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단톡 대포리 방 존경 스럽고 눈물나게 반갑습 니다 이러한 체널 때문에 수십년 무소식이였던 분 들에 안녕을 감지할수 있 다는것이 시대에 운을 받 은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 에는 빨.주.노.초.파.남.보 7색이 주로 많이 있는데 흑색만은 제외 되어있습니 다 우리 톡방에서 오고가는 소식은 아무리 진실한 농담이라도 내 혈족 내육신에 침 밷기이니 이해 하고 용서하시고 이 소식 체널만은 끈지들 마세요 그러하기 전에 7색에 들어 가지 않는 흑색은 내 스스 로 삼가합시다 경만이 동생은 혹시 고양시 에 살고 계신가 한번 만나 보세 내가 살아온 서편고삭은 이렇게 변해왔습니다 주경야독으로 서울에서 77년3월에 순경채용시험에 3천5백명 응시에 합격하여 3년근무하고 전두환 국보 위에 해직당하고 81년에 귀향하여 농사업에 전업했 을 우리 죽청리는 너무나 심한 농주에 취해 술판.쌈판.농사판의 풍습 이 있었는데 걸음목에서 시핀고삿.안고삿.물방아 모퉁이에서ㅡ2구 올라가는 도랑천에는 병아리 쥐 양말 걸레 농산물 찌꺼기 등이 꽉꽉썩어서 더운 날에는 시파리떼등으로 악취때문 에 불편을 많이격고 살아 오신 선친님들 그때 건언들 양림보가 페쇠되고하여 우리 조상님들이 피땀흘려 쌓아놓으신 농사용 그 큰 2ㅡ3백근 이상되는 봇돌을 타 부락 사람들이 훔쳐가고 여름 큰 비에 흘러서 흙에 묻치고하여 없어지기 시작 했지요 나는 너무나 도난 분실이 아쉬어서 생각한 나머지 당시에 2구 리장 병희 형님과 1구 리장 석정 아저씨와 상의해서 서울 전 세무서장 금남 이달휴 아저 씨를 뵙고 청원하여 당시 현금 80만원을 지원 받아서 봇돌을 가져다가 마을 안 도랑 복개 공사 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일일 노임으로 약 평균 7천 원정도를 지불하고 나는 딸딸이 4륜 구동 농사용 운반 차가 있어서 연료만을 지급받고 재미있게 꿈같은 공사를 했지요 그렇게 무거운 큰 돌들을 맨몸으로 우리 어른 들은 일당을 떠나서 내일같이 해주셨지요 그때 그 어르신들.동복대부.광산 대부.2구 승춘 대부님 부친 동면 아저씨.강빈 아저씨. 윤휴 아저씨.생후 아저씨. 왕휴 아저씨.김상호씨 김원섭.오치선.힘이 장사 이신 이분들에 운반으로 지금에 1구 마을 끝 석정 아저씨 대문앞에서 부터 서편고삿 병구 집까지 안고삿 경만이 동생 집까 지.안산입구에서 2구 마을 입구까지 복개하고.웃골 저수지 모퉁이 겨우 나무짐 한 사람 지나다니는 좁은길 현재 조상님들 산소길을 확 장해서 차도로 이용하고 있 지요 또 한가지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동촌 할아버지.장동 할아버님 그 젊은 시대에 자뜰 냇가에 정자 나무와 수갯재에 정자 나무를 심어서 큰 거목 이 되어 무더운 여름 논.밭 일하고 잠시 땀을 식히며 오손도손 식사도 하시는 쉼터를 그 어느날 화순 군청에서 홍수 예방에 장애가 된다고 하여 직원2명이 제거하러 왔었어요 그것도 조상님들에 명령인지 인연인지 우리 일 꾼들에게 걸려들었어요 그 때 어른들께서 정자나무를 벨려고 그러는지 엔진톱을 가지고 뚝에서 내려오고 있다고 해서 몇사람이 함께 쫒아가 확인하고 강력하게 저지하여 쫓아 보낸후 병희 형님과 상의 해서 달휴 아저씨께 전화로 알렸던바 무슨 소리냐 우리 어르신들 께서 심은나무에 농사일 쉼 터인데 절때 못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바람에 봇돌 을 갔다가 둘레 축대를 쌓아서 그 큰 정자를 보존 하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모시고 해년마다 준근이 아저씨께서 리장하시면서 청소 관리를 철저히 해주셨 는데 한 동안 화순.광주 사람들에 유원지가 되었지요 그런데 무당년들이 여기 저기서 소문듣고 와서 나무 속이 비워 있는곳에다가 촛불.향 을 피우며 신 굿들을 많이들하여 결국은 그 정자는 고사하고 말았습니다 그 년 놈들은 내장 썩어 다 죽었어요 그 후 준근이 아저씨께서는 지금에 있눈 정자나무를 심었는데 모질게도 성장을 하지 안는군이요 군청에 산림과에서는 성장제 수 약품이 있으리 생각됨니다 지원 받아 보세요 소식지에서 어떤 문자가 있어도 내 동지 혈손들이 하신 말씀들이 기에 달게 받아 이해하며 너무 긴 구절이지만 내 고 향 역사라고 생각되어 알림 톡이니 오타가 많은 점 이해 부탁하며 다음에 또 짜증소리 기대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