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여독서 遊山如讀書Ⅱ
- 야생화의 시낭송회-
박순희
지난여름 덕유산 원추리 마중도 봄에 계획했던 등산이라 꽤나 설레었다. 2박3일 등산의 배낭은 단일치기 하고는 완전 딴판이다. 배낭도 새로 장만하고 단단히 준비했다. 경험이 많은 친구 조언대로 도시락을 준비하되 짐을 줄이는 특별한 방식으로 챙겼다. ‘유산여독서’ 라고 했으니 이제 제대로 산을 읽으려고 한다. 무주에서 곤도라를 타고 향적봉을 올라 사방팔방으로 엎드려 벋친 산등을 따라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책장을 넘기듯 산을 즐기는 맛이라니! 향적봉아래 대피소에 도착해서 1박을 했다. 20대 초반에 노고단 산장에서 하룻밤 묵었던 기억이 까무룩 하다. 그땐 2층 나무 침대는 없었고 마루바닥에서 칼잠을 잤던 것 같다. 하도 오래돼서 난생처음 경험한 것처럼 생경하고 수학여행 온 소녀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다. 도랑물소리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악기소리를 따라 한 마장쯤 떨어진 약수터로 내려갔다. 맑고 차가운 약수를 손에 움켜 마시니 뼛속까지 정화된 느낌이다. 상수원 청정지역이라 치약 비누도 못쓰고 고양이 세수만 허용된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했으니까. 청정지역을 지키자면 불편도 기꺼이 감수해야한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말을 떠올려보며 아래로 흐르는 물의 순리와 겸손을 배운다.
기온이 서늘해지고 산등성이로부터 순식간에 몰려드는 안개 속에 청초한 원추리 무리가 이세상의 꽃이 아닌 듯 신비로운 행간으로 저장된다. 이튼 날은 하루 꼬박 산행을 해야 하는 코스다. 보통 사람들은 이틀이면 거뜬한 코스인데 우린2박3일을 잡았다. 덕유산 원추리와 야생화 탐방으로 산에서 노닐기로 한 등반이다. 꽃무리를 보며 앉아서 쉬고 사진도 찍고 갈피갈피 산 주름을 헤쳐 보다가 너럭바위를 만나면 벌렁 눕는다. 햇볕 쏟아지는 동업령에서 무룡산에 이르는 비단길 행간에선 야생화들의 시낭송이 무르익는다. 분홍색 오이풀이 꼬리를 흔들며 동시 한 편을 낭랑하게 읊어주고 이어서 가녀린 원추리의 서정시가 이어진다. 보라색 비녀가 단아한 옥잠화의 고품격의 시조에 갈채를 보내니 싸리 꽃도 시샘한다. 구름모자 쓴 산봉우리와 숨바꼭질도 하고 유유자적하며 덕유산 갈피에 추억 한 잎씩 끼워 둔다. 구름도 쉬어가는 갈매 빛 산등성이로 장엄한 대서사시가 메아리쳐온다.
풀벌레의 언어도 야생화의 미소도 미풍의 속삭임에 우린 한 덩어리로 어우러져 신선의 풍류를 즐긴다.
어떤 친구가 남편을 따라 산악회와 산행을 했다. 앞사람의 뒤꿈치 만 보고 왔다고 다시는 안 따라간다고 했단다. 산악회에서는 대부분 관광차를 대기해 놓고 정상을 찍고 오는 것이 목적인 듯 숨 돌릴 틈 없이 쫒아가기 바쁘다. 우린 워낙 해찰을 많이 하다 보니 해거름 무렵이 되었다. 삿갓재가 지척인데 스산한 바람이 수상하다. 이내 저 멀리 향적봉 골짝으로부터 비구름이 몰려온다. 순식간에 어두컴컴해지고 비바람 몰려온다. 회오리치는 바람에 나뭇잎이 잔 가지째 날린다. 천둥소리와 숲이 우우 우는 소리가 난생 처음 들어보는 귀곡성처럼 이 세상 소리가 아닌 듯 괴기스럽다. 등줄기에 땀이 난다. 무섬증이 엄습한다.
비옷을 뒤집어쓰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때 맞춰 바로 몇 십 미터 아래 삿갓대피소가 보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삿갓대피소에 당도했다. 친구가 예약을 해두어서 수속은 간단했고 2층 침대에 보금자릴 잡았다. 가난한 소꿉놀이 같은 저녁밥도 꿀맛이다. 비는 그쳤다. 행여나 첩첩산중의 깊고 푸른 밤하늘을 보고자 한밤중에 나갔더니 밤안개에 지척도 안보이고 화장실 앞 외등이 안개 속에 희뿌옇다. 난 좀처럼 무섬을 타지 않은데 신령스런 산속이어서인지 무서워서 재빨리 문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간밤에 폭우로 입산금지령이 내렸다. 남덕유 산행은 하나님이 막으시니 다음으로 미루고 삿갓대피소 아래 황전마을 쪽으로 내려왔다. 대개의 사람들은 두 시간이 걸린다는 길인데 우린 한나절이 걸렸다. 인생길과 같이 우여곡절 많은 덕유산 산행, 야생화 꽃밭에 내린 햇살은 더없이 찬란했건만 어인 광풍이 발길을 재촉하더니 여러 상황을 만났다. 융단같이 펼쳐진 능선에서 하루를 두고도 많은 것을 느끼고 얻은 것이 많다. 오늘도 ‘대체로 맑은’ 하루. 이것이 바로 유산여독서遊山如讀書 책장을 덮는다.
첫댓글
'가난한 소꿉놀이 같은 저녁밥도 꿀맛이다'라는 표현에 그때의 입맛이 살아납니다.
언제 또 그런 맛있는 밥을 먹어볼 수 있을지......
야생화들이 시낭송을 소개하는 부분 - 야생화가 얼마나 아름답게 피어있는 곳이길래 시낭송도 모두들 절창일듯합니다.
한 가지부탁: 제목 아래 작가 이름 꼭 써주세요. 아마 박순희 샘 같은디~~~
이거 퍼나르기 하기도 하니깐 창조주의 이름을 꼭 넣어주세요
감사합니다 성의를 다해 과찬을 해 주셨는데 주인이 집을 오래 비워두고 손님왔다 가신 줄도 모르니 죄송합니다요
박순희드림
감사합니다 성의를 다해 과찬을 해 주셨는데 주인이 집을 오래 비워두고 손님왔다 가신 줄도 모르니 죄송합니다요
박순희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