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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게도 (…) 나는 아스팔트의 ‘틀딱’이 되었다. (…) 나는 2016년 말 (…) 언론이 노조에 장악된 채로 읊어대는 요설에 속아, 무지한 놈이 되어 그녀에게 욕을 퍼부어댔던 죗값으로 나오기 시작했었다. (…) 이름도 모르지만 그냥 서로 지켜보기만 해도 금세 눈시울이 붉어진다.”
2019년 6월 6일 현충일, 어느 사이트에 게재됐던 ‘광화문 비망록’이라는 글의 대목이다. 그는 “왜 (…) 우물 파듯이 바보짓을 계속하냐고…” 탄식을 하면서도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나무는 서서 죽는다. 슬프게도 쓰잘 데 없는 나이만 먹었으나 그래도 쉽게 죽지 않는 나무가 되어 (…)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선다면 아아 이슬같이…’ (…) 우리 늙은 것들만이라도… (…) 당장에 이뤄낼 것이 없더라도….”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그저 그의 토로대로 광화문 집회에 나서 태극기를 흔든 ‘틀딱 노인’이려니 짐작할 따름이다. 60대는 노인으로 잘 여기지 않는 시대, 70~80대쯤은 돼야 “틀니 딱딱대는 노인”이라 자탄(自歎)할 수도 있으리라.
한국의 위대한 세대
▲ 2017년 탄핵 사태 이후 광화문 태극기 집회의 주력은 대한민국을 일군 7080대였다. / 조선DB
70~80대, 그런데 이 세대는 자탄이라면 몰라도 ‘철없는 부류’가 그렇게 함부로 지칭해도 될 만한 세대가 아니다. 경로(敬老) 차원에서가 아니다. 우리 현대사의 역사적 차원에서 그러하다.
지금의 70~80대는 대한민국 탄생 전후의 격동기에 태어난 세대다. 80대라면 일제(日帝) 시대 후반에서 말기에, 그리고 70대 중반은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났다. 가장 젊은(?) 70세면 1951년생, 바로 6·25전쟁 때 태어났다. 격랑의 시기였다. 해방은 됐으나 새 나라는 바로 주어지지 않았다. 만 3년, 격렬한 진통 끝에 대한민국이 섰다. 남쪽 절반이지만 귀한 성취였다. 이제 어떻든 새 나라의 새 시대가 이어져야 할 터였다. 그런데 아직 아니었다. 곧바로 6·25라는 3년의 피어린 전란(戰亂)의 시기가 닥쳐왔다.
처참했다. 나라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인명피해가 500만명이 넘었다. 어른도 그랬지만 아이들도 수없이 죽고 다쳤다. 이산가족도 1000만명이 넘었다. 수많은 가족이 생사(生死)를 모른 채 헤어지고 흩어져야 했다. 어른도 그랬지만 아이들도 그랬다. 아버지든 어머니든 한 분의 손이라도 놓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살아남기는 했으나 부모를 모두 잃은 아이들이 헐벗은 채 거리를 헤맸다. 갓 태어난 아기들이 누이의 등에만 업혀 있어야 했다. 그래도 살아남아 자라난 그때의 어린 세대들, 그들이 바로 지금의 70~80대다.
6·25의 희생자는 우리만이 아니었다. 유엔군 피해자도 15만명이 넘고, 미군 전사자도 4만명에 육박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폐허로 남은 전장(戰場)의 기억을 안고 귀국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 6·25가 끝난 뒤 35년 만에 서울을 찾은 한국전 참전(參戰)용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폐허 위에 기적이 서 있었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했다. 그 기적의 한복판에 있던 세대가 지금의 70~80대다. 1960~70년대 ‘위대한 개발시대’, 위대한 정치지도자와 경제리더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의 한복판을 담당한 젊은 일꾼들을 빼고 성취를 말할 수는 없다. 70~80대는 그 위대한 시대의 젊은 주역이던 ‘위대한 세대’다.
신세대, ‘586, 대깨문들’과는 다르다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섰다. ‘철없는 무리’들은 우습게 알았지만 그 속에는 굴지의 기업을 이끌거나 온갖 분야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온 이들이 즐비했다. 이들이 눈비를 마다하지 않고 수년간 거리에 나섰다. “당장에 이뤄낼 것이 없더라도…”라며.
당장은 아니었지만 그 분투(奮鬪)는 헛되지 않았다. 탄핵 정변(政變) 이후 어느덧 만 5년 가까이, 문재인(文在寅) 정권 만 4년, ‘언제까지 이러나’ 했던 바람이 마침내 바뀌었다. 20~30대 젊은 신세대들의 태세가 결정적이다. 이들은 지금 비교할 전례(前例)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이 정권의 반대편으로 집결하고 있다.
촛불 정변과 문재인 정권의 탄생을 뒷받침한 주력은 ‘586세대’ 운동권 세력과 ‘대깨문’의 중심인 ‘40대 세대’였다. 이들은 대체로 70~80대의 자녀 세대였다.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풍요가 어떻게 주어진 것인지 잊었다. 이들은 ‘민주화’는 신성시하면서도 ‘산업화’의 성취는 우습게 알았다. 그러면서 ‘민주팔이’ ‘정의팔이’에 몰두했다.
70~80대는 이런 자식 세대를 이기지도 설득하지도 못한 안타까움을 토로하곤 했다. 그러나 20~30대는 다르다. 이들은 개별적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70~80대의 손자 세대이며, 586으로 대표되는 ‘민주팔이’ 세대의 자녀 세대다. 이 신세대도 한때는 ‘민주팔이’에 휘둘렸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그 주술(呪術)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위대한 세대’와 ‘68세대’
그런데 이 같은 상황은 과거 미국에서 진행됐던 정치현상과 유사한 점이 있다. 바로 ‘레이건 혁명’으로 불리는 보수(保守)혁명이다. 물론 그것은 이제는 지나간 역사가 돼버렸고, 미국은 또다시 새로운 시험대에 들어서 있다. 하지만 ‘혁명’으로까지 불리기도 했던 미국 현대사의 과정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시험과 관련해 놓칠 수 없는 일깨움을 준다.
미국 현대사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톰 브로커(Tom Brokaw)의 베스트셀러 《The Greatest Generation》에서 유래된 용어로, 1900~1924년에 태어난 미국인들을 일컫는다. 이 세대는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성장해서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을 겪고, 이후 미국의 전후(戰後) 부흥을 이끌어냈다.
이들이 어린 시절과 청·장년기를 보낸 시기는,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하게 고난이 연속으로 덮치고 이어진 시대였다. 풍요를 편히 누릴 틈이 없었다. 생사의 시련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 세대는 그 고난을 넘어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대부흥을 일구고 자유세계의 선두로 미국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세대’라 했다.
그런데 이들 위대한 세대의 자녀 세대는 달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6년부터 태어난 ‘베이비붐 세대’는 미국이 전후(戰後) 부흥을 이룬 뒤인 1960년대에 성인기를 맞았다. 풍요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1960년대는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서구세계와 미국이 모두 격렬한 진통으로 돌입한 시기이기도 했다.
유럽에선 1968년 프랑스 68혁명으로 대표되는 신좌익운동이 기승을 부렸다. 68운동의 구호는 야릇했다. “배고픈 건 참아도 지루한 건 못 참는다” 했다. “방해 없이 즐기자”고도 했다. 빈곤으로 인해 발생한 투쟁이 아니었다. 풍요가 없었다면 나올 수도 없는 구호였다.
▲ 미국 보수혁명을 이룬 두 주역 윌리엄 버클리(왼쪽)와 로널드 레이건. / 퍼블릭 도메인
리버럴의 시대
미국도 진통(陣痛)에 휩싸였다. 흑인인권운동이 격화되는 가운데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거세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 ‘히피’라는 반(反)문화 운동이 당시의 청년 세대들에게 광범하게 퍼져갔다. 베트남전으로 인한 당시 미국 청년 세대의 희생은 분명 반발할 만한 고통이었다. 하지만 ‘히피’라는 반문화 흐름은 희생에 대한 반발과는 다른 문제였다. 유럽의 68소동과 비슷했다. 역시 풍요의 부산물이었다.
히피는 대부분 백인이었다. 이들은 와스프(WASP)라는 미국의 주류 집단인 앵글로색슨계 백인 신교도 가정의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위대한 세대’의 자녀 세대였다. 이들 세대는 부모 세대가 이룩한 전후 부흥의 결과,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안락한 삶을 살아가던 세대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모 세대의 전통적 가치에 맞서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성적(性的) 억압’과 ‘관습적 도덕’을 타파한다고 했다. 그러나 향락주의와 방종이 횡행했다.
미국의 1960~1970년대 정치는 그런 사회적 배경을 깔고 진행돼갔다. 1960년대 출발은 민주당의 존 F. 케네디였다. 그는 1961년 제3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지만 1963년 암살됨으로써 임기는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신화(神話)의 자리에 올랐다.
1964년 케네디 사망 뒤 치러진 대선(大選)에서 공화당 후보로 배리 골드워터가 출마했다. 결과는 골드워터의 기록적인 참패(慘敗)로 끝났다. 민주당의 존슨이 제36대 대통령이 됐다. 공화당의 닉슨은 제37대 대통령(재임 1969~1974년)에 당선됐으나 워터게이트 사건을 이유로 한 탄핵 압박으로 사임해야 했다. 표면적으로는 ‘주거니 받거니’였지만 리버럴 우위의 시대였다.
1970년대, 대학가 지식인층과 언론 등은 리버럴로 기울어 있었다. 탄핵 결의와 닉슨 사임의 바탕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1976년 민주당의 카터가 닉슨을 승계했던 포드를 꺾고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리버럴’이 주류로 확고히 굳어지는 듯했다.
이제 미국의 ‘위대한 세대’에게서 그 자녀 세대가 멀어져가는 가운데 미국 자체가 멀어져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변화도 진행되고 있었다. 1964년 골드워터의 패배는 표면적으로는 참패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보수의 재출발이기도 했다. 당시 대선에서 골드워터를 도운 청년 대중운동 조직이 있었다. ‘자유를 위한 젊은 미국인’(Young Americans for Freedom·YAF)이라는 조직이었다.
‘젊은 보수’의 성장
1960년 9월 11일, 코네티컷주(州) 샤론에 있는 윌리엄 버클리의 자택에 미국 전역 24개 주 44개 대학에서 90명의 젊은 대학생이 모였다. 이들은 나중에 ‘샤론 선언’으로 불린 보수주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청년 조직을 결성했다. 이것이 YAF였다.
버클리는 대학을 갓 졸업한 1950년 25세 때 예일대의 무신론(無神論)과 좌편향(左偏向)을 고발한 《예일에서의 신(神)과 인간》을 펴낸 인물이었다. 1955년 30세 때는 보수주의 평론지 《내셔널 리뷰》를 창간했다. 그러고나서 5년 뒤인 1960년 보수주의 청년 조직을 탄생시킨 것이다.
1960년대 당시 공화당도 이른바 ‘리버럴 컨센서스(Liberal Consensus)’로 기울고 있었다. 마치 한국에서 끝없이 되뇌어지는 ‘중도(中道)’ 운운과 유사했다. 그런데 YAF가 골드워터와 결합하면서 공화당이 ‘보수주의’에서 이탈하는 걸 막았다. 당장은 졌지만 미래를 잉태하는 성과였다. 이념적 원칙과 그것을 굳건히 하는 세력의 형성은 훗날 보수혁명이라 불린 레이건 대통령의 탄생에 큰 기여를 하게 됐다. 레이건이 정치인으로서 실질적 첫발을 디딘 것도 이때였다.
1960~70년대는 미국 공화당에는 험난한 시기였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이념적 원칙, 운동세력의 결집, 그리고 장차를 짊어질 정치인의 등장 3가지가 마련되고 다져져 갔다. 세대적 변화도 있었다. YAF를 필두로 한 보수주의의 청년 운동이 지속되면서 계속 등장하는 신세대 청년층에서도 보수적 흐름이 강력하게 이어져갔다.
한편 전통적인 민주당 층에서도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는 그냥 ‘자유’가 아니라 ‘좌파적 의미에서의 진보’라는 함의(含意)를 갖게 된 ‘리버럴’에 대한 반감의 흐름이 형성돼갔다. 그리고 이 모든 흐름은 한 지점을 향해가고 있었다. 1980년 ‘레이건 혁명’이었다.
‘위대한 세대’의 대통령 레이건
▲ 로널드 레이건은 1964년 공화당 대선 후보 배리 골드워터(왼쪽)의 찬조연사로 나서면서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퍼블릭 도메인
6월 5일은 로널드 레이건 서거(逝去) 17주기다. 레이건은 1980년 11월 4일 현직 대통령이던 경쟁 상대 카터에 압도적으로 승리, 이듬해 1981년 1월 20일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911년생, 이미 70세였다. 그 자신이 바로 미국의 ‘위대한 세대’의 한 사람이었다.
위대한 세대 출신의 이 노(老)정치인은 재선까지 하며 8년 임기를 수행하는 동안 또 한 번 그 세대의 칭호에 어울리는 위대한 역사적 과업을 수행했다. 미국의 힘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 전체를 붕괴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는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자유시장경제 노선 상징의 하나로 영구적인 이름을 남겼다. 소련을 ‘악(惡)의 제국’이라 질타하며 몰아붙인 강철 같은 반공(反共) 보수주의자였다. 그런 만큼 좌파세력들에겐 오늘날에도 악명이 높다. 그런데 레이건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레이건은 유레카대학이라는 일리노이주의 자그마한 대학, 속된 표현으로 ‘지잡대’를 나와 어느 지방방송국 아나운서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다 1937년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육군 항공대 정보부 장교로 근무했다. 전쟁 뒤 영화계로 복귀할 무렵만 해도 그의 정치의식은 평범했다. 부친은 민주당 지지자였으며, 그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An American Life》(1990)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는 철저한 뉴딜의 신봉자가 되었다. (…) 나는 대기업들을 믿지 않았으며 민간기업들이 아니라 정부가 전기 등의 공익사업들을 소유해야 하고 정부가 국민에게 집을 지어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형은 정부의 비대화(肥大化)에 반대하면서 전쟁 때 우리의 동맹국이었던 소련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공화당의 선전을 그대로 늘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론했다.”
민주당의 변질, 레이건의 변화
▲ ‘反共의 女戰士’ 진 커크패트릭. / 퍼블릭 도메인
이대로였으면 훗날의 레이건은 없었다. 이런 그를 바꾸어버린 건 바로 그의 삶의 터전이던 영화계였다. 할리우드 전역에서 좌익분자들이 발호(跋扈)하고 있었다. 1946년 레이건은 영화배우조합(SAG·Screen Actors Guild)의 조합원으로도 활동하고 있었다. 파업(罷業) 움직임이 있었다. 좌익의 주도였다. 레이건은 이 파업이 노동조건 개선과 같은 일반적인 쟁의(爭議)가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진 것임을 간파하고 배우조합에 보고서 제출을 준비했다. 협박전화가 왔다. 그의 얼굴에 염산을 뿌려버리겠다는 것이었다.
유혈 대결이 벌어지고 파업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집과 자동차에 방화도 이어졌다. SAG 조합원들의 출퇴근 버스가 전소(全燒)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치열한 공방전은 이듬해인 1947년 2월이 되면서 끝났다. 파업세력을 꺾은 것이다. 1947년 3월 레이건은 SAG 회장으로 선출되고 그 뒤 7차례 연임(連任)했다. 이 경험은 레이건의 이후 정치노선을 결정짓는 출발이 됐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여전히 민주당원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민주당과 점점 멀어져갔다. 결국 레이건은 1960년 닉슨이 케네디에 맞서 대통령에 출마할 때 그를 지지했다.
“리버럴 민주당원들이 복지국가를 만든다면서 미묘한 형식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도입하는가를 알게 될수록 나의 견해도 그만큼 변해갔다. (…) 나도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변한 것만큼 변한 것은 아니었다.”
레이건의 회고다. 문제는 민주당의 변질이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원 레이건’의 이 같은 변화는 이후 미국 사회에서 진행될 정치 지형의 변화를 알리는 하나의 예감이었다. 레이건 집권 후 1981년 미국 최초의 여성 유엔대사로 임명된 ‘반공의 여전사(女戰士)’ 진 커크패트릭(Jean Kirkpatrick)도 그런 경우다. 그녀는 젊었을 때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이후로는 오랫동안 민주당원이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오콘으로 분류되었을 때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어떤 종류의 보수주의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친구이자 당시 신(新)보수주의 운동의 대부로 알려져 있던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에게 물어보았다. 그는 ‘네오콘이란 현실에 좌절한 리버럴’이라고 답했다.”
‘레이건 민주당원’
민주당에 대한 실망의 출발이었다.
지식층뿐 아니라 훗날 ‘레이건 민주당원’이라 불린 대중적 민주당원층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블루칼라 노동자, 적지 않은 노조들, 가톨릭 신자 등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층이었던 대중이 1980년, 1984년 연거푸 레이건을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레이건에 대한 호감도 있었지만 기존의 민주당에 대한 실망이 결정적이었다.
레이건은 1964년 대선에서도 공화당 골드워터 후보 지지에 나섰다. 보수주의 정치인 레이건의 본격적 시작이었다. 골드워터는 졌지만 찬조연사로 나선 레이건은 〈선택을 위한 시간(A Time For Choosing)〉이라는 미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종종 인용되는 안보 문제와 관련한 기념비적 연설은 바로 그 찬조연설의 한 대목이었다.
1965년 레이건은 공화당 후보로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했다. 압승이었다. 바로 이때 레이건을 따라 40만명의 민주당원이 탈당(脫黨)을 했다. ‘레이건 민주당원’의 시작이었다. 1968년 레이건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예비선거에 나서 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들러리 요청의 측면이 강했다. 당선은 물론 닉슨이었다. 그런데 레이건은 이를 시작으로 1976년, 1980년 연거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도전하게 됐다.
광범위한 세력을 결집시키다
한편 레이건이 이런 과정을 밟아가는 동안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요 흐름이 결집돼가고 있었다. 뉴딜에 반대했던 리버테리안, 루스벨트에서부터 시작된 친소(親蘇) 경향에 위기감을 느낀 반공주의자들, 서구 전통가치의 훼손에 분노한 전통주의자들, 그리고 네오콘도 모여들고 있었다. 레이건은 그 정치적 정점(頂點)이 됐다.
레이건은 그럴 만한 자질이 있었다. ‘배우’에 대한 속된 오해와 달리 그는 자신의 연설원고를 직접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강력한 힘은 그의 노선이었다. 그의 대외(對外)정책은 고립주의적인 공화당의 전통적 노선과는 달리 민주당 윌슨주의의 적극적 개입주의 전통에 닿아 있었다. 그러면서 경제·사회·문화 정책은 미국 전통의 자유주의와 보수적 가치에 충실했다. 그의 노선은 중도가 아니라 안팎 모두에서 강경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레이건은 각양의 보수세력에서부터 애국적 민주당원까지 광범한 세력을 결집할 수 있었다.
1977년 민주당의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런데 카터는 ‘재앙’이었다. 카터는 도덕외교·인권외교를 내세웠다. 그런데 그 도덕과 인권의 화살은 지독한 인권유린 체제였던 소련과 그 위성국들은 놔두고 엉뚱하게 미국의 우방국(友邦國)으로 향했다.
카터는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을 무던히도 괴롭혔다. 북한의 인권유린은 놔두고 미군철수를 운운하며 한국을 위협했다.
카터의 이 어처구니없는 행태는 이란에서 대가(代價)를 치렀다.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혁명 세력은 11월 테헤란 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다. 카터는 1980년 4월 인질 구출작전을 명령하지만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이로써 1980년 미국 대선은 사실상 결정 났다.
레이건이 대통령이 되자 미국은 모든 면에서 힘을 회복해갔다. 레이건은 30여 년 전 할리우드 시절 좌익과 맞설 때부터 품어왔던 생각을 드디어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소련과 그 진영은 허물어져갔다. 레이건이 두 번째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10개월 뒤인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1991년 소련도 붕괴했다. 국내적으로는 카터라는 재앙이 끝난 데 이어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세계사적 재앙도 막을 내렸다. 영국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것으로 “20세기는 끝났다”고 했다.
‘위대한 세대’와 ‘新세대’가 함께하고 있다
한국도 지금 안팎으로 ‘재앙’에 시달리고 있다. 이 정권의 난맥과 파탄은 새삼 언급이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럼에도 그간 한동안은 “과연 언제까지”라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변화가 일어났다. 여론조사 수치(數値)상의 차원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신세대가 완전히 돌아섰다. 이들이 새삼 정치이념과 역사를 공부한 덕분은 아니다. 가르침을 준 것은 경험이다. 이 정권 세력들의 엽기적 행각과 국정파탄이 초래한 고통이 각성을 가져왔다.
이런 변화는 미국에서 레이건 혁명에 이르던 변화의 과정에 비견해볼 수 있다. 물론 나라가 다르고 시대와 조건이 다른 만큼 동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패턴의 유사함은 있다. 위대한 세대의 성취를 잊은 세대의 방만함, 그런 가운데 진행된 방자함의 폭주(暴走)가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새로운 저항의 힘이 형성된다. 미국이 그러했고, 우리도 다르지 않다.
586세대는 한국의 ‘위대한 세대’가 이룩한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첫 세대다. 그럼에도 그 세대의 운동권 패거리들은 그 혜택은 안중에도 없이 ‘민주팔이’에만 심취했다. 그 바로 아래 40대들도 현 정권에 여전히 적잖은 지지율을 보인다. 그러나 20~30대는 다르다. 이들의 지지율 분포 양상은 70~80대와 거의 동등하다. 직접 함께 행동하지는 않지만 ‘위대한 세대’와 ‘신세대’가 함께 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회복’을 위한 강력한 동반이다.
물론 낙관할 수만은 없게 하는 요인들은 여전하다. 국민의힘의 문제는 새삼 논할 필요도 없다. 레이건도 없고, 이념적 결집도 약하다. 그러나 언제고 문제가 없었던 적은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넋두리보다는 의지다. 고난을 거치며 단련된 힘이 있다. 건강한 흐름이 형성돼 있다. 이것을 소중히 하는 게 먼저다. 그러면 결집도 이루어진다. 인물도 나온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역할은 하게 된다. ‘재앙’의 시대를 반드시 끝내야 한다는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기 때문이다.⊙
이강호 / 한국국가전략포럼 연구위원
월간조선 2021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