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紀元前 24세기 단군이 고조선건국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족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고 강한 족장이 주변의 여러 족장 사회를 통합하여 권력을 강화해 갔다.
족장 사회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것은 고조선이다.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기원전 2333년에 건국하였다. 단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고 나라 이름이 처음 사서에는 조선(朝鮮)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 고조선을 사용하였다.
기원전 194년 일종의 정변을 통해 등장한 위만조선까지 포괄해 고조선이라 한다.
국가 형성단계를 농경과 금속기의 사용이 어느 정도 진전된 사회로 보고, 고고학계선 기원전 10세기경에 나라를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한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인접한 족장 사회를 통합하면서 한반도까지 발전하였는데,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의 출토 분포로써 알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 사실을 전하는 단군 이야기는 우리 민족의 시조 신화로 널리 알려져 있고, 신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으로,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한 고조선의 성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환웅 부족은 태백산의 신시를 중심으로 세력을 이루었고, 천손天孫(하늘의 자손)임을 내세워 자기 부족의 우월성을 과시하였다. 또, 풍백, 우사, 운사를 두어 바람, 비, 구름 등 농경에 관계되는 것을 주관 하였다.
주로 구릉 지대에서 농경 생활로 사유 재산이 성립되고 계급의 분화에 따라 지배 계급은 농사와 형벌 등 사회생활을 주도하였다. 새로운 지배층은 홍익인간(弘益人間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을 통치 이념을 내세워 권위를 내세웠다.
환웅 부족은 주위의 다른 부족을 통합하고 곰을 숭배하는 부족과 연합하여 고조선을 형성하였으나, 호랑이를 숭배하는 부족은 연합에서 배제되었다.
단군은 제정 일치(祭政一致)의 지배자로, 고조선의 성장과 더불어 주변의 부족을 통합하고 지배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조상을 하늘에 연결시켰다.
고조선 사회는 상당한 계급분화가 진전되어 노비, 촌락의 일반민, 귀족으로 크게 대별된다. 8조금법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지는 3개 조에서, 노비제도의 존재와 사유재산에 대한 법적 보호조처 등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화려한 부장품들은 계급분화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일반 촌락 구성원이나 친족집단들 간에는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귀족은 노예와 토지, 재화 등 자신의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촌락 공동체를 대표하는 수장으로서의 면모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단군기」에서는 환검(桓儉)으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는 47대의 왕명과 재위기간, 치적을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1. 단군(檀君) : 재위 93년-원년(기원전 2333년) 고조선을 건국.
2. 부루(夫婁) : 재위 34년-원년(기원전 2240년) 즉위.
3. 가륵(嘉勒) : 재위 51년-기원전 2206년 즉위
4. 오사(烏斯) : 재위 49년-기원전 2155년 즉위
5. 구을(丘乙) : 재위 35년-기원전 2106년 즉위
6. 달문(達文) : 재위 32년-기원전 2071년 즉위
7. 한율(翰栗) : 재위 25년-기원전 2039년 즉위
8. 우서한(于西翰) : 재위 57년-기원전 2014년 즉위
9. 아술(阿述) : 재위 28년-기원전 1957년 즉위
10. 노을(魯乙) : 재위 23년-기원전 1929년 즉위
11. 도해(道奚) : 재위 36년-기원전 1906년 즉위
12. 아한(阿漢) : 재위 27년-기원전 1870년 즉위
13. 흘달(屹達) : 재위 43년-기원전 1843년 즉위
14. 고불(古弗) : 재위 29년-기원전 1800년 즉위
15. 벌음(伐音) : 재위 33년-기원전 1771년 즉위
16. 위나(尉那) : 재위 18년-기원전 1738년 즉위
17. 여을(余乙) : 재위 63년-기원전 1720년 즉위
18. 동엄(冬奄) : 재위 20년-기원전 1657년 즉위
19. 구모소(緱牟蘇) : 재위 25년-기원전 1637년 즉위
20. 고홀(固忽) : 재위 11년-기원전 1612년 즉위
21. 소태(蘇台) : 재위 33년-기원전 1601년 즉위
22. 색불루(索弗婁) : 재위 17년-기원전 1568년 즉위
23. 아물(阿勿) : 재위 19년-기원전 1551년 즉위
24. 연나(延那) : 재위 13년-기원전 1532년 즉위
25. 솔나(率那) : 재위 16년-기원전 1519년 즉위
26. 추로(鄒盧) : 재위 9년-기원전 1503년 즉위
27. 두밀(豆密) : 재위 45년-기원전 1494년 즉위
28. 해모(奚牟) : 재위 22년-기원전 1449년 즉위
29. 마휴(摩休) : 재위 9년-기원전 1427년 즉위
30. 나휴(奈休) : 재위 53년-기원전 1418년 즉위
31. 등올(登兀) : 재위 6년-기원전 1365년 즉위
32. 추밀(鄒密) : 재위 8년-기원전 1359년 즉위
33. 감물(甘勿) : 재위 9년-기원전 1351년 즉위
34. 오루문(奧婁門) : 재위 20년-기원전 1342년 즉위
35. 사벌(沙伐) : 재위 11년-기원전 1322년 즉위
36. 매륵(買勒) : 재위 18년-기원전 1311년 즉위
37. 마물(麻勿) : 재위 8년-기원전 1293년 즉위
38. 다물(多勿) : 재위 19년-기원전 1285년 즉위
39. 두홀(豆忽) : 재위 28년-기원전 1266년 즉위
40. 달음(達音) : 재위 14년-기원전 1238년 즉위
41. 음차(音次) : 재위 19년-기원전 1224년 즉위
42. 을우지(乙于支) : 재위 9년-기원전 1205년 즉위
43. 물리(勿理) : 재위 15년-기원전 1196년 즉위
44. 구홀(丘忽) : 재위 7년-기원전 1181년 즉위
45. 여루(余婁) : 재위 5년-기원전 1174년 즉위
46. 보을(普乙) : 재위 11년-기원전 1169년 즉위
47. 고열가(古列加) : 재위 30년-기원전 1158년 즉위~1128년까지 30년간 통치.
이상 단군조선의 치세 기간은 기원전 2333년~기원전 1128년으로, 47대 임금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1205년간 지속되다가 제후가 난립하면서 열국시대가 전개되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고조선의 기록은 『산해경(山海經)』의 해내북경(海內北經)에 “조선은 열양 동에 있고 바다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 열양은 연에 속한다(朝鮮在列陽東 海北山南 列陽屬燕).”라 기록하였다.
『관자(管子)』의 경중갑편(輕重甲篇)과 규도편(揆度篇)에서 춘추시대의 제(齊)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인 기록은 『사기(史記)』 소진전(蘇秦傳)에, 소진이 연(燕)의 문후(文侯: 서기전 361∼서기전 333)에게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방에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누번이 있으며.”라고 하며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위략(魏略)』에는 조선이 연의 소왕(昭王: 서기전 331∼279) 때에 진개(秦開)의 침공으로 서쪽 영토 ‘2,000리’를 상실했다고 하였다
이러한 단편적 문헌자료의 한계로 고조선 중심지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게 된다
고조선의 중심 위치는 재요령성설(在遼寧省說), 이동설(移動說), 재평양설(在平壤說)이 있다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는 비파형동검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남만주 요령성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기원전 4세기 후반에 연후(燕侯)가 ‘왕’이라고 칭하며 고조선의 군장(君長)도 왕이라고 칭하고 연과 대립 하였다. 기원전 3세기 초 연이 강성하여 남의 제(齊)와 북의 동호(東湖)를 정벌하고, 고조선을 침공하여 영토를 크게 상실하고 중심부를 요동에서 평양으로 옮겼을 것이다.
평양을 중심으로한 고조선은 성능이 개선된 세형동검과 청동창 등을 만들고 철제공구와 무기도 사용해 금속기문명을 진전시켰다.
이어 진(秦)이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쌓으며 요동에 세력을 뻗쳐 오자, 고조선의 부왕(否王)은 진과의 충돌을 피하고 자체의 방어에 주력하여 진의 요동군과 청천강을 경계로 현상을 유지하게 되었다.
서기전 3세기 말 진秦을 이어 한漢이 등장하면서 조정과 제후들 간에 분쟁으로 수만명의 유민이 압록강과 청천강 사이의 이른바 ‘진고공지(秦故空地)’에 정착했고, 고조선의 영역으로 귀속되었다.
이때 1천여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은 위만이 조선으로 망명해 오자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위만에게 박사의 지위를 주면서 규(圭)를 내리고 ‘진고공지’ 지역에서 국경 방면을 진수하는 직임을 부여하였다.
위만이 유이민집단을 결속시켜 세력을 키워나가다가 기원전 194년경 한이 조선으로 침공해 오니 수도를 방어해야겠다며, 군사를 끌고 올라와 정권을 탈취하는 정변을 일으켰다.
이 때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 지역으로 탈주해 그 곳에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위씨왕조는 유이민과 토착민의 연합정권으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반도 남부 여러 소국과 한의 교역을 중계하며 이득을 취하여 강성해 지자 인근의 임둔·진번 등의 집단을 복속시켰고, 압록강 이북에까지 세력을 뻗쳤다
기원전 109년 한의 무제가 5만의 육군과 7천의 수군으로 침공하자 1차의 접전(패수)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1년여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기원전 108년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되었다.
한은 고조선 영역에 4군을 설치하자 많은 고조선인이 남으로 내려가 삼한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패수고(浿水考)』(정약용) 『강역고(疆域考)』(정약용) 『조선상고사』(신채호, 종로서원, 1948) 『조선사연구』(정인보, 서울신문사, 1947) 『위씨조선흥망고』(이병도, 1956: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