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씨앗
허공으로 치솟은 풀길 따라
바람처럼 휑하니 달려간다.
무엇인가 내 바짓가랑이 붙잡는 것이 있다
달려갈 땐 몰랐지만
나무그늘 아래 앉아 쉬는데
내 바짓가랑이 붙잡고 안달하는 억센 가시들,
손바닥으로 털면 더 끈질지게 달라붙는
저 집착을 어떻게 달래야하나
함부로 대하면
더 끈끈이처럼 달라붙는 저 고집에 지쳐
살며시 손가락을 갖다댄다
깡마른 몸뚱아리 잡고 살살 당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의 마음 힘없이 풀어진다
가만 생각해보니
저 도깨비씨앗, 내 애인의 혼령 같아 가슴 서늘해진다
풀길 한가운데 혼령처럼 버티고 앉아
운 좋게 내 바짓가랑이 붙잡은 걸까
내 마음 돌리려고
날카로운 침들 속사포로 쏘아 댔지만
이미 돌아선 마음 낚아 챌 수는 없다
여자여, 그러지 말고 편히 쉬려무나
인적없는 풀숲에 숨어
요행이 내 바짓가랑이 잡고 늘어져도
그때의 젊고 푸른 날
이젠 쉬 돌아올 수 없으니,
나팔꽃
오일장 가는 엄마가
통치마를 펄럭이며 가네
전봇대를 감아 오르는
나팔꽃 넝쿨처럼
먼 길을 걸어서가네
자글자글 주름 잡힌 손등으로
가끔씩 해를 가리며 가네
장터바닥에 퍼들고 앉아
쿡쿡 쑤시는 무릎을 두드리며
산나물을 팔고 있네
펼쳐진 통치마 속에서
삐져나온 발등이
퉁퉁 부어올라 곧 터질 것 같네
자전거
누워있는 자전거 바퀴를 돌리면서 상상한다
도대체 이 족속의 정체가 무엇인지 떠올려본다
어디서부터 길을 끌고 와
적막한 뒤란에 누워있는지
누구의 소유였는지
궁금증은 감나무 잎처럼 무성하지만
도대체 자전거가 끌고 온 길을 알 수가 없다
바람 빠진 바퀴를 보고
굴곡 많은 길을 걸어왔다는 상상만 할 뿐
말없이 녹슬어가는 차체에서
아버지의 뼈대가 보인다
젊을 적에 농사일로 뼈대 일으켰다가
골다공증으로 주저앉은 아버지처럼
어쩌면 이 자전거가 아버지의 길을
끌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밤마실 가는 길
밤마실 갈 때마다 달이 날 미행하면서 따라온다
달아, 네 정체는 이미 밝혀졌다
넌 밤마다 마을길을 떠도는 감시자
네가 날 미행해도 난 발걸음 멈출 수 없으니
네가 지쳐 멀리 도망칠 때까지
난 유령처럼 밤길을 떠돌아다닐 거다
바람의 등
바람 없이 씨앗 혼자 제 터를 잡을 수 없다
바람 앞에 등불이라고 들어본 적이 있다
씨앗은 바람을 위태위태하게 여기지 않는다
바람의 등을 타고 멀리까지
날아가는 씨앗의 눈물을 본적이 있는가
씨앗은 눈물을 제 터에 뿌리고
새싹을 내밀어 화해를 하자고 한다
태풍
태풍 전야에 해안가의 배들이 모두 쇠사슬을 걸쳤다
범법자도 아닌데
어부는 형사처럼 배들의 팔뚝에 쇠사슬을 채웠다
쇠사슬을 채우는 어부의 얼굴도 심란하다
담배를 꼬나물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충혈돼 있다
태풍이 온다고 밤새 설쳤던 눈을 털고
해안가에 나왔을 때
춤추는 고래처럼 어부를 맞이하던 배들
곧 태풍이 장대 같은 칼을
바다에 들이댈 거라는 흉흉한 소문에도
배는 넉살좋게 어깨춤을 춘다
신나는 어깨춤에 바다는 파랗게 물들지만
태풍이 지나가고 난 뒤의 아수라장을 알고 있는 것일까
배와 배의 팔뚝을 쇠사슬로 묶어
스크럼을 짜는 파도의 기세에
바다도 몸을 사린다
우물의 기억
고향집 옆 부잣집이
학의 날개처럼 휘어져 있었다
병호 형이 살았던 기와집 뒤엔
수양버들 잎 분분하게 날리는 연못이 있었다
물속을 수놓았던 금붕어는 사라졌고
잉크 빛 꽃창포도 말라붙었다
마당의 우물도 속을 드러냈다
우물 속에 차오르는 달빛만큼
가슴께까지 우물물 차오르던 그때
부잣집 외동딸이 우물 속을 들여다보다
실수로 떨어져
눈 까집던 기억을 우물은 알고 있을까
대충 꼽아 봐도 열아홉 살 방년이
되었을 법한 소녀의 나이
우물가도 그만큼 늙어
주변엔 시퍼런 이끼 투성이다
목동
목동은 고삐를 잡고
소 옆에서 걸어간다
소 뒤에 붙어 서면
냅다 발에 차일까 무서워
옆에서 헐렁하게
고삐 늘어뜨리고 소를 따라간다
앞에서 걷는 것도 긴장의 연속이다
대가리에 솟구친 두 개의 뿔은
누구라도 치 받을 듯
소는 점잖게 걷는다
목동은 쇠파리와 함께 걷는다
쇠파리가 항문 주위를 알랑거릴 때
소는 귀찮게 꼬리만 흔들 뿐
이미 쇠파리와 친해진 사이를
어떻게 때어낼 수가 없다
장마
비가 어느새 다 내렸는지
빗줄기가 현처럼 늘어진다
늘어진 현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지
그걸 알고 바람이 세차게 달려와 현을 당긴다
빗줄기는 팽팽하게 당겨지고
땅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빗소리가 쟁쟁하게 울린다
비를 피해 처마 밑에 웅크린 고양이는
연주가 지루한지 까욱 하품을 하고
장닭은 장단을 맞추며 비에 젖은 날개를 턴다
적당하게 내리는 비는
감미로운 고향곡이 될 수가 있지
자, 파전을 구워 먹자구나
바람이 켜는 빗줄기의 연주 소리를 들으며
구수한 파전 냄새에 젖어 보자구나
장마
이제 그만 오라지
한때는 빗소리도 감미로워서 밤새 듣곤 했는데
무지막지 내리는 비는 상대하기도 싫다
몇날며칠 퍼붓는 비
세상을 앙갚음 하며 쏟아지는 비
메마른 땅 흥건하게 불려놓고는
고은 실개천 흙탕물로 들쑤셔 놓고선
가녀린 꽃잎 하나 배처럼 강에 띄었는데
무지막지 하구나
앙 토라진 빗줄기
몇날며칠 땅을 물 천지로 만든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 마음까지 빗물로 채워놓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를 언제까지 맞아야 하나
이제 그만 오라지
밤새도록 흐느끼는 비
내 가슴 빗물로 채운 것도 모자라
남의 가슴까지 후벼 파는 빗줄기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장마
비를 오래 바라본 사람들은 안다
비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를
할 일없어 추적거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아라
비가 미쳤다고
하늘의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나
부질없이 떨어지는 잎은 없고
까닭 없이 붉어지는 꽃잎은 없으니
한동안 빗소리에 꽂혔을 때는
가슴 속에서 태동처럼 울리는 무엇인가가 있어
그것을 아련함이라고 해도 되겠나
나는 그런 비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아련함보다 더 짙은 그녀의 눈물을 생각한다
여행길
내 옷깃에 묻어 나를 따라온 도깨비씨앗처럼
나도 당신의 옷자락에 묻어 먼 여행길 떠나고 싶어요
옷자락에 까만 뿔 박고
억센 손으로 잡아 빼도 빠지지 않는
도깨비의 뚝심으로
나도 당신의 옷자락에 붙어 멀리까지 가고 싶어요
끝내는 당신에게 들켜
아무데다 굴러다니는 팔자가 될지라도
당신의 보드라운 숨결만 맡아도 그만이라오
신발의 향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어가는 꽃줄기처럼
나도 벼랑 끝까지 기어 올라가련다
이쯤이면 됐다 하고 피는 꽃처럼
벼랑 쪽 어디쯤에 퍼들고 앉아
군살 박인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저 발바닥 얼마나 먼 길 건너왔을까
땅을 기어가는 꽃줄기도 밟고 왔을까
그래서 구린내 나는 발바닥이 저리 향기로운가
신발에 짓이겨진 꽃잎이 내는 향기처럼
발바닥에도 향기가 스며 있다
흰 눈썹
소나기 물러난 산자락에 안개가 걸린다
안개가 배웅 나왔다 올라가는가
솜뭉치 풀며 흩어지는 안개의 꼬리가 짧다
풀잎에 스쳐도 이슬이 되고
사람의 눈썹을 스쳐도 흰 눈썹이 되는데
낮달은 흰 눈썹 근처로 흘러가서
저를 닮았다 미소 짓는데
안개는 꼬리를 감추며
산자락에 외딴집 한 채 보여 준다
빈 집
거가 누가 왔소 소리를 치면
창마다 어둠만 고여 들고
바람이 참나무를 흔들어 낙엽을 쏟아놓는다
불 꺼진 창문엔 낯선 그림자
집 주인 다시 돌아왔나 창문을 열면
수줍은 듯 꼬리를 감추는 달그림자
주인이 누웠던 방에는 곰팡이만 쓸고
귀뚜라미 놀라
한서린 울음을 남기고 떠나는데
거기 누가 없소 다시 한 번 불러보면
달그림자 제 꼬리를 끌고 떠난다
소나무
아무나 낙락장송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온 세월이 품처럼 넓어야 된다
좁은 마음으론 위로 가지 뻗지만
넓은 마음으론 좌우로 가지를 뻗는다
그래서 황새를 받아주는 여유도 있다
다른 나무들이야 독한 황새 똥을 멀리 하지만
소나무는 그런 냄새쯤이야 하고 팔을 벌린다
그 여유가 소나무의 이름을 빛내준다
소나무가 천길 벼랑을 딛고 서서도
실족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품에 앉은 줄 아는 여유 때문이다
놀고먹는 소
요즘 들판엔 소가 없다
소는 밭둑에서 되새김질하며 엎어져 놀고
소의 궁둥이를 후려치던 채찍은 뒤란에서 삭아간다
폭력과 간섭을 받지 않는 시절에
소의 멍에는 한낱 허울뿐이다
소 대신 부역하는 건 트랙터다
트랙터들이 들판을 휘저으니 소들만 살판났다
살판이 났어도 그건 치욕이다
이름값 하지 못하는 소는 소가 아니어서
그가 버릇처럼 가는 곳은 강둑이다
그 옛날 우직하게 걷던 소의 뒷다리가 그립다
뒷다리 불끈 세워 쟁기를 끌고 가던 소의 등짝이 그립다
팔자 좋게 늘어져도
소의 이름이 빛나는 건
트랙터처럼 밭을 갈아엎던 뚝심 때문이다
집
한겨울 산길 걷다가
찾아갈 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눈발은 벌떼처럼 얼굴에 달라붙고
추워서 발 오그린 부엉이는 울지도 않는데
이 차디찬 겨울 어디까지 이어지려나
가도 가도 눈 덮인 벌판
날쌘 삭풍만 바람결을 찍는다
대체 어디 있는가
숨어 있을 집 한 채
지금쯤 지글지글 끓는 아랫목에 누워
발톱 깎아주는 아내의 숨소리를 들으며
깊이 잠들었을 우리 집
나는 왜 사서 이 고생인가
내가 가는 길로 열차는 설국열차처럼 달려가는데
가도 가도 눈 덮인 벌판
차라리 이곳에 서서 자작나무처럼
찬바람이라도 파고드는 마음의 집을 짓고 싶다
집
산길 걷다 딱따구리 집 한 채 만났다
겉보기엔 답답한 구멍이지만
딱따구리에겐 가슴을 뎁혀주는 집이다
저 집을 짓느라 밤낮 며칠 고생했을 노고가 떠오른다
부리가 끌이 되고
머리를 망치처럼 휘두르며
지어 놓은 집 한 채
누가 뭐래도 인간의 집보다 백배는 낫다
자재와 장비를 동원하고
철근과 콘크리트로 찰옹성처럼 지어도
물난리를 당하면 끝이다
그러나 딱따구리 집은 물난리에도 끄덕없다
내 젊은 날 집 한 채를 위해
사방을 떠돌았지만
여태껏 딱따구리 구멍만 한 집 한 채 구하지 못했다
놀고먹는 소
황소가 강둑 위에 엎어져 있다
그의 오래된 버릇은
뭔가를 우물거리는 일
남을 씹는 것 같지만
태연한 표정에선 도대체 그것을 읽을 수 없다
밭이라도 갈아야 이름값을 하지만
늘 강둑에 엎어져
놀고 있는 신세가 고달프게 보였다
거품을 질척거리며 끌었던 쟁기는
허름한 창고의 유물로 삭아가고
녹슨 세월만큼 그의 생도 따분해 보였다
집만 나서면
죽기 살기로 밭을 갈았던
그 옛날이 사무쳤기에
강둑에 엎어져
뭔가를 우물거릴 때마다
질척질척 거품이 흘러내린다
놀고먹는 소
뭔가를 우물거리는 것은
그리움이 깊다는 뜻
강둑에 엎어져 있는 소들이
산자락 타고 내려오는
산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집에 가니 할머니가
대청 기둥에 기대고
뭔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할머니의 고단한 두 눈이
강둑을 따라 내려오는 황소를 보고 있었다
트랙터
들판을 휘젓는 괴물에 대적할 자는 없다
힘 센 소들은 이미 그의 이름을 버렸고
그의 이름이 빛나던 땅엔 괴물이 으르렁거린다
딱정벌레를 닮은 트랙터가 추수를 한다
도무지 그의 정체를 종잡을 수 없지만
어슴푸레 알고 있는 건 왕성한 식욕
메뚜기 떼가 밭 한 뙤기를 갉아먹듯
누른 들판을 순식간에 요절낸다는 것
먹으면서 동시에 배설하는 똥도
거대한 몸집만큼 굵어서
그가 들판을 기어가는 날은
소도 무서워 큰 눈만 끔벅거린다
이제 소가 짊어질 업보는 괴물이 물려받아
그가 한번 쓸고 간 땅은 더 황량하다
푸들에게
모처럼 꽃놀이 가는데
그의 섭섭한 눈동자가 아른거린다
마루 밑에서 꺼낸 목줄을
그의 목에다 걸어 놓고
대문 쪽으로 한걸음 떼는 순간
그는 꼬리를 둘둘 말아
비련을 나누듯 내 뺨을 핧아댄다
가지 말라 애원하듯
떨어지면 못살겠다는 듯
애원과 이별사이에
눈물이 질척하게 묻어 있다
과업
나비는 마부처럼 꽃의 종착역에다 향기 한 짐을 부려놓는다
무수한 꽃들을 징검다리처럼 스치고 왔을 나비의 날개가 가뿐해졌다
그 향기 지고 오느라 날개 한 쌍 기진맥진 흔들며 왔을 여정은 고달팠을 것이다
강둑 저편에 도깨비처럼 서 있는 엉겅퀴꽃에
마지막 향기 부려놓으면 올 봄 나비의 과업은 끝이다
바지게
물건을 지고 가도 가뿐한 것은
어깨 위에 붙어 있는 날갯죽지 때문이다
새가 되려는 욕망으로
날갯죽지 한없이 펴고
허공으로 솟구치려는 부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