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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1 너, 남을 심판하는 자여! - 유기성 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2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요 그대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린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요 그대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들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없이 여기는 것입니까?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종기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을 주실 것이오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종기와 평강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같이 나누고 싶은데요 하나님께서 로마서 2장 1절부터 11절 말씀을 가지고, 너, 남을 심판하는 자여라는 제목의 말씀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마음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세상 죄를 다 짓고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인지, 그들에게 심판이 있을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그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그보다도 더 큰 죄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죄가 있으면 뭐가 있겠습니까? 바로 남을 심판, 판단하고 정지하는 죄가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1장 18절부터 32절까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그저 불경건과 불의를 행하는 이들을 조목조목 그 죄를 열거하면서 이들은 사형에 합당하다 하나님이 반드시 죽일 거 멸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두 손 들고 아멘 당연히 그렇습니다.
아멘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누구냐 하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직접 받았고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일에 자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
그들은 선민의식이 대단히 강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과 자기들과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습.
그래서 그들은 사도바울의 말에 100% 동의 말씀 잘하셨습니다.
사도바울 말씀 잘하셨어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 불의한 이방인들은 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그랬었어요. 그런데 사도바울이 바로 그 유대인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선언을 오늘 하는 겁니다.
1절 말씀에 보면 남을 심판하는 자요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은 여러분의 마음에 반드시 새겨두셔야 됩니다.
하여튼 이 말씀이 계속 새에서 여러분의 속에서 들려져야 됩니다.
남을 심판하는 자요
이 말씀을 잊어버리면 여러분 남 심판하는 자리에 빠지게 됩니다.
너 남을 심판하는 자요 그때 정신 바짝 차리고 아 내가 판단하고 또 정죄하고 있구나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이건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이에요. 여러분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중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 여러분 이 말씀을 여러 번 들어보셨을 거예요.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게 죄라고 하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모르시는 게 아니실 겁니다.
근데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니까 계속 판단하고 정죄를 계속하는 겁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게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듣기는 했었지만 마음에 새겨지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허랑방탕하게 하나님 믿지 않고 사는 사람하고 은근히 마음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자신하고 누가 더 죄인 같습니까? 솔직히 여러분 누가 더 죄인 같아요? 하나님 믿지 않고 온갖 죄를 저지르는 그런 방탕한 사람하고
은근히 마음에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하고 누가 더 죄인 같습니까? 아직도 그래도 방탕한 사람이 더 죄인이지 이런 생각이 있으니까 마음에 남 심판하는 마음을 해결 못 받는 겁니다.
인터넷에
실린 글 중에 진짜 무서운 사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새벽 기도 한 번도 빠지지 않는 집사님 눈길이 무섭다
십일조 정확하게 꼬박꼬박 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다 40일 금식기도 다녀온 권사님 눈길이 무섭다 크고 건강한 교회 다니는 성도가 무섭다.
신학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다.
왜 무섭지? 그들 속에는 은근히 남을 판단하는 게 있다는 겁 나는 잘하는데 나는 이만큼 열심인데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있는데 이게 무섭다는 거
바리새인들 성경에 그렇게 나오는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 철저하게 지키되 하나님이 주신 거 외에도 자기들이 만들어 가지고 그 율법 규정을 더 만들었습니다.
부가적으로 탈무드가 있는 많은 부분이 그런 내용들이죠.
심지어 음식을 하는 데 들어가는 그런 양념까지도
십일조 바쳐야지 그래 가지고 그 양념에 11조를 바칠 정도로 하여튼 철저하게 철저하게 율법 지키며 살려고 했던 사람이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경건과 열심히 광기가 돼버렸어요.
어느 정도로 죄 짓는 사람 돌로 쳐서 죽일 정도로
신앙 열심이 잘못 빠지면 이렇게 갑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는 것이 사람을 돌로 쳐 죽이는 수준까지 갑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이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가 얼마나 큰지를 명심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지옥이 불쏘시개라고 생각했습.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1절 하반절에 그대는 남을 심판하는 일로 결국 자기를 정죄하는 셈입니다.
남을 심판하는 그대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엄청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우리가 심판하는 대로 우리도 그대로 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3절에 또 이야기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요.
정말 그렇다고 수긍 안 하는 사람 많습니다.
세상에 저 방탕한 사람 하나님 믿지도 않는 온갖 죄를 저지르는 저런 사람들하고 나하고 같다고 나도 그 사람들처럼 그런 죄를 짓고 있다고 인정 안 하는 사람 많으실 거예요. 실제로 제가 성경 공부 인도할 때 어떤 교인이 그랬어요.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 다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 저 정말 끔찍한 죄수나 아주 교양 높은 사람이나 다 뿌리는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랬더니 막 엄청나게 반발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저도 제 속에 죄가 있다는 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제가 저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저 폭력배 살인범 저 끔찍한 가정 파괴범과 내가 같다고요? 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너무너무 당황스러웠어요.
그렇게까지 강하게 말할 줄은 몰랐어.
아마 심정적으로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으실 거예요. 예수를 믿으면서도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 벌레만도 못한 자다 말할 수 없는 죄인이다 다 교리지 실제로 마음에는 난 괜찮은 사람이야 이런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제가 그랬거든요. 저는 그냥 정말 교리로는 내가 지옥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나쁜 사람 너무 많다 이런 생각하고 살았어요.
그 말은 나는 나쁜 사람 아니라 그런 뜻이에요.
세상에 나쁜 사람이 많은 거지 나는 뭐 괜찮은 사람에 들어가는 것은 주께서 제 눈을 열어서 저 자신의 실상을 보여주시기 전까지는 정말 그랬습니다.
주님이 저 자신을 보게 해 주셔서
제가 얼마 많은 죄인인가를 깨닫고서야 저보다도 더 악질인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예수를 믿으셨는데 여러분보다도 더 악질인 사람 보신 적 있습니까? 솔직히 이 점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어떻게 대답하시느냐에 따라 여러분이
진짜 예수를 믿고 있는지 아닌지가 구분됩니다.
세상에 나보다 악질인 사람 많지요. 아직도 본인은 진짜 예수님을 만난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만한 죄인인지를. 여러분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를 덮어버리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걸 악용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뻔연히 죄를 짓고 잘못을 해놓고 우리 서로 비난하지 맙시다.
남 판단하지 맙시다. 우리 다 예수 믿는 사람인데 남 판단하고 심판하고 그러지 맙시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죄를 지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완전히 악용하는 사람.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구원하신 겁니다.
우리 가운데 죄가 있으면 반드시 해결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해결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 이런 태도는 이건 큰 죄라 죄를 지은 사람보다 더 큰 죄라는 거예요.
나는 의인인데 너는 죄인이야. 이건 죄 짓는 사람보다 더 큰 죄 심판하는 죄 판단하는 죄 마태복음 5장 22절에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
살인죄와 똑같은 죄를 적용하신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마음으로 형제를 비판하고 그에게 노하면 실제로 죽인 것과 같다는 거죠.
마태복음 25장 28절에 보면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이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실제로 간음한 거나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거나 같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러니 여러분, 남의 죄에 대해서 나는 의로운데 너는 죄인이야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꼼짝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심판을 받는 겁니다.
누가복음 6장 37절에 비판하지 마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오.
정죄하지 마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비판하면 반드시 나에게도 그 죄가 있기 때문에 꼼짝없이 나는 그 비판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그런데 내가 남을 용서하면
내게도 그런 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 용서로 인하여 내 죄를 용서하십니다.
근데 돌아오는 게 더 큽니다. 내가 비판하면 더 큰 비판이 돌아오고 용서하면 더 큰 용서가 돌아옵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이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 명심하셔야 돼요. 프란시스 쉐퍼라고 하는 신학자는 이 말씀을 실제로 표현 적용하기를 보이지 않는 녹음기가 있다고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 보이지 않는 녹음기를 달고 다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는 말이 그대로 다 녹음이 됩니다.
언제 그게 틀어지죠?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때 틀어집니다.
여러분이 한 말 그대로 다 들립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여러분이 심판을 받습니다.
너가 그랬잖아 잘못된 것이라고 너가 그랬잖아 그게 죄라고 이게 두려운 거지.
그러니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용서하는 말을 하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이건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여러분이 돌려받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뭘 잘라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시려고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의 민족 중에 제일 작은 민족을 하나님이 선민으로 택하신 겁니다.
유대 민족을 선민으로 택한 걸 보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구나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을 민족이 없으시구나 저 유대인을 택한 거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도 받아주시겠구나 그렇게 쓰시려고 유대인을 택하신 거라.
신명기 7장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요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그랬는데 유대인들은 자기가 선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랑하고, 이방인들은 불소식 지옥이 불쏘시개라고 그렇게 멸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고 그랬으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시고 계시다.
오랫도록
유대인들이 지금도 저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래도록 기다리고 계시 돌이키기를 그런데 그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만우리 여기니 하나님을 없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4절에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그대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오래 참으심을 없신 여기는 것입니까? 그랬어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죄를 짓는 사람이 나오면 우선은 나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하는 점을 인정해야 되고, 그 사람만 죄인이고 나는 의인이라는 태도를 가지면
이건 더 무서운 죄를 짓게 되는 거니까 나도 똑같은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를 실제로 지은 거고 나는 가능성만 가지고 있는 거 나나 당신이나 똑같은데 하여튼 이 죄는 해결을 해야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죄를 접근해 들어가야 되고 또 그 사람이 회개하기를 스스로 회개하기를 기다려줘야 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고 그리고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으로 오래 참으신 하나님같이 해야 된다는 대만 제자훈련 세미나 갔다가 마지막 시간에 질문이 하나 올라왔어요.
질문이 뭐냐 그랬더니 교회는
문제가 많은 목사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요? 공개적인 답변이 불편하시면 강요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런 질문이 올라왔어. 문제가 많은 목사님은 어떻게 해야 되지? 제가 답변을 드렸어요.
그가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어떻게 할 건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문제가 많은 목사님 어떻게 해야지 그분이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내가 어떻게 할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은 가족이라면 죄를 덮어버리라 이런 뜻이 아닙니다.
죄는 해결해야 돼요. 문제는 고쳐야 됩니다.
그런데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면 안 된다는 거
만약에 그분이 아버지나 형이나 동생이라면 막 소문 내겠습니까? 이 목사님에게 문제가 많습니다.
그분이 내 아버지고 형이고 동생이라면 하여튼 말 안 하고 그분 찾아가서 이거를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고치셔야 됩니다. 말을 해도 얼마나 부드럽게 얼마나 진심으로 스스로 돌이키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얼마나 오래 기다려주면서
하겠냐 말이에요. 그런데 내 가족이 아니면 그냥 말만 하거든요.
이럴 수가 있느냐 저럴 수가 있느냐 어쩌면 그렇게 엄격하게 어쩌면 그렇게 단호하게 문제를 처리하려고 하느냐 어째서 기준이 그렇게 둘이냐 말이에요.
똑같은 문제를 처리하되 어떻게 기준이 둘이냐 내 가족에게 하는 방법이 다르고 가족 아닌 사람에게 하는 방법이 다를 수가 있겠냐
이게 죄라고 하는 거죠. 그리고 정말 그 문제 많은 목사님 나는 그 목사님에게 어떤 교인인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을 가르치실 것이라.
여러분 로마서 1장과 로마서 2장은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에 그대로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다 써버린 둘째 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둘째 아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그 둘째 아들 동생을 받아준 아버지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했던 또 큰아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 큰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다 탕자라는 거 그리고 이 큰아들이 더 큰 죄인이라는 거
로마서 1장 18절에서 32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탕자 이야기입니다.
오늘 로마서 2장 1절에서 11절까지 나오는 이야기는 큰아들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대부분 큰아들에 속합니다.
이미 예수 믿으시고
그리고 오늘 이렇게 주일에 교회까지 와서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들을 어찌 탕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러분들은 반듯하시고 그래도 예수 믿으시고 이제 삶이 많이 변하셨고 그래도 경건하시고 그런데 문제는 큰아들 같아져 가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큰아들 같은 그것은 방탕한 사람을 보면
갑자기 마음에서 판단이 일어나요. 마음의 정직함이 일어나요.
여러분은 방탕한 사람이 여러분 가까이 오시면 어떤 느낌이십니까? 큰아들 같아지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다 있어 나는 저런 사람하고 같이 얽히기 싫어.
5절 말씀에 그대는 완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으니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이 나타날 진노의 날에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왕고하여 회개할 마음이 없다는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죄인 아닙니다.
심판하는 사람이에요. 죄를 지은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그런 짓 안 했다고 발뺌하고 어떻든지 변명합니다.
그러다가
죄가 밝혀지면 확 꺾어집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두려워하면서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죄가 드러나면 꺾어져요.
그리고 용서해 달라 그러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오히려 회개할 기회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정죄하고 심판한 사람은 좀처럼 회개를 안 합니다.
왜?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니까.
잘못한 사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뭐가 잘못이냐 잘못한 사람을 잘못했다고 해 고쳐야 되지 않겠냐 내가 교회를 위해서 했는데 가족을 위해서 했는데 이 정죄하고 심판하는 사람은 좀처럼 자기가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 앞에까지 갑니다. 하나님 앞에까지 하나님 앞에 가서 자기가 그동안 말했던 거, 행동했던 거, 마음에 품었던 거 다 드러나고 난 다음에서야.
그러나 그는 정말 기절하시게 내가 나를 정죄하고 살았구나
꼼짝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비판 잘하는 사람 당신 왜 그렇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냐 그렇게 질문하면 그러면 내 성품이 성격이 철저하고 솔직하기 때문이라고 대부분 그렇게 변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몰라서 그런 것
왜 당신이 그렇게 비판적입니까? 자기 죄를 몰라서 그런 거라니까 특히 남의 죄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 이게 얼마나 큰 죄인지를 모르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사람이 성격이 솔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 아닙니다.
철야 기도 시간에 요즘에는 온전히 철회하는 그런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만 전에는 정말 온전히 철회했죠.
철야 기도 시간에 어느 집사님이 보니까 장로님 권사님들이 다 자는 거예요.
기도를 안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어요.
하나님 장로 권사도 이렇게 다 자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얼마나 민망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 집사에게 말씀을 주셨대요.
너 잠도 안 자고 남 흉이나 볼 거면 너 그만 자라.
조크지만 정말 깊이 새겨드려야 되는 거예요.
나는 뭘 잘했고 나는 그렇게 안 했고 누구는 뭐가 잘못이고 누구는 뭐가 문제고 이런 식으로 할 바에야 그게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자기가 깨달아야 된다는 거예요.
프랜시스가 제자들과 함께 40일 금식할 때
39일째 어느 제자가 그만 그 허기를 이기지 못해서 스프를 한 숲은 떠마셨습니다.
제자들이 다 그 숯불을 떠 먹은 제자를 노려보는 거예요.
금식을 깨뜨렸다고. 그때 프란세스가 스푼을 들고 가서 자기도 그 스푼을 떠먹었어요.
제자들이 경악했습니다.
아니 선생님 아직 금식이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드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가 금식하는 것은 정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자고 우리가 금식하는 건데 우리가 굶으면서 이렇게 서로 미워할 바에야 차라리 먹고 서로 사랑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여러분 기준을 분명히 하셔야 돼요.
아무리 신앙생활 잘하고 열심히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고 있다면 나는 완전히 지금 잘못 가고 있는 겁니다.
더 무서운 죄를 짓고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예수님을 진짜 제대로 믿었고 바로 믿었다면 나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겁 믿음은 사랑으로 열매 맺어져야 그게 진짜입니다.
6절 말씀은 좀 충격적이에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심판은 그 사람이 어떻게 행했느냐에 따라서 심판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로마서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로마서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복음을 증거한 책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분명히 로마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놀라운 복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심판은 분명히 행한 대로 받는다고 이야기하고 있음을 여러분이 보시잖아요.
7절부터 11절까지 보세요.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며 영광과 존기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이기심에 사로잡혀서 진리를 거스리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9절, 10절 말씀은 거기에다가 유대인에게서부터 그리스까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동일하다
11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 그건 아멘이에요.
그러나 그 믿음은 반드시 합당한 행함이 따라오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은 어떤 죄를 짓고 살아도
믿으니까 구원해 주시겠다는 뜻으로 주신 게 아닙니다.
믿으니까 이제는 구원받을 자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구원받은 자의 삶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러낼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거죠.
구원을 받기 위해서 행함이 꼭 필요하다 그런 뜻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예요. 그러나 정말 믿은 사람은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게 돼 있습니다.
사과나무에 사과 열매가 맺어지니까 사과나무인 줄 아는 겁니다.
근데 사과 열매 때문에 사과나무가 사는 건 아니에요.
사과나무가 사는 것은 뿌리가 살아있으니까 사는 거죠.
이 뿌리가 믿음입니다. 그러나 사과나무인 줄 알았는데 열매가 돌 복숭아가 맺혀요.
그러면 이건 사과나무가 아닌 겁니다.
그런 경우에는 나무가 문제가 생긴 거죠.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절대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성숙한 과정에서 판단과 행동의 기준이 변합니다.
어릴 때는 무조건 좋고 싫은 거예요.
기준이 나에게 유익하냐 어떠냐 분별의 기준이 없으니까 그냥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무조건 안 하는 겁니다.
어린 애들이죠. 조금만 나이가 들면 이제 유익한 게 뭔지를 알게 됩니다.
뭐가 나에게 유익하고 뭐가 나에게 손해냐 하는 계산이 돼요.
조금 더 가면 내 편이냐 아니냐 이것도 중요한 기준이에요.
더 성숙하면 옳으냐 그르냐 이게 기준이 됩니다.
이 정도쯤 가면 대단히 성숙한 사람입니다.
옳으냐 그르냐는 기준을 가지고 문제를 보는 것은
성숙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예수를 믿으면 거기서 하나 더 갑니다.
하나 더 가요.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옳으냐 그르냐는 기준을 넘어서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옳으냐 그르냐는 기준을 넘어서라 어떤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옳으냐 그르냐는 것 때문에 다 관계가 깨지는 겁니다.
부부 싸움 왜 하시고 사세요 결국 뭐가 옳으냐 그르냐를 가지고 싸운 거 아닙니까?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 가지고 싸운 거 아니에요 왜 하나님의 천국 같은 교회가 깨지고 싸웁니까? 옳으냐 그르냐 가지고서 싸우는 거잖아요.
옳으냐 그르냐는 것은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하나 더 가야 돼요.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어요.
옳으냐 그르냐 아닙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를 우리의 죄를 지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거잖아.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 죽인 원수를 양자 삼았어요.
옳으냐 그르냐 가지고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나 위해 죽으시고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니 내가 예수님 바라보고 살면 우리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용서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예수님 바라보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정지하고 판단하고 정지하고 판단하고 이건
흉내 낼 수가 없습니다. 서로 꾸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진짜 구주로 영접했는지 아닌지는 용서와 사랑을 하는지 아니면 정지하고 심판하는지를 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지난 월요일에 마음에 꼭 지적을 해줘야 될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이걸 반드시 고쳐야 되고 또 잘못을 내가 분명히 알게 해줘야 되겠다.
그런 분이 있었어. 근데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 이렇게 마음이 편치 않으면 그러면 기도를 더 하라는 뜻으로 늘 생각했기 때문에 기도를 좀 더 하고 그 사람에게 말을 해줘야 되겠다.
그래서 아침에 말을 해주려다가
난 접었습니다. 조금 더 기도하고 해야지.
그리고는 주일 설교를 위해서 말씀을 이제 펼쳐서 읽는데 제일 첫 번째 남을 심판하는 자여 기절하는 줄 알았다니까 아 주여 제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군요.
그래서 아 내가 이게 뭘 내가 잘못 지금 처리하려고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해보고 방법을 바꿨어요. 그분에게 무슨 문제를 지적해 주는 게 이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게 아니구나.
오히려 그를 더 시험에 들고 낙심케에 빠지게 하는 거구나.
여러분 마음에 정말 새겨야 합니다.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우리 의지나 결단으로 극복이 안 됩니다.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됩니다.
저는 성격적으로 굉장히 비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노도 많고 문제 있는 사람도 많고 잘못된 사람도 너무나 많이 보이는 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이 성격이 바뀐 것이 성찬 때문입니다.
한 번은 성찬을 봤는데 준비 기도하고 있는데 마음이 풀어지지가 않아요.
성찬 받기에 내 마음이 합당치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나 이미 성찬식은 진행되고
떡을 받아서 먹는데 마음이 울컥하더라고.
저야 성찬을 받으니까 은혜를 받지만 나와 한몸이 되시는 주님은 내가 얼마나 불편하실까 내게는 은혜지만 주님께는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이런 나를 품으셔야 되니 그 성찬 떡을 먹으면서 엄청나게 눈물이 쏟아지더라.
그런데 그날 성찬을 받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거 나는 그 사람을 품을 수가 없어.
나는 그 사람하고 같이 얽히기가 싫어 그랬던 사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어요.
나를 품으신 주님 나와 한몸이 되신 주님의 고통을 성찬을 받으면서 그렇게 절절히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마음이 완전히 바뀌어버렸어요.
여러분 주 예수님을 정말 바라보셔야 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남 판단하고 정죄하던 내가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꿔져요.
이건 기적입니다 기적 진짜 거듭난 거죠.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판단이 더 많아집니다.
남에 대한 정죄가 더 커집니다. 완전히 율법주의로 빠져들어가 그래서 분위기가 무서운 분위기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 마음에 분명하게 명심하십시다.
여러분 마음에 방탕한 자를 볼 때
그리고 그를 심판하는 자를 볼 때 누가 더 죄가 크냐 심판하는 죄가 더 크다 이건 명심해야 돼요.
방탕한 사람보다 그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이 죄가 더 크다.
이건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걸 잊지 않으시면 가정에 기적이 일어납니 여러분의 가족 관계에 기적이 일어나요.
여러분 직장생활에 완전히 기적이 일어납니다.
교회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 모르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 정말 큰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보면서 정지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더 큰일입니다.
그는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이 그런데도 그런 사람을 정죄 판단하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정말 제대로 믿었다면 용서가 나오고 사랑이 나와야 진짜입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주님 저도 모르는 사이에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이 있으면 주여 제게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정말 고백하고 회개하고 오늘 해결받게 해주소서.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을 뜸으로
용서와 사랑이 제게서부터 흘러나오게 해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