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감사합니다. 한 주 동안 평안하셨죠, 다들? 이제 지난주에 마태복음 24장까지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다룰 장수는 25, 26, 27, 28장으로 네 개 장이지만 각 장의 절수가 워낙 많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지금까지 했던 대로 다 읽으면서 진행하면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습니다. 남겨진 시간 동안 전체 장 내용을 다 읽으면서 진행하기는 어렵고요. 복음서 공부는 다음 학기에 요한복음을 또 하기 때문에, 인물들을 실제 시간과 공간에 재배치해서 순난 주간의 마지막 일주일 사건을 공부할 기회가 앞으로 계속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모든 기록을 재구축(Reconstruction)하는 시공간 속의 종합적인 공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따라가면서 읽고 그 의미를 추적하는 데 초점을 두고 진행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24장까지 살피면서 끝에 대해서 공부했었지요. 24장 1절부터 28절까지 예수님의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 중에 '끝'이 두 가지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24장 3절에서 제자들이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물었던 질문과, 6절의 "끝은 아직 아니니라", 13절의 "끝까지 견디는 자", 14절의 "그제야 끝이 오리라"에 총 네 번의 '끝'이 나옵니다. 24장 3절에 제자들이 물었던 '세상 끝' 할 때의 그 끝은 '텔레이아', 즉 긴 끝(말세)입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6절, 13절, 14절에서 말씀하신 끝은 '텔로스'입니다.
제자들이 물었을 때의 끝과 예수께서 대답하실 때의 끝이 다릅니다. 제자들이 물었을 때의 끝은 말세이고, 예수께서 대답하실 때의 끝은 새말입니다. 말세가 길다면 새말은 그 말세가 끝나는 지점입니다. 흔히 재림의 징조로 전쟁, 지진, 기근, 질병, 도덕적 부패 등을 이야기하는데, 그런 사건들은 재림의 징조가 아니라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입니다. 24장 8절에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나오지요. 전쟁, 지진, 기근 등은 재림의 징조가 아니라 재난의 시작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텔로스'의 징조는 24장 14절 말씀 하나뿐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이것이 '텔로스'의 징조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말세는 재난과 함께 시작됩니다. 전쟁이나 지진이 일어나면 말세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세를 끝내려면 천국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진이나 전쟁이 일어났다고 예수께서 오실 때가 가까웠다며 기뻐하지 마시라고 당부합니다. 그것은 재난의 시작을 알리는 것일 뿐입니다. 태풍이 불고 사람이 죽어갈 때 "우리는 예수를 믿으니 하늘 갈 때가 가까웠네" 하고 좋아하면 안 됩니다. 그런 재난을 끝내야 할 영적, 도덕적, 윤리적 책임을 느끼고 속히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신앙 초기에 개인적으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교회에 처음 나갔을 무렵, 태풍으로 200~300명이 바다에 빠져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많은 분이 밝은 표정으로 "정말 세상 끝날이 다 왔어. 주님 나라 갈 때가 가까웠나 봐"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이 '구원받은 선민'이라는 자부심만 보이는 것 같아 충격이었습니다. 나중에 성경을 읽어보니 바로 이런 뜻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24장 후반부에도 예루살렘 멸망과 세상 끝을 같이 이해했던 제자들의 질문이 있지만, 예수께서는 그 시기에 대해 예루살렘 멸망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다 이루어질 것이고, 재림의 시기는 아무도 모른다고 답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시죠.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이것을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국 달라스 신학대학원을 중심으로 일어난 세대주의 해석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휴거' 이론을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구원받은 자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자가 구원받지 못한 자입니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의 독특한 이론에 의하면,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이방인으로서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조용히 오시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싹 데려감을 당하고(휴거), 유대인들은 땅에 남아 환난을 다 통과한 후 세상이 새롭게 되었을 때 하늘로 데려간다는 성경에 없는 이론입니다. 그들은 이 구절을 이방인은 데려감을 당하고 유대인은 남아있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전혀 성경과 맞지 않는 이론입니다.
1992년 한국에서 이장림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다미선교회'가 10월 28일에 휴거한다고 난리를 피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휴거 이론이 기독교에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데, 성경에서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구원받은 자이고 버려둠을 당하는 자는 멸망 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개념이 전혀 아닙니다.
40절과 41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데려감을 받는 자와 버려둠을 받는 자가 운명이 결정되기 직전까지 똑같이 밭에 있었고, 맷돌을 갈고 있었습니다. 즉, 운명이 결정되는 현장은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자리라는 점입니다. 데려감을 당하는 자가 교회에서 하얀 옷을 입고 기도하다가 데려감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 메시지는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다가 운명이 갈라졌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재림 준비가 특정 장소나 구별된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42절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는 앞 문장과 떼어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장소가 바로 맷돌을 돌리고 밭에서 일하는 일상의 삶의 자리라는 뜻입니다. 재림교인 학생이 재림을 준비해야 하는 장소는 학교이고, 주부가 준비해야 하는 자리는 가정이며, 직장인이 준비해야 하는 자리는 직장 터입니다. 일상에서 매일 살아가는 자리가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입니다.
25장 1절부터 13절에 나오는 열 처녀 비유를 보겠습니다. 1, 2절을 보면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라고 합니다.
왜 12나 7이 아닌 '열 처녀'일까요? 유대인들에게 '열(10)'이라는 숫자는 회당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정족수)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 유대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공간이 회당(Synagogue)이었는데, 회당 하나가 형성되는 최소 인원이 10명이었습니다. 따라서 '열 처녀'는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2절에서 구분 기준이 '악함과 의로움'이 아니라 '미련함과 슬기로움'입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의 구분이 아니라, 신랑을 기다린다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구분임을 뜻합니다.
이 두 그룹의 공통점은 모두 '등'을 가졌고,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은 '기름을 담은 그릇'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만 가졌고, 슬기로운 자들은 그릇에 여분의 기름을 담아갔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등잔 속의 기름은 당장 빛을 밝히는 '공적 신앙'이며, 그릇 속의 기름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에서 준비된 '사적/예비된 신앙'입니다.
목사가 설교나 가르침만을 위해 성경을 읽고 개인적 교제가 없다면 그릇에 기름이 없는 것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신앙을 넘어,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 예비된 삶을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25장 13절에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이는 24장 42절의 결론과 똑같습니다. 일상에서 매일 살아가며 늘 주님과의 관계가 그릇 속 기름처럼 예비되어 있는 삶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14절부터 30절까지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종들의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 셈을 합니다. '오랜 후에'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각각 남겨서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종의 신분이 자녀의 신분으로 바뀌어 주인의 권한과 즐거움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그는 24절에서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라며 땅에 묻어두었다가 가져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속성을 오해했습니다. '굳은 사람'이란 완고하고 까다로운 사람을 뜻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게으름에 대해 변명하며 하나님의 절대 섭리를 핑계 대었습니다.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책망하며 차라리 취리하는 자들에게 맡겨 이자라도 받게 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받은 달란트(재능)만큼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의 사업과 타인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열 처녀 비유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보여준다면, 달란트 비유는 타인과의 수평적 관계 속에서 봉사하고 나누는 삶을 보여줍니다.
31절부터 46절은 양과 염소의 심판 비유입니다. 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모든 민족을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눕니다. 오른편의 양들에게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하십니다. 이들은 주릴 때 먹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했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자들입니다.
의인들은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대접하였나이까"라며 자신들이 행한 선행을 의식조차 못 합니다. 진정한 선행은 자각 없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는 나보다 지위, 신분, 학력, 재산 등 무엇으로 보나 못한 자를 뜻합니다. 나보다 낮은 자를 조건 없이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반면 41절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하십니다. 지옥 불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영원한 나라를 거절했기에, 마귀를 위해 예비된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6장 1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는 구절은 총 다섯 번 나옵니다(7:28, 11:1, 13:53, 19:1, 26:1). 이는 마태복음이 다섯 개의 큰 설교 묶음(교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25장으로 다섯 번째 교훈이 마무리되고, 26장부터는 십자가 고난과 순난 주간의 기사가 시작됩니다.
핵심 요약 정리
말세의 끝(텔로스)과 재림 준비의 장소 (마태복음 24장)
전쟁, 지진, 기근 등은 재림의 징조가 아닌 '재난의 시작'일 뿐이며, 참된 끝(텔로스)의 징조는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입니다.
구원과 심판이 갈라지는 현장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밭에서 일하고 맷돌을 돌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자리'입니다.
열 처녀 비유: 수직적 관계와 예비된 신앙 (마태복음 25:1~13)
열 처녀(교회 공동체) 중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를 가른 기준은 '그릇에 담긴 여분의 기름'입니다.
등잔의 기름이 외적으로 보이는 '공적 신앙'이라면, 그릇의 기름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는 개인적이고 예비된 영적 관계를 의미합니다.
달란트 비유: 수평적 관계와 일상에서의 충성 (마태복음 25:14~30)
각자의 재능대로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충성스럽게 열매를 맺는 것이 재림 준비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하나님의 속성을 오해하여 게으름과 변명에 빠지지 않고, 타인에게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과 염소의 심판: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선행 (마태복음 25:31~46)
구원받은 의인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신이 행한 선행조차 의식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나보다 지위나 조건이 낮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주님께 행한 것이며, 하나님은 원래 인간이 아닌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준비된 형벌의 장소에 임하지 않도록 영원한 나라를 예비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