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지는 과수원
기억과 추억 사이/손바닥 동화
2005-12-25 16:01:43
배꽃 지는 과수원
사방을 둘러 봐도 과수원만 있는 마을입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넓게 펼쳐진 들판은 과일나무가 빽빽이 들어서있는 과수원뿐이었습니다. 포도 밭은 물론이고 복숭아 밭, 사과 밭이 서로 경계를 한 채 넓은 들판을 뒤덮고 있었습니다.
때맞춰 봄이 돌아와 과수원은 온통 꽃망울 투성이었습니다.
과일나무들이 밥풀 같은 꽃망울을 매달고 포근한 햇살 아래 졸고 있었습니다. 한차례 봄비라도 지나가면 꽃망울들은 화들짝 놀라 꽃을 활짝 피울 것만 같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배씨 아저씨네 배 밭은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비록 손바닥만 한 배 밭이었지만 꽃망울들이 복스럽게 뭉쳐 쳐다만 봐도 눈이 시렸습니다.
그렇지만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그늘이 깔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불이 난 듯 시끄럽게 날아왔던 벌들이 올해는 아예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 많던 벌들이 과수원으로 날아오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더구나 배씨 아저씨 네 배 밭조차 며칠째 조용한 것을 보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마 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배씨 아저씨의 마음은 허전했습니다. 배씨 아저씨는 가끔씩 들판 끝에 있는 산자락을 하염없이 쳐다보았습니다. 까
치발을 뜨거나 한 쪽 손바닥을 이마 위에 갖다붙이고 한참동안 눈을 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벌들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포근한 봄바람을 타고 벌들이 그 쪽 산자락에서 날아올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산 속 어디쯤에 벌들이 모여 살고 있는지 배씨 아저씨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조용하게 며칠을 보내던 꽃들은 이제 시들거렸습니다.
눈부신 꽃잎도 색깔이 흐릿해져갔습니다. 더욱이 힘없이 떨어지는 꽃잎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절망이었습니다. 땅으로 떨어지는 꽃들의 힘없는 모습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때 벌들은 두 패로 갈려 싸움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과수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비탈 고목나무에 벌들이 몰려들어 며칠 동안 싸움을 벌였으나 결말이 나지 않았습니다. 벌들도 과수원의 꽃들이 힘없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며 무척 가슴이 아팠을 것입니다.
“저기 저 과수원 좀 보라구. 지금 꽃들이 지고 있어.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빨리 과수원으로 가서 꽃들에게 꽃가루를 묻혀 줘야 해”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과수원 주인들이 나쁜 마음을 고치기 전까지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구. 그동안 인내심으로 참고 견뎠는데 또 참으라니 그게 말이나 돼”
“그래도 참아야 해, 아무리 주인들이 미워도 우리가 임무를 포기한다면 삶을 포기한 것과 똑 같아. 주인들이 다 나쁘다고 하지만 배씨 아저씨 같은 양심적인 분도 있잖아. 괜히 다른 사람들 때문에 그 분이 피해를 입겠어. 배씨 아저씨를 위해서도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한다구”
‘그럼 우리는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날아갈 거야“
“좋아, 과수원 주인들 스스로 깨우치기 만들어야 해. 우리들이 배 밭에서 앵앵거리면 아주 나쁜 주인이라도 자신들의 마음을 고치게 되겠지 뭐”
두 패로 갈라섰던 벌들은 결국 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결사적으로 임무를 포기하자며 버티던 벌들도 여왕벌의 명령에 따라 모두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사실 벌들이 다른 과수원은 버려두고 배씨 아저씨네 배 밭을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배씨 아저씨의 착한 마음씨 때문입니다.
과수원 주인들이 농약을 뿌리며 과일 농사를 지어도 배씨 아저씨만은 그 방법을 싫어했습니다.
더구나 성급한 과수원 주인들이 꽃이 활짝 핀 동안에도 마구잡이로 농약을 뿌리는 바람에 꽃가루를 묻혀 왔던 벌들은 불쌍하게도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벌들은 이 날의 사건을 오랫동안 가슴 속에 새겨 놓았습니다.
앞으로는 이 과수원으로 날아오지 말자고 벌들끼리 굳게 맹세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배씨 아저씨는 달랐습니다. 농약을 뿌리는 대신 언제나 손작업을 했습니다. 과일나무가 벌레에 시달리거나 잎이 이상하다 싶으면 미련 없이 그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며칠이 걸리더라도 자신의 고집대로 했습니다.
배 밭 주변의 과수원 주인들은 배씨 아저씨의 답답한 일솜씨를 보고 혀를 끌끌 찼습니다. 더구나 그 방법대로 일을 하다가는 다른 과일나무까지 병충해를 옮길지 모른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습니다.
그렇지만 수확 철에는 배씨 아저씨의 숨은 노력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배씨 아저씨네 배가 다른 과일보다 더 굵고 싱싱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농약을 쓰지 않는 무공해 과일이란 소문 때문에 배들은 먼 도시로 순식간에 잘 팔려 나갔습니다. 그래도 과수원 주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배씨 아저씨의 배가 굵고 싱싱한 이유가 벌들이 부지런히 꽃가루를 묻혀준 덕분이란 사실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벌들은 과수원 주인들이 무척이나 답답하다는 듯 한참동안 과수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배씨 아저씨의 웃음 띤 얼굴도 떠올랐습니다. 벌들은 모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자, 빨리 떠나야 해”
여왕벌이 명령을 내리자 벌들은 일제히 자리를 뜨기 시작했습니다. 산 능선 고목나무에 새까맣게 붙어 있던 벌들은 소방차 소리를 내며 배꽃이 하염없이 지고 있는 배씨 아저씨네 배 밭으로 날아가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