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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법
생각을 안 한다
인간들이 도무지 생각을 안 한다. 만약 생각했다면 '나는 이러한 공식에 넣고 생각을 풀어봤다.'며 생각을 빌드업하는 경로를 자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니까. 결과는 독점되지만, 과정은 공유된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구조론은 사유의 빌드업 과정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단서의 수집, 메커니즘의 발견, 분류이론, 의사결정 원리를 단계적으로 쌓아 올려 이론의 틀을 완성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생각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것을 질문하는 사람도 없다. 답답한 일이다. 이 문명은 뭔가 근본적으로 결함 있는 문명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을 빼놓고 시작한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소박한 생각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는 창피하기 때문이다. 주먹구구로 큰소리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반대로 무엇을 1만 번 반복했다거나 혹은 남들 놀 때 노력했다거나 하면서 생각하지 않고 미련하게 몸으로 때웠다고 강조하는 사람이 많다. 다들 바보 경쟁을 하고 있다. 그게 자랑인가? 답을 몰라서 헤매느라 개고생했다고 말하기보다 나는 이렇게 지름길을 찾았노라고 자랑하는 게 정답이 아닐까? 좋은 것은 나눠서 칭찬을 듣는 게 상식인데 말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가만있어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들은 넘치는 아이디어를 주워 담기 바쁘다. 그들도 머리를 쓰기는 하지만 조리 있는 생각은 못 한다. 왜 그들은 좋은 머리를 남들과 공유하지 않을까? 자기 머리에서 생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에 비범한 사람이 많지만 단순 문제풀이 노가다는 잘하는데 세상을 뒤집어놓는 창의적인 생각은 못 한다. 날고 기는 박사는 많은데 다들 자기 전문 분야에 갇혀 있다. 민폐를 끼치는 정치판 쓰레기들의 뻔히 보이는 헛소리를 지적하는 사람이 없다. 진짜 천재라면 사회적 발언을 해야 한다. 그들이 침묵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명상한다는 수도자처럼 머리에 힘주고 앉아있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척하는 것이다. 반면 우연히 아이디어가 떠오를 확률을 높이려고 상대방을 자극하다가는 싸움 난다. 과거 개그맨 선배가 후배들을 자기 집에 합숙시키며 아이디어를 갈취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개콘의 군기반장 계보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생각은 상수를 단서로 삼고 대칭을 고리로 삼아 미지수를 추적하는 것이다. 미지수는 스칼라, 벡터, 매트릭스, 텐서로 꼬여 있다. 단서를 잡고 공식에 맞추어 차근차근 풀어가야 한다. 상호작용의 닫힌계를 정하고 조절장치가 작동하는 경로를 추적해야 한다. 그런 사유의 메커니즘이 없이 그냥 생각한다는 것은 그냥 거짓말이다.
생각의 메커니즘은 자연의 원리를 복제한다. 자연은 사건을 격발하고 전달한다.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은 대개 전달자다. 인간은 사건의 격발자를 보지 못한다. 격발은 계 내부 밸런스의 코어에서 일어난다. 그곳에 우리가 찾아야 할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있다. 조절장치가 있다. 존재의 기능이 숨어 있다. 기능을 알면 다 아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주먹구구다. 기억력을 사용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독서와 폭넓은 대화가 도움이 되지만 그것으로 창의를 할 수는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진짜다. 창의는 특별한 기술을 써야 한다. 보통 사람의 기술은 아래와 같다.
1. 자유연상법.. 우연히 생각이 날 수도 있지만 창의적인 생각은 못 한다.
2. 넘겨짚기법.. 귀납적 사고. 누구를 모함하면 상대의 해명과정에 진실이 드러난다.
3. 자극반응법.. 관종이 쓰는 방식. 남을 험담하고 대결하는 중에 자극받아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4. 배회괴짜법.. 엉뚱하고 괴상한 생각을 한다. 초딩들에게 장려되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없다.
5. 상호작용법.. 대화를 통해 피드백을 받거나 집단이 성과를 공유하면 시너지 효과가 있다.
6. 쥐어짜기법.. 마감에 쫓기는 웹툰 작가처럼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으면 집중할 수 있다.
타란티노는 게임 안에 또 다른 게임을 집어넣는 방법을 쓴다. 90년대에 활약했던 박정우 작가도 스킬이 있다. 그것은 끝내기에 대한 것이다. 홍상수도 규칙을 깨는 트릭이 있다. 스킬을 배우면 당신도 작가가 될 수 있다. 이야기는 주워 오면 된다. 인터넷에 널려 있다. 문제는 끝내기다. 타란티노는 70퍼센트를 오마주 핑계로 주워오고..라고 쓰고 해먹고로 읽는다.. 20퍼센트를 특유의 장광설로 때운 다음 나머지 10퍼센트를 임팩트 있는 아이러니로 완성한다. 그것은 시간적인 진행을 공간적으로 비트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저 장면에서 저게 가능해? 누가 불쑥 들어와서 방해하면 어쩌지?' 하고 수다를 떨다가 그 수다를 영화 안에 집어넣으면 펄프픽션이다. 이쯤 되면 평론가와 관객들도 내러티브의 허술한 부분을 눈감아준다. 관객은 임팩트 있는 아이러니에 매료된다. 중요한 건 나름대로 기술이 있다는 거다. 나이트 샤말란은 평범한 이미지에서 고도의 긴장을 뽑아낸다. 스타워즈 시리즈의 많은 드로이드 중에 관객에게 먹히는 것과 먹히지 않는 것은 감각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 묵직하고 얼굴을 감춘 것이 먹힌다. 그런 기술과 노하우를 공개하고 공유해야 한다.
내가 사용한 생각법은 아래와 같다. 구조론은 생각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도 많은 기술이 있다.
1. 자문자답법.. 처음 본 영화를 자신에게 몇십번 반복해서 들려주다 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2. 조절장치법.. 객체 내부에서 작동하는 핵심적인 조절장치를 찾는다. 방아쇠를 격발하는 메커니즘이 있다.
3. 자기제거법.. 관측자 입장을 제거하면 객체 내부의 사정이 보인다. 선악과 도덕과 신파를 넘어 쿨해야 한다.
4. 패턴발견법.. 어색하고 위화감이 느껴지거나 반대로 전율하게 하는 인상적인 장면에는 공통 요소가 있다.
5, 방향판단법.. 한 방향으로 계속 가면 완전성이 그 안에 있다. 방향이 발산되면 안 되고 수렴되어야 한다.
6. 공식분류법.. 나름대로 분류기준을 찾아서 분류만 잘해도 아이디어가 늘어난다. 모르면 분류하자.
7. 단순화하기.. 중복과 혼잡을 제거하면 핵심이 추려져서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 명백해진다.
8. 이미지기술.. 머릿속에 그림을 띄우면 직관적으로 이해되는데 사람들이 이걸 안 한다.
인간들이 생각을 못 하는 이유는 말의 고삐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보려면 고삐를 놓아야 한다. 객체를 자기 자신과 연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선악과 도덕과 신파를 고리로 자신을 개입시킨다. 수학자처럼 나와 상관없이 돌아가는 것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쿨하지 않은 사람과는 어른의 대화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의식적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거다. 내버려 두면 저절도 생각된다는 망상은 좋지 않다. 막연히 개구쟁이 짓을 하고 엉뚱한 짓을 하고 괴짜 행동을 하면 커서 발명왕이 된다는 식의 비과학적인 사고를 버려야 한다. 에디슨이 이상한 짓을 많이 했지만, 이상한 짓 덕분에 발명왕이 된 것은 아니다. 워낙 에너지가 넘쳐서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그는 인상적인 장면을 봤을 때 남들보다 더 많은 호르몬이 나오고 더 강하게 흥분하고 고도로 집중하는 특이체질이었다. 그건 타고난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
모든 것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방법을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한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거론하는 사람이 없다. 이 문명은 크게 잘못되어 있다. 기초공사가 부실하다. 21세기에 종교와 주술과 음모론이 판치는 이유다.
엉뚱한 짓이나 개구쟁이 짓, 괴짜를 찬양하는 분위기가 있다. 어리석기 짝이 없다. 생각은 좁혀가는 게 정답이다. 그런데 좁히려면 먼저 넓혀야 한다. 천하인의 넓은 마음을 얻은 다음 구체적인 목표로 좁혀야 한다. 보통은 넓히기 위한 넓히기다. 넓히다 보면 생각이 산으로 간다. 산만해진다. 자유로운 생각이 필요하지만, 구글 사무실처럼 꾸민다고 구글만큼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쓰는 방법은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반응을 끌어내려면 단계적으로 자극의 강도를 높여야 한다. 인간들이 서로 차별하고 혐오하며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다. 그게 타인에게 생각을 구걸하는 짓이다.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인 이유는 착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이 더 많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사실은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배회하다가 우연히 주운 아이디어라서 경로를 공유할 수 없다.
잘 사는 나라들의 공통점은 전쟁을 많이 했다는 거다. 새벽부터 많이 돌아다니는 짐승이 먹이를 구한다. 주변과 많은 상호작용을 하는 사람이 아이디어를 낸다. 지구를 많이 돌아다닌 유대인이 성과를 낸다. 많은 전쟁을 경험한 몽골군이 이겼다. 이런 식이라면 점차 나빠진다. 대책 없이 많은 일을 벌이다 보면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하게 된다. 나쁜 사람이 이기는 구조를 없애야 한다.
사람들이 생각할 줄 모르므로 일단 저질러 본다. 콜럼버스는 그냥 서쪽으로 가봤는데 신대륙을 발견했다. 양차 세계대전은 먼저 저지르는 자가 이득을 본다는 생각 때문에 일어났다. 다들 초조해져서 '받고 더블로 가.'를 외쳤다. 무모한 짓이다.
문제는 무의식이다. 애들끼리 치고받고 하다 보면 어른이 달려온다. 일은 커진다. 상호작용이 증대한다. 그 과정에 뭔가 배우는 게 있다. 좋은 교훈도 얻고 나쁜 교훈도 얻는다. 일부 아이디어가 수확된다. 문제는 멈출 수 없다는 거다. 인간들은 누가 자신을 멈춰 세워주기를 바라면서 폭주를 계속한다. 여기에는 집단의 보호를 받는 어린이의 어리광이 무의식의 형태로 숨어 있다. 엄마가 말려줄 것으로 믿고 혹은 신이 브레이크를 걸어줄 것으로 믿고 갈 데까지 가는 것이다. 이는 지성이 결여된 사람의 미성숙한 자세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다 보면 아이디어가 나온다. 다양한 환경 속에 자신을 놓아보거나, 자유연상을 하거나, 티격태격하다가 보면 늘어난 상호작용 속에 뭔가 건지는 게 있다. 그걸로 일시적인 성과를 낼 수는 있지만 근본을 세울 수는 없다. 그걸로 살을 더할 수 있을지언정 뼈대를 세울 수는 없다. 진짜는 진지해야 한다. 늘어져 있는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원론이 있어야 한다
생각은 복제되므로 원론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원론을 사유하지 않는다. 그리스 때는 원론을 사유했는데 지금은 안 한다.
일본인은 도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지식은 외국 원서의 번역에서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인이 독자적인 사상을 만들어낸 일은 없다. '닥치고 번역이나 해.'하는 식이다. 어느 일본 작가의 말이다. 영화 '으라차차 스모부'에도 비슷하게 묘사된다. 일본인은 맹목적으로 전통을 따를 뿐 생각하지 않는다. 외국인이 '왜?' 하고 물으면 '선배님이 하니까' 하고 얼버무린다. 그들은 다이카개신과 메이지유신으로 2천 년 동안 두 번 바뀌었을 뿐이다.
한국인도 다르지 않다. 그냥 일본을 해 먹는다. 이런 식으로는 선두에 근접하게 따라붙을 수는 있어도 추월할 수는 없다. 단독으로 공사를 수주하지 못하고 남이 짓는 건물에 하도급이나 받는 하청 문명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동양은 형이상학이 없다. 공자의 괴력난신, 술이부작은 나쁜 것을 경계할 뿐 바른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노자는 대놓고 나쁜 길로 꾄다. 도덕경은 통째로 빈정대기와 이죽거리기다. 석가는 독화살의 비유가 문제다. 브라만교의 공리공론을 반대한다며 형이상학을 부정한다. 공자, 노자, 석가는 현실주의자다. 그들은 현실에 발목이 잡혀 미래를 개척하지 못한다.
동양문명은 원론이 없다. 중국의 산학은 설명이 없고 바로 문제 풀이 들어간다. 기초가 없고 중간에서 뜬금없이 시작한다. 아이디어는 복제되는 것이다. 스승이 하나를 가르치면 제자가 열을 복제한다. 동양은 원론이 없으므로 복제가 안 된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를 배우는 식이라서 나무에 원줄기가 없으므로 새로 가지를 칠 수 없다. 본류가 없으므로 지류를 개설할 수 없다. 야자수처럼 키만 크고 앙상해져서 풍성함이 없다. 지적 모험심이 없는 자폐 문명으로는 인류문명의 선봉에 설 자격이 없다.
생각을 해 본 나라는 그리스다. 로마는 짝퉁이다. 일찍이 지중해에 미노스와 미케네가 있었지만, 이집트 아류다. 바다민족의 침략 이후 그리스는 한동안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철기문명을 가지고 슬그머니 돌아왔다. 이때 멋진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는 점이 각별하다. 그리스의 압도적인 창의는 어디서 나왔을까? 지정학적 이유로 문명의 자궁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조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리스는 6천 개 섬들의 집합이다. 중앙이 없다. 한때 미케네가 중앙을 자처했지만, 바다민족의 침략에 의해 쓸려나갔다. 400년간 지중해는 역사에서 지워졌고 문명은 주변부로 흩어져서 잠복했다. 세월이 흐르고 문명은 다시 돌아왔다. 이집트의 건축술과 페니키아와 표음문자와 서유럽의 철기문명이 한꺼번에 그리스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보통은 중앙이 지방을 견제하면서 발전을 가로막는다. 문명이 쇠퇴하는 원인은 중앙과 지방의 불균형 때문이다. 지방은 중앙의 압박에 눌려 질식하고 중앙은 지방의 도전을 막기 위해 낡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
게는 탈피할 때가 위험하고 조직은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할 때가 취약하다. 신도시의 건축과 같다. 구도시는 발전의 한계가 있다. 인구가 적은 초기에 광장과 골목과 성벽을 너무 작게 설계한 것이다. 도시를 통째 리모델링할 수 없다. 일본인과 이탈리아인이 작은 차를 타는 이유다. 옛날에 골목을 작게 만들었던 것이 두고두고 병폐가 된다. 625의 잿더미에 다시 시작하며 미국 기준을 받아들인 한국과 다르다.
그리스는 바다민족의 침략에 의해 국자로 죽을 떠내듯이 가운데가 비워졌다. 가운데를 비우면 사방에서 일제히 몰려든다. 그리고 새로운 기운이 크게 일어난다.
사유가 망하는 것은 가운데를 차지한 기득권 때문이다. 서구문명은 여전히 기독교의 권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니체가 한 마디 했지만, 비명에 불과하다. 한국도 신토불이 하면 망한다. 옛것을 부수지 않으면 새것이 들어설 수 없다.
두 가지 고질병이 있다. 하나는 중앙이 전통을 존중한다며 구도시에 안주하는 것이고, 둘은 변방이 중앙을 복제하면서 원본의 권위에 굴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는 용케 두 가지를 피했다. 바다민족의 침략으로 모든 도시가 폐허가 되었다. 오랜 공백기 이후 압도적인 신기술이 사방에서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 누구도 주도권을 잡지 못한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원론을 세우고 싶어 한다. 중앙의 건설이 필요하다. 그리스는 6천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중앙의 건설이 불가능하다. 물질의 중앙을 건설할 수 없으므로 사유의 중앙을 건설하게 된다.
좋은 건축술이 있고 멋진 터가 있는데 텃세 부리는 사람이 없다면 원점에서 새로 시작해보자는 웅장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런 마음의 여유를 누린 사람들이 그리스인이었다. 그들은 다급하게 쫓기는 것이 없었다. 6천 개의 작은 섬들이 어쩌겠는가 말이다. 해꼬지할 사람이 없다. 하긴 나중에 알렉산더가 와서 쓸어버렸지만 말이다.
대부분 중앙을 차지한 권력자 눈치를 보며 기가 죽어서 조급하게 성과를 증명하려고 기본을 건너뛰고 겉보기 장식만 추가하는 실패를 저지르곤 하는데 중앙이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 섬들은 달랐다.
로마도 비슷하다. 주변을 정복하여 졸지에 제국이 되었다. 로마가 세계의 중앙이다 하고 떠들어봤자 아무도 믿지 않는다. 게르만과 페르시아와 아프리카의 영토가 더 넓기 때문이다. 영토의 중앙이 못되므로 정신의 중앙을 추구한 것이 일신교다. 일신교는 이집트 파라오 아케나톤이 지방 귀족을 제압하고 중앙을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스의 다신교는 섬에 짱박혀 사는 변방인의 사유다. 소수의 로마인이 광대한 영토를 가진 게르만족을 제압하려면 압도적인 중앙의 논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나름 말빨이 먹어준다는 기독교를 수입한 것이다.
딜레마가 있다. 늦게 팬 장작이 위로 올라가는 법칙이다. 기초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장 늦게 만들어진다. 건축이라면 토굴에서 움집으로, 초가집으로, 기와집으로 바뀐다. 좋은 것이 나중에 등장한다. 기초가 중요한데 원시인의 토굴이나 부족민의 움집은 기초가 없다. 삼국시대 초기의 굴립식 건축은 주춧돌이 없다. 삼국시대 중반에 가구식 건축으로 바뀌는데 다 지어진 집을 들어 올리고 주춧돌을 밀어 넣는 기술은 없다. 집을 무너뜨리고 새로 지어야 한다. 로마는 다신교라는 낡은 집을 허물고 기독교라는 새집을 지었다. 갑자기 정신의 집을 갈아타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로마나 되니까 하는 일이다.
그리스는 바다민족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문명을 새로 지어볼 만했다. 6천 개의 섬 중에 누구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우연히 창의하는 자궁이 만들어졌다. 텃세 부리는 기득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정복하고도 접수하지 않은 사실이 그러하다. 스파르타는 인구가 적어서 전쟁에 이길 수는 있어도 영토 합병은 불가능했다.
좋은 생각은 여러 지정학적 상황이 맞아떨어졌을 때 그리고 때맞춰 물이 들어왔을 때 생겨난다.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가려고 하면 기득권이 자리를 비워주지 않는다. 남의 생각을 모방하면 번역만 하다가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뉴올리언스의 남군 군악대가 해산했다. 남군이 두고 간 브라스밴드의 트럼펫을 흑인들이 주워가서 연주한 것이 재즈다. 그들은 전통을 계승하지도 않았고 남에게 배우지도 않았다. 갑자기 좋은 것을 손에 넣게 되면 백지상태에서 새로 시작한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은 르네상스 시대에 재현되었다. 갑자기 몽골의 말발굽에 밟힌 아랍의 학자들과 유대인 상인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좋은 것을 전해주었지만 눌러앉아서 주도권을 잡지는 않았다. 아랍인은 종교가 달라서 조용히 찌그러졌고 유대인은 장사꾼이라서 한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결국 피렌체인이 주도권을 잡았다. 남들 덕에 좋은 것을 손에 넣되 주도권은 내가 잡아야 한다. 그런 일은 역사에 드물게 일어난다.
원효는 독자적인 생각을 일으켰다.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중국을 넘어섰다. 퇴계는 모방에 충실했다. 율곡은 적어도 새로운 것을 시도는 했다. 청나라가 집요하게 압박하여 없애버린 조선왕조 특유의 공론 정치는 율곡의 작품이다.
외부에서 온 손님이 좋은 것을 잔뜩 전해주되 사용법을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떠나면 사람들은 원론을 생각하게 된다. 쫓기는 마음이 없으므로 차분하게 앉아서 생각한다. 진짜는 그런 창의의 자궁에서 만들어진다. 인도의 타지마할 묘당이나 모스크바의 성 바실리 대성당이 그러하다. 변두리에 살던 듣보잡 오랑캐가 갑자기 문명 세계의 맛을 본 것이다. 좋은 것을 손에 쥔 촌놈이 반드시 벌이는 일이다. 기초부터 잘 다져야 성공할 수 있다.
폴리네시아 화물신앙도 비슷하다. 이차대전이 일어났다. 갑자기 미군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까지 찾아와서 통조림과 의복과 신발을 준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은 갑자기 떠나버렸다. 좋은 것을 잔뜩 얻은 그들은 '이게 뭐지?' 하고 고민하다가 종교를 만들었다. 그들에게는 종교가 원론이었던 셈이다.
마르크스가 부르짖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이항 대립은 기독교에 유입된 조로아스터교의 잔재다. 자라투스트라는 3천 년 전에 떠난 사람이다. 인류는 여전히 3천년 묵은 족쇄에 발목이 잡혀 있다. 원시인의 움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큰 게가 작은 게딱지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이제 그만 허물을 벗어야 한다.
1. 생각하려면 중심이 되는 원론을 건설해야 한다.
2. 중심이 이미 건설되어 있으면 기득권의 폐해로 망한다.
3. 중심이 없으면 변두리에 고립되어 크지 못하고 시든다.
4. 변방에서 중심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 때 멋진 것이 나온다.
5.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면 사람들이 원론을 생각하게 된다.
뭔가 되는 분위기가 있어야 한다. 생각해보면 인터넷이 막 도입되던 2천년대 초반이 그랬다. 벤처 붐이 있었고 논객 붐도 있었다. 해보자 하는 분위기였다. 노를 저어볼 만큼 물이 들어오는 때였다. 노무현 이후 노무현이 없었고, 유시민 이후 유시민이 없었고, 김어준 이후 김어준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이후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보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변화를 보는 것이다. 변화가 없다면 감시할 이유가 없다. 보려면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봐야 한다. 나는 자극하고 상대는 반응한다. 그게 찔러보기다. 먹어보고, 맛보고, 해보고, 겪어보고, 두고보고, 알아봐야 한다. 수동적으로 보는 것은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보면서 객체의 사정에 개입하는 실패를 저지른다. 관측자의 개입에 의한 정보의 오염이다. 능동적으로 보는 행위가 또다른 상호작용을 구성하므로 객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체적인 상호작용을 보지 못 한다.
인간은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 방법으로 본다. 자극해서 반응이 있으면 거기에 무엇이 있다. 객체가 반응하려면 객체 내부에도 같은 상호작용 구조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반응하지 않는다.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없는 것이다.
내가 물체를 타격하면 물체 내부에서 밸런스가 소집되어 에너지 파동을 도출한다. 코어가 움직여서 반작용의 힘이 되돌아온다. 객체 내부에 반작용을 만들어내는 의사결정의 절차가 있다. 우리는 객체 내부에서 반작용이 도출되는 절차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냥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퉁친다. 왜 되돌아오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경우 외부의 작용을 흡수한다. 계를 정하고 보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검은 쇠구슬에 햇볕을 비추면 쇠구슬은 뜨거워진다. 반작용의 힘은 구슬 내부에 머물러 있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면 열은 어디로 갔을까? 냄비 안에 있다. 팽이를 채찍으로 치면 그 힘은 어디로 갔을까? 팽이의 회전력에 흡수되어 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 사회, 문화, 경제가 다 물리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강체의 법칙 - 전달자를 본다. 작용에 반작용한다.
유체의 법칙 - 격발자를 본다. 닫힌계 내부의 밸런스가 반작용을 결정한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것을 누가 결정하는가?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강체는 즉각 반응하지만, 유체는 천천히 반응한다. 우리는 오판한다. 물리는 강체를 다루는 게 보통이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는 유체이기 때문이다. 풍선효과는 천천히 나타난다. 용수철도 마찬가지다. 유체도 닫힌계가 작동하면 강체와 같다. 강체도 파동으로 쪼개보면 유체와 같다.
격발자와 전달자가 있다. 우리는 격발자를 보지 않는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은 전달자에 관한 것이다. 반작용은 방향을 바꾸어 전달하는 것이다. 내가 벽을 때리면 벽도 나를 때리는 게 아니라, 내가 때린 힘이 벽을 거쳐 되돌아오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지만 말을 똑바로 해야 한다. 어떻게 벽이 내가 때린 힘을 180도 되돌렸지? 그 의사결정과정을 해명해야 한다.
닫힌계의 사고
가만히 앉아서 눈 감고 명상한다는 말도 있지만 대략 거짓말이다. 눈 감으면 잠든다. 머리에 힘주고 앉아있어봤자 두통을 앓을 뿐이다. 가볍게 움직이면 생각이 잘 된다. 컨디션이 영향을 미친다. 걷는 게 좋다. 아침에 달달한 커피를 마시면 집중할 수 있다. 카페인은 뇌혈관을 수축시키고 설탕은 뇌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몸이 피곤하면 생각이 방해받는다. 이건 백 퍼센트다.
생각은 단서가 있어야 한다. 화두가 필요하다. 화두는 쾌감을 주고 뇌간지럼증을 유발한다. 사람을 유혹한다. 단서를 얻고 대칭을 고리로 삼아 추론을 전개한다. 단서는 상수다. 대칭에 추적하여 상수를 근거로 미지수를 확보한다. 상수와 미지수 사이의 밸런스를 찾고, 코어의 이동을 추적하여 변화의 다음 단계를 알아내면 생각이 진도를 뽑을 수 있다.
얽힌 실을 풀어보자. 실마리가 단서다. 실마리 놔두고 중간부터 풀면 우연히 풀릴 수도 있지만 풀어놓은 만큼 도로 엉켜서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생각은 단서를 실마리로 삼아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가야 한다. 단순한 문제는 대충 해도 풀릴 때가 있지만 복잡한 문제는 복잡하게 풀어야 한다.
단서는 현장에 있다. 대개 현장을 수색하지 않고 넘겨짚기를 시도한다. 아무나 한 명을 지목한다.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혐의를 벗기 위해 다른 사람을 지목한다. 사소한 문제라면 그렇게 마구잡이로 추궁하다가 우연히 답을 찾기도 하지만 중요한 일은 소동 중에 현장이 훼손되고 단서를 망실한다.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현장이 훼손되었거나 등잔 밑이 어둡거나. 특히 등잔 밑이 어두운 경우는 의도적으로 등잔 밑을 살펴야 한다. 반드시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다면 사각지대가 있다. 뻔히 보고도 놓치는 시야의 사각지대가 있다는 확신을 두고 차근차근 풀어봤더니 문제가 풀린 경험을 나는 많이 가지고 있다.
궁극적인 단서는 존재다. 존재는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뭔가 있다면 그냥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있을 만해서 있는 것이다.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이 반드시 있다. 탄생의 자궁이 있다. 격발자가 있다. 상호작용이 있다. 자궁이 있다. 모태를 거치고 있다. 그것을 받쳐주는 환경이 있고 타이밍이 있고 에너지의 맥놀이가 있다. 경로가 있고 방향성이 있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다. 뭔가 있다면 반드시 짝이 있다. 짝과 그것을 통일하는 토대가 있다. 둘이 공유하는 것이 토대다. 짝과 그것 사이에 조절장치가 있다. 기능이 있다. 밸런스가 있다. 그것은 내부에 있다. 어떤 둘 사이에 있다. 닫힌계를 지정하고 내부와 외부를 가르고 내부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문제는 상호작용이 어디서 일어나는가다. 인간은 열린 공간에서 외부와 상호작용한다. 열린 공간이면 현장이 훼손되고 단서가 오염된다. 닫아걸고 시작해야 한다. 상호작용은 둘이 연결되어 랠리가 이어지는 것이다. 소거법을 사용해야 한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아닌 것을 배제하면 남는 것이 정답이다.
대개 외부에서 넘겨짚기를 시도하며 성공확률을 높이려고 자극의 강도를 높여간다. 만인이 만인을 괴롭히고 험담하고 헐뜯고 차별하고 증오하게 된다. 그게 성공확률을 높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류는 그렇게 망가진다.
삼단사고
지식의 근본은 인과의 대칭성이다. 자극과 반응의 대칭성이다. 그것이 계 내부에 감추어지면 에너지가 되고 계가 깨져서 외부에 드러나면 운동과 변화가 된다. 우리는 그것이 계 내부에 감추어진 것을 놓친다. 격발자는 모르고 전달자에 주목한다.
대칭은 가운데 축이 있다. 왼발과 오른발 사이에 몸통이 있다. 두 바퀴 사이에 바퀴 축이 있다. 돌멩이라도 무게중심이 있다. 대칭된 둘을 외부와 연결하는 것이 반드시 있다. 그것이 없으면 연결이 끊어지고, 연결되지 않으면 밸런스가 무너지고, 밸런스가 무너지면 존재가 깨진다. 그 연결고리에 우리가 찾아야 하는 조절장치가 있다. 기능이 숨어 있다.
대칭은 둘이 아니라 축을 포함하여 셋으로 성립한다. 날아가는 화살은 앞뒤가 없다. 그 화살을 보는 관측자가 있어야 앞뒤가 성립한다. 그러므로 셋이다. 인과율은 둘이 아니라 세 개의 항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셋 중에서 원인과 결과 둘을 알지만, 사건의 메커니즘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수평 대칭 - 공간의 좌우는 대칭이다.
수직 대칭 - 각운동량 보존에 의한 공간의 거리와 시간의 속도 비례는 비대칭으로 보인다.
우리는 좌우대칭은 알아도 코어와 좌우의 안밖 대칭은 모른다. 중심과 주변의 대칭을 모른다. 왼팔과 오른팔의 대칭은 알아도 몸통과 왼팔+오른팔의 대칭은 모른다. 척추 하나가 왼팔과 오른팔 둘을 동시에 감당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골반 하나가 왼발과 오른발 둘을 감당하는 사실을 모른다.
원인은 변화를 거쳐서 결과가 된다. 원인=결과가 아니라 원인=변화=결과다. 원인=변화=결과이므로 원인과 변화의 관계를 통해서 결과를 알아내고 반대로 변화와 결과의 관계를 통해서 원인을 알아내는 3단논법이 성립한다.
2단 사고 - 원인 > 결과..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3단 사고 - 원인 > 변화 > 결과.. 원인은 변화를 거쳐서 결과가 된다.
'원인은 변화하고 변화는 결과한다. 고로 원인은 결과한다.' 우리의 모든 사유를 이 삼단논법에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한 방향으로 계속 가며 추론할 수 있다. 이단 논법으로는 순환의 오류에 빠진다. 원인이 변화를 거쳐 결과로 갈 수는 있어도 변화는 원인으로 갈 수 없다. 가려면 다시 계를 정하고 에너지를 끌어와야 한다. 그 경우는 다른 사건이다.
우리는 대칭적 사고에 빠져 있다. 이항 대립적 사고에 흑백논리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변화가 있으므로 비대칭이다. 대칭은 같은 것인데 같지 않다. 변화는 항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항 대립적 사고를 극복하는 일원론적 사고를 훈련해야 한다. 이항 교착을 일항 타개로 극복해야 한다.
가운데 코어 하나를 움직여서 대칭된 양쪽 두 날개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다. 그것이 조절장치다. 엄마 곰을 해결하면 새끼 곰 두 마리는 따라온다. 집의 공간을 넓혀주면 고양이 두 마리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싸우는 둘을 뜯어말리려면 2의 대처가 필요하지만, 그냥 먹이를 많이 주면 된다. 하나로 둘을 해결하는 것이 일원론이다.
항상 둘 사이에 하나가 있다. 합쳐서 셋이다. 그 세 번째는 조절된다. 그러므로 넷이다. 그 조절하는 사람까지 다섯이다. 이렇게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원인에서 결과로 곧장 가는 이단 사고를 버리고 변화를 거쳐서 가는 삼단 사고로 갈아타야 한다. 대부분의 오류는 이단 사고의 교착에 의해 일어난다. 순환의 오류를 저지른다. 결과를 놓고 원인을 찍는 넘겨짚기 사고다. 이분법적 사고, 획일적 사고, 틀에 박힌 사고, 프레임에 갇힌 사고, 흑백논리의 우격다짐이다. 그런 식으로는 뻔한 이야기밖에 못 한다. 진정한 창의는 삼단 사고로 가능하다.
삼단사고는 가운데 변화 부분에서 새로 가지를 친다. 원인이 밑동이면 결과는 잎이다. 그 사이에 Y자로 갈라지는 부분이 있다. 창의는 거기서 얻어진다. 복제가 무한이므로 가지를 칠수록 풍성해진다.
프로와 아마가 다르듯이,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다르듯이, 지식인은 일반인과 생각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변화가 있고 그 변화의 형태가 동일한 것이 구조다. 구조는 같은 변화를 반복시켜 같은 결과를 재현한다. 변화 속에서 구조를 추출하여 결과를 재현하는 것이 과학이다.
동사 중심적 사고
삼단사고를 하려면 동사 중심의 사유를 익혀야 한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동사가 앞에 와야 한다. 정확히는 동사의 메커니즘이다. 그것은 동사의 변화다. 이때 동사는 수동이 아니라 능동이라야 한다.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흐르는 그것이 물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그것이 거북이다. 어순만 바꿔도 창의가 된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나쁜 짓을 하는 놈이 나쁜 놈이다.
동사 중심적 사고 - 액션 중심, 행위 중심으로 본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나쁜 놈이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한다.
명사 중심적 사고 - 고유한 속성 중심으로 본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 인지부조화에 빠진다.
명사 중심적 사고는 인지부조화에 빠진다.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쁜 놈이 아니므로 내가 한 행동은 나쁜 짓이 아니라고 생각해 버린다. 행위 중심이 아니라 속성 중심으로 보는데 그 속성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 과거의 속성이다. 이명박도 어린 시절 주변에서 착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자신은 착한 사람이고 그러므로 자신의 행위는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고유한 속성이라는 말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우주 안에 그런 것은 없다. 여우는 신 포도가 덜 익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포도의 속성이다. 속성은 속에 있으므로 속일 수 있다. 속일 수 없는 것은 액션이다. 행위는 속일 수 없다. 여우가 포도를 따 먹으려다가 팔이 닿지 않아서 실패한 사실은 속일 수 없다.
물 한 컵 더하기 한 컵은 큰 한 컵이잖아. 1+1=1이라고 우기는 꼬마가 있다. 동사 중심으로 가자. 물을 더하는 게 아니라 더하는 그것이 물이다. 꼬마의 관심을 물이 아니라 더하기로 옮겨야 한다. 물이 둘이 아니라 더하기가 둘인 것을 2라고 한다. 액션이 둘이다.
동사는 크고 명사는 작다. 동사는 움직이고 움직이는 것은 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보다 크다. 그런데 우리는 큰 명사에 작은 동사가 깃든다고 생각한다. 큰 육체에 작은 정신이 깃들고, 큰 하드웨어에 작은 소프트웨어가 깃들고, 큰 물질에 작은 성질이 깃들고, 큰 명사에 작은 동사가 스며든다고 생각한다. 동사를 명사의 부속품으로 생각한다. 틀렸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당연히 움직이는 것이 머물러 있는 것보다 크다. 움직임+명사=동사다. 움직이는 팽이는 멈춰 있는 팽이보다 크다. 에너지+명사=동사다. 동사를 동작만으로 좁혀서 보지 말고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으로 넓혀서 봐야 한다. 그 동사는 환경을 장악하고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사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코기토 논증이다. 원시인이 숫자 2를 알고 있다면 그 전에 1도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2를 안다. 고로 1은 어제부터 알고 있었다. 존재는 1번이고 생각은 2번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숫자 2에 해당하므로 숫자 1에 해당하는 존재는 이미 증명된 것이다. 2는 1보다 크고 동사 생각은 명사 존재보다 크다.
동전의 앞면을 본 사람은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백 퍼센트 확신이 든다. 앞면만으로는 존재가 불성립이기 때문이다. 존재는 완결되어야 하며 앞면과 뒷면을 갖추어야 완전하다. '생각한다'는 동사다. 동사만으로 문장이 안 된다. 동사가 동전의 앞면이라면 뒷면은 명사다. 앞면의 동사 생각한다를 보고 뒷면에 숨겨진 명사 존재를 알 수 있다.
태초에 동사가 있었다. 대부분의 명사는 동사를 살짝 비틀어 놓은 것이다. '밀다'라는 동사가 있으면 밀대도 나오고 밀개도 나온다. 원시인은 회전식 맷돌이 없었고 밀돌로 곡식을 밀었다. 밀가루, 밀은 동사 '밀다'에서 파생된 명사다.
데카르트가 처음 존재를 사유했다. 사유의 첫 단추를 끼우려고 한 것이다. 우주의 근본은 상호작용이다. 진정한 코기토 논증은 '나는 상호작용한다.'로 되어야 한다. 생각은 상호작용의 일종이다. 존재는 상호작용의 주체다.
사유의 첫 번째 퍼즐 조각은 동사의 메커니즘이다. 동사는 명사의 부속품이 아니다. 명사에 깃드는 작은 동사가 아니다. 그 동사는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큰 메커니즘이다. 거기에 조절장치가 있다. 바람이 불면 기압이 걸려 있고, 물이 흐르면 수압이 걸려 있고, 열이 전달되면 열압이 걸려 있다. 압이 밸런스를 조절한다. 이때 한 방향으로 조절한다. 시곗바늘은 뒤로 가지 않는다. 물도, 바람도, 열도, 시계도 언제나 한 방향으로 조절된다. 키다리의 긴 다리를 자르지 않고 숏다리에게 키높이 구두를 선물한다. 강자를 끌어내리지 않고 약자를 돕는다.
내부에 조절장치를 갖추고, 기능을 갖추고, 밸런스를 갖춘 동사가 형님이고 명사는 동사 메커니즘의 부속품이다. 이것이 사유의 첫 단추다. 이후 일사천리로 복제된다. 이것이 모든 생각을 복제하는 원본이다.
상호작용의 조절장치
상호작용의 의미는 존재 내부에 변화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외력의 작용에 의해 변화가 격발되지만, 내부에 그 작용을 받아주는 장치가 있다. 멈추어 있던 것이 외력의 작용에 의해 갑자기 동작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활발한 운동이 밸런스에 감추어져 있다가 언밸런스에 의해 드러나는 것이다.
엔진 안에서 돌던 운동이 기어변환에 의해 바퀴로 전달된다. 자동차가 급정거하거나 급가속하면 승객이 관성력의 존재를 깨닫지만, 급정거나 급가속을 안 해도 관성력은 엔진 속에 숨어 있다. 배터리도 마찬가지로 전기의 운동이 내부에 숨어 있다. 궁극적으로 운동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전달되는 것이다. 모든 운동은 궁극적으로 자리바꿈이다.
틀린 생각 - 멈추어 있는 존재가 외력의 작용에 의해 변화한다.
바른 판단 - 변화가 밸런스에 가두어져 있다가 잠금이 해제되면 드러난다.
스마트폰 화면이 꺼져 있어도 내부적으로는 24시간 켜져 있다. 운동은 무에서 발생하지 않고 자리를 바꾸어 드러날 뿐이다. 어원으로 보면 에너지energy는 안en에서 일ergy한다는 의미다. 안에서 하던 일을 겉에서 하는 것이 운동이다. 반대로 겉에서 하는 운동을 안으로 감추면 에너지다. 그 변환은 힘이다.
에너지 - 안에서 운동한다.
힘 - 운동을 겉으로 드러낸다.
운동 - 겉에서 움직인다.
내적 모순에 의해 밸런스의 틀이 깨졌을 때를 가정한 개념이 에너지다. 틀을 깨는 작용은 힘이다. 그 결과는 운동으로 나타난다. 존재를 지탱하는 상호작용의 밸런스가 무너졌을 때 새로운 밸런스를 찾아가는 변화의 절차다. 이때 한 단계 낮은 차원의 밸런스로 옮겨 간다. 엔트로피의 일방향성이다.
존재가 곧 상호작용이며 상호작용은 언제나 내부에서 핑퐁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른다. 인류는 밸런스를 모른다. 그 전에 닫힌계 개념, 상호작용 개념도 없다. 사건의 안과 밖을 나누지 않는다. 천칭 저울의 두 접시가 밸런스를 이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시에 저울이 지구와 밸런스를 이루는 사실은 모른다. 지구와 저울의 밸런스가 두 접시의 밸런스로 복제된 것이다.
대결하는 두 팀의 밸런스는 아는데 주최 측과 관중의 밸런스는 모른다. 관중이 경기장을 찾지 않으면 주최 측은 룰을 바꾼다. 공인구 규정을 바꾸고 도핑 테스트를 강화한다. 그러한 상호작용에 의해 생물은 진화하고, 문명은 진보하고, 회사는 성장한다.
이단사고 - 에너지와 운동을 대칭적으로 이해한다.
삼단사고 - 에너지와 운동 사이에 조절장치가 있다.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난다. 에너지가 운동이 될 뿐 그 역은 없다.
상호작용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조절장치가 있다. 대칭 2를 변화의 방향 1로 해석해야 한다. 에너지가 운동으로 갈 뿐 운동이 에너지로는 안 간다. 운동이 에너지로 갈 때도 있는데 그 경우는 열린계다. 열린계는 외부에서 개입하여 오염된 것이다. 오염되지 않은 하나의 사건 안에서는 무조건 에너지가 운동으로 가고 그 역은 없다. 에너지 밸런스가 깨지는 것이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조절된다. 깨지는 속도의 조절이 마치 반대로 가는 것처럼 보여서 헷갈린다.
자전거 페달을 밟지 않아도 내리막길에서 가속될 수 있다. 뒤바람이 불어주면 더욱 좋다. 마치 운동에서 에너지가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한동력의 오류다. 환경을 이용한 속임수다. 그 자전거는 결국 멈춘다.
2단 사고 - 원인 > 결과
3단 사고 - 상호작용 계에서 (원인 > 일방향적 조절 > 결과)
양질전환의 오류나 순환의 오류, 무한동력의 오류는 조절장치의 작동을 역방향 진행으로 착각한 것이다. 진보와 보수도 그러하다. 문명은 진보할 뿐 보수하지 않는다. 보수는 진보의 속도 조절이다. 보수는 거꾸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보가 앞으로 가는데 필요한 추진력을 모으는 과정이다.
2단 사고 - 주어 (동사의 연결) 목적어
3단 사고 - 동사의 상호작용 (주어 + 목적어)
2단 사고는 주어와 목적어의 대칭에 주목할 뿐 동사에 주목하지 않는다. 동사는 접속사로 취급한다. 주어와 목적어가 만나는데 동사가 소개팅을 주선하며 전화번호나 알려주는 정도다. 3단 사고로 보면 동사가 적극적으로 양쪽을 오가며 중매쟁이 역할을 한다. 조절장치가 작동한다. 동사 메커니즘 속에 주어와 목적어가 들어 있다.
주어와 목적어가 별도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사에서 동작의 시작점이 주어, 도착점이 목적어다. 그 동사는 2를 품은 1이다. 이원론을 품은 일원론이다. 공격수와 수비수 2는 원팀 안에서 작동한다.
우리는 대칭된 둘을 한 단어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삶과 죽음을 생명 한 단어로. 진보와 보수를 생산력의 밸런스 하나로.
연역하는 방법
세상은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은 둘의 주고받기다. 그것을 하나의 게임으로 이해하는 게 연역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곧 연역한다는 것이다. 연역은 꼬인 것을 꼬인 순서대로 푸는 것이다. 연역은 상수와 스칼라와 벡터와 매트릭스와 텐서를 차례대로 풀어야 한다. 그러므로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귀납은 그냥 넘겨짚으면 된다. 생각이 필요 없다.
연역하려면 닫힌계를 지정해야 한다. 공격팀과 수비팀을 통일하는 그라운드를 발견해야 한다. 그라운드는 닫혀 있다. 관중이 그라운드에 난입할 수 없다. 닫히면 조절된다. 닫힌계 중심, 상호작용 중심, 조절장치 중심의 사고가 연역이다.
주사위를 던지면 여러 외부 변수가 개입한다. 그것은 큰 의미가 없으므로 아예 없는 것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그 외부 변수의 영향이 무의미하게 될 정도로 많은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많은 주사위를 던지면 밸런스가 작동하여 외부 변수가 내부 상수로 바뀐다. 내부 상수로 되면 결과를 교란하지 않는다.
자전거가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무한동력이 느껴진다. 내리막길 다음에는 오르막길이 있다. 그런데 오르막길이 없으면 어떻게 되지? 그게 열린계다. 닫힌계는 한 바퀴 돌아서 출발점으로 되돌아온다. 계가 닫혀 있기 때문이다. 출발점으로 돌아가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균형이다.
닫힌계 = 균형계
한 명은 강체지만 여럿은 유체다. 유체는 압이 걸려 있다. 계에 들어있는 자원의 숫자가 많을수록 유체의 영향은 강하게 나타난다. 그 경우 닫힌계가 작동한다. 밸런스가 작동한다. 유체의 압력이 내부 자원을 움직여서 고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체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균형을 만든다.
연역은 상호작용 위주, 닫힌계 위주, 조절장치 위주, 밸런스 위주, 유체의 성질 위주, 기능 위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돌아가는 판도 전체를 보면 기능이 출현하고, 조절장치가 나타나고, 밸런스가 작동한다. 외부 변수의 개입을 균형으로 만든다.
사건 내부에 계를 연결하는 회로가 있고 경로가 있다는 게 중요하다. 귀납은 그것이 없다. 추론의 비빌 언덕이 없다. 길을 가는데 지도가 없고 나침반이 없는 셈이다.
풍선효과와 같다. 조절장치가 개입하여 인간의 작위를 무위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런데 약간의 텀이 있다. 유체의 풍선효과는 천천히 나타난다.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반작용의 힘을 무시하다가 된통 당한다.
사유는 연역이라야 한다. 귀납은 사유가 아니라 넘겨짚기다. 생각하는 방법에는 오직 연역이 있을 뿐이다. 연역은 닫힌계 안에서 상호작용의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닫힌계를 정하려면 판을 키워야 한다. 전체의 판도를 돌아보고 조절장치를 찾아야 한다.
귀납 - 배가 아프다면 외부의 독이 있는 음식을 먹었다. 넓혀간다.
연역 - 배가 아프다면 위장 내부에서 독이 자극했다. 좁혀간다.
연역은 닫힌계를 지정하여 외부 변수를 내부 상수로 바꾼다. 외부의 우연적인 원인을 내부의 필연적인 원인으로 바꾼다. 연역은 좁혀가므로 미리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추론을 시작해야 한다. 시야가 좁은 상태에서 더 좁히면 답을 찾을 수 없다.
연역은 미리 넓혀 놓고 다음 좁히므로 처음 출발점이 잘못되면 망한다. 동전이 떨어지면 일단 크게 동그라미를 그린다. 동전이 굴러갈 수 있는 최대 범위를 잡아야 한다. 안으로 좁혀가며 수색한다. 이때 처음 동그라미를 작게 그리면 망한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 안을 너무 좁게 정하면 망한다.
귀납은 점차 넓혀간다. 넓히기는 끝이 없으므로 영원히 못 찾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공간이 좁은 데서 시작하므로 현장이 파괴되고 단서가 오염된다.
사람들이 귀납을 선호하는 이유는 문제가 쉽기 때문이다. 용의자가 두 명이라면 대충 찍어도 50퍼센트 확률로 맞춘다. 그러나 사건에 접근하는 경로가 없으므로 어려운 문제는 전혀 맞히지 못한다.
사람들이 연역을 기피하는 이유는 닫힌계를 정하고, 상호작용을 찾아내고, 조절장치를 찾아내고, 밸런스의 축과 그 축의 이동 방향을 추적하는 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건의 경로를 모르기 때문이다. 구조를 모르고 메커니즘을 모르기 때문이다. 연역은 특별히 훈련해야 할 수 있다. 지도가 있어도 독도법을 모르면 소용이 없다. 다만 연역은 플랫폼이 같으므로 하나만 배우면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
사람들이 연역을 못 하는 이유는 사건에 자기를 개입시키기 때문이다.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역할을 주려는 심리다. 자신이 사건의 조절장치로 기능하려는 생각이 있다. 관객이 심판 노릇을 하려는 것이다. 이때 관객은 사실 판단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을 살리는 결정을 한다. 엉뚱한 판결을 해야 주목받기 때문이다.
모든 관성계의 물리법칙은 동일하다. 모든 닫힌계의 의사결정 원리는 동일하다. 아인슈타인의 등가원리는 강력하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하나의 의사결정 플랫폼을 공유한다. 자연계의 모든 변화는 거리와 속도의 각운동량 보존이다. 그러므로 인간에 의해 추적된다. 그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연역이다.
존재론과 인식론
사유의 방법으로 연역과 귀납이 있지만 실제로는 연역뿐이고 귀납은 경험을 활용하는 것이다. 귀납은 학습된 것이며 생각하는 게 아니고 전달하는 것이다. 경험이 많은 노련한 수사관은 딱 봐도 누가 범인인지 알지만, 과학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연역 - 변화는 닫힌계 내부에서 일어난다. 외부와 내부의 경계를 정하고 경로를 추적한다.
귀납 - 변화는 외부에서 누가 건드려서 일어난다. 외부의 의심 가는 용의자를 찍어야 한다.
경로가 있다. 연역은 자연의 변화하는 흐름을 따라간다. 모든 변화는 먼저 계 안에서 대칭의 밸런스를 만들고 다음 그 밸런스의 코어를 움직여서 질, 입자, 힘, 운동, 량 순서로 일어난다. 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이며 계, 체, 각, 선, 점 순서다.
문제는 연역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연역은 산의 정상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이다. 인간은 정상에 가 본 적이 없다. 우주의 가장 작은 것을 본 적이 없고 가장 큰 것을 확인한 적이 없다. 태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중간에 끼어든 존재다. 연역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길을 찾으려고 해도 지도가 없다.
처음에는 귀납할 수밖에 없으므로 귀납하다가 적절한 때 연역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올바른 사유는 연역이지만 현실적으로 연역할 수 없다면 귀납하다가 연역으로 갈아타야 한다. 귀납으로 단서를 수집하고 가설을 세운 다음 연역으로 검증한다.
존재 - 배경, 실체, 연관, 이행, 귀결
인식 -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
존재론이 자연의 의사결정 순서라면 인식론은 인간의 접근순서다. 존재론과 인식론은 순서가 반대로 되어 있다. 연역은 배경을 응용하고, 실체를 종합하고, 연관을 분석하고, 이행을 수용하고, 귀결을 지각한다. 인식은 반대로 귀결을 지각하다가, 이행의 수용으로 올라서고, 다시 연관을 분석하고, 실체를 종합한 다음 마지막으로 배경을 응용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간이 반대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거울의 상의 뒤집혀 있는데 그걸 모르면 코털 다듬다가 코피 난다.
1. 귀결을 지각한다.
2. 이행을 수용한다.
3. 연관을 분석한다.
4. 실체를 종합한다.
5. 배경을 응용한다.
인식론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간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순서가 뒤집혀 있다. 사람이 죽었다면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다. 맨 처음 귀결을 지각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단서의 수집이지 추론이 아니다. 존재론은 이를 뒤집어 자연의 사실과 일치시키는 것이다.
1. 배경을 응용한다.
2. 실체를 종합한다.
3. 연관을 분석한다.
4. 이행을 수용한다.
5. 귀결을 지각한다.
존재론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간다. 인식론으로 가설을 세운 다음 존재론의 재구성으로 검증한다. 사건의 재구성에 성공하면 답을 찾은 것이다. 지식은 존재론의 연역 추론으로 최종 확정된다. 그 이전의 중간단계는 지식이 아니다.
자연은 배경이 먼저 움직인 다음 실체가 움직이고, 연관이 움직이고, 이행이 움직이고, 마지막 귀결로 나타난다. 1차대전이라면 먼저 인종주의와 제국주의가 배경이다. 신무기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배경의 환경적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 실체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의 암살이 일어난다. 오헝제국의 선전포고가 있다. 그리고 이해관계를 따라 각각의 동맹국이 하나씩 참전하는 게 연관이다. 이행은 전쟁의 진행이고 귀결은 최종적인 결과다. 파리강화회의와 베르사유조약이다.
살인사건이 낮다면 범인과 피해자의 얽히고설킨 배경은 나중에 알려진다. 형사는 배경과 실체를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추론이 불가능하다. 처음에는 경험을 살려 귀납적인 방법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알리바이를 묻는 것은 넘겨짚기다. 용의자를 범인으로 간주하고 '네가 범인이 아니라는 증명을 해봐.'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귀납의 방법으로 운 좋게 범인을 잡을 수도 있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수도 있다. 귀납은 성공한다 해도 요령일 뿐 추론이 아니고, 사유가 아니고, 과학이 아니다. 반면 연역은 경로를 확정하므로 한번 성공하면 다른 모든 사건에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경로를 확정하여 지도가 만들어진다.
확률에 대한 이해
사람들이 많이 헷갈리는 게 확률이다. 연역적 사고가 핵심이다. 귀납적 사고는 자기 자신을 개입시키는 자기중심적 사고다. 우리가 무의식적인 자기소개를 경계해야 한다.
상호작용이 아닌 일방작용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귀납적 사고에 빠진다. 주사위의 눈을 결정하는 것은 주사위와 중력과 던지기와 주변 공간의 상호작용이다. 주사위의 일방작용이 아니다. 상호작용은 닫힌계가 있고 조절장치가 있다.
물고기를 잡으면 손에 쥔 물고기에 집중하게 된다. 물고기를 놓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 바다의 넓음을 보지 못한다. 더 많은 물고기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객체에 자기를 개입시키므로 전체가 아닌 부분을 보게 된다.
연역의 상호작용.. 전체를 조망
귀납의 일방작용.. 부분에 집착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아인슈타인의 오판도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확률을 잘못 생각했기 때문이다. 귀납적으로 접근하면 확률은 우연이고 연역적으로 생각하면 확률은 균형이다.
'신은 균형의 원리로 세상을 만들었다.'고 하면 멋지잖아. 확률은 내부에 조절장치가 있다. 확률은 통제되지 않는 외부 변수에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닫힌계 내부의 밸런스에 의해 큰 수의 법칙으로 통제된다.
우연과 필연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연이 있는 곳에 필연이 있다. 문제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우연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전체는 필연이고 부분은 우연이다. 필연에 주목해야 조절장치가 보인다.
전체.. 필연.. 닫힌계는 조절장치가 있다.
부분.. 우연.. 열린계는 조절장치가 없다.
주사위를 잘못 만들었다면 열린계다. 확률은 닫힌계를 전제로 성립한다. 조절장치에 의해 계가 통제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카지노에서 돈을 따거나 잃은 사람은 우연이지만 주최 측은 필연이다. 만약 우연이라면 카지노 망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개입시켜 자신이 카지노의 고객이라고 생각한다. 왜 자신이 카지노 운영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가?
돈을 따거나 잃은 게 우연이 아니고 하필 그날에, 하필 그 장소에서, 하필 그 숫자로 잃거나 딴 게 우연이다. 그날, 그 테이블, 그 숫자로 범위를 좁히는 관점은 닫힌계를 부정하는 것이다. 카지노는 닫혔는데 행운이라는 뒷문이 열렸다고 믿는다. 범위를 좁히면 열린계다. 그런데 왜 좁혀서 바라보지?
닫힌 것은 전체요, 열린 것은 부분이다. 전체 위주의 사고가 연역이라면 부분에 매몰된 사고가 귀납이다. 닫힌계 전체를 봐야 내부 밸런스라는 조절장치가 보인다.
문이 열려 있다면 바람이 불어서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문이 닫혀 있으면 담배 연기가 상승기류를 만들어 작은 바람이 일어도 건물 벽을 쓰리쿠션으로 맞고 균일하게 작용한다. 자전거가 출발점으로 돌아온다면 내리막길만큼 오르막길을 만나게 되듯이 닫힌계 안에서 변수는 균일하게 작용한다. 단 시간이 흘러야 한다. 주사위를 많이 던져야 한다. 주사위를 적게 던지면 열린계다.
사유가 부분에 매몰되는 것은 조절장치를 보지 않으려는 것이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므로 보지 못한다. 내리막길에서 돈을 따고 오르막길에서 먹튀하려고 한다. 조절장치가 중요하다. 예컨대 적군의 첫 번째 포탄이 빗나갔다고 치자. '명중률이 형편없군.' 하고 웃을 일이 아니다. 탄도학을 배운 포병이 첫 번째 포탄의 낙하지점을 보고 오차를 수정하기 때문이다. 다음 포탄은 명중한다. 그 자리에 있으면 죽는다. 닫힌계는 우연을 모아서 필연을 만든다.
주사위의 특정 눈이 자주 나오게 하는 어떤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이 이번에는 반대로 작용한다. 방향성의 원리 때문이다. 그 원인 요소의 선택은 두 가지다. 가속적으로 쏠림을 유발하거나 균형을 회복하거나다. 가속적으로 쏠림을 유발하면 열린계다. 닫힌계에서는 무조건 균형이 복원될 수밖에 없다.
모기장에 모기 한 마리가 들어왔다. 모기는 누구를 물까? 그것은 우연히 선택된다. 재수 없는 사람이 모기에게 물린다. 다음에는 누가 물릴까? 다른 사람이 물린다. 왜? 그 모기는 물린 사람에 의해 죽고 다른 모기가 들어오거나 혹은 그 모기가 다른 쪽으로 이동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계속 무는 모기는 죽는다. 점차 모기에게 물릴 확률은 균일해진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이 닫힌계라는 점이다. 열린계라면 문 앞에서 자는 한 사람만 물릴 수도 있다. 닫힌계 안에서 모기는 고르게 이동할 수밖에 없다. 닫힌계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에 따른 조절장치가 있다. 모기의 작용에 인간이 맞대응하므로 결국 조절된다.
로또 당첨 확률은 1/814만이 아니고 814만 조합의 균형이다. 크고 작은 45개 숫자 중에서 여섯 개의 숫자만 맞추면 되는 쉬운 게임이 아니고 814만 개 조합의 균형을 맞추는 게임이다. 숫자 여섯 개를 고르는 게 아니라 추첨기 속에 들어 있는 814만 개의 조합 중에서 여섯 개의 숫자를 가진 하나의 조합을 제출하는 것이다. 복권을 사는 나를 개입시키지 말고 주최 측의 관점에서 보자는 말이다. 누구도 당신에게 복권을 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틀린 생각.. 확률은 내 몫이다.
바른 판단.. 확률은 균등하게 나눠주는 방법이다.
엎치나 메치나 결과는 비슷하지만, 의식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보려는 노력해야 한다. 최대한 넓혀서 연역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확률을 내 몫이라고 좁혀서 생각하므로 문제가 생긴다. 나를 배제하고 돌아가는 판도 전체의 균형으로 넓혀서 보자.
귀납적 사고.. 신은 우연을 이용하여 세상을 만들었다.
연역적 사고.. 신은 균형을 이용하여 세상을 만들었다.
사고의 방향에 따라 사람의 태도가 달라진다. 확률은 당첨의 우연이 아니라 구조의 필연인데 사람들이 자기를 개입시켜 귀납적 사고를 하므로 확률을 우연으로 착각한다. 우연적 요소가 있지만 그건 부분이고 전체를 봐야 조절할 수 있다.
우연과 필연은 공존한다. 우리는 그중에서 필연을 추적해야 한다. 헷갈리지 말자. 특정한 사람에게,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일이 일어난 것은 우연이 맞다. 그 부분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게임의 주최 측이니까.
확률은 어떤 결과의 원인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이다.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개입시킨다. 균형은 원인이 전체에 있다. 아인슈타인은 무엇을 잘못 생각했을까? 빛 입자 중심의 사고다. 광자는 나다. 자기를 대입시킨다. 내가 무엇을 먹을지는 내가 무엇이 먹고 싶은지가 아니라 그 식당의 메뉴판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가 결정한다. 판도를 넓혀서 공간 중심의 사고를 해야 한다. 주변 공간이 광자를 흔들었다. 빛의 일방 작용에 이중성이 있는 게 아니라 빛의 진행이 공간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중성을 가진다.
경로가 있다
모든 종은 진화의 계통에 속해 있다. 계통에서 벗어나 뜬금없이 존재하는 종은 없다. 무생물 또한 마찬가지다. 우주 안의 모든 존재는 빅뱅의 자손들이다. 예외는 없다.
경로가 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사람은 경로를 복제하고 공유한다. 하나와 열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길이 있다. 길 끝에는 집이 있다. 집은 있는데 길이 없을 수는 없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고, 갈 수 없는 맹지에는 집이 없다. 집과 길은 한 세트다. 사람의 성과 이름처럼 같이 다닌다. 컴퓨터라도 경로가 없는 파일은 없다.
길은 공유된다. 하나의 길을 알려주면 열 집을 찾아내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다. 문제는 개소리다. 여친은 있지만 사귄 적은 없다는 식의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거짓말의 공통점은 디렉토리가 없고 경로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경로를 추궁하여 진위를 가릴 수 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존재가 낱낱이 끊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이것대로 존재하고 저것은 저것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집은 있는데 길이 없다는 식이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속일 수 없다. 딱 걸리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마술사는 천으로 그 지점을 가려 놓는다. 추적하지 못하게 길을 막아버린다. 애니메이션은 안개나 연기를 쓴다. 마법을 쓸 때는 '펑!' 소리를 내서 관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무협지는 뜬금없이 기술 이름을 외친다. 권투선수가 '여보시오. 그대 기운 센 강적이여! 나의 힘찬 어퍼컷을 받으시오!' 하고 외치는 일은 없는데 말이다.
터미네이터가 과거로 오는데 굳이 불빛과 안개 소품과 굉음이 필요할까? 거짓말을 하려니까 처치 곤란한 지점이 생긴다. 관객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 그 곤란한 지점을 얼버무리려고 한다. 이는 역으로 그 가려야 하는 연결부위를 추적하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날 수 없다. 버스를 타고 정류장으로 오든 지하철을 타고 개표구로 오든 반드시 딱 걸리는 관문이 있다.
진리는 존재는 완전성을 반영한다. 존재는 연결되어야 완전하다. 차는 시동이 걸려야 완전하다. 주유소와 연결된다. 악기는 소리를 내야 완전하다. 악사와 연결된다. 말은 대화가 통해야 완전하다. 집단과 연결된다. 생명은 호흡해야 완전하다. 에너지를 공급하는 태양과 연결된다. 물체는 중력이 있어야 완전하다. 지구 중심과 연결된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상부구조와 연결하는 경로가 있어야 완전하다. 그러므로 딱 걸린다. 속일 수 없다.
모든 존재는 조절된 존재이며 반드시 조절자가 있다. 길이 집을 조절한다. 호흡이 생명을 조절한다. 주유소가 자동차를 조절한다. 악사가 악기를 조절한다. 지구가 질량을 조절한다. 조절하는 자와 연결되므로 속일 수 없다.
모든 거짓말은 라디오는 있는데 방송국은 없다는 식으로 조절장치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라디오가 아니다. 방송국이 라디오를 조절한다. 모든 괴력난신, 외계인, 초능력, 사차원, UFO, 초고대 문명설, 환빠, 사이비 등의 공통점은 그러한 연결을 부정하고 조절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딱 걸리기 때문이다.
경로 없이, 계통 없이, 조절장치 없이 그냥 있는 것은 우주 안에 없다. 모든 존재는 회로 속의 존재다. 회로기판 위의 모든 소자는 배터리와 연결되어 있다.
조절하는 자와 조절되는 자 사이에 방향성이 있다. 중력을 전달하는 지구가 먼저고 물체가 다음이다. 악사가 먼저고 악기는 다음이다. 전체가 먼저고 부분은 다음이다. 조절되는 것은 조절하는 것을 공유한다. 나무의 가지가 다양해도 에너지를 공급하는 밑동은 하나다. 강물의 지류가 다양해도 결국 하나의 바다에 도달한다. 말단의 여럿과 근본의 하나 사이에 우리가 찾아야 할 진짜가 있다. 방향성이 있다.
한 줄기로 이어가는 변화의 흐름의 읽고 방향성을 알면 사건의 다음 단계를 알 수 있다. 미래를 알고 대비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답은 그곳에 있다. 다양한 변화의 구슬이 에너지라는 하나의 실에 꿰어진다.
- 존재는 경로가 있다. 족보가 있고 계통이 있다.
- 존재는 방향성이 있다. 경로의 연결은 한 방향이다.
- 존재는 완전성이 있다. 상부구조의 공유에 의해 완전하다.
개가 냄새로 길을 찾는 것이 사실은 배회하는 것이다. 배회하다가 냄새가 끊어지면 방향을 바꾼다. 방향전환을 반복하면 점차 수색 범위가 좁혀져서 우연히 정답에 이를 확률이 증가한다.
반지성주의가 있다. 이죽거리기 좋아하고 비아냥대기 좋아하는 자들 있다. 그런 짓을 하는 이유는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려는 것이다. 개가 배회하는 것이나 관종이 개소리로 타인을 자극하는 것이나 같다. 그들은 진리를 부인한다. 진리는 없고, 있어도 알 수 없고, 알아도 전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연결을 부정한다. 집은 인정하면서 길을 부정한다. 그냥 거짓말이다. 사람을 화나게 하여 반응을 끌어내려는 짓이다.
그들이 표면적으로 말은 그렇게 해도 그들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길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다. 제힘으로 길을 찾아낼 능력이 없으므로 다른 사람을 약 올려서 대신 찾아내게 하는 약은 기술을 쓴다. 피곤한 자들이다. 정말로 길이 없다면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여 대신 답을 찾게 하는 길도 없다.
메커니즘 찾기
생각한다는 것은 내부에서 대칭되는 A와 B를 합친 전체 C에 대칭되는 외부의 D를 찾는 것이다. 여기에 성공하면 E, F, G로 계속 가는 방향성을 찾게 된다.
활과 화살은 대칭된다. 활은 화살을 밀어내고 화살은 활을 떠난다. 활과 화살은 서로를 거부한다. 그러나 둘이 힘을 합치면? 과녁을 발견한다. 과녁은 사슴이다. 사슴을 잡으면? 다음은 멧돼지다. 다음은 산토끼다. 한 방향으로 계속 가주는 것이다.
전체 C와 외부 D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C는 내부에 있고 D는 외부에 있다. 외부를 연결하는 데서 방향성이 얻어진다. 이걸로 순환의 오류에서 벗어난다. 이항 대립에서 탈출한다.
진보와 보수가 A와 B라면 C는 문명이다. D는 그 문명의 발전이다. 순환의 오류를 벗어나서 다음 단계로 계속 가게 된다. 방향성을 찾으면 예측할 수 있다. 예측이 지식이 도달하는 전부다.
남자가 있으면 여자도 있다. 합치면 사람이다. 사람에 대칭되는 것은 동물이다. 동물과 식물을 합치면 생물이다. 생물과 무생물을 합치면 자연이다. 이렇게 한 방향으로 계속 가야 한다. 방향을 제시하지 않으면 말꼬리를 잡힌다. 한 방향으로 가면 일이 계속 커지므로 말머리를 잡게 된다. 말꼬리가 아니라 말머리를 잡아야 한다.
시인은 운을 띄운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후창한다. 선창이 '산이 높다'고 하면 후창은 '물은 깊다'로 받는다. 다시 '들은 넓다'로 이어가면 '사람은 많다'로 받는다. 평측과 압운으로 가능하다. 압운이 없으면 김삿갓이 와도 운을 받을 수 없다. 배구 시합과 같다. 공을 네트 너머로 넘겨서 랠리가 이어져야 한다. 패스가 한 방향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서로 밀어내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힘을 합치는 것이다.
두 선수가 서로를 링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지만 사실은 둘이 힘을 합쳐서 시합을 흥행시킨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밀어내려고 하지만 사실은 힘을 합쳐서 문명을 발전시킨다. 당근과 채찍이 서로를 미워하지만, 사실은 힘을 합쳐서 말을 달리게 한다. 대칭 2는 비대칭 1로 환원된다. 그리고 외부에서 새로운 대칭을 찾아낸다.
방향의 제시가 중요하다. 그것은 말꼬리 잡기를 말머리 잡기로 바꾸는 것이다. 말대꾸를 라임으로 바꾼다. 상호작용의 랠리가 오가면서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말꼬리 잡기는 상대의 말을 반박하여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인데 말머리를 잡으면 한 방향으로 계속 가므로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말대꾸 행동, 말꼬리 잡기, 사람을 공격하는 행동은 상대방을 화나게 해서 반응을 끌어내고 거기서 자기 행동의 단서를 찾으려는 동물의 본능이다. 어린이가 하는 짓이다. 궁지에 몰린 사람이 하는 최후의 발악이다. 자기 계획이 없다는 사실을 들킨다.
Concept은 꿰다Con+잡다cept는 뜻이다. 꼬치에 산적을 꿰듯이 한 줄로 꿰는 게 컨셉이다. 내가 먼저 컨셉을 제공해야 상대가 나의 말에 자기 아이디어를 추가할 수 있다. 비로소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대화가 되는 그림이 만들어진다. 나와 상대가 공유하는 상부구조의 조절장치가 컨셉이다.
진보와 보수가 공유하는 것은 생산력이다. 진보의 지식 생산력과 보수의 산업 생산력이 밀고 당기며 문명을 이끌어 간다. 그것을 컨셉으로 제시해야 말이 통한다. 컨셉을 못 잡은 사람이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끌어내고 거기서 뭔가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피곤한 짓을 한다. 어른들 사이의 대화라면 컨셉을 잡기 전에는 발언권이 없다.
답은 언어에 있다
생각은 상수를 단서로 미지수를 찾는다. 상수와 미지수는 대칭이다. 대칭을 추적하면 된다. 미지수가 제곱으로 꼬여 있는게 화근이다. 미지수가 꼬인 정도에 따라서 스칼라, 벡터, 매트릭스, 텐서가 있다. 많이 꼬아놨지만 풀면 풀린다. 마구잡이로 의문부호를 붙이지 말고 육하원칙에 맞게 구체적으로 무엇이 내가 모르는 미지수인지 확실하게 진술하면 질문이 곧 답이 된다.
능동 / 수동
질 - 언제 / 어디서 (시간과 공간)
입자 - 누가 / 무엇을 (주어와 목적어)
힘 - 왜 / 웬 (이유와 의문)
운동 - 얼마나 / 어떤 (조절과 선택)
량 - 하였나 / 되었나 (능동과 수동)
육하원칙은 영어 문법에 맞춘 것이고 구조론은 질, 입자, 힘, 운동, 량에 능동과 수동을 대입하여 십하원칙을 세울 수 있다. 좌표를 벌여 놓고 빈자리를 채우면 된다. 사유가 풍성해진다.
질문과 답은 대칭이므로 문제를 뒤집으면 답이다. 대칭은 뒤집어야 한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그것이 바람이다. 여기서 벼락같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주어와 목적어가 대칭을 이룰 때 둘을 연결하는 동사가 코어다. 코어 중심으로 사유해야 한다. 동사가 중심이라야 한다. 그냥 동사 말고 꼬인 동사가 답이다. 메커니즘으로 꼬였다.
우리는 동사가 단순히 주어와 목적어를 연결할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동사가 스칼라, 벡터, 매트릭스, 텐서로 꼬인다. 동사를 가운데 함수로 놓고 대칭의 양쪽 날개로 붙는 주어와 목적어를 갈아 끼우는 것이 생각이다. 바람이 불 수도 있고, 유행이 불 수도 있고, 흥행이 불 수도 있고, 인기가 불 수도 있고, 역사가 불 수도 있다. 하나가 불면 다 분다.
우리가 찾으려는 패턴은 동사다. 사유의 연결고리는 동사다. 천칭 저울의 두 접시라면 한 접시는 주어, 다른 접시는 목적어다. 가운데 천칭 축이 동시다. 축을 조절하면 대저울이다. 우리는 양쪽 끝에 놓인 두 접시의 대결에 주목하지만, 축을 조절해야 한다. 동사에 숨은 메커니즘을 조절해야 한다.
권력權力의 권權은 저울추다. 축을 움직이는 자가 있다. 싸움을 붙이고 흥정을 말리며 가운데서 농간을 부리는 자가 있다. 지금 한국은 언론과 검사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 알고 보니 심판이 몰래 선수로 뛰고 있었다. 선수가 몰래 토토를 하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부는 것이 바람이다. 부는 것은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가는 메커니즘이다. 기압의 존재가 발견된다. 바람이 부는 게 아니라 기압골이 이동한다. 낮에 팽창한 공기가 밤에 수축하는 데 따른 밸런스 조절이다. 조절장치가 있다. 바다는 해류의 대류에 의해 수온이 비교적 일정하지만, 육지는 밤낮의 편차가 크다. 뭐든 원인은 언밸런스고 결과는 밸런스다.
빛은 있고 어둠은 없다. 빛은 광자가 있고 어둠은 암자가 없다. 광자의 반대편에 대칭되는 그 무엇이 없다. 어둠은 밝음을 반대편에서 본 것이다. 그것은 관측자의 사정이다. 밝기를 명도가 아니라 암도로 표기할 수도 있다. 길이가 아니라 짧이로 표현할 수도 있다. 삐딱한 사람이라면 말이다.
대칭은 비대칭이다. 대칭은 관측자의 편의로 오염된 정보다. 관측자를 배제하고 physical reality로 보면 에너지는 비대칭이다. 대칭은 에너지의 이동과 머무름인데 에너지는 이동할 뿐 머무름이 없다. 에너지는 언밸런스에서 밸런스로 이동한다. 밸런스에 도달하면 내부에 잠복하여 이동한다. 바퀴가 돌지 않으면 내부에서 엔진이 돈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부에서 심장이 뛴다. 언밸런스에 의해 움직임이 밖으로 나왔다가 밸런스에 의해 안으로 숨는다.
같은 것을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의 편의다. 크기는 있는데 작기는 없고 길이는 있어도 짧이는 없고 너비는 있어도 조비는 없다. 모든 이항 대립은 인간의 편의에 따른 착시다. 동사 중심의 사고를 얻어야 이항 대립의 수렁에서 탈출할 수 있다. 동사는 움직이고 움직임은 시작과 끝이 하나의 방향성에 수렴되므로 교착이 타개된다.
그냥 주어와 목적어를 연결만 하는 수동적인 동사가 아니라 조절장치가 있는 동사 메커니즘이다. 동사가 천칭 저울의 축이 되어 양쪽의 두 접시에 담긴 주어와 목적어의 대칭을 동시에 지배한다. 권력은 능동적인 동사다.
선은 있고 악은 없다. 선은 사회화가 있고 악은 사회화에 대칭되는 그 무엇이 없다. 반 사회화는 없다. 움직임은 대칭을 이용하는데 반사회화는 대칭을 부정하므로 힘을 조절할 수 없다. 도둑질을 해도 도둑들이 뭉쳐서 강도단을 결성해야 하는데 반 사회화는 강도단을 흩어지게 만든다. 도둑들이 모이면 이미 사회다. 조절장치가 없다.
진보는 조절장치가 있고 보수는 조절장치가 없다. 진보는 문명이라는 도달점이 있고 보수는 도달점이 없다. 보수는 진보가 만들어낸 것이다. 진보한 만큼 보수가 발생한다. 선두가 전진하여 후미와 간격이 벌어진 것이 보수다. 진보가 멈추면 보수도 멈춘다. 진보가 집단에 언밸런스를 만들기 때문에 밸런스의 복원력에 의해 보수가 생겨난 것이다.
물가를 올려서 조절할 수는 있어도 내려서 조절할 수는 없다. 가격이 계속 내려가면 0에 도달하므로 조절이 불가능해진다. 일시적인 보수는 가능해도 계속 보수는 불가능하다. 계속 진보는 가능하다.
진보는 올라가는 것이고 보수는 내려오는 것이다. 진보는 계속 올라갈 수 있지만 보수는 올라간 만큼만 내려올 수 있다. 자전거를 타도 내리막길은 오르막길만큼만 가능하다.
엄밀히 따지면 모든 것이 비대칭이다. 대칭은 변화의 순간에 도출된다. 움직임에 의해서 연출된다. 나무가 자라므로 대칭된다. 생태계가 조화하므로 대칭된다. 몸통이 걸어가므로 좌우가 대칭이다. 모든 대칭은 운동을 반영하며 운동은 일직선이므로 비대칭이다. 대칭은 운동에 힘을 조달하는 준비 자세다. 비대칭이면 운동은 실패다. 한쪽 다리가 없으면 걷지 못한다.
대칭은 조절장치의 작동과정에 연출된 임시적 포지션이며 조절은 한 방향으로 일어나므로 궁극적으로는 비대칭이다. 산의 기슭은 대칭이나 정상은 비대칭이다. 모든 조직은 반드시 하나 이상 비대칭이 있다.
생각하는 방법은 동사를 중심에 두고 주어와 목적어가 양 날개로 붙는 메커니즘을 구성하여 함수를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 에너지의 입력과 출력을 추가하고 우선순위를 부여하면 완벽하다. 내부 상호작용구조가 드러나고 외부와의 연결고리가 확보된다. 그다음은 계속 연결한다. 함수에 상수를 넣으면 미지수가 나온다. 지식은 무한 복제된다.
이항 대립적 사고는 동사를 배제하고 주어와 목적어가 책임 떠넘기기 핑퐁 게임을 한다. 인간의 눈이 상대방을 주목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감시하느라 나와 상대를 연결하는 고리를 깨닫지 못한다. 남녀관계라 해도 공유하는 연결고리 숫자를 늘려야 하는데 상대의 행동을 받아치는 팃포탯에 신경 쓰느라 그 부분을 놓친다. 조절장치를 잃어버린다.
각운동량
관측은 주체와 객체 곧 인간과 존재의 상호작용을 연결고리로 객체 내부에 숨은 상호작용을 포착한다. 존재는 내부에 활발한 상호작용을 감추고 있다. 인간과 존재 사이에서 'A=B, B=C, 고로 A=C'를 성립시킨다.
상호작용 형태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이는 존재의 다섯 가지 모습이다. 물리학은 에너지 개념 하나로 얼버무린다. 에너지는 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입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힘을 의미하기도 한다. 질은 계의 안과 밖의 밸런스, 입자는 중심과 주변의 밸런스, 힘은 코어의 이동에 따른 진행 방향과 역방향의 밸런스, 운동은 각운동량 보존의 밸런스, 량은 외부의 대상에 의한 변별의 밸런스다. 밸런스의 형태가 다르다.
이들 중에서 입자만 분리하여, 혹은 힘만 분리하여, 혹은 운동만 분리하여 따로 메커니즘을 설명한다는 것은 불능이다. 힘은 아는데 운동은 모른다면 로미오는 아는데 줄리엣은 모른다는 식이다. 사건을 구성하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전체과정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사람은 역사적으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