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 값 -김풍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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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춰두었던 약병을 꺼냈다.
조그만 유리병 속에 하얀 알약들이 가득하다. 지난 삼 년간 몰래 모아 둔 약이다.
이 약국 저 약국 옮겨 다니며 몇 알씩 사 모은 것들이다.
때로는 약사들에게 속마음을 들켜 가슴 철렁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시치미를 떼고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를 대며 눙쳐 넘겼다.
하얀 종이 위에 약을 쏟았다. 한 알 한 알 세어 보았다.
마흔 두 알. 이만 하면 될 성 싶다. 마음 정리는 다 끝났다.
내 나이 여든일곱. 살만큼 살았다.
아니 너무 살았다. 남편을 보낸 지도 삼십 년이 넘었다.
그동안 진 빚도 다 갚았다. 아이들도 모두 잘살고 있다. 여한도 없다.
달포 전 경로당에 가다가 비탈길에 넘어졌다.
어깨를 다친 후 왼쪽 팔이 영 불편하다.
몇 해 전부터 시원치 않던 무릎 관절도 요즘 들어 부쩍 쑤시고 아프다.
이러다가 똥오줌이라도 받아내게 된다면…, 겁이 덜컥 난다.
마음이 급해진다.
삼 년 전 읍내 농협에서 운영하는 노인 대학에 다닐 때였다, 노인 대학에 같이 다니던 동문동에서 산다는 노인의 말이 남의 말처럼 들리지 않았다.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없더라.
자식이 댓이나 되어도 누구 하나 데려가는 놈이 없다.
똥오줌 가리지 못할 땐 목이라도 매는 게 낳을 것 같다’
그 말이 왜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지, 그 때부터 약을 사 모으기 시작했었다.
밤이 되면 사지가 욱신거린다.
하는 일은 별로 없어도 뙈기밭에 난 잡초를 뽑는다든지 빨래라도 하는 날이면 돌아눕는 것조차 버겁다.
무엇보다도 제일 귀찮은 건 세끼 밥해 먹는 일이다.
구십이 다 되도록 이 짓을 하고 살았는데 그것조차 힘겨우니 정말 갈 때가 되었나 보다.
몸 아픈 건 그래도 앓기라도 하지, 외로운 건 더 견딜 수 없다.
온종일 사람 구경 못하고 말까지 잃어버릴까 하여 공연히 밭에 난 풀을 보고 말 걸고, 옛날 부르던 노래도 흥얼거려 보지만 이내 시들해진다. 몸 아프니 더 외롭다.
산다는 것이 무언가? 숨만 쉰다고 사는 건가?
한 세상 살아왔어도 무엇 때문에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쫓겨 살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 나이가 되었다.
앞서간 영감이 부럽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정신없이 바쁠 때가 좋았다. 할 일도 없으니 살맛도 없다.
요즘은 아이들 전화도 뜸하다.
옛날 저희 어려울 때는 곧잘 전화도 하더니만…,
그렇다고 공연히 잘 사는 아이들 들쑤셔서 속상하게 할 수는 없다.
오도 가도 않는 자식들에게 서운한 생각이 아주 없지는 않아도, 자식이란 키워 놓으면 다 그런 게지 하며 마음을 돌린다.
마당에서 짹짹거리는 새들을 본다.
어미 새도 날아다니느라 얼마나 배고프랴?
먹이를 잡아 꼴깍 삼키면 제 배 부르련만. 그걸 제 목구멍에 넣었다가 새끼들에게 내뱉어 먹여주는 걸 보면
어미 마음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같은 거지.
자랑 할 것도, 내 세울 것도 없는 거야.
새끼 키우는 거야 도리이고 의무일 뿐이지, 어디 새들이 부모 봉양하는 걸 본적이 있나?
잠은 오지 않고 긴긴밤 지새우다 보니 생각도 많다.
지나온 세월만 돌아봐 진다.
먼저 훌쩍 가버린 남편, 내 가슴에 대못을 쾅쾅 박아놓고 떠난 큰아들 광복이, 사람 구실 못 할 거라던 금희, 아이들 하나하나 키우던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 몸 하나 부서져도 아이들만큼은 버젓이 키워 보겠다며 억척같이 살아온 지난날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쳐 간다.
나는 딸만 넷을 둔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언니들은 하나둘 짝을 찾아 시집갔다.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살 작정을 하셨다.
태평양 전쟁이 한 창이던 때였다.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젊은 사람은 무조건 전쟁터로 끌려가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이웃 동네 허 참봉 둘째 아들을 데릴사위로 데려왔다.
내가 열일곱 살 되던 해였다.
신랑은 나보다 열 살이나 위였다.
몸집은 자그마했으나 부지런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착했다.
장인 장모를 친부모 모시듯 했다.
오빠가 없던 나는 오빠처럼 신랑이 좋았다.
온 식구가 부지런히 일해도 사는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쌀 한 톨 구경할 수 없었다.
관에서는 제수용으로 땅속에 묻었던 쌀까지 용케 알고 빼앗아 갔다.
옆집에 사는 일본 사람이 일러바친 거라고 쑥덕거렸다.
가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느닷없이 일본 순사가 와서 남편을 잡아갔다.
근로 보국대라는 곳으로 간다 했다.
말리던 아버지는 일본 순사가 밀어치는 바람에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후 몸져누워계시다가 두어 달 만에 돌아가셨다.
의원 한 번 부르지 못했다. 그런 후로 어머니도 시름시름 앓아누우셨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배 속의 아기도 무엇을 알고 있는지 가끔 발길질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온 세상이 다 일본 나라가 된다고 떠들어 댔다.
집집이 집안을 뒤져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가져갔다.
송진을 따오라고도 했다. 들에는 쑥도 남아있지 않았다.
산에는 소나무마다 껍질이 벗겨져 허옇게 알몸을 드러내었다.
흙먼지가 펄펄 날던 삼월 스무사흘 날,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뻐꾸기 소리가 처량하게 들리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픈 몸을 이끌고 일본 사람을 찾아 갔다.
아무 왕래도 없었던 집이었다.
어머니 손에 쌀 한 줌과 한 발이나 됨직한 까만 미역이 들려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아니면 구경조차 못 하던 물건이었다.
얼마나 다급하였으면 모두 다 꺼리는 일본 사람을 찾아갔을까?
일본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못하는 어머니였다. 무슨 재주로 어떻게 그걸 얻어 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다.
일본이 망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만세를 부르러 홍성 읍내로 몰려갔다.
옆집에 사는 일본 사람은 짐을 꾸렸다. 떠나면서 일본 그릇 몇 가지와 두어 됫박 쌀을 주고 갔다.
모처럼 배부르게 밥을 먹었다.
스무날쯤 되었을까? 한밤중에 누가 문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가보니 신랑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신랑을 붙들고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신랑도 소리 내어 울었다.
일본 땅 단바라는 광산으로 끌려가 죽도록 일하다가 돈 한 푼 못 받고 돌아왔단다.
몸만이라도 성하게 돌아와 준 것이 고마웠다. 죽었다 살아 온 사람이었다.
신랑에게 이름을 지어 달라 했다.
아이는 세 살이 되도록 이름도 없이 살았다.
언제든 아비가 돌아오면 지으려고 이름을 짓지 않고 그냥 개똥이라 불렀다. 그래야 명도 길다 했다.
“광복이라고 하면 워뗘?”
그 때 사람들이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해방이나 광복이라는 말이었다.
“나라두 찾구 아들두 얻었으니 그 이름이 참 좋구먼유.”
나는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광복이 이야기를 하려니 숨이 막힌다. 눈물이 난다.
그 이름은 내게 커다란 짐이었다.
평생 나를 죄인으로 살게 한 이름이다.
난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후, 한 번도 그 이름을 불러보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그 아이는 얼마나 영민했는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도 장래 큰 사람이 될 거라 했다.
하나 들으면 열을 안다더니 그 아이가 그랬다.
네 살 때였던가? 집안 식구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어디서 들었는지 그 때 한참 유행하였던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을 얼마나 멋들어지게 불렀는지.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지금도 그 아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아이는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도 잘했고 모범 학생이라 하여 표창장도 받아왔다.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착하게 컸다.
어느 날, 등 넘어 재수 할머니가 참외를 한 소쿠리 가득 머리에 이고 오셨다.
“웬 참외를 다 가져오셨유?”
“이 집 아들이 하두 착헤서 먹어보라구 가져왔네.”
할머니 참외밭은 앞 산기슭에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학교를 오가며 밭에 들어가 참외를 따 먹었다.
광복이만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지나간다고 했다.
난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만일 살아온 날을 지울 수만 있다면 그날을 지우고 싶다.
광복이가 국민학교 막 삼 학년에 올라간 봄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마땅히 도시락을 쌀 게 없어 보리 누룽지 한 덩이를 주어 보냈는데 어린 것이 얼마나 배고플까 생각하니 걱정이 되었다.
나는 쑥 뜯던 바구니를 든 채 동구 밖으로 광복이를 마중 나갔다.
멀리서 광복이가 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 가보니 어떤 어른의 손을 잡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아는 분이었다.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면서 풀빵을 파는 아저씨였다.
“광복아! 왜 이렇게 늦었니?” “……”
나는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그는 부드러운 얼굴로 나에게 인사하고 손짓으로 나를 구석으로 이끌었다.
“댁의 아드님이라기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빵을 훔쳐 달아났다는 것이었다.
빵이야 몇 개라도 줄 수도 있지만, 어려서 바르게 커야 나중에 큰 사람 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내가 아는 그분은 참 점잖은 분이었다.
결코 거짓말 할 분은 아니었다.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서 힘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착하고 정직한 아이라고 철석 같이 믿었었는데 도둑질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문득 이런 때 따끔하게 혼을 내지 않으면 큰 일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지 알기나 혀? 도둑질을 혀?”
나는 아이의 멱살을 거머쥔 채 아이를 질질 끌고 오며 윽박질렀다
“너 집에 가서 보자! 도둑질을 혀? 집에 가서 아버지께 일러 다리몽뎅이를 분질러 놓을 거여!”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광복이는 내 손을 뿌리치더니 냅다 도망쳤다.
나는 도망치는 광복이 뒤를 따라가며 소리쳤다.
“너 잽히기만 혀봐! 그냥 안 놔둘 거여!”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도 아찔하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덜컥 주저앉는다.
광복이가 막 신작로로 뛰어드는 순간 군용 트럭 한 대가 쏜살같이 달려오더니 그만 아이를 덮쳤다. 즉사였다.
나는 아이를 잃고 반미치광이가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며칠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녔다.
아이가 갔던 곳을 찾아 몇 시간씩 헤매다 오기 일쑤였다.
언젠가 광복이가 빵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무슨 돈이 있느냐며 무시했던 생각이 나면, 어린 것이 긴긴 봄날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 정말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러다가 아주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그러는 나를 도저히 지켜볼 수 없었던지 남편은 고향을 떠나자고 했다.
아예 아이의 흔적이 전혀 없는 생소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하였다.
나도 더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아예 아이의 흔적이 전혀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충청도 예산군 덕산이란 곳으로 이사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언제 어렵지 않은 적 있으랴만 그래도 금희 만큼 가슴 아프게 키운 아이도 없다.
금희는 한국전쟁 휴전이 되던 이듬해에 태어났다.
육이오 전쟁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던 시절이니 사는 꼴이 너도나도 말이 아니었을 때였다.
나는 그 때 동네 사람을 따라 나무 장사를 시작하였다.
남편은 산에서 나무를 해 오면 나는 그걸 머리에 이고 가서 장에 내다 팔았다.
나무 한 단에 쌀 한 됫박, 그래도 그것으로 우리 온 식구가 연명하였다.
나무 단이 너무 무거워 고개가 부러질 것 같았다.
그래도 쉴 수가 없었다, 내려놓으면 다시 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산비탈을 만나면 그걸 이용하여 잠시 내려놨다가 다시 머리에 올려놓고 가서 팔았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들이 올망졸망한데 또 아이가 들어섰다.
아이 떼는 비방이라고 어른들이 하는 말을 귀담아들었던 대로 언덕에 올라가 굴러도 보았다.
펄쩍 뛰어도 보았다.
모시 뿌리를 삶아 먹으면 된다고 해서 그것도 삶아 먹어 보았다.
아이는 떨어지지 않고 배만 아파서 고생했다.
금희를 낳고 난 후, 다섯 달 만에 나는 다시 나무 장사를 시작하였다.
징용을 하다 온 남편은 그 후유증으로 자주 드러누웠다.
하루 일하고 하루 드러눕는 남편을 보면서 한가하게 아이를 끼고 누워있을 수만 없었다.
나는 아이를 해방 되던 해에 낳은 큰 딸애에게 맡겼다.
나는 장에 가기 전에 보리쌀 뜨물을 받아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그걸 참참이 젖 대신 아기에게 먹이라고 신신당부하였다.
그러나 겨우 열살 배기 어린 게 뭐 알겠나?
어떤 때는 아침에 놓고 간 그대로 물 한 방울 줄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저 놀기도 바빴을 테지. 그럴 때는 속만 상했다.
젖몸살이 얼마나 심한지 장에 가면 젖이 퉁퉁 불어 온몸이 열이 나고 쑤셨다.
참고 와서 퉁퉁불은 젖을 아시 짜내고 아이에게 물리면 처음에는 힘이 없어 제대로 빨지 못하다가 어느 정도 제힘을 얻으면 쭉쭉 빨다가 잠이 들고는 했다.
겉 젖을 짜냈다고는 하지만 아이는 불은 젖을 먹고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설사가 끊이지 않았다.
대꼬챙이처럼 비쩍 마른 아이를 내려다보며 ‘내일은 죽어도 가지말자’ 다짐하고서도 이튿날이 되면 또 나무 단을 이고 장으로 갔다.
“이, 아이, 엄지가 웂어유!”
어느 날 앞집에 사는 장 씨 아저씨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린가 해서 밖을 내다보니 큰 딸아이 등에 업혀있는 금희를 보면서 하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달려가서 보니 정말 금희 엄지손가락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다른 손가락의 반도 되지 않았다.
아이가 그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젖인 줄 알고 그 손가락만 빨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땅바닥에 앉아 두 다리를 뻗고 엉엉 울었다.
놀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장 씨 아저씨 이야기를 듣고 모두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갔다.
잠시 후 동네 분들이 다시 찾아오셨다.
쌀, 보리, 콩 등 집에 있는 곡식들을 가지고 오셔서 아이를 잘 먹이라고 등을 두드려주셨다.
심지어는 그 귀한 달걀 몇 개들고 오신 분도 있었다.
나는 동네 인심에 또 한 번 울었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지금은 모두 저 세상 사람들이 되셨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금희를 업고 장에 다녔다.
“요새는 나뭇단이 작아진 것 같어”
나무를 단골로 사주시는 분들이 말씀하시기에 아이의 손을 보여주었더니 두말하지 않고 돈을 얹어 주시는 분들도 있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있어서 좋았다.
금희 때문에 제 언니도 어지간히 고생했다.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착해서 그런지 지금은 제일 부자로 산다.
금희는 제때 학교를 들어가지 못했다.
너무 마르고 키도 작기 때문이었다.
일 년 늦게 들어갔다. 모든 사람이 사람 구실 못 할 거라 했었다.
그래도 무사히 고등학교까지 나와 시집가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나는 일생동안 금희만 보면 안쓰럽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말할 때 난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했다.
어느 자식인들 귀하고 애틋하게 키우지 않았으련만 유독 금희를 제일 어렵게 키운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어찌 괴롭고 어려운 일만 있었겠는가?
자랑거리도 많고 즐거웠던 기억도 많다.
아이들이 하나 같이 착해서 별로 속 썩인 일 없고, 남매간 우애도 좋아 남들의 칭찬도 많이 받았다.
나는 죽은 광복이 밑으로 딸을 낳고 그 뒤로 아들 윤복이를 얻은 후 딸 셋을 더 낳았다.
광복이를 잃은 후 나는 한 번도 아이들을 나무란 적이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 돈을 가져간다고 한꺼번에 졸라댈 때, ‘없는 돈,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이 속없는 것들아!’ 하며 화도 내고 싶고 소리치고도 싶었지만,
광복이를 생각하고 참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지갑을 마루 끝에 놓고 밖으로 나갔다.
아이들은 지갑을 열어보고 돈이 있으면 나눠 갖고, 없으면 조용히 나갔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음 날은 지갑을 채워 놓았다.
아이들은 언제나 제 할 일들을 찾아했고 잔병치레 하나 없이 오손도손 잘 자라주었다.
나무 장사를 접고 두부 장사를 시작하였다.
나무 장사보다 힘도 덜 들고 이익도 많았다.
사람들은 내 두부만 사갔다.
내가 만든 두부는 힘이 있고 맛이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팔면서 인색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두부를 팔고 나서도 그냥 일어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 두부까지 다 팔아 주고 집으로 갔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들에게 그다지 싫은 소리를 듣지 않고 살았다.
나무 장사 십이 년, 두부 장사 십 년. 이렇게 해서 나는 아이들을 키웠다.
윤복이는 중학교 까지만 나왔고 나머지 딸들은 모두 고등학교까지 가르쳤고 다 짝을 지어주었다.
나는 윤복이에게 부탁했었다.
틈이 나는 대로 모두 한 번씩 다녀가라고. 아이들은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하느라 전화통에 불이 났다.
나는 그저 보고 싶어 그런다고 했더니 안심하는 눈치들이다.
통장을 열어 보았다.
그동안 밭에 심었던 마늘 몇 접 팔아 넣은 돈, 아이들이 쥐어주고 간 돈, 정부에서 나오는 노령연금을 모아둔 돈, 쓰지 않고 모두 집어넣었더니 구백만 원이나 되었다.
이걸 어쩔까?
내 장례 치르는 건 큰 사위가 상조회를 들어놨다니 그 걱정은 안 해도 되고, 같은 금액으로 고루 나눠주고 나머지는 큰애에게 줄까하다가 문득 젖배 골아 제일 어렵게 큰 금희 생각이 났다.
제 일 먼저 달려 온 건 윤복 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왔다.
나는 며느리에게 백만 원을 슬그머니 쥐어 주었다.
며느리는 깜짝 놀라 나에게 도로 내어 주며 무슨 서운 하신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늙은이가 서운한 일이 있을 게 뭐가 있겠느냐고 했다.
나는 아이들 키우느라 애썼으니 옷이라도 한 벌 해 입으라고 했다. 실랑이하다가 결국 받아서 갔다.
돌아갈 때 아이들 머리를 일일이 쓰다듬어 주었다.
아비에게는 건강 조심하고 형제간 자주 전화라도 해서 우애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일렀다.
“오머니, 왜 그러세유?”
“에미가 그런 소리도 뭇허냐?”
나는 우정 퉁명스럽게 말하고 재촉하여 돌려보냈다.
그 후로 아이들이 다녀갔다.
천안에 사는 큰 딸이 왔다 갔고 셋째도 다녀갔다.
나는 슬그머니 백만 원씩 손에 쥐어 주었다.
“늙어지니 돈 쓸 일 웂더라. 나중에 내가 필요하면 그때 돌려다오.”
아이들은 서로 이야기를 들었는지 고맙다며 받아갔다.
바쁘다며 오지 않던 금희가 저 혼자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상하단다.
하룻밤 나하고 같이 자고 가겠다고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곁에 사람을 두고 자 본다.
전에는 종종 아이들이 와서 자고 가기도 했다,
내외가 와서 하룻밤쯤 묵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손자 손녀들도 다 직장들 가지고 있어 서로 바쁘게 살고 있으니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금희와 같이 자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 지나온 삶을 고스란히 말해주었다.
못 했던 말까지 다 털어놓고 보니 마음이 후련하다.
금희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내 말을 들어주었다.
금희도 제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위 흉도 보고 아이들 자랑도 했다.
금희는 시인이 되었다며 자랑하였다.
문화원에서 문학 강의를 듣고 숙제로 낸 시를 써서 선생님께 보여주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아주 훌륭하다며 문학지를 소개해주고 등단까지 시켜주었다는 것이다.
나야 시가 무언지, 등단이 무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자랑하는 걸 보니 좋은 것임이 틀림없다.
형제들 중에서 네가 제일 공부를 잘했다며 장하다고 칭찬해주었다.
금희는 내가 더 늙으면 제가 나를 모시겠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웃었다. 얼마나 더 늙으면?
아들부터 딸네 집까지 훑어보아도 병든 내가 살 집은 없었다.
방이 없거나, 있어도 내 곁에서 수발해 줄만한 사람은 아무 집도 없었다.
어느 집엘 가도 나는 자식들에게 커다란 짐만 될 뿐이었다.
결국, 애초에 내가 마음먹은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요새는 얼씬도 하지 않더니 윗집에 사는 여편네가 내려 왔다. 하필이면 이때 올게 뭐람!
“무슨 약을 그렇게 먹는다나?”
“냄이야 무슨 약을 먹든 웬 상관이라나? 혈압약이여! 혈압 약!”
나는 얼른 약 병을 치우며 돌아앉았다.
엊그제 막내가 다니러 왔을 때 그 여편네와 무언가 속닥거리더니 무슨 낌새라도 챘나?
내 시퍼런 핀잔에 도망치듯 아낙이 갔다. 나는 나머지 약을 털어 넣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밖에 사이렌소리가 들리더니 읍내에서 살고 있는 윤복이가 뛰어 들어 왔다.
“오머니, 병원에 가유”
“아니, 내가 왜 병원에 가니?”
그때까지만 해도 정신이 멀쩡하였다.
다만 조금 어지러울 뿐. 안가겠다는 나는 같이 온 장정들에게 억지로 떠메어 구급차를 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모여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눈을 뜨자 한꺼번에 울음소리가 터진다.
며칠 동안 잠을 잔 모양이다. 인천 길병원이란다.
아무래도 내 하는 양이 수상해서 형제들끼리 미리 짠 모양이었다.
윗집에 사는 분이 할머니에게 내 거동이 수상하니 유심히 살펴보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연락해 달라 부탁하였다고 했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왜 살려놨어!”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들도 울었다.
“엄마, 저희가 잘못 했어유”
나는 아이들 때문에 울었고 아이들은 나 때문에 울었다.
병원에서는 누군가 계속하여 내 곁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번갈아가며 아이들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나는 간병인도 있으니 그만들 가보라 했다.
저희 나름대로 가정을 꾸리고 있고 직장이 있으니 어떻게 내게만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사실 이젠 죽을힘도, 의지도 없다. 이젠 죽지 않을 테니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토요일에는 아들딸 모두 와 주었다.
두어 달 만에 퇴원 통보를 받았다.
내 어두운 귀로도 분명히 들었는데 이틀이 지나도 퇴원 절차를 밟지 않는다. 갈 곳이 없다.
그래! 내 짐작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이제는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내 앞에서 내색은 않지만 속으로는 무척 난감해 하는 것 같았다.
보지 않아도 뻔하다.
병든 나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느 자식이 맡아 주겠나?
이때 금희가 나섰다.
“옴마는 내가 모실 게유.
그러나 나두 옴마를 집으로 모실 순 없어유.
알다시피 우리 집은 공장이라 옴마가 계실 곳이 없어유.
그래서 우리 집 근처 요양원으로 모실까 해유.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 요양 보호사 자격증도 따놨어유.”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쉰다. 나에게 의사를 물었으나 난 이제부터 산목숨이 아니다.
그저 자식들이 심어 놓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난 좋다는 뜻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나사렛 요양원이란 곳으로 왔다.
산기슭에 아담하게 지어진 건물이다.
금희네 집에서 차로 십오 분 거리다.
창밖으로 내려다보면 파란 바다가 보인다.
한 낮엔 하얀 햇살이 부서져 반짝반짝 은빛조각들이 바다위에서 춤춘다.
처음엔 서먹하고 낯설었으나 있어보니 괜찮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왜 진작 요양원이란 곳을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윤복이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내가 약을 먹고 깨어났을 때 한 말이다.
“죽은 성이 오머니 가슴에 못 박았다구 허셨지유?
그런디 오머닌 왜 우리들 가슴에 못 박으려구 하셨어유?”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살아난 게 참 다행이다.
내가 그대로 갔다면 아이들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내가 평생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처럼 나도 아이들에게 못할 짖을 할 뻔했어!
두고두고 얼마나 어미를 원망했을까?
어느 날 금희는 제가 지은 글이라며 내게 가지고 왔다.
제목이 젖 값이라고 했다. 내 앞에서 읽어 주었다.
‘사람들이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말할 때,
엄마는 더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우겼습니다.
엄마가 가지고 있던 모든 걸 내려놓을 때, 나를 따로 불러 젖 값을 주기 전까지는, 더 아픈 손가락이 나 일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나무 장사 십이 년, 두부 장사 십 년, 우리 엄마 생의 이력입니다.
솔방울 두 가마니, 때로는 연목가래 세 자루씩 머리에 이고,
삼십 리 새벽 길 걸어 홍성 장에 내다 팔아,
우리 오 남매 목숨 이어갈 때 엄마는 사람이 아니고 우마차였습니다.
나무하러 산에 갈 때나 새벽 장에 갈 때 젖먹이 어린 나를 언니에게 맡기면서 보리 뜨물 한 수저씩 떠먹여라.
어린 언니는 울 기력조차 없어 축 늘어진 나를 등에 업은 채 정신없이 놀다 보니
해는 지고 집에 오신 엄마는 퉁퉁 불은 젖을 물리고 그것을 먹은 나는 늘 설사를 했습니다.
쇠꼬챙이 같은 나를 보고 사람들은 사람 구실 못 할 거라 했습니다.
어느 날 동네 어른이 내 손가락을 쳐다보고 소리쳤다지요.
이 아이 엄지가 없어!
엄마 젖인 줄 알고 손가락을 빨아대니 엄지가 닳아 없어졌지요.
그 후로 엄마는 나를 등에 업고 산에 가고 장으로 다녔습니다.
우리 엄마 허리는…, 우리 엄마 허리는…,
난 엄마의 가슴에 모래 알갱이처럼 들어박혀 평생 욱신거리게 했나 봅니다.
여북 한이 되었으면 젖값이라도 주고 싶었을까요?
젖값을 받아놓고 하늘이 무너지라 울었습니다.
땅이 꺼지라 울었습니다.
엄마 사랑은 양파껍질, 얼마나 더 주어야 끝이 나나요?
엄마는 엄마인 줄만 알았습니다.
엄마는 여자가 아닌 줄 알았습니다.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를 알아갑니다.
무엇으로 그 사랑 갚으오리까?’
읽던 딸도 울고, 듣는 나도 울고,
함께 있던 사람들도 울었다.
어미를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해 주는 딸이 고맙다.
금희는 내가 있는 요양원에 취직하였다.
나 때문에 하던 일을 접었다.
이젠 하루걸러 한 번씩 만난다.
내가 내야 하는 요양비는 모두 금희가 부담한다.
형제들이 서로 낸다고 했다.
그러나 금희는 젖값을 받았으니 저도 젖값을 갚아야 한다며 제가 다 낸다고 했다.
정 그러면 형제들이 십시일반으로 조금씩 보태주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다른 형제들은 미안한 마음으로 올 적마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금희에게 마음을 표하는 것 같다.
형제간 우애를 보면 흐뭇하다.
제 손으로 제 목숨 끊는 것.
그게 얼마나 큰 잘못인 줄 이제 알았다.
나야 가고 나면 고만이라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자식들 마음은 어떡할까?
살고 죽는 건 내 소관이 아니다.
인명재천이라 하지 않던가. 그저 타고 난 명대로 살 수밖에는….
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또 한 살 먹는다.
올 설에는 서로 자기네 집으로 데려간다고 한다.
지난주에는 아들 내외가 다녀갔는데 오늘은 막내딸이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자식들 모두 고맙다 . (끝) |