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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수 시집 - 어떤 날의 기도
차례
1부
홍차 가게
나리포창
걸레질
아픈 날
하늘
우리 집
파리
내려놓습니다
두 겹
콘크리트 난간
정지
휴지(休紙)
비어있는 들
등대
미세 먼지
하늘은 바닥이다
보잘것없는 자
야간비행
가난한 자
On line & Off line
2부
중년
다름
구김 방지
일기
안식
착오(錯誤)
병든 사회
언어기득권
우리 동네
어린 딸
자연 속에
바람꽃
政治
공기의 본질
환갑
사람이 사랑이다
늙은이의 기도
겨울의 강
광야
아멘
3부
죽음의 문제
성탄 예찬
비명(悲鳴)
유월절
슬퍼하는 자, 복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창조
긍휼(矜恤)
형상과 우상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處暑
태초에
보시기에 참 좋았다
하나님 소유
성령 충만은 말씀 충만
하늘의 소리
둔갑하다
어떤 날의 기도
하나님을 닮은 자
살라 살아내라 : 生命
4부
핑계
개뿔
품꾼의 기도
온통 아픕니다
환갑을 맞으며
端(YHWH)
복음
근원의 시간
春葉의 독립선언
살아보니
아파야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
봄바람
좋은 날
오늘의 일
항아리에 물을 채워라
어머니 말씀
나리포 우체국
승천의 계절
四月의 아침
해설 : 나리포창에서 만난 예수/나문석(시인)
시집 서평
한 사나이가 돌아왔다. 나리포에 홀로 돌아온 불효자, “‘엄니’ 부르며” 고향 집에 돌아온 탕자, 한 권의 시집을 품에 안고 돌아온 황인수 시인의 기도는 절절하다. 때는 늦어 “엄니의 대답이 없어도” 이미 온 세상은 “우리 집”이 되었다. 시의 본질은 간절한 기도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측면에서 「늙은이의 기도」, 이 절절한 시 한 편만으로도 이미 족하지 않은가. 21세기 한국 시문학이 놓치고 있는 시의 진면목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 번의 거짓도 용서할 수 없”는 ‘노회찬을 애도하는 시’는 또 어떠한가. 그립다, 꿈속에라도 꼭 가보고 싶다, 황인수 시인의 그 옛날 나리포우체국으로!
- 이원규(시인)
황인수의 시 곳곳에는 포구의 비린내와 시골 정지간의 매캐한 연기냄새가 난다. 그곳에는 묵묵히 한 생애를 건너간 어머니가 보인다. 그는 어머니에게 애틋하고 먹먹하다. 하지만 그의 시집을 관통하는 중심에는 기도가 있다. 황인수의 시를 읽으며 나의 십자가와 나의 하나님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작은 방은 어떠한지 자꾸 돌아보았다.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서의 말씀이 내게 주는 말씀인 듯 여겨짐도, 하나님 시를 쓰게 하시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라는 기도가 나오게 하는 것도 황인수의 시가 주는 힘이다.
조혜경(시인)
해설
나리포창에서 만난 예수
나문석(시인)
황인수 시인이 구축한 시의 공간 속 예수는 그의 배후이기도 하고 진리의 무한 원점이기도 하다. 시인은 예수와 나의 삶에서 무수히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나 마침내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가난한 백성을 결합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끝없는 사유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특히 나리포창은 과거를 반성하고 회개하는 시인의 상징적 장소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나리포창에 관한 이야기로 조선조 경종 2년에 섬나라인 제주도에 가뭄이 극심하여 기근이 들면 곡식을 보내기 위해 조선 정부가 만든 구휼미 창고로 다섯 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인 예수의 기적 형태는 아니지만 나라에서 굶주린 백성을 구하기 위해 만든 창고이기에 기독교적 정신과 일치하는 부분이기에 나리포창은 나눔의 상징적 장소로 보이기도 하여 시인이 나리포창을 찾는 이유로 보인다.
이 사람아!
숨을 쉬고 살자
얼다 터져버린 강가
객기 부리다 무덤 파헤친
나는 불효자입니다
눈꽃이라는 이름도 아니었건만
제 몸 비벼 내어주고
석양 때면 날 울게 하더니
집 나간 아이를 찾아 나선 눈가에
묻은 석양이
빨갛게 그녀를 물들였지요
눈꽃이라는 예쁜 이름도 아닌데
나리포창 작은 처마 끝에 매달린
유년이면
얼음장 밑 숨소리
산을
강을
들을 하나로 만들어 덮는
눈꽃이라는 그녀
불효자는 홀로 서 있습니다
굴뚝을 들고 나는 일로
늘상 분주한
고향 없는 텃새
나리포창 눈꽃이 시들면
우뚝 서 있는
남자가 있습니다
- 「나리포창」 전문
“객기를 부리다 무덤 파헤친 나는 불효자입니다.” 상당히 모호한 시의 부분은 파묘를 이야기한다. 그럼 파묘란 무엇인가? 무덤을 옮기거나 없애기 위해 봉분된 무덤을 걷어내고 고인의 유골을 수습한 뒤 비석이나 상석을 폐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파묘에 대한 구체적 해석이 없이 “객기 부리다”로 규정할 뿐이라 더 진정성 있는 그의 진술을 찾아보니 시 「죽음의 문제」에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가 있다.
죽은 자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을까?
산 자에게 죽음이 가늠 안 되는 무게다
죽은 자는
산자를 원망할 자격도 없으므로
원망하게 욕하고 저주하게
놔두어라
살려는 몸부림이라고 여겨라
살아있는 것이 독기도 뿜는 것
살기도 살아있는 것이 품는 것
그래서
죽음은 결국 산 자의 몫이다
장례는 죽은 자에게 맡기라는 말씀
죽음의 세계는 하나님 소관이라는 말씀
- 「죽음의 문제」 전문
시인이 생각하는 죽음의 문제는 무엇인가? “죽은 자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지고 “산 자에게 죽음이 가늠 안 되는 무게다”라고 하면서 삶과 죽음의 차이를 고통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는 자와 고통의 무게를 지고 갈 수 없는 자로 구분하고 있다. “죽은 자는 산자를 원망할 자격도 없으므로” 여기서 시인의 입장을 보며 잠시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부르짖는다. 절망의 끝에서 살려는 몸부림이기에 그 몸부림이 독기를 뿜고 살기도 품는 것이기에 “죽음은 결국 산 자의 몫이다”라고 스스로 결정짓다가 결국 죽음의 세계는 하나님의 소관이라 한다.
그럼 앞의 「나리포창」에서 나온 “객기 부리다 무덤 파헤친 나는 불효자입니다” 이것은 부정적 사태인가? 긍정적 사태인가? 그 어느 것도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긍정적 사태는 기독교적 정신을 가진 시인의 유일신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므로 다른 어떤 영적인 것을 섬기지 않는다는 종교적 이유로 파묘를 결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긍정적 사태는 부정적 사태로 전환되고 있다.
어머니의 파묘로 인해 그의 무의식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하다 “눈꽃이라는 그녀/ 불효자는 홀로 서 있습니다”라고 불효자란 멍에를 스스로 진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는 예수의 뒷모습처럼 시인은 홀로 파묘의 십자가를 지고 나리포창에 서 있다.
바닥을 닦는다
내가 흘려 더럽혀진 얼룩
밟아서 묻힌 오물을
엎드려 손걸레로 닦고
또 닦는다
허리도 오금도 저려오는데
그대로다
나의 바닥 끝내
그대로이다
- 「걸레질」 전문
걸레질은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으나 걸레질을 하면서 걸레질을 하는 바닥에 자신을 비추어 가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리는 일을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시인은 걸레질을 하면서 자신의 오류와 잘못으로 더럽혀진 바닥의 얼룩을 보게 된다. 황인수 시에서 바닥의 이미지는 마음이다. 마음에 묻은 얼룩은 작은 티끌이라도 마음을 더럽히는 오물로 자책하면서 마음자리를 닦고 또 닦는다. 걸레질은 시인이 수양을 하는 것이자 기도의 행위로 보인다. 그래서 바닥에 두 손을 모으고 허리도 아프고 오금이 저리도록 기도를 해보지만 결국 변하지 않은 자신을 보고 “나의 바닥 끝내 그대로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이 마주한 바닥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하여 그는 다음 시에서 “하늘은 바닥”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는데
하늘 입장에선
눈이 하늘로 오르는 거잖아
눈이 사라진다
하늘로 사라진다
바닥이 보인다
길이 보인다
하루가 보인다
어쩌면
하늘은 바닥
- 「하늘은 바닥이다」 전문
바닥을 닦으면서 바닥이 투명해지기를 바라는 매 순간 시인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우리는 이렇게 얘기하는데”라고 인간의 입장과 “하늘 입장에선 눈이 하늘로 오르는 거잖아”라고 한다. 그러나 그 순간도 짧기만 해 시인은 아쉬움에 “눈이 사라진다/ 하늘로 사라진다”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낸 구원의 빛은 짧기만 하여 시인의 기도는 날로 깊어지지만 눈이 내리는 날 여전히 바닥을 보면서 기도를 한다. “바닥이 보인다 / 길이 보인다/ 하루가 보인다” 시인은 여전히 밑바닥을 헤맨다. 헤매다 가난한 자들을 만난다.
아픈 사람
가을 같은 사람
누군가는 시원한 바람이라 부르는
배고픈 계절
고달픈 계절
물 한 모금 달게 마시는
행복한 자는
나를 어쩔 수 없이 쉬게 하시니
당신 없이 살 수 없게 하시니
결국 가난하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 「가난한 자」 전문
인간의 삶에는 온갖 것들이 찾아와 정신을 억압하여 슬픔과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들에게는 인간을 보호하는 보이지 않는 영적 신들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이 하나님이나 부처님 그리고 성모마리아나 태양신, 혹은 무속신앙으로 존재하고 인간들은 각자 선택한 신에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니 시인은 여러 가지 고통과 슬픔 속에서 바닥을 보게 되고 바닥에서 예수를 만나지만 흘러넘치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바닥으로 가라앉은 고요를 만나 기도의 평안함을 얻어 스스로 모든 고통을 헤쳐나갈 길을 보게 된다. 그것은 시인의 믿음이 견고하기에 가난과 고달픔도 물처럼 달게 마신다.
나는
사랑을 모른다
아파야 할 가슴이 없으니
사랑도 없다
아파야 슬퍼야
사랑이라는데
상처나 터지고 멍들어 아프고
피눈물이 목젖을 막아 가슴 쥐어짜게 슬퍼한 적 없이
찡하게 코끝을 스치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될 수 없으니까
명줄을 걸고 승부를 거는 것이
사랑이다
생명 다할 때까지 믿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세상 사람이 모두 미워지고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날도 없이
사람 살아가는 세상을
말할 수 없다
죽도록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
죽음으로 사랑을 말하는 존재
사랑함
그 자체
주님이 하신 일ᆢ
마침내 사람이 되신 일
그래서 사람이
사랑이다
- 「사람이 사랑이다」 전문
인간은 동물의 본능적 행동과 구분되어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하여 자유롭게 사랑할 조건이 주어진다. 인간의 가장 바닥인 무의식에 숨어있는 사랑, 조건 없는 사랑에 몸을 던져 불태우기도 하지만 시인의 사랑은 연인들의 사랑과 차원이 다르게 시인의 고정된 시선으로 사람을 어떻게 무엇으로 사랑해야 하는가를 사유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안과 밖의 실체는 무얼까?
“나는/ 사랑을 모른다/ 아파야 할 가슴이 없으니/ 사랑도 없다”
시적 정황으로 보면 사랑은 환상도 아니고 거짓의 은유라고, 사랑에 의존하지 않은 시인에게 사랑은 넘어설 수 없는 벽 같은 존재였으나 운명적으로 만난 예수를 통해 사랑의 실체를 깨닫는다.
“죽도록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 죽음으로 사랑을 말하는 존재/ 사랑함/ 그 자체/ 주님이 하신 일ᆢ/ 마침내 사람이 되신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사랑은 기독교적 시각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로 희생한 사랑이다.
입만 열면 거짓말
바른 제도를 향하지 않고
가진 자로 남기만을 향하여
치열한
민중은
거짓을 먹고
국가는
거짓을 낳고
코미디와
헤픈 어젯밤의 스토리
가장무도회
- 「政治」 전문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정치가란 모든 폭력성에 잠재되어 있는 악마적 힘들과 기꺼이 관계를 맺기로 한 사람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막스 베버의 말처럼 우리 사회의 지배세력인 정치인들도 자본주의 시스템과 결탁하여 권력을 휘두르는데 분투노력만 할 뿐이지만 우리는 그냥 진실을 골라내기 위해 애쓸 뿐이다. 그렇지만 국가의 형성과 유지를 위해 국민의 권한을 행사하나 여전히 속고 있는 시인은 “입만 열면 거짓말/ 바른 제도를 향하지 않고/ 가진 자로 남기만을 향하여”라 한다. 이것은 불가능한 공약 남발과 쇼맨십만 난무하는 코미디 같은 정치판과 군부독재에 저항한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을 잊어버린 정치인들은 부끄러움도 미안함도 상실한 채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날 선 성령의 검으로
찢겨진 심령을
드립니다
자복하고 참회하는 심령
갈급하고 애통한 심령
가난하고 청결한 심령을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하시는
십자가의 도를
좁고 협착한 길을
찢겨진 심령이어야만 따를 수 있는
머리 둘 곳 없는 나그네로 살게 하소서
그런 믿음과 용기 주소서
재물도 번제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시는
심령이 찢겨지는 아픔을 참고라도
용서하는 진심이어야
하늘나라
라고 하십니다
어쩌다
찢겨진 심령을 드립니다
- 「어떤 날의 기도」 전문
「어떤 날의 기도」에서 시인의 기도는 단순히 안과 밖이 아니라 안이면서 동시에 바깥도 아닌 하나의 심리적 거점이 된다. 또한 시인이 마주한 현실에서 느끼는 황폐함과 죽음의 허무에 대한 비애를 마주하고 벗어나려 몸부림을 친다. 그러다가 시인은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목사가 되어 그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그의 기도는 존재의 사유이고 시인의 지향처가 되나 시인의 기도는 시 속에서 은유나 비유가 아닌 현실의 선연한 행위로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시 속에서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시적 정황의 주체가 된 심령에는 절대적인 존재, 성령을 지향하고 있다.
“날 선 성령의 검으로/ 찢겨진 심령을/ 드립니다”에서 ‘성령의 검’은 십자가이다. 날 선 검은 죽음이다. 그래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 그 앞에 찢겨진 성령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한 예수를 바라보는 시인의 아픈 마음은 이렇게 서술한다. “자복하고 참회하는 심령/ 갈급하고 애통한 심령/ 가난하고 청결한 심령을” 그러다 그는 십자가를 통해 용서를 부르짖는다.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라 하시는”이라고 하는 그의 모든 시간 속 심령에는 용서만이 구원이 되고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의 진실은 기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성령에게로 나아가려는 심리적 궤적을 그리고 있다.
정지라는 말을 아세요?
잠깐 멈추라는 말 아니지요
새벽
아침 솥을 열던
여자가 내 가슴에 묻혔습니다
들판이 거칠군요
노을이 검어지는 시간
찬장에 넣어 둔
시큼한 하루를 꺼내
저녁을 차리던 여자
찬밥 한 덩이 얹힌
소쿠리 시렁
허기진 한술 떠 넣으라
언제나 바쁘시던
한 여름날
가쁜 호흡
진한 땀 한 줄기
마다 안 하시던
어디계세요?
잠자리 데우는
아궁이 재
늘 당신이 계시던
정지
- 「정지」 전문
시인의 시 세계가 기독교적 시 세계관이나,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적 정서를 담은 어머니에 대한 시이다. 슬픔의 정서를 내재한 어머니의 모습은 시인의 눈물이 되어 어머니의 한을 씻어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어머니의 심장부인 「정지」를 시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정지라는 말을 아세요?/ 잠깐 멈추라는 말 아니지요” ‘정지’라는 말이 잠깐 멈추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잠깐 멈춘다는 것은 어쩜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가 항상 계시는 정지간은 외부와 차단된 어머니만의 공간이다. 그 안에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밥을 하면서 모든 고뇌와 고통의 시름을 불에 태우면서 재가 된 어머니의 가슴을 알고 있는 시인은 “새벽/ 아침 솥을 열던/ 여자가 내 가슴에 묻혔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자식과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들어있는 찬장 안에는 아침에 넣어 둔 어머니의 사랑이 발효되어 시큼한 반찬이 된다. “찬장에 넣어 둔/ 시큼한 하루를 꺼내/ 저녁을 차리던 여자” 그렇게 오래도록 정지를 지키던 어머니, 마치 죄라도 지은 듯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찬밥 한 덩이 물 말아 대충 드시던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정서가 시의 곳곳에 묘사되어 있다.
착하게 살아라!
그래도 지지는 말아라! 하시던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이기지 못해
늘 지고 살아온
지금은
내 나이 예순다섯입니다
나는 알아듣지 못한 그 말귀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품앗이해야 하는
그 나이입니다
- 「어머니 말씀」 전문
갖은 풍상을 다 견뎌 낸 어머니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살아온 경험이 지혜이고 교육이 된다. “착하게 살아라”라고 하셨지만 어머니는 무조건 착하기만 하지는 말라고 한다. 그 말은 착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돌이켜 보며 어머니의 지혜를 깨닫게 된다.
갯물 밀려와 닿은
소식 알리고
민물 내려와 고인
안부 전하여
예부터 오가는
인정 쌓인 곳
주고받아 나눔의
씨 뿌린 터전
나리 포구 한자리에
편지의 세월이
기억으로 소곤대는
나포 우체국이다
- <나리포 우체국>전문
시에서 우체국은 조그만 마을의 풍경을 단단하게 잠가두고 있다. 그리고 시인이 자주 찾는 나리포의 우체국은 단순하게 소식만 보내는 장소가 아니라 “예부터 오가는/ 인정 쌓인 곳/ 주고받아 나눔의/ 씨 뿌린 터전/ 나리 포구 한자리에”라고 한다.
이렇듯 나리포는 시인에게 꿈과 희망을 나누는 나눔의 상징이고 무덤을 파헤친 어머니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체국은 과거의 상처들이 현재의 나와 상호의존적이면서 미래지향적인 시간을 창조해 타인의 고통을 보듬어주는 자로 거듭 나는 사유의 공간이자 어머니와 예수에게 삶의 근원적인 아픔과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는 장소다.
황인수 시인은 목회자이다. 하기에 지나온 굴곡 많은 시간의 경험으로 핍박받고 고통받는 자들을 대변하는 시를 창작할 것이라 믿으며 첫 시집의 상제를 축하드린다.
저자 소개
황 인 수
전라북도 옥구(현 군산) 출생.
초, 중, 고 시절 전형적인 간척지 농촌 마을인 전라북도 옥구군 미면(현 미성읍) 해성교회 출석과 함께 기독교 신앙인으로 거듭남의 시행과 착오를 거치며 가난한 자들이 겨우 살아내는 ‘빈 들’ 같은 세상에 대한 근원적 통증을 지닌 청소년기 학창 시절은 교회 중심의 생활이었다.
자기 정당화를 위해 타인을 정죄하는 기독교 신앙인들을 이웃으로 경험하며 사랑이라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동시에 희생의 삶이라는 존재(자의식) 세계에 눈뜬 청년(대학) 시절을 보낸다.
모순의 사회 제도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생활에서 부딪히는 안팎의 갈등 속에서 30대 중반 목숨을 겨우 부지한 교통사고 이후 인생의 고통조차 생명의 삶이라는 명제 앞에 순응하기로 한다.
물질문명이 하느님의 세계(순수한 시간)를 오염시킨 주범이라는 믿음을 40대에 들어서서 비로소 깨닫고, 질곡(좌충우돌)의 삶에 믿음의 지평을 열어보겠다는 다짐으로 험난한 세월을 견디게 된다.
기존(유형)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자로서 기독교 신앙인 행세를 기쁨이라 여기며 법학, 교육학, 부동산학 그리고 신학을 기웃거리며, 물질문명의 세상인 이 땅에서 건설개발 사업 영위로 생계를 잇고,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길 고대하는 기도로 선물이 된 하루하루의 삶을 연장 받았다.
60대 중반 현재, 군산시 나포면 십자들로교회 목회자의 삶에 이르기까지 들풀처럼 생경(生硬)하나 순박하게 살기를 원하고, 빈 들의 마음 밭에 싹을 틔우고자 부지런히 숨 쉬는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