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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해병 귀신도 잡겠더라” 그 말을 남긴 6·25 종군 女기자 [송의달 LIVE]
“한국은 세계를 깨운 자명종...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은 속임수일 뿐”
6·25 당시 30세 ‘마거리트 히긴스’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 가상 인터뷰
송의달 에디터
입력 2023.06.06. 07:15
업데이트 2023.06.06.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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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쯤 북한은 북위 38도선 전역에서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을 개시했습니다. 그로부터 1953년 7월 27일 밤까지 3년 1개월 2일, 도합 1129일에 걸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는 6·25 전쟁 개전 초기 6개월 동안 현장을 누비며 직접 취재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다. 1951년 여기자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9월 그녀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수여했다. 2016년에는 '5월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Wikipedia
이 기간 중 사망·부상·실종된 남북한 군인만 141만명이었고, 5개 의료지원국을 포함한 21개국은 175만명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6·25는 2차 세계대전 후 가장 큰 국제 전쟁이었습니다.
이틀 후인 6월 27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1920~1966) 당시 30세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은 6·25 전쟁 당시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였습니다. 그는 1950년 12월까지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 낙동강 방어, 인천상륙, 서울 수복, 장진호 철수 같은 전쟁터를 취재했습니다.
195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賞)’을 받은 히긴스 기자는 ‘귀신 잡는 해병’이란 용어를 만든 주인공입니다. 1950년 8월 17일 한국해병대 제1대대가 통영에 단독상륙해 북한군 제7사단을 패퇴시킨 기사에서 “이들은 귀신마저 잡을 것(They might even capture the devil)”이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초기 6개월간 곳곳을 누벼
2019년에 상영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미국 영화배우 메간 폭스(Megan Fox)가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 역할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사진 위). 아래는 '장사리' 영화의 한 장면/워너브러더스 코리아
2019년에 상영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미국 영화배우 메간 폭스(Megan Fox)가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 역할을 맡아 연기하고 있다(사진 위). 아래는 '장사리' 영화의 한 장면/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쓴 <War in Korea>를 번역해 1951년 하반기 국내에 출간된 책.
6·25전쟁 발발 73주년을 맞는 이번 달에 기자는 그의 육성(肉聲)을 들어보기로 했습니다. 아래는 히긴스 기자의 저서와 평전, 기사(記事)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가상(假想) 인터뷰입니다.
- 왜 위험한 6·25 전쟁 종군기자를 자원했나?
“도쿄에서 서울행 미군 수송기를 탈 때 ‘한국은 여자에게 적합한 곳이 아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내게 한국행은 단순한 기사 취재를 넘어 성전(聖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나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동아시아특파원으로서 신문사를 대표하고 있었다. 내가 못 가거나 안 간다면 나의 존재이유가 없었다.”
1920년 홍콩에서 태어난 히긴스 기자는 7세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가 UC버클리에서 대학 시절 학보사 기자로 일했습니다. 뉴욕 컬럼비아대 저널리즘스쿨을 우등졸업한 뒤 1942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를 거쳐 1944년 유럽에 파견돼 2차 세계대전을 취재했습니다. 1946년부터 베를린지국장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5월 도쿄지국장이 됐습니다.
- 한국 방문은 그때가 처음이었나?
“그렇지 않다. 도쿄에 부임 직후 5월 30일 실시된 한국 총선거 취재차 왔다. 북한군 진지(陣地)와 70m 떨어진 곳에 있는 개성 외곽의 한국군 요새 등을 찾았고 뉴욕 헤럴드 트리뷴 5월 29일자 1면에 ‘기자(記者), 한국을 갈라놓은 국경으로 가다. 빨갱이들이 말과 포탄으로 싸우는 현장을 발견’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도쿄지국장으로서 쓴 첫 번째 1면 기사였다.”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한국 군인들과 음식을 앞에 놓고 얘기하고 있다(사진 위). 한국 군인들을 상대로 수첩·펜을 들고 취재하는 모습
- 전쟁 초기 상황은 어땠나?
“6월 27일 내가 3명의 특파원들과 도착했을 때 미 군사고문단도 후퇴준비를 하는 등 서울은 아수라장이었다. 28일 새벽 한강 인도교(人道橋) 폭파로 다리를 건너던 많은 군인과 피난민들이 사상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나는 간신히 나룻배를 구해 한강을 건너 도로와 산길을 22km쯤 걷고 나머지는 지프차를 얻어타 수원에 갔는데 거기에서 서울 함락 소식을 들었다.”
◇“한국이 위험한 곳 아니면 오지 않았을 것”
- 아찔한 순간의 연속이었겠다?
“한강을 건너는 동안 총성이 끊임없이 울려 나는 간(肝)이 콩알만 해졌다. 피난민 대열에서 유일한 미국 여기자였던 나는 일행에 폐(弊)가 되어선 안 된다고 다짐했다. 한국이 위험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위험한 사태가 곧 뉴스이고 뉴스를 수집하는 게 내 일이다. 총에 맞는 걸 두려워해서는 기사(記事)를 따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25에 참전하자 북한의 김일성이 1950년 7월 8일 소련의 스탈린 앞으로 보낸 지원 요청 편지
- 수원에서 대전으로, 대전에서 대구·부산 등으로 계속 후퇴했는데.
“6월 30일 밤 11시쯤 억수같은 장맛비가 퍼붓는 가운데, 덮개없는 지프차를 타고 수원에서 7시간 비포장 도로를 달려 겨우 대전에 도착했다. 머리 위에 담요를 얹어봤지만 금방 물이 새 소용없었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종군기자들은 물에 젖은 강아지 꼴이었다. 추워 온 몸을 덜덜 떨었다.”
- 종군기자로서 힘들었던 일이라면?
“기삿거리 찾는 일은 전체 어려움의 5분의 1이 안 되었다. 교통과 통신이 끊어진 게 가장 힘들었다. 차량은 서울 탈출시 동료 기자가 운좋게 구한 지프차로 해결했다. 기사는 군용(軍用) 전화를 이용해 도쿄로 기사를 소리내 불러 보냈는데 전화기 한 대를 놓고 순위 다툼이 치열해 보통 2~3시간 기다렸다. 전화 사용 시간도 자정부터 새벽 4시로 제한됐다.”
실제로 28일 낮 수원에 도착한 히긴스 기자는 ‘서울 함락’ 기사 송고를 위해 미 군용기 편으로 일본 이타즈케 공군기지로 갔다가 29일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수원비행장에서 맥아더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의 전용기를 보고 활주로에서 기사를 작성하던 중 만난 맥아더의 제의로 도쿄로 다시 갔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일본에 도착하는 즉시 트루먼 대통령에게 미 지상군 파견을 건의하겠다”는 전용기 내 특종 인터뷰 기사를 보낸 뒤 6월 30일 한국에 복귀했습니다.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9일 한국 전선 순찰차 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 미 극동군 총사령관. 그의 '바탄' 전용기 앞에 서 있다.
6·25 전쟁 중 조우한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와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오른쪽)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가 6.25 전쟁 도중 밝은 표정으로 기자를 작성하고 있다.
그는 “우리들은 기사를 작성하다가 고꾸라져 타자기 앞에 푹 쓰러진 적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타자기로 기사를 칠 때면 항상 기분이 날아갈듯했다. 기사 마감과 내 이름이 적힌 기명(記名) 기사가 주는 흥분과 도전은 너무 매력적이었다”고 했습니다.
- 미군 스미스 부대와 북한군간의 첫 전투는 어땠나?
“7월 5일 새벽 대전을 출발해 평택을 거쳐 경기도 오산 죽미령쪽에서 벌어진 교전 현장에 갔다. 쌍안경으로 그날 오후 미군 한 명이 북한 T-34 탱크를 향해 바주카포를 조준하다가 기관총에 가슴을 맞는 걸 보았다. 19세의 케네스 섀드릭(Shadrick) 이등병이 첫 미국인 전사자였다. 1개 대대 병력 540명의 스미스 부대는 5000명의 북한 제4보병사단 2개 연대와 싸웠다.”
◇女기자에 대한 미군과 회사 양쪽의 편견
- 유일한 여성 종군기자로서 어려움이 더 많았을 것 같다.
“나는 두 가지 역경과 싸워야 했다. 하나는 여성에 대한 미군(美軍)의 편견이었다. 워커 중장(8군 사령관)은 7월 17일 군인들을 동원해 강제로 나를 대구공항에서 도쿄로 쫓아냈다. 맥아더 원수가 추방 명령 철회 결정을 내려 나는 7월 19일 전선에 돌아왔다. 또 하나는 회사가 대선배인 호머 비거트(Bigart) 기자를 한국에 보낸 것이다. 그는 나에게 ‘도쿄로 떠나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나는 떠나지 않고 버텼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경기도 오산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비. 1950년 7월 5일 미국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임 부대가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던 오산 죽미령에 세워져 있다.
경기도 오산에 있는 유엔군 초전기념비. 1950년 7월 5일 미국 제24사단 소속 스미스 특임 부대가 북한군과 첫 전투를 벌였던 오산 죽미령에 세워져 있다.
히긴스 기자는 “인천상륙작전 취재차 수송함에 타려했다가 ‘전통상 군함에는 여성의 탑승이 금지된다’며 거부당했다. 하지만 ‘객실 아닌 갑판이나 홀 한 구석에 슬리핑 백을 깔고 자겠다’며 맞선 끝에 승함(乘艦)했다”고 말했습니다.
- 종군취재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나?
“딱 한 번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때 들었다. 그날은 ‘무혈 상륙’이 아니라 매우 위험했다. 아군의 맹포격에 적군은 기관총 발사로 맞섰다. 내가 탄 보트 위로 적의 총탄들이 날아왔다. 첫열의 해병대원들이 방파제로 기어오를 때, 사진사는 ‘내 할 일을 다 했다. 수송함으로 간다’고 하더라. 일순간 나도 그와 함께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의 사격이 다시 시작돼 나는 보트에서 재빨리 내렸다.”
그녀는 저서 <War in Korea>에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데이비스, 크레인, 그리고 나는 참호에서 뛰어나와 방파제의 다른 쪽으로 20야드쯤 뛰어갔다. 그곳에서 총알을 피하는 데 안성맞춤인 약 15피트 높이의 흙무더기를 발견했다. 해병대원들이 우리 왼쪽에 있는 암벽 쪽으로 갈지자걸음을 옮기다가 5~6명이 예광탄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다. (중략) 상륙함 한 척이 암벽 위에 있는 아군 병사 몇 명을 적으로 오인해 포탄을 발사했다. 해안에서 미친 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병사 여러 명이 맞았다.”
①950년 9월15일 유엔군 총사령관인 미국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가운데)이 배 위에서 인천상륙작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②미 해병대 발도메로 로페즈 중위가 앞장서서 사다리를 걸치고 해안에 상륙하는 모습. 그는 상륙 직후 북한군 총에 맞아 손에 있던 수류탄을 떨어뜨렸으나 자기 몸으로 감싸 동료 대원들을 살렸다. 그는 미국 정부 훈장을 받았다. ③인천상륙작전 당시 인천 해안 모습/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목숨 잃을 뻔한 아찔한 순간들
타자기, 벼룩약, 칫솔 등만 갖고 다닌 히긴스 기자는 땅바닥, 교실 등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잤습니다. 여성이라고 특별한 장소나 대우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운 바지와 셔츠를 몇 주씩 입었습니다. 영하 20도 아래의 혹한(酷寒)이 몰아닥친 12월 5일에는 미 해병 제5연대 소속 중대원들과의 장진호 철수에 동행했습니다.
- 죽음의 공포를 느낀 순간도 있었나?
“1950년 8월 초 경남 마산 서쪽끝 진동리에서 미 육군 제27보병연대 임시 본부가 있던 학교 건물에서 북한군의 기습을 받았을 때다. 교실에서 커피 등으로 모처럼 호화스런 아침식사를 마칠 때쯤 갑자기 사방에서 총알이 폭음과 함께 난무했다. 기관총의 집중사격으로 테이블 위의 커피 포트가 날아갔다. 내가 잠잤던 간이용 나무침대 위에 수류탄이 터졌고, 총알들이 핑핑 소리를 내며 창문과 얇은 벽들을 찢고 관통해 들어왔다.”
그녀의 이어지는 말입니다.
“우리는 피신하려 했으나 바닥에 몸을 붙인 채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내 이빨들은 스스로 제어할 수 없어 저절로 딱딱 맞부딪혔다. 울음 섞인 소리도 몇 마디 나왔다. 전쟁 중 처음 탈출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고 죽음이 목전에 다가온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존 마이켈리스 제 27보병연대장은 8월 말 뉴욕 헤럴드 트리뷴 본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북한군의 공격이 4시간 넘게 계속되는 동안 히긴스 기자는 임시 응급치료소로 실려들어온 많은 부상병들에게 혈장을 주입하는 일을 자발적으로 도왔다. 그날 히긴스 기자의 행동은 영웅적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입은 병사들의 생명을 살리는데 보여준 사심(私心)없는 그의 헌신에 우리 연대원들은 매우 감사하고 있다.”
1950년 8월 17일 한국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을 기념하고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1980년 경남 통영에 세워진 전적비 모습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에 대한 영문 전기. 앙투아네트 메이가 1983년 발간했다. 한국에는 2019년 <전쟁의 목격자>로 번역됐다./Amazon
◇“대학때부터 ‘가장 뛰어난 기자’ 되겠다고 결심”
- 왜 그렇게 전쟁 취재에 열과 성을 다했나?
“어렸을 때부터 종군기자가 꿈이었다.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자원입대해 공군 조종사로 활약한 아버지로부터 전쟁 얘기와 사진들을 많이 접했다. 내가 10대 후반일 때, 40세 유명 여성 비행사의 실종 뉴스를 듣고 그녀의 신비로운 실종을 취재하러 남태평양으로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시절부터 나는 평범한 기자가 아닌 ‘가장 뛰어난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도 전쟁터를 누볐는데.
“독일의 부헨발트(Buchenwald)의 가스실 현장 등을 취재했고 다하우(Dachau)의 나치 강제수용소는 연합군의 도착 전에 먼저 취재하고 수감자들을 해방시켰다. 당시 취재와 봉사 활동 공로로 ‘종군 휘장(徽章)’을 받았고, 1945년 뉴욕신문 여성클럽으로부터 ‘최고의 해외 특파원상’을 받았다.”
- 6·25 취재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자가 됐는데.
“6·25 전쟁 취재 등으로 1951년에만 퓰리처상과 AP통신의 ‘올해의 인물’, 조지 포크 기념상(George Polk Memorial Award), 미 해병대 예비역 장교상 등 50여개 상을 받았다. 32세이던 1952년 윌리엄 홀 미 공군 대령과 재혼(再婚)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을 일곱 차례 더 방문해 취재했다.”
히긴스 기자의 자서전을 보면 그녀는 6·25 전쟁 종군취재 후유증으로 여러 질환을 앓았습니다. 그는 “기관지염, 급성부비강염, 말라리아 재발, 이질, 황달에다 일종의 ‘사회적 해악’인 신경 긴장 발작 치료까지 받았다”고 썼습니다.
히긴스 기자의 1951년 퓰리처상 수상 공적 내역 일부. 그녀는 최초의 여성 퓰리처상 수상자이다./pulitzer.org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1951년 발간한 자신의 첫 번째 저서이자 6·25 전쟁에 관한 세계 최초의 영문 서적/Amazon
◇16번 소련 경찰에 체포...“저널리즘을 사랑”
히긴스 기자는 이후에도 어려운 해외 취재를 주로 했습니다. 후루시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네루 인도 수상, 프랑코 스페인 총통, 시아누크 캄보디아 왕자 등을 독점인터뷰했고, 스탈린 사망 후 미국 기자 가운데 최초로 소련 취재를 했습니다. 여러 달 동안 2만1000km 거리를 돌며 소련 전역을 취재했는데 소련 경찰에 16번 구금됐습니다. 그는 “어학원에서 배운 러시아어 덕분에 통역자가 없었지만 풀려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1951년부터 1965년까지 10차례 베트남을 취재했습니다. 그때마다 1~3개월씩 머물렀는데 1963년 7~8월의 경우 42곳을 찾았습니다. 히긴스 기자는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간섭은 잘못됐고 빨리 중단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마지막 취재 중 풍토병인 리슈마니어증(혈관에 기생하는 편모충인 리슈마니어에 의한 질환)에 감염돼 워싱턴 DC 미국 육군병원에서 치료받다가 1966년 1월 45세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 평생 ‘불꽃 같은 기자’였는데 어떤 마음으로 살았나?
“저널리즘이란 직업을 완전하게 사랑했고 그 무엇보다 저널리즘을 가장 중시했다. 주 5일 근무나 매일 밤 같은 시간에 저녁 먹으러 집에 가는 건 꿈도 꾸지 않았다. 특히 1944년부터 1952년까지 나에겐 저널리즘이 전부였다. 재미, 사교(社交) 생활에는 시간을 전혀 쓰지 않았다. 기사에 도움 안 되면 파티도 거절했다. 내 일을 잘 해 내겠다는 강력한 욕망과 열의 뿐이었다.”
1963년부터 뉴스데이(Newsday)로 옮겨 매주 3건의 칼럼을 쓴 그녀의 말입니다.
“칼럼을 잘 쓰기 위해 나는 하루 9~12시간 전화기를 붙들고 취재하기도 했다. 나는 사무실에 편하게 앉아 의견을 늘어놓는 것 보다는 현장 취재와 그에 대한 깊은 사고(思考)와 해석을 조합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가 1955년에 쓴 자서전. 그녀는 "35세의 젊은 나이지만 누구보다 쓸 내용이 많아 자서전을 쓰기로 했다"고 밝혔다./Amazon
◇“30년 정도 앞서...남자들보다 더 큰 용기”
일각에서는 그녀가 지독히 남성 중심적이던 당시 언론계에서 출세하려고 젊음과 미모, 성적(性的) 매력을 활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그의 행실을 비유한 소설이 1950년대 초 출간돼 기자 사회에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6·25 당시 종군기자 동료였던 키이스 비치(Keyes Beech) 전(前) 시카고 데일리 뉴스 특파원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녀는 포화(砲火) 속에서도 유용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전선(戰線)을 오가며 운전할 때, 내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엑셀을 세게 밟고 지프가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분투하는 동안, 조수석에 탄 히긴스는 적군의 총알 수를 세고 있었다. 결코 공황 상태에 빠지지 않았던 그녀는 30년 정도 시대를 앞서 있었다.”
미국 정부가 발행한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 기념우표
미국 ‘라이프(LIFE)’지 소속 사진기자였던 칼 마이단스(Mydans)는 “히긴스 기자는 가장 신성(神聖)한 영역인 전쟁 취재 분야에 침범해 들어와서 자신이 남성들과 동일하게 능력있으며 때로는 더 용기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그 사실은 당시에 우아하게 수용되기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가 6·25 전쟁이 남긴 교훈을 물었더니, 히긴스 기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6·25 당시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많은 무덤들은 적(敵)을 과소평가한 끔찍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승만 대통령이 나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자 속임수’일 뿐이다. 끝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을 격퇴함으로써 세계인들을 잠에서 깨우는 자명종(自鳴鐘)의 역할을 했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알링톤국립묘지에 있는 히긴스 기자의 묘비(왼쪽). 그녀의 무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묘에서 50m쯤 떨어져 있다. 남편 윌리엄 홀 공군 중장은 18년 후인 1984년 사망해 그녀 곁에 묻혔다. 같은 묘비의 앞뒷면에 두 사람의 연대기 등이 적혀 있다.
미국 워싱턴DC 인근 알링톤국립묘지에 있는 히긴스 기자의 묘비(왼쪽). 그녀의 무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묘에서 50m쯤 떨어져 있다. 남편 윌리엄 홀 공군 중장은 18년 후인 1984년 사망해 그녀 곁에 묻혔다. 같은 묘비의 앞뒷면에 두 사람의 연대기 등이 적혀 있다.
마가리트 히긴스 기자의 1951년 저서를 2023년 재출간한 책. 번역과 주석은 이현표 전 주미국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이 맡았다./코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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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박이
2023.06.06 08:01:06
6.25 그날의 생생한 현장이 용감한 마가리트 기자같은 분이 있어 잘 보존되고 후세에 교육자료로 잘 활용되고 있구나. 마가리트 히긴스 감사합니다. 한국인들의 가슴에 당신의 희생이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답글작성
241
1
역적토벌대
2023.06.06 07:48:29
귀신잡는 해병. 듣기만 해도 심장이 뛴다. 자유대한을 위협하는 찢을 비롯한 마귀집단을 척살할 째 까지 노해병의 조국애는 멈추지 않습니다. 항상 충실한 해병이 되자.
답글작성
239
2
블랙재규어
2023.06.06 08:14:29
저널리스트의 삶을 제대로 산 멋진 그녀에게 한국인으로 감사드립니다.
답글작성
232
1
TigerWoops
2023.06.06 08:56:18
저렇게 참혹한 전쟁에서 구한 대한민국에 어떻게 좌파정권이 들어설수 있는가. 먹고 살만해지니 좌파 사상이 궁금하고 좌파 지지해도 먹고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정신 차려라. 좌파 정권이 망친 5년을 똑바로 보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사라진다.
답글작성
64
0
cwcwleelee
2023.06.06 08:57:48
우리나라도 히긴스기자 마냥 자기임무에 충실하고 정확한 사실만 알리는 기자가 너무없는게 안타가워요 히긴스기자 고맙네요
답글작성
59
0
동방역정
2023.06.06 08:09:00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답글작성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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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2023.06.06 09:02:45
이나라는 저런 외국 기자들까지 피와땀 을 흘리며 지켜낸 나라다! 그런데 지금은 대통령까지 나서서 북에다 나라를 바치려하는 나라가 되었고 거의 절반의 국민 아니 개돼지들이 이에 동조하고있다!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는가~@@@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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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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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
2023.06.06 09:04:09
참으로 한없이 부끄럽고 죄송하고 통탄할 상황의 연속이다!
mylup
2023.06.06 09:02:23
마거리트 하긴스 기자님께서 "한국은 세계를깨운 자명종"이란 덕담중최고의언사가 우리나라발전상과 가장 잘어울리는표현에 경의를표하며 우리들의 영원한친구입니다.
답글작성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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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카드
2023.06.06 08:38:40
감사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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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한도
2023.06.06 09:08:49
대한민국의 역사는 빨굉이와 싸워 이긴 역사다. 총알과 폭탄이 터지는 625전쟁을 피와 죽음으로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빨굉이들로부터 지켜냈다. 지금은 625때 보다 더 많은 민주빨굉이들이 대한민국을 전복시켜 공산화하려고 암세포처럼 대한민국의 도처에 또아리를 틀고 진지전을 펴고 있다. 아무리 민주를 팔아도 그 배후에는 공산당의 검은 마각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자유가 없는 민주는 전체주의로 가는 개나발일 뿐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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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정정의
2023.06.06 09:03:40
대한민국 국군은 세계 최강이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우크라이나 처럼 자유 우방 국가들이 무기 지원하고 돕는다면 중국, 라시아와 맞짱떠도 이긴다. 대한민국 국군 화이팅!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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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K머린
2023.06.06 09:14:42
Once marine forever marine. 귀신잡는 해병과 히긴스가 없었다면, 한국인들은 계속된 가난과 비운으로 중세거지 보다 못한 인생을 살고 있을 것이다. 미국인과 해병들에게 불손하게 굴면 천벌 받을 것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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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과자유
2023.06.06 08:07:27
군함에 타는 건 '승함'이다. '승선'은 상선이나 어선에 오르는 걸 말한다. 기자는 구분해서 바로 쓰기 바란다...ㅠ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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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앙구
2023.06.06 09:56:10
인민군 서울로 쳐들어 올때 이미 죽창에 무기들고 셀프 적화한 거시기 동네... 반면 어린 학생들 까지 북한군에 끝까지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낸 갱상도... 전후에도 지리산에 숨어들어 끝까지 군경에게 대항했던 오오미들... 지금도 보건데 저들은 공산주의자가 대부분 인거같음.. 이러니 경상도에 대한 자격지심이 극에 달해 거짓으로 통수를 치고있지.. 웃긴건 지들 욕하면 전부 갱상도 인줄 아는 ㅉㅉㅉ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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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바다
2023.06.06 09:30:20
감동이다 귀신잡는 해병 그리고 하긴스 깆자의 기록과 활동...참으로 멋진 위대함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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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7980
2023.06.06 09:29:46
나를 비롯, 안일하고 내 몸만 생각하는 많은 보통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삶을 사셨군요. 존경스럽습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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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kmek
2023.06.06 09:12:58
이럴진대 대한민국에 인민군이쳐들어올때 ㅇㅇ지역은 삽시간에 땅을 내주었다 반면경상도지역은 학도의용군등등 동원하여 주민들이 50%이상전쟁에참여하여 나라를지켰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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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화
2023.06.06 09:45:14
마가리트 히긴스! 당신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이십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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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eka
2023.06.06 09:35:23
한국의 못다핀 청춘들과 세계의 젊은이들이 허겁지겁 땅을 파서 만든 무덤 속에 묻히면서 지킨 우리 이땅 대한민국이 세월이 지나면서 어느덧 좌파공산주의자들이 스믈스믈 기어어들어와 발 밑에서 부터 시작해 우리의 온 몸을 먹어삼키려고 올라오고 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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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세상
2023.06.06 10:02:10
미국은 4만 3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고 천문학 적인 군비로 우리나라를 지켜준 혈맹.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에 식량 원조를 아끼지 나라다. 50년대 생들은 안다. 학교에서는 미국이 원조로 준 분유와 밀가루로 만든 우유죽. 밀가루 빵으로 끼니를 떼우고, 가난한 자들은 울력에 동원되어 임금으로 받은 밀가루로 만든 수제비.팥 칼국수로 끼니를 떼운 것을 , 주체사상에 빠져 반미를 외친 운동권들이 민주화 투사로 왜곡되어 국회의원이 되어 한국정치를 좌지우지(우상호. 임종석. 미 문화원 방화범 정청래 등) 하는 나라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미국은 지금도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혈맹이지 배척할 나라가 아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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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N
2023.06.06 10:17:16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속임수일 뿐이다 김대중나 쩝쩝이는 그 말 뜻을 몰랐을까 아니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은게지 둘다 근본은 공산주의자들이니까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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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석
2023.06.06 10:09:42
귀신 잡는 해병 이란 특출한 표현 쓴 .마가리트 기자 한국해병 못지 않게 용감한 투사였다 목숨을건 그녀의 취재덕에 한국전쟁의 참상이 삿삿이 전해진것은 역사적 치적이다 여자의 몸으로 목숨을 내던진 전쟁 취재활동 높이 평가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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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2023.06.06 09:52:24
귀신 잡는 한국 해병대의 자부심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되었지.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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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암선사
2023.06.06 10:01:20
"공산주의자에게 타협이란 시간을 벌기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는 영원 불변한 진리를 진즉부터 터득하신 이승만대통령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나라의 국부이시다. 지금 우리가 이 혼란한 시기에 명심해야할 금과옥조와 같은 어록이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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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산인
2023.06.06 10:36:34
한국의 전쟁을 증언하고 세계에 널리 알린 한 여인 종군기자는 조선일보의 언론사다운 기사로 우리들 앞에 부활했다. 아, 대한민국. 이렇게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은 탄생해서 지금의 질곡속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의 질곡은 종북좌파들이 정권을 사기쳐서 잡아 국가기틀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어놓았다. 이승만의 말을 전한 이 최초의 여성종군기자의 말대로 "종북좌파들과의 타협은 시간을 벌기위한 수단이자 사기 일 뿐이다." 우리는 이 좌파들과의 협치란 말장난에 놀아나서는 안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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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
2023.06.06 10:00:05
한국에는 왜 저런 기자들이 없을까? 5.18의 진실에 대해선 눈감고 조갑제같은 얼치기는 자기가 본 며칠간의 일로 북한국 개입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한반도 적화가 평생 과제였던 김일성이 그 소중한 기회를 날려버릴 바보였겠는가? 지난 탄핵광풍의 실체도 말하는 기자가 없고 헌재에서 대통령을 파면한다고 결정한 그 이면의 얘기를 취재하는 기자가 없다. 이걸 보면 히긴스가 얼마나 뛰어난 기자였는지 증명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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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ya301
2023.06.06 09:55:58
잘생기셨네요....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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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2023.06.06 10:22:49
이런 정직한 우파 도서-책들을 전국 학교와 도서관에 배포해야 한다. 좌파들은 김제동-문재인-조국 책들을 전국에 세금으로 뿌리는 좌파를 막아야 한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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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2023.06.06 10:21:00
동아일보, 중앙일보는 좌파 선동꾼을 인터뷰하며 그들 이데올로기를 암암리에 퍼트리는데 기자들이 일을 하더라. 조선일보는 제발 그러지 마라 김용익-김윤 같은 문제인 케어 하던 좌파선동꾼들 인터뷰 싫으면서 의료가 어쩌구 떠들던 기사 보고 어이가 없어서.... 동아-중앙은 우파신문이 아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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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2023.06.06 10:20:22
난 국가가 부르면 언제던지 사선으로 달려갈 것이다. 해병은 영원하다. 필 - 승!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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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을잡자
2023.06.06 10:59:11
문재인이 책방에서 이책을 추천도서로 선정해 봐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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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마
2023.06.06 10:51:25
투철한 직업관 사명감을 가진 전문인 또한 이 분을 인정한 사회 이런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사이비들 야바위들 엉터리들이 날뛰는 작금의 언론 방송 기자들이 휘젓는 현실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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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달이
2023.06.06 10:29:19
용기있는 여성으로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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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같이
2023.06.06 11:01:22
민주화라는 개3김가들 적은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적은 살인마 개일성.. 적의 적은 동지라 그럼 개4김, 민주화라는 아가 달성하고 철조망부터 제거했다가 다시 설치했지! 그런놈들이 민주화시대래! 야 언어 유린 사기꾼아 민주화는 시작한 건국서부터 민주화 국가였어! 단 장기집권 차이지! 인민개돼지들은 죽어도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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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to
2023.06.06 10:34:29
6.25남침 현충일 종군기자님의 기사 올려주셔서 조선일보 감사드립니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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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안이
2023.06.06 09:01:12
글쎄 현충일 이라서 이런 기사 날린 줄. 모를 겠지만 난 현충일 을 왜 있는지 모르겠다 난 한번도 현충일을 자랑스럽지 않다 반친일, 친일과공산과 반공주의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족속들을 장례식이 뭘하려 경례를 하는가 물론 우리도 그것을 따라 가려면 경례를 해라 겠지 ㅋㅋㅋㅋㅋ 즉 우리 모두는 친일 자식이니까 말이다 부인을 아무리 해도 말이다 현충사의 경례를 하는 순간말이다 공산당의 배극도 친일이 아니라구 그것도 친일이다 친일은 미국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있고 그것은 친일 사상이고 북한을 받아들이는 것도 친일 사상이다 김일성 주의도 일제의 바탕 위에 세워 졌어니 말이다 ㅋㅋㅋㅋㅋ 그걸 알아라 한다 우린 친일 사상에 벗어 나기 힘들다 나의 사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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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을 입력해주세요.
예안이
2023.06.06 09:22:47
과거에도 이런 글 적어니 똑같은 소리 하더구먼 지금이나 과거나 똑같네,ㅋㅋㅋㅋㅋ 나의 사견이다.
갑부회장
2023.06.06 09:19:19
국가나 이웃을 위해 헌신해볼 생각조차 없는 사람들이 주절거리며 말이 많더라. 주로 빨간색들이 그러지....
소나무62
2023.06.06 09:16:35
뭔 싸이비 사상 인가 산에나 들어가 살어라
가다오다
2023.06.06 10:57:12
종군기자로 전쟁에 참가한 우리나라 언론사 기자중 단 한명도 순직하지 않은것을 생각하면 히긴스는 정말 위대한 기자다.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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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Man
2023.06.06 09:45:22
귀신도 잡을 수 있는 해병들아 넘치는 자부심은 해병의 독 임을 명심하길...449기 올림
답글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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