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초등학교 시절
“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신명기 31장 12절)
나는 1933년 음력 10월 7일 일제치하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족 소유의 땅이 없어 다른 사람의 논밭을 임차하여 농사를 짓는 가난한 집이라 봄이면 보릿고개에 아침 밥, 저녁 죽으로 연명하며 성장했다.
내 나이 9살(만7세) 되는 해에 초등학교 시험을 보고 입학을 했다. 그때 시험 문제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선생님이 연필 10자루 중 3자루를 빼면 몇 자루 남느냐며 일본어로 시험을 보았다. 입학을 하기 전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일본어 공부를 배웠던 것이 기억이 난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태평양 전쟁이 치열했던 시절이라 초등학생들도 공부만 매진할 수는 없었다. 일제는 학교공부는 불과 서너 시간만 시키고 광솔(송진이 붙은 소나무 가지) 따오기, 쇠붙이 모으기, 모심기, 이삭줍기 등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거둬들이고 노동력 이용에만 광분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애국이라고 가르쳤다.
4학년 때에는 태평양 전쟁이 치열하여 하루에도 한두 번씩 미국 전투비행기가 날아오고 공습하여 방공호로 피신하느라 공부할 시간도 없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나는 1, 3, 4학년 때 우등상을 받았다. 5학년 때에는 아버지가 갑자기 작고하시어 집안 일을 돕느라 결석이 많아졌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에서 졸업사진을 찍으니 꼭 오라는 전달을 받고 학교에 갔다. 공교롭게도 그날 졸업 시험을 치게 되었다. 나는 몇 달을 결석한 처지라 시험을 잘 볼 수 있을까 했지만 최선을 다해 시험을 보았다. 나중에 선생님께서 나를 찾으셨다. 여러 학생들 앞에서 여러 달을 결석한 내가 졸업시험 성적이 상위권이라며 칭찬을 하여 나에게 용기를 주신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우리 33회 동창생은 1, 2반 합하여 120여 명이 졸업을 하였다. 그 당시는 졸업생의 나이가 같은 것이 아니고 1~5살까지 차이가 났다. 33회 졸업생은 9명만이 중학교를 진학했고 나머지는 농사일을 하는 농군이 되었다. 나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으나 꿈을 접어야 하는 처지였다. 어린 가장(家長)이기에 열심히 농사만 짓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우리 33회 동창들은 그 당시 대부분 군대 갈 나이여서 일부는 국군으로, 일부는 북한의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이 때문에 졸업생 중 5분의 1이 전사, 사고사, 행방불명, 자연사 등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5~6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 같다.
2010년 어느 날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나를 만나기 원하였다. 죽산초등학교 100주년이 되어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있으니 꼭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달라고 했다. 또 학교 발전과 동문회 발전에 공로가 있으므로 감사패를 주기로 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그리고 100주년 기념 문집을 발행하겠다며 인터뷰를 요청하여 죽산 초등학교 100주년 기념 문집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죽산초등학교 100년사』, p.412~421)
어려운 시절, 힘들게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내 인생의 발판을 놓아준 소중한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