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8 무자성(無自性)
제법(諸法)을 이해한다면, 모든 법(法)의 자성(自性)은 허공(虛空)과 같이 청정(淸淨)한 것이며, 하나를 아는 것으로 전체(全體)를 알게 되고, 하나를 보는 것으로 전체(全體)를 볼 것이며, 많은 법(法)을 안다고 해도 아는 것에 자만(自慢)하지 않을 것이다.
보특가라(補特伽羅)가 가립(假立)하는 근거(根據)인 오온(五蘊)과 지계(地界) 등의 육계(六界, 地界 水界 火界 風界 空界 識界)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처(六處)를 이름하여 법(法)이라 칭(稱)한다. 이것을 결택(決擇)하는 방법이 많을지라도, 사구(四句)의 생(生)을 부정(否定)하여 제법(諸法)이 무자성(無自性)임을 결택(決擇)하니, 그것을 법무아(法無我)라 한다.
자(自)가 아니면 타(他)도 아니다. 이는 내외(內外) 제법(諸法)의 자생(自生)은 어디에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인(因)과 과(果)가 한 성품(性品)으로 생(生) 함은 자생(自生)이고, 다른 성품(性品)으로 생(生) 함은 타생(他生)에 따른 것이다.
이는 자타(自他)의 개개(個個)에서 생(生)하는 것과 자타(自他)의 공생(共生)에서 생(生)하는 두 가지로 결정(決定)되며, 그 각각은 자생(自生)과 타생(他生) 둘이기에 사구생(四句生)으로 부정(否定)하며, 다른 변(邊)을 제거(除去)하는 도리(道理)가 이러한 것이다.
자연생론자(自然生論者)들은, 연꽃을 누가 애써 만들었는지 보지 못하는 것처럼, 공작도 색깔과 모양을 누가 만들었는지 보지 못하으므로, 모든 사물(事物)의 생성(生成)은 자연적(自然的)으로 생긴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러한 논리(論理)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자연생(自然生)이라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일정(一定)하게 일어난 생(生)은 일체(一體)의 시간(時間)과 장소(場所)에 모두 있거나, 모두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공작의 특별한 색깔이나 모양은 까마귀에게도 있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일생(一生)은 일체(一體)가 생기거나 전혀 생기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과(果)를 얻기 위해 세간(世間) 사람들이 하는 모든 노력은 모두 의미(意味) 없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변(四邊)의 생(生)에 과실(過失)을 보는데 의지하여, 사변(四邊)에서 생기지 않는다는 것(無生)이 성립하니, 이에 일체가 모두 자성(自性)으로 생김이 없으니, 제법(諸法)이 모두 무자성(無自性)인 것에 의지(依支)하여 올바른 이해(理解)를 이룬다.
이와 같이 만일 자성(自性)의 생김(生)을 부정(否定) 함에 의지(依支)하여 모든 사물(事物)의 무자성(無自性)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면, 사물이 아닌 것에서도 무자성(無自性)의 바른 견해(見解)를 얻어 일체법(一體法)의 자성(自性)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중관(中觀)의 견해(見解)를 용이(容易)하게 얻게 된다.
연(緣)에 의지(依支)하여 생기는(生) 모든 것은 그 자성(自性)이 적멸(寂滅)이라고 하였다. 만일 법(法)이 연(緣)에 의지(依支)하여 생긴다면(生), 이러한 분별(分別)은 관찰(觀察)할 수 없으니, 이러한 연기(緣起)의 도리(道理)는 일체(一體)의 악견(惡見)을 끊을 수 있는 그물이라고 하였다.
만일 법(法)에 연기(緣起)가 있다면, 그것은 자재(自在)가 아니다. 일체법(一體法)에 자재(自在)가 없는 까닭으로 모든 것은 무아(無我)요, 무자성(無自性)이다. 자재(自在)가 자성(自性)이 성립(成立)하여 나타나는 것이라면, 모든 식(識) 또한 의지(依支)하지 않고 나타나는 것 또한 성립(成立)한다는 의미(意味)이다.
연기(緣起)에 의한 환(幻)을 번뇌(煩惱)와 청정(淸淨)의 인(因)으로 전도(顚倒)된 것이라 하고, 환(幻)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하는 것도 전도(顚倒)된 것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제법(諸法)에 자성(自性)이 있다고 말함은 연기(緣起)가 없다고 하는 것으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과실(過失)이 된다.
그러므로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이견(二見)을 벗어나고자 한다면, 무자성(無自性)과 청정(淸淨) 번뇌(煩惱)의 연기(緣起)가 환(幻)과 같음을 승인(承認)하여야 한다.
만일 자성(自性)이 있다면, 부처와 성문(聖聞) 제자(弟子)들은 마땅히 같이 보아야 하지만 같이 보지 못하고, 성문(聖聞) 제자(弟子)들은 실상(實相)에 집착(執着)하여 희론(戱論)의 그물을 제거할 수 없는 해탈(解脫)이 없다.
이처럼 아(我)와 아소(我所)에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보고, 그 의의(意義)를 닦으면, 아(我)와 아소(我所)에 집착(執着)하는 신견(身見)을 없앨 수 있다. 이것이 멸제(滅諦)된다면, 욕취(欲聚) 등의 모든 사취(四聚)가 모두 멸제된다.
세간(世間)의 희론(戱論)은 모두 공성(空性)으로 멸제되니, 일체(一體) 법공(法空)을 관찰(觀察)하여 멸제할 수 있다. 만일 희론(戱論)이 아니라면, 경계(境界)에 비리(非理)의 분별(分別)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며, 분별(分別)하지 않는다면, 아(我)와 아소(我所)의 강한 집착(執着)으로부터 신견(身見)을 근본(根本)으로 하는 모든 번뇌(煩惱)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신견(身見)을 근본으로 하는 모든 번뇌취(煩惱聚)가 쌓이지 않는다면, 모든 업(業)을 짓지 않기 때문이요, 업(業)을 짓지 않는다면, 생(生)과 노사(老死)라고 하는 윤회(輪廻)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공성(空性)에 대한 바른 각성(覺醒)만이 일체(一體) 희론(戱論)의 행상(行相)을 멸해 없애주고, 이를 열반(涅槃)이라 한다고 분명(分明)히 말하였다. 이는 공성(空性)의 견해(見解)로 삼유(三有)의 근본(根本)을 끊을 수 있고, 해탈도(解脫道)의 성립(成立)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에 대한 견고한 바른 이해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뇌(煩惱)의 제거(除去)에 만족(滿足)하여 안주(安住)하면, 오랫동안 닦지 않았기 때문에 소지장(所知障)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모든 보살(菩薩)은 번뇌(煩惱)를 제거(除去)하여 생사(生死)를 벗어난 것에 만족(滿足)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소지장(所知障, 인식된 차별 현상에 집착하는 법집에 의하여 일어나 보리를 방해하는 번뇌)을 제거하고, 모든 중생들을 이익(利益)되게 하기 위하여 오랫동안 무변(無邊)의 자량(資糧)으로 광대(廣大)하게 장엄(莊嚴)하고 수행(修行)한다.
소지장(所知障)은 오랫동안 수행한다고 하여 제거할 수 없으며, 광대(廣大)하고 현묘(玄妙)한 수행(妙行)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래서 소지장(所知障)의 방편만 닦는 것은 법무아(法無我)를 깨우쳤다 해도, 구경원만(究竟圓滿)을 수행(修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지장(所知障)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 자성(自性)이 있다고 탐착한 것을 마음의 상속(相續)에 견고(堅固)한 훈습(薰習)을 이루게 하여, 훈습(薰習)의 힘으로 무자성(無自性)을 유자성(有自性)으로 나타내는 이견(二見)의 모든 착란(錯亂)을 의미(意味)한다.
그러므로 소승(小乘)의 아라한(阿羅漢)과 제팔지(第八地) 보살이 오랫동안 이견(二見)의 모든 착란(錯亂)의 습기(習氣)를 남김없이 제거(除去)하여 정화(淨化)하는 것이 바로 성불(成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