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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五 부, 한시비
한국문학사와 한문학
정병욱 교수의 「한국고전시가론」(1977)에 의하면 ‘고전시가의 사적 전개’는 상고시가,향가,별곡, 악장, 시조, 가사,판소리 7장으로 분류하고 있다. 본고의 금석문비에는 상고시가와 악장이 없는 대신 경기체가와 민요가 포함됨으로써 고전문학 읽기의 구색을 갖추고 있다. 정병욱 교수는 시가론에서 한시의 시조화와 시조의 한역화를 언급한다. 고시조 2.500수 가운데 시조의 한역이 170 수라는 것과 한시의 시조화는 70수 정도이나 완전히 대응되는 한시의 시조화는 40수가 된다고 한다. 어쨌든 한시와 고시조 간 경계를 넘나들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일이다.
한시비와 한문학예술비의 경우 한국한문학이 국문학사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장덕순 교수의 「한국문학사」(1981)에는 한국문학사의 시대구분에 많은 할애를 하면서 한국한문학에는 언급이 없고 한국문학연표에는 한문시문학을 포함하고 있다. 김윤식.김현 공저의 「한국문학사」(1973)는 ‘문학이 사회와 그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넓은 정신의 작업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일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었던’ 까닭으로 전통문제와 이식문화, 식민지치하의 문학의 위치, 해방 후의 분단문제 등에 관심을 둔 나머지 한국한문학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고 있다.
다만 조윤제 교수의 「국문학사」,「국문학개론」에는 한국문학을 국문학과 한국한문학으로 분류하였고 백철.이병기 공저의 「국문학전사」(1957)에서는 한국문학사에 한국한문학을 포함시킬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고민의 결과가 부록으로 ‘國漢文學史’를 포함시키고 있는데 일 백여 쪽 분량이다. 한국문학은 우리말 창제 이후의 문학으로 보는 순수한 조선문학과 한문학을 포함하는 광범한 조선문학으로 나누어 진다고 하면서 후자를 택하고 있다. 국문학사의 기술은 시대가 흐를수록 전자의 순수한 한국문학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명확해 보인다. 한시비를 답사하면서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금석문을 답사하는 경우 한문학이 우리 문학의 뿌리이면서도 우리문학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한국의 역사가 그랬듯이 우리의 문학도 반도적 운명에 의해 비극적인가를 생각한다. 그러나 문화란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어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한글문화가 세계로 퍼져나가는 21 세기의 현상도 그러한 것이다. 고대로부터 조상들의 이중적 문자생활은 역사시대의 한 비극이라기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불가피한 문화현상이라고 본다.
1. 고운 최치원崔致遠 한시비
가.위치: 부산 해운대구 동백공원 정상
답사: 1998년 2월 1일 (일)
나. 漢詩碑 머리말
고운 최치원 선생은 우리 나라 한문학의 원조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이름 높은 시인이다. 선생이 끼친 많은 작품 중에서 세상에 널리 퍼진 몇 편의 시를 국역하여 여기에 같이 새겨둔다. 鷺山 李殷相 국역
1) - 봄새벽 -
흘러가는 저 물은 돌아 못오고
봄빛만 사람을 괴롭히누나
애틋한 아침비 부슬거리고
꽃들은 피고맺고 저리 곱구나
난리때라좋은 경치 주인이 없고
뜬 세상 명리도 쓸데 없는 것
아내는 원망스레 소매 붙들고
구태 어이 술잔 자주 못들게 하나
-春曉-
叵(파)耐東流水不廻/只催詩景惱人來/含情朝雨細復細/美艶好花開未開/
亂世風光無主者/浮生名利轉悠哉/思量可恨對伶婦/强勸夫郞疎酒盃
2) - 혼자 사는 중에게 -
솔바람 소리밖엔 다른 소리 들리쟎고
깊숙히 구름밑에 띳하나 매었구나
세상사람 길아는것 웅당도로 원망하리
띠끌묻은 신발가국 바위이끼 더럽히네
- 贈獨居僧 -
除聽松風耳不喧/結弟深倚白雲根/世人知路飜應恨/石上莓笞汚履痕
3) - 어떤 중에게 -
자 중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저 뒷날 내 자취 두고 보게나
한 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
- 贈 山僧 -
僧呼莫道靑山好/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一入靑山更不還
4) - 가야산 홍류동 -
미친 물 바위 치여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할네
행여나 세상시비 귀에 들리까
흐르는 물을시켜 산을 감쌌네
- 伽倻山 紅流洞 -
狂嗩(쇄)疊石呪重巒 /人語難分咫尺間/常恐是非聲到耳/故敎流水盡籠山
‘가야산 홍류동‘한시비는 충남 보령시 개화예술공원에 친필이 새겨져 있다.2019.5.18
5) - 나그넷집 밤비 -
나그넷집 깊은 가을 / 비는 내리고
창아래 공요한 밤/ 차거운 등불
가없다 시름속에/ 낮았노라니
내 정녕 참선하는 / 중이로구나
- 郵亭夜雨 -
旅館窮秋雨/寒窓靜夜燈/自情愁裡坐/眞箇定中僧
6) - 비오는 가을 밤에 -
쓸쓸한 가을 바람/ 애닯은 노래
세상엔 날알아/ 주는 이 없고
깊은 밤 창밖에는/ 비듣는 소리
등불아랜 만리 먼 길/ 외로운 마음
-秋夜雨中 -
秋風惟苦吟/世路少知音/窓外三更雨/燈前萬里心
7) - 생각을 붙여 -
너 부디 이익길엔 생각을 끊고
부모주신 귀한 몸 상치 말아라
어찧다 진주를 캐는 저사람
목숨걸고 바다밑을 들어가는고
몸이 영화 띠끌에 더럽기 쉽고
마음 때는 물로도 씻기 어렵네
누구랑 담담한 맛 의논하리요
사람들은 달고 취함 즐기는 것을
- 寓 興 -
願言扃(경)利門/不使損遺體/윤奈探珠者/輕生入海直/
耳榮塵易染/心垢水難洗/澹泊與誰論/世路嗜甘醴
8) - 접시꽃(蜀葵花) -
거칠은 밭언덕 쓸쓸한 곳에 /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렸네
첫어름 비갤무렵 가벼운 향기/ 보리누름 바람결에 비갠 그림자
수레탄 어느 누가 와서 보리요/ 벌나비만 부질없이 서로 엿보네
본시부터 천한데 태어났기로/ 사람들의 버림받음 참고견디네
寂寞荒田側 繁花厭柔枝 香輕梅雨歇 影帶麥風欹
車馬誰見賞 蜂蝶徒相窺 自慚生賤地 敢恨人棄遺
다. 孤雲 崔致遠 先生 略傳
구름같이 왔다가는 인생이기에 자기 스스로 孤雲이라 字를 짓고 호도 또한 海雲이라 하고서 높은 포부 품은 채 구름같이 오갔으되 구름이 반드시 무심한 것만이 아니라 비를 뿌려 자취를 남김없이 우리 국사상에 시로 학문으로 은혜를 끼쳐놓고 간 이가 계셨으니 그가 바로 新羅말엽의 대시인이요 대학자였던 崔致遠 선생이시다. 憲安王 원년 서기 八五七년에 나서 어버이의 교훈 아래 자라다가 十二세에 唐으로 건너가 十八세에 급제하여 漂水縣尉가 되었으니 新羅國소년으로 만리 타국에서 이런 영예가 또 어디 있을 것이랴. 漂水縣은 江蘇省에 있는 작은 고을이라 녹은 많고 일은 적으므로 한가한 시간을 한껏 이용하여 연구와 저작에 밤낮없이 정진하여 그 동안에 지었던 글들을 모아 中山覆簣集 다섯 권을 만들었으니 中山은 그 곳 땅이요 覆蕢는 학문의 완성을 결심하는 뜻이다. 몇해 뒤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 淮南節度使 高騈에게 諸道行營 兵馬都統을 명하고 그로 하여금 난리를 토벌케 했던 바 선생은 한창 이름을 얻은 때라 二十四 세로써 그의 從事官이 되어 이듬해에 黃巢를 치는 격문을 지었는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여야한다고 할뿐만 아니라 저 땅 밑에 있는 귀신들까지도 이미 너를 죽이기로 의논했으리’
黃巢는 이 구절에 이르러 자기도 모르게 상에서 떨어졌던 것이다. 이라비아 기록에 의하면 황소가 반란을 일으킨 곳은 廣東지대요 거기서 回回敎인 基督敎人 猶太人 波斯人들 十萬여명이 죽었는데 그때 그 곳에는 우리 신라의 사람들도 많이 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더욱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실감있는 글을 썼던 것이다. 이 글로서 선생의 이름은 높이 떨쳤고 兵馬都統 高騈의 주청으로 벼슬이 올라 都統巡官承務郞侍御史 內供奉으로 승차되는 한편 二十六세 때에는 당나라황제로부터 紫金魚袋의 하사를 받았는데 그것은 붉은 금빛으로 꾸민 물고기 모양의 그림을 그린 주머니요 그 속에는 성명을 적은 표신이 있어 대궐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이라 외국 청년에게는 더 할 수 없는 영광이므로 시를 지어 감사했었다. 선생은 兵馬都統 高騈의 밑에서 종사官으로 있은지 어느덧 四年 二十八세에 본국으로 돌아오려고 僖宗황제에게 장계를 올렸던 바 황제는 특히 唐의 국서를 가져가는 사신의 자격을 띄게해 주었고 高騈은 二百貫이나 되는 돈과 여러 가지 行狀을 갖추어 주었으며 또 당나라 군사들로 顧雲 揚瞻 吳巒 등은 석별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顧雲은 같은 해에 급제하여 친교가 가장 두터운 친구요 또 특히 선생을 高騈에게 추천한 사람으로서 이런 시를 써 주었다.
‘鷄林나라 三神山 맑은 정기로 태어난 기이한 사람. 十二 세에 배타고 바다 건너와 글로써 中原천지 흔들었고 十八 세에 과거 마당 들어가 대번에 급제 한 장 따낸 이라네.’
선생은 본국사신 金仁圭와 집소식을 가져왔던 아우 栖遠과 함께 많은 사람의 작별을 받고 淮南을 떠나 금의 환향의 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바다를 건너지 못해 부득이 지체하게 되어 실상은 그립던 고국에 도착한 것이 二十九세 되던 해 三월이었다. 憲康王은 侍讀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의 요직을 주었고 선생도 즐거이 나아가 나라를 위한 자기의 포부를 펴보려 했으며 또 한편 당에서 지었던 글들을 묶어 桂苑筆耕이란 이름을 붙이고 그것과 시집 三책을 합하여 위에 올리니 귀국한 다음해의 일인데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작이요 높이 평가받는 책이다. 그러나 높은 학문과 포부를 가졌기 때문에 시기 질투가 시작되어 조정의 인 누구나 모두 다 선생의 일동일정을 눈주어 보며 방해를 일삼기 때문에 가슴은 품었던 이상과 포부는 사라져 갔고 나라를 위한 모든 경륜조차 하나도 실시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더구나 귀국한 뒤에 憲康王 定康王이 이어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眞聖女王이 들어서면서부터는 나라 안의 정세가 더욱 어려워져 조정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모략을 도저히 막아내는 도리가 없어 마침내 지방관이 되어 시골로 내려가 太山郡 지금의 全北 泰仁郡과 天嶺郡 지금 慶南 咸陽郡 그리고 富城群 지금 忠南 瑞山群으로 太守가 되어 나가 지방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에 힘쓰기도 했으나 선생으로서는 쇠망해가는 국운과 함께 한탄스런 날을 보낸 것이다. 다시 몇 해 뒤에 甄萱이 따로 나라를 세우니 三十六세때 일인데 선생은 비록 나라의 혼란 속에서 버림받은 사람처럼 되었건마는 그같이 어지럽기 때문에 나라걱정 하는 마음을 더욱 버리지 못해 眞聖女王 八년 三十七세 되던 해에 정치의 급선무 十조를 써올려 여왕도 칭찬하며 新羅의 작위 중 제 六위에 가는 阿湌을 내려주니 그것은 眞骨이외의 평민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작위였다. 그리자 四十四세 때에는 弓裔가 또 일어나 딴 나라를 세웟거니와 이같이 혼란하니 학문이 쓸 곳 없고 인심조차 갈수록 험악하므로 마침내 벼슬을 던져버리고 막대를 벗삼아 방랑의 길을 떠났었다. 일찍이 太守를 지낸 嶺南 湖南 여러 고을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 慶州의 金鰲山과 陜川의 淸凉寺와 剛州 지금 慶北 義城의 氷山과 智異山 雙溪寺와 東萊 海雲臺와 合浦 지금 馬山에 있는 月影臺와 梁山의 臨鏡臺 외 咸陽의 學士樓가 모두 다 발자국 끼친 유적지요 도 특히 慶北 安東 淸凉山에는 致遠峰이라 이름한 곳이 있으며 그 곳 바윗굴 속에 어떤 노파의 모습을 새겨 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생에게 밥을 지어 바치던 식모였다고 전해 왔었다. 이같이 여기 저기 바람과 구름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다니며 어느 때는 우거진 숲속을 찾아 들어가 나무를 찍어 정자를 매고 또 어느 때는 흐르는 강기슭에 집을 짓고 화초들을 심기도 하며 그 속에서 시 읊고 생각하고 책 베고 잠자며 날을 보냈던 것이다. 선생이 만년에 鷄林에는 잎이 누르고 鵠嶺에는 솔이 푸르다하여 새로 일어나는 高麗太祖에게 축하의 글을 써 올렸다고 전하지마는 그것은 어느 점으로나 뒷사람들이 만들어낸 믿을 수 없는 말이니
첫째, 신라에서 벼슬한 분으로 가볍게 배반할 그런 인격이 아니며 또 이미 세상을 저버린 이가 왜 정치에 간여하였겠는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高麗 顯宗 때에 선생에게 文昌侯의 시호를 내렸던 것도 그가 유학의 최고봉이요 또 문학의 시조라 존경하여 한 것이리라. 선생의 鸞郞碑 서문은 花郞의 내용을 알려준 보배로운 기록이요 眞鑑禪師 白月和尙 智澄大師의 비문 및 華嚴經結社文 등 명문들은 그 학문이 과연 얼마나 깊었던가를 증거해 보이고도 남음이 있다. 선생이 최후에는 처자를 이끌고 伽倻山 밑으로 집을 옮겨 들어가 친형으로 중이된 賢俊과 定玄法師와 함께 수도하는 벗을 삼고서 海印寺에서 은거하며 지내다가 어느 날 아침 문밖으로 나가더니 숲속에 갓과 신만 끼쳐 있을 뿐 아무도 그의 자취를 찾지 못하여 책마다 신선되어 갔다고 적었으므로 나도 여기 그대로 적어둔다.
孤雲子 육신의 뒷소식은 세상에 아는 이 하나 없어도 그 이름 학문 예술 겨레의 가슴가슴에 자리 잡고 해 달과 산과 바다와 함께 자손만대에 길이 살리라.
一九七一년 三월 일 / 후학 李殷相 글 / 金忠顯 씀
다. 경남 하동의 한시비
1)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원
2) ‘입산시 入山詩’
僧乎莫道靑山好 山好如何更山出 試看他日吳蹤迹 一入靑山更不還
스님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라
산이 좋을진대 어찌 산을 나서는가
훗날 내 자취를 두고 보시오
한 번 청산이 들면 다시 나오지 않으리니
3) 최치원 (857-?)
본은 경주 호는 孤雲이다 당나라에서 격황소서로 천하의 名文을 지어 떨쳤으나 고국 신라에서는 골품제 신분의 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화개동천 세이암에서 세속에 더렵혀진 귀를 씻고 임산, 그 후, 종적은 알 길이 없다. 청학을 타고 노니는 선생을 봤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위 시는 선생이 지리산으로 입산을 앞두고 그 심경 혹은 각오를 다진 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4) 건립 : 2009년 12월 21일
2. 고려 대각국사 <효대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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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義天의 ‘孝臺詩碑’는 필자가 취재한 것이 아니다. 4월 28일(일) 아내가 전남 구례 화엄사로 동창회 야유회를 간다기에 행여 시비가 있거든 살펴 보라 흘러가는 말로 했는데 대각국사의 효대 시비를 찍어 온 것이다. 버스는 떠나려하고 사진은 인화가 되지 않아 기다렸다가 한 장에 오 천원을 주고 인화지 물이 흐르는 사진 한 장을 쥐고 버스에 올랐다는 말을 들었다. 孝臺詩碑 사진은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다.
취재,1996년 4월 28일(일), 전남 구례 화엄사 경내.
나.시비
寂滅堂前多勝景 吉祥峰上絶滅俟 彷徨盡日思前事 薄昏悲風起孝臺(적멸당 앞에는 경치도 빼어나고/길상봉 높은 봉우리 티끌도 끊겼네/진종일 방황하며 지난 일 생각하니/저믄 날 가을 바람 효대에 감도네/
다. 비음
대각국사(1055-1101) 의천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11세에 靈通寺에서 낙잠(落簪 - 낙발)하고 31세에 송에 건너가 화엄사 천태 등 중국불교를 두루 살피고 돌아와 천태종을 일으켰다. 고려 선종 11년 (1094) 남쪽지방을 순례 중 화엄사에 머물면서 이 곳 효대에 올라 읊은 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불기 2535년 서기 1991년 12월/ 화엄사 주지 최종원 /구례군수 윤관중/ 글씨 寯亭 이돈흥
3. 고려 이인로 시비
가. 섬진강 낙조 蟾津江落照
이인로
草屋半依乘柳岸 초옥반의승류안
板橋橫斷白繽汀 판교횡단백빈정
日斜愈覺江山勝 일사유각강산승
萬頃紅浮數點靑 만경홍부수점청
초가집들은 강가 버들 숲에 반쯤 숨었고
나무다리 건너니 희고 마른 풀들 우겨지고
해가 기울어 강산의 경치 한결 뛰어나
한없이 넓고 붉은 물결위에 두어 점 푸르구나
나. 李仁老 (1151 - 1220)
본은 경원(인천) 자는 미수眉叟 호는 쌍명재雙明齋, 고려 중기의 문신으로 詩文뿐만 아니라 글씨ㅣ에도 능해 草書 隸書가 특출하다. 그의 말년에 섬진강을 유람하고 남긴 시가 그의 저서 <파한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선생이 섬진강의 낙조를 바라보며 지은 작품으로 그 문학적 가치가 탁월한 名詩이다.
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원
시: 이인로, 서 : 野井 朴炳和 조각 : 한상엽 건립 : 2009년 12월 21일
4. 일연 一然 시비
1) 비음
일연 선사는 1206년 경주 김 씨 문중에서 태어나 이름은 견명 자는 회연이다. 1215년 9세에 출가하여 목우의 법사가 되었고 1283년 (77세) 국존이 되어 왕의 공경을 받았으나 효성 깊은 그는 서울의 화려한 생활을 사양하고 시골로 돌아가 노모를 시봉하였다. 1288년 인각사로 돌아와 구산문도회를 여니 그 성과는 고금에 드믈었다. 1289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4요 법문에 든 지 71년이었다. 일년은 생전에 해양,지넌,퍼산,남해,운제,청도,경주,빙산 등 각처의 절에 두루 머물고 온 나라 간산을 널리 돌아 견문을 넓혔고 평생에 대장경 읽기를 두 차례 대가의 장소를 깊이 탐구하는 한편 유가를 섭렵하여 백가를 꿰었던 그는 백 여권의 저술을 남겼던 바 어록 계송 잡저, 조동오위,조도,대장수지록,제승법수,조검사원,선문염송사원 등이었다.
이외에 삼국사기에 빠진 고대역사와 문학을 오늘에 전하는 삼국유사(1285년 ,78세)는 문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이다. 일연이 가신 지 칠백년 그의 빛나는 업적을 기릭는 후학들의 성금을 모아 황패강 권영철 신동욱이 이 일을 주관하고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군위군의 협찬을 받아 이 비를 세운다.
효성여대 권영철은 글을 짓고 김동욱 쓰다/ 인각사주지 박순태
2)
快適須臾意已閑 暗從愁裏老蒼顔 不須更待簧梁熟 方悟勞生一夢間
(즐겁던 한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한 끼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
三國遺事 卷二 洛山二大聖 觀音正趣 調信條/黃浿江 번역하고 沈載完 쓰다/1985년 12월 8일 /
3) 인각사 보각국사탑과 비
보물 제 4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인각사 보국국사탑 및 비는 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소재로 되어 있다. ‘ 이 탑과 비는 고려 제25대 충열왕 15년(1289)에 입적한 보각국사 一然의 부도탑(浮屠塔)과 그 탑신이다. 자연석으로 짜여진 地臺石 위에 팔각 하대석이 놓여 있는데 상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대석에는 동물상이 조각되어 있다. 상대석도 팔각이나 원형에 가까워졌고 주위에는 연꽃 팔엽(八葉)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도 팔각인데 정면에는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이란 탑명이 있고 후면에는 門扉형이 있으며 남은 육면에는 사천왕입상과 연관 위에 보살입상이 양각되어 있다.
이 탑은 원래 인각사에서 동쪽으로 2 킬로미터 지점에 세워졌던 것이나 도굴배의 만행으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62년에 이 곳으로 옮겨 보물로 지정되게 되었다. 탑비(塔碑)는 점판암(粘板岩)으로 조성되었는데 행간을 몹시 음각으로 구획하고 명문(銘文)을 각자하였다. 현재 몹시 파손되어 있으나 이 비문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월정사에 사본이 있어알 수 있다. 이에 의하여 고려 충열왕 21년(1295)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4) 인각사지
인각사지는 사적 제 3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각사지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뒤 고려 충열왕 10년 (1284)에 중수되었고 조선 숙종 25년(1699)에 증축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 일연 스님이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이 곳에 옮겨 거쳐하면서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한 바 있었고 또 삼국유사를 여기에서 저술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중국 진대의 명필인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보각국사비 및 탑’(보물 428호)이 있으며 극락전과 명부전, 강설루(講說樓), 요사(寮舍) 등의 건물이 있고 석불상과 부도 등이 있다.
5) 여담
오늘은 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일연선사의 시비를 찾기로 한 것이다. 일찍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유는 오늘이 아내의 가짜 생일날이기 때문이다.가짜 생일이란 원래 정월 삼일이 생일인데 행사를 하고 축하하기에는 새해와 겹쳐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에서 호적등재일인 4월 20일로 한다는 것인데 그것을 가짜 생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마침 서울에서 장남이 오고 아이들이 이 날을 위해 준비를 하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려는 것이다. 북부정류장에서 한 시간 남짓 가니 군위읍에 도착할 수 있다. 군위중고교에 들러 물으니 모 여 선생이 인각사 입구에 비가 있는데 여기서는 우보행 또는 고로행 버스를 타고 가라한다. 그도 물어물어 나에게 전하는 터였다. 버스가 하루 두 번 있다 한다. 이 날 날씨는 몹시 더웠다. 족히 십여 명에게 일연스님의 비가 있는 곳을 물은 것이다. 지도상 위치는 구위군과 영천군의 경계선상에 놓여 있는 것이다. 하양,동강,신녕,집실을 거쳐야 하는 곳이다. 이튿날 사이가 틀어진 안 사람에게 인각사 가는 것이 어떻겠는냐고 물으니 마지못해 가자한다. 일찍 퇴근하여 헐레벌떡 준비를 하여 아내와 의논을 한 것이다.지도를 본 아내는 하양,신녕보다는 팔공산 제2석굴암으로 가는 것이 지름길이라고 한다.
팔공산 송림사,한티고개,제2석굴암을 넘어 창평에 이르러 길을 물었다. 아내는 창평파출소로 필자는 인근가게로 갔다.삼거리에서 좌회전 봉림, 화북을 찾아가라 한다.철교를 지나서 화북 2리,화북 1리를 지나 멀리보니 노변에 절 하나가 보인다. ‘卍인각사’ 푯말이 보이고 낡은 사찰 전경이 눈앞에 펼쳐진다.일연선사의 시비가 입구 쪽에 있는 부도와 함께 나란히 서 있어 반가움이 더한다. ‘수고로운 인간사 꿈결인 줄 내 인제 알았노라’(方悟勞生 一夢間)라는 시비의 끝 구절을 외면서 경내 극락전에 들러 삼배를 올렸다. 인각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세운 사찰로 고려 충렬왕 조선조 숙종 때 증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전체적인 인상은 매우 노후한 절이라는 인상이다. 필자가 기록들을 노트에 적고 사진을 찍는 등 오랜 시간을 거기서 허비했으나 누구도 내다보는 이 없다. 강설루 왼켠 끝으로 앉은 방 앞에 검은 고무신 한 켤레 달랑 놓여 있는데 문 위에는 <수도중>이라는 쪽지 하나가 붙어 있다. 팔십 노구에 삼국유사를 완성했다는 일연선사가 기거하신 이 곳, 절은 노후하여 쓰러질 듯 기둥이 건물을 버티어낼 수 있을까 하는 느낌마저 주는 분위기였다. 일연선사의 시비는 황패강 박사가 번역하고 심재완 교수가 쓴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군위 한밤마을 냇가에서 정원석 몇 개를 골라 뒷 트렁크에 실었다. 그래도 해가 아직 머리 위에 있다. 삼국유사를 재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날 군위읍에서 헛걸음한 덕택으로 오늘 일은 가볍게 처리된 셈이다. 창평 파출소장의 말처럼 인각사를 찾아볼 필요가 없는지도 모른다. 거기엔 볼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왜 볼 것이 없겠는가. 지난 날 역사를 모르고도 잘 살 수 있다는 우리의 현실, 버려진 역사를 찾지 않는 우리들 한국인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가. 스포츠,과학,경제도약 뭐 그런 것이던가. 앞만 보고 가려는 의식에서인지 인각사는 너무도 관심 밖으로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인각사 옆으로 확 트인 이차선 도로는 나 있고 사방은 산으로 에워져 있다. 길 아래 넓은 강이 흐르고 있다. 황톳물이지만 수량이 넉넉하고 아늑한 곳으로 근처 어디를 택하던 음택의 명당일 것이라 생각이 드는 군위군 고로면 화북 1 리에 있는 인각사다. 불자의 이름을 새기는 기왓장을 접수한다는 광고로 보아 곧 증축을 계획하고 있는 듯 하나 출입문의 기둥과 기왓장의 무게를 생각하면 언제 바람 하나에 넘어질지 보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한다. 일연 선사가신 지 어언 710여 년, 선사 가신 뒷 자취가 왜 이리도 서글픈지 트인 들판을 바라보았다. 저녁 햇빛은 아직 따갑다. 일행이 열린 법당을 나온 후 어떤 인적도 보이지 않는 인각사 오후는 정체없는 바람만 일고 멀리 산들만 멀거니 곡선으로 이어져 한가롭기만 한 것이다. 햇빛을 등에 업고 혹시나 빠질세라 섯터를 누른 후에야 인각사 경내의 고저늑한 분위기를 알아차린 것이다.
5. 남원 廣寒樓와 광한루의 시
가. 광한루의 연혁(廣寒樓沼革碑)
광한루는 麗朝 명종 殿中監 黃公有의 세거지로 후손 鑑平이 학당을 짓고 호를 逸齋라 하고 이조 태종년 간에 방촌(庬村) 黃 喜가 개수하여 廣通樓라 扁名하더니 미구에 쇠폐하여 세종 16년에 부사 민여공(閔汝𦷧)이 고쳐 짓고 동 19년에 부사 류지례가 단청하여 면모 일신하니 동 26년에 상국 정인지가 그 이름을 광한루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선조15년 송강 정 철이 전라감사로 도임하여 부사 장의국으로 하여금 경내를 정리하게 하고 누 앞에 요천수(蓼川水)를 끌어다가 못을 파서 銀河를 만들고 호중에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 三神山을 상징한 섬을 짓고 오작교를 걸고 上漢槎를 띄워 선경을 모방한 전정을 축조하였다. 그후 인조 4년에 신 감(申鑑)이 구제를 좇아 중건한 것이 현존의 건물이다. 이 광한루를 배경으로 민족문학을 춘향전이 저작되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이상의 내용은 廣寒樓沼革碑의 내용이다
어쨌든, 남원의 광한루를 찾는 사람들에게 춘향전의 고전적인 풍류를 어떤 형태로든 전달해주려는 자취가 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우선 광한루란 이름은 어디서 온 것일까, 춘향정이 왜 여기서 이루진 것일까 초등학생류의 물음일까. 광한루에는 역대시인 풍류객의 시와 記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시력이 나쁜 사람은 읽어낼 수 가 없는 곳이다. 올라갈 수도 없는 곳이지만. 그러나 黃守身의 <광한루기>와 申 欽의 <광한루기>, 洪錫箕의 <광한루시서> 등을 부족한 대로 참고할 수 있다. 그리고 관리사무소 계장과 직원의 호의로 용성지편, 광한루예찬시선 등을 얻을 수 있었다. 광한루에 관련된 누대지가 있으나 결함이 있어서 책자를 회수하였고 따라서 외부 유출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얼른 보니 모 시인이 번역한 것인데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남원의 광한루는 무주의 寒風樓,전주의 寒劈樓와 더불어 호남 三寒의 하나로 치고 있다.<광한루기>를 쓴 좌익공신 황수신은 ‘남원을 옛날에는 帶方이라 불렀는데 산천이 수려하고 기름진 땅이 백리에 걸쳐 있어 참으로 하늘이 준 마을의 땅이요 어떤 고을이든지 이에 미칠 바가 못된다’고 서두에서 말하고 있다. 당태종이 劉仁軌를 대방주 자사로 삼았고 남원은 대도호부라 불리어왔다는 것이다. 황수신의 원조(遠祖) 공유는 원래 장수현 사람이었으나 고려 이의방과 다툼이 있어 가족을 이끌고 남원으로 왔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공유,감평(일재), 君瑞, 一喜 ,守身 대에 이르게 되었다고 계보를 밝히고 있다. .
이미 광한루라는 이름은 하동부원군 정인지에 의해 불리어졌다는 언급을 한 바 있는데, 정인지는 갑인년에 부사 민여공이 주변을 고치고 누각을 일으켰으며 정사년에 류지례가 붉은 벽을 붙인 것으로 정인지가 그 수려함에 감탄해 전설상의 달나라 궁궐인 ‘廣寒淸虛府와 닮았다고 하여 광한루라 고쳐 불렀다 한다. 광한루는 남원부에서 二里 떨어져 있는데 동에는 仙山이 있어 돌이 벽돌처럼 천여 리 깔려 있어 기괴한 모양을 하니 ’구류‘라 하고,남에는 내가 있어 蓼川,서는 들판인데 밤나무를 많이 심어 율수(栗藪)라 하고 북에는 옹골산이 있다.성을 굳게 쌓아 임란시에도 보존되어 있어 교룡이라 한다. 만복사는 남원의 서쪽에 있어 ’만복사저포기‘의 배경이 된다.
‘광한’이라는 이름은 이 곳에서 바라본 정경이 太虛같이 광대무변한 아름다운 정경을,‘寒’은 백성에게 교만과 사치를 막아 청빈함을 숭상케 하고 관리들에게는 잘못을 책하고 경계하여 ‘뼈에 사무치게 한다’는 의미의 寒이 아니가 한다. 덧붙여 ‘廣寒’은 중국 사전에서는 월중궁전명(月中 宮殿名)이다. [개원천보유사(開元天寶遺事)]에 말하기를, 당나라 明皇이 월궁에서 놀았는데 天府에 보니 옆에 ‘광한청허부’라 써놓았다. 상아(常娥 또는 素娥) 선녀 십여 인이 흰옷을 입고 神鳥를 타고 桂樹城 아래에서 춤을 춘다‘는 대목이 있다. 조선의 광한루를 보면서 중화의 전설을 차용한 정서적인 결핍은 비판받아야할 일이지만 중화의 사유와 인식세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당시의 상위계층 사람들이 천상계와 지상계를 넘나들었던 상상적 발상을 볼 수 있다. 지금의 玩月亭은 그들 옛 풍류의 자취로 남아 있다.
황수신이 임금의 각별한 베풂에 감지덕지 한다는 내용과 시 한 수가 있다.신흠의 광한루기를 기대했으나 영인되지 않아 그 내용이 궁금하다. 다만, 황수신의 광한루시서를 쓴 홍석기는 광한루 북쪽에 교룡성(세의 장려함이 교룡과 같다)이 있다 했는데 신 흠은 서쪽에 있다 하였다.
나. 광한루 시
1) 홍석기는 <광한루예찬서시>에서
용성의 남쪽 시냇가에 광한루가 있는데
누 아래 날아가듯 다리 하나 그 아래 푸른 물이 흐른다
은하수 역시 하늘 위에 있는 것이 아니로세
월궁이 도리어 세간에 있지 아니한가
.....................
2) .광한루에 올라 (登樓) - 白江 李敬輿
은하가 밤에 광한루를 차게 하니,
오작교 가까이 북두와 견우가 가로 놓여 있구나
천상인간에 물색을 아름답게 구며 보이고
계수나무 궁궐에 달을 천 년이나 붙잡아 머무르게 하였구나
`星河夜冷廣寒樓 烏鵲橋橫近斗牛 天上人間令物色 桂宮留得月千秋
3) 은하 농명월 - 송강 정 철
넓고 길게 뻗혀 있는 은하수는 밝은 달을 희롱하고
언덕에 심어진 대나무는 밝은 바람을 이끌어 오는구나
일 년에 한번 이곳 남녘을 순행하며 백성을 어루만질 적에
다만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만 있었다네
恢拓銀河弄明月 栽培塢竹挹淸風 一年南國巡宣化 只在淸風明月中
4) 廣寒樓 - 滄浪 張澤相
누각 위의 옛 정든이는 어디로 가고
복사꽃과 흐르는 물만 사람들을 애닯게 하네.
오작교 위에 비친 무심한 저 달빛은
인간에게 비추기를 그 몇 백 년이던가
樓上佳人不在樓 桃花流水使人愁 無心烏鵲橋頭月 來昭人間幾百愁
5) 남원 광한루에서(本無題) - 손곡 이 달
맑은 시냇가엔 비가 온 뒤
작은 물결이 일어나고 수양버들 어둑어둑
강 언덕에 비껴 서 있네.
남으로 가는 길에서 한 동이 술로
모름지기 취해 버렸는데,
삼월의 동녘바람
벌써 많이 없어졌구나.
헤어지는 골목 곳곳마다
왕손의 봄풀은 푸르고
마을거리 집집마다
탱자꽃이 가득 피었네.
하늘끝가지 흘러와서
나그네가 된지 벌써 오래이지만,
한밤중의 고향 노래만은
차마 듣기 어려워라.
淸溪雨後起微波 楊柳陰陰水岸斜 南陌一罇須盡醉 東風三月已無多 離程處處王孫草 門巷家家枳穀花 流落天涯爲客久 不堪中夜聽吳歌
이 밖에 滄浪 張澤相의 <광한루> 1 수, 佔畢齊 <一派銀漢>, 관찰사 李玄紀의 <次伯氏韻>, 判書 李殷相의 <登樓>, 李敬義의 <登樓>, 강주보,이건상의 시 등이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忠魂不滅’의 휘호, 자라돌(鼈石)이 있다. 한서에 발해에 有大鼈하야 背負三山이라는 구절이 있다.이를 연상해서 호중에 삼신산을 선조 15년(1579) 관찰사 송강 정 철이 만든 뒤 이 고장에 재난이 자주 일어나게 되자 자라돌을 만들어 삼신산을 지켜보게 한 뒤부터 재난이 없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한다. 남원 지방의 비림이 있고 열녀춘향사가 있다.오작교는 물론 월매의 집도 있다. 향단이 부엌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장면이 보인다.
다. 춘향사기(春香祠記)
古來로 그 자취가 烈行한 사람이 많으나 춘향과 같이 고난과 기이한 운명을 격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妓家의 한 처녀로서 우연히 관아의 귀공자와 만났으나 처음부터 능히 예로써 보고 만날 수 없었음이 형세였다. 비록 폭관의 위협과 압박에도 끝내 의로서 스스로를 지켰으며 말로 위협하고 공포심을 주고 중형으로 핍박하여도 추호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고 곧음이 죽지 않았다. 이는 어찌 용렬한 성품과 평범한 마음으로 가히 바꿀 수 있는 바이리오. 또한 죄로 인한 신음(누絏呻吟, 죄로 인한 신음)과 고운 미모가 망가지는(玉碎花飛) 경우는 늘 당하는 아침저녁의 일이었으나 홀연 부군이 벼슬을 얻어 (救壁終完) 돌아온 바 되어 다시 만나니 어찌 하늘이 춘향의 지성에 감동하여 특별한 천우신조가 있음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문인재사가 이런 사실을 서술하여 이름을 전하고 이름난 기녀들은 노래로 부르고 여항의 부녀들은 이야기하게 되는 등 모든 사람들이 두루 듣고 그 환상적인 세계에 젖거나 혹은 슬픔이 극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 기뻐서 일어나 춤을 추는 자 있어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바 이와 같은 즉 춘향의 이름은 장차 백세 불망의 이름이 될 것이다.
신미 맹하/ 學圃 金瑞圭 記/춘강 정석모 서/
6. 경주 남산 용장골(茸長谷)의 신라문화
가. 남산 용장골
1) 금호신화의 저자 김시습의 자취
이 곳은 용장골의 정수리인데 여기서부터 아래쪽 산자락이 용장계곡이다.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를 이룬 이 계곡에는 큰 바위들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집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 곳에서 아래로 400미터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용장사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상이 자리하고 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大賢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雪岑) 스님(매월당 김시습)이 우리 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金鰲新話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대현 스님이 삼륜대좌불을 돌며 염불을 하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그 뒤쪽 바위에 세겨진 마애여래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1997년 (불기 2541년) 6월 29일 신라문화원이 세우다.
2) 향가의 시인 충담사와 三花嶺
이보다 용장골에는 三花嶺의 바위가 하늘벽을 쌓고 있다. 그러나 군데군데 산불이 나서 탄 흔적이 남아 있고 불독인상의 바위들이 웅크린 자세로 산을 지키고 있어 무거운 느낌을 주고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 삼화령은 눈으로는 남아 있는 자취를 볼 수 없으나 신라 향가가 들리는 듯 하여 조심스레 걷는 것이다.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頂)는 높은 곳을 의미하고, 세 곳 수리는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와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선덕여왕 시절 生義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 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스님은 나를 파내어 시원한 곳에 있게 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 날 그 곳에 가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 스님은 땅 속을 파 돌미륵불을 얻어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 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경덕왕때 향가, 안민가와 찬기파랑가를 지은 충담(忠談) 스님이 해마다 삼월 삼일,구월 구일에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있는데 바로 그 부처님으로 짐작된다.
지금 미륵불은 없어지고 다만 지름 2센티의 연화대좌만이 남아 있다. 순환으로 아래쪽에 절터가 남아 있으니 그 곳이 생의사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력은 절터 옆에 서 있던 비석에 있으련만 이제 비석은 사라지고 비석받침만이 역사의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1997년 6월 29일 부처님 마을이 세우다
3) 신라의 불교문화 자취
㉮ 용장사곡에는 보물 제187호의 용장사곡 불상이 있다. 이 석불좌상은 용장사터를 내려다 보는 가까운 곳에 있는 8세기 중엽의 불상이다. 현재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다. 목에는 세 줄의 뚜렷한 三道가 있고 옷깃은 오른쪽 어개가 들어나게한 右肩偏袒으로 옷자락은 맨 윗단의 대좌부까지 흘러내리듯 표현하였다. 왼손에는 보주를 얹고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특히 불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다른 불상대좌에서 볼 수 없는 중첩된 圓形臺座를 하고 있는 점이다. 맨 아래에 자연적 기단부 위에 대좌받침과 원형대좌를 교대로하여 삼층으로 중첩되게 만들었으며 맨 윗단의 둥근 원형대좌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 그외 용장사곡에는 신라 후대로 추증되는 삼층석탑이 있으니 보물 제 1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탑은 하층기단을 생략하고 암석에 높이 6미터의 괴임 한단을 직접마련하여 삼층기단 中石을 받게 하였다. 相輪部는 전부 업어져 그 원래의 상태를 알 수 없고 다만 옥개석 頂部에 擦柱孔만이 남아 있다. 각부의 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어 장관을 이루는 수법과 양식에서 新羅下代에 속하는 대표적인 석탑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애여래좌상은 8세기 후반의 우수한 작품이다. 석불좌상 뒷면 바위 벽에 새겨진 이 마애불은 연화좌 위에결가부좌의 앉은 자세로 이중으로 새긴 두광과 신광을 갖고 있다. 머리는 곱슬머리에 상투가 뚜렷하고 얼굴은 원만 온화하다.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세줄의 삼도가 뚜렷하다. 법의는 양어깨를 걸쳐버린 通肩이면서 평행선으로 된 잔잔한 옷무늬가 印度佛像을 생각게 한다. 양손의 손 모습은 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여래좌상의 신광 왼쪽에는 불상을 만들 때 글씨가 10여 자 새겨져 있으나 현재 읽어보기 힘들다.
이상의 신라불교문화 유적은 용장계곡 하나에 모여 있으며 용장사터와 삼층석탑 불상 등이 밑에서 보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삼층석탑은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위치의 주소는 경북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로 되어 있다.필자가 찾은 것은 1999년 9월이라 한 여름이 지나가고 하늘은 맑아 산세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었다.
나.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
1) 답사 일시 : 1998년 7월 24일
2) 경주 남산의 불교문화
필자가 역사에 어둡다는 것은 스스로 아는 바이다. 경주 남산(금오산)에 마애불조각과 사지 석탑 석등 불상태자 귀부비석태 석불 부도 석조물 성지 창지 등 324점이 이 있다는 것은 초문이다. 초문이라기보다 신문을 통해서 읽은 적이 있으나 무관심했던 것이 오늘의 나를 무식쟁이로 만든 것이다. 안내도에 보면 통일전 안내와는 달리 (안내판은 유적물 중심으로 된 것임)계곡을 36계곡으로 나누어 유적을 분류해 놓아 서안상에서 보기는 훌륭한 것이나 현지 답사에는 통일전 안내가 좋은 것이었다.
1998년 7월 24일 경주 모 대학에서 연수회가 있는 날이다. 전 날 성주 백운동 伽倻山 입구 솔밭장여관에서 밤을 세워 논 탓인지 맑은 정신은 아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와 동부정류장엘 대니 자리가 꼭 하나 비어 있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고속버스비는 2600원, 경주시외터미널에 도착한 것이다. 40번 경주 시내버스를 타고 경대교를 지나 캠퍼스에 이르러 <IMF시대와 생활의 지혜>특강을 들었다. 경제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행복해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는데 줄서기 1 시간여를 기다리게 하여 지치게 했다. 선진화 따로 현실 따로 라는 실상을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겉보기 큰 행사는 치밀하게 잘하면서 보이지 않는 작은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우리 문화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권위의식에 젖어 있는 병폐를 불식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경주 시내로 나와 10번 버스를 타고 남산을 향한 것이다. 버스가 남산을 지나는 데도 내리지 않으니 기사가 큰 소리로 일깨워주는 것이다.
길에서 건너다 보이는 산이 푸른 골을 이루면서 흐르는 듯 앉아 있는데도 그 산이 금오산(466) 지금의 남산일 줄 모르고 걷기만 하였다. 넓은 들판이 파란색 하나로 찰해놓은 것 같은 칠월의 들판을 욕심없이 바라보며 배설을 하였다. 1977년에 기공 1년여만에 완공한 통일교 44미터를 지나면서 여느 도시교외와 달리 잘 짜여진 도시규모와 깨끗하게 정비된 도시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관광도시라는 명분에 관심을 둔다면 알맞은 안내판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자주 갖게되는 것이다. 저만치 머리가 쇤 한 노인(?)이 있어 경운기를 운전하는데 유턴하려는 몸짓을 읽지 못한 채, 南山이 어디 있는냐고 물었더니 처음엔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물으니 큰 소리로 대답을 하는데 “저기 앞에 보이는 산 전부가 남산이고 옛날의 금오산, 이 동네는 남산동이요 ...” 목소리에는 심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머리는 희게 쇠였으나 성깔이 만만치 않아보이는 노인의 대답은 남산에 와서 남산을 찾는냐는 나무람이었다. 다시 묻기를 남산에는 불상,마애석불 등이 많다는데 하니, 부랑은 산 전체에 깔려 있다면서 약도를 가지고 가야지 그냥 가서는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 東峰 金時習의 <금오신화>를 조선 최초의 소설로 꼽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 <금오신화>의 배경인 金鰲山을 이순에 이르러 그 현장을 찾았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부끄러운 마음이다. 국문학이란 광맥이 한 없이 넓고 크고 깊은 무량대수임을 다시 깨닫는다. 남산이란 불교유적지가 매월당 김시습(호는 東峰,淸寒子,贅世翁, 淸隱, 법명은 雪岑)한 사람의 행적에 묻힐 일은 아니나 막연히 불교유적터로 또는 불교성지로 인식하기보다 기인, 방랑객 매월당이 세거했던 사실로부터 추적하는 것은 더욱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의 힘이 약한 것 하지만 현실에서 매월당만큼 알려진 인물도 드문 것이다. 그가 경주 남산에서 아직도 이름을 날리고 있는 소이연은 어디에 있는가 생각한다면, 물론 향가와 관련된다는 산화령고개가 있고 용장사터가 있긴 하지만,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남겼다는 이유로 세세 東峰의 호가 회자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매월당은 금오산 어디에서 언제까지 세거한 것인가 하는 간단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넘어갈까 하는 것이다.
우선 31세(세조11년)에 금오산실을 卜築하고 일생을 그 곳에서 마치기로 한 사실을 들 수 있다. 같은 해 3월 세조가 古弘福寺를 중신하여 원각사라 하고 緇流(승려)를 소집할 때 효녕대군의 추천을 받고 5 일여의 일정으로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가 蓮華經 언해사업을 도와 내불당에서 열흘간 교정을 보고 돌아왔는데 그 이후는 금오산 용장사에 정착하여 독서를 하였다 한다. 국문학자 이재수에 의하면 매월당이 경주에 머문 것은 31세에서 36세 사이가 된다. 34세 무자년 겨울에 금오산에 거처하며 山居百泳을 지었다는 말이 있는데 금오신화는 韻詩로 되어 있음을 감안할 때 百泳은 금오신화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용장사는 금오산에 있는데 詩僧 雪岑이 용장사를 지어 거기서 거처했다는 말과 매월당 사우가 금오산 남변동구에 즉 용장사 옛터에 있었다는 등 몇 가지 의견이 있는 것인데 매월당이 놀며 쉬던 곳이다. 용장사가 없어졌어도 사우는 있었던 것 같다. 매월당이 <용장사>를 읊은 한시가 있으니
용장산 골 깊으니 /오는 사람 볼 수 없네/ 가는 빗발 개울 대밭 스쳐가고/빗는 바람은 들매화 두둔하다/ 작은 사창에서 사슴함께 졸음 들어/ 메마른 교의에 앚으면 재와같은 고요거니/ 깰 줄 없는 처마 깃에/뜰꽃만이 지고 피네.
그 위치는 금오산 남변동구가 된다. 경주시가 안내도를 보면 남산의 북족으로부터 양지마을,음지마을이 있고 탑골, 통일전이 있는 안마을,남산삼층석탑 아랫쪽이 남쪽마을이다. 금오산정을 가는 길에 용장사지가 있고 용장사지삼층석탑 그리고 용장리,용장골이 있으니 이곳은 남산의 마애석불 중 으뜸이라 하는 칠불암마애석불과 남산정의 중간에 위치한다. 사우와 용장사구지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遺址가 확인되는 것으로 해결된 것이고 매월당의 출생지는 경성성균관 북쪽 명륜동이며 누대에 걸쳐 무직의 가계로서 부친은 병으로 겨우 얻은 충순위벼슬도 나아가지 못했던 金日省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본은 강릉(溟州)이며 무열왕 5대손인 周元이 중시조다. 생후 8개월에 글을 알았고 3세에 작문을 하여 ‘春雨新幕氣運開’라고 묘사하였다는 매월당은 20대부터 방랑, 정착,환속, 50대에 2차의 방랑기를 거쳐 59세(1493년,성종24년)에 일기를 끝낸 불우한 나그네였다. 길지 않은 삶의 기간에서 20여 년을 방랑이 길을 택하였으니 그의 첫째 방랑은 삼각산 重興寺에서 독서하다가 단종 遜位의 비보를 듣고 삼일 간 대곡을 하고 드디어 僧衣를 걸치고 방랑의 길로 접어 들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고 정치.사회적인 정의와 신뢰가 없는 세상에서 관료의 길을 택할 수 없다는 명부도 명분이지만 어릴 때부터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매월당으로서는 인간적으로 용납이 되지 않는 현실의 상황이었다. 두 번째의 방랑은 가족의 비운으로 말미암은 방랑이었다. 사십대에 만혼을 하였으나 부인이 죽자 다시 방랑을 하게 된 것이다. 후자의 방랑은 그의 인간적인 좌절에서 오는 방랑의 길이었다. 매월당의 광인열전은 그의 50대의 궤적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의 방랑은 관서지방,관동지방은 물론 송도,평양의 고도를 돌며 역사의 무상을 접하였고 금강산을 유람하고 ‘내가 오늘 죽는다 해도 족하다’고 경탄한 것이다. 호남지방을 돌며 세속의 풍속과 호남의 경개를 둘러보았다. 매월당은 팔공산도 둘러보고 나그네의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러나 매월당이 주로 방랑한 곳은 관동,관서지방과 충청, 호남지방이었던 같은데 이는 김병연의 행로와 유사한 일면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라망국의 덧없음을 노래한 서거정의 <금오산>시에 ‘깨어진 비문에는 김생 글씨 간혹 뵈며/ 일찌기 옛 절엔 최치원의 글이 걸렸구려’라는 데서 金生字, 致遠詩를 기대한 마음 도한 없지 않았으나 용장사터를 찾는데 시간을 다 소비한 것이다.
그런데 금오산에 고운 최치원의 시가 있었던가 하는 의문은 고운 선생도 경주 금오산을 주류했다는 것을 시인 이은상은 말하고 있다. 孤雲 선생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장 섭섭해 했다는 당나라 시인 顧雲은 <금오산>시를 지어 최고운에게 주었던 것으로 보아 금오산이란 명칭은 ‘금자라 머리같은 높고높은 산 마루’라는 산세를 두고 붙여진 이름인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중국 사람들 보기에는 이천 미터도 되지 않는 태산을 두고 천하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볼 정도이니 금오산 높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니라 넓은 평지의 금빛같은 넓은 벌(千里萬里之洪濤)과 한 점 푸른 계림(一點 鷄林碧)을 대비시켜 금오산의 빼어난 풍광으로 인해 孤雲같은 奇特한 인물을 낳았다는 고운을 칭송하는 발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南厓 李斗遠의 <鰲山晩煙>에 팔만암 하재(八萬庵何在)라는 싯귀로 보아 남산에 팔만 암자가 있었던가 의심할 수 있다. 과연 경주 남산은 불교성지요 석불유적지다.
3) 경주 남산에서 만난 사람들
1998년 7월 28일(화).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을 집에 있었더니 좀이 쑤시는 것이다. 비오는 데 경주 남산엘 간다했더니 아내와 딸이 조롱을 한다. 비가 내리는 걸 멈출 수는 없는 일이고 여름비야 맞아도 여름인 걸 어쪄랴. 경주행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도착한 것이 9시, 경주터미널에 도착하니 부슬부슬하던 비가 차창을 심하게 적시고 있다. 통일전 앞에서 내려 안마을을 지나 남산 삼층석탑 앞에서 촌로에게 칠불암마애석불 가는 길을 물으니 2시간 정도 소요된다며 비가 오는데 왜 가는냐 한다. 남쪽마을로 접어들면서 곧 산 밑에 당도한 것인데 마을의 끝 집으로 보이는 집에 들어가서 산길을 묻는데 비는 더욱 추적이고 동네 개들은 짖어대는 것이지만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새 중년 아주머니가 마당가운데 서서 이쪽의 거동을 관찰하는 것이다. 칠불암마애석불 가는 길을 물었더니 트인 길 따라 죽 올라가면 된다고 하면서도 필자의 복장을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이다. 그는 등산객 차림이 아닌 것을 보고 실망하면서 올라갈 수는 있지마는 옷을 다 젖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가는 길이 여러 갈래 있는데 다른 길로 가지 말고 큰 길만 따라 죽 올라가야한다는 것과 칠불암도 좋지마는 천룡사가 좋다는 말을 한다. 필자가 용장사를 묻자 용장사는 가보지 않은 것이고 천룡사는 서울의 주지 스님이 곧 개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갖출 것이라는 말을 전한다. 그 아주머니는 개축할 천룡사를 다니는 모양이다. 날은 컴컴해지고 비는 소나기로 그치지 않는다. 얼마가지 않아서 땀이 솟아진다. 나중에는 땀이 소나기인지 소나기가 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가 되고 가파런 경사는 계속되는 것이다. 칠불암 오르는 길이 다소 험해 보이지만 산세는 역시 무겁고 정적인 기세를 나타낸다. 나그네 가는 길을 짙은 회색의 약개구리들이 앞길을 막으니 비오는 날 등산을 비웃는 지 나를 깨우치러 하는 지 여하간 비오는 산길은 개구리떼도 만만히 볼게 아니다. 산어귀에서 투박하게 울던 부엉이소리는 사라지고 산중에서는 까르르 넘어가는 산새소리가 독을 올리는 것으로 승속의 경계를 일러주고 있다. 산개울물은 더욱 불어나고 빛깔은 부옇게 변한다. 수림은 갈수록 깊어지고 어둠을 시커멓게 몰아온다. 보이는 것은 손바닥만한 하늘만 나무들 사이로 언듯언듯할 뿐 열대지방의 우림과 하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필자는 깊고 어두워가는 산골을 오르면서 태고의 정적을 맞은 듯 하고 자연의 무서운 위력으로 꺾여진 기세로 길 하나만 보고 오른 것이다. 위안을 삼은 것은 가끔 나타나는 경주시장 명의로 써 놓은 안내 간판이다. 평소에 보이지 않던 안내간판에서 인간적인 체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날의 별다른 보람이다. 우비를 썼는데도 나무에서 굵은 빗방울이 얼굴을 적시고 있고 초행길에 끝이 보이지 않는지라 이 날 출발 때의 고집은 다소 꺾인 셈이다. 기세가 꺾여서인가 머리 위에서 들리는 까마귀소리는 어떤 죽음을 진하게 들려주는 것 같았고 쓰러진 고목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 늙어 쓰러진 고목이 무슨 힘을 쓸 것인가 그렇다고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고목도 아닌 터에 가볍게 발로 걷어치운 것이다. 칠불암이 가까워지는 것인가 산 중턱을 넘어서니 물컵이 보이고 시멘트로 공사한 흔적이 보인다. 다시 오르니 竹溪가 이어지는데 길은 다시 캄캄해진다. 한치 앞을 볼 수 없을 듯 하여 기진한 몸을 이끌고 차츰차츰 오르니 컴컴하던 길이 다시 트이고 다시 어둡더니 길이 뚫리기를 거듭한다. 김시습의 용장골이 아니더라도 남산의 칠불암마애석불 오르는 길은 대나무골로 이어지면서 부석사 안양루문(?)을 여는 것보다 더욱 가파르다는 느낌이다. 다시 길을 잡으며 머리 위로 상체부터 드러내고 있는 석불의 마당을 올라서니 깡마른 한 보살이 석불앞에서 손질을 하다가 뒤돌아보며 씩 웃는다. 소나기 쏟아지는 우중을 네가 어떻게 왔는냐 하는 웃음이다. 보살의 그 웃음으로 지금까지 고투하였던 나의 행적은 없었던 것으로 되고 다만 앞뒤 겹으로 정좌하고 있는 석불이 마음을 꿰뚫는 듯 말이 없다. 진짜 일곱 불상인가 돌아가며 속으로 세워보았다. 속세에 사는 사람은 어디가나 남을 믿지 못하는 습관이 붙어 있는 것이다. 화강암 자연석에 새겨놓은 마애불 일곱 분, 앞에는 사방을 향해 한 분 씩안아 있고 뒤쪽의 보존불은 우뚝한 높이로 삼불의 조각이 보인다. 그러나 앞에서 보면 보일락말락 하여 높이가 조정되지 않으나 몇 발 뒤로 비켜서면 뒷면의 본존불이 자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신라시대 불상으로 보물 제200호이다. 서양화를 감상할 때 뒤로 물러서서 적당한 거리에서 감상하라던 중학교 때 미술선생의 말이 생각난 것이다. 생각하면 불상도 하나의 예술품임을 잠시 잊은 것이다.
비가 쏟아지는데도 우비를 받치고 카메라 삿터를 계속 눌렀다. 씩 웃던 보살은 이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묻는 말에 대답만 할 뿐이다. 때가 정오를 지났는데도 공양하란 말이 없으니 속으로는 섭섭하다. 냄비밥을 혼자서 끍어 먹는 걸 보면 밥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밥을 좀 달라할까 비가 오는데 하룻밤 재워달라 할까, 무슨 설명을 들은 것 같은데 남은 것은 없다. 마루에 걸터앉아 남산의 비를 감상하는데 마애불을 두고 떠나려니 어째 섭섭한 마음이다. 부처를 모시고 있는 보살이 늙었으나 이 깊은 산 중에 저와 내가 둘이만 있다는 사실은 심상치가 않을 것이란 생각을 한 것이다. 만약 하룻밤 재워 달라하여 잠을 잘 수 있다 하더라도 밤중에 웬 놈이 나타나 ‘너 누구냐’하는 날이면 인생은 끝나는 것이다. 아니 끝날 것 까지는 없다하더라도 망신은 물론 곤욕을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보살은 나의 이런 헛생각을 알아 채렷는지 말하기를 ‘길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따라 가지 말고 능선을 타고 나가면 길을 만난다’ 는 말을 해주었고 뒤따라오며 거듭 주의를 주는 것이다. 칠불암마애석불에서 용장사터로 가는데 보살의 주의는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이 사실이다. 남산의 바위는 磨砂라 운동화로는 감당키 어려웠다. 여름이라서 그런가 땀은 왜 그리 오는지 비오듯하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면서 갬새기 하나 보이지 않는 경주 남산의 능선을 계속탄 것이다. 미끄러운 바위, 없는 길을 찾아 헤매며 다시 보면 큰바위 위에 담배공초가 떨어져 있어 그것을 보고 길을 찾은 것이다. 무모한 결단이 얼마나 많은 시련을 가져오는 가를 남산을 오르면서 두고두고 생각하는 것이다. 누가 이 산 중에 담배꽁초를 버렸는가 하고 주워보니 피우고 버린 꽁초가 아니라 길을 알려주려는 의도로 꽁초를 버렸음을 안 것이다. 보살이 길을 안내해준 것이나 부처님이 꽁초를 버린 것이나 이 우중에 누가 올 것을 알았음인가 필자가 길을 헤맬 대마다 담배공초가 잇는 것이다. 용장사 가는 길로 접어들었을 때도 바위위에 놓여 있었다. 꽁초는 시간적으로 많이 지난 것은 아닌 듯 하나 그렇다고 당일 것은 더구나 아니라는 판단이 선 것이다. 어쨌든 누군가 고마운 일이다.
다시 능선을 타고 전망대로 연결되어 잇는 등산로에 닿기 위해 비며 빗방울을 가리지 아니하고 계속 앞으로만 가다가 내리막길에서 바위끝을 딛다 닳은 운동화 탓인지 정신없이 궁둥이를 바위 끝에다 부딛친 것이다. 순간 정신이 하나도 없다. 다시 정신을 차린후 보니 오른 팔 밑부분에 선혈이 낭자하고 핏줄이 붉게 그어져 있다. 가방은 어디론지 달아났고 몸을 움직이니 다행히 발목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문득 마음이 약해진다. 죄를 지은 것일까, 욕심을 부린 것일까. 다행히 앞을 보니 ‘자랑스러운 경주만들기 시민운동협의회’ 이름으로 세워진 안내판이 있어 도움을 받은 것이다. 와당무늬에 고위산 1.1km, 금오산 2.9km, 칠불암100m, 여기서 칠불암이 백미터라니 그 백 미터가 몇 km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땀을 닦으며 쉬엄쉬엄 오르니 시간이 3시를 넘고 있다. 점심은 커녕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터이라 모든 것은 될 대로 돼라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가니 茸長谷(용장골)안내판이 있다. 거기엔 칠불암 2.7km, 용장사지, 삼층석탑 380m라는 글귀를 보고 기뻐한 것이다. 안내문은 이러하다.
‘ 이 곳은 용장골의 정수리인데 여기서부터 아래쪽 산자락이 용장계곡이다.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를 이룬 이고에는 큰 바위들이 겹겹이 에워싼 가운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3기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 곳에서 아래로 400m 정도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용장사터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둑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용장사는 신라통일시대 범상종을 개창한 大賢 스님이 거주하던 곳이며 조선 세조대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 스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大賢 스님이 三輪大坐佛을 돌며 염불을 하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한다.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1997년(불기 2541년) 6월 29일/ 신라 문화원이 세우다.
용장곡을 가자면 三花嶺을 거쳐야한다. 삼화령은 용장골을 왼편에 두고 오른편으로 는 큰 바위들이 병풍을 치고 있다.
問余何事登靑山/笑而不答心自閑 (樂山會) - 삼화령에서
용장사 찾기를 그만 둘까 말까 하다가도 드문드문 위와 같은 요산회의 소이부답심자한과 같은 구절에 고마움을 느낀 것일까 삼화령에서 힘을 낼 수 있었다. 필자가 요장사터에 접근할 무렵 담배꽁초 몇 개를 다시 발견하였고 여유있게 용장골을 향해 내려가는데 뒤에서 사람소리가 나는 것이다. 소나기 쏟아지는 우중에 남녀 한쌍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삼층석탑의 사진을 찍고 사람이 반가워 인사를 하니 그도 아는 체를 한다. 그는 필자가 다친 상처가 심한 것을 보더니 가방과 삼발을 자기가 메고가겠다 하면서 용장사에 대해 설명도 한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장풍이다. 구세주를 만나 것 같은 반가움이었고 이야기를 하다가 용장터는 보지도 않고 하산한 것을 나중에 안 것이다.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그들의 안내에 의해 따라 가노라니 정작 용장사터를 지날 때 나에게 무슨 말을 한 것 같았으나 지나쳐버린 것이다. 삼층석탑을 산 아래에서 보면 높이 솟아 있어 용장사를 오르는 등대와 같다. 세 개의 개울을 건넜고 운동화에서 물소리가 난다. 산 정상에서 용장골까지 하산하는 길은 만만치가 않은 것이다. 오후 4시가 지나서야 도로변에 올 수 있었고 거기까지 안내해준 이는 경주에 산다는 김광조 씨다. 그의 안내로 음식점에 가서 약을 바르고 술까지 대접을 받았으니 경주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이다. 김 씨는 삼릉에서 터미널까지 날 태워주었고 필자는 짜장면으로 대답하고 셋이서 헤어진 것이다. 누가 말 했던가 山에서 만나면 모두가 山사람이지 山 사람은 모두가 좋은 거여. 마침 영남일보에서 ‘佛脈’시리즈로 설잠 김시습전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를 일러 心儒踐佛, 跡佛伴狂이라 평한 것을 보았다. 왕조시대 영원한 자유인으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나마 종교에 귀의함으로써 가능했던 자유인이었다. 5세 때 경전에 뛰어난 매월당을 보고 당시 집현전학사 崔致雲이 時習이라 이름지은 것은 오늘에 보아도 그의 삶이란 시대와 사회에 얼마나 치열한 것이었고 현실에 대한 심연의 고뇌에 깊이 좌초돼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4) 경주 남산동 들녘의 彫刻品·
경주 남산동 들녘에는 무명인의 조각품이 오랜 세월 풍우와 싸우고 있다. 남산동 부근 상점 아주머니에게 들판의 시멘트조각품 사자상, 인물상 2기, 두부가 없는 불상 1기 등에 대해 물었다. 상점아주머니는 書出池 가는 길에 밭에서 보았던 그 아주머니다. 말에 의하면, 조각한 햇수는 수십 년 된 것인데 현재는 방치되어 있다면서 재작년 80을 넘어 작고한 水月 선생의 작품이라 한다. 수월 선새이 여기에 작은 공원을 조성하려다 말고 작고했다고 한다. TV에도 많이 소개된 분이라하며 자제들도 출향하고 없다 한다. 사자상 1기는 다소 훼손되었으나 원형은 보존된 모습이나 근육에 힘을 주고 있는 두 청년상은 왼팔이 없거나 왼팔 중간 부분이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다. 시멘트 조각품의 표정은 윤곽이 너무 뚜렷하여 6.25 참전 미군인가 생각되더니 한국을 지키려는 씩씩한 한국청년임을 알았다. 신라고도 경주 남산동 들녘에서 그런 근육질의 힘을 뽐내며 표정과 자세에 어떤 난관도 마다하지 않을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조각품을 일찌기 대한 적은 없다. 다만 남산 도처에서 목잘린 불상을 보거나 주인없이 버려진 고인의 조각품을 우거진 풀밭을 헤쳐가며 어렵게 보아야 하는 문외한 나그네로서는 정신적인 부담인 것은 사실이다. 들녘에 버려진 조각품, 필자가 보기에는 뛰어난 조각품임에 틀림없는데도 경주의 많은 예술가들이 모른 채 할 이유가 없는데 무슨 곡절이 숨어 있던가 하는 의심을 하면서, 신라 제 21대 소지왕 10년 (488)의 전설을 읽고 있었다. 소지왕을 모해하려던 모의자(Conspirator)들의 음모를 쥐와 까마귀가 일러주어 모면했다는 전설이다. 매년 1월 15일을 기하여 烏忌日 이라 하여 까마귀에게 밥을 주는 날이라 한다. 인간과 동물의 공생관계를 합리화 한 것만 아니라 음력으로 1월이면 겨울철이라 새들의 먹이가 절단되었을 시기에 까마귀에게 먹이를 던져준다는 발상은 동물사랑이라는 구호를 댈 것 없이 매우 신선한 발상이다. 옛 사람의 지혜 가운데는 이숍 우화를 들지 않아도 이렇게 명분과 합리화를 통해 자연과 동물을 사랑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거기서 몇 걸음 가다가 대문에 ‘伽羅軒’이라는 액자를 보았다. 입구에 실장군, 하원당장군을 세긴 석조대장군이 입구에 있고. ‘아무에게 雅正 丙寅 大雪 아무가‘ 라고 수수관계를 밝혀놓았다. 명문가인 듯 하여 대문을 열고 들어서서 주인을 찾으니 주인은 얼른 나서지 않고 대신 조각품과 정원수가 잘 배치되어 있어 관심을 끈다. 이렇게 경주 남산 안마을은 역사의 마을이요 예술의 마을임을 확인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1999년 가을에 재차 경주 남산동을 찾았을 때는 인물 조각상 2기가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이 선생의 제자들이 와서 들고 갔다 한다. 이 선생의 주거지였던 곳에 대구에서 온 젊은 사람들이 도요지를 하고 있는데 그 곳에 가서 탐문하면 알 것이라 한다. 혹은 남산동의 50,60대 부인들은 이 선생의 작품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말은 분명히 물어 확인해들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버스를 타고 왔다. 어쨌든 1999년 경주 남산동 들녘에 있던 시멘트 인물조각품 2기가 실종된 것은 사실이다. 어디로 간 것일까. 후학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다. 김시습의 <望 公山 > 한시비
답사 :2004년 5월 25일, 위치 : 대구 팔공산
험준한 공산이 우둑 솟아서
동남으로 막혔으니 몇 날을 가야할고
이 많은 풍경을 다 읊을 수 없는 것은
초췌하게 병들어 살아가기 때문일세
公山峻聳山崢嶸 碍却東南幾日程 多少風光吟不得 只緣憔悴病中生
7. 사가 서거정(四佳徐居正)의 시비
가. <북벽향림(北壁香林)>
1)탐방 : 2002년 11월 25일(월), 대구 동구 도동 측백림
2)-北壁香林- (大丘十景 중 제 6 경)
고벽창삼옥삭장(古壁蒼杉玉槊長)
장풍부단사시향(長風不斷四時香)
은근갱착재배력(殷勤更着裁培力)
유득청분공일향(留得淸芬共一鄕)
북벽 향나무 숲 옛 벽에
푸른 향나무 창같이 늘어졌네
사시로 바람결에 끊이잖는 저 향기를
연달아 심고 가꾸어 온 가을에 풍기세
(노산 이은상 역)
나. <침산만조(砧山晩照)>
1) 2005년 5월 15일 (일), 대구 북구 침산동 오봉산
2) - 침산 만조 -
수자서류산진두(水自西流山盡頭)
침만창취속청추(砧巒蒼翠屬淸秋)
만풍하처용성급(晩風何處舂聲急)
일임사양도객수(一任斜陽搗客愁)
<침산의 저녁 노을>
물은 급히 돌고 산은 끝났는데
침산 푸른 숲에 가을 빛 어리었네
어디서 해늦은 방아소리
손의 가슴 찧는고
(노산 이은상 역)
다. 側柏樹林과 九老亭
대구 도동의 측백림은 대구시 천연기념물 제1호로 지정될 만큼 잣나무가 洛迦山(160미터)을 에워싸고 있는데 절묘한 것은 험한 바위틈을 뚫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군락지가 끝나는 동쪽에 신라시대의 고찰인 관음사가 산비탈에 어렵게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 의상대사가 창건하고 고려 광종때 심지대사가 중창 해인대가사 다시 중수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낙가산 관음사 뒷벽에는 낙가산 관음전이 無說法堂임을 말하고 있어 이채였다. 그보다 낙가산정에 九老亭이 있어 더욱 흥미롭다. 조사자에 의하면 1933년 3월에 향산 아래에 살았던 아홉 노인의 詩會를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지은 맞배지붕의 집이다. 아홉 노인이란 경주인 정축생 崔雲慶을 비롯한 채정식,도윤곤,곽종태,최완술,채준도,곽정일,서우곤,서영곤 등 아홉 노인을 말한다. 九老社座目이란 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연치순으로 기록한 것 같다. 구노정 또는 구노당은 웬만한 반촌에는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멀지 않은 文昌公(崔致遠)影堂 옆 경주 최 씨의 구노당에서는 20여 명의 선비가 배출되었다고 관리인이 전하다.
구노당의 모체는, 몽계필담(夢溪筆談)에 의하면 당 백낙천이 낙양에 살았는데 高年者 8명과 더불어 놀았다. 이를 구노라 일컫는다는 말이 있다. 한자의 九는 老의 뜻도 있지만 南方 또는 久의 의미도 있어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詩社로써 뜻을 같이하는 久老의 의미가 있다. 중국 하남성 낙양현 백거이의 고택을 구노당이라 하였다. 당시 노인 아홉 명이 모여 늘 치회(齒會)를 하였는데(作尙齒會) 백거이의 시에 구노시가 있다. 대구의 낙가산을 향산이라 말한 것은 제동야화(齊東野話)에 기영회당향산(耆英會唐香山) 구노집어낙양(九老集於洛陽)에서 따온 것 같다. 그후 宋 李 昉은 至道元年에 구노회를 열었는데 역시 백낙천의 유향(遺響)을 이은 것이라 한다. 어쨌든 초기 구노회는 70대 이상 80대 간의 관직을 가지지 낳은 노인들의 순수 모임이었던 것인데 백거이가 그린 九老圖가 있다.
8. 일두一蠹 정여창 시비
가. 섬진강蟾津江
風蒲泛泛弄經柔 풍포범범농경유
四月花開麥已秋 사월화개맥이추
看盡頭流千萬疊 간진두류천만첩
孤舟又下大江流 고주우하대강류
솔바람 부드러이 갯버들 흔들고
늦은 봄 화개골은 보리 익어 가을 같구나
두류산 천만봉을 두루두루 구경하고
조각배에 몸을 싣고 큰 강 따라 흘러가네
나. 정여창鄭汝昌 (1450 - 1505)
함양 사람이며 호는 일두一蠹요 하동 정씨다.
화개면 덕은리 악양정에서 소용하다. 하양읍 목도리에서 목도강정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 씀. 이 작품은 탁영 김일손과 함께 지리산 기행을 마친 후 화개나루에서 돛단배를 타고 섬진강을 내려오면서 지은 시로 후세의 수많은 선비들이 이를 차운하여 명편을 남겼다.
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원, 건립 : 2008년 4월 19일, 답사 : 2019년 2월 24일
9. 눌제(訥齊) 朴 祥 시비
가. 비음
박상(1474-1530), 조선조 중종 때의 문신,자는 昌世,호는 訥齊 시호는 文簡,光州에서 탄생하여 연산군 때에 문과에 급제, 校理 應敎를 거쳐 목사를 역임하였다.
애민의식이 투철한 청백리로 유명하였으며 글을 잘 하여 훌륭한 문장가로서 당시 湖南詩壇의 조종으로 숭배되었다. 16세기의 혼란했던 士禍期에 節義를 지켜온 己卯名賢의 한 사람이다.
이 비에 새긴 한시는 김시습의 山居百絶에 차운한 申 潛의 시를 읽고 이에 화답한 칠언절구 백수 가운데 하나이다. 저술로 [東國史略]을 비롯하여 많은 한시문이 있다.
나. 시비
雖遁深山晦性名 有時 天變亦關情 夜來風雨知多少 揮淚佳花落滿庭
깊은 산에 묵혀/이름 없이 산다한들 /천기 변할 때는 /가슴 조일레라/ 밤사이 비 바람이/ 얼머너 휘몰아 쳣는지/ 낙화는 들에 가득 /눈물겹구나
10. 남명 조식의 시비
가. - 월담정시(月潭亭詩) -
가야산 옛 무덤은 산 위에 이어지고
월기(지산리)쓸쓸한 마을은 없어졌다 다시 사네
이린 풀은 아롱아롱 봄기운이 한창인데
겨울이면 말랐다가 이듬해 그 혼 다시 돋네
伽倻古國山連塚 月器荒村亡且存 小草班班春帶色 一年銷却一寸魂
이외 고령의 주산에는 육사의 <광야>,윤동주의 <서시>, 박목월의 <산이 날 에워싸고> 등의 시가 돌에 새겨져 있다.
11.퇴계 退 溪의 한시비
가. 안동 퇴계종택 앞 자연석,2004년 11월
나. <退 溪>
身退安愚分
學退憂暮境
溪上始定居
臨流日有省
(金台均 근서)
다. 퇴계 이황 선생의 아호가 위의 시에서 유래했음을 알 게 하는 시다. 신퇴, 학퇴로 현실에서 물러나 자연에 귀의 은일하는 학자의 풍모를 알게한다. 이는 환해풍파에 시달리다가 부귀공명을 떨쳐버리고 강호에 은일하는 은일군자로서 자연에 유유자적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그러나 臨流日有省 으로 보아 군자로서의 몸가짐을 잃지 않는다.
이는 隱逸歌辭로 <退溪歌>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어제 올탄 말이 오날이야 왼 줄 알고
葛巾布衣로 故園을 차자가니
淸風의 興을 겨워 閑暇이 누워시니
아마도 江山主人은 나 뿐인가 하노라.
12. 서산대사 茶詩
가. 다시茶詩
白雲爲故舊 흰구름은 오랜 내 벗이요
明月足生涯 밝은 달은 곧 내 삶이어서
萬壑千峰裏 일만 골짜기 일천 봉우리에서
逢人卽勸茶 사람이 오면 차를 권한다네
나. 서산대사 (1520 - 1604)
1520년 최세창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호는 휴정休靜이다 서산대사는 화개동천에서 선문에 들리를 작정하고 열 다섯에 경전을 읽고 열 여덟에 부ㅜ루도에 정진 壬辰倭亂의 와중에서 승병장으로 활약하여 그 명성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의 詩才가 가려진 측면이 많다. GKEHHD에 있는 그의 유적으로는 신흥사 능파각기, 쌍계사중창기, 쌍계사중창 경찬소 등과 대사의 입산기가 전해져온다.
다.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공원
13. 손곡(蓀谷) 이 달(李達) 詩碑
가. 찾아가기 ; 충북 홍성군 홍성읍에는 손곡 이 달 선생의 시비가 있다.
비음을 먼저 보자.
나.비음
이곳은 조선 중기의 명류시인 손곡 이 달(1539-1609) 선생이 나신 고장이다. 洪州 (安平) 李 氏 五經司公 晟의 五세손이요 副正秀 咸의 아들로 공이 나시매 月山의 풀이 사흘동안이나 울었다 한다.漢吏學官을 겨우하고 임진란에는 白衣從事하였으나 뜻을 펴지 못하여 방랑 하고 나중에 原州 蓀谷에 숨어 詩酒를 벗삼아 평생을 마치었다. 崔慶昌, 白光勳과 더불어 三唐派 시인으로 이름을 떨치며 許 蛟山 筠에게 시통을 이어주었고 청신염려한 시풍은 朱之蕃도 太白에게 비겼다. 교산이 엮은 蓀谷集 육권에 330여 수의 시가 지금 전하고 있다. 공은 이제 사백여 연만에 자기 고향에 시비로서 돌아 왔도다.
/1983년 11월 일 / 전국시가비동호회에서 홍주 이씨의 협찬을 얻어 세우고 김동욱은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다. 에맥요
시비의 원제는 <예맥요(刈麥謠)>다. 허 균이 [학산초담]에서 말한 바 있지만, 시골 아낙네가 먹을거리가 없어 비가 오는데 보리를 베어 밥을 짓고자 하나 생나무에 불은 꺼지고 아이들은 옷자락을 붙들며 우는 모습은 당시의 생활고를 역력히 그려내고 있어 시인의 날카로운 현실인식을 찾을 수 있다. 손곡 선생에 대한 기록은 제자 허 균이 지은 [손곡산인전]에 전하고 있지만 전기 내용이 소략한 정도이다. 손곡의 자는 익지(益之)요 고려의 문장가 쌍매당 이 첨의 후손으로 부친인 이수함이 홍주 관기를 통해 그를 낳았다 한다. [손곡산인전]에 의하면, 한때 한리학관의 벼슬을 하였으나 뜻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당대의 시인인 최경창, 백광훈과 詩社를 결성하였다. 그후 사암(思菴) 박 순(朴 淳,1523-1589, 서경덕의 문인,문과에 급제, 박상,임제 등과 호남계통 문인) 이 이 달에게 말하기를, “ 시의 도는 마땅히 唐으로써 으뜸을 삼아야 한다네, 소동파가 비록 호방하기는 하지만 벌써 2 류로 떨어진 것일세,”라고 추고하면서 곧 책시렁 위에 꽂힌 이태백의 악부(樂府), 가(歌), 음(吟) 등과 왕 유, 맹호연의 근체시를 뽑아 보여 주었다 .이 달은 시의 법도가 당시에 있음을 알고 밤을 낮 삼아 공부에 전념하였다 한다. 그러나 이 달은 얼굴이 못생기고 술을 좋아하였으며 살림을 돌보지 않아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한다. 일정한 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녔으며 비렁뱅이 노릇을 하였던 것이다. 蓀谷이라는 호는 원주 손곡리에서 한 때 묻혀 살았기에 호를 삼은 것이다. 지금의 강원도 원성군 부론면이다. 손곡 외에도 西潭, 東里라는 호가 있다. [손곡 이 달시선](우리말로 옮긴 이, 허경만)의 부록에서 김완기는 ‘손곡 시의 주된 정조는 한애(恨哀)이다. 이는 주로 전쟁과 가난, 그리고 헤어짐을 겪으며 슬프고 고통스런 현실을 떠돌며 지은 시들에서 보인다.’고 했거니와 시는 삶의 ‘상처’에서 나온다는 말의 확인에 해당한다. 현실적인 상처는 고통과의 처절한 대결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 극복의 대안으로써 자연에 몰입하거나 또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는 지적이다.
田家少婦無夜食 雨中刈麥林中歸 生薪帶濕煙不起 入門兒子涕牽衣
시골밭집 젊은 아낙네/저녀거리 떨어져서/비맞으며 보리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생나무에 습기젖어 불길마져 꺼지도다/문에 들자 어린 아이들 옷자락 잡아 다리며 울부짖네/ (리가원 번역하고 쓰다)
이 달 선생의 시세계를 말하여 일반적으로 시의 중심은 신분갈등에서 오는 소외감과 방랑생활의 객회를 읊은 시가 주류를 이룬다고 한다.
<詠柳家孤雁> 에 孤飛水雲外 誤墜罻羅中 生身本不公이라는 말이 있다. ‘혼자서 수운 밖의 멀리 날고자 하였으나 잘못하여 새 거물에 떨어졌으니 본시 이는 불공평한 데 태어난 것이니‘ 라 대목이 보인다. 이 달 선생은 스스로 태어날 때부터 불공평한 태생임을 갈등한 것이다. 스스로를 매화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임란 중에는 ’머무는 곳이 곧 고향‘이라 하여 떠돌이 삶을 탄식하기도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달 선생의 시는 조선조의 적서차별 사회로 인해 받는 사회적 불평등과 시문학을 인정해주지 않음에 대한 회포를 자연에 비기거나 이별, 선계를 소재로 노래한 것이다. 그의 시에 민족에 대한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가당하다면 그것은 국가가 이 달을 버린 결과에서 말미암음일 것이다. 그는 <刈麥謠>,<拾穗謠>,<移家怨> 등에서 흉년, 부역,빈궁으로 인한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라. 여담
홍성을 찾은 것은 1996년 4월 13일 오후였다. 토용일 수업을 마치고 서부정류장에서 버스를 탄 것이 13시 20분 대전행을 탄 것이다. 대전에서 천안, 온양을 거쳐 홍성에 도착한 것이 저녁 8시경이다. 주민에게 한용운 선생 비를 물으니 여기저기로 가리켜준다. 헛걸음을 반복하다가 모 사진관에서 필름을 사면서 물었더니 필름 팔기보다 안내에 더 열을 올리는 젊은이도 있다. 홍성ㅂ 중앙거리에 김좌진 장군의 동상이 눈에 띈다. 읍사무소와 군에 들러 군의 문화공보실 이종욱 계장의 주소를 물어 여관에서 통화를 하였다. 여관의 방이 따뜻하여 편안히 잠을 자긴 했으나 주위가 소란하다. 이튿날 아침 6:30분에 여관을 나와 남산공원으로 간 것이다. 남산공원에서 한용운 선생, 김동욱 선생의 문학비를 보고 남산공원 너머에 있는 이 달 선생의 시비를 찾은 것이다. 홍주성지를 보고 조양문 옆 식당에서 감자탕을 먹고 재차 홍주성을 찾았다.성삼문, 최 영,김좌진,한요운의 동상가지 보게 되니 멀리서 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아침 9시에 약속한 대로 군청으로 이 계장을 만나 아내를 받았다. 安懷堂과 칠백년된 느티나무,조선조 아문등이 인상적이었다.이 날 이 계장은 자기차로 한용운 동상이 있는 교외로 안내하고 필자가 기록하고 사진을 찍는 동안을 기다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갈산행 버스를 타고 한요운 생가를 찾은 것이다. 교랑이 있는 곳에서 약 3킬로미터, 차가 없어 도보로 걷기로 하고 가는데 운좋게 승용차를 탈 수 있었다. 그 사람은 경상도 사람이 정권을 잡고 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며 불만을 말하기도 하였다. 갈림길에서 내려 걷자니 만해 생가를 위해 비포장 큰 도로를 새로 닦아놓았다. 생가 안내판, 기록들, 방명록에 서명하고 만해사를 들러 내려오니 승용차 한 대가 그때까지 가지않고 서있다. 그 승용차를 타고 광천으로 갔다.입에 침이 마르도록 인사를 하고 광천에서 홍천으로 오니 13시다.
홍천에 있는 홍주성은 사적 제231호다.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이 성의 초축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 주위가 390미터의 토성으로 성첩이 400개 정도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존 석성은 조선 초기의 양식으로 보이는데 문종 원년(1451)에 새롭게 수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종 광무10년(1906)에는 의병장 미종식,이세영, 채광묵,안병찬 등 의병들이 성에 주둔하면서 일군을 격퇴하였던 곳으로 설명한다.
그러니 이번 여행일정은 대구-대전-천안-온양-예산-홍성-광천-대전-대구로 돌아온 것이다.
14. 송파 松坡 姜봉수 窓巖十詠
가. 답사일:2005년 3월, 위치: 공주시 금강교 북쪽 다리목
窓巖十詠은 沙汀狎鷗,錦江釣魚,馬壑朝煙, 蛇巖暮雨, 石燈行人,春峽看花, 夏樹迎風, 秋江看月,冬嶺孤松,ㅇㅇ林堂 等 十詠이다.
나. 비문
姜鳳壽 선생은 명문의 후예로 관향은 진주다. 부친의 이름은 琦요 모친은 公山 이 씨다. 자는 德叟요 호는 窓巖 또는 松坡라 하였다. 조선 제11대 중종 38년 (서기 1543)에 온양에서 출생하여 제15대 광해군 7년 (서기 1615) 12월에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학덕과 문장력이 뛰어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만인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선조 13년 (1580)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중인 동 27년 (1594)에는 진산군수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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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89년 3월 19일/문학박사 임헌도 근찬/십삼대손 윤식 근서
15. 白湖 林梯 先生 詩碑
가.위치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1번지, 信傑山 중턱
나. - 탄금등대 -
칼튕기며 行帥臺에 오르니 기운이 솟는다
초라한 벼슬자리 내모습 쓸쓸하여라
찬가을 바다 교룡이 꿈틀대고
구름깊은 長白山엔 호랑이 득실대네
世上에 태어나 滿洲땅을 못삼키고
어느때 다시 서울로 돌아갈건가
잔비우고 말타고 돌아서니
아슬한 저 하늘엔 안개걷히네
彈劍登臺意氣高 一摩行色嘆蕭蕭 滄溟秋冷蛟龍蟄 長白雲深遞豹驕
生世未呑氣虜國 幾時重到洛陽橋 淸樽醉罷催歸騎 極目遙空瘴霧消
다. 白湖公 墓碣 原文 및 譯文碑
公公의 諱는 悌요 字는 子順이며 姓은 林氏로 羅州人이다. 先代는 高麗때 顯達하였으며 朝鮮朝에 이르러 諱 枰이 成宗때 武科에 뽑혀 섬돌아래서 방패를 들고 임금을 모시다가 湖南兵馬虞候가 되셨다. 한때 喟然히 탄식하시기를 일찍이 父母를 잃고 외롭게 成長하여 집안을 일으켜서 三品官에 이르름도 또한 충분하다고 하셨다. 祭祀 지내는 일에 삼가히 하고 宗族에게 화목함으로써 家庭의 敎訓이 되게하셨다. 그 뒤가 諱 鵬이니 己卯士禍를 당하여 太學이 諸生들을 거느리고 궁궐을 지키며 抗爭하였는데 그 사실이 己卯黨籍에 나와 있다. 뒤에 登科하여 慶州府尹을 역임하셨다. 그 분이 諱 晉을 낳아 威勢와 名聲으로 嶺南 湖南 湖西 關西北의 五道 節度使가 되셨다. 장수로 있은지 數十年에 貨利를 사사로히 하지 않아 집안에는 두꺼운 깔개하나 없었다. 寧邊과 耽羅府에 政淸碑가 있다.그분이 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며 어머니는 南原 尹氏로 左參贊 諱 李孫의 四代孫이다. 公은 明宗 四年 西紀 1549年 12月 20日에 태어나셨는데 남이 따르지 못하는 天才로 하루에 수천마디 글을 외웠으며 文章이 豪宕하고 시에 더욱 뛰어났었다. 宣祖 9年 監試에서 蕩陰賦와 留犢試를 올려 進士 三等으로 뽑혔고 다음해 大科에서 二等으로 등제하셨다. 文詞가 날로 갈수록 世上에 有名해졌는데 그 무렵에 東西 朋黨論이 일어나 선비들이 명예로 다투며 相互間에 올려주고 끌어내렸으나 공은 마음 기우리지 않으며 그들과 무리 짓지 않았다. 또 自己를 낮추며 남에게 附阿하는 일은 좋아하지 않았으니 그런 理由 때문에 벼슬이 顯達하지 못했다. 當時에 어떤 當路人이 持論을 좋아하여 成敗가 左右되던 사람이 많았는데 公은 그의 門앞을 지나면서도 만나보지 않고서 저자야 사람의 얼굴만 지녔을 뿐 귀신의 날뜀이다, 禍가 곧 미치리라고 말하셨는데 그 몇 년 뒤에 果然 패하였다. 이름난 山川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셨고 일찍이 俗離山에 들어가 大谷 先生을 스승으로 섬기셨다. 당시의 선비들이 대부분 공을 法度外의 사람으로 보았으며 그들이 취했던 바는 文詞일뿐이었다. 그러나 贊成 李 珥, 學士 許 筠, 使君 楊士彦 등 몇 사람은 그분의 奇氣를 인정했었다고 말해진다. 전에 高山 道察方으로 北關에 나가 楊使君, 許學士, 太常 車天輅 등과 함께 駕鶴樓에 올라 酬昌錄 한 권을 지은 게 있다. 또 西北道 兵馬評事와 關西都事가 되셨으니 모두 宣祖때의 일인데 지금까지도 그곳 關塞의 地方에서는 往往 그분의 읊은 시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벼슬은 禮曹正郞 兼 史局知製敎에 그치셨다. 宣祖 24年 서기 1587년 8월 11일 돌아가시니 나이 39세시다. 楓江, 白湖, 碧山, 嘯癡는 모두 別號인데 만년에 고치기를 謙齋라 하였다. 楓江은 錦城의 서쪽에 있으니 지금 林氏의 舊業이 있는 곳이며 白湖는 玉果縣에 있는데 無盡藏이라 이르기도 한단다 恭人 慶州 金氏는 大父의 諱가 千齡인데 성종때에 有名한 분으로 直提學이며 父의 諱는 萬鈞으로 中宗 明宗때에 大司憲이던 분이다. 어머니는 順興 安氏다. 明宗 3年 7月 3日에 태아나 公보다 一年 위인데 공이 돌아가신 4년째의 12월 6일에 돌아가셔 合葬하였다. 墓는 나주의 會津 위에 있다. 아들은 地,埈,坦(탄),게인데 모두 豪擧로 名族이라 稱하였다.埈은 仁祖가 中興한 초엽에 行誼로 獻陵參奉에 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게는 叔父인 文化 縣令 懽(환)의 后系가 되었는데 추천하는 사람이 있어 앞으로 크게 쓰임을 받을번 했으나 戶曹佐郞에 그쳤다. 女壻三人에는 兵曹佐郞 金克寧, 贈領議政 許喬厚, 陵參奉 楊汝栢이다.
지금 子孫으로 姓氏를 이어 오는 사람이 三世에 걸쳐 몇 사람뿐이다 원은 網을 낳아 젊어서 才名이 있었는데 進士에 올랐으나 不幸하게 早折하였다. 網이 楨과 楮를 낳았다.
外孫 許 穆 삼가지음/ 己巳 西紀 一九八九年 四月 日 謹竪/
라. 林 白湖의 舊碑와 미수(眉叟) 許 穆
백호의 묘소는 信傑山에 있다. 신걸산은 나주의 진산인 錦城山의 줄기로 영산강을 바라보며 봉우리들이 수려하게 뻗어 있다. 이곳에는 나주 임씨의 10세 소윤공 휘 鳳이하 17세 백호공 휘 悌 등의 산소가 있는 곳이다. 영성각에 안내된 첫구절이다.영성각은 나주시 다사면 가운리 141번지다. 사실은 나주로 오는 도중 백호의 비를 발견하고 좌회전하여 목포,무안,영산포로 갈라지는 삼거리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차를 세웠다. 가운 주유소가 있는 가운삼거리이다. 창계서원이 자연석에 새겨져 있는데 창계서원은 호남의 학자 林泳(1649-1696)선생을 모신 서원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부제학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학문연구에 바친 학자이다.그 창계서원이 있는 뒷산이 신걸산이고 그 신걸산 중턱에 백호의 묘소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신걸산에 오르니 영산강을 막아 있는 듯 두 개의 산줄기가 좌우로 뻗었고 그 사이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신걸산엥서 바라본 전경은 앞이 확틔여 있는 것이 거칠 것이 없었다.
묘비는 1989년에 세운 번역비가 있고 그 왼편에 구비가 있다. 구비는 판독이 어렵지만 ‘浿江別十首 影 白湖公新筆을 14세손 采駿이 保存하고 禮曹正郞知製敎 白湖林公之墓 叔人 金氏祔,崇禎紀元後 四 辛丑四月 日立가 보인다.8代孫 主賢 載洙 謹書’만 읽고 내려온 것이다.
비문을 쓴 허 목(1595-1682)은 본관이 양천이다. 자는 文父,호는 眉叟,시호는 文正이다. 헌종 1년 (1660)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기간을 두고 송시열 등이 주도한 세력에 예송논쟁을 벌였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영의정에 임명된 유일한 인물이다. 허목은 퇴계와 남명의 양문을 출입한 정 구의 제자로서 동강 김우홍의 신도비문은 미수의 해서체다. 미수의 유필은, 고전체로 ‘東海頌’을 지어 동해파도의 피해를 막았다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가 현재 모사된 비문이 육향산에 옮겨져 있고 정구를 모신 성주의 회연서원에 남은 과주문자 현판 삼 점(玉雪軒,望雲軒,不愧室)을 볼 수 있다. 서체에서 단연 앞서 나갔던 미수의 서체를 두고 당시 이정영과 홍길주가 모함하고 혹평하였으나 그는 중국의 서체를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다. 역사서 [동사], 예서[경례유찬] 등이 있다.
16. 성호 이익 星湖 李 瀷 묘비문
가. 위치 : 경기도 안산시 1동 555/경기도 기념물 제 40호
답사 : 1999년 8월 25일
나. 이익 선생 묘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이 익(1681-1763) 선생의 묘이다.자는 自新, 호는 星湖 본관은 驪州이다.
선생은 부친이 귀양가 있던 평북 운산에서 출생하였으나 경기도 광주첨성리에서 거주하였으므로 스스로 성호라고 불렀다고 한다.선생의 부친은 당쟁의 와중에 귀양징에서 선생이 출생한 다음 해에 별세하였고, 선생을 가르치던 형 이 잠(이잠)마저 당쟁으로 희생되어 선생은 벼슬에 대한 뜻을 버리고 오직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몰두하여 실학의 대가가 되었다.
선생은 유형원의 학풍을 계승해서 천문,지리,의약,율산,경사 등에 널리 통달하였을분아니라 정치, 경제, 재정, 지방제도, 과거제도, 학제, 병제, 관제 등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비판하고 그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이 내용은 선생의 대표적 저술인 성호사설에 나타나 있다. 곽우록, 성호문집 등 저술도 남겼다. 선생의 학문은 그 후 안정복(안정복),이가환 이중환 등에 의해 계승발전되었다. 선생의 사후에 조정에서는 선생의 학덕을 기려 이조판서를 추증하였다.
성호선생 이공휘익지묘/증정부인고령신씨지묘(부좌)/증정부인사천육씨(부우)
다. 이 익의 학문 연구지
성호 이 익 선생이 학문연구를 하였던 곳. 이 곳 첨성리는 조선조 실학의 대가 성호 이익(1681-1763) 선생이 학문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거주하였던 곳이다.이익 선생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로 모든 학문은 실제 사회에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첨문 지리 의약 율산 경사 등에 통달하여 정치 경제 지방제도 학제 관제를 비판하고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선생은 성호사설 곽우록 등을 저술하였다.
화은 류해엽 씀
묘지 옆에 瞻星祠가 있어 객지 사람에게는 경주의 첨성대를 연상하여 웬 첨성사?라는 의문을 일으킨다. 그러나 지명이 첨성리이고 첨성리공원이 있다. 첨성리공원에 청동기시대 지석묘가 남아 있다. 안산시의 비지정 향토유적이다. 전체 7기의 지석묘군은 1991년 선부동 시화정수장 공사 중 발굴된 것으로 대략 기원전 10세기에서 5세기경, 즉 2500년 전에서 3000년전 청동기시대의 무덤이다.발굴 후 수자원 공사 시화장사택 마당에 복원되어 있던 것을 1997년 11월에 이 곳으로 다시 이전 복원한 것이다.커다란 바위의 뚜껑돌(개석)아래에 덩어리 돌을 한 줄로 돌려만든 직사각형의 매장부가 남아 있는 소위 남방식 지석묘이며 내부에서 청동기시대의 무문도기 등이 발견되었다.
17. 담헌 湛軒 홍대용 시비
가. 답사 : 2005년 3월31일(천안시 천안삼거리공원 내)
나. -乾坤一草亭主人 -
無競免積毁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겠고
不才絶虛譽 재주스럽지 못하니 헛 명예 있을소냐
好友時곡門 수시로 좋은 친구 찾아오면
壺酒有翕蔬 아름다운 산나물 술안주가 일미라오
淸琴嚮危欄 높은 헌함에 비껴서서 거문고 타노니
中曲且悲噓 곡조속의 슬픈 감화 그 뉘가 알겠는가
다. 비음
-洪大容(1731-1783) : 담헌 홍대용은 조선후기의 뛰어난 학자이시다. 일직이 실학에 뜻하신 선생은 수학과 자연과학에 힘썼으며 이십대에 혼천의와 자명종을 만드셨다. 고향 천원군 수신면 장산리 선생의 옛 집터에는 그 때의 사설 천문대 농수각의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고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쓴 한글본 을병연행록과 따로 문집 담헌서가 있다.
선생은 이때 지구는 돌며 우주는 무한하다는 생각을 의산문답속에서 확실히 하셨고 선생의 실학사상과 선비정신은 박지원 등 북학파로 이어졌다. 선생의 서거 이백주년을 맞이하여 뜻있는 후학들이 그 뜻을 기리는 시비를 이 곳 천안삼거리에 세운다.
이 일을 주관한 문학박사 김태준은 삼가 글을 짓고
학술원 회원 김동욱은 글씨를 쓴다
1983년 4월 13일
18. 다산 정약용의 유적지와 시
가. 위치
정다산 유적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다. 사적 제107호.
茶山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조선 말기 당대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선생은 순조 원년 신유교옥(辛酉敎獄)으로 인하여 장기(長鬐)를 거쳐 강진(康津)에 유배되어 18년 간 귀양생활 중 강진읍 동문 밖에서 8년 간 머물다가 순조 8년(1808) 봄에 외가 해남 윤씨가 거주하는 이 곳 도암면 만덕리 귤동 다산 초당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초당 좌우에 있는 도암과 서암의 서재에서 후진을 가르치고 저술에 전념하였다. 특히 백성을 다스리는 책인 [牧民心書]를 비롯하여 [經世遺表],[欽欽新書] 등 500여권에 달하는 저서가 이 곳에서 완성된 바, 선생의 애국애민사상이 역력히 스며 있다. 이를 총정리한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는 철학, 법학, 종교, 악경(樂經) ,의전,농정,천문,역상(易象), 측량,건축 등에 이르기까지 가위 우리나라 후학의 지표가 될 뿐아니라 세계적으로 학술자료가 되어 학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 하겠다.(이상은 안내문) 정약용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시대양심이자 시인정신이 투철한 우국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문학으로 이론과 시,부,사,사곡,전 등 한문학 전 장르에 이르고 이천여 수의 시를 남기고 있다.
다산의 시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되고 있다. 匡濟一世의 詩 즉 憂國愛民의 詩와 民族自主的인 詩가 그것이다.
나. 시비
1) 우국애민의 시
- 기민시(饑民詩) -
모두가 초췌하여 만신창이 되어서
메마른 산 송장 몸을 가누지 못해
거리마다 행길마다 유랑민을 만나네
....... .........
어디로 갈지 끝내 모르겠네
憔悴含瘡痍 槁莩(고표)弱不振 道塗逢流離..... 不知竟何之
이 시에서 민초들의 참상을 시의 소재로 삼아 유랑민을 뜨거운 마음으로 언급하고 있다. 시 속에는 위정자의 폭거와 비리를 고발하는 칼날이 서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둘째로 그는 조선 사람은 조선말로 시를 써야한다는 시의 자주론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2) 자주적인 조선시
조선조 삼당시인만 하더라도 당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 갈고 닦았다. 그러나 다산은 조선인이면 조선의 현실을 그려야한다고 조선의 자주적인 시를 주장했다.
노인이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은
붓가는 대로 정신없이 노래를 짓는 것
어려운 한자에 신경 안 쓰고
퇴고 하느라 더디지도 않고
흥이 나면 그것을 뜻으로 나타내고
뜻에 이르면 그것을 시로 쓰니
나는 진실로 조선인이라
즐겁게 조선시를 지을 것이다.
老人 一快事 縱筆寫狂事 競病不必拘 推敲不必遲
興到卽運意 意到卽寫之 我是朝鮮人 甘作朝鮮詩
그러나 김상홍(단국대) 교수가 지적했듯이 ‘조선시를 쓴다고 하였으면서도 중국의 그릇(한시)을 빌어 조선인의 삶을 담는 데만 집착한 결과 小說害道論을 주장한 점은 정약용문학의 한계이자 아쉬움’이라고 지적한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주희에서 정약용으로>라는 논문을 쓴 철학자 정형조 교수는 다시 <정약용에서 주희로>라는 말로써, 조선의 근대화의 실패와 시대적 요구에서 실학이 필요했다고 강조함으로써 정약용의 실학의 중요성이 시대적 요청에 의한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실학의 진정한 면모는 민생을 최우선에 두는 정치였다.민생을 중히 여겨야 국법도 존중된다는 민생우선의 사상이 정약용 실학의 핵심이다. 이러한 정책은 민주주의 사회인 오늘에도 변함이 없는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다산은 이황을 정점으로 하는 남인계 학통이다. 남인계 학통을 다시 학봉 김성일계, 서애 류성룡계 그리고 한강 정 구의 세 계열로 나눈다면 다산은 한강 정 구의 인맥에 속한다. 다시 말하면, 퇴계 이황-정구-허목(미수)-이익-권철신-정약용으로 분류하고 있다. 퇴계학통에서 중요한 사상적 전변기에 許穆과 李瀷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산은 16세 때 星湖 이익의 유고를 사숙했다. 39세 때 정조가 승하하자 이기경(李基慶)의 모함을 받고 四凶으로 지목되어 장기현을 거쳐 강진으로 귀양가게된 것이다. 이때 4형제 중 둘째형 정약종은 참수되고 중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귀양간 것이다. 이 곳은 강진만이 한 눈에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곳으로 다산이 후진을 가르치던 곳이다. 1958년 엣 터의 주춧돌 위에 다시 세운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다산 선생이 직접 바위에 새겼다는 ‘丁石’, 선생이 1808년 봄에 손수 파서 물을 마셨다는 불갈수 藥泉, 손수 만든 자그마한 연지, 돌을 부뚜막 삼아 차를 달였다는 청석 다조(茶竈) 등 四景과 蓮池假石山이 남아 있다. 특히 돌에 새긴 ‘丁石‘이라는 글자는 유배생활의 한을 단단한 돌에다 깊이 새겼을 것으로 믿는다. 일경마다 시 한 수씩을 지었으니, 다산 선생이 긴 유배생활에서 ’제 영혼을 헹구는 사람‘이 아니었던들 어찌 75세를 살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약천의 물을 손으로 떠서 두어 번 마셨다. 시원한 물맛이 가슴을 적신다. 오장이 엉킨 근심을 쓸어내리는 것이다. 역저 [여유당전서]를 이 곳에서 완성했으니 다산 사경은 그의 체취가 가장 많이 묻어나는 곳이다. 약천의 물을 ’한 바가지 떠 마시면 안개를 먹은 것(찬하(餐霞)=도가의 말)보다 상쾌하다’는 말이 빈 말이 아니다.
다. 다산의 행적
1762년 6월16일(영조38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 남양주국 와부읍 능
내리)에서 丁載遠과 海南 尹씨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남.
1769년(7세) ‘小山蔽大山遠近地不同’이라는 시를 지음
1775년(13세) 두보의 시를 익힘
1778년(16세) 星湖 李瀷의 유고를 사숙
1785년(23세)중용강의,정조가 인정,李蘗으로부터 천주교 이야기를 듣다.
1788년(26세) 천주교 몰두
1790년(28세) 전시갑과 2위 합격,정조왕,‘奇才詩人’이라함
1793년(31세) 부친사망,사직,[수원성제],[起重架圖說]로 수원성역사에 滑車,
鼓輪을 사용 4만량 절약
1796년(34세) <饑民詩>지음
1800년(38세)형조참의 사직, 민명혁배척
1801년(39세) 정조승하,이기경이 모함, 사흉으로 지목
1802년-1819년(40-57세) 18년 간 유배생활,
윤단의 산정이 있는 다산으로 옮김,[經世遺表], [牧民心書]
강진에서 다산학 강의, 제자 중 草衣, 意怐 등 고승도 있다.
1832년 (71세) 조선시론을 以詩論詩한 <老人一快事>
1834년 (73세) 사회시 <荒年水村春詞十首>
1836년 2월22일(75세) 작고
라. 茶山草堂과 西庵
다산초당은 귤원 처사 尹 慱(단)이 초가로 건립하여 후손을 가르치던 서당으로 사용하였으나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08년 봄 이곳으로 옮겨와 유배가 끝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1818년 8월까지 18명의 제자와 함께 講學을 하던 곳이다. 茶山草堂이란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模刻한 것이다.
그리고 서암은 1808년 다산 선생 유배당시 지어진 草幕으로 윤종기,윤종벽,윤종상,윤종진 등 18명의 제자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茶星閣이라고도 하며 허물어져 없어진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세웠다,
마. 다산 정약용 유적비
이 곳은 茶山 丁若鏞 先生께서 康津 謫居十有八年의 後半 十年 有餘의 歲月을 보내신 곳으로서 本來 橘園 尹 摶의 山亭이었다.先生은 1801年 辛酉敎獄에 連坐되어 康津에 流配되자 그해 11월에 東門밖 酒家에 寓接하고 居室을 四宜齋라 이름하니라. 1805年 겨울에 經函을 寶恩山房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가을에 다시 李鶴來家로 移徙하시었다. 읍거八年을 마치고 1808年 봄에 茶山草堂으로 옮기자 轉轉하던 생활에 安定을 얻은지라 臺도 쌓고 못도 팠으며 꽃과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가 飛流瀑布를 만드시니 茶山景色이 先生의 詩文과 더불어 더욱 빛나리라 때에 藏書 千餘 卷을 둔 東西兩菴에 起居하시며 弟子 18인과 더불어 講學으로 自娛하시니라. 1818年 九月之望에 鄕里로 돌아가신 후로도 茶信契를 남겨 群聚相樂의 길을 터놓으시니 先生의 얼은 길이 여기에 계시도다. 先生은 八代玉堂 羅州丁氏의 後裔로서 京畿道 揚州郡 瓦阜面 笤川馬峴에서 晉州牧使 載遠의 四男으로 태어나니 1762年 6月16日生이오 1836年 2月22日에 卒하시니 享年 75歲였다. 外家는 海南 尹氏로서 恭齋 尹斗緖 先生의 外曾孫이오 豊山 洪 씨 夫人을 맞아 二男 一女를 두었으며 夫人의 裙幅에 斷腸의絶筆을 남기니 流謫의 痛恨을 풀 길이 없다. 일찍이 22세에 經義로 出身하여 成均進士가 되자 正祖의 眷遇至極하였고 28세 때 文科로 及第한 후로 暗行御史 刑曹參議를 거쳐 承旨 등 堂上官에 이르는 사이 民心을 收攬한 治績이 至大하다. 한때 金井察訪, 谷山府使 등 外職으로 左遷되었으나 모두 僻派의 銳鋒을 謀免케 하려는 正祖의 깊은 뜻에서였다. 정조 薨(훙)去와 때를 같이하여 獄事에 連坐되니 四十 後半의 流配生活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先生은 도리어 이 時機를 하늘이 준 餘暇로 여기사 六經四書를 整理하여 修己之學을 定立하고 一表二書를 著述하여 經國濟民의 道를 밝히니 이로서 修己治人의 儒道는 燦然히 빛을 내어 近世開化의 길잡이가 되니라. 이에 茶山學은 바야흐로 國學의 中樞가 되니 學運의 隆盛함이여 天地와 더불어 無窮하리라. 1900年을 前後하여 頹(퇴)落된 草堂 옛 터에는 石壁의 丁石 二字만이 先生의 遺志를 간직한 듯 남아 있을 뿐 蕭然히 찾아오는 이 없더니 時運은 다시 돌아 1955年 이래 茶山遺蹟保存會에 의하여 本堂이 復舊되고 1974年부터 茶山草堂復元委員會가 事業을 繼承하여 이제 東西 二菴이 復元되니 이에 草堂의 옛 모습을 되찾으니라. 北으로 主君을 向한 憂國衷情을 달래며 南으로 黑山島 仲氏 巽庵(손암- 정약전)에의 慕情을 못 잊어 間或 春和秋晴에 逍遙自適하면서 排悶의 정을 풀으시던 이 곳을 다듬어 이 碑를 세우노라.
서기 1977年 4月 10日/哲學博士 李乙浩 謹撰/ 康津郡守 後孫 埰鈞 謹書/다산유적비건립추진위원회 謹竪/
19. 난고 김병연의 <浮石寺> 시 (1)
가. 찾아가기
7월 24일 (목).건강이 여의치 않아 집에 있는데 마침 설계사무소에 다니는 장남이 일주일 휴가를 얻어 부석사를 간다는 말에 동행을 한 것이다. 승용차로 3 시간,10시경에 도착한 것이다. 부석사 입구의 당간지주를 보고 속계를 지나 선계에 발을 디디는 것은 지금 세상에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일종의 낯설기를 찾아 나서는 것이니까. 그런 점에서 사찰의 당간지주는 언제 보아도 낯설기의 한 사물이다. 불교행사 때 행사를 알리기 위해 사찰 앞에 기를 다는 일종의 깃대이다. 仙界인가 禪界인가 사천왕의 무서운 상을 넘겨보면서 불세계로의 발디딤을 어찌 무심하다 하겠는가. 무량수전을 두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양문과 안양루 밑 계단의 좁은 공간을 빠져 나와 다시 지상으로 머리를 내미는 좁은 통로는 속계와 법계의 경계선을 넘어가는 느낌이다. 더구나 계단을 지나 올라서면 시선이 무량수전 본당에 머물게 된다. 숨을 참고 올라 신라시대의 국보 석등을 오른 쪽으로 비켜 무량수전 앞에 서면 말못할 환희에 젖게 더다. 장남은 석등이 좌측으로 조금 비켜 앉은 것은 아미타불이 앉은 위치를 고려하여 우측으로 접근하게 하려는 뜻이라 한다. 주지 勤日 스님은 보이지 않고 대구 출신인 젊은 도선 스님은 그 때 법명이 떠오르지 않아 찾지 못한 것이다. 조사당에서 삼배하고 빛바랜 조사 의상대사상을 찬찬히 뜯어 본다. 이 황 선생이 禪扉花를 읊은 시가 있다는 안내의 말을 보고 당대의 사상적 교류가 억압되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었음을 알게 한다.
선비화는 학명이 골담초라 하는데 의상이 심었다는 선비화가 조사당 뜰에 푸른 잎을 드러내고 있다. 철책을 하여 보호하고 있으나 생기가 없어 보인다. 안양루 아래 좌측의 법종각에 이르니 불국사 범종보다 크기는 작으나 비천하는 용의 조각들 섬세하기 더하다는 느낌이다.
나. 종면의 각시刻詩
願此鍾養遍法界
鐵圍幽暗悉皆明
三途離苦破刀山
一切衆生成正覺
원컨대, 이 종소리가 법계에 두루 퍼져 어두운 세상을 모두 밝혀 삼도(三惡道)에서 벗어나며 刀山이라는 지옥을 부수어 일체의 중생이 정각(正覺)을 이루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불교에는 원음이라는 것이 있다.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듣는 이의 정도에 따라 깨닫게도 되고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차별성이 있다. 정각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깨달음이다. 범종이 어찌 단순한 소리일 것인가. 소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해 세상에 울리는 것이니 천언만어의 법어가 따로 없는 것이다. 공양시간이 되었는가 하여 부엌으로 찾아가니 벌써 공양시간이 지난 것. 머뭇거리고 있는데 보살님이 조금 기다리면 밥이 있을 거라는 말이 있고 밥이 없으면 국수라도 삶아 주겠다는 것이다. 보살의 말이 고마워 마루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까 안양루를 청소하던 처녀가 건너편 마루에 앉아 있다. 장남에게 관심이 있는냐 물으니 실없는 소리로만 듣는다. 처녀에게 우리 아들과 사귀어 보라 하니 처년 웃으며 아버지가 아들을 소개하는 것 처음 보았다며 웃는다. 우리 모두는 웃었다. 안양루 현판의 사진을 찍고 점심도 잔득 먹고 나니 부러운 것이 없다. 인간의 욕심이란 사실 별 것도 아닌 것 같다. 밥 한 그릇에 만족을 하니 말이다. 하산 하는 길에 친구의 부인을 만나 인사를 하다. 먼 길에 아는 사람을 만나니 반가움이 더한다. 부석사에서 몇 시간 있다 나오는 길인데 속세의 사람들을 보는 것 같으니 편견과 교만이 얼마나 가득한가를 알게 한다. 소수서원에 닿은 것은 태양이 달아오르는 시간대이다.
景濂亭에 오르니 벽면에 한시가 즐비하다. 당시 군수 주세붕의 <경렴정>시가 있다.
여기에 차운하여 퇴계의 차운시가 있다. 商山 周世鵬 의 경렴정 시, 1560년 명종 15년 (嘉靖 39년) 경신년 어사 崔 顒의 차운 시가 있다.
산은 끝 없는 푸름을 안고/계곡엔 다하지 못하는 물소리/ 가울에 오는 객은 사색에 빠지겠네/ 갸날픈 퉁소 소리에 구름이 경렴정에 머무는구나.
주지하다시피 소수서원은 원래 백운동서원(萬曆경술춘 각)이라 하였는데 선조 사액서원 하면서 (인재가 끊이지 않는다는 의미) 토지와 노비를 내렸다 한다.
백운동이란 간판이 작은 글씨로 씌어있는데 만력 경술년이니 1610년 광해군 2년이 된다. 이외 경렴정 현판에 이름이 밝혀진 시인은 황 진, 황준랑, 두곡,홍우정, 류세명, 내산 정 한, 강침, 황 시 ,관찰사 안현, 전 사간 황효공, 전 직강 안공 신(가정정미 중춘),무술추 김응조, 무술 성균, 권 지 오 건 등의 한시가 있다. 무술년은 1598년 선조 31년이다. 직방재, 일신재, 경건정각, 장서각 등이 좌우로 안치되어 있고 지ㅣ난 해인 듯 文成公 安珦(1243-1306) 향사 순서가 적혀 있다.
다. 소수서원의 ‘殿座圖’.
이 전좌도는 지성 공자를 주향으로 하여 아성제공제후를 종향라는 문묘향교의 東西廡 位牌配享式을 보여주는 인물 배열도로서 일종의 의궤도이다. 확인에 의하면 조선 중종 8년 (1513)에 제작된 이모본임을 알 수 있으며 소수서원에는 이 작품과 함께 원본격인 전좌도가 전해오는데, 일설에 의하면 그것은 고려 충열왕 29년(1303) 문성공 안향(1243-1306)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라 한다. 이 전좌도는 지본에 眞彩로 그렸는데 부분적인 채색의 剝落은 있지만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단상 중앙의 공자정면상을 정점으로 하여 그 좌우와 단하의 제자들이 약간 측면상을 이루며 중앙을 향해 이삼중으로 종렬배열되어 있다. 인물상은 각각 주색대에 금자로 이름을 명기했는데, 이들 인물은 모두 椅坐像으로 방형관모를 쓰고 홀(忽)을 든 동일복식의 상용으로서 마치군신의 조례의식과 흡사하다.
또한 화면의 상부에 위계의 정점을 두는 삼각형구도는 중국 송.원대의 의궤도에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양식으로써 이 정좌도의 유입경로를 추찰케 한다. 대성전 전좌도는 이처럼 고대식을 지니면서도 조선시대의 각종 의궤나 연회도에 미친 영향 또한 주목할만한 자료‘ 라고 소개하고 있다. 필자가 부석사를 찾았을 때는 현판의 시가 마멸되어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해가 불가능 했는데 다시 본 안양루에는 김립 김병연(1807-1863)의 시 <浮石寺>를 소개하였다.
라. 시 <부석사>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을 오지 못하다가
백수가 되어 이제 안양루에 올랐네
강산은 그림같이 동남으로 벌려져 있고
천지는 부평초 같이 밤낮으로 물에 떠 있구나
세속의 만사는 달리는 말처럼 바쁜데
넓은 우주에 이 한 몸은 물에 떠 있는 한 마리 물오리 같구나
많은 세월 어느 해에 이같이 아름다운 경치를 또 볼 것인가
세월은 참으로 이 늙은 이에게 무정도 하구나.
김 립 시인이 노경에 이르러 영주 부석사를 찾은 것이다. 그의 삶이 정착되지 못하고 방랑의 길을 계속하였음을 白首, 무정한 세월, 물에 떠 있는 한 마리 물오리 등의 시어에서 찾을 수 있다. 만년의 그는 방랑의 쓸쓸함을 부석사 안양루에서 흐느꼈던 것인가.
20. 난고(蘭皐) 김병연 시비(2)
가. 청풍쉼터
청풍쉼터의 蘭皐 金炳淵(1807-1863) 詩碑를 찾았다. 무등산응 찾은 것이 오후 3시. 안내도를 보니 김삿갓 시비의 위치가 보인다. 좌측으로 계속 올라가니 다시 청풍쉼터로 가는 내리막길이 있다. 약 20여 분을 더 달려야 청남교가 있고 큰 못이 있다. 더위에 사람들이 산속에 숨어 있고 대흥사로 들어가는 차들이 줄을 잇는다. 김병연의 금강산 시비에 몸을 기대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언제 또 이곳을 올 수 있을까 하는 우려는 내 나이를 생각해서다. 말이 쉽지 좁은 한국이라 하지만 전국을 몇 번씩 여행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난고의 시는 그의 일생이 보여주는 것처럼 매우 낭만적이고 자유분방한 정서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사회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풍자는 지도층과 권력자를 향한 하나의 비수였다. 당대의 진보적 의식을 가진 청년 김병연에게 있어 조부가 저지런 부끄러움은 그를 평생의 올가미로 씌웠다. 따라서 가문적인 연좌의식에서 당대의 이데올로기였던 계급문제를 초월하거나 파괴할 수 있었던 아니며 스스로를 부정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병연의 시와 사회의식은 이러한 천부적인 부정의식과 운명적인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해야하는 타고난 운명자의 삶이었다.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스스로 재능을 드러낼 수 없다는 자괴감은 그의 배타적 현실의식에서 파악되는 것이지만 한문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던 그는 쉬운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깊이 있는 의미와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은 뛰어나다는 생각이다. 아래에 소개하는 두 편의 시는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 있으면서 의미의 전달이 얼마나 심오한가를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청풍쉼터는 탁 트이고 넓은 초원 위에 조성되어 있어 찾는 이로 하여금 떠나기 싫게 만드는 자연의 흡인력이 있다.
나. 한시
1) 금강산金剛山
松松佰佰巖巖廻 水水山山處處奇
소나무와 /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고 돌아
물과 물/ 산과 산이/ 곳곳마다/ 절경이네
2) 구월산(九月山)
지난 해 구월에 구월산을 지났네
금년 구월에도 구월산을 지나네
해마다 구월에 구월산을 지나니
구월산 풍경은 늘 구월이네.
昨年九月過九月 今年九月過九月
年年九月過九月 九月山光長九月
다. 감상
시인 김병연은 한자를 우리 언어의 특성에 맞게 잘 살린 시인이다. 또한 표현이 쉬운 대신 시행에 숨어 있는 풍자와 부정의식은 엄청난 질량을 수반하고 있다. <금강산>,<구월산>은 한자의 동어반복을 사용한 절창의 한 예다. <胡地無花草>에서는 이 백의 시를 비판한 것이고 <書堂乃早知>는 버릇없는 훈장을 나무란 것이다. 구월산은 954미터의 높이로 행정개혁 이전에는 황해도 신천군 용진면, 단군이 은퇴한 아사달산이 구월산이요 황석영의 [장길산](1974-1984)의 배경이 되는 산이다. 인권이 없는 천민들을 착취하고 갖은 부정과 부패로 민초들을 위협했던 당대의 권력층을 향해 민생을 되찾고 계급해방을 추구하던 피압박민들의 처절한 투쟁의 본거지가 황해도 월산이다. 김삿갓이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비웃고 권력자와 가진자들을 거침 없이 풍자하고 비판하던 위인으로서 구월산을 모를 리 없다. 지난 해에도 구월산을 지나갔고 금년뿐 아니라 해마다 구월산을 지나간 것이다. 피의 자취가 없다한들 민초들의 한조차 없을 것인가, 칼자루 쥔 자들의 역사기록이 어떻게 말했건, 인간해방운동은 인간해방운동이었지 그것이 역적의 행위요 민족반란은 아니란 절규를 구월산에서 들을 수 있을 뿐이다. 김삿갓의 귀와 눈은 그러한 시대혁명과 사회불평등에 열려 있었던 것이다. 구월산의 새소리,물소리,바람소리가 단순한 소리가 아니요 죽은 이들의 한맺힌 울음일 것이다. 시비의 비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金병연 선생은 고려태사 휘 선평 후예로 서기 1807년 3월 13일 김안근 공의 차남으로 명문 안동 김씨 집에 태어났다. 자는 성심 호는 난고 김삿갓(김립)은 곧 속칭이다.서기 1811년 11월 홍경래 역난 당시 선생의 조부 김익순 공은 선천 방어사로 있었는데 불의에 달려든 난군에게 항복한 탓으로 이듬해 삼월 구일 복주를 당하고 그 일가는 조정으로부터 폐족의 명이 내렸다.이 때가 선생의 나이 육세되던 해였는데 종복 김성수를 따라 형 병하와 더불어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 그것에서 자라나며 수학하였다.그 뒤 주죄는 조부에만 한하고 자손에는 미치지 않기로 영이 내려 선생은 부친 김안근 공 곁으로 돌아가 22세때 과거에 급제했으나 폐족의 자손임을 부끄러이 여기어 그는 인간의 영달을 버리고 팔도유랑의 길을 떠났다. 조부를 대신하여 속죄하는 뜻으로 머리에 커다란 삿갓을 쓰고 단장을 벗삼아 오늘은 석양비끼는 산 그림자를 영탄하고 내일은 주막집에서 세상을 비웃으며 행운유수와 같이 일생을 방랑울분을 토하는 구구절절이 곧 파격적인 시요 해학적인 걸작이었으니 주옥같은 작품들이 ㅜ전되고 애송되기에 김삿갓을 모르는 이가 없다. 끝내 불우한 시인으로 방방곡곡을 전전타가 서기 일팔육삼년 삼월이십구일 오십칠세를 일걔로 무등산록 동복에서 한많은 세상을 한점 구름처럼 떠났다. 이제 선생의 고혼을 위로하고 불후의 금자탑을 기리기 위하여 뜻있는 이들이 정성을 모아 여기 시비를 세운다(선생은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셨음)
서기 일구칠팔년 십월이십이일/난고 김병연시비건립위원회입/글 양천 허 연/글씨 예서대자 종하 김충현/ 해서소자 광산 김철근
라. 여정따라
일행은 다형 김현승의 시비를 놓치고 내려오면서 무등산 전망대에서 광주시를 내려다 본 것이다. 무등산 아래로 자욱한 저녁안개 속에 잠길 채비를 하는 듯 태양이 기승을 꺾은 시각이다. 흰 빛깔의 아파트군이 유달리 드러나는 광주시가지는 폭이 넓어 카메라 렌즈에 다는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 번을 찍은 것이다. 여느 도시와 외견상 다름이 없으나 역사의 흐름에선 언제나 또 하나의 점으로 남아 있는 광주란 도시, 자유당 말기에 친구가 있어 무등산을 한번 올랐던 그때는 독재와 민주주의가 극한의 대립을 이루어 광주일고와 광주제일고 학생들이 무언의 갈등을 안고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난다. 그때 광주일고 학생으로 아버지가 광주경찰서 수사과장으로 있다는 그에게 중국의 사상가 손 문의 책을 사준 기억이 새롭다. 어쨌든 광주는 한국 근대역사의 중심에 놓여 있는 도시다. 식민지시대 광주학생 사건으로부터 최근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일련의 민족운동은 지속적인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은 김대중정부시절 민주화운동으로 승격되고 당시 희생되었던 이른바 반란군들이 민주열사로 자리매김되어 지하에서나마 위안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어떤 정치적인 조치에서가 아니라 온 국민의 한결같은 열화로 그들을 민족민주열사로 추앙되어야할 그 역사적 진정성은 없는가 이같은 관점에서 경기도 마석의 모란공원에 있는 민족민주열사의 묘소에 이어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광주시 망월동의 국립묘지를 찾은 것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역사적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역사의 큰 줄기를 오염된 역사적 강으로 방류하는 오류의 흐름만 보고 현실이라고 한 적은 없었던가 이러한 기분으로 망월동을 찾은 것이다. 망월동은 초행길이라 묻고 물어 늦을 무렵 5⸱18묘지에 당도한 것이다. 먼저 ‘5⸱18 민주항쟁추모탑’으로 구묘지를 찾았다. ‘영.호남 사랑과 우정의 기념비‘는 그간 두 영호남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벽 때문에 갈등을 많이 겪었다는 것을 현실로 보여주는 기념비였다.
‘1980년 5월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산화하신 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5월 단체와 부산사회단체 간의 영호남 화합교류는 광주를 사랑하는 부산거주 황명자여사의 노력으로 인해 5.18광주의거 부상자회가 88.10.22 부산을 최초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부산 자성대로타리클럽을 부상자회 초청으로 93.10.10-11 광주를 방문하였고 이에 5.18유족 부상자회원들이 93.12.11 자성대로타리클럽 초청으로 부산을 방문하는 등 영호남간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교류와 협력이 지속되고 있는 바,우리 모두는 이 작은 만남이 민족화합을 실현하는 시금석이 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이를 기념하고 여기 민주 성지에 이 비를 세웁니다’ 라는 우정의 비가 있다.(1994년)
21. 귤은(橘隱) 김 류(金瀏)와 삼호팔경시
가. 삼호팔경시(三湖八景詩)
1) 규정추월(橘亭秋月) -
귤정에 비 개이고 계화꽃 핀 가을
시인 묵객들이 이 월명루를 찾아드네
루대 위에 넘쳐나는 황금 빛 국화
강호에서도 이 꽃이 제일 으뜸일세
橘雨天晴桂子秋 風流每御月明樓 樓頭千樹黃金色 躍在江湖第一洲
2)- 백도귀범(白島歸帆) -
먼 섬은 언 듯 쳐다보이고 가까운 섬은 다가오고
말이 달리듯 새가 나는 돛이 지나왔네
輞川의 좋던 시객을 생각하니
아득히 떠나가는 돛배는 보기 드문 장관일세
原圖閃來近島歸 馬如馳範鳥如飛 想得輞川詩客好 長天風帆壯觀稀
3)- 이곡명사(梨谷明沙) -
눈빛은 배꽃같고 달빛은 모래빛 같아
서로 비춘 밝은 빛이 물가에 가득하네
아마도 먼 옛날 큼직한 바위가
몇 번이나 걸러지고 몇번이나 문질렀나
雪色梨花月色沙 雙明照麗滿汀多 借問先天許大石 幾回淘汰幾回磨
이 밖에 거문도의 三湖八景은 죽림야우(竹林夜雨),녹문노조(鹿門怒潮),용만낙조(龍巒落照), 석름귀운(石檁歸雲), 홍구어화(紅國漁火) 등이다.
나. 김 류의 행장과 거문도 명칭
김 류(1814-1884)는 거문도가 외침으로 점거되고 극심한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인 1814년 (순조 갑술년)에 東島 망양추귤동(현 柚村里)에서 태어났다. 공의 휘는 瀏요 자는 士亮이며 호는 橘隱이다. 귤은의 조상은 중세에 거문도에 이주하였으며 조부는 정택 부친은 志權이다. 연소한 나이에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 長城의 蘆沙 奇正鎭(현 高山書院)문에서 수업하여 경사문학에 정통하여 조선조 6대 성리학자(서화담,이퇴계,이율곡,이진상,임성주)에 이어 선생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시문과 전술,예능에도 능하였으며 귀향하여 낙영재를 짓고 후학을 지도 한 바 그 명성이 사해에 알려졌다. 특히 1884년 11월 오대징 등과 더불어 군대를 이끌고 마산포에 도착했던 청나라 수사제독 정여창(丁汝昌)이 거문도에 와서 주민과 필담을 주고 받았던 일이 있었다. 이 때 김 류의 제자들이 실력을 발휘하였던 것인데 김류의 제자들의 실력과 문장이 뛰어남을 알고 종래 三島라 불렀던 지명을 巨文島라 부르도록 조정에 청원하였다 한다. 거문도라는 명칭이 유래한 연유인 것이다. 거문도는 청국과 영국의 조차지였다. 김 류는 노사 선생의 수제자로 총애를 받았으며 노사 선생은 문장에 미해점이 있으면 흥양삼도 귤은에게 가서 물어보라 하였다. 육순 고령에 완도군 청산제에 초빙되어 후학을 지도하다가 고종 21년 갑신년(1884)4월에 잠들다. 현재 귤은 선생 숭모회에서 행장비건립을 추진 중에 있다.
거문도는 일찍이 개화기의 외세침략을 받은 곳이다. 거문도사건이 그것이다. 1884년 한로통상조건의 결과 원산항의 사용권을 얻은 러시아가 남진태세를 보이자 영국이 이듬해 4월에 군함과 수송선으로 거문도를 점령하여 포대를 구축하였다가 이홍장의 조정에 의해 1887년 2월에 철수한 사건을 말한다. 영국군은 거문도를 Port Hamilton 이라 이름짓고 23개월 간 주둔한 것이다. 그 이전 186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 상선과 해군함정이 드나들었다. 영국군 묘지는 지금도 거문도 동도 해변에 있다. 주민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던 그들은 해군사병과 해병대원 10명이 이 섬과 근처 해역에 묻혔다. 1886년 사망한 두 명과 1903년에 사망한 한 명의 해군병사의 기록은 비문에 새겨져 있으나 나머지의 묘지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폴.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를 생각게 한다.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고요한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바다를,쉼 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폴.발레리의 고향은 지중해 연안이다. 사람은 해변에서 바다를 보고 있을 때가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순간이다.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어지고 들이 별세계를 이루고 있다. 영국군이 거문도에 오게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는 말을 하였던 것은 거문도 일대의 절경 때문이다. 거문도에는 신선바위, 비로봉 등 볼만한 곳이 있지만 그보다 희귀식물이 많은 것도 또다른 이채다. 서도의 동백숲길을 오르면 광나무,참식나무,예덕나무,구실잣밤나무,생담나무,조록나무,보리장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스기목 등 안내자의 말로는, 희귀수종 350종,해양식물170종이 있고, 희귀조류는 동박새,팔색조 등 35종이 있다 한다. 필자는 산을 오르면서 안내판에 써놓은 식물 이름을 일일이 적어본 적이 있다. 당국의 세심한 배려를 절감하면서 말이다.
다. 자작시 - 거문도 파도야 -
밤이면 남해파도가 먼저 우는 곳
갯바람 낯선 사람더러
낮은 어찌하고 밤되어 사무치는지
거문도 여객선 여수로 떠나면
밤바다 소주잔으로 건배 올리자던
늙은 파도야,
옆모습 차만 뺨 오리섬에 버리고 왔나
주름살로 밀려오는 고독을 웃고만 있노.
그대 살진 내음에 한 잔 가득 부딛쳐
떠나는 배 꽁무니에 높이 들어
이곡명사(梨谷名沙) 모래알로 뿌린 정(情)아
선창가 빈 배 바람에 목매는 밤
속살 흰 갯가 삼호카페에서
멸치 안주 놓고 수작부린 옛 노래
거꾸로 옳이 굽이굽이 욕망을
무슨 장 긴 방에서 그대 철석임에 귀 멀고
삼호교 등 굽은 다리
꾸버정 넘는 파도야
저기가 노루섬 해돋는 곳이냐.
라. 여담 :
지난 2004년 4월에 고교동창 십여 명이 거문도 여행을 간 일이 있다.거문도, 백도 등을 일주하고 우리 나라 남단에 이 같은 절경이 언제 있었던가 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육십을 넘어 칠십을 앞두고 그날 밤 거문도 해변에서 소주잔을 부어놓고 일행은 얼굴에 패인 주름살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년시대로 돌아가 떠들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는 것이다. 늙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면서 자기는 저렇게 늙지 않았을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밤바다를 향해 늙은이들의 마지막(?) 광기를 옛 노래로 달래던 거문도에서의 하룻밤을 생각한 것이다. 시에서 ‘늙은 파도야‘는 늙은 친구들의 얼굴을, 파도는 그들의 주름살을 바다의 파도와 연결해 보았다. 시에서 리듬이 필요하다면, 해변에서 출렁이는 파도의 리듬과 늙은이들이 광기로 부르는 옛 노래에서 우수적인 시의 리듬은 필요 불가결한 것이 아닐까. 이 시에서 파도 그 출렁이는 물결 그리고 살아온 인생의 리듬은 자연스레 조화를 이룰 것이다. 이시는 내면으로부터 북받치는 힘이 다소 부족하다는 생각은 있지만 늙은이들이 해변에서 낭만을 즐기는 분위기는 어느 정도 전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22. 최익현의 <존심명리存心明理>
가.답사 : 2005년 4월 위치: 천안시 독립기념관
나. 한시비 <성충대의 (聖忠大義)>
晧首舊畋畝
草野願忠心
亂賊人皆討
何須問古今
白髮을 휘날리며 밭이랑에 일어남은
草野에 忠誠으로 불타는 마음
亂賊을 치는 일은 사람마다 해야 할 일
古今이 다를소냐 물어 무삼 하리요
對馬藕人 최 익현
다.
의 가르침
의 나라를 함께 하자는
에서 날라온 의
나라와 스승 위해 목숨바친 제자 의 가 여기 한다.
등 에 과 의 을 잡으시다
속을 밝힌 -
등 에 과 을 펼치시다
길로 !뻗친 -
을 과 으로 의 을 이끌어시다
으로 치솟은 -
23. 홍암 나 철의 한시비
가.
鳥鷄七七 日落冬天
黑狼紅猿 分邦南北
狼道猿敎 滅土破國
赤靑兩陽 焚蕩世界
天山白陽 旭日昇天
食飮赤靑 弘益理化
나. 나 철의 예언서
을유년 8월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문화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자유의 극한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한민족의 선도문화가 크게 번창하여
공산.자유의 대립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다. 홍암 나 철 선생 약력
단기 4196(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칠곡마을에서 태어남
단기 4224(1891)년 29살의 나이로 대과에 장원급제
단기 4240(1907)년 45세 때 을사오적 처단을 위해 암살단을 결성하려 했으나 실패함(10년 형 선고)
단기 4242(1909)년 47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 독립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후에 대종교로 개명)
단기 4248(1915)년 53세 때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발표하고 대종교를 종교단체를 가장한 항일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압박함
단기 4249(1916)년 8월 15일 54세 때 황해도 구월산에서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라는 순명삼조를 유서로 남기고 스스로 숨을 끊는 폐식법으로 순국함. 현재 홍암 나 철 선생의 묘소는 중국 황룡현 청파호 마을에 있으며 나철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무장독립단체인 북로군정서 만들어 청산리전투와 같은 공로를 세웠다.
천안시 독립기념관 내
24. 매천 황현黃玹 유시비
가.찾아가기
1996년 6월 16일(일) 전남 구례군 청천초등학교를 찾았다. 황 매천의 유허비를 보기 위해서다. 개교 60주년을 맞고 있는 청천초등학교 교정에 매천 선생의 유시비가 있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한 착상일 것이다. 전면에는 시가 있고 이면에는 황 씨 전남 종친회에서 1974년에 세웠다는 간단한 기록이 있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기나긴 역사를 돌이켜 보니/ 글 배운 인간으로서의 구실을 다하기가/이처럼 어려운 줄은 몰랐구나/
나 .시비
秋燈掩卷懷千古 亂作人間識字人 (遺詩 속에서)
전남 구례군 화엄사 입구 못미처 왼쪽으로 <시의 동산>이 있다. 구례경찰서 마산파출소에 문의한 것이다. 시의 동산에는 눈에 띄는 초대말씀이 있다.
장대한 기상으로 영겁을 달리는 지리산
한 때는 이 땅의 아픈 역사를 온 몸으로체험한
산 산
오늘도 평화를 기원하며 침묵하는 이 산자락에
앉아
청학이 깃을 치고 옥수가 속삭이는
화엄사 골 산허리 타고 내리는 태고의
바람소리 멧새들 노래소리
당신께 드릴 파랑새를 안고 여기
시인들이 다가오네요.
길손이여 !
흐르는 시심 한 오라기 풀어 막혔던 가슴
활짝 열어요
이 동산에 사재로 시비 20기를 세워 주신
우리 고장 출신 和堂 丁奇錫 시인께
경의를 표하며 그 동안 많은 어려움을
무릎쓰고 이 정비사업에 협조해주신 여러
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1989년 12월 구례군수/
길손이여 !
우리 함께 시정에 젖어
인생의 애환을 나누어 보지 않으렵니까?
라고 하여 시의 동산이 정기석 시인의 사재로 이루어진 것과 지나가는 길손을 유혹하여 잠시 지리산 자락 시의 동산에서 시인과 더불어 노닐어보자는 뜻을 새겨 놓았다. 시의 동산에는 20여기의 시비와 많은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다.
다. 황 매천 절명시絶命詩 四首
역시 시의 동산 윗쪽에 있는 매천 선생의 한시비에는 유명한 絶命詩 4 수가 있다.
梅泉 黃 玹은 1855년 12월 11일 광양군 봉강면 서서촌에서 부친 時黙과 어머니 豊川 靈 氏와의 장남으로 태어나 33세 때 구례간전 만수동으로 이사하여 48세 때 현재의 광의 월곡 마을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長水요 자는 운경(雲卿)이며 호는 매천이다. 4세 때부터 글 공부를 시작하여 7세 때는 시를 지었으며 15세 때 향시에 응시 황 신동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29세 때에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에 34세에 생원회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하였으며 1864년 고종 원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시까지의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춘추필법으로 [梅泉野錄]을 저술하였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의 비보를 들은 매천은 절명시 四首를 남기고 9월 10일 (음 8월 7일) 음독 절명하였다. 한말 三大 문장가이며 애국지사 황 현의 약력이다.
독자를 위해 해석문을 먼저 싣는다.
1) 시비
난리 속에 살다보니 백발이 하얗게 되었구나/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다가/
오늘날 참으로 어찌 할 수 없게 되었구나/
가물거리는 촛불이 청천에 비치도다/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임금자리 옮겨지니/
구중궁궐 침침하고 해만 길고나/
이제부터 조서와 칙령은 다시 없을 것이다./
임랑지에 눈물이 천 가닥이나 흐르는고나/
새와 짐승도 슬피울며 바다와 산도 찡그리고/
무궁화 삼천리 강산은 속절없이 갔도다./
가을 등잔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의 일을 곰곰이 생각하니/
아! 글자나 안다는 사람이 참으로 괴롭구나/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으니/
다만 살신성인 할 뿐이요 충성은 아니로다/
겨우 송나라 윤곡을 따를 뿐이요/
진동이 했던 뒤를 따르지 못했음을 부끄러워한다/
亂離滾到白頭年 幾合捐生却未然 今日眞成無可奈 輝輝風燭照蒼天 妖氣晻의 帝星移 九闕沈沈晝漏遲 詔勅從今無復有 琳琅一紙淚千絲 鳥獸哀鳴海岳嚬 槿花世界乙沈淪 秋鐙揜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曾無支履半椽功 只是成仁不是忠 止竟僅能追尹穀 當時愧不躡陳東
(단기 4326년 12월 일 함안 조용민 근서)
[梅泉野錄] 卷之六(隆熙四年 경술)에 매천 선생의 절명시 네 수가 있다. 동시에 조선이 일제에 병합됨을 울분하여 약을 먹고 절명한 기록이 있다.
한국이 망하자 전 진사 황 현은 약을 먹고 죽었다. 황 현의 자는 운경(雲卿)이요 어른의 고향은 長水이다. 武愍公 進의 후예이며 호는 매천이다. 어려서 재주와 슬기가 있어 蘆沙 奇正鎭이 매천을 보고 이상히 여겼는데 자라서 스승으로 모시기에 이르렀다. 심재(밀齋) 李建昌, 滄江 金澤榮과 사귀었으며 태상황제 무자년(25년)에 학교에 들어갔다.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기이한 행동을 좋아하였으며 세상에서 가히 할 일이 없음을 알고 고향에 내려와 시문으로 세월을 보냈다. 문장력이 뛰어났으며 평소에 불서는 보지 않았다. 융휘 4년 8월 3일 합방령이 군으로부터 동네로 알려지자 그날 밤 아편을 먹고 익일에 절명한 것이다. 유시 네 수가 있다.
우리의 선조 중에 나라를 걱정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가 한.둘일까마는 조선 근대사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영합하여 나라를 송두리째 넘긴자 있거니와 아울러 광복 후에는 그들 매국노들이 도리어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한 사실과 그 연장선상에서 오늘날 민족의 의미자체가 변질되려는 기미마저 보이고 있음에 비추어 매천 황 현의 죽음은 그의 말대로 오로지 살신성인의 정신일 뿐 허울좋은 충성이 아닌 것이다.
2) 류인석柳麟錫의 애도시
황상사(현)가 절개를 지켜 죽으면서 남긴 절구시 4 수의 운을 받아 그를 애도하노라
황상사는 호남 남원군에 살았다. 합방의 변이 일어난 날 임금께서 왜놈들의 압박에 못이겨 양위를 윤허한다는 칙지를 반포하시자 원통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아들한테 술과 안주를 갖추게 하고 이웃 친구들을 청해놓고 종전대로 술을 나누고는 그날 밤으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책상 우에 칠언절구 4 수를 써놓고 또 아들에게 유서를 남겨놓았다. 유서의 마감에 <너희들은 과히 슬퍼말라>고 써 놓았다. 장례식에 참여한 사람은 만여명이 되었다. 왜놈들도 추우신이라고 칭찬했다한다.
사천년 흘러온 작은 중화 나라에
대화가 찾아들줄 꿈엔들 알았으랴
남원땅의 황상사는 남달리 뛰어나서
의리를 지니고서 하늘로 올랐구나
급박한 운명을 만회할길 없게 되니
이런 삶이 지사에겐 분초도 지리했네
구중궁궐 바라보ㅗ며 가을밤에 흐느끼며
천만가닥 솟는 눈물 태연히 훔쳤구나
일월이 빛을 잃고 천지도 찌푸리니
갑작스레 동청일엽 나부끼며 떨어지네
뉘 아니 죽을가만 그대 죽음 남과 달라
상여 메고 한탄하며 만사람 흐느끼네
공이야 있건 없건 옳바르게 죽어야지
도를 위해 죽는 것이 나라 위한 충성이라
도의지국 부추김이 그대에게 달렸거늘
해동땅에 어느 때나 정의가 있으리라.
류인석(1842-1915): 호 毅菴,자 汝經, 가원도 춘천군 가정리, 14세나이에 화서학파인 화서 이항로 선생에게서 학문을 배우다.
3) 호세.리잘의 절명시
필자는 황 현의 <절명시>를 읽고 필립핀의 애국자 호세 P.리잘 박사를 생각한 것이다. 호세.리잘의 절명시 <나의 마지막 작별인사( My Last Farewell)>를 읽고 한국에서 멀지 않은 민주주의 나라 필립핀의 역사와 그들 식민지 역사를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절명시는 호세.리잘이 베이검바얀(Bagumbayan)의 감옥에서 지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필립핀은 16세기 중세기부터 20 세기 중엽까지 그 중간 광복기간(1872-1898) 26년을 빼고 계속 외세인 스페인, 미국 그리고 일본 등으로부터 식민지지배를 받아온 나라다. 호세.리잘(1861.6.19 - 1896.12.30)은 라구나의 카람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첫 번 째 스승은 그의 어머니였다. 그는 마드리더 중앙대학을 졸업하고 영국의 베르린대학과 독일의 라이츠찌히와 하이델벨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스페인에 대한 내란과 반란의 혐의로 스페인이 쏜 총에 의해 죽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전체시는 1연 5행씩 14연의 스탄자 형식으로 된 70행의 장시이다.
- 나의 마지막 작별인사 -
안녕, 태양이 애무하는 나라 나의 조국
동양의 진주 해양의 나라 우리의 잃어버린 에덴
................
모두여 안녕, 나의 정신마저 찢어버린 그대도
가정마저 빼앗겨버린 어린 시절 나의 친구들
피곤한 날들로부터 나를 쉬게한 것을 감사하며
나의 갈 길을 밝게 해준 고마운 친구 당신도
사랑하는 모든 생명들이여 안녕, 죽음의 세계 거기
편안한 휴식이 있을 터이니.
25. 명미당 이건창 문학비
가. 생가 :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梅泉이 쓴 ‘명미당’이란 휘호가 초가 안에 있다.美明堂의 미명은 程子의 質明美盡(바탕이 분명해야 결과가 좋다)에서 취했다함.
나. ‘명미당 이건창 선생 문학비’
崧陽道中
崧陽六載五經過 不見扶山與彩霞 細數一生遊宦事 會心偏小役形多
숭양가는 길에
개성을 육년 사이에 다섯 번을 지났지만
부소산과 채하동도 들르지 못 했네
자세히 헤아리니 일생 동안 벼슬살이에서
마음에 맞는 일보다는 몸만 바빴네
다. 비문
明美堂 이건창 李建昌(1852-1898) 선생은 맑고 고운 시문으로 구한말의 시단을 빛낸 문장가요 시인이시며 양명학을 가학으로 받들고 고궁固窮을 가헌家憲으로 지킨 조선시대 선비의 전형이시며 닦은 학문과 포부는 마음껏 되지 못했지만 대쪽 같은 기개와 신념으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전통시대 관인官人의 모범이셨다.
선생은 조선왕조 제2대왕 정종의 법자 덕천군 德泉君 후손으로 1852년 강화도 사기골에서 상학象學공의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1898년 47 년을 일기로 세상을 버리셨다. 선생의 자는 봉조鳳藻 호는 영재寧齋 또는 명미당이다. 일문이 강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5 대조 ㅇㅇ 공이 荷谷 鄭齋斗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비롯되었으며 훗날 신유옥사의 여얼餘孼로 일문이 파가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강화는 피세의 공간이자 삶의 터전이 되었다.
이로부터 종 5 대조 광사匡師공을 비롯하여 고조부 충익忠翊 공의 증조부 勉伯 조자손 祖子孫 양명학을 전수하여 강화학 200년 전통의 단초를 열었다. 병인양요 때 조부 시원是遠 공의 순절로 강화에서 별시를 보이자 선생은 15 세의 어린 나이로 급제하였으며 19 세에 옥당에 들어가 최연소의 패기를 자랑하였다. 이때 문명이 널리 알려져 개성의 金澤榮 구례의 黃玹이 찾아들었으며 훗날 가장 가까운 문우가 되어 우리나라 한문학의 마지막 장을 아름답게 장식했다. 선생은 암행어사, 한성부소윤, 승지, 공조참판 등 생애의 태반을 묘당에서 보냈지만 관인으로서의 선생은 큰 뜻을 펴지 못했으나 문장을 통하여 영재를 드러내었다.
갑오경장을 정변으로 단정한 선생은 1890년 해주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고군산도에 유배를 자원하여 조부 李梅의 자강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문집 ‘明美堂集‘과 ’黨議通略‘을 저서로 남긴 선생은 당신의 詩文集敍傳을 미리 지어두고 2 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1997년 7월 5일 서울대학교 문학박사 민병수 짓고 ㅇㅇ 쓰고 한국문학비동호회 세우다
라.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 의하면 이건창의 字는 鳳朝, 호는 寧齋 혹은 명미당, 全州人으로 太上皇時(淸 목종 덕종시) 文科를 거쳐 경연원시강經筵院侍講에 이르렀다 한다.
송박오소행대지연서, 송정운제선생감은진서,게곡기, 수당기 등 12편이 수록되어 있다.
26. 추강 김지섭 한시비
가. 2005년 4월 답사, 위치: 천안시 독립기념관 내
나. <평생에 품은 뜻>
표연히 이 한 몸이 만리길 떠나갈 때
배안엔 모두 원수이기에 벗할이 뉘있는가
기구한 나라 앞길 촉도보다 험난하고
분통하는 겨레마음 진 나란들 더할소냐
오늘날 뭄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은
그 몇 해를 참으면서 와신상담 하였던가
이미 정한 이 걸음은 평생의 뜻이기에
다시는 고국 향해 돌아갈 길 묻지 않으리
(추강 김지섭 의사께서 1923년 12월 상해에서 동경으로 건너가며 석탄화물선 안에서 장도의 심정을 읊은 시)
다. 약전
의사는 1884년 안동군 풍산읍 오미동에서 태어났다. 경술국치후 항일투쟁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에서 활약 1924년 1월5일 일황궁성에 폭탄 3개를 던져 원수들의 간담을 써늘케하고 불타는 민족혼을 만방에 드높이고 투옥되어 1928년 2월 20일 옥중에서 순국하다.
27. 白山 안희제 한시비
가. 섬강춘작蟾江春酌
南國佳期逐日還 남국가기축일환
有誰管領好江山 유수관령호강산
五龍臺古碧蘿裏 오룡대고벽나리
孤鶩島遙殘照間 고목도요잔조간
一字詩安吟點首 일자시안음점수
三盃神快笑開顔 삼배신쾌소개안
須臾歲月滄桑改 수유세월창상개
此世無多此會閒 차세무다차회한
남쪽의 좋은 약속 그날따라 들어오니
누가 있어 이 좋은 강산을 차지하느냐
오룡대는 오래되어 푸른 덩쿨 속에 있고
외로운 목도는 석양 사이에 있네
시 한자 적어 읊으며 머리 끄덕이니
술 석잔에 상쾌해져 온 얼굴에 웃음이라
잠깐만에 세월은 상전벽해로 변했으니
세상에 이런 한가한 모임 많지 않으리
나. 안희제 安熙濟 (1885-1943)
본은 순흥,호는 白山, 경남 의령출신, 1909년 서상일,신성모,박중화 등과 함께 대동청년단을 결성,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부산에 백산산회를 창설 경영하면서 국내외 독립운동단체의 거점을 제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조달기관으로 독립운동에 힘써 왔으며 1962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시 : 안희제, 서 : 하태현, 조각: 한상엽, 건립 : 2009년 12월 21일. 답사:2019년 2월 24일
다. 여담
백산 선생은 중.고교 동문인 안경화의 조부가 된다. 국립해양대학을 갔던 그가 독립운동가의 장손인 것을 알지 못했다. 하동공원에서 백산 선생의 한시비를 발견한 후 전화를 하면서 학생시절 교무실로 자주 불려 갔던 기억을 찾아낸다. 백산의 장자 안상록 安相祿은 동경제대 의예과를 다니면서 동경학생운동에 참가하고 해방 후 고향 의령에서 소작인들에게 토지를 분배해 주면서 ‘낙동강농민조합’을 만들어 자작농 창정 운동을 펼쳤던 것인데 이를 좌익활동으로 몰아 체포하려했다는 것이다. 농민조합은 백산이 북간도 동경성에서 구상하였던 ‘발해농장’과 동일한 구상인데 친일파가 득세하던 시절 이를 공산당활동으로 몰았던 것이다. 안경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쫓겨와서 사대부중.고를 졸업했다. 소설에나 나오는 이야긴 줄 알았으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이승만 정부 시절 경남 의령 백산의 고향은 초토화되었다. 온 마을이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한국의 모스코바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미군정청과 이승만 정부가 반민족자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탓으로 이같은 후유증을 낳게 했다. 부산 용두공원에는 백산의 동상이 있고 이곳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비밀 연락 장소였던 곳이다. 2013년 현제 안경화는 광복회부산지부장을 맡고 있으며 저서『安熙濟, 백산 안희제의 생애와 민족운동 』,(조동걸 외, 선인,2013)을 펴냈다. 2019년 3월에는 발해농장에 관심이 많은 정치기, 학자들과 함께 중국 동경성으로 ‘발해농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백산의 흔적은 부산의 백산상회, 중국의 발해농장, 대동청년단, 대종교와 독립운동 등 굵직한 자취가 남아 있다. 전화로 확인한 것은 동문들에게 오해되고 있는 황옥이라는 경찰서장이다. 황옥은 조선총독부 경시로 있었는데 조선인으로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임무를 맡았다. 상해로 김구를 체포하러 가는 임무를 알아낸 백산은 암호를 표시하여 김구가 체포되지 않도록 하고 황옥을 여러 차례 설득하여 조선인으로 살게 했다. 초기에는 조선인 체포에 앞장 섰으나 점차 독립군에 협조하고 정보를 알려줬던 황옥이다. 해방 후 그를 경찰관으로 추천한 것도 백산,김구 등이라 한다.
백산 선생의 한시비를 섬진강이 좌우로 흐르고 있는 이곳 하동공원에서 읽는다. 오늘 하루는 마음이 매우 흐뭇하다. 졸업 후 처음으로 안경하 친구와 통화를 한 까닭이다.
28. 만포(晩圃) 최양해(崔穰海) 한시비
가. 소재지, 대구 두류공원내 인물동산
나. - 대구장관(大邱壯觀) -
대구시의 웅장한 기상 이 성안에 있으니
옛 모습 새로운 단장 모두 다 선명하다
기이한 꽃 햇빛 비춰 마음을 감동케 하고
고목도 봄을 자랑하니 눈이 이리 부시는구나
막히고 트인 운의 가닥 그 실상 알기 어렵고
가고 온 많은 사람들 누구인지 모르겠네
취하고 깨어남이 진실로 사람의 할 일인데
근심이나 즐거움 너와 나 함께 하세
大邱雄容在此城 舊奇新美總鮮明 異花映日心惟感 老木過春目可驚
否泰多端難測實 往來無數不知名 一醒一醉眞人事 憂樂同盟子我情
다. 비음
만포 최양해 선생은 1897년 음력 8월 23일 경주시 손곡동 43번지에서 부 최현일(崔鉉一) 모 김석촌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니,고운 최치원의 29세손이요 가선대부 호조참판 최치덕(崔致德)의 6세손이다. 선생은 유년시절부터 한학을 배워 사서오경을 통달했으며 숭조정신이 투철하였다.
1919년 23세 때 3.1운동에 참가하여 왜경의 추적을 받아 피신해 오던 중 1940년 44세 때 창씨개명 반대를 위해 집에 갔다가체포되어 경주경찰서에 수감되었으나문중에서 출옥토록 탄원하여석방되었다. 1945년 조국광복 후 대구에 거주하면서부터 대구.영남 詩友會 활동을 활발히 하여 아룸다운 大邱風光을 노래하였으며 별세하기전까지 漢詩 260여 수 중 대구를 소재로한 시를 100여 수 남겼다.
1958년 62세 때 고운 최치원의 경학대장(經學隊杖)을 현토케하고 발간하여 전국도서관 유림 드에 배포하였으니,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불구하고 후학의 경학 전수에 힘썼다. 1961년 65세 때 영남시단 한시예시에서의 1등 당선을 계기로전국 한시회 및 유림 등에서 활약하여 대구를 빛낸 공적이 크며,1967년 71세 때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과 경학대장을 합본 발간하여 학문연구자료로 제공하였다.
선생은 일생동안 한시창작과 경학전수에 힘쓰다가 1978년 9월 21일 82세로 대구시 남구봉덕동 519번지에서 별세하셨다.
선생이 가신지 어언 22년 !
대구가 낳은 한학자요 한시대가였던 선생의 학문과 시 연구가 학계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이때 선생을 기리는 이들의 뜻을 모아 여기 인물동산에 선생의 한시 한 수를 돌에 새겨 선생의 대구사랑 정신을 길이 이어받고자 한다.
2001년 6월 23일 /만포 최양해 한시비건립위원회/
29. 우암 송시열의 현액시
배회연서원 拜檜淵書院
斥餘山木又牛羊 世道如今轉可傷 敬拜先生祠廟下 臨風乘嗅百梅香
척여산목우우양 세도여금전가상 경배선생사묘하 임풍승후백매향
右 尤菴 先生 昔至 庚申自巨濟宥還歷拜寓感而作也
우 우암 선생 석지경신자거제유환역배우감이작야
멀리 나무와 우양들은 여유로운 데
세상의 도의는 변하여 마음이 아프구나
이 곳 선생의 사묘를 찾아뵈니
바람 건 듯 불어 백매향이 향기롭구나
우암 송시열이 지난 날 경신년에 이르러 소위 ‘갑인환국‘으로 거제도에서 귀양을 풀려날 때 이 곳(성주 회연서원)을 지나가며 그 느낌을 사물에 기탁하여 지는 시가 아닌가 한다. 조선조 당파싸움의 중심에 있던 송시열이 이 곳을 지나며 한강 정 구의 묘소를 찾았다는 것은 정구의 학문과 높은 도덕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0. 조령鳥嶺의 김종직 시
가. 문경 새재
예부터 영남에서는 많은 선비들이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갔다.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鳥嶺)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秋風落葉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禁忌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문경에서 넘으면 제3관문을 지나 괴산군 쪽에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영.호남의 선비들이 서울로 과거보러가던 항양행의 큰길. 필자는 제3관문으로부터 역으로 올랐으니 과거를 보고 하행하는 길이다. 1106m의 周訖山은북은 괴산군이 남은 문경시가 관할한다. 삼림욕길을 따라 제3관문을 향해 오르니 길 양편에 휴식고간 또는 작은 집을 지어 쉴터로 해놓았고 문경을 넘나들었던 선비의 상을 새겨 과거응시자의 이화를 소개해 놓았다.문경새재민요비가 있고, 조령 ‘산불됴심’표석(문화재자료제226호)을 보고 거기가 문겨시 문경읍 상초리임을 알게한다. 표석의 연대는 조선후기로 추정되는 데 원추형 화강암에 음각을 하여 한글비로 하였다 높이는 157m. 주흘산은 태백산맥 줄기로 충북과 경북의 도계를 이루고 있다. 충북쪽은 다시 가 수계로 경북쪽은 낙동강 수계로 이어지며 꾀꼬리 등 19종의 조류가 서식한다는 것이다. 영남 제2관문은 鳥谷關이라 이름하고 사적 제147호다. 삼국시대의 석성,주막, 송덕비, 충렬비,한시 등이 군데군데 있어 옛 자취를 남기려 하고 있다. 문충공 김종직의 칠언율시 <교구정(交龜亭)>을 만난다.
나. 김종직의 시
교구정에 올라 앉아 하늘땅을 즐기는데
문득 깨달으니 귀밑머리 흰빛이로다
한가 흐르는 물은 바람과 더불어 노래 부르고
즈믄 바위는 그림갘건만 날은 점점 저물어만 가누나
내가 시로써 풍치를 읊으매 날새는 보금자리 찾아 헤매고
나의 눈물로 회포를 되씹으매 잔나비마저 그 울음을 멈추도다
남쪽길 두 이정표는 이미 어두워 모양 사라져만 가는데
아 - 달도 밝은 오늘밤사 어디메서 머무를 것인고.
당대의 석학 문충공도 새의 고개 새재에서 삶의 허무를 눈물로 맞았던 것인가. 이 시의 전후 사정을 알길 없지만 前景後悔의 정서로 보아 인생 후반기의 고독한 나그네 심사를 절묘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교구정 건물은 없고 터만 남아 있다. 애초 교구정은 조선조 성종 시 문경현감 신승명이 구전설화 팔왕과 선녀 이야기가 있었던 팔왕폭포 위에 건립했다 한다. 교구정은 체임하는 신.관찰사의 교인장z소로 사용되었으니 일반 백성들과는 무관한 낭만이다.
31.대구 달성군 영벽정映碧亭 현액시
乘舟訪竹谷梅作 樂齋 徐思遠(1550-1615)
風雨掀江不肯晴 /孤舟難發訪梅行 /滿山紅錦非無意 /玉骨氷魂獨繫情
비바람이 강 물결 흔들어 날씨 갤성싶지 않은데
한 척 빈 배 띄우기도 어렵건만 매화 찾아 떠난다
붉은 비단인양 산 가득한 꽃에 생각 없지 않지만
매화의 차가운 혼에 유독 정이 끌린다
* 영벽정은 1573년 牙巖 윤인협(1541-1597)이 지은 정자로써 河南 현 汶山에 낙향하여 짓다.
32. 중국 태산의 무자비
가 찾아가기
2005년 11월
중국 태산 무자비 옆에는 두 기의 시비가 있다.
唐代 짱추안(張銓)의 ‘관무자비觀無字碑‘시비와 중국 시인 궈모뤄(郭沫若)의 ’망태산관일미수望泰山觀日未遂‘가 그것이다. 두 시비의 전문이 소개된 바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소개한다.
나. 궈모뤄의 ’望泰山觀日未遂‘ 시비
’夙興觀日出(숙흥관일출) 星月在中天(성월재중천)飛霧岭斗急(비무영두급) 稠雲海上旋(조운해상선) 晨曦光晦若(신희광회약) 東壁石巍然’(동벽석외연),
일찍이 일어나 해돋이를 보고자 하였으나 별과 달이 아직 중천에 있네, 안개는 깊은 산마루에서 급하게 움직이고 조밀한 구름은 해상에서 돌고 있네, 새벽은 아직 그대로 어두운데 동편 벽 바위는 늠름한 모습 드러내네.
궈모뤄(1892-1978) : 중국의 시인,철학자,서예가
다. 짱추안(張銓)의 ‘觀無字碑‘시비
奔盪天風萬里吹(망탕천풍만리취) 玉函金檢至今疑 (옥함금검지금의)袖携五色如椽筆(수휴오색여연필) 來補秦王無字碑(내보진왕무자비).
우거진 풀이 바람에 흔들려 그 향기 만리 가는데 옥함금검(진귀한 서적 함과 금으로 쓴 책제목)을 이제와서 의심하다니, 내 직접 오채의 미문과 명필로(大筆如椽) 태산에 와서 진시왕 무자비를 채울까 하네.
짱추안은 明代 심수인沁水人이다.자는 宇衡, 만력에 진사가 되다.희종시에 요동안핵사로 성이 무너지자 굴하지 아니하고 죽다, 시호는 충열, 저서에 ‘國史記聞’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