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5. 31
골드만삭스 회장을 역임한 로버트 루빈은 클린턴 행정부에서 재무장관 재임(1995~1999) 중 미국의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 문제가 심각함을 느꼈다. 그는 퇴임 후 이 문제를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해 브루킹스연구소로 들어갔다. 그리고 민주당과 협의하여 연구팀을 구성했다. 그 결과, 브루킹스연구소에 민주당 현역 상원의원까지 참여한 ‘해밀턴 프로젝트’ 팀이 가동됐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름을 땄다.
이들의 연구로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민층의 소득과 저축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춘 경제정책이 구상되었다. 브루킹스연구소가 2006년 4월에 발표한 해밀턴 프로젝트의 내용은 ‘모든 계층 동반 성장’ ‘복지·성장의 상호 상승작용’ ‘할 일을 하는 효과적인 정부’ 등이다. 그들이 내놓은 4대 정책과제는 ‘인적자원 투자, 혁신과 인프라, 미래 불안 해소(저축과 사회보험), 정부 역할 제고’ 등이었다. 이후 미국의 재정정책이 서민경제 쪽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내놓은 ‘동반 성장’ 정책은 한국의 더불어민주당도 기본정책으로 채택한 바 있다.
해밀턴 프로젝트 보고서는 로버트 루빈 당시 시티그룹 회장, 로저 알트만 전 재무차관, 피터 올스잭 전 백악관 경제특보 등이 주도해 작성되었다. 당시 루빈은 월스트리트 유대계 금융인들의 대부였다. 이런 그가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는 점은 높이 사줄 만했다. 하지만 이들은 미국의 심각한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에 대한 실상, 곧 정확한 데이터는 발표하지 않았다.
해밀턴 프로젝트 보고서
이 데이터가 공개된 것은 2014년이었다. 노동경제학을 전공한 재닛 옐런이 이끄는 연준이 ‘소득불평등과 부의 편중’ 데이터를 전격 공개한 것이다. 이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소득점유율이 올라가는 계층은 상위 3%밖에 없다. 차상위 7%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으며 나머지 국민 90%는 소득점유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이는 중산층이 붕괴되어 하류로 밀려나고 있음을 의미했다. 자본주의의 영속 가능성에 의문을 던져주는 심각한 도전이었다.
이는 10명이 사는 사회를 가정했을 때, 돈 잘 버는 한 명이 나머지 9명과 소득이 같아지거나 더 많아짐을 의미한다. 서민들은 저축 여력이 크지 않아 소득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하지만 소득이 상위 소수에게 집중되면 그들에게 들어간 돈은 소비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전체 절반 가까이의 소득이 사회로 흘러나오지 못하고 그들의 곳간에 축적된다. 곧 사회 전체 소득의 절반이 소비력을 잃어버리는 사회가 돼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수요 부족으로 불경기를 초래하고 심하면 공황을 맞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소득불평등이 앞으로 개선될 가능성 없이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2014년 연준이 발표한 미국에서의 부의 편중 자료를 보면 심각한 부의 쏠림 현상을 볼 수 있다. 상위 3%가 미국 전체 부의 50% 이상을 독점하고 있으며, 차상위 7%가 25% 가까이 소유하고 있다. 곧 상위 10%가 전체 부의 75%를 갖고 있고, 미국 국민 90%의 부는 25%에 불과한 실정이다. 문제는 가장 취약한 계층인 하위 50%의 점유율인데 이들은 순자산이 거의 없다. 재닛 옐런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직접 언급했다.
재닛 옐런은 “미국의 불평등 정도와 불평등의 지속적 확대 추세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그 누구도 공개하지 못했던 미국의 치부를 만천하에 알렸다. 금융자본주의를 이끌고 가는 연준의 수장이 금융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점과 그 폐해를 솔직히 밝힌 것이다. 옐런은 미국의 소득불평등이 100년 만에 최악의 수준이며 특히 “상위 5%의 부가 1989년에는 미국 전체 부의 54%를 차지했는데, 2013년에는 63%로 늘어났다”며 “같은 기간 하위 50%의 부는 전체 3%에서 1%로 오히려 줄어들었다”고 서민경제에 대해 걱정했다.
이는 여론의 핫이슈가 되어 정치판을 흔들었다. 소득과 부의 불평등 테마는 2016년 미국 대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선거 의제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버니 샌더스 후보는 “상위 1%가 하위 90%의 소유를 모두 합친 정도의 부를 독점하는 것은 비도덕적이고 그릇된 일”이라며 부자증세를 통해 누구에게나 대학 등록금을 무상으로 지원해 교육의 평등을 이루겠다고 호언했다. 그러자 다른 대선 후보들도 당파를 초월해 앞다투어 서민경제를 위한 공약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통화공급 주도권이 바뀌다
옐런은 2017년에도 후속 자료를 발표했다. 불과 3년 사이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14년도 자료만 해도 소득 점유율이 증가한 계층이 상위 3%였는데 이제는 상위 1%로 줄어들었다. 이는 소득 독식 체제가 날이 갈수록 심화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소득 점유율이 올라가는 계층은 상위 1%밖에 없었고, 그다음 9%는 현상 유지 중이며, 나머지 국민 90%의 소득 점유율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소득불평등의 확대로 빈부격차는 더 커졌다. 상위 1%가 미국 전체 부의 40% 가까이 독점하고 있으며, 상위 10%가 미국 전체 부의 77%를, 나머지 국민 90%가 23%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문제는 하위 50%다. 이들은 소유한 순재산이 거의 없고 전체 부의 1% 남짓을 소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른바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사람들로 위기에 취약한 계층이다. 결국 이 문제로 코로나19가 들이닥치자 미국의 자본주의는 그 근본 틀을 바꾸기 시작한다.
이러한 소득불평등과 빈부격차 문제는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공통으로 당면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로써 그간 논란이 되었던 ‘기본소득’ 개념이 각국에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이제 팬데믹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금융자본주의에서 포용적 자본주의로 바뀌고 있다. 첫째, 팬데믹 사태로 어려운 하위 50%의 붕괴를 막기 위해 통화 공급 주도권이 연준에서 재무부로 넘어왔다. 비상 상황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통화정책보다 특정 대상을 지원하는 재정정책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통화 공급은 월스트리트(금융시장)를 통한 유동성 살포에서 메인스트리트(소비자와 기업이 있는 실물시장)를 통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양만큼 쏴주는 ‘점적관수(點滴灌水)’식 공급으로 바뀌었다. 재정에서 개인들에게 직접 지급되는 돈이 다른 재정 집행액의 두 배 이상으로 급증했다. 셋째, 재정 기능이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재정의 3대 기능, 곧 ‘자원 배분, 경제 안정화, 소득재분배’ 기능 중에서 ‘경제 안정화’ 기능을 중요시했다면 이제는 ‘소득재분배’ 기능이 더 중요해졌다.
홍익희 / 세종대 대우교수·‘월가이야기’ 저자
출처 : 주간조선(http://weekly.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