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6. 26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쪽에선 그의 이미지 정치와 운동권 정책을 문제 삼는다. 이미지든 운동권이든 나라를 강건하게 세우고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면 그 자체가 문제될 건 없다. 다만 하나의 가치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다른 가치들이 무시될까 걱정이 되긴 한다. 권력은 균형감을 상실할 때 도전받는다.
이동통신 3사의 통신요금을 한꺼번에 확 내리는 정책에도 그런 위험이 도사려 있다. 집권당의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지난주 가격 인하 방침을 발표하면서 “한 해 최대 4조6000억원의 국민 통신비 절감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4조6000억원이라면 통신3사의 영업이익 3조7000억원을 훨씬 뛰어넘는 수치다. 대중은 환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손해 나는 장사를 장기간 지속할 수 있는 비즈니스는 없다. 한두 해는 몰라도 3, 4년이나 5~10년 이런 수익구조가 이어지면 회사들은 망할 것이다.
야당일 때는 표를 얻기 위해 대중의 이익이라는 하나의 가치만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집권을 하고 나면 대중의 이익뿐 아니라 시장의 활력도 고려해야 한다. 정부의 재정도 챙겨야 한다. 다양한 가치들을 균형 있게 살피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중의 오늘만 생각하는 정책을 펴다가 시장이 파괴되고, 재정이 바닥나 대중에게 더 많은 고통을 안겨준 나라들이 지구상엔 즐비하다. 그리스는 채권국 유럽연합(EU)의 눈치만 보면서 출산 수당도 주지 못하는 하류 국가로 전락했다. 베네수엘라는 시장에 생필품 공급이 안 돼 폭동과 데모, 최루탄으로 날을 지새운다.
시장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나쁜 요소가 시장 내부에 엄존하는 것은 사실이다. 시장이 스스로 개선하지 못하면 정부가 개입해야 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SKT, KT, LG유플러스 세 이통 회사의 독과점 체제가 가격 담합 구조를 형성한 문제는 좀 다르다. 위법 논란을 낳은 강제 가격 인하의 칼을 너무 성급하게 빼들었다. 그보다 시장 참여자 수를 늘려 회사들이 박 터지게 경쟁하고 가격, 품질, 서비스에서 소비자의 다양한 선택을 가능케 하는 제4 이동통신 도입을 천명하는 게 나았다. 제4이통의 등장은 사실 가격 정책을 뛰어넘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의 출현을 의미한다. 시장의 기득권을 꼼짝 못하게 하면서 정부의 재정 소모는 막고 소비자가 착한 가격을 지속가능하게 누릴 수 있는 해결책으로 주목받은 지 오래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지난 7년간 꾸준히 추진됐지만 기득권 3사의 철벽 방어와 청와대·정치권의 이해 부족으로 시장 참여가 좌절됐다. 제4이통을 무산시킨 가장 큰 논리는 2조원 이상 거대한 비용이 든다는 거였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기술 혁신이 거듭된 덕분에 시장 참여 비용이 7000억원 정도로 대폭 줄었다고 했다. 우선 정부의 실무 부서는 신규 사업자한테 파는 주파수 판매 비용을 대폭 낮춘다는 방침(1조원→1500억원 규모)을 세웠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중후장대한 철탑 기지국 설치도 아예 필요 없어졌다. 이른바 망가상화, 차세대 접속망 구축방식 같은 혁신적 통신기술이 민간에서 속속 개발돼 비용 문제를 해소한 것이다. 차세대 제4 이통 기술이 적용될 경우 등장할 가장 매력적인 상품은 ‘실시간 자기 설계형’ 요금부과 서비스다. 소득과 직업, 취향에 따라 모든 소비자가 개인 입맛에 맞는 음성·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변경해가면서 사용하는 맞춤형 요금체제다. 소비자 스스로 통신료를 결정하기에 가격 불만은 저절로 사라진다.
제4 이통의 성립 조건은 정치권의 지원과 신규 사업가들의 의욕, 소비자의 열망이다. 지금 정부가 집권 초기 높은 국정 지지율과 개혁 동력을 바탕으로 우선순위를 높이기에 딱 좋은 정책이다. 성급했던 시장 통제 정책도 이것으로 만회할 수 있다. 솜씨 좋은 정부는 시장에 시끄럽게 개입하지 않는다. 분명한 법적 근거 위에서 은근히 우회적으로 툭툭 치듯 시장에 스며들어 간다. 운동권 정부도 시장의 혁신을 이뤄낼 수 있다는 유능성을 증명해 보였으면 한다.
전영기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chuny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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