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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8장
제 8 장 승리
(대 지)
一.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사는 생활(1-17)
二. 소망 생활(18-30)
三. 사랑 생활(31-39)
(본문강해)
一.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사는 생활(1-17)
.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므로 앞에서(7:25) 성도가 마음으로 살 때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살 때는 죄의 법을 섬기게 된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본절 에서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하여 "그러므로"라는 말을 썼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법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또 영적으로는 성도의 중생한 영이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더불어 살고 그를 힘입어 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성도의 영적 생활이요 신령한 생활이다. 이것이 신앙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법적으로 죄사함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 정죄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신령한 뜻은 그리스도 예수 믿는 자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산영이 되었고(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받았음),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더불어 사는 생활이므로 아무 가책이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 사는 자는 항상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며 아무 가책이나 두려움이 없다(요일 4:18).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가게 된다(엡 3:12).
.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법 여기서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법칙, 원리를 뜻하는 것이며 이 법칙이나 원리에는 권세가 있으므로 이것을 권세로 보고 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 좋다.
생명의 성령의 법 성도의 중생한 영의 새 생명은 권능이 있고, 성령의 권능은 무한하다.
죄와 사망의 법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리킨다. 범죄하면 죄의 권세에 눌려 자유를 잃고 사망의 고통을 당한다(시 32:3-4). 사망의 권세는 모든 사람을 이기고 모든 사람을 정복한다(고전 15:55). 모든 인류가 범죄했으므로 죄와 사망이 인류 위에서 왕노릇하며 큰 권세로 억압하고 멸망으로 끌고 갔다. 죄인으로서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거기서 해방될 자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중생한 새 생명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법)이 그 무서운 죄와 사망의 법과 권세에서 해방을 시켜 주게 되었다. 성도가 영적 생명과 성령의 인도대로 살 때에는 계속하여 죄의 세력을 이기고 구원을 이루어 그리스도를 닮아 나갈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성도의 구원이 점점 완성을 향하여 이루어져 나가는 것이다.
.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육신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고 율법이 약하다는 말이다. 율법에도 의식과 제도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리가 희미하게 계시되어 있다(유월절 양이나 속죄제물, 도피성 등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음). 그러나 그 복음이 의문(儀文)과 제도 속에 감추어져 그 빛과 능력이 약하므로 죄로 어두워지고 완악해진 사람들을 믿게 하고 살려내는 데는 너무 미약하셨다. 율법은 또 하나님의 의지(意志)를 가르쳐 주고 거기에 복종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전적 부패한 인간을 복종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하셨다. 율법이 연약하다고 해서 불완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법으로서 완전하고 의로우며 거룩하나 육신의 죄악성 때문에 그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이다. 율법이 연약하여 할 수 없게 되었어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야 만다. 율법의 방법으로 되지 않으므로 다른 방법 즉 독생자를 보내서 구속하는 방법을 사용하셨다.
죄를 인하여 우리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뜻이다.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보내셨다는 것이다. 사람으로만 사람의 죄를 대속할 수 있기 때문에 죄인 된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는 없으시다(히 4:15).
육신에 죄를 정하사 예수께서 인성으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정죄받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죄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죽게 하심으로 우리가 죄사함 받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육신을 좇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의 부패성(욕심)을 따라 행치 않는다는 것이며, 영을 좇아 행한다는 것은 성도가 중생한 영(새 사람)으로 성령의 인도를 좇아 산다는 뜻이다.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①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은 법적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켜 준 것이다.
㉠ 내 죄로 인하여 내가 받을 형벌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았으니 형벌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켰다.
㉡ 나를 대신하여 율법을 다 행하여 주셨으니 내게 행하라고 명하신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다.
② 주관적으로는 성도가 중생한 영으로(새 사람, 새 생명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때는 율법의 요구대로 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 율법은 약해서 못했으나 복음은 강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 복음을 가지고 역사하는 오순절 성령은 강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 성령으로 행하면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도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의 요구를 이루지 못하고 육체의 욕심만 이루었으나 영으로써 성령을 따라 살 때는 육체의 욕심은 떨어져 나가고(갈 5:16)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계속적으로 전진하는 성결 생활이요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을 좇는 자와 영을 좇는 자가 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중생한 영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자로 영의 일만 생각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부패성을 좇아 사는 자이다.
영을 좇는 자는 성도가 중생한 영으로(새 사람으로) 성령을 좇아 사는 자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소원을 가지고 사모하고 추구하는 것을 가리킨다.
.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신자가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심령의 역사가 끊어지고 흑암의 세계를 만나게 되며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게 된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도가 중생한 영과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 때에는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생명의 산 역사가 있어 날마다 새 생명으로 창성해 나아가고 참된 평안과 안식이 있다.
.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의 생각은 육신의 욕심(부패성)을 따라 육신중심으로 하는 생각이며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을 하는 자는 하나님의 법인 성경 말씀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굴복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을 반대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과 전연 맞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항을 일으킨다.
. 8: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에 있는 자는 전 에 언급한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인데 그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육신의 소욕은 항상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육의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해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영의 사람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중생한 영을 찾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영적 새 사람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자기 적성에 맞고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 이러한 생활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영의 사람으로 바꾸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된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옛 사람을 부인하고 자기 중심이나 자기를 위하는 것도 부인하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한다. 그리고 주님을 사모하여 간절히 찾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 주신다고 했다(렘 29:13).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으로 생명을 삼아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보다 달고 꿀송이 보다 달게 되어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는 자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이다.
.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하반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영"과 같은 것이며 성령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수 없다(고전 12:3). 성령은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시고 또 만물 안에 계시고 특히 성도 안에 내재하여 계신다. 성령이 내재하지 않는 자는 중생하지 못한 자요 참신자가 아니다. 누구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다. 그 사람 속에는 성령이 항상 내주하여 계신다. 신자라도 일시적으로 영적 감동이 없을 수 있으나 그 때에도 성령은 떠나지 않고 내주하여 계신다. 그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으므로 성령의 감동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것뿐이다. 그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앙망하고 간절히 찾으면 성령의 감동이 다시 임하게 된다.
요한복음 6:37에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좇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성도들과 같이 계시겠다고 하셨다(마 28:20).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성도의 몸은 아직도 죄 아래 있고 사망 아래 있다는 뜻이다.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여기 영은 성도의 영은 중생한 영으로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칭의) 산 영이 되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성도의 영이 죽은 영이었으나 믿을 때에는 중생하여 산 영이 되었다.
"중생"이란 죽었던 영이 살아난 것을 말한다. 성도의 영은 의로 인하여 중생하여 살아났으나 육은 아직도 죄와 사망 아래 있다. 요한복음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했고 또한 베드로전서 3:21에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성도의 영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고 몸은 아직도 죄와 사망 아래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도의 산 영이 성령과 합력하여 죄와 사망 아래에 있는 몸을 구속해 내는 일을 하는 것이 몸의 구속을 이루는 것이다(8:23).
.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은 성령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성도의 몸이 죄로 인하여 사망 하에 있는 것을 가리킨다. 성도가 자기 몸을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는 데서 점점 건져내어야 그리스도의 형상이 입혀지고 성화를 이루어 나가며 영적 새 생명이 점점 자라난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4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장막"은 육신을 가리키는데 육신의 장막을 쓰고 사는 우리가 영적 생명에 삼키워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육신이 영적 생활에 이용당할 때에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는 것이다. 바울은 장막 같은 육신을 벗어 놓고 빨리 천국 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가기를 간절히 소원하셨다. 바울이 이것을 위하여 짐 진 것같이 탄식을 하면서 힘써 이루어 나가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은 것이다(13절).
. 8: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우리가 빚진 자로되 잠언 22:7에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고 했다. 빚을 지면 반드시 갚을 의무가 있다. 갚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죄가 된다. 우리는 육신에게 빚진 종이 된 것이 아니므로 육신대로 살 의무가 없고, 오직 예수님께 은혜의 빚을 졌으므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을 행할 의무가 있다.
.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부패성)대로 사는 것이다. 즉 주를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여 육신 중심으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이 생활은 영의 생활이 아니므로 반드시 죽을 것이다.
죽을 것이로되 성도가 영으로 살지 않고 육신대로 살면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고 죽은 믿음이 된다(약2:17). 육신의 욕심대로 살고 정욕대로 사는 생활은 다 썩어져 없어질 것이다. 베드로후서 1:4에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셨다. 육신대로 사는 생활은 반드시 죽을 것이요,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생활은 다 썩어질 것이고 망할 것이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여기 "영"이란 성령으로 중생한 성도의 영(속 사람)을 가리킨다. 성도의 영이 성령을 힘입어서 몸의 행실을 죽이고 악행을 떠날수록 하나님이 가까워지고 새 생명의 역사가 커진다. 이것이 영의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께서 중생한 영혼 속에 내주하셔서 감동하시고 또 외부에서도 감동을 하시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도하시며 말씀대로 순종시켜 영으로 살게 하시려고 애를 쓰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성령의 인도를 힘써 순종해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라고 하셨다. 골로새서 1:29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항상 성령의 감동과 주장을 받아 주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는 자가 되어야 한다.
.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영은 성령을 가리키는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이유는 물과 성령으로 영이 중생한 자라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다. 성도가 성령의 인도를 잘 받아 순종해 나가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고(갈 5:16)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이 된다.
.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무서워하는 종의 영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대로 다 행하지 못하면 벌을 받을 것이므로 항상 두려워 떨며 무서워한다. 갈라디아서 4:24-25에 율법은 종을 낳은 자로서 자녀(율법에 속한 자)로 더불어 종노릇한다고 했다. 성령이 율법을 가지고 역사할 때에는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지 못했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지 못했으며 무서워하는 종의 위치에 두었다. 그러나 성령이 복음을 가지고 역사할 때는 믿는 자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고 양자로 삼았다.
양자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의 영이 연합된 영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연합된 자이다(롬 6:4-5). 갈라디아서 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다. 중생한 사람은 누구나 양자의 영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이다. 성도는 다 하나님의 양자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다. 양자의 영과 독생자의 영이 다른 점이 무엇인가? 예수님은 인성(영혼과 몸)과 신성(그리스도의 영)이 결합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예수님은 인성과 신성을 분리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이신다. 이것이 독생자의 영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지만 연합만 되고 그리스도와 영적 교통만 한다. 성도의 인성이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가 된 것은 아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접붙임을 입음과 같이 그리스도의 영과 신자의 영이 연합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영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이고 신자의 영은 언제나 신자의 영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살고 있으나 내가 그리스도가 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므로 자기가 예수라고 말하고, 자기 속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것은 양자의 영과 독생자의 영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의 미혹에 빠진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참람된 자이며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여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영과 우리의 영은 연합된 것뿐이고, 하나로 결합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언제나 그리스도요 우리는 언제나 사람이다. 천국에 가서도 우리는 언제나 사람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앙망하고 경배할 뿐이다.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바"는 아람어로 "아버지"라는 말이고, "아버지"는 헬라어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인데 오늘날 자기 나라 말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아바"라는 말은 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고, "아버지"는 혈친(血親)과 신뢰심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본능적으로 "아바"라고 부르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에 어린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아바"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하는 말이 아니며 연습해서 하는 말도 아니고 본능적으로 하는 말이다. 여러 나라 어린아이들이 발음은 약간 다르지만 아버지를 "아바"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우리 나라 아이들은 "아빠"라고 하고 일본 아이들은 "빠빠"라고 하고 미국 아이들은"파파"라고 하며 아랍아이들은 "아바"라고 한다. 거의 비슷하다. 이것은 아마 에덴동산 말인 듯하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부를 때에 나오는 말이다. 성도도 중생한 영이 있으므로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아버지라고 불러야 심령이 평안하고 아버지가 기뻐하고 아버지와 친근해진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양자의 영이 있는 증거이다.
.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성령과 우리 영이 같이 증거한다.
우리 영이란 죽었던 영이 중생하여 다시 살아난 영을 가리킨다. 우리가 거리낌없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므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을 우리 영이 증거하는 것이고 또 성령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감동시키고 인도하시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성령이 증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은 성도가 믿을 때에 법적으로나 생명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계속하여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을 이루게 하여(권능과 지혜와 도덕 면에서) 하나님의 후사를 삼아 당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하시는 것이다.
후사라는 말은 "기업을 물려받는 자"라는 뜻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든 소유 뿐 아니라 영광과 능력과 지혜와 성결까지 그 자녀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고 있다.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께서 벌써 당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셨고 양자인 성도에게도 자격을 이루어 그리스도와 함께 물려주시려고 한다.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도에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기업을 물려주기 위하여 성도들을 합당한 자격자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자격은 고난 중에서 믿음을 지키므로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을 받게 하신 것이다.
로마서 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다.
야고보서 1:2-4에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환난과 고난 가운데 믿음을 지켜야 그 인격과 실력이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기업으로 받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음으로써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받았다(마 28:18).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라는 것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 것만큼 후사가 된다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것만큼 하나님이 것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많이 참예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많이 이루어서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많이 받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 것만큼 기업으로 받을 영광도 크다. 그러므로 이 진리를 깨달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에 참예하기 위하여 그 고난에 참예하기를 힘썼다(빌 3:10). 사도 요한도 예수님의 환난에 참예함으로 그 나라와 영광에 참예했다(계 1:9).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고난의 잔을 다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부활의 권능에 참예했다. 성도들도 고난을 통과하며 연단을 받아야 영광의 기업을 받을 자격이 이루어진다(딤후 2:10-12). 현대에는 기독교인들이 고난 없이 예수를 믿고 고난보다 영광을 취하려고 한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농사짓는 고난 없이 열매를 얻고자 하는 것과 같다. 교역자들도 강단에서 교인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도록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육신의 욕구를 채워주며 듣기 좋아하는 설교를 많이 한다. 이것은 농부에게 농사의 방법과 농사하는 수고와 고난을 가르쳐 주지 않고 가을에 오곡백과를 풍성히 추수하여 그것을 먹으면 즐겁고 건강해지고 좋다는 것만 가르치는 것과 같다. 교역자가 성도에게 십자가를 지고 나가는 길, 즉 모든 고난을 겪어야 될 것과(행14:22),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법을 바로 가르쳐 주어야 참된 교역자이다.
二. 소망의 생활(18-30)
.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도가 현재에 고난받는 것은 장차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할 인격과 그 자격(실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야고보서 1:2-4에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이 고난은 현재 믿음을 지키는 고난이요, 말씀을 지키면서 당하는 고난이며,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하는 고난이다(고전 9:26-27). 이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적은 것이다. 이 고난은 육신적으로 잠시 받는 것이지만 이 고난을 받으므로 신령하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환난 중에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이 만들어진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받는다. 그러므로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 장차 영광을 받기 위한 자격을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운동 선수나 각종 자격시험을 준비하는 자들도 많은 고난을 받으면서 자격을 만들어 나간다. 그들은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위해서 그만큼 수고와 노력을 하며 고난을 당하는데 우리 성도가 썩지 안고 없어지지 않는 영원한 영광과 존귀와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받는 고난을 마다 할 수 있겠는가? 성도가 세상에서 받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17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이룬다는 것은 자격을 만들어 영광이 오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현재 말씀을 위해 받는 고난은 큰 유익이다. 모세는 장차 받을 영광을 바라보고 애굽의 모든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것을 더 좋아하셨다고 했다(히 11:25). 성도가 현재 말씀을 순종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주를 위하여 수고하며 희생하는 것은 영원하고 귀중한 영광을 만들어 나가는 것임을 알고 즐거워하여야 한다(롬 5:3-4).
. 8: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은 자연 만물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도를 가리킨다. 자연 만물도 성도가 나타나기를 고대한다. 그 이유는 만물도 원래의 목적대로 성도에게 바로 이용당하여 자기들을 통하여(피조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피조물의 원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되었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만물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한다. 하나님은 영이므로 물질이 직접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물질(몸)과 영을 소유한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가게 된다. 성도에게는 하나님과 통한 영이 있고, 육체라는 물질이 있다. 그러므로 만물이 성도에게 이용되어 그 물질과 그 물질의 소모되는 힘(Energy)으로써 영적 일을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일을 하게 되면 그 피조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최 권능 목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어느 성도의 가정에서 닭을 잡아 최 목사를 대접했는데 그 때에 최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닭이 하나님의 종의 목구멍으로 넘어가니 얼마나 복이 있나"라고 했다고 한다. 그 닭이 하나님의 종에게 음식으로 이용되어 영양분과 힘을 공급하므로 주의 종이 그 힘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결국 하나님께 그 영광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만일 그 닭이 우상 섬기는 제사상에 놓이게 되었다면 하나님께 저주받을 일에 이용당하므로 탄식을 하게 될 것이다. 피조물이 바로 사용되지 못할 때에 탄식하며 고통 당한다(22절 참조).
. 8: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피조물도 저주를 받았고(창 3:17),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하고 범죄하는 일과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게 되었다. 이것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다. 우상 섬기는 일과 불의한 일에 이용되는 모든 물질과 동물은 다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이다.
자기 뜻이 아니요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는 것은 피조물의 본래의 뜻(원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인간의 죄를 심판할 때에 만물도 저주와 파멸과 멸망을 당한다.
.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앞 에 말한 바 피조물도 인간의 죄로 인하여 허무한데 굴복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곧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다. 피조물이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종과 같이 억지로 끌려서 이용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썩어질 것이요 파멸과 멸망이다.
해방되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불의한 일에 이용되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도 하나님의 자녀에게 이용당하여 자녀의 영광에 참예하는 일과 하나님의 뜻대로 이용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자기의 소원이라는 것이다.
자유에 이르는 것은 자기의 자원하는 소원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피조물의 자유로운 소원 즉 자원하는 소원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용됨으로써 자녀들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구속이요 만유의 회복이며(행 3:21), 만물의 복종이다(고전 15:28).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택한 백성을 구원하는 동시에 만물도 저주와 불의와 파멸에서 구출하여 완전히 하나님께 복종케 함으로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시는 것이다(계 11:15; 21:5). 이것이 에베소서 1:10에 말한 만물 통일이다. 만물 통일이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뜻이 성도를 통하여 만물에게 충만히 이르고 만물은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충만히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에베소서 1:23에서 말한 만물 충만이다. 이 만물 충만이 참된 구원완성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나 더러운 것이 하나도 없다.
. 8: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하고, 불의한 일에 이용당하므로 탄식하고 고통 한다. 예를 들면, 나무가 하나님이 주시는 환경 속에서 잘 자라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이용된다면 그 나무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예한 것이다. 그러나 절이나 신당을 짓는 데 이용되고 범죄하는데 이용된다고 하면 탄식을 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서 1:8에는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할 수 없다"고 했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이용당하지 못할 때에 피곤하고 고통이 온다. 우리 마음과 몸도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사용하면 피곤이 오고 고통이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하여 바로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될 경우에 사용하지 않고 자기 집에 쌓아 놓으면 그 물질이 탄식한다. 수전노(守錢奴)가 되어 돈을 아까워하고 사용하여야 할 때에 사용하지 않고 쌓아 놓으면 그 돈이 탄식을 하고 하나님이 전대에 구멍을 뚫어 놓아 다 새어나가게 하신다. 성도가 믿는 일 하지 않고 재산을 모아서 전대에 넣어 놓으면 그 전대에 구멍이 뚫려 다 빠져나간다. 예를 들면 부도가 나고, 각종 사고가 나고, 병이 나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것이요 자기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다. 만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탄식하는데 사람이 그것을 막으면 만물이 고통하고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전대에 구멍을 뚫어 놓는다. 김현봉 목사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목적을,
① 먹고살기 위해
②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 주셨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과 만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사용해야 탄식이나 피곤이 없어지고 기쁨과 평안이 있으며 육체도 건강해질 수 있다(잠 4:20-22).
. 8: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출애굽기 23:19에 처음 익은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성도가 자신을 하나님께 바쳐드렸기 때문에 처음 익은 열매이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샀고 성령으로 믿게 했고 하나님께 바친바 된 자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이다.
양자 될 것 15절에는 성도가 이미 양자의 영을 받아 아바 아버지라 부른다고 했는데 본절에는 양자 될 것을 기다린다고 했다. 성도가 물과 성령으로 중생하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나 영적 생명으로는 벌써 양자가 되었다. 그러나 양자의 자격이 아직 구비되지 못했으므로 그 자격이 성취되기를 속으로 탄식하면서 기다린 것이다.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10절에 성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중생하여 살아났으나 몸은 아직 죄와 사망 아래에 있다고 했다. 죄와 사망아래에 있는 몸을 성령과 중생한 영혼이 합력하여 건져내는 것이 몸의 구속이다. 다시 말하면 육신의 부패성을 점점 벗어버리고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성도가 탄식한다(롬 7:24). 성도는 중생한 영과 성령이 합작하여(협력하여)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육신의 부패성을 이기고 하나님을 순종한 것만큼 새 사람을 입어 나간다. 그러므로 우리 몸을 쳐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시키는 일을 힘써야 한다. 바울은 자기 몸을 쳐 복종시키는 일을 힘썼다(고전 9:27). 죄를 점점 벗어버리고 점점 깨끗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 몸의 구속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생명의 길을 걷는 성도는 탄식하면서 이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 고린도후서 5:4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소망으로 구원을 이루었다는 뜻이다. 로마서 5:2-4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거기에 도달하기를 소망하던 성도가 환난과 인내를 통과하여(연단이 되어) 자격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것이 구원 성취이다. 성도가 구원 완성을 소망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여 계속 구원을 이루어 나갈 때에 점점 구원이 이루어지게 된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성도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이며 현세의 것이 아니고 내세의 것이다. 성도는 이 보이지 않는 고귀하고도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고 모든 환난과 고난을 참고 인내로써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17-18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다.
. 8: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도의 소망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 즉 신령한 것과 내세의 영광스럽고 영원한 것이다. 성도가 이 소망을 바라보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하여 즐거움으로 달음박질하며 모든 고난을 참고 연단을 받아 나가는 것이다. 기독교 현실주의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소망보다 세상 주의로 기울어져서 현세의 것을 추구하고 육신이 잘 되며 평안하고 세상에서 잘사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이며 참 소망이 아니다. 성도가 잠시 후에 없어질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보이지 않는 내세의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두고 인내로써 그 소망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앞 절(23-25)에서 몸의 구속 성취와 소망에 도달하기 위하여 탄식하는 성도를 돕기 위하여 성령께서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며 도와주신다. 성도가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탄식할 때에 성령께서도 같이 탄식하시며 협력해 주신다. 성도 자신은 연약하며 그 일(구원을 이루는 일)이 힘들고 어려우나 성령께서 도와주시므로 그 능력을 힘입어 이루어 나간다.
. 8: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도가 연약하고 무지하여 갈 길도 알지 못하고 행할 능력도 없는 모든 사정을 성령께서 대신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여 주시고,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도록 감동시켜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성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그 성도를 붙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성취하려고 탄식하는 성령의 생각도 아신다. 성도가 성령과 합력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그 일을 성취하도록 지혜와 진리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은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나가기를 위해서 기도하신다. 우리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하고 기도하여야 된다(마 26:42). 우리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이 뜻대로 되기를 구하지 않고 우리 생각대로 육신의 욕심을 따라 구하는 것은 잘못된 기도이다. 자기 욕심과 자기 중심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간구해야 한다.
에베소서 4:30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다. 성도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이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다. 또한 물질을 하나님께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자기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로 사용하지 못하면, 이것도 성령을 근심시키는 일이 된다. 언제나 우리는 기도와 성경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아 순종하며 하나님의 구원운동이 바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성령이 성도를 붙드시고 기도하며 성취시키는 일이다.
.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을 자도 성도를 가리킨다. 율법주의자들은 종의 영을 받아 종의 처지에서 무서워하며 하나님을 섬기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양자의 영을 받아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15절 해석 참조). 그러므로 성도의 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또 여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는 자(믿음을 지키는 자)를 가리킨다(요일 5:3-4). 믿음을 지키는 자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 모든 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유익하고 된다는 뜻이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같이 일한다는 뜻이다. 구역(舊譯) 성경에는 "합동하여 유익하게 된다"고 했다. 믿음 지키는 성도에게는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합동하여 유익하게 된다. 각주(脚註)에 보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해서 선을 이루어 나가신다. 성도가 무슨 일을 당할 때에 한 가지만 보거나 육신적인 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것과 합하여 보고 영적인 면과 영원한 내세의 것을 합하여 보면 반드시 유익한 것이 된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가서 종살이한 것과 보디발의 처에게 무고를 당하여 감옥에 갇힌 것과 술 감독에게 배신당한 것 등을 보면 손해가 된 것 같으나 바로의 꿈을 해석한 것과 총리 된 것을 합해놓고 보면 그것들이 큰 유익이었다. 욥이 시험받을 때에 재산이 하루에 다 없어지고 열 자녀가 하루아침에 다 죽고 몸에 악한 병이 들고 아내의 멸시를 받을 때는 유익이 없는 것 같으나 인격이 연단 된 것과 후에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시고 축복해 주신 것을 합하면 그 모든 것이 다 유익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손해 되는 것이나 유익 되지 않는 것, 복되지 않는 것을 주시지 않다. 믿음 지키는 성도에게는 전부가 다 유익 될 것이요, 복이 될 것이며 은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일 좋은 것으로 성도에게 주신다. 한 사건만 볼 때는 잘못된 것 같고, 화를 만난 것 같고, 저주받은 것 같아 낙망할 수밖에 없으나 좀 더 지나서 다른 것들과 합해 놓고 보면 유익한 것이요 영적인 면과 내세까지 합하여 보면 전부가 다 큰 유익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의 시기와 가룟유다의 배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만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큰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았으나 구속 성취와 영광의 부활과 합하여 볼 때 얼마나 선을 이루었으며 얼마나 유익이 되었는가?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진리이다.
선을 이루느니라 선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뜻이다. 또 영적 구원이 된다는 뜻이다. 성도가 당하는 모든 것의 전체가 합력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고 영적 구원역사를 이루게 된다.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많이 당하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게 되고 회개하게 되며 하나님의 뜻대로 바로 서게 되어 영적으로 큰 유익을 보게 된다. 다윗은 시편 119:71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다. 고난 당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되고 자신의 잘못을 찾아 회개하고, 말씀에 바로 서게 되니 유익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어떤 것을 주어도 그것을 믿음으로 통과하여 감사하며 인내로써 자신의 구원성취와 하나님의 구원사업이 잘 되어 나가도록 하여야 한다. 또 현세의 환난이 내세의 영광을 이루고 육신의 환난과 고통이 영적 생명의 면류관을 만들어 나간다.
.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 이는 하나님이 알아주었다는 뜻이고 알아주었다는 것은 사랑했다는 뜻이다.
아모스 3:2에 여호와께서 땅의 모든 족속 중에 이스라엘 백성만 알았다고 하셨다. 그것은 모든 족속 중에 이스라엘 족속만 사랑했다는 뜻이다. 본절 에 미리 아신 자를 미리 정하셨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알아준 자 즉 사랑한 자를 예정했다는 뜻이고 예지 예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미리 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나서 예수를 믿을 것을 예지(豫知)하시고 택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자로 예정해 좋고 예지하신 것이다. 예지 예정이 아니고 예정 예지이다. 예지 예정이 잘못된 이유는 사람이 앞으로 태어나서 예수를 믿을 것을 하나님이 예지하고 그 사람을 택했다고 하는 것이므로 ①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고 ② 구원의 원인이 사람에게 있게 되고 ③ 하나님께서 사람을 따라온 것이 된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우리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예정 예지(豫定豫知)가 분명하다. 예지는 예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정해져 있기 때문에 예지 할 수 있다).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은 것만큼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복을 받고 영광이 된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려면 교역자와 교인들이 함께 해산하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갈 4:19 참조).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많은 성도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될 때에 그리스도는 그 모든 아들 중에 맏아들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동생이라고 했다(요 20:17). ①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후에 믿음으로 양자 된 자들에 대하여 맏아들이다.
②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다음에 부활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맏아들이다.
③ 그리스도는 구원완성의 첫 열매이기 때문에 후에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형제들에 대해서 맏아들이다.
.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정한 사람만 부르시고 부르심을 받은 자만 예수를 믿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는 다 예정된 자요 택한 백성이다. 자기 자신이 택한 백성인 것을 아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믿어지는 것이다(요일 5: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로 믿어지는 사람은 다 택한 백성인 것이다.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다(엡 2:8).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서 의인으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요한복음 17:22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에게 사죄와 칭의를 주시고 구원하여 주시고 자녀의 권세와 영광을 주셨다. 또 미래의 큰 영광에 참예할 자격을 만들어 나가게 하신다.
三. 사랑 생활(31-39)
. 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예정해 주시고, 불러주시고, 믿게 해 주시고, 의롭다 해 주시고, 영화롭게 해 주신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할 뿐이다. 여기에 대하여 우리가 감히 무슨 말을 할 처지가 못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우리를 대적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는 뜻이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은혜로 주신 것인데 누가 대적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역사를 막거나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대적할 자가 없는 이상 성도의 구원운동을 대적할 자가 절대 없다는 뜻이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정하시고 독생자를 보내어 구속하시고 전체 구원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 나가시는 것이기 때문에 대적할 자가 없고,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며 반드시 승리하고 성공할 것이 확실하다.
.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내어 주셨는데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끼지 않고 모두 주신다.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성도에게 그리스도의 나라와 의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은사로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성도의 구원사역을 위하여 필요할 때는 만물과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을 은사로 주신다. 고린도전서 3:23에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것이니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평안한 것과 부요한 것도 은사로 주시고, 환난과 고통도 은사로 주신다(빌 1:29). 성도에게 고난을 주시는 것은 그것이 아들의 형상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5:3-4, 8:18, 약 1:2-4). 환난과 고통이 그 자체는 쓴 것이요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인내와 연단을 이루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은사로 그것들을 주신 줄 알고, 감사히 받아 믿음으로 참고 하나님을 의뢰하여 그의 능력으로 이겨 나가야 된다.
. 8:33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 믿음을 주셨고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사죄해 주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서 의롭다고 선언하셨다. 최고 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성도를 의롭다고 하셨으므로 아무도 성도를 정죄할 수 없다. 국가에서도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하여 석방한 자는 아무도 정죄하지 못한다.
.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도를 정죄할 자가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셨기 때문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의를 완전히 이루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우리에게 그 의를 입혀 의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③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며 그 공로를 가지고 중재하시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우편은 장소적으로 우편이라는 뜻이 아니고 요긴한 자리, 즉 능력을 행사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우리 영적 성장과 우리 몸의 구속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어 나가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요긴한 자리에서 하나님께 기도해 주시며 그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야로 지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를 누가 대적하거나 정죄하거나 생명의 역사를 중단시킬 자가 절대로 없을 것이 확실하다.
.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이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폭포수와 같이 쏟아 부어주시는 사랑이다. 사람의 사랑은 변하기 쉽고 중단되기 쉬우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 사랑은 절대 변하지 않고 끊어지지 않다. 이 사랑으로 하나님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늘영광을 내놓고 낮고 천한 이 땅 위에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주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셨고, 성령은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주님은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여 주시며, 보호해 주시고 우리의 생명이 되시고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궁극적 책임을 지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여 주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와 같이 무한하며, 나이아가라 폭포수와 같이 내려 부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무도 막을래야 막을 수 없고,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요한일서 5:18에 악한 마귀도 손을 대지 못한다고 했다. 환난과 곤고, 핍박, 기근, 적신(벌거벗은 몸), 위험과 칼이라도 우리 성도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주후(主後) 2세기 경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갑은 로마 정권의 박해를 받아 형장에 끌려가 장작더미 위에서 화형을 당하기 직전에 로마 관리들이 예수님을 한번만 모른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할 때에 "예수님은 나를 86년 동안 사랑하며 한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모른다고 하리요"하고 순교 당했다고 한다. 폴리갑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삼키어져서 말씀을 지키며 순교한 사람이다.
. 8:36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 구절은 시편 44:22를 인용한 말씀인데 구약시대 성도들도 많은 고난을 당하여 도살한 양같이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성도가 고난받는 것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상례(常例)이다. 이 구절의 말씀은 성도가 세상에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성도들이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으나 그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진 증거가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증거이다(히 2:10). 그 모든 환난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여 영광의 상급을 주시려고 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더 깊이 들어가게 하고, 성도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시 119:67,71).
.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모든 일은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과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 구역(舊譯) 성경에는 "이기고도 남는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모든 것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 8: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내가 확신하노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도에게 넘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이길 것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것은 인생 전체를 가리킨다. 죽음의 공포와 생의 애착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오히려 생명도 버리며 죽음도 사양치 않고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 주님만 따라 간다.
천사들이나 천사는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마귀)(엡 1:21; 6:12)가 있는데 선한 천사나 마귀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권세자들 복음을 거역하고 성도를 핍박하는 세상 모든 권세자들 즉 개인의 권세와 국가의 권세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시간 전체를 가리킨다.
능력 세상과 우주에 있는 능력 전체를 가리킨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영광과 치욕, 존귀와 멸시, 순경(順境)과 역경(逆境), 번영과 쇠약, 높아짐과 낮아짐을 가리킨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
다른 아무 피조물 위에서 언급하지 않은 피조물 즉 피조물 전체를 가리킨다. 우주의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다.
고린도후서 5:14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했다. 그의 사랑이 우리를 강제로 끌고 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에 끌려서 나가는 것이다. 이 사랑에 끌려서 고생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고 모든 것을 단 마음으로 희생하고 생명까지 바치며 순교의 길로 나아간다. 마지못해 죽임을 당하는 것은 참 순교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너무 커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단 마음으로 죽는 것이 참 순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 모든 것과 생명까지 다 희생하며 어디든지 그리스도만 따라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