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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장 10절-21절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 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롬 5:10, 11).
11절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 얻은 것'을 아는 지식으로 맺게 되는 열매 중의 하나를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으로 구원을 받은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그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된 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12절).
이 구절에서는 일부분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13절로부터 17절까지의 괄호로 묶여져 있으며 그후에 18절에서 다시 이 말씀을 시작하여 끝마친다. 18절의 전반부는 12절의 전반부와 같은 내용이며, 같은 진리를 다른 말로 표현한 것 뿐이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이렇게 말한 후에 18절의 끝부분에서 그 말씀을 이렇게 마친다.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 삽입 구절들을 간단히 보고자 한다. 여기에 풍성한 진리가 들어 있지만 이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너 있기 때문에 요점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14절에 '사망이 왕노릇'이라는 말씀이 있다. '사망이 왕노릇'이란 무슨 뜻이며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사망이 왕노릇하였다'고 사도는 말한다. 이 말은 사망이 다른 때에는 지배하지 않았다거나 또는 현재에는 지배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아담과 모세를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4장에서 시작하여 전개하고 있는 큰 줄거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아브라함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말하는 말씀의 일부분이다.
이 말씀을 간단히 살펴보면 율법의 개입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결코 폐하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로마서 4장 13절과 24절에서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사도는 사람이 율법으로는 결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며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 되고 율법의 행위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왜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만들어 줄 수 없는가?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브라함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면 진노 외에는 아무 것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이 이루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노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은 진노를 부어주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며 그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때에 생명을 받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생명이며 진노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도 생명이지 진노가 아니다. 행위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진노만을 거둘 뿐이다. 아브라함은 오직 약속을 따라 유업을 받고 오직 그의 믿음에 의하여 의를 받았던 것이다.
구원에는 두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그때까지 사망이 왕노릇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율법이 생명을 가져다 주었다는 의미로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지만 그러나 율법은 시내산에서 주시기 오래전부터 세상에 있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율법이 있었으므로 믿음의 의로 율법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주신 율법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폐지하지 않았다. 산에서나 출애굽 때에도 구원의 계획에는 전혀 다른 면이 없었다. 그전에나 그 당시에도 여전히 율법이 있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켰다. 만일 율법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믿음으로 율법을 지켰던 것이다. 모세 전에도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왕노릇하였지만 그가 의를 받아 생명에 이를 수 있었다. 이것은 율법이 그 당시에도 이미 있었지만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었고 시내산에서 비로소 문자의 율법을 받았다.
사망의 왕노릇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 말씀 곧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을 단순히 잘못 적용하기 때문에 5장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하고 고무적인 말씀의 의미를 놓친다고 생각한다. 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왔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와서 멈추고 사색하면서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하고 깊이 연구하여 그 타당성을 스스로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우리 자신들의 선택이나 한마디의 말도 한 일도 없이 왜 이런 죄에 빠져 있는가 하고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태초에 한 사람이 있었으며 그가 타락했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우리는 그의 자녀들이므로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신분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떤 이들은 이 일을 훌륭하게 규명할 수 없고 그 타당성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영생의 길에 마음의 문을 닫는다. 유한한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런 수고를 그만두고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원을 전심전력을 다하여 찾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생각해야 할 중요한 일은 바로 이 구원이다. 우리는 죄에 빠진 사람들이며 이런 죄의 신분은 잃어버린 상태임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바다에 빠졌는데 누군가가 그를 구하려고 밧줄을 던졌더니 그것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내가 물에 빠졌고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밧줄을 붙잡는데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물에 빠진 것이 정말 내 잘못임을 알지 않는 한 밧줄을 붙잡지 않겠다. 내 잚못이라면 밧줄을 붙잡겠다. 왜냐하면 내 잘못으로 물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이 나를 물 속에 밀어넣어 이 지경이 되었다면 결코 밧줄을 붙들지 않겠다." 이런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런 사람을 정신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죄인이며 잃어버린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고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붙들도록 하자.
'사망이 왕노릇하여'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2절과 18절은 이 사망이 무엇임을 말해주고 있다. 왜 사망이 이르러 왔는가?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이르렀다.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되었는가? 정죄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사망과 아주 친숙하다. 매일 사람들이 무덤에 들어가는 것을 본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선한 사람들이 죽는다. 단지 두 갖지 예외는 있지만 일찌기 세상에 살았던 모든 선한 사람들이 죽었다. 그들은 정죄 아래 죽는가? 결코 아니다. 죄인들이기 때문에 죽는가? 아니다. 만일 죄인들이라면 선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의 사람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선한 사람이 되어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면 믿음으로 한 것이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늙거나 젊거나 간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러 오는 사망은 정죄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심판을 집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죽은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왜냐하면 죽은 후에는 은혜의 기간 같은 기회가 없으므로 죄 가운데 죽은 사람은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한 사람은 죄 가운데 죽지 않고 오직 전에 지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말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부인하고 그의 입혀주신 의를 거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의를 주셔서 전혀 죄를 지은 일이 없는 것처럼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믿음을 부인하지 않는 한, 죄인으로 형벌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병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 동상에두시고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난외주석에서 말하듯이 '죽어 가므로 정녕 죽으리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나 영어 식의 표현법이 아니다. 그 말씀대로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그 날에 죽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날에 타락하여 사형을 선고받았으므로 그는 죽은 사람이었다. 그때에 즉시 사형 선고가 집행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아담은 여전히 선한사람이었고 그후에도 사형 집행을 받은 일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스도꼐서 그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은 후에 아담의 입장을 모둔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은 날 밤에 일어나서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라고 말한 바로 왕과 똑같은 입장에 있었다(출 12:33).
살인자에게 사형 선고가 내렸을 때에 사실상 죽은 자나 다를 바 없다. 아담의 경우는 그보다 더 하다. 그는 죽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살려 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존재가 없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꼐서 사람에게 은혜의 기간을 주시고 살리기 위라여 도신다. 이제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한 마디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들어 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없다면 인간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한 마디의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생명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들어있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없다면 인간에게 생명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예수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아마 이럿게 대답했으리라.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으니 갈 필요가 없다'라고
에스겔 13장 22절에서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니 못하게 하였은즉'라고 말한다. 악인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들은 생명이 없으므로 죽은 자들이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셨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진정으로 붙잡아 그들의 생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들의 잃어버린 생명을 대신하게 된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 그는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은 죽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으며 사형 선고가 모든 사람에게 내렸다.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아 정죄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사형 던도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런 사형 선고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길 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보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며 십자가 상에서 그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며 오직 우리를 위해서 율법이 정한 형을 받으셨다. 그리스도 자신은 죄가 없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을 수 없으나 우리를 위해서 받으셨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값없이 주시는 선물은 무엇인가? 그것은 은혜로 주신 선물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아담의 행위로 인간이 죄에 빠졌었지만 그리스도의 행위로 죄에서 구원을 받는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정죄를 받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죄인들이 정죄 아애서 구원을 받는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의롭게 된 모든 사람들에게 이 값없는 선물이 이르러 온다. 의는 생명이다. 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간단하면서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의심하는 사람은 선하게 될 수 없으며 오직 그는 열매없는 쭉정이만 수확할 뿐이다. 우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도록 하자.
'값없이 주시는 선물로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인가? 모든 사람이 원하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말씀하신다. '너희가 영생울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어 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 이 은혜는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곳까지 이르러 왔지만 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하므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를 의롭게 해주는 행위를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모든 해답을 준다.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가 여러분을 의롭게 해 줄 의를 행항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나를 의롭게 해줄 의를 행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자, 한 사람이 그를 의롭게 하는 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는 누구일까? 내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없고 여러분이 나를 위하여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율법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준다.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고 순종하게 되었다. 의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어떤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켰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는가? 또는 지금까지 아무도 도달한 일이 없고 그 이상으로 높은 것이 없을만큼 아주 높은 표준을 어떤 사람이 세웠다는 말을 들어본 일이 있는가? 불신자들 중에도 자신의 이상을 가지고 있어 그 이상에 가까이 도달하면 할수록 더욱 큰 부족감을 느끼는 자들이 흔히 있다. 높은 표준에 도달하기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들은 거기에 도달샜을 때에 더욱 높은 표준이 있음을 발견한다.
흠없는 생애를 산 사람이 한분 있다. 이 세상에 있을 때에 모든 죄의 권세를 성공적으로 이겨낸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그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셨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세상을 자신과 화목을 이루었다. 그는 세상 사람들 앞에 서서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고 도전하셨다. 그의 입에는 간사함이 없었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 보다 조ㅍ이 되신 자라.' 그러므로 그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이 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병이 없느니라.' 고 말했을 때에 유대인들이 했던 것돠 같은 질문이다(요 6:53).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삐 능히 제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그의 생명 곧 그의 의를 가질 수 있느냐고 말할 때에 이와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살을 줄 수 있는 방법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있었는가? 그들에게 말한 말씀이 아니고서는 그 방법을 설명할 수 없다. 그의 말씀은 영이요 생병이다. 인간에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속의 경륜을 설명할 수 없다 구속의 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으며 영원토록 구속의 경륜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한한 능력만이 이룰 수 있고 무한한 지혜만이 이해할 수 있다.
만일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생명을 가지면 우리는 의로운 생명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순종하셨으므로 우리가 제 마음대로 행하여도 그의 의가 여전히 우리에게 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있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매일 우리의 생애에서 나타나야 한다. 그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우리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에 의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받느다. 우리가 사는 생명은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측량할 수 없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의는 그의 의이다. 이 놀라운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자. 우리가 순종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보였기 때문에 그 순종에 필요한 모든 능력을 맏도록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순종하는 능력을 받게 하신 이유이다. 이것을 가지면 생명을 소유한다. 어떠한 생명인가? 하나님의 생병이다. 이 생명을 소유한 후부터는 시험을 받을 때에 지금까지는 시험에 늘 넘어졌지만 이제부터는 그런 시험으로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사단에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소유한다. 어떠한 생명인가? 하나님의 생명이다. 이 생명을 소유한 후부터는 그런 시험으로 우리를 넘어 뜨릴 수 없다고 사단에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고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람의 생애에서도 스스로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때가 결코 없었다. 우리는 시험을 저항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완전히 저항하기 위하여 우리의 타고난 생명과는 다른 생명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생명은 죄의 지배를 받은 일이 없고 또 지배를 받을 수도 없는 생명이여야 한다. 다음의 영광스러운 말을 거듭거듭 되풀이하여 주장하자.
"그의 생명은 내 생명이 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나를 결코 만질 수 없다. 그의 능력은 내 능력이 되었고 그의 순종은 나의 순종이 되었으며 그의 생명의 나의 생명이 되었다. 그 생병은 죄없는 생명이며, 믿음으로 나는 그 생명을 가지고 있다. 그 생명은 내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죄가 그 생명을 만질 수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죄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또 이렇게 하면 언제나 성공하게 될 것이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나라.' 율법이 가입한 때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한 때부터였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법죄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기 전에 세상에 죄가 있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기 전에 세상에 죄가 있었다.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기 전에 율법이 세상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산에서 그토록 무서웁고 우뢰같은 소리로 율법을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사람들이 죄를 더욱 크게 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기록하였다. 그토록 엄숙하고 무서운 상황 속에서 우뢰같은 음성으로 율법을 선포한 것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주었던 인상을 우리도 똑같이 받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우리도 그와같은 죄성 벽력과 번개가 무섭게 치는 장면을 보고 마음에 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좀더 생각해 보자.
산에 오른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모든 것은 율법의 엄숙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율법을 주셨기 때문에 백성들은 율법이 가진 놀라운 위엄을 볼 수 있었고 어떤 사람도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율법은 너무도 광대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지킬 수가 없었다. 율법의 선포와 관련하여 보여 준 모든 것은 인간이 율법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주 크고 엄청나게 광대하므로 인간은 그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율법을 준 것은 율법에는 오직 사망과 정죄만 있을 뿐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율법을 준 것은 한낱 인간의 마음에 실망을 주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다. 아르라함에게 돌아가 보면 율법을 준 것은 다른 무엇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의 의로운 자손에게 의의 유업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직접 맹세하고 이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주셨다. 하나님이 자기를 두고 맹세 하시면서 의인 곧 율법의 의와 같은 의를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와같은 무서운 위엄이 율법에 있기는 하나 율법으로부터 의를 얻을 수는 없었다. 율법은 유일한 표준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이 두 가지 점을 종합해 보자.
율법은 아주 거룩하지만 율법을 줄 때에 보여준 바와 같이 율법으로부터는 어떤 의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율법에서 요구하는 모든 의를 가질 사람이 있도록 하겠다고 하나님은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율법을 준 사실은 이같은 의를 얻는 다른 길이 있어댜 하고 또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하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율법을 주신 것은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을 가장 강력한 음성으로 백성에게 전파했기 때문이다. 율법을 주신 분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었으며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맹세하셨다. 이것은 그들이 율법에서 의를 얻을 수 없으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엄청나게 풍성한 은혜가 있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가입으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이다. 이 은혜는 죄인이 개심할 때는 언제나 풍성하였다. 죄인은 개심하기 전에는 죄의 극악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이 이르러 와서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며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온유한 음성이 들린다. 그리스도 안에는 은혜와 생명이 있다.
우리의 마음이 죄를 깨닫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보내어 죄를 깨닫도록 해 주시는 보혜사의 역사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죄를 깨닫게 하는 일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는 일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죄를 깨닫게 함과 동시에 죄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죄가 왕노릇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것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르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해 준다. 우리는 이런 은혜 속에서 '더욱'이라는 귀한 말씀을 다시 인식하게 된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잘 아신다. 우리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용서할 수 었다고 말하며 슬퍼하고 애통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그들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부담해 줄만큼 그들이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수 있는가를 알 수 없다. 누가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해 주는가? 누가 우리의 무가치함을 보여 주는가? 우리가 범죄했다는 것을 어떻게 발견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죄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의 모든 죄를 알고 계시다는 것과 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지 않는다.
하나님이 구원의 경륜을 세웠을 때에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잘 알았으며 인류가 빠진 타락의 깊이를 잘 알고 계셨으나 인간은 이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이제 그의 율법으로 죄를 우리의 마음에 깨닫게 하고 율법에 비례하여 죄가 많아진다. 전에는 죄가 우리의 눈에 적게 보였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보시는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신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주는 분은 보혜사이며 마음이나 생각에 죄를 많이 깨달을 때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가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에 은혜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그에게 아주 선하거나 아주 위대한 어떤 것을 구하지 말고 더욱 넘치도록 해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은헤의 양을 측정할 필요가 없으므로 세상을 두루 살피고 은혜를 필요로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 본 다음에 충분히 돌아가도록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아무리 죄가 커서 가리울 수 었을 것 같이 보일지라도 충분히 가리우고도 더욱 넘치게 은혜가 있다. 죄인인 우리가 옷을 입듯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옷입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새 생애를 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