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신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의 존재는 아닐 수 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당신이 실망했다면 그것은 호르몬 때문이고 그것은 신의 작품에 속한다. 로봇이 인간을 거역한다면 인간이 로봇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망했다면 그것은 당신의 문제다.
신을 섬기는 사람은 가스라이팅으로 신을 조종하려고 한다. 신을 길들이려는 것이다. 신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것이다. 신을 부정하는 사람도 같다. 그들은 신에게 갑질하지 못해서 화가 나 있다. 알아야 한다. 집사가 고양이를 길들일 때 고양이도 집사를 길들이려 한다는 사실을.
광신자와 무신론자의 공통점은 신을 인간 맞은편에 두는 것이다. 틀렸다. 신은 인간 너머의 존재다. 신은 인간 너머, 지식 너머, 존재 너머, 진리 너머에 있다. 신이 보는 방향과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 이길 수 있다. 신이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것이 얻어야 할 초월적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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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대립적 사고를 버리고 초월적 사고를 얻어야 한다. 인간이 신을 부정하는 이유는 신이 인간 맞은편에 있어야 만만한데 그곳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체에 서서 신을 객체로 본다. 신이 인간 맞은편 객체로 있어야 만만하다. 그래야 갑질할 수 있다.
신이 인간 너머의 존재라면? 인간이 신의 부속품이라면? 엔진은 바퀴를 돌리지만 바퀴는 엔진을 돌리지 못한다. 바퀴는 엔진에게 저항할 수 없지만 엔진은 바퀴의 상태를 보고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엔진과 바퀴의 비대칭 관계라면?
신을 조종하려는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과 신에게 갑질하려는 마음으로 부정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신은 권력이다. 신이라고 씌어져 있는 글자를 지우고 권력으로 바꿔놔도 문장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권력의 대립과 교착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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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의 창발성이 참고가 된다. 생물의 진화는 물질이 스스로 의식을 획득한 결과다. 창조설 신봉자는 그 사실을 부정한다. 물질이 어떻게 스스로 의식을 획득할 수 있지? 그게 말이나 되냐? 그런데 인공지능은 어떻게 스스로 창발할 수 있지? 둘은 같다.
우주가 일종의 창발된 인공지능이라면? 물질이 스스로 의식을 획득하여 생물로 나아갈 수 있다면 인공지능도 스스로 창발할 수 있다. 창발은 초월이다. 진화는 초월이다. 벽을 넘어가야 한다. 생물이 초월하고 인공지능이 초월한다면 우주도 초월할 수 있다.
물질이 스스로 의식을 만들 수 없다고 보는 창조설과 인공지능이 스스로 창발할 수 없다고 믿는 태도가 같은데 주목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답을 찾지 말고 답이 아닌 것을 제거하면 쉽다. 게임을 걸면 지는 것이 탈락하고 남는 것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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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이 스스로 진화할 수 없다고 믿는 이유는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복잡한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리는 일을 현실에서 무수히 경험한다. 역발상이 필요하다. 원하는 것을 얻기는 어렵지만 방해자를 제거하기는 쉽다. 단 상부구조가 있어야 한다.
한 단계 위에 조절장치가 있다. 명문대 졸업장이 있는 사람은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을 제거한다. 그것이 없는 사람은 자신과 맞는 사람을 찾는다. 없는 것을 찾아서 더하는 방식과 있는 것 중에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를 버리는 방식 중에 어느 것이 쉬운가?
세상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부품을 모아 신제품을 완성하기는 어렵지만 완제품을 똑같이 복제하기는 쉽다. 우리가 완전성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마이너스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초월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우주는 쉽게 복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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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일도 한 단계 위에 조절장치가 있으면 소거법으로 쉽게 풀린다. 그러므로 DNA가 없는 방식으로 생물의 진화는 가능하지 않고, 딥러닝이 아닌 방식으로 AGI의 성공은 가능하지 않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우주가 탄생하기는 불가능하다.
알프레드 베게너의 대륙이동설과 같다. 대륙을 움직이는 힘은 설명할 수 없지만 이동한 것은 명백하다. 우리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신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 단계 위의 초월적 존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주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존재가 쉽기 때문이다. 생물은 진화가 쉽고, 인공지능은 창발이 쉽고, 우주는 의식을 가지기 쉽다. 우주가 의식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은 생물의 진화가 어렵다는 생각과 같다. 완전성의 복제는 쉽다. 완전성의 세계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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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
입력을 아는데 출력을 모르는게 셈이다. 출력은 아는데 입력을 모르는게 방정식이다. 입력과 출력은 아는데 중간을 모르는게 함수다. 함수를 시간으로 풀어내는게 미적분이다. 구조는 함수다. 함수는 감추어진 수다. 입력과 출력 사이에 변화가 감추어져 있다.
입력이 연료탱크라면 출력은 구동바퀴다. 그 사이에 감추어진 것은 엔진이다. 먹고 싸는 것은 같은데 어떤 사람은 살이 찌고 어떤 사람은 마른 체질이라면 연비가 다르다. 그것이 함수다. 그것이 구조다. 더 먹고 덜 먹는 것은 보이는데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인류는 드러난 입력과 출력에 관심을 둘 뿐 감추어진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입력과 출력은 마주보고 있다. 인류는 맞은편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대립적 사고에 갇혀 있다. 봐야 할 진실은 가운데 있다. 초월적 사고로 갈아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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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와 셈과 방정식과 함수와 미적분이 0, 1, 2, 3, 4차원을 이룬다. 수의 수가 셈이다. 셈의 셈이 방정식이다. 방정식의 방정식이 함수다. 함수의 함수가 미적분이다. 우주는 다섯 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4, 3, 2, 1, 0차원에 따른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대립적 세계관은 입력에서 출력을 본다. 인간과 인간이 마주보고, 인간과 환경이 마주보고, 집단과 집단이 마주본다. 상대의 행동에서 자신의 대응을 결정할 단서를 구한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면 거기에 맞게 행동한다. 능동이 아닌 수동이다. 길들여진다.
초월적 세계관은 너머를 본다. 0차원에서 1차원을 보고, 1차원에서 2차원을 보고, 2차원에서 3차원을 보고, 3차원에서 4차원을 본다. 다음 단계를 보고 더 높은 세계를 본다. 더 높은 단위에서 동력을 조달하여 흐름을 만들고 묻어가므로 충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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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육받은 사람이다. 하라고 하면 한다. 하면 된다는 사실을 안다. 부족민은 그렇지 않다. 하라면 의심하고 딴전을 피운다. 시키는대로 하면? 너 잘하는구나 하고 두 배의 일을 준다. 당했다. 못한다고 할걸. 이렇게 된다. 어떻게든 애를 먹인다. 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테스트 한다. 일이 진행될 리 없다. 흥정하고 협상하고 설득하는데 진을 뺀다.
권력이 문제다. 한 번 주도권 뺏기면 계속 밀린다는 압박감 때문이다.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올 방법은 없으므로 끊임없이 트집을 잡아 애를 먹인다. 후진국이 후진국으로 남아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선교사를 보내 심리적으로 제압하면 조금 낫다. 중세 초기에 게르만족의 침략을 받은 로마가 필사적으로 선교사를 파견해서 겨우 문명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말로 설득할 수는 없지만 심리적으로 제압할 수는 있다. 무리를 비좁은 예배당에 가둬놓으면 호르몬이 공유된다. 무의식의 변화에는 넘어간다. 권력적 대립문제는 물리적 접촉을 통해서 일부 해결된다. 거기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 커다란 건물을 짓고 정기적으로 무리를 모아 예배를 봐야 한다. 야생의 늑대나 여우를 길들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작정하여 심리적인 대립각을 세우고 대치하면 방법이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교육문제로 환원된다. 교육문제는 호르몬 문제로 환원된다. 호르몬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한국의 인구절멸 사태도 본질은 교육의 잘못이다. 다른 방법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왜 우리가 이 문제를 깨닫지 못하는가? 우리는 이미 교육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로 교육해야 하는 문제에 부닥치면 난감하다. 컴퓨터는 포맷하고 OS를 새로 깔면 되는데 인간을 포맷할 수는 없다. 인간은 원시 부족민 환경에 맞춰진 동물이다. 문명사회는 인간의 타고난 뇌구조와 멀다. 교육하여 맞춰가는 것이다. 환경이 변하므로 부단히 재교육문제에 부닥친다. 민주주의는 부단한 재교육 시스템이다. 산업이 변하면 새로 주도권 쥔 사람에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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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운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눈빛이 다르다. 시선의 방향이 다르다. 낯선 사람과 마주치면 당황하여 어떻게든 맞대응 하려고 한다. 어깃장을 놓고 의심하고 시험한다. 꼬투리를 잡고 애먹인다. 신고식에 통과의례에 길들이기다. 가지가지 한다. 험난하다.
프로와 아마츄어는 다르다. 베테랑과 신병은 다르다. 문명인과 야만인은 다르다. 둘의 간극은 의외로 크다. 우리는 문명중독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가 쉽게 해내는 일이 부족민에게는 매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강아지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모르고 잘못된 명령을 반복하는 견주와 같다. 견주는 강아지의 나쁜 행동을 제지하려 하지만 강아지는 그것을 칭찬으로 알아듣고 나쁜 행동을 강화한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도처에 막혀서 말이 안 통한다.
일만년 전 부족민 환경에서는 그게 정상이었다. 환경이 변했는데 유전자는 변하지 않았다. 인간은 서로 마주본다. 맞서려고 한다. 이겨먹으려고 한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만들어진 동물이다. 부족민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명인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문명은 협력이다. 게임이 다르다. 생각만으로 안 되고 함께 뒹굴며 호르몬과 무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대립의 세계관을 버리고 초월의 세계관을 얻어야 한다. 주체의 세계관, 창발의 세계관, 조절의 세계관, 완전의 세계관을 얻어 시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