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남원과 함양을 잇는 길목,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깊은 산중인지라 다랑이 논을 만들어 논농사를 짓게 돼
다랑이논,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다원적 활용 필요
비탈진 층층의 논 개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정성 쏟아
전북 남원시(南原市)는 동쪽으로 경남 함양·하동군, 서쪽으로 전북 임실·순창군, 북쪽으로 전북 장수군, 남쪽으로 전남 구례·곡성군에 접하고 있다.
동부는 백두대간 줄기를 따라 덕두산(德頭山·1150m)·바래봉(1165m)·삼봉산(三峰山·1186m)·명선봉(明善峰·1586m)·반야봉(般若峰·1732m)·노고단(老姑壇·1507m)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는 산지로, 그 아래에는 해발 450~650m에 달하는 운봉고원이 넓게 펼쳐져 있다. 운봉읍·인월면·산내면·아영면에 걸쳐 있는 운봉고원은 정령치·등구재·다리재·꼬부랑재·여원재·팔랑치 등 험한 고개들이 많다. 전북 장수와 경남 함양으로부터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요천(蓼川)은 남원의 중앙부를 지나 서남부의 곡성군 고달면에서 섬진강으로 합류한다. 운봉면 일대에서 발원하는 광천은 동부로 흐르다가 노고단·만복대(萬福臺·1433m) 등지에서 발원하는 달궁계곡과 반야봉에서 발원하는 뱀사골계곡의 계류와 합류해 만수천을 이룬 다음 임천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지리산 천황봉 능선은 북쪽으로 창암산(923m)을 거쳐 삼봉산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중간에 백운산(903m)이 우뚝 솟아 있다. 백운산과 삼봉산이 맞닿은 골짜기에는 예부터 누런 꿩이 많다고 해 ‘황치골’이라 불렸다는 ‘중황리’가 자리하고 있으며, 중황리 가장 끝에 위치한 마을이 ‘상황마을’이다. 황치골 가장 윗자리에 있다고 해서 ‘상황’이다.
해발 450m에 이르는 이 산골짜기마을에는 50여 가구 150여 명이 살고 있는 산골 마을치고는 꽤 큰 마을이다. 본래 마을 주변의 3개 자연마을을 통틀어 ‘황치골’로 불려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 때 이들 상·중·하황을 중황리에 병합하고, 이곳을 ‘상황(上黃)’이라 해 자연마을로 뒀다. 일명 ‘웃황치’라고도 불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파평(波平)윤씨 통정대부 윤천왕(尹天王)이 지리산으로 피난 가던 중 등구치를 넘어가려고 지나다가 영신암(靈神岩)이라는 바위 밑의 굴에서 피난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돼 굴로부터 200여m 떨어져 있는 지금의 마을에 내려와 느티나무숲 아래에 마을 터를 닦아 정착했다고 한다. 자손들이 번창해 윤씨 단일 동성마을이 형성됐는데, 이후 몇몇 타성이 전입해 함께 마을을 이뤄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주민들의 80~90%가 윤씨이고 타성도 일가 친척뻘이라고 한다. 주업은 논농사이지만 주민들이 먹을 정도의 양식거리밖에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 남원 산내 중황·상황마을 다랭이논 유명
옛날 남원과 함양을 잇는 길목이었던 이 마을은 양지바르고 토질이 좋아 먹을 양식을 위해 주로 논농사를 했는데, 워낙 깊은 산중인지라 다랑이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됐다고 한다. 주민들은 근면하고 협동심이 강해 지난 1975년에는 자율적인 경지정리작업(합배미 작업)을 실시해 이른바 삿갓배미(다랭이논)논이 큼직큼직하게 경지 정리를 했다는 설명이다. 특히 높은 산과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 이 지역에서는 계단식 논이 필수적이었다. 산꼭대기까지 층층이 만들어진 계단식 논들이 전해주는 풍광은 최근에 이르러서는 아름다움을 넘어 경이 자체라 할 만하다. 층층이 돌로 쌓은 이들 계단식 논들은 강우량을 중심으로 한 각각의 환경에 따라 물을 가두거나 보존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고안돼 있다고 전한다.
다랑이논은 다랑논, 다랭이논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제일 익숙한 이름은 ‘계단식 논’일 터이다. 다랑이논은 비탈진 경사지를 개간해 계단식으로 조성된 농지를 일컫는다. 다랑이논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에서도 활용돼 온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쌀을 얼마나 많이 생산할 수 있겠나?’라는 관점으로만 본다면, 평지의 논에 비해 기계의 투입도 어렵고 가용면적도 좁아 대규모 농사가 어려운 다랑이논의 쌀 수확량은 낮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다랑이논은 쌀 생산 이외에도 상당한 공익적 가치와 기능을 갖고 있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다랑이논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실정에서 점차 다랑이논의 경작을 포기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규주택이나 창고, 비닐하우스 등을 짓는 등 다랑이논을 다른 용도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다랑이논 주변의 난개발과 그에 따른 원형의 훼손도 심해지는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다랑이논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함과 함께 다원적인 활용계획 등을 수립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이와 관련해 국내 다랑이논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전북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중황·상황마을은 다랭이논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다랑이논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일구려 산비탈을 깎아 돌을 쌓아 올려 계단식으로 만든 논이다. 이곳 중황마을과 상황마을엔 다랑이논이 치맛자락처럼 펼쳐지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남해 다랭이마을보다 경사는 완만하지만 석축의 굵직한 돌덩이와 제각각으로 휘어진 논두렁이 이뤄낸 곡선의 조화가 황홀할 지경이다. 저렇게 많은 무거운 돌들을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선조들의 고초와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다랑이논이다.
■ 다랑이논은 부지런했던 삶, 애환의 대명사
남원 산내면에서 가장 평평한 곳은 실상사가 있는 실상 들(뜰)이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논밭으로 보면 상황·중황의 들이 더 넓다고 한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낸 산속의 거대한 평야다. 상황마을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경남 함양이 나오는데, 호남과 영남을 잇는 고갯길이라고 한다. 예전 신작로가 함양의 마천까지 뚫리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와 상황·중황마을을 거쳐 인월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고개를 넘어 서로 혼사가 오가기도 했다고 전한다. 상황마을의 다랭이논은 벼농사의 공익적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식량주권은 말할 것도 없고 저수지의 역할과 경관적 순기능을 고려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다랑이논들이 유지돼야 할 텐데, 경제성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하우스로 대체된 곳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래서 더 이상 다랑이논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 농민들은 농민수당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 아름다운 다랑이논을 지켜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겠다는 걱정스러움이 곡선으로 자연스런 논두렁길을 걸으면서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다.
남원 산내와 함양 마천,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유일한 옛 고개 등구재는 옛길의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땅과 삶의 길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는 듯한 다랑이논은 우리 선조들의 피와 땀과 눈물이 배인 흔적이 아니던가. 다랑이논은 산골짜기의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자리 잡은 좁다란 논이다. 다랑논, 다랭이논, 논다랑이, 다락배미 등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비탈진 층층의 논을 개간하기 위해 얼마나 공과 시간을 들였으며, 얼마나 많은 정성을 쏟았겠는가. 어떤 다랑이논은 삿갓만큼이나 작아서 ‘삿갓배미’라 부르기도 한다. 다랑이논이 많았던 시절 전해오는 이야기인데, 농부가 논을 갈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아무리 세어 봐도 논이 하나 부족했다고 한다. 결국은 포기하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더란다. 그렇게 작은 땅에도 농사를 지을 만큼 옛사람들의 삶은 부지런했지만 궁핍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랑이논은 애환의 대명사이다.
면적이 좁고 반듯하지 못하니 잦은 손길이 필요하며, 경작 면적이 좁으니 수확도 많지 않다. 상황마을에 부농이 있을 수 없는 구조다. 지금은 다랑이논에 자꾸만 비닐하우스가 덮여 있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비닐하우스에는 주로 상추를 재배한다고 한다. 수입 면에서 벼농사보다 3배 이상은 많다는 설명이다. 상황마을 할머니들은 처녀 시절 등구재를 넘어 이곳으로 시집올 때 양지바른 지역에 부농이 많다고 해서 왔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층층이 논에 웬 손이 그렇게 많이 가는지 해도해도 일이 끝나지 않는다는 푸념이다. 평생 일만 시키는 그런 애환이 서린 논이 바로 다랑이논이다.
[출처] 400년 전 일군 산골마을, 남원 상황마을의 다랑이논|작성자 안동처사 택전 윤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