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발령받은 직장은 서산의 서산농림고등학교였다. 이곳은 농업계학교였고, 여기에 공업계 고등학교가 들어서며 이후 서산농공업고등학교로 바뀌었다.
농업계학교에 기계과가 새로이 새겨나니 건물도 새롭게 지어졌고 환경도 농업에서 공업으로 변화가 될려니 혼돈이 많은것 같다.
선생님들도 자기들 영역 싸움하듯이 날카로왔고, 교장 선생님도 농업계라서 편견이 심한 편이었다. 이래저래 힘들게 지내며 점점 자리를 잡아가는 중이었다.
다시 말하면 농업계 선생님들은 일처리가 우유부단하듯이 흘러가고 공업계선생님들은 각을 재듯이 카리스마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도록 샤프한 편이어서 많이 부디치곤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잘 궁합을 맞혀가며 무난히 생활하고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기계과 1학년3반 담임을 맡았다. 난생처음 하는 교사에 처음대면하는 학생들과 교실 무언가의 책임감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
수업준비하랴 학생들 파악하랴 학교의 업무 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의 옆자리에 김경숙이라는 영어선생님의 도움이 가장컸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교사의시작은 4년이나 빠르다. 그분의 도움으로 난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실습시간이면 학생들을 데리고 건물밖의 정리작업을 많이 했다. 학생들에겐 기계과 1회라는 자부심도 심어주기 위함도 있었지만 공업계 교사들의 자존심도 가미된 측면에서 더 멋지게 꾸미고 싶었기도했던것 같다.
난 처음부터 용접실습을 맡았다. 여가저기 책도보고 천안공고 선배님들을 초청하여 실습도 해보면서 배웠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아침 일찍 등교시켜 1시간 자격증 시험에 필요한 이론공부도 시켜가며 멋지게 생활했다.
이론공부를 시작한지 3개윌 되었는데 합격자가 7명이나 나왔다. 나 스스로 뿌듯하고 아이들에게 고마워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런데 실기시험을 보려면 이곳은 시험장소가없어서 대전에 가서 보아야한단다. 난 아이들것을 모두 접수하고는 시험 날짜까지 열심히 훈련시켰다.
그리고 가을 시험보는날 전날에 대전에 여관방을 잡아놓고 재웠고, 다음날 시험장비와 학생들 모두 싣고 시험장에 도착하고 시험을 치렀는데 합격자 발표날이 되어 결과는 5명이나 합격이 되었다. 전기용접기능사2급 5명 합격, 또한 선반기능사2급, 기계조립기능사2급 등 다른 종목까지 많이 합격을 하니 서산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교장선생님도 놀라서 농업계 선생님들을 경각심을 주기도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우리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지기 시작하며 차츰 학교에서의 갈등도 없어졌다.
학교에서의 첫번째 업무는 학생과 교외생활지도업무였다.
아침정문지도 그리고 방과후 교외순찰지도 등 젊다는 이유로 학생과의 전반에 걸쳐 관여하게되었다
2학년때인것같다. 반에 김영기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어느날 점심시간에 술을 잔뜩먹고 농업계 학생들과 싸움을하고는 농기구실에서 난동을치는데 농기구실이라 각종 연장들이 많이 있어서 그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리고 있다고 연락이왔다. 난 다급히 달려가 담임으로써 그리고 학생과 선생님으로서의 책임감도있고 해서 조심스레 말을건네고 혹시나 영기가 연장이라도 휘둘를까하는 것을 대비하며 조심스레 접근을 하였는데 의외로 나한테는 조용히 고분고분 잘따랐다. 난 영기를 데리고 학생과에 데리고 갔는데 그리 고분하던애가 다른 선생님들한테는 폭럭적으로 난동을 부렸다.
깜짝놀란 선생님들이 자리를 피하였고 난 다시 영기를 잡고는 꿇어 앉혔다. 그리고는 죄송하다며 꼬꾸라 잠들었다. 난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잠들게 내버려두고 깬다음 얘기하자며 자리를 비웠다.
잠에서 깬 영기는 어찌할바를 몰랐고 나한테 매를 좀 많이맞았다. 학생과장님은 퇴학시킨다고 소리를질렀다. 난 과장님을 진정시키고 담임으로서의 용서를빌고 퇴학만 시키지 말아달라고 졸랐고 이어 징계위원회에서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리고는 책상을 들고 교무실 복도로 내쫒았다. 나의 고등학교시절이 생각나 그리 행동했던 것이 잘 되었던것같다.
영기의 아버지가 육성회 임원이었는데 매우 고마워했다. .졸업후 안면도에서 부모가 하던 식당을 운영하고있었는데, 10년이 지난 어느날 문자가 왔는데 고맙다는 문자였다. 그때의 고마움과 기쁨은 가슴에 크게 남았다.
또 한가지 일화는 1학년 2학기중에 갑자기 천안공고 토목과에 다니던 학생이 갑자기 우리반으로 전학 왔는데 싸움을 하여서 전학을 왔다고한다.
그러고는 2학년이 되어 학기초에 또다시 친구들과 싸움을 하였고 이를 처리하던 학생과에서 난동을 부리고는 뛰쳐나가 결석을 하였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찾았지만 못찾았고 친구들을시켜 학교에 등교만 하라고 당부했다.그러던 어느날 제영이 어머님이 전화로 퇴학만 면하게 해달라는것이다. 난 장담할 수는 없고 일단 학교를 보내라고 하고는 집에 갔더니 아내가 학부형이 찾아와 준것이라며 무슨 봉투를 하나 건네주길래 열어보니 그속엔 10만원이 들었더라. 난 아내한테 왜 받았냐고 큰소리로 소리쳤다.
다음날 학생이 학교에 나왔고 나한테 몽둥이로 많이 맞았고, 이어 징계위원회에서 나의 변호에 의해 퇴학을 면하였다.
그러한 이유를 들어 학급아이들한테 제영이 어머님이 우리반 친구들을위해 한턱 쏜다고 하면서 빵을 돌리고, 나머지는 학생통장에 넣어 주니 깔끔하게 해결되었고 학생의 어머니도 고마워하더라.
그시절 나의 취미는 축구였다. 학교 교직원들의 축구모임이 있었고, 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2번 방과후에 하였고, 화요일은 학생들과 게임을 하였다. 학생들도 너무좋아하였다.
목요일엔 선생님들이 양팀을 나누어 게임을 하고 게임후에는 간단한 음료와 간식으로 즐기고는 2차로 식당에 가는것이 코스였다. 그렇게 즐기던 5련차 되던해에 박장양 선배선생님이 테니스를 좋아한다기에 연습겸 해보았는데 참으로 매력이 있더라. 그리고는 서너번 치고 말았는데 이것이 다음학교에서 시작의 발단이 된것이다.
이학교에서 함께한 이종엽, 최성관, 고덕주 선생님들과 그리고 여러 선배 후배선생님들 많이 고맙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장많은 추억을 남겨주신 최성관 선배님, 여러 많은 추억들은 가슴에 묻어두고 자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