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동 한 그릇
손진숙
부산, 울산, 경산, 포항에 사는 옛 친구 네 명이 경주에서 모였다.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 안강 사거리에서 내린다. 사거리를 휘둘러보다가 구석 한 상점에서 눈길이 멎었다. ‘이xx 공인중개사 사무소’ 간판이 붙어 있다. 예전 상호가 불현듯 생각났다. ‘향미반점’ 아직껏 영업을 하고 있다면 꾀죄죄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 우동 한 그릇 먹어보고 싶다.
취학 전이었던가 보다. 닷새만에 열리는 장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안강읍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사거리는 읍의 출입구이자 요충지였다. 사거리 한쪽에 세일병원이 있고, 도로 건너편에 보문당서점, 맞은편에 쌀집, 그 반대편에 향미반점이 있었다. 버스정류장, 학교, 기차역, 읍사무소, 우체국, 경찰서 등 주요 시설이 사거리에 눈꽃송이처럼 피어 있었다.
어머니 꽁무니를 졸랑졸랑 쫓으며 시장 구석구석을 돌고 되돌아와 마주한 사거리에서, 어머니는 향미반점으로 나를 이끄셨다. 중천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졸아든 뱃구레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었지 싶다. 그걸 어머니 밝은 귀가 알아들으신 게다. 우동 한 그릇을 시켜서 먹게 하셨다. 어머니와 나누어 먹었는지, 아니면 따로 한 그릇씩을 시켰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맛조차 잊혀 아련하다. 그것이 집밥만 먹던 촌아이의 황홀한 첫 외식이었다. 요즈음의 깔끔하게 단장한 식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날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피로를 풀고 배고픔을 달래던 최적의 휴식처나 충전소가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짜장면보다 우동을 더 좋아하신 것 같다. 국수도 가락이 가는 소면보다 가락이 굵은 중면이 더 좋다고 하셨다.
언니도 어머니를 닮았는지 짜장면보다 우동을 더 즐겼다. 언니가 안강에서 직장에 다닐 때 나는 여중에 입학을 했다. 자취를 하는 언니와 같이 지내게 되었다. 매일 된장찌개로 먹는 밥이 물릴 때면 우동을 사 먹었다. 그런데 반점에서 먹고 오는 게 아니라 빈 냄비를 가져가서 담아와 자취방에서 둘이 오붓하게 먹었다. 언니가 직접 갈 때가 많았지만 나를 심부름시킬 때도 있었다. 그다지 싫은 기색 없이 반점 주인에게 우동 한 그릇 값과 빈 냄비를 내밀었다.
결혼하여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였다. 입덧으로 노란 신물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도록 아무 음식도 먹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중화요리인 우동이었다.
신혼살림을 차린 단칸셋방에서 몇 걸음만 옮기면 사보이호텔이 있고 호텔 옆에 사보이반점이 있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낮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반점으로 가서 우동 한 그릇을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웠다. 그제야 가뭄에 시든 풀이 단비를 맞은 듯이 파릇하게 생기가 돌았다. 그러고선 저녁과 이튿날 아침을 굶은 뒤 점심때면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힘든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동 한 그릇의 신비 덕분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었는지 아리송하다. 한마을 경이와 이웃 양동마을의 영, 숙, 희가 어울려 안강읍내로 갔다. 양지목욕탕에서 함께 목욕을 하고 나니 점심참이었다. 자연스럽게 향미반점에 들어갔다. 경이와 숙, 희는 짜장면을 영이와 나는 우동을 나무젓가락으로 둥글게 저으며 감아올렸다. 후루룩 소리와 더불어 한창 부푼 소녀의 꿈이 모락모락 김을 내며 기다란 면 가락에 향기롭게 딸려 올라왔다.
스무 살 즈음 봄. 진해 친구와 모처럼 만나 영천 은해사엘 갔다. 초록이 눈부신 길을 걸으며 종달새처럼 재잘거리기도 하고 함박꽃처럼 웃음 짓기도 했다.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점심시간이 한참 넘어 시장기가 몰려왔다. 식당을 찾아 헤매다가 겨우 눈에 띈 반점이 무척 반가웠다. 진수성찬이 뭐 필요하랴. 시장이 반찬인 것을. 거기에 둘도 없는 우정이라는 강력한 향미료가 있었으니. 그날 먹은 아주 맛난 우동 한 그릇의 맛을 언제 다시 느낄 수 있으려나. 옛 우정은 퇴색해버리고 우리들 입맛은 진화해버린 듯하다.
이제 반점에 가거나 배달을 시켜도 우동을 주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 짬뽕에 밀려난 우동을 찾지 않은지 오래다. 가난에 휘청거리는 삶 속에서도 우동 한 그릇이면 마냥 행복하던 시절이 그립다.
국수도 소면보다 중면을 좋아한 어머니는 어쩌면 우동을 마음껏 드시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세상을 달리한 지도 강산이 한번 반이나 바뀌었다. 향미반점이 간판을 내린 건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인지, 후인지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진다.
내가 건너온 세월의 물살을 헤아린다. 고요하고 잔잔할 때도 있었고, 거칠고 험난할 때도 있었다. 그 고비마다 징검다리가 놓이듯 우동 한 그릇의 추억이 놓여 있음을 돌아본다.
코로나19로 여느 해보다 춥고 아프고 외로운 올겨울이다. 맑고 부드럽고 따뜻한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놓고 정답고 아름다운 향취를 담뿍 빨아올리고 싶다.
《좋은수필》 20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