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송선주
“어머나! 밖이 하예요.”
룸메이트가 커튼을 활짝 열며 소리쳤다. 새벽 다섯 시. 아직 사위가 깜깜 할 텐데. 그녀의 고함소리에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달려갔다. 삼층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희다 못해 푸른빛이 감돈다. 전나무가지에도 밤새 하얀 꽃이 피었다.
내 룸메이트와 만리장성을 쌓는 밤. 언니가족을 따라 왔다는 그녀는 참새처럼 조잘 됐다. 밝고 귀여운 소녀 같았다. 그녀의 얘기를 자장가처럼 들으며 어느새 잠이 들었나보다. 눈을 떠니 아침 여덟시다. 아뿔싸. 다른 이들은 벌써 산책을 끝내고 식당으로 가고 있었다.
지난 밤 내가 바라던 작은 소원을 들어 주신 분께 감사하며 사박사박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만든다. 살포시 눈을 손안에 느껴본다. 온몸의 세포가 전율 한다. 눈의 무게에 나무 가지들이 늘어졌다. 살짝만 닿아도 꽃잎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여섯시 새벽기도에 참석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어제 이어 목사님의 설교내용이다. 교회 2박3일 산상수련회에 참여 중이다. 빅 베어 중턱에 자리한 camp cedar falls. 천연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성도들과 사랑으로 하나 되는 시간이다. 숲속에 사층 목조건물이 자연을 닮았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란 아름드리나무가 뿜어내는 정기로 속세에 찌든 내 몸과 마음도 연초록이다. 숲속 군데군데 작은 암자 같은 목조건물이 개인 기도처다.
식당은 사방 유리창을 크게 하여 자연 속에서 식사하는 분위기로 매끼 다른 음식이 나왔다.
예배를 드린 후 숲속 길을 걸었다. 잣나무 소나무 상수리나무 등 잡목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계곡 아래서 물 흐르는 소리가 아련히 들린다. 개구리 소리도 들릴 듯 귀를 쫑긋한다. 나이를 가늠 할 수 없는 아름드리 고목이 뿌리째 뽑혀 비스듬히 산 아래로 걸쳐 누워있다. 장난기가 발동해 흔들어 보지만 꿈쩍 않는다. 언젠가 우리도 풍화되어 저 나무처럼 자연으로 돌아가겠지.
알밤만한 도토리가 지천으로 깔려있다.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아 만들어 둔 구멍구멍에 다람쥐들이 겨울양식인 도토리가 들어있다. 나무도 동물도 서로 공존한다. 마른 고목꼭대기에 딱따구리 한마리가 낮선 이들의 방문에도 초연히 앉아있다.
비가 오락가락한 오후, 계곡 아래로 조심스레 내려가니 공중다리가 있었다. 한사람씩 줄을 잡고 살금살금 건넜다. 정자를 내려가니 검은 바위가 푸른 이끼로 덮여있다. 낙엽이 물속에 침전해 있고 가지들이 떨어진 곳을 돌아 바위위로 맑게 흐른다. 태고의 신비가 그대로다. 내 룸메이트는 얼어붙은 듯 다리 입구에 서있다. 옛날 설악산 수학여행 때 울산바위를 지나 808계단을 오르다 무서워 주저앉아 울던 친구가 떠올랐다.
마지막 날이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버켓리스트를 말했다. 어떤 이는 유럽여행을, 성지순례를, 성경통독을 천천히 해보고 싶다고, 만년 소녀 같은 집사님이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 라고 해 모두 폭소를 터트렸다. 나는 자고나면 하얀 눈이 왔으면 했었다. 윷놀이도 했다. 윷을 즉석에서 생솔가지로 만들었다. 편을 나누고 윷이요 걸이요 이곳저곳에서 환호와 응원 소리로 떠들썩했다. 가지런히 움켜진 윷가락에서 솔향기가 묻어나고, 우두둑 우박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밤은 깊어갔다.
지면이 하얀 솜을 깔아 놓은 듯 우리를 설레게 했다. 짧았지만 자연과 동화되어 사랑하는 이들과 평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낸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오롯이 그분과 만남의 시간이 필요로 할 때 창조 태초의 날처럼 깨끗하게 닦아 왔던 이날을 기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