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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모카님 '
아니 이 표지 자세히 보니까 구겨진 종이같은 느낌도 살짝 있네요? 더군다나 제가 대칭효과 되게 좋아하는데 이렇게 예쁘게 효과까지 넣어주시다니ㅠㅠㅠㅠㅠ 표지 자체에 아련함이 묻어있어서 이번화에 정말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아니 이런 표지는 대체 어떻게 하시는 거죠...? 오늘도 포토샵 고자는 운다...ㅠㅠㅠㅠㅠㅠ 너무 감사합니다! 정말 예쁘게 쓸게요!
' 마스베님 '
아니ㅠㅠㅠㅠㅠ제 오글거리는 1화 대사가 이렇게 멋지게 재구성될수도 있다니요ㅠㅠㅠㅠㅠ우선 이번에도 제가 사랑하는 대칭효과...! 더군다나 그게 종인이 백현이라니..! 이보다 황홀할 수는 없다...! 표지가 되게 포스터? 같은 느낌이 나요! 세로라서 그런가요ㅎㅎ? 처음 받아본 느낌이라서 더 새로웠던 거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예쁘게 쓸게요!
헬로 비너스 - romantic love
4개월 전쯤인가, 한참 정신없이 김종인에게 풍덩 빠져 턱 끝까지 물이 차올랐을 때였다. 애정촌 짝, 짝짓기 프로그램, 하다못해 짝꿍도 둘이 같이 짝을 이룬다는 뜻인데 왜 짝사랑의 짝만 홀로 남을 좋아하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 걸까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있다. 짝눈이라는 말이 있다. 양쪽의 크기나 모양이 서로 달라 짝눈이라고 한다. 짝사랑도 그렇다. 나와 상대방. 나의 사랑은 이런 크기에 이런 모양이지만 상대방은 저런 크기에 저런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상대방은 어떠한 크기도 모양도 없을 수도 있다. 짝을 이루고 싶으나 모양과 크기가 서로 첨예하게 달라 결코 짝을 이룰 수가 없다. 짝을 이루지 못하니 혼자가 되어 하나만 남는다. 손뼉도 짝이 맞아야 짝 소리가 나고 신발도 짝이 맞아야 완전할 수 있기에 한 짝만 남은 사랑은 어디에도 쓸 수가 없다. 한 짝만 덩그러니 남아 짝사랑이다. 그렇지만 한 짝만 남은 나의 짝사랑은 스스로 보듬어주고 품어주고 끌어안는다. 내 짝사랑은 내가 짝을 이루어주는 나와의 짝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매번 말하지만 우리는 이런 식으로 짝사랑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사실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자체에 올바르게 정의되는 건 없다.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이 다를뿐더러, 현실을 직감할 때에 꼬리를 잡는 시간도 다 제각각이 아니냐. 그러니 짝사랑이 무엇이냐, 왜 짝사랑은 그런 것이냐와 같은 질문은 다 무의미한 질문일 뿐이다. 주변에 있는 조력자들이 내게 그럴싸한 조건을 제시해줘도 정작 내 마음대로라는 변수가 있는 것처럼, 모든 짝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그 경계선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다. 빨간 선을 제 스스로 발견하고, 멍청하게 정신이 팔려 그 선을 넘어버리는 것도 모두 다 내 탓이니 자력으로 빠져나오는 것 또한 모두 스스로의 몫 아니겠냐.
" 김효정 진짜 왜그래? "
" ……. "
" 혹시 니가 김종인 좋아하는 거 그대로 말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김종인이 자기 좋아하냐 그딴 말 하지. 아니, 진짜 끝까지 썅년이네 그거. "
" ……아, 그니까 진짜. "
" 아 존나, 네가 뭘 잘못했다고. "
어렴풋한 주황으로 물들인 하늘이 이제 그만 현실을 효유하라며 내 머릿속을 잔잔하게 찔러댔다. 견고했던 이상이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김종인이라는 자체를 좋아하던 날로 따지자면, 놈은 내게 그 어떤 사람보다도 완벽하고 번듯한 남자였다. 원체, 내가 김종인이라는 인물에 갈증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제 신경을 모두 다 뺏겨버려 그런 것도 있지만, 적어도 지난 8개월간 김종인은 내게 그런 무게를 띠고 있었다. 알게 모를 묵중한 중압감에 답답하게 조여있는 교복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후, 하고 매캐한 가래가 역류했다. 무려 한 시간씩이나 일찍 일어나 공을 들였던 앞머리를 보기 흉하게 헝클이곤 매가리 없이 나사 풀린 머리를 그대로 바닥으로 떨궜다. 마치 마땅한 증거가 없는 살인 사건에 유일한 단서라도 발견한 것처럼, 단조롭기 그지없는 건조한 땅만 뚫어져라 마주했다. 아, 모든 게 건조하고 무난했다. 저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 날 내려다보고 있는 배수지도, 늘 그렇듯 같은 모양새로 제 홍조를 감추고 있는 하늘도, 매일 같은 패턴으로 골머리가 썩어나게 고생하고 있는 내 머릿속도, 잔뜩 기대하게 만들어 놓곤 결국 집 앞에서 허무한 말 한 마디를 끝으로 무심하게 등을 돌려버린 김종인도.
어제가 생각났다.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임에도 그럴수록 선명해지는 게 참 야속했다. 변백현을 보내고 한 손에는 내 가방을 든 채로, 다른 한 손으론 절뚝거리는 내 팔뚝을 부축하며 나란히 걸음을 맞춰주는 어제의 김종인이 떠올랐다.
" 아까 괜히 이상한 질문해서 미안, "
" …… "
" 사과하는데 변백현있으면 쪽팔리잖아, 그래서 가라 했어. "
김종인은 이 애매한 감정선에 아무 이상이 없던 사람처럼 시원한 미소를 비추며 내게 눈을 맞춰왔다. 예쁘게 웃는 어제의 그 얼굴에 지금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멀쩡히 있던 복도 양쪽 면이 빠른 속도를 내며 거리를 좁혀오는 느낌이었다. 눈치 없는 언질로 기도 근육을 압박해오는 김종인이 참 야속했다. 사과를 바란 건 절대 아닌데. 그저 김효정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김효정이 뭐가 그렇게 대단해서 사실인지도 모를 이야기들을 저 혼자 신뢰하고 무례한 질문부터 했던 건지. 내가 화난 건 김효정에 말만 듣고, 김효정에 말만 듣고서 저 혼자 북 치고 장구치는 그 태도에 속상한 것뿐인데.
지긋이 두 눈을 감았다. 푹푹 찌는 열대야도 아닌데 감기에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다리는 한쪽 절름발이에, 코는 비음에.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건 김종인 때문이었다. 눈치 없이 날 착각하게 하고, 날 추락하게 만드는 그 잘난 마스크 덕분에. 놈은 참 대단했다. 딱히 뭐 하나 하는 것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체에 대단한 능력이라도 주어진 것 같았다. 누군가가 위로랍시고 마법의 알약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내가 예뻐지는 알약보단 김종인의 눈이 180도 변해 한순간 내가 예뻐 보이는 그런 마법의 알약.
짝사랑의 조건 아홉 번째 : 난 그를 좋아하는 행동에 있어서 티가 안 난다 생각하지만, 남들은 나의 모든 행동에 티 좀 그만 내라며 충고를 일삼는다.
" 다리는 또 어쩌다가 다친 거야. "
" 변백현이랑 김종인 얘기로 문자하고 있었는데 김종인이랑 김종대가 그거 보려고 존나 난리치는 거야, 그거 안 뺏기려고 난리치다가. "
" 지랄, 마음 같아선 김종인한테 그냥 꼰질러버리고 싶다. "
" 야, 나도 마음 같아서 확 질러버리고 싶다. "
" 저번에 너 윤보미랑 같이 고백하러 갔었다며. "
" 고백이 아니라 그건 마음 정리, 김효정이랑 영화본다는 소리 듣고 충격먹었을 때. "
" 어쨌든 좋아하는 거 고백하려했던 건 똑같네, 그럼 그냥 고백하고 마음 정리해버려. "
" 미쳤냐? 이제서야 말이라도 간신히 하는데. 그래도 그거 때문에 김종인이랑 친해졌잖아. "
" 그따구로 어중간한 게 무슨 친구 사이냐, 그냥 변백현이랑 아는 사이니까 김종인이 몇번 말거는 거지. "
" 뭔 개씹소리야, 다 김종인이 착해서 그런 거지. "
" ……진짜 존나 한심하다, 존나 존나 등신같아. "
수지는 전생에 참 죄가 많은 아이였다. 예를 들면 현재 내 친구인 것으로만 봐도 그랬다. 제 성격과는 완벽히 다른 내 답답함에 울분이 터지는 건지 연신 쌍욕이란 욕은 다 토해내며 자신의 울분감을 표현하는 하나뿐인 내 친구였다. 그러나 그건 짝사랑을 듣는 입장이라 그런 것뿐이다. 뭐든지 하는 입장은 소심해지기 마련이다. 병원에선 하루가 지나면 금방 나아질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한 다리도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을 더해갔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욱신거림이 심해져 듣기 흉한 신음도 몇 번이고 튀어나오곤 했다. 배수지의 왼쪽 손을 잡고 같이 계단을 오르니 꼭 아무 능력 없는 무능력자라도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지는 속 터져 죽기 일보 직전인데도 철없는 난 멍청한 생각 하나 하곤 잘만 들곤 했다. 아, 오늘도 지각을 할 예정인 윤보미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덜 만만한 배수지라서 말대꾸라도 할 수 있는 거다. 윤보미였으면 벌써 김효정, 아니 김종인한테 끌려가고도 남았겠지.
" 야, 잠깐만 서 봐봐. "
" 아, 왜. 나 다리 아파. "
" 너 김종인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냐고 물어보기는 했어? "
" ……아, 그걸 어떻게 물어봐. "
" 왜 못 물어봐? 혹시 김효정이 지 말하고 싶은 대로 말했으면 어떡해. "
" 설마 그랬으면 김종인이 어제 나한테 잘해줬겠냐? 나쁘게 생각했겠지, 집까지 데려다줬다니까? 미안하다는 말도 했고. "
" 야, 남자는. "
" ……. "
" 특히 남자는 여자가 자기 좋아하는 거 알면 진짜……, "
" 다리 아직도 아프냐? "
" 아, 엄마 깜짝이야! "
" 아, 다칠뻔 했잖아 등신아. "
" ……변백현? "
깜짝 놀라 뒤로 휘어진 내 몸을 제 두 손으론 받치곤 놀란 숨을 허무하게 쓸어내는 변백현이 보였다. 젠장, 왜 필요 없는 상황에만 잘도 골라서 나타나냐 이 말이었다. 가뜩이나 멀쩡한 곳 하나 없는데 남은 다리 한 쪽까지도 다칠뻔하지 않았느냐. 눈치 없이 신이 난 얼굴을 장난스럽게 한번 흘기고자 비스듬히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어제 예쁜 짓 하나는 톡톡히 해준 놈이다. 나보고 김효정보다 예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를 거다. 언뜻 봐선 변백현을 사정없이 쏘아대는 성질 더러운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그 속엔 여러 가지의 의미가 담겨있었다. 난 태초부터 성격이 모나 남에게 쉽게 고마움을 표현할지 몰랐다. 오히려 그 표현을 다른 방식으로 비추곤 했었다. 장난스럽게 변백현을 흘기며 나름대로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내 의도를 알아채기는 한 건지 놈은 익살스럽게 옆으로 눈짓하기에만 바빴다. 반만 꺾었던 고개를 완벽히 뒤를 돌리니, 그제야 그 눈짓에 대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의도를 알아야 하는 건 변백현이 아니라 오히려 나인 모양이었다. 옆에선 예쁘게 미소 지으며 가슴 저린 음성을 비추는 김종인이 보였다.
" 다리 아직도 아프면 큰일인데, "
" ……. "
" 지금 어디 가는데, 교실? "
" 어어, 지금 교실……! "
" 야, 나 힘 없다고 김종인한테 부축해달라고 해. "
" 미친, 하지마라 진짜. "
" 아, 개답답하네. 하라고 그냥. "
" 아, 시발 못한다니까? "
" 나는 힘 없다고 김종인한테 해달라고 하라니까? "
" 아니, 진짜 둘이 간다고 생각해보라고. 아까 니가 김종인이랑 나랑은 친구 아니라며. "
" 나랑 변백현이 뒤로 따라온다니까? "
" ……아, 진짜. "
" 나 어깨 푼다? 니가 말해라? "
" 진짜 말하게? 아, 네가 말하면 안돼? "
" 존나 가지가지하네, 기다려. "
" ……. "
" 니 연기 잘해라, 알아서 대사 맞춰 진짜. "
주연 ○○○, 배수지 단막극의 막이 올랐다. 주연급 세미 여주 배수지가 힘없는 처연한 표정으로 제 어깨 위에 올려있던 내 팔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큽, 하고 때아닌 헛웃음이 터질뻔한 위기를 간신히 넘기려 양입술을 처절하게 앙다물었다. 짝사랑하는 놈 하나를 속이기 위해 되지도 않는 연기를 하려니 온몸에 수십 마리의 벌레가 지나가는 기분까지 들었다. 이놈의 미친 배수지는 어디까지 오버를 할 생각인지 아예 손목까지 돌려가며 자신의 고단함을 어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 진짜 한심하다. 한심하다 못해 자꾸만 웃음이 터진다.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민망함에 저도 모르게 뒤로 등을 돌리고 터지는 단맛의 웃음을 참아봤다. 콧구멍까지 벌렁거려지는 게 이거 여간 보통 일이 아니더라. 난 평생 거짓말을 하면 안 되겠다. 벌써부터 이렇게 오그라들어 죽겠는데,
" 아, ○○○ 나 진짜 팔 너무 아파. 잠깐 스톱. "
" 아, 2층만 더 올라가면 되잖아, "
" 우리 그냥 급식아줌마들 다니는 엘레베이터 쓰면 안돼? 아, 어쩔 수 없잖아. "
" 저번에 너 윤보미랑 그거 썼다가 벌점 받았다며? "
" 이건 특수한 경우라니까? "
" ……. "
" ……. "
" 야, 김종인 변백현……, "
감히 예언을 한다면 올해의 연기대상과 올해의 베스트 우정상은 배수지와 내가 분명했다.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깊숙이 파고들어가는 애절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광대가 꿈틀거렸다. 몰래카메라 대상인 두 놈들의 멍청한 표정을 기대하며 고개를 들었다. 축 처진 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매점에서 들고 온 과자봉지를 죄인 마냥 힘없이 떨구는 변백현에 이어서, 꽤나 심각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제 손에 들려있는 왕꿈틀이 하나를 변백현에게 맡기고 내 쪽으로 걸어오는 김종인이 보이는 것 아니냐,
" 우리 둘이 부축해줄게, 내가 조금 들어줄테니까 천천히 올라가면 돼. "
" ……. "
"변백현, 왼쪽 좀 잡아. "
" 뭐? 아, 우리 지금 음악실이라고……교실 5층이라니까? "
" 그럼 그냥 가? 우리 때문에 다친 건데. "
" 아, 그럼 김종대 불러, 김종대 때문에 다친 거잖아. "
" 꺼져 그럼, 존나 짜증나네 구네. "
" 아, 장난이잖아 미친놈아. "
" 아니, 남자애들한테 부축해달라고하지 왜 둘이서 오고 있어. "
잠 못 드는 밤이 하루 더 늘어날 것 같다. 놈은 여자를 설레게 하는 법을 하나하나 다 아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 내가 병신처럼 8개월이나 좋아하지. 턱하고 말문이 막혀 무의식적으로 김종인에게 시선이 향했다. 드라마에선 여주인공들이 잘도 튕기더만 난 그럴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내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다, 그러니 내가 여주인공이 될 리가 없다. 난 늘 여주인공의 친구 역할로 나오는 답답한 조연 역할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자격지심은 김종인이 날 더 착각하게 만들수록 심해졌다. 그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것 같다며 주변에서 엮을수록 그럴 리가 없다며 죽을 각오로 부정하는 그런 심보 말이다.
제 말이 끝나자마자 내 한쪽 팔을 저의 어깨 위로 올리려는 김종인이었다. 나보다 족히 한 뼘은 더 큰 놈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려니 그게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거다. 꼭 고목나무에 붙어있는 매미라도 된 기분이었다. 지끈거리는 발목에 저도 모르게 까치발이 들렸다. 이게 도와주는 건지 더 상태를 심각하게 만드는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어쨌든 김종인이 날 작살 내려는 의도 하나는 분명한 듯했다. 날 설레서 죽이려는 의도도, 날 아프게 해서 죽이려는 의도도.
" 병신아, 니 키랑 얘 키랑 안 맞잖아. "
" 아, 맞다. 미안, 아파? "
" 아, 괜찮아 괜찮아. "
" 허리에 두르는 건 괜찮지? "
" 응? "
" 나보다 니가 키 훨씬 작잖아, "
어깨 위로 올라가있던 오른쪽 손이 김종인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오묘한 전율이 손끝까지 돋았다. 원래 좋아하는 남자의 옷깃만 스쳐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게 짝사랑인데 늘 혼자서 기도하듯 모았던 손이 오늘만큼은 놈의 허리 쪽에 가있다 생각하니 순수했던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가는 건 당연한 지사였다. 후아,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심호흡을 했다. 입을 꾹 닫고 소리 없는 큰 호흡을 반복적으로 쓸어내렸다. 옆에서 등신 같은 친구를 보고 있던 수지의 찰진 표정도 보였다. 진정하자 진정해. 그냥 부축해주는 거잖아? 좋아할 일 아니야. 착각할 일 아니야. 암, 그럼. 부들부들, 처절할 만큼 떨리는 손끝에 놀란 가슴께가 계속해서 짓눌렸다.
" 아, 그럼 나 먼저 가있는다? "
아, 하고 당황스러운 탄식이 터져 나왔다. 내게 위로랍시고 했던 말과는 너무도 많이 변형된 문장에 제 의도와는 다르게 짧은 헛웃음도 튀어나왔다. 두 갈래진 미간 사이를 그대로 새긴 상태로 뚫어져라 배수지를 응시했다. 쓸데없는 오지랖 떨지 말고 그냥 쳐박혀 있으라고……. 애타는 입꼬리를 쭉 내려뜨리고 배수지를 죽어라 응시했다. 살면서 친구에게 이 정도로 비참한 표정을 지어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가 윤보미처럼 말이라도 잘하느냐, 배수지처럼 예쁘장하기라도 하냐. 자신감이라곤 일 퍼센트도 없는 자격지심 덩어린데 대체 무슨 배짱으로 김종인과 단둘이 교실까지 올라가냐 이 말이다.
' 야, 존나 기회. '
" ……. "
오, 세상에. 어린 시절에 할머니들이 내 앞에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을 자주 썼었는데 지금 상황에 딱 그 단어가 나와야 할 것만 같았다. 되지도 않는 윙크를 해대며 눈치 없이 야속한 손짓을 보내는 배수지 앞에 나 혼자만 느낄 수 있는 투명 벽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한 날숨을 토해냈다. 어정쩡하게 부축 받고 있는 자세에 꼭 김종인한테까지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옆에서 제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며 턱을 추켜들고 건방진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변백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철없는 배수지를 계속 건드리면 뭔가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고, 그나마 번지르르한 센스라도 있는 변백현이라면 내 속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
" 나랑 매점 가실 분, 선착순 한 명 변백현 당첨. "
딱 하나 간과한 사실이 있다. 건드리지 않아도 늘 사고를 몰고 다니는 배수지가 내 친구라는 사실을. 솟구치는 불안감에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이 무방비 상태로 열렸다. 으, 혼자선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내가 김종인하고 단둘이 무슨 말을 하겠냐.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얼굴만 벌게 질게 뻔한데. 애절한 표정은 점차 배를 더해갔다. 흘깃 배수지를 보다 이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변백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미 손바닥 중앙에는 흥건한 식은땀이 젖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김종인은 지금 자세 괜찮냐며 내 대답을 유도하고 있었다.
" 병신이냐, 얘가 니 허리 잡으면 당연히 불편하지. "
" 응? "
" 니가 ○○○ 허리 잡는게 더……, "
" ……. "
" ……. "
" ……어, "
" 아, 미친 그냥 배수지 니가 잡아. "
" 뭐? 아, 나 왜. "
" 병신아, 그럼 쟤 허리를 내가 잡을까. "
변백현에게 '병신' 이라는 단어는 제 주변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인듯했다. 제 친구의 하나뿐인 기회를 날려먹었다며 입술이 댓발 나온 수지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바짝 내 옆까지 다가섰다. 그제야 깊은 못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느슨하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배수지라도 있으면 일말의 자신감라도 생길 것 같았다. 축 늘어진 어깨에 내 팔을 제 어깨 위로 올리고 간신히 가벼워진 발걸음을 다시 계단 위로 올리는 철없는 배수지가 보였다. '아, 진짜 팔 아픈데…….' 하며 불평 어린 불만을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직도 개념 없는 심장이 날뛰기에 바빴다. 김종인의 탄탄한 허리를 더 이상 잡지 못한다는 건 좀 아쉬운 일이긴 했지만……안타까움의 맛을 진득하게 다셨다. 그래도 뻘쭘하게 단둘이 교실에 가는 것보단 그게 나은 편이였다. 나라고 뭐 김종인과 단둘이 있는 게 싫어서 그러는 줄 아느냐. 마음과 입이 따로 노니까 그런 거지.
" 업히는 게 제일 낫겠다, 업혀. "
" ……. "
" 계단 위까지만 업어줄게. "
" 응? "
" 어쩔 수 없잖아, 니 친구 힘들다며. 그냥 위에까지만 업어줄게. "
김종인에게 박력이라는 것이 폭발했다. 그저 좋아만 했던 8개월의 김종인과는 완벽한 다른 사람이었다. 바라보기식의 사랑만 한 탓인지, 아니면 원래 이랬던 김종인의 성격을 그동안 내가 몰랐던 건지 그게 의문이었다. 놈은 잘도 내 심장을 폭행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남자치고도 넓은 편에 속하는 제 등을 아무 말없이 내어주는 행동에 느슨하게 풀렸던 긴장이 다시금 급속도로 조여왔다. 빨개진 얼굴이 딱 터지기 직전 풍선과 다를 것 없을 거다. 매번 피하기만 급급했던 지난 날이 생각 났다. 아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단둘이라는 단어 자체가 두려워 어떻게든 어색한 상황을 도망치려 했던 멍청한 내가 떠올랐다.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든 날 위하려 하는데, 바보 같은 내가 그 기회들을 모두 다 차버리는 거다. 평소보다 아주 조금 더 용기를 내면, 심지어 그게 누구에게나 다 티 나는 발연기라도 시도를 해보면 뜻밖에 것들이 찾아온다. 예를 들면, 먼저 제 등을 내어주는 가슴 터지는 김종인의 배려 같은 것처럼.
매쓱거림과 함께 반복적으로 저려오는 손마디 끝을 여러 번이고 쥐었다 폈다 하며 타이밍의 틈을 봤다. 아, 이거 진짜 업혀도 되는 거야? 내 몸무게는? 나 이거 꿈 아닌가? 그럴 리가 없잖아, 김종인이. 느릿하게, 또는 힘겹게 한 걸음을 뗐다. 주변은 종인이와 나를 뺀 모든 것들이 다 슬로우 기법으로 처리되고 있었다. 양팔을 살짝 벌리고 여전히 눈앞에서 등만 보이고 있는 김종인에게로 허리를 굽혔다. 찌릿한 감정이 벅차올랐다. 코흘리개처럼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더라. 지금 상황이 믿을 수가 없어서, 너무 말도 안 되니까. 5초가량이 지났을까. 그제야 부드럽게 내 등허리를 감싸곤 굽혔던 제 무릎을 펴고서 계단 위를 오르기 시작하는 김종인이 느껴졌다. 그 사람의 호흡과, 체온과, 심장이 너무도 선명하게 박혀와 낙인이라도 찍힐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거짓말 같은 현실에 자잘하게 턱 부분이 움직여댔다. 뿌연 안개가 시야 앞을 가려왔다. 김종인이 본다면 내 마음을 들킬지도 모른다.
" ○○○, 잠깐만. "
" ……. "
" 아, 치마 왜이렇게 짧아, "
땅만 내려다보고 가던 내 팔목을 누군가 잡았다. 너무 하얗지도 않은, 그렇다고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누렇지도 않은 적당히 시간이 바랜 색깔의 제 교복 와이셔츠를 내 등허리 살짝 밑으로 묶어주는 변백현이었다. 아직 따뜻하지 않은 초봄에 반팔만 입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움에도 속마음과 따로 노는 입에선 아무 말도 나올 수 없었다. 변백현도 그걸 아는 건지 평소와는 다르게 깝죽거리는 말투 대신 침묵으로 대답을 일관했다. 느릿하게 고개를 올리자 놈과 두 눈이 마주친 나였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 모습에 병신 보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얼굴이 참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변백현이 밥 먹듯이 말하는 '병신'의 종착은 결국 나인 모양이었다.
김종인은 최대한 내 허벅지와 떨어져 손을 받쳤다. 그렇다 보니 꼭 엉덩이만 튀어나와있는 하마와 동급이 된 느낌이었다. 뒤에선 배수지가 흐뭇함 반, 뿌듯함 반, 어색함 반으로 계속해서 비웃음을 참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김종인에 어깨 쪽으로 고개를 떨구다 현실을 직시하고 황급히 목 부근을 폈다. 아, 내가 김종인한테 업혀있는 건지 김종인이 나한테 업혀있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심장박동이 참 규칙적으로 빨라졌다. 지치지도 않을까.
" 다 왔다, 조심히 내려. "
" 아, 완전 편하게 왔어 진짜! "
" 힘들다고 해서 데려다 준 거야, 띨띨아. "
김종인에게 있어 딱딱한 이름이 아닌 나름대로의 애칭으로 불린 두 번째 순간이었다. 놈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앞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잔잔하고 부드럽게 머리를 헝클였다. 아, 하고 무의식적으로 민망할 정도의 탄성이 터졌다. 바보같이 놀란 티 한번 제대로 내는 나다. 본능에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가 참 야속했다. 어머니, 인간은 왜 이렇게 감정적으로 몸이 움직이나요. 한번 더 머리 헝클여줬다간 김종인 앞에서 위아래 췄겠어요. 고개는 그대로 고정한 상태에서 게슴츠레 눈만 추켜 올렸다. 허나 내가 상상했던 간지러운 김종인의 표정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제야 놈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목을 돌렸다. 아, 이번엔 진짜 현실적인 탄성이 튀어나왔다. 감격적인 탄성이 아니라 안타까운 탄성이다. 어쩔 수 없이 나오는 그런 속상한 감정. 예쁘장한 얼굴에 예쁘장한 교복을 입고, 심지어는 신고 있는 신발마저 예쁘장한 김효정이 제 교실에서 나오는 걸 저도 모르게 본 모양이었다.
김효정은 당연하듯 우리 쪽으로 방향을 꺾다 제 머릿속에선 절대 어울릴 수 없던 우리를 보고 제대로 티 나게 인상을 찌푸렸다. 김효정은 참 다른 의미로 감정을 감추지 못 했다. 나와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죄를 진 게 아님에도 추락하는 자신감에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내 성격이 마냥 소심하고 꽉 막힌 게 아니다. 나도 짝사랑이 아닌 부분에서는 욱하기도 하고, 분노를 마음껏 티 내기도 했다. 그러나 짝사랑만큼은 아니었다. 마냥 자신감이 없고, 비관하고, 그러다가 혼자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병신이 되곤 했다. 이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작년에 같은 학원 오빠를 짝사랑했던 윤보미도 마찬가지였고, 재작년에 자기와 가장 친구의 남자친구를 좋아하는 배수지도 다를 것 하나 없었다. 그때라면 나도 친구들처럼 참 한심해하며, 나였으면 하지도 못할 조언들을 해주는 독설가 역할을 톡톡히 맡기도 했었다.
" 신경 쓰지말고 뒤 돌아봐, 와이셔츠 빼줄게. "
" 아……, 그냥 살짝만 빼줘. 나머지는 내가 풀게. "
" 손이 없냐, 뭘 빼줘 빼주긴. "
" ……. "
" 뭐, 니가 빼 "
오랫동안 삐딱선을 안 탄다 싶었다. 자상하게 내 허리춤에 묶여있는 와이셔츠를 빼준다는 김종인의 배려를 묵사발 말 듯 무시하며 띄꺼움에 극치를 보여주는 마스크에 참 오묘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제는 이어준다고 했으면서, 또 언제는 어떻게든 들키게 하려 난리고, 또 언제는 눈치 있게 행동하면서, 또 언제는 썩 괜찮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란.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말이라도 못하지, 그렇게 따지면 이어주려고는 왜 하고, 센스 있는 행동은 왜 하냐 이 말이다. 툭 튀어나온 내 아랫입술을 보지 못한 건지 여전히 툭툭 기분 나쁜 눈으로 아무도 없는 옆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변백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고개가 갸우뚱하고 움직였다. 귀신이라도 있나 싶어 나도 따라 그곳으로 시선을 옮기니……,
" 내가 한 말 듣고도 같이 다닐 마음이 생기나 봐? "
" ……. "
" 아, 불쌍해서 도와주려고 그러는 건가. "
" ……. "
" 그런 거 아니면……, "
" 김효정. "
"……. "
" 여태까지 네가 했던 말중에 진짜였던 게 하나라도 있냐? "
" 뭐? "
" 남자 친구 없다고 했던 말도 그렇고, 그때 손잡고 가던 사람이 친오빠라 했던 것도 그렇고, 용돈 안 받는다고 집에서 알바 못하게 한다고 한 것도 그렇고……, "
" ……. "
" ……나 좋아한다고 했던 것도 그렇고. "
" ……. "
" 너 나 좋아해? 아니잖아. 그럼 굳이 거짓말을해서까지 니가 나한테 그렇게 말을 한 이유가 뭔데. "
" 누가 거짓말이래? 너 내가 한 말 설마 거짓말인 줄 알고 있는 거야? "
" 아니야? "
" ……허, 진짜 웃겨. "
억세지 않고 부드럽던 목소리 톤이 독한 가시를 세우고 뻗어 나갔다. 그 방향은 딱 김효정을 향하고 있었다. 마냥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대화에 내 이름이 함축되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김종인의 독 발린 질문에 김효정은 마땅한 대꾸 없이 짧은 비웃음만 흘리며 제 등을 돌렸다. 누구 때문에 정신없이 두근 거렸던 가슴 부근이 다른 의미로 날뛰기 시작했다.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다. 순간이었지만 핀트가 확 엇나갔다. 평소에 나였다면 절대 못할 일이지만, 저도 모르게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간 건 참 놀라운 일이었다. 참 냉담하게 등을 돌리는 김효정의 팔을 무작정 잡고부터 봤다. 돌발적인 내 행동에 놀란 건 김효정뿐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두 배는 커진 눈으로 날 응시하고 있는 김종인도, 짧은 한숨을 뱉는 배수지도,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을지 감도 안 잡히는 변백현도 모두가 다 그랬다.
" 뭘 어떻게 말했는데? "
" 뭐? "
" 어떻게 과장했고, 어떻게 거짓말을 쳤길래 그런 말이 나와? "
" 과장? 과장이라는 소리가 나와? "
" 너랑 내가 평소에 말을 하는 사이야, 장난을 치는 사이야? 얼굴 아는 정도 그 이상 이하도 아닌데 니가 알아봤자 뭘 얼마나 정확하게 알겠어. "
" 하, 저번에 배수지랑 둘이 화장실에서 얘기했던 거 들……! "
" 그건 3분이고, 수지랑 나는 3년이나 됐어. 알아봤자 누가 더 알겠어? 그때 수지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 화부터 내지 말라고 했잖아. "
" 그래, 너 말하는 거로만 들어선 거의 ○○○이랑 소꿉친구급이다? "
원인모를 용기가 생긴 게 아니다. 내 마음을 들킬지 모를 두려움에 의한 뻔뻔함이 생긴 것뿐이었다. 김종인 앞에선 죽어도 착한 척, 이해심 넓은 여자라고 해도 8개월간의 내 마음을 허무하게 들켜선 안됐다. 얼굴까지 벌게진 채로 날 아래 위로 훑는 기분 나쁜 시선에 자신감을 지키려 양손을 둥글게 말아 쥐었다. 싸우지는 말자. 만약 김효정이 정말 김종인에게 내가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했다면 그 말이 오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까지만 하자. 계속 세뇌하고 세뇌했다. 잊어서는 안된다. 내가 김종인을 좋아하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한 일종의 연극일 뿐이라는걸.
" 나 1년이나 넘게 속여먹었으면 됐잖아. "
평소와 다를 것 없던 두 눈이 두 배 가량 넓어졌다. 내 시나리오에 죽어도 내 편일 리 없을 거라는 놈이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아, 필요 없는 새끼랑 얘기 계속 하고 있어야 해? 누가 봐도 여기서 쌍년은……. "
뒤이어 제 오른쪽 손을 들어 손바닥쪽으로 뒤집고 정확히 김효정쪽을 가리키는 대담한 변백현의 음성도 들려왔다.
" 김효정 넌데? "
"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며, 그럼 그냥 신경 쓰지 마. "
" ……. "
" 내가 뭘 생각하고 누굴 만나든지 관심도 말고, "
" ……. "
" 아직도 내가 너 좋아할거란 착각도 하지 말고, "
" ……하, "
" 아, "
" ……. "
" ○○○한테도 관심 끄고. "
김효정을 잡고 있던 내 손에 느슨하게 힘이 풀렸다. 이번에야말로 숨 쉴 틈도 없이 비릿한 욕을 뱉으며 빠르게 등을 돌리는 김효정의 뒷모습에 알게 모를 숨이 차올랐다. 내게 있어 김종인은 따뜻하고, 배려 많고, 모든 여자한테 친절했고, 착한 남자였다. 그 점이 지난 8개월간의 내 숨통을 조일 만큼 고통스러운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참 미묘하고 세부적인 감정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내 편을 들어준 거였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띵하고 망치로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 같았다. 늘 피하기만 바빴던 내 역할은 가득 성이 난 채로 도망가고 있는 김효정이 하고 있고, 항상 내 앞자리에서 나보다 더 빠르게 걸어가던 종인이는 벅찰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나와 나란히 발을 마주하고 서있었다. 거울처럼 김효정과 김종인 옆에 붙어 다니던 변백현도 이번만큼은 오롯이 내 편이었다. 흐물하게 늘어난 심장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다리도 균형을 잃고 쓰러질 것 같았다. 옆에선 후, 하고 구덕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김종인이었다.
" ……미안, "
" 뭐가 미안. "
" 그……일부러 그런 소리 듣게 하려고 한 게 아니라, "
" 알아, "
" ……. "
" 왜 그런지 알아. 너도 나 말고 다른 애 좋아하고 있다며, 근데 김효정이 나한테 그런 말 했으니까 억울했을 거 아니야. "
" ……. "
" 안 미안해도 돼, 띨띨아. "
" ……. "
" 우리 음악 늦어서 일단 빨리 가야겠다, 가자. "
내 얼굴을 다 가릴 만한 큼지막한 손이 머리 위로 부드럽게 올려졌다. 그 손은 10초도 안 지나서 빠르게 떨어졌지만. 내게서 등을 돌리고 멀어져 가는 곰살궂은 잔웃음에 망치질 투성이던 가슴께가 시릴만큼 아려왔다. 바람이 시렸다. 그래서 김종인도 시렸다.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고개에 그나마 남아 있던 힘까지 모두 빠지는 것 같았다. 좋아서 그랬다, 좋아서. 내 편을 들어주는 김종인이 좋아서, 센스 있게 행동해준 변백현이 좋아서, 변함없이 내 곁에 있어준 배수지가 좋아서, 비참해진 김효정이 좋아서, 그리고, 처음으로 변한 내가 좋아서.
" 야, "
" 응? "
어느새 뒤로 와 내 허리춤에 보다 꽉 묶여있는 와이셔츠를 풀어 주는 변백현의 간지러운 손끝이 느껴졌다. 석고상처럼 굳은 다리가 그대로 매가리 없이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뒤에선 나만 들릴 정도로 작게 한숨을 토해내는 변백현의 소리가 들려왔다.
" 치마만 짧다고 김종인 꼬실 수 있는 거 아니야, 병신아. "
" ……야, 우리 학교에서 나 짧은 편 아니거든. "
" 좋아하는 것좀 적당히 티내고. 남자는 너무 티내는 거 또 별로야. "
" ……. "
" 그리고 여자든 남자든, "
복부를 압박해왔던 얇은 와이셔츠가 이내 변백현의 손으로 전해졌다. 여러 가지의 후련함 때문인지 시원한 탄성이 터졌다. 수지는 일단 교실에 가서 고마움을 전하면 되고, 김종인한테는 미안하다는 말로 대체했으니 변백현에게도 미처 내 속마음을 전할 생각이었다. 꽤나 오글거리지만, 예를 들면 고맙다거나 뭐 그런 자잘한 말. 크게 입을 벌리고 잔뜩 무게를 실었다.
" 변……, "
" 여자든 남자든 자기 속마음 너무 티 안 내는 게 현명한 거라고, 응? "
" ……. "
" 난 얼굴 대놓고 빨개지는 여자가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내가 뭐냐. 아마 남자들 다 싫어할 걸. "
놈이 들고 있던 와이셔츠가 내 시야 전체를 가려왔다. 그건 제 와이셔츠로 내 머리부터 눈까지를 덮고 성냥팔이 소녀처럼 팔 부분은 턱에 매듭을 지어버린 변백현 때문이었다. 옆에선 너네 개그콘서트하냐며 자지러져가는 배수지의 웃음 소리도 들려왔다. 캄캄해진 시야에 예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사정없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이게 날 병신이라 부른다고 진짜 병신 취급 하는 건가. 계속 받아주니까 진짜 그렇게 보이나. 후아, 하고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이걸 어떻게 받아줘야 하나 이 말이었다. 화를 내기는 애매하고, 또 장난으로 받아주기는 바보 된 기분이고.
" 으유, 병신아. "
" 아, 진짜 손 떼라. "
" 이런데 어떻게 김종인을 꼬신다고, "
유일하게 와이셔츠가 걸쳐있지 않은 양쪽 볼을 사정없이 구겨대며 흉한 꼴을 만들어 보이는 변백현의 만행에 반사적으로 여러 가지의 쌍욕이 터져 나왔다. 허나 아침, 점심, 저녁을 쌍욕만 먹고산 사람처럼 일 퍼센트의 거리낌 없이 익살스럽게 웃어젖히다 아예 뒤통수까지 걸쳐 있던 와이셔츠를 아래로 쭉 내려 내 얼굴 전체를 가려버리는 새끼였다.
" 야, 미친 거 아니야? 아, 시발 변백현! "
" 아, 반응 웃겨 뒤지겠네. "
정말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허공 위를 훅훅 가로지르며 몇 번이고 개새끼의 이름을 죽어라 외쳐댔다. 그러나 장난의 끝을 모르는 건지 와이셔츠 전체로 덮여있는 내 얼굴을 제 손바닥으로 꾹 눌러버리곤 익살스러운 웃음과 함께 빠르게 계단 쪽으로 뛰어가는 지랄 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어쩌다 이렇게 모두한테 병신 취급받는 존재가 된 건지 모르겠다. 짝사랑하는 자체로 한심한 인간이 돼버리니, 이거 억울해서 맘대로 말할 수냐 있겠냐.
짝사랑의 조건 아홉 번째 : 그를 좋아하는 티는 어떤 식으로든 난다, 다만 그가 정말 눈치가 없거나, 눈치를 채도 모른 척을 하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것이 문제지만.
지금까지의 백현이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변백현 내 화장 내놔.
오늘 짝조 진짜 망작이네요...흑흑.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1.18 13:21
종인이 백현이 되게 심리가 궁금하네요ㅠㅜㅜㅜ 백현이두 설레여...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16 01:06
망작이라뇨!!!! 백현이 행동 때무네 설렘사 ㅇ<-<
종인이가 알고 있네ㅠㅠㅠㅠ알고있어..백현이가 하는 말에 다 의미가 있다니 뭘까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2.25 21:40
종인이 뭐지ㅣ...
백현이가 여주한테 마음 있는 것 같다..
와후 이런글을 망작이라뇨 !! 말도안됩니다 ㅎ
종인아 혹시나해서 말하는건뎅...여주가 너 좋아하는거알고도 그리행동하는거라면 레알..잔인한거양..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6.06.17 00:36
아니 김종인이 주요인물인듯한데.. 변백현 틱틱대고 챙겨줄껀 다챙겨주는게 왜이리 사랑스럽죠..♥
아 이번편 스프라이트 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