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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풍운(風雲)을 잉태(孕胎)하는 여인
그곳은 한 칸의 넓직한 석실(石室)이었다.
스스스스! 헌데 이 석실 전체에는 아주 기이한 분홍빛 향기가 가득했다. 그 향기의 내용은 아주 기이했다. 여인의 지분내음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물오른 여인의 몸에서 흐르는 체향(體香)같기도 했다.
하여튼 그 향기에는 마력(魔力)이 있었다. 여인이라면 모르나 사내구실을 할 줄 하는 남자에 게는 치명적인 효능이 그 안에 있었다. 즉 사내의 본능을 자극하여 여인을 안고 욕정을 풀어내지 않으면 아니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천하를 위태롭게 만들기에 충분한 향기였다.
{…!}
{…!}
죽음 같은 침묵이 흐르는 석실 안에는 향기에 휩싸인 채 일백여 명의 여인들이 있다. 낯뜨겁게도 여인들은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들이었다. 하나같이 절세미인들 인데 그녀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 여인들이 모두 초절한 공력을 지닌 여인들이라는 점이다.
여인들의 눈빛은 마치 횃불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여인들의 내공이 적어도 이갑자 이 상임을 나타내 준다. 여인들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가부좌를 튼 채 하나의 옥으로 만든 침대 (玉床)를 에워싸고 있었다.
스스스! 자세히 보면 예의 분홍빛의 향기가 여인들의 몸에서 안개같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문득, 그그그긍
석실 한쪽의 석문이 열리며 두 명의 여인이 들어왔다.
한 명은 고풍스런 자색(紫色)의 궁장(宮裝)을 걸친 중년의 미부인이었다. 이 자의미부는 아주 아름답고 왕후같은 기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옥용은 싸늘한 한기로 덮여 있어 한편으로 섬칫한 느낌이 들었다.
자의미부 옆에는 눈에 확 띄는 젊은 미인이 서 있다. 폐월수화! 침어낙안, 빙기옥골! 이런 미사여구가 오히려 부족한 미인이었다. 본래는 훈훈한 분위기의 여인인데, 어떤 험한 일을 당했는지 옥용이 얼음같이 굳어 있었다.
그 여인은 속이 훤히 비추어 보이는 나의 하나를 걸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폭발적 인 유혹이 실린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설련(雪蓮)아!}
문득 두 여인 중 자색 궁장을 걸친 중년미부가 엷은 나삼만을 입은 그 절세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설련(羅雪蓮)!
그렇다. 나삼의 미녀는 바로 천검성의 유일한 생존자인 천검미후(天劍美后) 나설련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들러온 자의미부는 혈영마군(血影魔君)의 마수에서 나설련을 구해낸 여황교주(女皇敎主) 천환여제(天幻女帝)라는 여인이었다.
-천환여제(天幻女帝)! 겉보기엔 아직 한창 난숙한 나이인 삼십대로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칠십을 넘긴 여인 이다. 다만 절정에 이른 내공과 뛰어난 주안술 덕분에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천향소녀미욕공(天香素女美欲功)을 거치면… 너는 제이의 천향염후(天香艶后)가 될 수 있다.}
천환여제가 나설련에게 말했다.
-천향염후(天香艶后)!
천환여제가 언급하는 이 여인은 팔백 년 전에 일세를 풍미했던 여인이다. 여자의 몸으로써 유일하게 고금오대마종(古今五大魔宗)에 들었던 고금제일여고수(古今第一女高手)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또한 그녀는 지분(脂粉)으로 천하를 도탄에 빠뜨렸던 절대음녀(絶代淫女)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가 나타나는 주위 십 리가 형언할 수 없는 방향(芳香)에 뒤덮인다고 했다. 그 향기에 접하면 어떤 사내라도 욕정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기꺼이 그녀의 개 (犬)가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절세의 미모와 지분으로 장장 일백 년을 천하무림 위에 군림했던 일대여마 천향염후(天香艶后), 저 고금제일마로 불리는 천마(天魔)와 우주혈종(宇宙血宗)에 비견되는 사상최강의 탕녀이며 여고수가 그녀이다.
이 천향염후에게는 미모와 요기뿐만 아니라 천지십병(天地十兵)에 드는 한 가지 절대마병(絶代魔兵)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비녀였다.
-천향옥잠(天香玉簪), 도대체 그 용도가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온통 신비로 가득 싸인 병기인 천향옥잠이 바로 그것이다. 천환여제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미인들을 돌아보았다. 분홍빛의 안개 사이로 드러나는 여체들에서는 폭발적인 매력이 뭉클뭉클 솟아나고 있었다. {우리 천향일맥(天香一脈)의 팔백 년 영화가 네 일신에 달렸다. 가랏!}
천환여제가 나설련에게 말했다.
[…!]
그러자 나설련은 혼백이 나간 표정으로 옥으로 깎아 만든 침대로 다가갔다.
사르르! 침대에 이른 나설련은 나삼을 벗어 버렸다. 그러자 완전히 나타나는 알몸의 여체!
나설련의 나신은 숨이 탁 막힐 정도로 너무나도 완벽 하고 뇌살적인 몸매였다.
{…!}
나설련은 천천히 옥침대 위에 자신의 나신을 뉘였다. 그러자,
{시작해랏!}
천환여제가 옥상을 차갑게 말했다.
스스스! 그 즉시 옥침대를 에워싸고 앉아 있던 백 명의 나녀에게서 분홍의 운무가 더욱 짙게 스며 나왔다.
석실은 삽시에 여인들의 야릇한 체향으로 가득해졌다. 그와 함께 나설련의 나신에서도 요요(妖妖)로운 광휘가 흐르기 시작했다.
츠츠츠…!
나녀들의 분홍기류는 솜에 물이 빠려들 듯이 나설련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마른 솜이 물기를 빨아들이듯이….!
지금 백인의 절정 여고수들이 자신들의 일신공력을 기향으로 바꾸어 나설련에게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천환여제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붕비(鵬飛), 그대가 죽지 않았음을 믿어요. 설련이 천향염후가 되는 날… 당신에게 진 빚을 받아내고야 말 것이에요.}
천환여제의 봉목이 형형하게 빛났다. 헌데 붕비(鵬飛)라니?
설마 패천황룡(覇天皇龍) 능붕비를 말함인가?
천환여제라는 이 여인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패천황룡 능붕비와의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황혼!
온통 피칠을 한 듯한 시뻘건 혈광으로 대지를 물들이며 황혼이 진다. 화살맞은 백조의 가슴으로 흐르는 선혈같이 노을이 지고 있는 것이다. 그 처절한 낙조(落照) 속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
그 인물은 당장 천지가 무너져도 꿈쩍 않을 듯한 웅자로 서 있다. 꽉 다물린 입술, 불타오르는 눈빛, 건장한 몸에는 타는 듯이 붉은 홍색의 경장을 꽉 끼게 걸쳤으며, 우수(右手)에는 창(槍), 한 자루 신창(神槍)이 들려 있었다.
전체가 마치 태양의 불꽃같이 시뻘건 신창(神槍)이 들려 있는 것이다. 홍포인의 우수에서 비스듬히 비껴 들린 길이 일 장 정도의 이 신창에서는 태양화기(太陽火氣)가 뇌전같이 흐르고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인물(人物), 그리고 범상치 않은 병기였다. 그리고 이 홍포인의 전면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대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대초원(大草原), 한 가닥 막힘도 없이 그 끝나는 곳이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초원! 그 초원을 딛고 홍포의 거웅이 우뚝 서 있다.
문득, 스스슥 휘르르! 홍포인의 뒤로 삼인이 소리 없이 내려섰다.
홍포인의 뒤로 내려선 삼인은 그대로 홍포인의 등을 향해 오체복지했다. {…!}
{…!}
잠시 숨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흠!}
홍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신존(神尊)!}
{신존(神尊)이시여!}
삼인은 이마를 땅에 박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홍포인, 그는 삼 인에게 있어서 신적인 존재였다. 홍포인은 타는 듯이 붉은 시선으로 삼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맨 좌측에 오체복지한 인물에게 닿았다.
그 인물은 피의(皮衣)로 중요한 곳만 가린 야수같이 생긴 인물이었다. 그자의 전신에는 시뻘건 털이 부숭부숭하게 나있어 섬칫한 인상이 풍겼다. {남황야 수신(南荒野獸神)!}
홍포인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신… 신존!}
남황야수신이라 불린 그 자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준비는…?}
{예…! 일만 마리의 맹수와 일천의 독응(毒應)이 준비를 갖추고 신존의 명을 대기하고 있습니다.}
홍포인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의 시선은 가운데 있는 인물에게로 닿았다. 그 인물은 삼 인 중 유일하게 여인이었다.
금발의 여인인데 몸매와 아주 풍염하고 전신에서 폭발적인 매력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의 투실투실하게 부푼 유방이 지면에 눌려 있었다. 그 탐스러운 유방에 흙이 묻었으나 여인은 감히 털어버릴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환밀후(歡密后)!}
홍포인은 여전히 무감정한 어조로 여인을 불렀다.
{신존(神尊)이시여.}
여인은 고개를 들어 홍포인을 우러러보았다. 나이는 서른 정도 되었을까? 두 눈이 새파란 벽안(碧眼)인 절세미녀였다. 우유빛의 피부가 미미하게 경련하고 있으며, 그녀의 벽안이 짙은 갈망을 담아 홍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을 받자 홍포인의 두 눈에 담담한 광채가 흘렀다.
(석역쌍미(西域雙美)에 드는 천만금의 가치가 있는 사랑스런 여인! 하지만…)
이내 홍포인의 눈빛은 다시 엄해져 있었다.
(아아 야 속하신 분…!)
홍포인의 엄한 시선을 접한 벽안미녀의 두 눈이 슬픈 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홍포인은 그녀의 애끓는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나는… 변황의 신! 변황 백만무림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계집에게 정을 주 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변황의 신이므로…!)
홍포인은 깊이 침음하며 말을 이었다.
{요지(瑤地)의 준비상황은 어떠한가?} 홍포인은 무뚝뚝하게 묻자 벽안미인, 환밀후의 고개가 떨구어졌다. <요지(瑤地).> 당대 서역제일문파(西域第一門派)다. 요지는 본래 모든 신선들의 어머니라는 서천(西天) 서왕모(西王母)의 후예를 자처하는 문파로써 선도(仙道)를 추구하는 도가의 일문이었다.
그러던 요지에 밀종(密宗)의 음사(淫邪)함이 만연되었다. 결국, 선도를 추구하던 여인들은 그 옥체에 사내들을 태우고 쾌락을 찾았다. 그것이 일천 년 전부터이며, 요지에서는 일천 년 전인 세월을 거치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음탕한 무공과 술법들이 창안되었다.
그러면서 요지의 여인들은 욕심을 키워갔다. 자신들의 육체로 천하를 정복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요지의 여인들은 이를 위해 그 아름다운 육체와 음탕한 술수로 서역무림의 신공절기들을 긁어 모았다. 결국, 일천 년이 흐른 당대에 와서 요지는 서역제일이 될 수 있었다.
밀종의 홍교(紅敎) 본산인 천룡사(天龍寺)가 요지의 분당이 된 것이 이미 오래 전이고, 황교(黃敎) 본산인 살가사(薩加寺) 역시 천룡사와 같은 꼴이 되었으며, 백 년 전에는 서장제일의 문파라던 저 포달랍사(布達拉寺)마저 요지의 요녀들에게 점령당했다.
그런 요지이건만 대초원에서 난 일 인 절대영웅(絶代英雄)에게는 너무도 무력했다.
-태양신존(太陽神尊)! 천 년을 걸쳐 내려오던 서역제일비(西域第一秘), 태양성부(太陽聖府)의 비밀을 푼 절대영웅!
그가 천지십병에 드는 한 자루 신창(神槍)을 한 번 그음으로써 요지의 천 년 공적을 일거에 무너뜨린 것이다. 그것이 이십 년 전의 일이었다.
뚝! 문득 환밀후(歡密后), 요지제일미인이라는 이 여인의 벽안에서 옥구슬이 흘렀다.
(당신 한 분을 위해 삼십 년 동안 가꾸어 온 심신이거늘…!)
환밀후는 눈물을 삼켰다. 그리고는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천녀휘하 일만의 미인과 삼만의 서역제일용병들이 신존의 일언 천명(天命)을 받고저 부복 하고 있습니다.}
환밀후의 말에 홍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마지막 일 인에게로 닿았다. 그 인물은 완전히 백발로 뒤덮인 노검사(老劍士)였다.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 정도의 백발노검사! 그러나, 그 노구에게서 뼈골까지 스미는 예기(銳氣)가 내뻗치고 잇었다.
범인이라면 그 예기 만으로 피를 토하고 죽을 정도로 날카로운 예기였다. {해천신검제(海天神劍帝)!}
홍포인이 묵직하게 불렀다.
{신존! 동해(東海) 해천검파(海天劍派) 일만검사(一萬劍士)가 신존의 존명을 고대한 지 오래 이옵니다.}
백발노검사, 해천신검제가 노인답지 않은 칼칼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좋소!}
홍포인은 돌아서서 다시 황혼을 바라보았다. 태양(太陽)은 어느덧 서쪽 끝이 지평선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홍포안은 입을 열었다.
{때가 왔소! 나 태양신존(太陽神尊)은 중원(中原)을 본존의 발아래에 두어보일 것이오!}
{신… 신존!}
{신존이시여!} 삼 인이 격동으로 몸을 떨며 홍포인을 올려다보았다. 태양신존(太陽神尊)!
이 인물이 바로 일전 패천황룡 능붕비가 아들 능천한에게 주목하라고 말했던 바로 그 태양 혼(太陽魂) 태양신존(太陽神尊)이란 말인가?
{중원(中原)은 넓고… 기인이사가 무수히 도사린 곳이다. 그러나!} 홍포인, 태양신존은 일갈하며 수중에 들린 신창을 번쩍 쳐들었다.
차차창! 번쩍!
순간 엄청난 창영(槍影)이 그의 신창에서 폭죽이 터지듯이 백 장에 이르는 극양강기(極陽剛氣)를 토해내었다. 태양신존이 휘두른 신창으로부터 실로 가공할 기세의 섬광이 쏟아졌다. 그에 따라 산산이 부서지는 황혼! 그 사이로 하늘이 양단되지 않는가?
{본존에게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이 있으니…! 뉘라서 본존의 앞을 막겠는가?}
태양신존이 웅혼한 일성을 토했다. 아! 그것이었는가? 태양신존의 손에 들린 창이 바로 그것이었는가?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 저 천지십병의 사대신병(四大神兵)중에 드는 절대신창(絶代神槍)이 아닌가? 한 번 내침으로 백장에 이르는 태양강기(太陽강氣)를 내뻗어 만상을 재로 만든다는 그 천고 (千古)의 신창(神槍)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태양성부(太陽聖府)! 그 천 년의 신비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태양천화신창(太陽天火神槍)이…!
{신존(神尊)!}
{신존(神尊)이시여!}
태양신존이 발휘하는 신위를 목도한 남황야수신, 환밀후, 해천신검제가 감격하여 눈물을 지었다.
이역의 오랑캐라 하여 중화인들로부터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당해오던 그들이 드디어 떳떳이 천하 위에 설 기회를 목전에 둔 것이었다. 한데 변황무림을 좌지우지하는 그들 삼인의 종사들이 감격에 겨워할 때였다.
{호호호!}
돌연 어디선가 한 소리 맑디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르르르!
그와 함께 허공으로부터 한 무더기 홍운(紅雲)이 사인 앞으로 날아 내렸다.
그 홍운은 한 명 의 지극히 아름답고 발랄하게 생긴 홍의소녀였다. 팽팽한 홍의(紅衣)의 겉으로 여인의 신비한 육체의 곡선이 드러나 보이고 한가닥으로 묶은 검은 머리가 허벅지까지 이르렀다. 아주 당돌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소녀였다.
{사란(사蘭)!}
소녀를 바라보는 태양신존의 안면에 훈훈한 미소가 감돌았다.
이 홍의소녀야말로 천지간에서 그 자신과 피를 나눈 유일한 존재인 것이다.
{호호! 오빠! 드디어 중원(中原)에 들어가실 생각이신가요?}
사란이라는 소녀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 소녀는 태양신존의 누이동생인 것 같았다. 태양신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다. 일 년 내로… 중원을 사란에게 주었다.}
태양신존의 말에 소녀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보다 오빠에게 부탁이 있어요.}
{무엇이냐? 말해 보거라!}
사란이라는 소녀는 냉큼 대답했다.
{오빠보다 사란이 한발 먼저 중원에 들어가 정세를 살펴볼 수 있도록 해주세요.}
{네가 척후가 되겠다고?}
태양신존은 검미를 찌푸렸다.
{아이! 오빠…아!}
사란이 태양신존의 품으로 뛰어들어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태양신존은 별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천하를 상대로 싸워도 지지 않을 나이지만 사란 네 녀석에게 번번이 지는구나!}
{와! 오빠 최고!}
사란은 팔짝팔짝 뛰며 좋아했다. 그런 사란의 모습을 보며 태양신존은 엄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환밀후와 해천신검제를 데리고 가야 한다!}
{헹! 사란 혼자가도 되는데…}
그러나 오빠의 태양신존이 내세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에 군소리는 하지 않았다.
{나! 내일 당장 떠날래요! 중원에는 강자가 많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알아볼거예요!}
사란은 중원 쪽을 바라보며 작은 손을 앙증맞게 휘둘렀다.
{오빠! 먼저 가겠어요.}
{오냐!}
화르르… 사란은 제비같이 가볍게 몸을 날려 초원 저편으로 날아갔다.
{환밀후! 해천신검제!} 사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태양신존이 묵직하게 불렀다.
{옛!}
{신존…}
양인이 무릎을 꿇으며 복명했다.
{사란을 잘 돌아보오! 그 일은 환밀후가 주력하고… 해천신검제는 중원의 내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고 하오!}
{존명(尊命)!}
{심려 놓으시옵소서!}
환밀후와 해천신검제의 대답을 들으며 태양신존은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중원(中原)이 있었다.
{사란으로 인하여… 너 중원이 몇 달 늦게 변황의 광풍에 휘말리게 되었구나!}
태양신존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변황(邊荒)으로 부터의 대풍운(大風雲)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숲 사이로 길게 뻗어 있는 관도,
두두두!
문득 한 대의 마차가 황혼을 등지고 질풍같이 쏘아왔다.
{이랴!}
마차의 마부석에는 한 명의 장한이 고삐를 잡고 일어서서 말들을 재촉하고 있었다.
네 필의 건마들은 거품을 물면서 장막이 두텁게 드리워진 마차를 끌고 달렸다. 장한은 비장한 모습으로 전면을 응시하며 달렸다. 헌데 그가 막 마차를 몰아 관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크크크크!}
쐐애액! 슈파팟!
돌연 음침한 음소가 터지고, 관도 우측 숲 속에서 시뻘건 강기가 벼락 치듯이 쏟아졌다.
{헉!}
마차를 몰던 장한이 아연실색했다. 그는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당겨 날아든 공격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콰릉!
{크으윽!}
히히히힝!
다음 순간 처절한 비명과 함께 피가 확 일었다. 네 필 건마가 머리가 박살나 쓰러지고 장한도 피를 토하며 나뒹군 것이다.
쿠웅!
마차를 몰던 장한은 관도 옆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스스스! 휘르르!
동시에 우측의 숲 속에서 십여 명의 혈영인(血影人)들이 날아 나왔다. 하나같이 음악한 인상 의 인물들이다.
{크크! 금(琴)가 계집년이 머리를 쓴다만… 그따위 잔꾀에 넘어갈 우리 혈영궁(血影宮)이 아니다!}
혈영궁도들은 음침하게 마차로 다가갔다.
{크크! 이제 그만 나오시지!}
그 중의 한 자가 장막을 들추었다. 바로 그 순간,
{야앗!}
파츠츠!
날카로운 교갈이 터지고 장막 안쪽에서 벼락치듯이 검기(劍氣)가 쏟아졌다. 그러나,
{크크!}
{그럴 줄 알았지!}
위이잉! 쿠르르릉!
혈영인들이 기쾌하게 움직이며 일제히 장력을 내쳤다.
콰콰쾅!
{아아악!} 마차가 통째로 박살이 나고, 그 안에서 한 명의 아리따운 소녀가 가슴이 박살이 나서 튕겨져 나갔다.
{크크크!}
{헤헤… 고년… 죽이기는 아까운 계집이었는데…}
혈영궁도들은 죽은 소녀의 허벅지를 툭툭 걷어차며 괴이한 음소를 지었다. {흐흐! 천효(天梟) 군사께서 펼친 천라지망에 십팔로(十八路)로 나간 금(琴)가 계집년의 위장마차가 모두 걸려들었다.}
{크크! 결국, 청허현도존(靑虛玄道尊) 늙은이와… 군사의 따님은 아직 이곳 패하(沛河) 근역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얘기지!}
{크크! 가자!}
스스스! 휘르르!
혈영궁도들은 분분히 몸을 날려 숲 속으로 사라졌다. 일장의 혈극이 지난 후 장내에는 다 시 적막이 감돌았다. 헌데
[흐음! 이런 곳에서도 피바람이라니…!]
일장의 참극이 있은 후 반각이 채 못 되어 돌연 한 줄기 황영(黃影)이 허공으로부터 날아 내렸다. 그는 임풍옥수란 말이 잘 어울리는 수려한 용모에 태산의 무게를 지닌 청년이었다.
황포청년은 검미를 찡그리며 부서진 마차를 돌아보았다. 곧, 그는 죽어 넘어선 소녀 곁으로 다가갔다. 갓 피어오르기 시작한 소녀가 젖가슴이 박살이 나서 죽어 있는 모습은 너무도 애처로웠다.
{혈영마장(血影魔掌)! 혈영궁도들에게 당했군!}
청년의 안면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혈영궁! 통천방! 그리고 자객집단인 밀살교(密煞橋) 등의 발호가 극에 이르고 있다.}
청년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으…!}
문득 한쪽에서 미약한 신음성이 들렸다.
{…!}
스스스슥! 그 즉시 청년은 유령같이 움직여 신음이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관도 옆의 우거진 풀 사이로 마차를 몰던 장한이 신음하며 누워 있었다. 청년은 급히 장한의 상세를 살폈다. 장한은 왼쪽가슴이 무너진 중상이었다. (회생은 불가능하다.)
청년은 고개를 저으며 장한의 몇 곳 혈도를 눌렀다. 그러자,
{으…!}
장한이 간신히 눈을 떴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소?}
청년이 급히 물었다. 마차를 몰던 장한은 한동안 망연히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상대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혈종(血宗)의… 마도들을… 패하(沛河) 근역에서 끌어내려는… 금맹주(琴盟主)의 계획… 실패…!}
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패공산(沛空山)으로… 가서… 전해 주십… 쌍극천효(雙極天梟)가… 나타났다고… 맹주께서 도… 위험…!}
{쌍극천효(雙極天梟)!}
{부탁… 사해정검맹(四海正劍盟)… 이… 무너지면… 무림도….}
툭! 장한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흠…!}
청년은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의 두 눈이 아주 밝게 빛났다.
{사해정검맹(四海正劍盟)이란 신흥조직이 사파제일뇌라는 쌍극천효와 모종의 일로 다투는 모양이군!}
청년은 중얼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스스슥! 그의 신형은 서북 쪽으로 폭사되어 갔다.
{무이산(武夷山)행이 더뎌지겠군!}
청년의 목소리가 그림자를 따르지 못했다.
황포청년, 그는 다름 아닌 능천한이었다.
그는 무이산으로 가던 길에 이번 일과 조우하게 된 것이다.
{패공산(沛空山)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 듯하군!}
쐐애액! 삽시에 능천한의 모습은 까마득히 사라져 갔다.
-쌍극천효(雙極天梟). 그는 사도제일뇌(邪道第一雷)라 불리는 모사(謀士)다. 만 가지(萬種)의 사이한 술수와 계략을 지녔다는 그는 사십여 년 전, 그는 패천황룡(覇天皇龍)의 눈 밖에 나서 초죽음을 당한 적이 있었다. 쌍극천효는 자신의 교활한 술수만을 믿고 만사교(萬邪敎)라는 문파를 세웠었다. 만사교는 쌍 극천효를 등에 업고 천하무림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그들의 이간질과 능간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급기야는 좀체 화를 안 내는 패천황룡 능붕비의 노함을 샀다.
그 뒤의 결과는 명약관화, 만사교의 수뇌 일천(一千)이 폐인이 되고, 쌍극천효(雙極天梟) 자 신도 반죽음을 당했었다. 그것이 사십 년 전의 일이었다.
-패공산(沛空山).
절강(浙江) 서북단을 흐르는 패하(沛河) 근역의 산(山)이다. 웅장한 산세는 아니나 예측불허의 험함과 어지러움으로 가득한 산이다.
저녁 무렵.
스스스! 어둠이 스물거리는 패공산역을 한 줄기 인영(人影)이 흐르고 있었다. 그 인물은 홍의(紅衣)를 날렵하게 걸친 소녀였다.
화라라락! 홍의소녀는 물이 흐르듯이 산봉을 타고 넘어갔다. 한데,
{…!}
홍의소녀의 뒤로 유령같이 따라붙는 인물이 있었다. 신형이 흐릿하여 흡사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자였다. 하지만 홍의소녀는 그 자가 따르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흐흐 천산홍연(天山紅燕)! 어서 금(琴)가 계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라!} 그 자는 입가에 음악한 미소를 지으며 앞선 홍의소녀를 노려보았다. 흐릿하게나마 드러나는 그 인물의 모습… 그 자는 영준하게 생긴 문사차림의 인물이었다.
계집을 홀리기에 적당할 듯한 얄팍한 얼굴 에 간교함이 가득한 자였다. 천산홍연(天山紅燕)이라는 홍의소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산봉을 넘어 치달렸다.
그러나 정녕, 그 간교한 자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
그 자의 머리 위에 또 한 명의 황의인이 둥실 떠서 따라가고 있음을…
그는 물론 능천한이었다. 죽은 마부의 부탁을 받고 패공산으로 달려온 그는 우연히 쫓고 쫓기는 두 남녀를 발견하여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버마제비가 매미를 노리고 또 그 버마제비를 참새가 노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능천한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었다.
(유령잠천행(幽靈潛天行)! 은밀함에 있어서는 으뜸이지…)
그의 입가에 고소가 흘렸다.
-유령잠천행(幽靈潛天行).
이는 유령대제(幽靈大帝)가 유령제종령에 남긴 절기 중의 하나이다. 능천한은 천곡둔에서 하루를 머물며 상세를 치료했다. 요상을 하면서 그는 심심하여 현음유 령종이 준 유령제종령을 살펴보았고, 그 과정에서 교묘히 감추어진 두 가지 신법(神法)을 찾 아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유령잠천행(幽靈潛天行)이다. 천하제일인 추종(追踪) 전문경공이 그것이다. 휘르르! 천산홍연이라는 소녀는 두 사람이 자신을 쫓고 있음도 알지 못하고 비연(飛燕)같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곧 그녀는 은밀한 곡구(谷口)에 이르렀다. (저 안에 여러 명이 있군!)
능천한은 곡구를 바라보며 신형을 더욱 은밀하게 감추었다. 곡구의 안쪽에서 희미한 인기척 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돌아왔어요!}
그때 천산홍연이 밝게 외치며 곡구로 날아들었다. 그러자, 휘이익! 곡의 안쪽에서 두 줄기 날렵한 인영이 마주 날아왔다.
그들은 한 명의 흑의미녀와 백삼청년이었다.
흑의미녀는 매우 활달한 성격으로 보였다. 백삼청년은 곱상한 것이 일견하여 문사(文士)의 인상이 들었다.
{호호, 어서와 홍매(紅妹)! 아니!}
{누구냐!}
마주 날아오던 흑의미녀와 백삼청년이 서로 다른 일갈을 질렀다. 그들은 한눈에 천산홍연을 뒤따라오던 간교한 인상의 추적자를 발견한 것이다.
{어멋!}
그제야 천산홍연은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그와 함께,
{흐흣! 사천묵봉(四川墨鳳), 신수제검(神手帝劍), 너희들도 있었군!}
간교한 자가 영악하게 웃으며 몸을 드러내었다.
{음…!}
그자를 발견한 세 젊은이의 안색이 일변했다. 특히 그자를 인도한 꼴이 된 천산홍연의 옥용이 새빨개져서 씨근덕거렸다.
{분면색마(粉面色魔)! 네놈이 감히…}
쐐애액! 분노한 천산홍연이 벼락같이 분면색마란 자를 덮쳐가며 발검을 했다.
(대단한 쾌검!)
숨어서 지켜보는 능천한의 눈가에 탄성이 흘렀다. 천산홍연이 허리를 더듬는 순간 그녀의 요대에서 한 자루 연검이 섬전보다도 빠르게 격사되어 나감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흣흐…!}
스스슥! 분면색마란 그 자가 어깨를 좌우로 흔들자 그 자의 신형의 형기가 허공중에 스며들 듯이 흐릿하게 나뉘었다.
(표향환종보(飄香幻踪步)! 저 자는 표향음제(飄香淫帝)의 진전을 이은 자군!)
능천한은 관목의 그늘에 선체 두 눈을 싸늘하게 빛냈다.
-표향음제(票香淫帝), 사백 수십 년 전의 인물로, 지독한 음마였고, 대도(大盜)였다. 그 자는 미혼술과 최음제도 수많은 규중처자들의 순결을 짓밟았으며 뛰어난 경공절기로 갖 은 악행을 다했었다.
어느 해인가 그는 화산파의 당대문주였던 화후(花后)까지 능욕하였으며, 그 일이 발단이 되 어 구파일방의 합공을 받아 갈가리 찢겨 죽었었다.
한데 그 표향음제인 무공이 분면색마란 자의 몸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흐흣! 기껏 이런 곳에 숨어 있었군…}
천산홍연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낸 분면색마는 음침하게 웃으며 품속에서 오색화전(五色火箭)을 꺼내들었다.
{흐흐! 곧 혈종(血宗)의 정예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것이다!}
분면색마는 오색화전을 쳐들며 음악하게 웃었다.
{막아욧!}
{차핫!}
천산홍연, 사천묵봉, 신수제검이 동시에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파파팟! 위이잉!
천상홍연의 몸에서 섬전같은 검기가 쏟아지고, 사천묵봉의 교수에서 수십 개의 암기가 우박 같이 날았다. 그리고, 신수제검도 웅장한 검세로 휘몰아 분면색마를 짓쳐갔다. 그러나
{흐흣! 어림없지!}
파아앗! 분면색마의 몸이 유령같이 흔들리며 오색화전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
{음…!}
천산홍연 등의 안색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오색화정은 화약이 비장되어 있어 허공에서 찬연한 오색 불꽃을 터뜨린다. 그것은 백 리 밖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렇게 되면 그들의 현 위치가 강적들에게 알려지게 되는 것이다. 천산홍연 등은 절망의 표정으로 오색화전이 터질 허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색화전은 터지지 않았다.
스스스슥! 한 줄기 흐릿한 인영이 어두워지는 허공을 가로질렀고, 오색화전은 어느 사이엔가 그 인영의 손 안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 인영은 백색 궁장차림의 면사여인이었다.
{헉!}
그 백의궁장녀를 발견한 분면색마의 안색이 홱 변했다. 반면,
{금(琴)언니!}
{맹주!}
세 젊은이는 희색이 만연하여 백의궁장녀를 바라보았다.
(저 골치 아픈 계집이 나타나다니…!)
분면색마의 안면이 이지러졌다. 다음 순간, 스스스! 그자의 신형이 연기가 흐르듯이 이십 장 밖으로 쏘아나갔다.
{달아나다니…!}
{서랏!}
천산홍연 등이 분분이 몸을 날렸다. 그 때였다.
{헉!}
허공을 가르던 분면색마의 몸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그와 함께, 화라락! 능천한이 관목의 그늘에서 육중한 기도를 휘몰아 표향음마 앞으로 날아 내렸다.
능천한은 발견한 중인들의 안색이 거의 동시에 변했다. 모두가 능천한의 엄청난 기도를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이이익!}
휘이잉! 표형환음신이 발악하듯이 몸을 허공으로 띄어올렸다. 단 한 번의 도약으로 그자의 신형이 까마득히 사십 장을 치솟았다. 그러나 능천한은 두 눈을 싸늘히 빛내며 우수를 쳐들었다.
그의 우수(右手)가 일순 새파란 강기로 뒤덮였다.
{수라단천류(修羅斷天流)}
그걸 본 백의면사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번쩌억!
능천한의 우수에서 새파란 강류(강流)가 뇌전되어 허공으로 무찔러 갔다. 파악!
{크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피가 확 일었다. 다급히 몸을 비튼 분면색마의 오른 팔이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쐐애애액!
하지만 분면색마는 팔 하나를 잃고도 물이 흐르듯이 멀리로 날아갔다.
위이잉!
능천한은 재차 수라강기(修羅剛氣)를 끌어 모았다.
(표향일맥! 천하여인들을 위해서하도 단절시키는 것이 좋다!)
능천한은 살인을 할 생각이었다. 그때,
{공자, 그냥 살려 보내세요.}
온화하고 기품 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능천한의 귓전을 울렸다.
(백의여인…)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렸다. 여인의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부드러움 중에도 만인이 절로 고개를 조아 리게 하는 힘이었다.
능천한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의 눈에 기품 있는 자태의 백의면사여인이 다가오는 것이 들어왔다.
(대단한 기도를 지닌 여인이다. 머잖아 여인중 제일인(第一人)이 되겠구나.)
능천한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의여인에게는 능천한과 흡사한 점이 많았다. 먼저 기품이 그렇고 중인들을 절로 감복케 하는 기도가 그렇다.
(여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깝다. 그렇지 않았으면 일대종사(一大宗師)가 되었을 터인데…)
그때,
(거인(巨人)… 드디어 찾아내었다. 천하를 받칠 기둥을…)
백의면사여인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의 눈빛은 아주 신비했다. 맑으면서도 포근하여 어머니와 누이를 대하는 것 같으면서 또 한편, 여인답지 않은 육중함을 담아 철혈의 장부라도 무릎을 꿇게 만들 위엄이 있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하옵니다. 천첩은 사해정검맹(四海正劍盟)을 맡고 있는 금벽라(琴碧羅)라 하옵니다.}
백의여인이 공손히 능천한에게 머리를 숙였다.
(맹주언니가 저렇게 공손하게 대하시다니…!)
(저 인물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백의면사녀의 태도에 세 젊은이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그들의 눈에 능천한이 갑자기 거대한 거악(巨嶽)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그리고
(금벽라(琴碧羅)!)
능천한의 유연한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는 한 여인의 소문을 떠올렸다. {혹시, 무림일교(武林一嬌)라 불리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능천한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는 면사여인을 바라보면서 언젠가 아버지 패천황룡 능붕비에 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했다.
<천하에 너와 짝이 될 수 있는 뛰어난 두 명의 여아(女兒)가 있다. 일교(一嬌)와 천혜(天慧) 라고 불리는 두 아이가 그들이니라. 일교라는 아이는 일대여종사(一代女宗師)의 재목으로서 철혈서시(鐵血西施)라고 한다. 천혜(天慧)라는 아이는 천하제일재녀(天下第一才女)라고 불리니라. 향차 네가 천하를 도모하려 한다면 이 두 여아를 가까이 해야 하느니라.
허허, 물론 그 아이 들을 패천신문의 안주인으로 삼으면 더욱 좋고…!> - 철혈서시(鐵血西施)! -천헤선자(天慧仙子)! 그녀들은 패천황룡을 감탄시킨 몇 안 되는 인물들 중에 든다. 그것도 이제 막 피어오른 젊은 여인의 몸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