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관한 단상
괴테가 지은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란 소설이 있다. 18세기 중엽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베르테르가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출간되자 마자 전 세계에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부녀에 대한 막연한 사랑과 실연에 의한 자살이 만연해진 탓으로 몇몇 국가에서는 이 소설을 판매 금지 시킨 일도 있다. 유명인의 자살 후에는 실제로 많은 젊은이들이 모방 자살을 했는데 이것을"베르테르 효과"라고 한다.
지난해에는 전직 대통령과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자살로 많은 국민들이 혼란을 겪었다. 이유가 뭐든 간에 그들의 죽음은 사회 전체에 우울한 분위기를 던져 주었고 사랑하는 가족에게까지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사건 이후에 평소보다 자살자가 많이 늘어났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이 "베르테르의 효과"가 자살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베르테르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요즘 부쩍 자살자가 늘어난다는 소식이다. 2009년도를 기준으로 하루 평균 33명 정도가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우울증 같은 영향도 있지만 물질적 고통이 그들을 자살로 내모는 경우가 많다. 해가 갈수록 자살자가 늘어나는 현실은 그만큼 복잡한 사회 속에 내재된 병리현상이 심각한 탓이기도 하다.
저녁 무렵, 나에게도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아내가 대모님(천주교에서 지칭하는 영적인 모친)과 전화를 나누던 중 알게 된 소식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우 노인이 자살에 실패해 차디찬 병실에 누워있다는 것이다. 우 노인은 몇 해 전 우리 이웃집에 살았던 분이다. 성당 활동도 적극적이고 봉사 활동도 열심이던 그가 극단의 선택을 한 이유는 생활고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큰아들 하나, 손자 둘, 몇 해 전 할멈을 당뇨병으로 보내고 큰아들마저 사업에 실패에 대주었던 돈이 하루아침에 날아갔으니 우 노인으로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생활고에 시달렸으면 말수도 적고 점잖은 노인이 자살을 결심하게 되었을까, 링거관 몇 개를 주렁주렁 몸에 꽂고 병실에 누워있다는 대모님의 말에 절망감마저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하고 보니 성당에서 우 노인의 얼굴을 못 본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나면 성당 마당에서 그분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등나무 아래 쉼터에서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의 안부를 묻던 기억이 새롭다. 그럴 줄 알았으면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대화도 많이 나눴으면 했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다.
마음이 착하고 선행만 한다고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다. 한평생 악행을 일삼으면서도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도 많고 남을 위한 봉사와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을 많이 본다. 이렇게 보면 삶은 불공평하고 과연 하느님이 존재하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우 노인이 아니더라도 요즘 자살을 하는 노인들이 꽤 늘어났다. 대부분이 병과 고독, 생활고에서 오는 고통이다. 몸이 늙게 되니 병이 들고 출가시킨 자식들도 집에 잘 찾아오지 않으니 외로움을 견디며 살아간다. 거기다 생활고까지 겹치니 마음속에 자살이란 극단적인 생각이 들어차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은 배를 굶으면서도 한 평생을 자식에게 몸 바쳤던 희생이 결국에는 자신의 목을 옥죄는 형벌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자식이란 노인들에게는 떨쳐내지 못할 짐 덩어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삶이 고되고 목숨을 끊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아도 한번쯤은 깊은 고뇌와 성찰을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은 사회에서 필요 없는 존재처럼 생각되지만 어머니의 탯속에서 수많은 정자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이유와 해답을 찾기 위해 종교가 생겨나고 생의 길을 밝혀주는 존재로서의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예수나 석가모니, 노자, 장자등 많은 수행자와 선각자들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의 말속엔 생의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는 메시지가 있다. 자살을 한다고 이승에서의 고통이 말끔히 사라지고 만사가 편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종교에서 자살을 죄악시 하는 것도 그 이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은 어느 말 많은 호사가가 지어낸 빈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며칠 전 입적한 법정 스님은 “오두막 편지”에서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법문집 “일기일회”에서도 현재 살고 있는 동안의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삶에서 가장 기특하고 기억할 만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살할 마음이 생기거든 한 밤 중 두둥실 떠오른 달을 한 번 더 바라보라. 둥그런 제 몸에 황금빛 물을 입혀 타오르는 의지에서 생의 절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가을에 풀숲에서 흐느끼는 벌레의 울음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라, 가을이 갈 때까지 쉴 새 없이 흐느끼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에서 불타는 생의 의지를 찾아낼지 모른다. 생에 대한 해답은 제 스스로 찾는 것이다. 비록 그 대상이 미물일지라도, 여하튼 차디찬 병실에 누워 생과사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우 노인의 쾌유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