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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천부경 하나부터 열까지" (이현숙 지음)에서 발췌
우리말과 한글이 외국에서 유래한다는 궤변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하였다고 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훈민정음보다 앞선 시대의 유물에 우리글과 유사한 글이 발견되거나 언어학적으로 말이 비슷하면 우리의 한글과 말이 그곳에서 유입되었다고 주장한다.
가장 가까운 일본만 해도 자신들의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비루(또는 아히루) 문자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1446년보다 700~100년이 앞서므로 한글은 자신들의 아비루 문자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학자들 중에는 인도의 구자라트어가 한글과 형태가 유사하며, 훈민정음보다 약 1000년이 앞서 있다는 이유로 한글은 구자라트어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또, 인도의 드라비다어가 우리말과 유사하다는 이유에서 우리말이 드라비다어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의 유명한 언어학 박사 중에서도 우리말이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에서 왔다고 주장하며, 이를 증명하려 한다. 조금은 엉뚱해 보이지만 우리말과 상당히 유사한 말이 많은 중앙아프리카의 르완다어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우리말의 역사는 1만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한글의 역사도 최소 4000년 이상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한글은 우리말을 확실히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뒤에 설명할 한글의 창조 원리를 보면 이는 분명하며, 더욱 놀라운 것은 한글의 모양이 우리말의 뜻과 너무도 일치하여 말과 글이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앞서 언급한 고대 인도어나 르완다어는 우리말과 유사하지만 이를 표현하는 글은 표음문자로 발음만 나타내지 한글처럼 소리를 그려내지는 못한다. 우리말과 글의 역사와 한글의 형태를 고려하면 우리말과 한글이 그들 지역에 전해진 것이 분명하다.
►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비루 문자
일본의 아비루(또는 아히루) 문자는 신대문자(神代文字) 중 하나로 대마도의 우라베 아비루(占部阿比留)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아비루 문자는 일본의 신사(神社)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로 여기에는 우리의 초기 가림다(加臨多) 문자가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일본의 천황만이 공물을 바친다는 최고의 신사인 이세신궁(伊勢神宮)에는 천부인의 상징인 가림다 문자가 새겨진 청동거울이 소장되어 있으며, 가림다 문자로 쓰여진 서적도 보관되어 있다. 가림다문자의 흔적은 문서나 서적뿐만 아니라 일본의 오래된 비석이나 사찰 등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에서는 한자가 전래되기 이전의 고대 일본에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며, 에도 시대부터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는 아비루 문자의 사용 시기를 ‘고사기’가 나온 712~1339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아비루 문자는 1446년에 반포된 훈민정음보다 최대 700년, 최소 100년이나 앞선 것이 된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한글이 자기들의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비루 문자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학자들은 일본의 신대문자는 위작이며, 일본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라고만 이야기한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그렇게 질타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진실을 직시하지 않고 일본과 꼭 같은 위선을 떨고 있는 것이다. 이는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맹신에서 비롯된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한반도에서는 가림다 문자의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가림다 문자를 부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가림다(加臨多) 문자는 단군조선 이전에 만들어 진 것으로 그 때의 배달국(倍達國)과 단군조선은 동일한 곳에 위치하였으며, 그곳은 현재 중국에 있는 태백산(太白山)과 그 이남 지역이다. 우리의 녹도문(鹿圖文)과 가림다(加臨多) 문자의 흔적을 찾으려면 한반도가 아니라 배달국이 있던 곳을 찾아야 한다. 가림다 문자의 흔적이 인도 지역이나 일본에서도 발견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을 감안하면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가림다 문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걸로 추장된다.
※ 일본어는 우리말 (고대 경상도 방언)
옛날 일본에서 사용했던 언어는 고대 경상도의 방언이 기본이었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 현재의 일본어가 되었다. 일본과 사할린, 쿠릴열도, 캄차카 반도 등 현재의 러시아 동부에는 원래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아이누’어(語)였다. ‘아이누’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해누리’로 ‘태양의 자손’내지는 해가 뜨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란 의미이다. 일본(日本)이란 이름도 ‘해 뜨는 곳’이란 뜻이다. 이는 일본 지역이 배달국(倍達國)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 남부의 김해를 중심으로 여러 부족이 연합하여 김수로왕을 가락국의 임금으로 추대하였으며, 그 시기는 기록상으로 AD42년이다. 가락국은 6가야의 연합국이다. 그의 아내는 천신의 명을 받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의 왕녀 허황옥(許黃玉)이다. 김수로왕은 왕으로 즉위 후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해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당시 가락국의 제철 기술은 같은 시대의 어떤 나라보다도 우수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잘 훈련된 철마 기마대가 있어서 주변국에서 함부로 볼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가락국은 우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가락국을 구성하던 6가야는 점차 힘을 잃고 결국에는 신라로 편입되고 만다. 이는 가락국의 주력 세력이 AD200년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나라를 옮기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한반도의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주역은 김유신장군이며, 김유신도 가락국의 후예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는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가락국에 올 정도면 그 당시에도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인도는 배달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단군조선 시대의 진한과 이를 물려받은 신라에 대해서도 사전 지식이 풍부했을 것이다. 가락국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신라와 인접한 한반도 남부 지방보다는 아직 문명이 미미하고 국가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다수의 부족들이 흩어져 있는 일본으로 국가를 옮기는 것이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락국이 나라를 옮겨 자리를 잡은 곳은 현재 일본의 가장 중심부 지역이었다. 교두보는 오사카였으며, 일본의 나라현(奈良県)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가락국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나라의 중심지이며, 초기에는 나가노현, 기후현, 아이치현 등 주로 일본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당시로서는 뛰어난 문명과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가락국은 5세기를 전후하여 일본 열도 전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중심 세력이 된다. 가락국이 세운 나라를 일본 이름으로는 야마토국(大和國)이라 부른다. 야마토국은 가락국이 세운 나라이므로 가락국이 있었던 경남 지역의 가야 유물과 야마토국의 유물은 서로 같을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일본의 역사가들은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가야를 식민 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주장하는데 이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가락국이 일본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가 야마토국(大和國)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 大和(대화)를 읽는 방법에도 의문점이 있다. 大和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다이와’ 내지는 ‘오오와’가 되어야 하는데 왜 ‘야마토’라고 읽느냐는 것이다. 大和와 ‘야마토’라는 말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으며, 일본에서도 大和에 대해서만 ‘야마토’라고 읽는다. 일본어 ‘야마’는 통상 산(山)을 가리키는 말로 야마모토(山本), 야마다(山田) 등에서 볼 수 있다. 한자어 대화국(大和國)은 ‘크게 화합한 나라’라는 뜻으로 가락국처럼 연방국가임을 나타내며, ‘야마토’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태양을 받는 신성한 땅’이라는 뜻으로 ‘해 뜨는 곳’과 동일한 의미다. 그래서 한자로는 大和國이라는 연방국가임을 나타내고, 이를 읽을 때는 우리말 ‘야마토’라고 읽었다. 그런데, 달리 보면 대화국(大和國)이 단군조선의 연방국임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야마토’라는 말도 ‘해 뜨는 나라’ 즉 조선(朝鮮)임을 암시할 수도 있다. 즉, ‘야마토’는 ‘해 뜨는 곳’이라는 의미로 일본(日本)의 의미와 동일한 것이다. ‘일본(日本)’이 해 뜨는 곳이 되는 것도 가락국(한국)에서 보았을 때의 이름이다. 사전에도 ‘야마토’는 일본의 옛이름이라고 정의해 놓았다.
임나(任那)는 일본에서 가야를 지칭하는 말이다. ‘임나’라는 말도 우리말로는 ‘임금이 나온 곳’이라는 뜻으로 야마토국의 임금이 나온 곳을 가리킨다.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야마토국(가락국)의 언어가 일본 전체로 퍼져나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고대 일본어는 고대 경상도 방언이 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가락국에서 출토된 기마상은 전형적인 일본 기마무사와 닮아있고, 가락국의 가옥 형태가 현재 일본에 남아있는 전통가옥과 흡사한 것도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가락국의 기마상과 가옥 토기
일본 나가노현의 가옥
일본어에 대한 단적인 예를 들어보면 ‘겐모호로’라는 말이 있다. 일본에서는 그 어원이 ‘꿩의 울음’에서 유래했으며, ‘닭의 울음’은 아침을 알리지만 ‘꿩의 울음’은 의미가 없어서 ‘쓸데없다’라는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겐모호로’는 경상도 말로 ‘건 머하러(그건 뭣 하려고)’의 뜻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일본의 나라현과 긴키 지방에서 가장 높은 산의 이름이 히코산(희고 큰 산)인데 이것 역시 한국(桓國)의 역사에 등장하는 태백산(太白山, 크고 흰 산)을 상징하여 지은 우리말 이름이다. 일본의 북부 지역에는 신라인들이, 홋카이도(北海道)에는 고구려인들이 다수 살고 있었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적었다.
이후 일본의 남부 지역에는 패망한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몰려들게 된다. 우리 역사에 기록되었듯이 백제는 패망 후 일본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을 왕으로 내세워 신라와 전쟁을 벌인다. 이것도 백제가 일본과 가까웠던 것이 아니고 당시 일본 남부 지역은 백제의 식민지 정도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일본으로 모여든 백제 유민들도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며, 일본 남부 지역의 언어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단적인 예로, ‘사무라이’는 일본에서 무사를 뜻하는데 한자로는 표기가 없다. 이는 ‘사무라이’가 백제의 무사를 뜻하는 ‘싸울아비’에서 유래한 때문이다(싸울아비→사우라비→사무라이).
일본 영화 중에 가케무사(影武者, 그림자 무사)라는 영화가 있다. 가케무사(影武者)란 자신과 닮은 사람을 내세워 적에게 혼란을 주는, 대역을 담당하는 존재이다. 영화 가케무사는 일본의 역사를 가르는 중대한 전쟁이지만 우리에게도 상당한 의미가 담긴 영화이다. 다케다신겐(武田信玄)이 죽은 후 가락국의 대표 주자인 다케다(武田) 가문과 백제 유민의 대표 주자인 도쿠가와(德川) 가문의 싸움을 그린 것이 가케무사란 영화이다. 다케다 신겐은 1521년 가이국(가야국과 발음도 비슷하다)의 슈고 다케다 노부토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본명은 다케다 하루노부로, 신겐은 출가하여 받은 법명이다. 그의 아버지 노부토라는 14세에 가문을 잇고 가이를 통일하여 전국 다이묘로 우뚝 선 용장이었다. 다케다(武田)는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 유명 다이묘(大名)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막강한 세력이었다. 다케다 가문의 철기 기마대는 일본 전국시대 최강의 군대로 군림하였다. 이들도 가락국의 기마무사와 판박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케다 군과 맞섰다가 대패한 후 혼자 말 위에서 똥을 싸며 도망쳤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물론 도쿠가와 연합 세력에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등의 가문도 참여한다. 영화의 결말은 다케다 군의 철갑 기마대가 도쿠가와 연합세력의 조총부대에 의해 궤멸되면서 패배한다. 이후의 일본 역사는 도쿠가와(德川) 가문을 중심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전쟁이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이유는 이 전쟁으로 인해 가락국의 맥이 일본에서마저도 끊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본 황실의 천황은 전통적으로 가락국의 후예였으나 이 전쟁으로 인해 천황 일가에 백제의 피가 섞이게 된다. 이는 2001년 12월 일본 천황 궁에서 아키히토(明仁) 125대 일본 천황이 한일고대사에 관해 “나 자신, 간무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武寧王)의 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에서, 한국과의 인연을 느낍니다.” 라고 인정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도쿠가와 가문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다케다 가문의 학살을 멈추지 않고 자행하는데 이는 앞서 다케다 신켄에게 혼 줄이 난 이후의 열등의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케다 가문의 사람들은 도쿠가와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으로 숨어들어 살게 된다. 또한, 혹시나 모를 도쿠가와 세력의 침입해 대비하여 다케다신켄에 의해 만들어진 닌자(忍者)의 무술을 연마하며 살아간다. 일본의 유명한 만화 ‘나루토’를 보아도 ‘닌자’들은 깊은 산 속에서 생활하며, 이들이 기거하는 집은 앞에서 나온 가락국의 가옥과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일본 천황의 성(性)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고대에도 왕이나 귀족은 출신이 중요하며, 성이 없는 왕은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일본 왕가의 성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왕권이 가락국에서 백제로 바뀌면서 천황의 권위와 왕권의 유지를 위해 고의로 은폐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로 영화에 나오는 다케다(武田) 군의 깃발에는 풍림화산(風林火山)이란 글이 쓰여있다. 그 뜻은 바람처럼 빠르게, 숲처럼 고요하게, 불길처럼 맹렬하게, 산처럼 묵직하게 적을 엄습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쟁에서 기선을 제압하여 승리를 취하는 방법에 대하여 논한 손자(孫子)의 군쟁(軍爭)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므로 병법은 적을 속이는 것으로 세우고, 이익으로 움직이며, (병력을)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함으로써 변화를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를 움직여 내달릴 때는 바람처럼 빠르고, 서서히 움직일 때는 숲처럼 고요하고, 치고 빼앗을 때는 불이 번지듯이 맹렬하고, 주둔하여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묵직해야 한다. 적이 모르게 은폐할 때는 그림자에 가린 듯하고, 군사를 움직일 때는 벼락이 치듯이 신속하게 해야 한다. 우회하여 공격할 것인지 곧바로 공격할 것인지를 먼저 아는 자가 승리할 것이니, 이것이 군사를 가지고 싸우는 방법이다. (故兵以詐立, 以利動. 以合分爲變者也.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 難知如陰, 動如雷震, 先知迂直之計者勝. 此軍爭之法也.)”
※ 일본의 옛 노래를 모아놓은 만엽집
일본에서 현재 사용하는 가나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는 10세기경이다. 그런데 그 보다 앞선 9세기 이전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만엽집’이며, 주로 4~8세기경의 노래이다. 이에는 약 4,600수의 노래가 실려 있으며, 내용은 일본 왕실을 비롯한 왕자, 여왕, 귀족들의 노래들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만엽집에 실려있는 만엽가를 절대로 해독할 수 없다. 이는 한자의 소리를 차용해서 읽는 것으로 ‘향찰식표기(이두문과는 다르다)’라고 한다. 만엽집에 실려있는 만엽가는 우리말을 모르면 해독이 불가능한 것이다. 현재는 많은 만엽가가 우리말로 해설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한국사람만이 읽을 수 있는 수 많은 만엽가를 당시 일본 왕실이나 귀족들이 불렀다는 사실이다. 이는 당시의 왕족이나 귀족은 모두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주류 세력은 가락국의 후예이며, 나머지 세력은 백제의 후예인 것이다. 최초 일본의 천황이 한국 사람(가락국의 후예)이었다는 것은 만엽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아래에 김인배, 김문배 선생이 해설한 만엽가의 한 구절을 예로 든다.
본문 : 垂乳根之母我養蠶乃眉隱馬聲蜂音石花蜘(蟲廚)荒鹿異母二不相而 (27자)
垂(드르우)乳(젖)根(근)之(지)母(어미) : 드르(들판의 고어)우(上)젖 큰 지어미
我(아)養(기를)蠶(눗헤)乃(내) : 아기를 눕혔(눗헤/누에:고어)네
眉(미)隱(은)馬(말)聲(성)蜂(버리)音(그늘) : 미운 말썽버리(벌/버리/고어)거늘
石(돌)花(화)蜘(거믜) : 돌아 거믜(까물아지다/고어)
(蟲廚)(쥐메노호리/쥐메늘/고어) : 째매놓으리
荒(그츠)鹿(사잠)異(다르) : 그치사 잠(사잠/사슴/고어)들어
母(어미)二(두)不(불)相(상)而(이) : 어미두 불쌍이 (생각한다)
이를 현재 말로 해석하면,
들판에 젖이 큰 지어미가 아기를 눕혔네(젖먹인다) 미운 말썽부리거늘.
(젖달라고)돌아 까물어지니 짜매놓으리 (우는 것을) 그치사+잠(寢)들어. 어미두 불쌍이 생각한다.
문자풀이 : 아기를(我(아)+養(기를)=목적격 ‘를’까지 그들이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노래를 해석하여놓고 보니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들이 그 당시에도 같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향찰식표기는 한자의 소리를 차용한 것이다. 한자의 의미는 은유로 사용되고 한자를 발음기호로 사용한 것이다.
音(그늘/陰:옛날에는 陰자 대신 音을 사용하여 ‘그늘’이라 했다-큰 사전 참조)
훈민정음은 우리말 소리말의 소리부호=발음부호의 창조이다. 이 시기 향찰의 표기법은 ‘한자’는 ‘소리부호’ 발음부호의 역활인 셈이다.
특이 한 것은 (蟲廚)는 廚(부억/주)에 벌레 충(蟲)이 붙은 글자로서 한문사전에도 나오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순전히 노래의 기록자가 고안해 낸 글자로 부엌 등의 그늘지고 습기 찬 곳에 서식하는 벌레라는 의미에서 부엌 廚(주)와 벌레 충(蟲)의 회의자(會意字, 모아서 만든 뜻글자)로 만든 글자이다.
(쥐메느리/(공벌레):고어:쥐메노호리/째매놓으리/소리차용). 놀라운 용자법이다. 한국인이 아니면 어디 감히 일본인이 이것을 해석하리오.
► 고대 인도의 언어
인도의 구자라트어는 한글과 닮은 것이 꽤 많으며, 한글을 읽듯이 읽어도 발음이 같다. 뿐만 아니라 같은 뜻을 가진 낱말도 상당히 많다. 인도의 구자라트어는 기록상으로 AD400년부터 사용된 것으로 훈민정음보다 약 1,000년이 앞선다. 인도의 드라비다어는 우리말과 같은 것이 수 백 개에 달한다. 우리나라의 어떤 학자는 구자라트어가 훈민정음보다 먼저 만들어졌다고 해서 ‘한글’이 인도의 구자라트어에서 기원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인도의 산스크리스트어가 우리말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박사도 있다.
이처럼 인도 유역에 우리말과 비슷한 언어가 많고, 한글과 유사한 형태의 글이 남아있다는 것은 티베트를 포함하여 인도 지역이 고대 한국(桓國)의 영향권에 속해있었다는 반증이 된다. 인도의 신화는 우리의 신화와 유사한 것이 많은 것도 하나의 예가 된다. 인도의 힌두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다음으로 신자 수가 많아서 9억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에서 발생한 또 다른 종교로는 불교가 있다. 힌두교와 불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교리는 윤회(輪廻)사상이다. 이러한 윤회사상의 시초가 되는 것이 천부경(天符經)에 담겨 있는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사람이 죽은 다음 다시 환생한다고 하는 윤회사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천부경을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사람이 삶을 반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우리민족의 사상과 철학인 천부경이 인도지역으로 퍼져나갔다면 당연히 우리말과 글도 인도로 퍼져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천부경 내용 중에 성환오칠(成環五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말은 5(다섯)와 7(일곱)이 고리를 이룬다는 뜻이다. 천부경 해설에서 설명한 대로 우리말 다섯은 ‘땅 위의 모든 것’이며, 일곱은 ‘일어나서 굽는다’의 의미이다. 다섯과 일곱이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은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생겨나지만 이들은 나서, 자라고, 죽는 고리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사람도 나서, 자라고, 죽지만 다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힌두교와 불교의 중심 교리인 윤회사상인 것이다. 성환오칠(成環五七)의 원래 뜻은 무상(無常)으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만물은 구름과 같아서 생겼다가 없어지니, 별도 나서 자라고 소멸되며, 국가도 생겨나서 성장하다가 소멸한다는 것이다. 우리말 일곱은 ‘나서, 자라고, 죽는다’는 뜻으로 생성멸(生成滅)을 의미한다. 이는 힌두교의 우주관에 그대로 반영되어 힌두교에서는 “우주는 생성, 발전, 소멸을 반복한다”고 한다. 이를 신이 주관하는 것으로 보아서, 브라흐마신이 우주를 생성하고, 비슈누신이 우주를 유지 발전시키며, 시바신이 우주를 소멸시킨다고 한다. 마치 계절이 바뀌듯 우주의 시간도 바뀌어 결국에는 낡은 우주가 소멸되고 새로운 우주가 만들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천부경 사상은 마야에도 전해져서 마야사람들도 이 세상은 성장하다가 언젠가는 멸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믿었다.
불교는 천부경 사상에 더욱 가깝다. 불교도 기본적으로는 윤회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힌두교와 다르다. 부처는 인생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네 가지 고통으로 보았다. 즉, 태어나는 괴로움(아이를 낳는 괴로움), 늙어가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이 그것이다. 부처는 인간이 이러한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오랫동안 명상하다가 그 답을 천부경에서 찾는다. 천부경의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보면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다. 이를 연결해서 해석하면 “세상(우주)은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천부경의 일(一)을 나로 인식하면 나라는 존재의 몸은 죽지만 나의 넋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끝없는 윤회고(輪廻苦, 윤회의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다. 부처는 윤회를 생로병사를 반복하는 고통으로 인식한 것이다. 우리말 아홉은 수양을 하는 것이며, 열은 아홉을 통해 마음을 열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천부경에서는 이것을 일적십거 무궤화삼(一積十鉅 無櫃化三)으로 적고 있다. 이를 해석하면 “우주의 근본 기운인 한(一)을 쌓고 쌓아 크게 열면 걸릴 것이 없는 밝은 사람(明人)이 된다”는 뜻이다. 부처는 사람도 수양을 통해 모든 사람이 부처(천부경에서는 밝은 사람[明人])가 될 수 있으며, 부처가 되면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불교의 핵심 교리이다.
힌두교나 불교의 근본 사상은 천부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인도 지방에는 우리말과 글이 널리 퍼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부처에 대해 좀 더 알아본다.
혹자는 부처가 우리와 같은 겨례의 일족인 동이(東夷)족이라고 한다.
여기서 먼저 주지해야 할 사항은 우리 한민족은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군신화에서도 나오듯이 환웅이 웅(곰)족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다. 이는 우리민족이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한은 ‘큰’, ‘많은’의 뜻이 있으므로 한민족이란 큰 민족 내지는 다수의 민족이 모인 것이다. 요즘 말로는 다문화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桓國)의 영역을 감안해 보아도 동북아시아 전역의 민족을 수용하고 있었다.
불교의 시조가 되는 부처를 한자로는 석가모니(釋迦牟尼)라고 부른다. 석가모니(釋迦牟尼)에서 석가는 북인도에 살고 있던 샤키아라 불리는 한 부족의 총칭이며, 모니는 성자를 의미하는 무니의 발음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샤키아)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부처가 동이족의 갈래임을 알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터키는 돌궐(突厥, 투르크)에서 유래한 나라인데 돌궐이 색국(塞國, saka)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색국(塞國)이 사카(saka)이므로 석가(샤키아)족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처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悉達多喬達摩, 실달다 교달마)이다. ‘고타마’라는 부처의 성은 한자로 구담(瞿曇)이라고 적는다. 부처를 일반적으로 ‘붓다’라고도 하는데 이는 ‘깨달은 자’를 뜻하며, 중국에서는 이를 한자로 ‘불타(佛陀)’ 또는 줄여서 ‘불'(佛)’이라고 한다. 여기서 부처의 성인 구담(瞿曇)은 ‘고타마’의 한자 발음을 빌린 것으로 이를 비슷한 발음의 구담(龜潭, 거북 연못)으로 바꾸어 놓으면 김수로왕의 탄생설화가 담긴 구지봉(龜旨峯)의 거북과 연관되기도 한다.
부처가 태어난 곳은 카필라 왕국인데 이는 현재의 네팔 부근으로 티베트와 인접해 있다. 티베트 원주민은 우리와 생김새도 흡사하며, 풍습과 문화도 같은 것이 많으며, 언어도 상당수가 우리말과 동일하다. 지리적 측면에서 본다면 카필라 왕국도 티베트와 어느 정도 유사성이 많았을 것이다. 특히 부처가 상투를 틀고 있는 모습은 우리민족과 일치한다. 불상을 보면 모두가 머리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아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상투를 표현한 것이다. 현재 네팔의 곳곳에는 구자라트어로 된 간판이 즐비하며, 이는 우리의 가림다 문자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 등을 고려하면 부처가 우리 민족과 전혀 연관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부처가 우리민족과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부처의 설법 현장에서 나타난다. 부처가 법을 설할 때에는 많은 부처들이 천상에서 내려와 경청을 하는데 여기에 한인천제, 환웅천황과 단군왕검도 참석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도 부처 사후의 기록이겠지만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 부처는 우리민족과 연결고리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도 부처의 원 고향인 한국(桓國)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아래에 부처의 초상화를 나타내었다. 석가모니의 16살 때 초상화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석가모니의 41살때의 초상화는 부처님의 제자인 부루나가 그린 것으로 돈황 유역에서 출토되었으며, 대영박물관에 조장되어 있다. 인물화를 보면 아리안족과는 거리가 멀며, 동이족이나 동부 아시아인 계열임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석가모니 16세때 초상화 석가모니 41세때 초상화
우리나라는 북방계의 기마민족과 남방계의 농경민족이 결합하여 상고사에 대 제국인 한국(桓國)을 건설했음은 누구나 아는 얘기이다. 이는 단국신화에도 나타나는 전설이다. 이렇게 두 민족이 결합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천손신화(天孫神話, 하느님의 자손)와 난생신화(卵生神話, 알에서 태어남)라는 두 가지 신화가 공존하며, 녹도문(鹿圖文)에서 유래하는 한자와 가림다(加臨多)에서 유래하는 한글이라는 두 가지 문자를 창조한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나라이다. 인도와 일본은 남쪽에 위치하고 가림다 문자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는 우연이 아닌 필연적인 결과이다. 단군조선 때만 하여도 나라를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의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며, 환웅 천황은 진한에 머물렀다. 이후 삼한의 진한은 신라, 마한은 백제, 변한은 고구려로 발전한다. 진한의 위치는 태백산 아래 쪽 계림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로 길게 뻗어서 서쪽으로는 티베트와 인도 북쪽, 동쪽으로는 한반도를 비롯하여 일본까지를 영향권으로 하였으므로 이들 지역에 천부경 사상과 가림다 문자가 일찍부터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대에는 국경이란 것도 명확하지 않았으며, 특정한 도시를 제외하고는 수 많은 부락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에는 그 영역이라는 것이 현재 말하는 국경의 개념이 아니라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난생신화를 간직한 남방계의 농경 문화에서 사용한 문자가 가림다 문자이므로 자연히 녹도문은 천손신화를 간직한 북방 기마민족의 것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한국(桓國)의 영역이 바이칼 호수에서 인도에 이르는 남북 오 만리라는 기록도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우리민족의 발원지이다. 한단고기(桓檀古記)를 해석함에 있어서 일부는 시베리아의 바이칼호가 우리 인류의 발상지라고 하며, 일부는 파미르 고원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 지역이 우리 문화의 영향권에 있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발원지는 아니다. 뒤에 설명하겠지만 문화 유적이나 문명의 이동으로 볼 때 우리 민족의 발원지는 동서로는 현재의 한반도에서 지금은 바다로 변해버린 황해와 대만에 이르는 지역이며, 남북으로는 일본 오키나와 북쪽에서 만주벌판에 이르는 지역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