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서녘에서
아무래도 삶은 술술 잃어가는 아쉬움이지
바라고 있는 모든 바람에 남은 말이 있어도
최종의 어느 날까진 틀어막고 눈 감고
때로 함께 같은 길을 가고
때로는 서로 다른 길로 가는 게지
모진 세월 고이 바쳐 불처럼 일어 피같이 타오르다가 파열破裂하는 목숨도 목숨이었긴 했을진대 너나 나나 마지막엔 하나쯤 원願은 있을지 몰라
벌겋게 물든 생피 같은 단풍잎도 떨어져
온밤 찬 이슬로 눅눅하게 검 젖은 흙 밑에서 삭아가는 절망 이상으로 너로 인해 얻은 근심도 뿌리 깊은 소중한 연緣이라 도리 없이 붙들었던 손을 놓고 서먹해지는 그리움에 마치 어느 길손이 외딴길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일처럼 캄캄한 밤 가랑잎 구르는 슬픈 불면으로 오늘 또 꼭 그와 같이
하긴 아무렇게나 구르다가 어디에선가 부서져도 좋겠지 본시 너나 나나 거푸거푸 사랑하고 날마다 죽어왔으니 이젠 갈빛마저 진하게 가라앉은 가을 서녘에 접어들어 낯선 바람 소리 스미는 겨울로 들어서는 외줄기 길목에서 쓸쓸한 발자국 소리 조차 없는 빈집 같은 가을이 외롭게 붕괴를 예감할 뿐 사랑이라 더 바쳐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데 말라 떨어져 뒹구는 지난 시간 괴롭게 쌓인 미움은 빈 가지 묵념의 숲에서 진흙 지층으로 멸망해가고 골수에 스미는 설움으로 치밀던 그리움은 불망不忘의 눈물로 새벽 서리꽃으로 되어가는 겨울 추운 낌새를 잎 진 나뭇가지 끝에서 목숨의 이별처럼 본다
아아, 그래 참말이다
못 견딜 사랑이 그만큼 아프기도 하거니와 저 혼자서 막무가내 무너져 저물어 가는 또 가을이기도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