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 절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
" 의인의 열매는
생명 나무라" (잠 11:30)
성경에 기록된 역사 중에는 참된 교육의 결과에 대한 많은 실례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지도 아래서 그 품성을 도야한 사람들의 귀한 경험을 보여 준다. 그들은 동료 인간들에게 축복이 되는 일생을 보내었으며,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세상에 섰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 중에는 가장 위대한 정치가인 요셉과 다니엘, 가장 현명한 입법관인 모세, 가장 충실한 개혁자인 엘리사가 있었고, 또한 "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 (요 7:46)던 예수님을 제외하면 세상에서 가장 큰 교사였던 바울 같은 인물도 있었다.
요셉과 다니엘은 청소년 시절에 가정을 떠나 포로로 이교국으로 끌려갔다. 특별히 요셉은 그의 운명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많은 시련을 당했다.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오로지 따뜻한 사랑 속에서만 자라던 소년이 보디발의 집에서는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신임을 받아 그의 친구가 되면서 학문과, 관찰에 의한 경험과, 사람들과의 접촉을 통해 견문을 넓혀 청지기의 직분에까지 올랐다. 그러던 중에 부당하게 유죄 판결을 받고, 누명을 벗을 희망도, 풀려날 가망성도 없이 국가의 죄인으로 바로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큰 위기에서 국가의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요셉으로 하여금 그처럼 일관된 성실성을 갖도록 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고난 없이는 높은 지위에 설 수 없다. 마치 폭풍이 골짜기 아래의 풀꽃은 해치지 않으면서 산꼭대기에 있는 나무는 그 뿌리째 뽑고 지나가는 것처럼, 격심한 유혹도 비천한 인생은 잘 건드리지 않지만 성공과 명예를 가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는 공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역경과 번영의 어느 시험에서도 잘 견디었다. 그는 바로의 궁전에 있을 때나 옥중에 있을 때나 항상 변함없는 성실성을 나타내었다.
요셉은 소년 시절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법을 배웠다. 때때로, 그는 별이 총총한 시리아의 하늘 아래 장막에서, 그의 아버지 야곱이 벧엘에서 꾸었던 꿈-하늘에서 땅에 닿은 사다리, 그리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 또한 하늘 보좌에서 내려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그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투쟁하여 마침내 마음 속에 품었던 죄를 몰아내고 승리자가 되어 " 하나님 … 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 다는 칭호를 얻은 이야기도 들었다.
양 치는 소년으로 아버지의 양 무리를 지키던 요셉의 순결하고 단순한 생활은 그의 체력과 지능을 발달케 하였다. 천연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거룩한 위탁물로써 대대로 전해 내려온 귀한 진리들을 배움으로, 그는 견실한 정신과 확고한 원칙을 체득하였다.
요셉은 그의 생애의 위기에서, 곧 자기의 어린 시절을 보낸 가나안 본집으로부터 노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애굽으로 가는 두려운 나그네 길 가운데서 혈육들의 천막이 있는 산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볼 때에, 야곱의 하나님을 기억하였다. 소년 시절의 교훈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은 감동으로 떨렸다. 그는 진실한 사람이 되어 어떠한 때에라도 하늘 임금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했다.
외국인과 노예로서 겪는 괴로운 생활,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악덕과 우상숭배 뿐인 환경, 온통 사람의 마음을 끄는 부와 문화와 왕실의 화려함으로 행해지는 예배 의식, 이 모든 것 가운데서도 요셉은 요동하지 않았다. 그는 의무에 충실하는 법을 배웠다. 가장 낮은 지위로부터 가장 높은 신분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입장에서도 충실하였으므로, 그의 모든 능력은 최고의 봉사를 위하여 훈련되었다.
요셉이 바로의 궁전에 부름을 받았을 당시에, 애굽은 세상에서 가장 큰 국가였다. 문화, 예술, 그리고 학문에 있어서 애굽과 비할 나라는 어디에도 없었다. 가장 어렵고 위험한 시기에 요셉은 그 왕국의 정무(政務)를 맡았으며, 그의 시정(施政)은 국왕과 백성들의 신뢰를 얻었다. 바로는 그로 " 그 집의 주관자를 삼아 그 모든 소유를 관리케 하고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 (시 105:21, 22)다.
영감(靈感)의 말씀은 요셉의 생애의 비결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의 자녀들을 향한 축복의 기도에서 야곱은 거룩한 능력과 아름다운 말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건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와 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창 49:22-26).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충성은 요셉을 굳세게 만든 닻이었다. 여기에 그의 능력이 숨어 있었다.
"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하늘의 사신(使臣) 다니엘
바벨론에서의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의 청년 시절이 애굽에서의 요셉의 초기 생애보다 행복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들도 요셉에 못지 않은 혹독한 품성의 시련을 겪었다. 왕족의 혈통을 받은 이 청년들은 비교적 소박한 유대인의 가정으로부터 가장 번화한 도시에 있는 당시의 최대 군주의 궁정에 옮겨져서, 국왕을 위한 특별한 봉사를 위하여 교육을 받게 되었다. 부패하고 사치한 궁정에서 그들은 강한 유혹에 둘러싸였다.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 사실, 여호와의 성전의 기명들이 바벨론 신들의 전각으로 옮겨진 사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이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온 사실을 가지고, 승리자들은 그들의 종교와 관습이 히브리 사람들의 그것들보다 더 우수한 증거라고 자랑하였다. 그런 환경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남으로 자초한 굴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최상권과 거룩하신 요구와, 그리고 복종에 대한 확실한 결과를 바벨론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보여 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이를 증거하셨다. 당시로서는 이러한 방법밖에는 없었다.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에게는 처음부터 시련이 닥쳤다. 그들을 총애하여 그들이 행복한 생활을 하기를 원했던 국왕은 자신이 먹는 음식물을 그들에게 공급하도록 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국왕의 음식물은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것이었다. 왕이 주는 식물을 먹음으로 그 청년들은 국왕과 함께 우상 숭배자로 낙인 찍힐 것이었다. 여호와를 향한 그들의 충성된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 덕. 체의 발달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치와 도락을 멀리했다.
다니엘과 그의 동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 안에서 충실히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에 신령한 것을 위하여 물질적인 것을 희생해야 할 것과, 최고의 선을 추구해야 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보상을 받았다. 절제의 습관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책임감이 그들의 지․덕․체의 능력을 고루 발달시켰다. 훈련이 끝나고, 왕국의 명예로운 직책을 얻으려는 다른 후보자들과 같이 시험을 치렀을 때, " 무리 중에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와 같은 자가 없" (단 1:19)었다.
바벨론 궁정에는 우수한 인재들과, 고귀한 천품을 가진 사람들과, 세상의 최고 교양을 가진 사람들이 각각 자기 지방의 대표로 전국에서 몰려와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히브리 포로들은 비교할 자가 없을 만큼 뛰어났다. 육체적 힘이나 아름다움, 지성과 학식에 있어서도 그들을 따를 자가 없었다. " 왕이 그들에게 모든 일을 묻는 중에 그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와 술객보다 십 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 (단 1:20).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과 굳센 극기심을 가진 청년 다니엘은 그 고상한 기품과 예절바른 행동으로, 그를 감독하는 이교의 관리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얻게 되었다. 그는 평생 동안 이와 같은 사람으로 지냈다. 그는 승진이 빨라 왕국의 총리 자리에 올랐다. 역대 군주의 치세, 국가의 몰락, 또한 원수의 왕국 건설에 있어서, 그의 기지와 예의와 선량한 성품은 한편으로 원칙에 굳게 선 마음과 합해져서, 그의 원수들까지도 "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 (단 6:4)다고 시인할 정도로 그의 지혜와 정치적 수완은 뛰어났다.
다니엘이 굳은 신뢰로 하나님께 매달려 있을 때에, 예언의 능력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가운데 궁정의 책임과 국가의 기밀 처리를 위임받았으며, 또 이러는 사이에 하나님에게서도 신임을 받아 그분의 대사로서 장래의 오묘한 일들을 해석하는 법을 배웠다. 이교의 군주들은 하늘의 대표인 다니엘과 교제하는 중에 그의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부갓네살은 "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 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자시로다" (단 2:47)라고 말하였다. 또한, 다리오는 " 온 땅에 있는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조서 중에 말하기를, " 다니엘의 하나님은 … 사시는 하나님이요 영원히 변치 않으실 자시며 그 나라는 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 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자" (단 6:25-27) 시라고 하였다.
진실되고 정직한 사람들
요셉과 다니엘은 지혜와 정의감, 순결하고 자애로운 매일의 생애, 그리고 백성들, 특히 우상 숭배자들인 이교도 백성들의 유익을 위한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어려서부터 배운 원칙과 자신들이 대표하고 있는 분에게 충실함을 입증해 보였다. 그들은 애굽에서도 바벨론에서도 전 국민에게서 존경을 받았다. 이들과 관계 있는 사람들은 물론 이교도인 백성들까지도 이 두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실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실례를 보았다.
이 고상한 히브리 사람들이 가졌던 평생 사업은 너무나 귀한 것이었다. 자라난 가정을 떠날 때에 그들은 장차 자신들이 가지게 될 숭고한 운명에 대하여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으리라!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충실하고 건실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실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물들을 통하여 나타내신 위대한 진리를 오늘날의 청년 남녀들을 통해서도 나타내기를 원하신다. 요셉과 다니엘의 역사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고 전심으로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고자 힘쓰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분께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실례이다.
인류의 가장 큰 결핍은 인물의 부족이다. 그 인물이란 매매되지 않는 사람, 심령이 진실하고 정직한 사람, 죄를 그대로 죄라고 부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마치 나침반의 바늘이 틀림없이 남북을 가리키듯이 양심이 그 의무에 충실한 사람, 비록 하늘이 무너질지라도 옳은 일을 위하여 굳게 서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품성은 우연히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무슨 특별한 은혜나 천분(天分)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고상한 품성은 극기와, 저급한 성품을 버리고 고매한 성품을 가지려는 노력의 결과, 곧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의 봉사를 하기 위해 자아를 내어 맡기는 자기 수련의 결과이다.
청년들은 자기들이 받은 천분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힘, 시간, 그리고 지성은 다만 일시로 빌린 보물일 뿐이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것으로, 모든 청년들은 응당 이것들을 최고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청년들은 각각 하나님께서 열매를 보기 원하시는 가지이면서 자본을 증식시켜야 할 청지기이며, 또 세상의 어두움을 비추는 빛이다.
청년들과 유년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복리를 위하여 각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 엘리사
선지자 엘리사는 유년 시절을 조용한 전원 속에서, 하나님과 천연계의 가르침 아래 유용한 훈련을 받으면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와 가족은 당시 거의 전국적이다시피했던 배교의 분위기 속에서도 바알 신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 가정은 하나님에 대한 공경과 충실한 의무 이행을 생활의 법칙으로 삼았다.
부유한 농부의 아들 엘리사는 주위에서 손쉽게 찾아 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였다. 그는 사람들을 지도할 소질을 가졌으면서도 일상 생활의 평범한 의무를 행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사람을 지혜롭게 지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작은 일에 충실함으로써, 그는 더 크고 중한 책임을 지기에 합당하도록 준비되었다.
엘리사는 유순한 한편, 정력과 굳은 의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일상 생활을 하는 중에도 확고한 목적과 고상한 품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지식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아버지를 도와 가사에 협력하는 중에, 하나님과 더불어 협력하는 법도 배웠다.
엘리사는 아버지의 종들과 함께 밭을 갈고 있을 때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하나님의 인도로, 자기 후계자를 찾고 있던 엘리야가 이 젊은이의 어깨에 두루마기를 던졌을 때, 엘리사는 부르심을 깨닫고 이에 순종하였다. 그가 "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들었더라" (왕상 19:21). 처음에 엘리사에게 주어진 일은 큰 것이 아니었다. 역시 평범한 의무를 행하게 하는 것이 그를 훈련하는 일이 되었다. 그는 그 주인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는 자였다고 한다. 그는 선지자 엘리야를 따르는 자로서 작은 일에 항상 충실하면서, 날마다 더욱 뚜렷해지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에 헌신하였다.
엘리사가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의 결심은 시험을 받았다. 그가 엘리야를 따라가려고 할 때에, 그 선지자는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는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말해, 부르심을 받아들일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를 스스로 정해야 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가 가진 기회의 가치를 알았다. 그는 어떤 세속적인 이익으로도, 하나님의 사자가 될 가능성과, 하나님의 종과 교제할 특권을 맞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세월이 지나 엘리야가 승천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엘리사는 그 후계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여기서 다시, 엘리사의 믿음과 결심은 시험을 받았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순회 봉사 여행을 따라다니는 중에, 그 선지자에게 조금 있으면 변화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가는 곳마다 엘리야로부터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왕하 2:2). 그러나, 소년 시절부터 쟁기를 잡고 일해 온 엘리사는 도중에 실망한다든지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배워 왔다. 이제 또 다른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쟁기를 잡은 그는 그 목적으로부터 돌아설 수가 없었다. 돌아가라는 권면을 받을 때마다, 그의 대답은 "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왕하 2:6) 하는 것이었다.
"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 그 두 사람이 요단 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 (왕하 2:6-15)더라.
이 때부터, 엘리사는 엘리야의 일을 대신하였다. 작은 일에 충실했던 그는 큰 일에도 충실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능력의 사람 엘리야는, 감당하기에 벅찬 악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사용된 하나님의 그릇이었다. 아합과 이교도 이세벨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백성들을 유혹하던 우상 숭배가 타도되고, 바알의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스라엘의 온 백성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길로 돌아섰다. 엘리야의 후계자로서 인내를 가지고 신중하게 이스라엘을 안전한 길로 인도해 갈 인물이 필요했다. 이 일을 위한 준비로 엘리사는 어려서 부터 하나님의 지도 아래 훈련을 받았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배워야 할 교훈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하시는 정확한 목적은 아무도 알 수 없으나, 작은 일에 충실하다는 것은 더 큰 책임을 지기에도 적합하다는 증거가 된다. 사람의 모든 행위는 그 품성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작은 일에 "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딤후 2:15)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자만이 하나님께로부터 더욱 큰 신임과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의 장부 모세
모세가 따뜻한 가정의 보호로부터 떠난 것은 요셉이나 다니엘보다 더 어릴 때였다. 그러나, 이 때에 벌써 그의 생애는 요셉이나 다니엘의 생애를 꼴지었던 동일한 힘에 의해 영향을 받았었다. 모세가 히브리의 친척들과 함께 보낸 기간은 불과 12 년간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에 그를 위대하게 만든 기초가 놓여졌던 것이다. 더구나, 이 기초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없는 자의 손에 의해 놓여졌다.
요게벳은 여자 노예였다. 그러나,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그가 진 짐은 무거웠다. 나사렛의 마리아를 제외하고는 요게벳만큼 세상에 큰 축복을 준 여자도 없다. 그는 자기 아이가 멀지 않아 자신의 보호를 떠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양육받게 될 것을 알고, 더욱 열심으로 그 아들의 마음을 하늘에 연결시키기 위하여 힘썼다. 그녀는 어린 모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심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그 일은 뜻대로 충분히 이루어졌다. 요게벳이 의무로 알고 가르치고 자신의 평생의 교훈으로 삼았던 진리의 원칙들이 모세의 마음에 그대로 옮겨져 그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게 했다.
요게벳의 아들은 고센의 가난한 가정을 떠나 바로의 궁전으로 가서 애굽 왕녀의 사랑하는 아들이 되었다. 모세는 애굽의 학교에서 최고의 문무(文武)훈련을 받았다. 그의 훌륭한 용모와 체격, 매력적인 인품, 지성적인 교양과 귀공자다운 태도, 무관으로서의 명망, 이런 것들로 그는 애굽의 자랑스러운 인물이 되었다. 애굽의 왕은 제사장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모세는 비록 이교의 신에게 예배하는 것을 거부하고는 있었지만 애굽 종교의 모든 비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의 애굽은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세력 있고 발달된 문명국이었으므로, 모세는 그 나라의 미래의 군주로서 이 세상 최고의 영예를 이어받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보다 더 고귀한 것을 선택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유린당하고 있는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의 영예를 포기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점에서 모세의 교육을 담당하셨던 것이다.
모세는 아직 그의 평생 사업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력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이를 위해 애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패배와 실망을 안고 낯선 곳으로 도망하는 망명자가 되었다.
미디안의 광야에서, 모세는 목자로서 사십 년을 보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필생의 사명과 영영 무관하게 된 듯 보였으나 실제로는 그 임무의 달성을 위하여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무지하고 규율이 안 잡힌 군중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극기를 통하여 지혜를 얻어야만 했다. 순한 양들을 보호하는 중에, 그는 이스라엘의 충직하고 인내심 많은 목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얻었다. 하나님의 대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아는 자가 되어야 했다.
애굽에서 받은 영향, 양모의 애정, 왕손으로서의 입장, 무수한 형태의 매혹적인 사치와 향락, 섬세하고 교묘한 거짓 종교의 신비, 이 모든 것들이 모세의 마음과 품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광야의 극히 단순한 환경에 의해 그는 이 모든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장엄한 산들에 둘리어 인적이 드문 곳에서, 모세는 홀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였다. 어디에나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그분의 능력에 둘러싸인 듯하였다. 여기에서, 그의 자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시야가 좁은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모세가 여러 해 동안의 고되고 힘든 생활을 통하여 얻은 것은 거룩하신 분의 직접적인 임재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나타나실 것을 미리 보았을 뿐 아니라 그분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여행하는 동안 줄곧 그들과 함께 하시는 것도 보았다. 모세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그릇된 평판과 비난을 받을 때에도 그 모욕을 참았으며, 위험과 죽음 앞에서도 "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히 11:27) 참고 견딜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단지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았다. 계속해서 그의 앞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환영을 본 것이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얼굴을 놓치지 않고 주목하였다.
모세에게 있어서 믿음은 짐작이 아니고 사실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특별히 지배하신다는 것을 믿었으며, 생활 하나하나에서 그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유혹에 대항하는 힘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였다.
모세는 그에게 주어진 중대한 일을 완전히 성공시킬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였다. 그는 도움이 필요함을 느꼈으며, 또 이를 구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잡음으로써 붙드시는 힘을 확신하는 가운데 전진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모세가 광야에서 받은 40 년간의 훈련에서 얻은 경험이었다. 이런 경험을 허락하심에 있어서 지혜가 무한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기간이 너무 길거나 그 대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지 않으셨다.
그 훈련의 결과와 거기서 가르쳐진 교훈의 성과는, 이스라엘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당시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발전에 이바지한 모든 일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의 말씀은 모세가 위대한 인물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최고의 증거, 곧 그의 생애에 대한 영감적인 기록의 판정이다. "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 34:10).
기쁨의 봉사자 바울
복음 사업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갈릴리 제자들의 믿음과 경험이 열성적인 한 예루살렘 학자의 지성과 결합되었다. 다소 사람 사울은 이방 도시에서 태어난 로마의 시민이었다. 그는 혈통을 보나 평생 동안 받은 교육, 애국심, 신앙을 보나 완전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고명한 학자들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율법과 관습에 따라 훈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이에 따른 편견이 대단하였다. 그는 청년의 때에 이미 산헤드린의 존경받는 의원이 되었다. 그는 고래의 전통적 신앙에 대한 열렬한 옹호자로, 전도가 유망한 사람으로 촉망을 받았다.
유대의 신학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이론을 더 중히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랍비들 나름대로의 교훈과 해석에 의해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세력 부식(扶植), 권세에 대한 욕망, 시기와 배타심, 완미(頑迷)하고 교만한 자부심, 이런 것들이 당시의 교사들을 지배한 주의와 동기였다.
랍비들은 타민족뿐 아니라 동족 앞에서도 자신들의 우월성을 자랑하였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 대하여 격렬한 저항심을 가지고, 국가의 주권을 회복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에 찬 음모와는 대조적인 평화의 기별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증오하고 죽였다. 이 박해 운동에서, 사울은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행동 요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애굽의 군사 학교에서 무력의 법칙을 배운 것이 품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으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사랑의 법칙으로 지도하기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해 천연계 속에서 하나님과 조용한 교제를 나누면서 40 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바울 역시 이와 똑같은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다메섹 성문 밖에서 바울이 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이상은 그의 생애의 방향을 일변시켰다. 박해자가 제자로, 교사가 학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메섹에서 쓸쓸히 보낸 어두운 며칠이 그에겐 마치 몇 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구약 성경의 말씀은 그의 연구 자료가 되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교사가 되셨다. 그에게도 고요한 천연계는 학교가 되었다. 그는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서 성경을 연구하며 하나님에 대하여 배웠다. 그는 지금까지 자기의 생애를 꼴지어 왔던 편견과 관습에서 벗어나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교훈을 받았다.
그의 후반 생애는 자기 희생과 사랑의 봉사로 일관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 헬라 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롬 1:14),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고후 5:14)라고 하였다.
사람으로 교사가 된 자 중에서 가장 위대했던 바울은 중요한 의무뿐만 아니라 사소한 의무까지도 받아들여 수행했다. 그는 정신적인 노동은 물론 육체적인 노동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수공업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는 문명이 발달된 도시에서 날마다 복음을 전하는 한편, 천막 만드는 일에도 종사하였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작별할 때에 그는 "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 (행 20:34)였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천부적으로 지력이 뛰어났다. 그는 또 그의 생애를 통해 보기 드문 지혜를 발휘했다. 더없이 깊은 뜻을 담고 있는 원칙들, 당시의 가장 위대한 사람들도 알지 못한 원칙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드러났으며, 그의 생애에서 예증되었다. 그는 모든 지혜 가운데 가장 큰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동정심과 통찰력을 소유케 하며 서로 참된 마음으로 교제하게 하고 선량한 본성을 일깨워, 보다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바울이 이교도인 루스드라 사람들 앞에서, 모든 은혜의 근원이신 천연계의 하나님을 가리켜 "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행 14:17) 하신 분이라고 한 말을 주목하라.
빌립보의 감옥에 갇힌 그를 보라. 고통스러운 고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찬미를 불렀다. 지진으로 옥문이 열렸을 때에도 그는 "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행 16:28)고 하며 이교도인 간수를 안심시켰다. 과연,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죄수들은 같은 죄수인 바울이 그대로 있자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함께 남아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을 지키던 간수는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구원의 길을 찾아, 자기의 온 가족과 함께 박해 아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합류했다.
아덴의 아레오바고 회의에서 과학에는 과학으로, 이론에는 이론으로, 철학에는 철학으로 응수하는 바울을 보라. 그는 하늘로부터 오는 사랑에서 생기는 기지를 가지고, 사람들이 모르면서 섬기는 소위 " 알지 못하는 신" 은 바로 여호와이신 것을 지적하고, 그리스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요 저희들은 그 아들인 것을 설명하였다. 계급 의식이 심하여 사람들의 권리가 전혀 인정되지 않던 당시에, 하나님께서 "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행 17:26) 하신 것을 밝히면서 인류의 형제애에 대한 위대한 진리를 설명하는 그의 말을 들어 보라. 다시, 그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는 은혜와 인자를 베푸시려는 그분의 뜻이 마치 황금의 실처럼 늘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6, 27).
베스도의 법정에서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아그립바 왕이 "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행 26:28)라고 말하게 한 당시의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그는 그가 묶인 사슬을 가리키면서 "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행 26:29)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스스로의 말처럼 "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와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 (고후 11:26, 27)는 일생을 보냈던 것이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고전 4:12, 13), "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 (고후 6:10)라고 하였다.
그는 봉사하는 중에 기쁨을 찾았다. 그리하여, 고난의 일생을 마치게 될 때에, 자기의 투쟁과 승리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 내가 선한 싸움을 싸" (딤후 4:7)웠다고 말할 수 있었다.
* *
이러한 내력들은 매우 유익한 것이다. 이것들은 누구보다도 젊은이들에게 아주 중요하다. 일생 동안 하나님께 봉사하는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하여 모세는 미래의 왕위를 거절했고, 바울은 자기 민족 가운데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내어 버렸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생애가 일종의 자포자기나 희생으로만 보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하였을까? 모세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받는 욕을 애굽의 보화보다 더욱 부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에게는 사실 그러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여긴 것이다. 바울은 "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 (빌 3:7, 8)으려 함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과 군주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화려한 궁전에는 사람들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하는 죄로 물든 향락이 넘쳤으므로, 모세는 그것 대신에 " 장구한 재물과 의" (잠 8:18)를 택하였다. 그는 애굽의 위대함에 속박되기보다 하나님의 목적에 그의 일생을 연결시키기로 하였다. 그는 애굽의 법률을 정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세상을 위한 율법을 제정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그릇이 되어, 가정과 사회를 위해서는 안전 장치가 되고 국가를 위해서는 번영의 초석이 되는 원칙들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원칙들은 지금도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인류의 모든 훌륭한 법률의 기초로 간주되고 있다.
애굽의 위대함이 티끌로 변하고 그 권세와 문명은 끝이 났지만, 모세의 업적은 결코 없어지지 않았다. 그가 실천적인 생애를 통해 세운 정의의 원칙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모세의 일생은 " 만 사람에 뛰어" (아 5:10)나고, " 전체가 사랑스" (아 5:16)러우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힘입어 빛났다. 광야에서 방황할 때도, 변화산에서도, 그리고 하늘의 궁정에서도, 항상 그리스도와 함께 한 그의 일생은, 지상에서는 타인과 자신에게 복이 되고 하늘에서는 영예를 받은 생애였다.
바울 역시 그의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임재의 능력을 힘입었다. 그는 말하기를,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5-39) 하였다.
바울은 그가 행한 수고의 보수로 장래의 기쁨을 기대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참으시고 굴욕을 문제삼지 않으신 것과 같은 기쁨, 곧 자기의 수고의 결실을 내다보는 기쁨이었다. 그는 데살로니가의 신자들에게 이와 같이 편지 하였다. "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살전 2:19, 20).
바울의 필생의 사업이 세상에 끼친 결과를 어느 누가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괴로움을 덜어 주고 슬픔을 위로하며, 악을 물리치고, 이기주의와 육욕을 버리고 고상한 생활을 하게 하며, 또 영생에 대한 희망으로 생애를 영광스럽게 만드는 모든 선한 감화 중에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가지고 아시아에서 유럽의 남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쏟은 숨은 노고에서 비롯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복된 감화를 사람들에게 끼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그릇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생애인가? 그리고, 이런 평생 사업의 결과를 영원한 나라에서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또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