려
자재들이 유실되자 복개를 포기하고
조선 말기 이래 ‘도성삼대시’의 하나로
꼽히던 배오개 시장 인근에 시장을 건설
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이에 회사 명칭을
광장회사(廣藏會社)로 바꾸고 토지를 구입한 뒤
새 상설시장을 설치해 광장시장(廣藏市場)이라 명명.
.
개설 당시 광장시장에는
와가(瓦家)로 된 고사(庫舍) 50개 소와
양철로 지붕을 덮은 다수의 노점(露店)이 있었고,
입점(入店) 상인은 200여 명이었다.
시장 주위에는 흙으로 울타리를 쌓았고,
남문, 북문, 동문, 서문의 네 문을 설치하여
일몰이 되면 폐문했다. 초기 사무는 김동형(金東衡),
오한길(吳漢吉), 안태호(安台護) 등이 맡았고, 일제때
홍석구(洪奭求)가 오랫동안 지배인으로 사무를 전담하였다.
광장시장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은 것은 1909년 3월 초.
광장회사는
1911년 조선회사령 실시에 따라
광장주식회사로 인가(認可) 받았으며,
1912년에는 주주총회에서 고위 관료 출신들을
사퇴시키고 상인들이 경영권을 장악했다.
이후 광장주식회사는
한동안 박승직이 대표를 맡았다가
1920년경부터 김한규(金漢奎)가 대표직을
승계하여 일제 강점 말기까지 자리를 지켰다.
광장회사는
창립 당시의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 회사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두산그룹 창업자 박승직
19세 때부터 행상을 시작.
1896년 박승직상점을 개설
포목 도산매를 시작했다.
1905년 광장주식회사 설립에
앞장서면서 대표이사에 선임되었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1907년 42명의 포목상인들과 함께
공익사를 설립해 초대 이사장에 취임.
1917년 공신상회를 열어
사업영역을 곡물류로 확대했고,
1930년 경성상공협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박가분제조본포에서 박가분을 생산
면포를 사가는 고객들에게 덤으로 주다가
이후 방문판매로 수익을 올렸으나 원료인
납의 유독성이 알려지며 1937년 문을 닫았다.
1933년 쇼와 기린맥주주식회사의
설립에 참여해 대표이사를 지냈으며,
1940년 공익사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다.
박승직상점은 1948년 두산상회로
바뀌면서 두산그룹의 단초를 놓았다.
...........박승직 상점......................
19세 때 송파상인들과 알게 되면서
송파장에서 물건을 구입하여 처음에는
전남 지역 중심으로 내륙을 순회하며 행상
어느 정도 돈이 모아지자 그는 제물포에서
직접 외국 상품을 구입하여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진출해 적지 않은 자금을 마련하여, 1896년 그는 지금의
종로4가에서 동대문에 걸쳐 있던 배오개에 박승직상점 개설.
포목 도산매를 시작하였다.
이즈음 관직에도 진출하여
1900년레 성진감리서 주사.
그후에 정3품 중추원의관.
1905년 7월 그는
동대문시장 상인들이
자본금 7만 8,000원으로
동대문시장 관리회사인
'광장주식회사'를 설립에
앞장서면서 대주주로서
취체역에 선임되었다.
한국 최초 경영인 단체인
한성상업회의소에 재직 중
1907년에는 일본으로부터 얻은
1,300만 원의 차관을 갚기 위해
거족적 국민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 운동주체
대구 광문사에 70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1907년 그는 최인성(崔仁成)·김원식·최경서 등
42명의 객주 출신 포목상인들과 함께 합명회사
공익사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공익사는 처음에 1만 원을 출자하였다.
1909년 자본금을 2만 9,000원으로 증자
1910년에 이토추상사[伊藤忠商社]와 합자
자본금을 4만 6,000원으로 증자하였다.
1914년 자본금을 50만 원으로 증자
주식회사로 개편하여 국내 각지 및
만주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였다.
1919년에는 만주지점을 합하여
만주공익사를 설립하였다.
1917년 그는 동대문시장 안에
곡물상이자 정미업소인 공신상회를 열어
사업 영역을 직물에서 곡물류로 확대했다.
1921년에는 곡물의 유통시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자본금 100만 원으로 세운 '경성곡물신탁주식회사'에
유일한 한국인으로 참가하였다.
1918년에는 경성포목상조합 결성을 주도
1919년에는 직물상공제회 회장으로 선출.
같은 해 고종 장례식과 1926년 순종 장례식에서
상민봉도단장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1930년에는
경성상공협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한국인 상인계의 리더로서 행동하였다.
그의 기업 활동 중에
이색적인 것이
박가분제조본포이다.
납과 돌가루를 섞어 만드는
재래의 화장품 제조법에 부인
정씨의 아이디어를 곁들여 만든
박가분은 처음에는 박승직 상점에서
면포를 사가는 여인들에게 덤으로 주던 것
1915년부터 방물장수를 통해
가가호호 방문판매로 팔리며
박승직상점의 만만치 않은
돈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원료인 납에 유독성이
알려지면서 1937년 문을 닫았다.
1933년 그는 김연수(金秊洙) 등과 함께
쇼와 기린맥주주식회사의 설립에
참여하여 취체역을 역임하였다.
쇼와 기린맥주주식회사는
1945년 8·15광복 후 아들 두병이 인수
1948년 동양맥주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
현재도 그의 장손인 용곤이 운영하고 있다.
그는 77세인 1940년
공익사 대표이사에서 물러났는데,
박승직상점은 1937년부터 경성고등상업학교
(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를 졸업하고
은행에서 4년간 견습생활을 했던
맏아들 두병이 맡고 있었다.
박승직 상점은
1948년 두산상회로 바뀌면서
재벌그룹 '두산'의 단초를 놓게 된다.
.................................................
..............동대문시장..............
종로4가와 청계4가에서 시작하여
동대문 인근까지 이어져있는 시장
1905년 김종한 외 3인이 광장주식회사 설립
동대문시장(현재 광장시장)을 등록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시장으로 출발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배오개시장으로 알려지기도 했는데,
전차의 부설과 한국전쟁 이후 근처에 평화시장 등이
생겨나면서 상권이 더 커져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양대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 상가 팀204가 건설되고,
이후 동대문길을 따라 아트프라자,
우노꼬레, 혜양엘리시움, 디자이너클럽,
프레야타운, 밀리오레, 두산타워 등도
들어서면서 시장과 주변이 복합 현대화.
.....................................................
1953년
1962년
2018.01.24
종로4가 로터리의 창경궁 쪽 모퉁이에
'두산그룹 발상지'라는 소공원이 있다.
1896년 박승직 상인이
박승직 상점을 열었던 곳.
이 상점이 먼훗날 두산그룹.
이 소공원은 1996년,
두산그룹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서 조성된 시민공원이다.
120년 역사의 두산그룹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기업 중
최장수 기업으로 공인되었다.
박승직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이자
해방 직전 박승직 상점 문을 닫았다.
6·25 전쟁이 나던 1950년, 86세로 운명.
그러나 그의 사업이 끝난 것은 아니다.
1946년 아들 박두병에게 가게 문을 다시
열게 하고 두산(斗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경영이란 보잘 것 없는 콩 한알 한알이 모아져
말(斗)이 되고, 그 말을 다시 차근차근 쌓아 올려
산(山)이 되는 것을 알았다." - 두산(斗山그룹 창업자 -
.........박승직..........
두산(斗山)그룹 창업자.
1864년 6월 22일 경기도
광주에서 아버지 박문회(朴文會)와
어머니 허씨(許氏)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대한제국기 성진감리서 주사, 중추원 의관, 공익사(公益社) 사장
일제강점기에는 박승직상점 사장을 지내면서 직물상공제회 회장,
경성상공회의소 회장,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등으로 위촉되었다.
1950년 12월 20일 사망했다.
....................................
개화기
우리나라 기업을
이끌었던 보부상.,박승직
박승직은 보부상으로 상인 생활을 시작.
1882년, 그가 18세 되던 해 전국을 다니며
시골 아낙들이 짠 옷감을 수집해 한양에 판매.
지금의 종로5가 광장시장 부근인 배오개에
집을 마련해 놓고 수집해온 것들을 거래했는데,
정식 가게를 열지 못했다. 육의전 상인이 아닌 때문
서울에 포목점을 열려면 육의전 상인이어야 했다.
보부상은 정식으로 가게를 내고 장사하면 안 됐다.
광목, 비단, 명주, 모시 종이, 어물 등 모두 규제 대상
육의전 아닌 상인들은 ‘난전’이라고 불렸으며
언제든 단속을 당하는 처지. 수백년간 그랬다.
그 때문에 조선상업은 피폐 백성들의 삶은 궁핍.
수백년 동안 육의점 독점 체제는 변하지 않았다.
.
1894년 갑오개혁 변화가 왔다.
육의전 독점권이 폐지된 것이다.
떠돌이 상인들, 즉 난전들도 비로소
합법적으로 가게를 낼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6년 박승직도
자기 이름을 내걸고 박승직 상점을 열었다.
그 상점이 해방 후 두산그룹으로 발전했다.
옷감 화장품 쌀 거래…‘배오개의 거상’
박승직이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박승직 상점에
물건을 공급했고 더욱 많은 소비자들이
그곳에 와서 옷감을 샀다.
초기에는 조선 시장 만을 상대
1910년대 후반부터는 장춘 하얼빈
등 만주 지방으로까지 진출했다.
1915년부터는 화장품 사업에도 진출했다.
그의 부인 정정숙이 사은품으로 만들어 나눠준
분(파운데이션 같은 화장품)이 손님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자 정식 제품으로 만들어 판매를 시작했다.
1917년부터는 동대문 일대에서 쌀장사에도 진출.
광장시장 사장이 되어 조선상인들의 장사 터전을
닦기도 했으며 이래저래 박승직은., 배오개의 거상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개천에서 용’이 난 셈이다.
상인으로서 박승직의 영향력이 컸음은
1919년 고종께서 승하했을 때, 그리고
1926년 순종께서 승하했을 때도 박승직이
상민봉도단장을 맡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봉도단이란 임금의 상여를 매기 위해 조직한 모임
왕가봉도단, 상민(常民)봉도단 등으로 구성됐는데
박승직은 국가적 행사에 두 번이나 상민 대표로 선발
대표적인 거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약속과 신용
상인.,박승직
그가 상인으로서 신망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약속을 철저히 지켰고 또 용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새로운 스타일의 상인이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서는 상인들을 천하게 여겼다.
사농공상 국법 질서상 가장 천한 직업이기도 했지만
상인 자신들도 대부분 천하게 행동한 것이 사실이다.
고객들의 눈을 속이고 약속을 어기는 것이 다반사였다.
또 장사의 규모를
키우려 하기보다는 번 돈으로
양반 신분을 사고 벼슬길에 나서려 했다.
박승직이 새로운 종류의 상인인 것은
약속과 신용을 목숨처럼 중히 여겼고
벼슬길에 나서는 대신 사업 확장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기업가의 출발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승직 상점에서 OB맥주로 변신,
1990년 대 말에는 두산중공업이라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박승직 정신은
두산그룹 속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
..................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했다.
아버지가 경작하는 토지의 지주인
민영완(閔泳完)이 해남현감으로 부임할 때 동행.
해남에서 모은 돈 300냥을 형 승완(承完)에게 보내
1882년부터 송파장에서 포목행상을 시작한 것이 박승직상점의 시초.
1884년 해남에서 돌아와서 형과 함께
장사하다가 1886년부터 단독으로 포목상.
처음에는 송파장 물건을 구입하여 내륙순회 행상
뒤에는 제물포에서 수입상품을 직접 구입하여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진출해 적지 않은 자금 마련
상술이 좋아 1889년에는 경성 배오개
(종로 4가 92번지)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1896년 6월 종로 4가 15번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박승직상점에서 영국산, 일본산 등
다양한 직물을 취급하며 거상으로 성장.
1900년 12월 성진감리서 주사,
1905년 4월 중추원 의관(짧게 관직생활)
1905년 7월 광장주식회사 발기인과 취체역을 맡았다.
같은 달 한성상업회의소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
1906년 1월 상의원, 1909년 상임위원을 맡았다.
1906년 합명회사 창신사(彰信社) 발기인으로 참여
1907년 8월 최인성과 합동으로 자본금 2만 900원으로
합명회사 공익사(公益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9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는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14년 공익사를 주식회사로 전환
자본금이 50만원으로 증자되었는데,
일본 자본이 유입되어 조·일합자회사.
공익사는 국내 및 만주 각지에 지점을 설치
1915년 화장품 제조업 박가분 본포(本鋪) 설립
1918년 특허국에 박가분 상표를 정식으로 등록했다.
1920년 이후 선풍적인 인기로 판매되었으나
1930년대 일제 화장품 수입시판으로 1937년 폐업.
1917년에는 미곡 판매 및 정미업에 진출하여
예지동(동대문시장)에 공신상회(共信商會) 설립
1918년 경성포목상조합 조합장에 추대되었다.
1919년 3월 고종 국장(國葬) 때
상인봉도단(商人奉悼團) 단장으로 활동
같은 해 3월 만주공익사를 설립해서 감사역을 맡았고,
9월 직물상공제회 회장, 11월 조선경제회 발기인과 취체역,
1920년 1월 동양염직㈜ 취체역을 지냈다.
1921년 6월과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 준비위원과
지방위원, 같은 해 10월 경성곡물신탁㈜ 감사역을 맡았다.
1922년 11월 유력 경제인들이 친목도모와 일선융화(日鮮融和)를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실업구락부 발기인으로 참여해 평의원 등 임원을 역임
1923년 10월 교육실천회 특별회원,
1924년 4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2월 박승직상점주식회사로 개편 사세 확장.
1926년 순종 국장 때 상인봉도단을 이끌었고,
1927년 이상재(李商在) 사회장에서 준비위원을 맡았다.
1930년 2월 경성상공협회 회장에 선출되었고,
1931년 10월 중앙일보사 취체역을 맡았다.
1933년 12월 쇼와기린맥주주식회사 주주와 취체역으로 참여
같은 해 경성창고금융㈜과 조선직물㈜ 감사역으로도 활동했다.
1934년 2월 경성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7년 4월 경성상공조합연합회에서 공로자 표창.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2월 조선지원병제도 제정
축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쌍수(雙手) 들어 축하」
(『매일신보』1938.2.23.)라고 징병제를 환영하는 글을 썼다.
같은 해 8월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평의원과 국민정신총원 경성부연맹 상담역으로 위촉되었다.
1939년 11월 친일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
1940년 6월 경성경제통제협력회 상임이사,
10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40년 8월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로 창씨개명을 했다.
1941년 3월 박승직상점을 미키[三木]상사주식회사로 개칭
1941년 12월 경성부 총력과 방문 해군 국방헌금으로 1만원 헌납
1943년 2월 방공협회를 통해 방공감시대
위문금 100원, 5월 육군에 국방헌금 200원을 냈다.
해방 후 양조업과 운수업으로 눈을 돌렸다.
1945년 장남 박두병(朴斗秉)이
쇼와기린주식회사 관리지배인으로 위촉
같은 해 10월 임시정부요인을 맞기 위한
한국지사영접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46년에는 처 정정숙과 장남의 처 명계춘이
두산상회라는 상호로 운수업을 시작했다.
그해 10월 일본식 상호인 미키상사를
박승직상점으로 환원했다가
1948년 두산상사로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