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니
若論大華嚴의 重重無盡法界인댄
만약 대화엄(大華嚴)의 중중(重重)하여
다함이 없는 법계를 논할진댄
不渉唇吻하야 早是說了也며
입술을 거치지 않고서 벌써
설하여 마친 것이며,
不干敎乘하야 早已演了也라
교승(敎乘)에 관계치 않고서
벌써 연설하여 마친 것이다.
直饒溪聲으로 爲舌相하고 山色으로 爲身噐하고
설사 시냇물 소리로 혀를 삼고,
산색(山色)으로 몸을 삼으며,
盡山河大地로 爲寂場하고惣情非情으로 爲衆會라도
온 산하대지로 적멸도량(寂滅道場)을 삼고,
모든 유정(有情)과 비정(非情)으로 대중들의
모임을 삼는다고 하여도
言說을 不着이요 讃揚을 難盡이어늘
말을 붙일 수 없고 찬양을 다하기 어렵거늘
相師가 入無綘罅處하야 强生穿鑿하니
의상법사가 구멍을 꿰맨 데가 없는 곳에 들어가
억지로 천착(穿鑿)을 내었으니,
所謂彼旣無瘡이어든 勿傷之也라
이른바 “그에게 이미 상처가 없다면
더 이상 상처를 내지 말라.”고 한 것이다.
강설 ;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인 소동파(蘇東坡) 거사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의 이치를 깨닫고 지은 시가 있다.
계성변시광장설(溪聲便是廣長說)
산색기비청정신(山色豈非淸淨身)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곧 부처님의 크고 큰 설법이거늘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어찌 청정법신 부처님이 아니랴.
밤이 되니 8만 4천의 게송이나 되는 것을
다른 날 이 이치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겠는가.”
雖然이나 敎海波瀾이 不碍默味일새 相師가坐寬하사 蕩蕩地하야
비록 그러나 가르침의 바다가 넓고 깊음이
침묵의 맛에 방해되지 아니하기에
의상법사가 포용[坐寬]하여 걸림 없이 탕탕하게 이르되
任他道하대法性圓融無二相하니 諸法不動本來寂이요
“법(法)과 성(性)이 원융(圓融)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으니,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부터 고요하도다.
無名無相絶一切하니 證智所知非餘境이라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일체를 여의었으니,
깨달은 이의 지혜라야 알바요 그 밖의 경계가 아니로다.”라고 한
四句가 道盡了也니
이 네 구절에서 모두 다 말해버린 것이니
不搽紅粉에 便有風流의 氣象이로다
붉은 분(粉)을 바르지 않고도 곧 풍류(風流)가 있는 기상(氣象)이다.
且道하라 四句에 還有你思量計較와 分別意識也無아
또한 일러보아라.
이 네 구절에 또한 그대의 사량계교와 분별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自寂場으로 至于今日히便是一條鐵이라 無你接觜處로대
적멸도량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가 바로 통째로 무쇠덩이라서
그대의 주둥이를 댈 곳이 없는데
相師가慈悲之故로 不惜眉毛하고 有落草之談하야便道하대
의상법사가 자비한 까닭에 눈썹을 아끼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말을 하여 곧바로 이르되,
眞性이 甚深하야 極微妙라하니 早是十分帶泥帶水去也어든
“참다운 성품은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하다.”라고 한 것이니,
벌써 충분할 만큼 진흙과 물을 뒤집어 쓴 것인데
山僧이 今日에 重爲注脚하니 葛藤이不少로다
산승(山僧)이 오늘 거듭 주각(注脚)을 내니 허물[葛藤]이 적지 않도다.
前에 云한 法性者는 融淨穢하고 通眞俗하야 所謂不可取不可捨니
앞에서 말한 “법성(法性)이란 정(淨)과 예(穢)를 융화하고
진(眞)과 속(俗)에 통하여 이른바,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함이니,
若除一切인댄不得全法界之智하고
만약 일체를 제한다면 법계(法界)의 지혜를 온전히 얻지 못하고,
若添一事인댄 不得名淸淨之界者也어니와
만약 하나의 일이라도 덧붙이면 청정법계(淸淨法界)라는
이름을 얻지 못할 것이다.
此云 眞性者는 別取有情門中에 證入分하니
여기에서 말한 진성(眞性)이란 따로 유정문(有情門) 가운데서
참다운 지혜로 진리를 증득하는 것[證入分]을 취한 것이니,
退身一步하야 假作眞性之名이요
몸을 한발 물리어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요,
非指法性外에 別有一段眞性也라
법성 밖에 따로 일단의 진성이 있다고 지시한 것은 아니다.
若是藏人이 竪看에 有分커나 若是圓頓機中에
만약 장교(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차제(次第)를
밟아 보게 되어 있다거나
橫看인댄 早是錯了也니 不竪不橫하고 且道하라 是什麽消息고
[橫看] 하면 벌써 틀려버린 것이니,
차제도 말고 일거도 말고서 어쨌든 말해보라.
이것이 어떠한 소식인가.
橫竪는 且置一邊하고고作麽生是甚深底道理오
차제니 일거니[橫竪] 함은 우선 치워두고 무엇이
“매우 깊다.”는 바의 도리인가.
강설 ; 장교(藏敎)를 배우는 사람이란 즉 삼장교(三藏敎)인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비니장(毘尼藏)과 아비담장(阿毘曇藏)을
배우는 사람을 말하며,
以謂眞也에 全是夢幻이요 以謂假也에 純是實相이니
진(眞)이라고 말함에 전부가 몽환(夢幻)이요,
가(假)라고 말함에 순전히 실상(實相)이니,
非性非相이며 非眞非假로대
而性而相하며 而眞而假일새
성품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며
진(眞)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지만
성품이면서 형상이고 진이면서 가이기 때문에
故로 云하대 甚深也라하니라
“매우 깊다.”고 한 것이다.
그것을 양면을 다 부정하면서 양면을 다 수용하는
중도적 견해라고나 할까. 그래서 “매우 깊다.”고 한 것이다.
契文殊之妙智하대 宛是初心이니 則深也를不可得이요
문수(文殊)의 묘지(妙智)에 계합하되 완연히 초심(初心)이니
“깊다”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요,
入普賢之玄門하대 曾無別體니 則淺也를不可得이라
보현(普賢)의 현문(玄門)에 들어갔으되
일찍이 별체(別體)인 적이 없으니 “얕다”고 함이 있을 수 없다.
妙有는 得之而不有일새 眞也를 不可得이며
묘유(妙有)는 이것을 얻되 있지 아니한 까닭에
진(眞)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며,
眞空은 得之而不空일새 假也를 不可得이라
진공(眞空)은 이것을 얻되 공하지 아니한 까닭에
가(假)라 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理絶名言이 謂智斷修證일새 故로 云하대 極微妙也라하니
이치가 이름과 언어를 여읜다 함은 지혜가 닦아
증득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 것이다.
還會麽아 莫謂如來가 成斷滅하라 一聲이 還續一聲來로다
도대체 알기나 하는가?
“여래(如來)가 단멸(斷滅)을 이룬다고 하지 말라.
한 소리가 또한 한 소리를 잇대어 오도다.”
실체가 없는 소리도 다시 소리가 이어져서 계속된다.
그것이 묘유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묘유에 집착하지 말라.
묘유인 진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